[오래된 리뷰] <파이터>


데이비드 O. 러셀 감독의 2010년대 전성시대 시작을 알리는 작품 <파이터>. ⓒ시너지



21세기 최고의 복싱 경기로 회자되는 미키 워드와 아투로 게티의 WBU 주니어 웰터급 챔피언 3연전. 긴장감을 유발하거나 청량감을 주는 대신, 처절함을 동반한 감동을 선사한다. 이 경기를 보면 스포츠에선 패자는 없고 승자만 있다는 생각이 들 것이다. 무엇보다 그들은 서로를 승자로 인정한다. 


영화 <파이터>는 다름 아닌 미키 워드의 실화를 바탕으로 했다. 아투로 게티와의 챔피언전을 다루진 않았고, 그 이전까지의 인생역전을 다뤘다. 링에는 혼자 올라가지만 링에 올라가기까지는 절대 혼자일 수 없는 법, 영화는 미키 워드와 그의 가족들을 함께 그렸다. 미키 워드의 복싱 인생에서 형 디키와 엄마 앨리스를 비롯해 가족들이 많은 역할을 했다. 


감독 얘기를 하지 않을 수 없는데, 90년대 중반 <스팽킹 더 멍키>로 극찬을 받으며 화려하게 데뷔한 데이비드 O. 러셀은 1999년 <쓰리 킹즈>로 메이저 무대까지 올라섰다. 하지만 이후 오랫동안 부침을 겼었다. 그러다가 2010년 <파이터>로 단숨에 아카데미가 사랑하는 감독이 되었고, 이후 <실버라이닝 플레이북> <아메리칸 허슬>까지 성공시키며 대세 감독으로 우뚝 섰다. <엑시덴탈 러브>와 <조이>로 연착륙 했다. 


그의 영화들은 상당히 스타일리쉬한데, 영리한 편집과 파격적인 변신을 앞세운 캐릭터 그리고 영화 전체를 앞서서 끄는 듯한 음악이 키포인트다. 자칫 정신 없이 산만 할 수 있을 텐데(누군가에겐 단연코 그렇게 느낄 수 있겠다), 이를 다잡는 분위기가 마련되어 있다. <파이터>는 이런 요소들이 완벽하다 할 만큼 적재적소에 들어차 있다. 


'복싱', 그리고 '가족'과 '아픈 사람들'


영화의 주된 소재는 복싱, 그러나 말하고자 하는 건 가족과 아픈 사람들, 그리고 희망. ⓒ시너지



미키 워드(마크 윌버그 분)는 서른 살이 훌쩍 넘었지만 여전히 백업 선수로 전전하고 있다. 돈을 받고 챔피언의 승률을 높여주는 역할. 그 돈 덕분에 일가족이 먹고 산다. 미키에게 권투의 모든 것을 알려준 전 챔피언인 형 디키 워드(크리스찬 베일 분). 하지만 그는 과거의 영광을 뒤로 하고 마약에 쩔어 살아 가는 루저다. 심지어 미국 메이저 방송사 HBO에서 그의 다큐멘터리를 찍는데, 그가 생각하고 있는 그의 부활이 아니라 그의 마약 생활을 통해 교훈을 전하려는 내용이다. 그럼에도 미키의 트레이너다. 한편 그들의 엄마 앨리스 워드는 미키의 매니저다. 


승리의 기회가 찾아 온다. 이번만큼은 백업이 아니라 자신의 경기를 펼칠 수 있을 것 같다. 그런데 상대방이 아프다는 이유로 경기 직전 바뀌는데, 체급 자체가 너무 차이난다. 훨씬 더 높은 체급이었던 거다. 미키는 말도 안 되는 이 경기를 피하려 하지만, 형과 엄마가 미키를 밀어 넣는다. 돈 때문이었다. 돈은 벌어왔지만 또다시 처참하게 진 것이다. 선수로서의 회의, 가족들에 대한 실망으로 방황할 때 살린을 만난다. 그러곤 다시 재기를 꿈꾼다. 가족들과는 좀 거리를 둔 채.


그렇지만 다시 위기에 빠진다. 미키가 자신과 함께 하려면 생활비를 대 주어야 한다는 말에 형 디키가 어이 없는 범죄 행각을 실행에 옮긴 것이다. 미키는 경찰에 잡혀 가려는 디키를 보호하려다 경찰에 의해 오른손을 심하게 다친다. 감옥에 가는 디키, 풀려난 미키. 하지만 미키는 더 이상 권투를 할 수 없는 몸이 된다. 많은 시간이 지난 후 미키의 진가를 알아본 에이전시가 제의를 해오는데, 조건이 있었다. 가족이 관여할 수 없다는 것. 미키는 어떻게 해야 할까?


영화는 미키라는 권투선수의 인생역전을 기본 뼈대로 '가족'과 '아픈 사람들'을 주요 요소로 투입시킨다. 그런 의미에서 디키 또한 미키 못지 않은 주요 뼈대다. 즉, <파이터>는 미키와 디키 둘 모두를 따로 또 같이 잘 살펴야 하는 것이다. 


가족이란 무엇인가


가족이 전부인 미키 워드. 하지만 그건 그의 선택이 아니다. 그의 선택이 가족일 때 비로소 함께 나아갈 수 있다. ⓒ시너지



우린 이 영화에서 '권투'를 잘 느끼기 힘들다. 하다 못해 '권투 선수'를 잘 느끼기도 힘들다. 미키 워드의 권투 또는 권투 선수 미키 워드를 잘 보여주려면, 영화에서 보여준 권투 인생 이후를 보여줬어야 했다. 아투로 게티와의 3연전을 하이라이트 삼아 그때까지의 우여곡절을 보여주는 게 맞는 것이다. 대신 <파이터>는 그 외부의 것들을 말하고자 했다. 사실 삶에서는 그것들이 더 중요할지 모르겠다. 


<밀리언 달러 베이비>나 <신데렐라 맨>이 생각나게 하는데, '영화'로서의 전체적 만듦새는 <파이터>가 더 뛰어난 것 같다. 미키가 미키일 수 있었던 건, 즉 그의 존재를 형성하는 가장 중요한 요소인 권투는, 그 자신도 말하듯이 100% 형 디키 덕분이라 할 수 있다. 매니저 역할을 하는 엄마를 비롯한 많은 수의 가족들도 마찬가지다. 어느 누가 해당되지 않겠냐만, 그에겐 그의 가족들이 전부다. 그의 권투는 오로지 가족들에 의한 것이니까. 사실 그는 온전한 어른이 아닌 것이다. 


그렇지만 그는 어른이다. 어른이어야 하는 나이이고 몸이며 생각을 갖고 있다. 그런 것들은 연인 살린을 만나면서 뚜렷해진다. 그녀의 조언에 따라 자신과도 같은 가족들과 떨어져야 한다는 걸 깨닫는다. 아니, 가족들과 떨어져야만 가족들과 더 잘 지낼 수 있다는 걸 깨닫는다. 여기서 중요한 건, 가족들은 그가 '선택'하지 않았고 살린은 그가 '선택'했다는 것. 


가족이란 무엇인가 다시금 생각하게 한다. 가족이면 모든 걸 다 용서하고 받아줘야 하는가. 가족이 원하면 자신이 가고자 하는 인생을 포기해야 하는가. 가족 간에는 모든 게 당연한 것인가. 모든 걸 다시 생각해야 하지 않을까, 싶다. 그렇지만, 내가 나일 수 있게 한 가족을 저버리는 새로운 방황의 시작일 수 있다. 즉, 함께 가되 '방법'을 달리해야 한다. 그러기 위해선 '변화'가 필요한 바, 영화는 후반부 디키의 변화에 주목한다.  


아픈 이들이 이야기하는 희망


하나 같이 아픈 사람들이다. 심지어 그들이 사는 동네도 아프다. 그런 그들이 희망을 이야기하려 한다. 자신을 인정하고 변화하고자 한다. ⓒ시너지



미키는 아프다. 권투 선수로서 미래가 없다. 형처럼 한때나마 잘 나갔던 적도 없다. 결국 손을 크게 다쳐 더 이상 하고 싶어도 할 수 없을 지경에 이른다. 디키는 어떤가. 한때 챔피언으로 지역 명사가 되어 더할 나위 없는 삶을 누렸다. 하지만 그게 오히려 독이 되어 마약에 찌든 폐인의 삶을 살아간다. 그보다 아픈 사람을 찾기 힘들다. 미키의 연인 살린도 아프다. 꽤 잘나가는 높이 뛰기 선수였지만 지금은 동네 술집에서 일하고 있다. 이젠 그저 그렇게 살아갈 수밖에 없다. 


미키와 디키 가족은 어떤가? 엄마 앨리스는 이혼한 후 재혼해 살고 있다. 그런데 다 큰 자식들 모두와 함께다. 미키, 디키를 비롯한 자식들은 거의 10명에 육박한다. 또 재혼한 남편도 있다. 그와 자식들은 카리스마 넘치는 앨리스에게 꼼짝도 못한다. 하지만, 그녀에겐 고충도 많다. 이 다 컸지만 능력 없는 자식들을 다 챙겨야 하는 것이다. 그래서 더더욱 미키에게 매달린다. 돈, 돈, 돈!


심지어 이들이 사는 동네도 아프다. 한때 챔피언이었다가 폐인이 된 디키와 결을 같이한다. 디키가 챔피언이었을 땐 이 동네도 잘 나갔는데, 그가 폐인으로의 삶을 걸어갈 때 이 동네도 함께 침체되었다. 누가 먼저랄 것도 없는 국가적 침체의 희생양이 된 것이리라. 동네가 아픈데 가족들이 아프지 않을 수 없고, 가족들이 아픈데 동네가 아프지 않을 수 없다. 


아픈 사람들끼리 모여 어떻게 희망을 이야기하는가를 보여준다 하겠다. 어떻게 해야 할까? 자신들이 아프다는 걸 인정하는 게 우선이다. 그러곤 상대방의 아픔을 이해해야 한다. 자신이 아프지 않다고 생각했을 땐 상대방의 아픔을 조롱하고 하대 하기 때문이다. 영화에서 그 중심엔 디키가 있다. 그렇지만 디키의 변화는 미키와 살린의 선택과 결심에 따른 것이기도 하다. 맞물려야 가능하다는 얘기다. 


우린 아픈 시대를 살아간다. 자신이 아픈지 모르고 누군가가 아픈지 관심도 없는 시대를 살아간다. 아는 게 오히려 병일 때도 있겠지만, 이럴 땐 아는 게 힘일 수 있겠다. 아픈 걸 치료하려는 게 아니다. 아픈 걸 아프다고 말하며, 아프지만 그럼에도 살아가는 것이다. 영화에는 그런 시대였으면 좋겠다는 소망이 담겨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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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리뷰] 제89회 아카데미 작품상 <문라이트>


제89회 아카데미 시상식에서 '작품상'의 쾌거를 올렸다. 더욱이 사상 최초로 남여조연상을 흑인이 휩쓸었는데, 그 중 한 명이 <문라이트>의 메허샬레하쉬바즈 엘리다. ⓒ오드(AUD)



지상 최대 영화 '축제'인 '제89회 아카데미 시상식'이 지난 2월 26일 미국 LA에서 열렸다. 언제나처럼 쟁쟁한 후보들을 앞세운 사전 마케팅이 활개를 쳤는데, 이번엔 싱겁게 끝나버린 경향이 없지 않아 있다. 다름 아닌 <라라랜드> 때문인데, 일찍이 골든글러브 6관왕으로 역대 최다 수상을 하였고 아카데미에도 14개 노미네이트로 역대 최다를 기록한 바 싹쓸이가 예상되었었다. 제목 'la la land'도 아카데미의 성지 LA를 그대로 차용하지 않았는가. 그야말로 아카데미를 위한 영화였으니. 하지만 고작(?) 6관왕에 그치고 말았다. 그것도 메인 상 중 감독상과 여우주연상만 탔다. 


한편 8개 노미네이트 <문라이트>와 <컨택트>가 뒤를 따랐는데, 둘 중에는 <문라이트>가 압승을 거두었다. 수상 개수를 떠나, <문라이트>가 작품상을 탔기 때문이다. 일찍이 전 세계 영화제에서 <라라랜드>를 저멀리 따돌리는 수의 상을 탔는데, 한때 158관왕으로 많은 언론에 오르락내리락 했다. 급기야 아카데미 3관왕으로 175관왕을 넘어섰다고 한다. 사실상 <라라랜드>와 <문라이트>의 각축전이었던 거다. 


여기엔 '흑과 백'이라는, 결코 그냥 지나칠 수 없는 요소가 도사리고 있다. <라라랜드>가 백인의 꿈을 티끌없이 아름답게 그려냈다면, <문라이트>는 흑인 소수자의 성장을 어둡고 아픈 아름다움으로 그려냈다. 둘 다 치명적이게 아름답다. 다만 그 방식이 완연히 다른 바, 머리는 <라라랜드>를 보고 싶어 하지만 가슴은 <문라이트>를 보고 싶어 한다. 나는 가슴이 시키는 말을 듣고 <문라이트>를 보았다.


짧은 시간에 한 인간의 성장을 담다


평균 이하의 짧은 러닝타임에 한 인간의 성장을 오롯이 담았다. 한 시기의 순간순간을 담았을 뿐인데 오롯이 담았다고 느껴진 이유는, 그 순간에 담긴 모습이 완벽히 그 시기를 담아냈다는 것일 테다. ⓒ오드(AUD)



배경은 미국 마이애미 흑인 지구의 마약 소굴, 미국이 결코 좋아할 만한 내용은 아니다. 영화는 '리틀', '샤이론', '블랙'의 3부로 구성되어 있다. 샤이론의 유년, 소년, 청년 시절을 상징하는 별명들이다. '호모새끼'라고 놀림을 받는 한 작고 힘 없는 흑인 아이, 리틀. 여전히 놀림 받는 힘 없는 소년이지만 자신의 정체성이 무엇인지 알게 되는 샤이론. 과거를 청산하고 빈민가 출신 흑인이 할 수 있는 일을 하며 살아가는 블랙. 


우리는 짧은 시간에 한 인간의 성장을 지켜볼 수 있다. 물론 모든 면을 볼 순 없다. 그건 영화 사상 성장의 시간을 가장 완벽히 담아 냈던 <보이 후드>도 해낼 수 없었다. 무수한 시간의 흐름 속에서 자신을 만들고, 깨닫고, 변화하는 장면들만 볼 뿐이다. 그거면 충분하지 않을까 싶다. 아니, 이 영화라서 충분하지 않았을까. 


마약쟁이 엄마와 함께 살아가는 '리틀', 오직 케빈이라는 친구만 있을 뿐이다. 한없이 작고 힘 없는 아이는 호모라고 놀림 받는다. 도망가다가 마약 소굴로 들어가게 되었는데, 우연히 후안이 발견한다. 그는 일대를 주름잡는 마약상. 기댈 곳 없는 리틀은 엄마 대신 후안과 후안의 여자친구 테레사와 급격히 가까워진다. 이후 리틀에게 절대적인 영향을 끼치는 후안. 빈민가 흑인이 지녀야 할 생각과 마음가짐, 행동을 일깨운다. 


'언젠가는 뭐가 될지 스스로 결정해야 해' '넌 지금 세상 한 가운데 있어' '달빛 속에선 흑인 아이들도 파랗게 보이지' '나도 엄마가 싫었지. 하지만 지금은 미칠듯이 그리워' 등 주옥같은 명대사를 리틀에게 전하는 후안. 상당히 도식적인 전개와 장면이지만, 꾸밈없이 다가오니 그저 받아들이지 않을 수 없다. 어두워야 빛이 존재하는 게 아니다. 그러면 그들은 한 몸이 아니지 않은가. 어둠을 뚫고 빛이 나오는 게 아닐까. 어둠과 빛은 한 몸인 것이다. 후안도, 리틀도 어둠이자 빛이다.


가장 들추기 싫은 모습, 하지만 너무나도 아름답다


희망도, 슬픔도 없는 공허로운 눈의 샤이론. 꿈과 희망의 나라 미국이 가장 덮고 싶어 하는 모습임에 분명하다. 하지만... 감독은 이를 너무나도 아름답게 그려냈다. 이를 어찌하나. ⓒ오드(AUD)



리틀에게 희망이라는 게 있는 걸까. 그에겐 단순히 '소외된 사람'이라는 타이틀을 붙여주기가 민망하다. 소외라는 단어에 함축된 엄청난 무게를 감안하고라도 말이다. 사회로부터의 단절과 고립과 격리, 스스로에 대한 포기 등이 소외를 뜻하는 거라 한다면, 그는 소외의 모든 걸 지니고 있다 하겠다. 집안은 가난과 폭력이 난무하고, 무력감과 공허함과 혼란과 무의미가 몸을 휘감으며, 모두가 나를 업신여기고 놀리고 못살게 구는 것 같아 어디에도 눈을 둘 수 없다. 허공을 바라볼 뿐이다. 거기엔 슬픔도 없다. 


'희망'과 '꿈'의 나라 미국에서 가장 들추기 싫은 모습일 것이다. 하지만 아이러니하게도 정작 영화는 너무나도 아름답다. 누구에게나 아름다운 순간이 다가오고, 순간이 영원같을 때가 있다. 리틀이 비로소 샤이론이 되는 순간, 샤이론은 인생의 지침이 된 후안의 '달빛 아래선 흑인도 파랗게 보이는' 체험을 한다. 그저 순간에 자신을 맡기는, 그때만큼은 난 껍데기의 내가 아닌 본질적 내가 된다. 


그러나 인생이 순탄치만은 않다. 샤이론은 본질이 파괴되는 수모를 겪고 또 다른 껍데기를 입을 수밖에 없는 선택을 한다. 이제 '샤이론'이라는 샤이론의 본모습은 아주 단단한 껍데기에 몇 겹이고 둘러싸여 절대 밖으로 내보일 수 없게 되었다. 그는 '블랙'으로 살아간다. 그가 아는 가장 단단한 껍데기 후안의 모습을 하고서. 


그렇지만 머지 않아 그의 본질이 다시금 도전을 받을 위기에 직면한다. 그의 본질을 일깨워준 순간과의 조우, 그의 얼굴엔 '블랙'이 아닌 '샤이론'이 비추고 자신감 없고 움츠러든 표정과 말 본새가 드러나며 슬픔조차 찾기 힘든 공허하기 짝이 없는 두 눈이 영화를 지배한다. 그는, 다시금 달빛 아래서 파랗게 보이는 체험을 할 수 있을까. 


이보다 더 아름다운 영화는 없다


이 '아름다운' 위대한 영화, 또는 아름다운 '위대한' 영화. 나는 이보다 더 아름다운 영화를 본 적이 없다. 앞으로도 이런 류의 아름다움을 이렇게 표현해낼 영화가 있을까? ⓒ오드(AUD)



영화는 상당 부분 헤르만 헤세의 세기의 베스트셀러이자 현대 성장 소설의 시초와도 같은 작품 <데미안>을 생각나게 한다. 그렇지만 단언컨대 그보다 더 위대한 성장을 다뤘다고 말할 수 있는 건, 한 아이의 성장이 뚫고 가야 할 것들이 너무나도 지독했기 때문이다. 그야말로 첩첩산중, 다 말하기도 힘들거니와 늘어놓는다해도 완전히 드러낼 수 없을 거다. 그럼에도 '아름답다'고 말할 수 있는 것도 그 위대함을 말해준다. 


절대 잊히지 않을 한 가지가 있다. 리틀과 샤이론과 블랙의 그 '두 눈'. 얼마나 캐스팅에 공을 들였을지 느껴질 만한 세 사람의 놀라운 싱크로율은 뒤로 하고서라도, 세 사람의 시기에 따른 두 눈의 공허함은 가히 치명적이다. 아무런 감정을 찾을 수 없는 두 눈은 모든 걸 말해준다. 이건 '경지'라고밖에 말할 수 없다. 이런 연기는 처음 본다. 


순간을 이끄는 색감과 OST는 영화의 품격을 한껏 높이는 데 일조했다. 특히 색감은 이 영화가 아름답다고 느끼는 데에 절대적 공헌을 했다. 블랙톤에 가까운 파스텔 톤의 색들이 영화의 중요한 순간 순간을 수놓는다. 블랙을 돋보이게도, 그렇다고 블랙을 묻히게도 하지 않고 조화를 이룬다. 우린 이 영화의 포스터부터 눈길을 떼지 못한다. 일정한 톤의 OST도 역시 중요한 순간을 일깨우는데, 안정감보단 긴장감을 느끼게 한다. 일종의 영화적 장치, 단조로울 수 있는 영화에 색깔을 입혔다. 


<와호장룡>은 '무협영화'에게 갖는 선입관에 철퇴를 내렸었다. 이토록 아름답고 철학적인 무협이 있다니. 무협에는 인간이 존재하지 않는 줄 알았는데 말이다. 부끄럽지만 <문라이트>는 '흑인영화'에게 갖는 선입관에 징벌을 내린 것 같은 충격을 내게 주었다. 누구나 편견 어린 시선을 가질 수밖에 없는 데 말이다. 이보다 아름다운 영화는 이전에도 이후에도 찾기 힘들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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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서평] <너무 시끄러운 고독>


소설 <너무 시끄러운 고독> 표지 ⓒ문학동네



삼십오 년째 폐지 속에서 살아가는 한탸. 폐지압축공인 그는 지하실에서 수많은 폐지에 둘러싸여 압축기 한 대와 씨름하며 고독하게 일한다. 엄청난 양의 교양을 뜻하지 않게 쌓아가고, 엄청난 양의 맥주를 힘을 얻기 위해 의도적으로 마신다. 덕분에 그는 매일매일 머릿속으로 그 어떤 것도 할 수 있고 그 어느 곳으로도 갈 수 있으며 그 어느 누구하고도 만날 수 있는 행운을 얻었다. 그건 곧 행복이다. 


그는 5년 후 압축기 한 대와 함께 은퇴해 집으로 가져와 하루에 한 꾸러미씩만 꾸릴 생각을 하고 있다. 그 한 꾸러미가 한 점의 예술작품이 되기를, 그 안에 그의 젊은 시절 품었던 모든 환상과 지식, 삼십오 년간 배운 것들을 모조리 담을 생각이다. 참으로 멋진 계획! 그 때문에 온갖 수모와 비정상적인 일의 연속을 버틸 수 있다. 


<너무 시끄러운 고독>은 고독 속에서 일하는 한 남자 한탸를 그린 짧은 소설이다. 그곳엔 오직 그와 압축기가 있을 뿐이다. 그리고 끊임없이 쏟아지는 폐지들. 하지만 역설적으로 그곳은 너무 시끄럽다. 폐지들, 그 중에 있는 '진정한 책'이 선사하는 이야기들이 한탸를 가만히 놔두지 않는다. 한탸는 매일 그 이야기 속으로 들어간다. 


'위대한 일'을 하는 '하찮아 보이는' 사람


한탸가 매일 같이 행하는 건 '파괴 행위', 그것도 자신이 가장 사랑하고 숭배하기 마지않는 것들을 파괴하는 행위. 그는 그 행위에 깃든 아름다움을 이해한다. 그 아름다움은 한탸의 앎이 전제되어 있다. 진정한 책들의 위대함을 알면서도 파괴할 수밖에 없는 처지. 한탸에겐 인생을 건 싸움이다. 


책의 위대함을 안 이상 파괴만 할 순 없다. 그는 2톤이나 되는 양의 책들을 집으로 가져 왔고, 매일 같이 몰래 책을 빼돌려 가치를 알아주는 이에게 팔아넘긴다. 그렇게 그는 책들을 최대한 구출하려 한다. 책으로 구현되어 있는 인간의 정신과 문화를 지키려는 행위와 다름 없다. 누구도 거들떠보지 않고 누구도 기대하지 않는 곳에서. 


한탸가 대변하는 이들은 사실 우리가 알지 못하는 사회 곳곳에서 활동하고 있다. 그것이 꼭 책과 같은 인간의 정신과 문화의 상징과 같은 것이 아니더라도 말이다. 우리가 우리일 수 있게, 우리가 지극히 평범한 일상을 영위할 수 있게 꼭 필요한 일을 어딘가에서 하고 있는 분들. TV에서 꾸준히 알려지고 있지만, 그들을 '희귀한 일'을 하는 사람으로만 인식되고 있는 게 사실이다. 


책이 떠나는 여정의 마지막은 독자의 손이어야 할 테지만, 사실 폐지가 되어 종이로 다시 태어나는 경우가 대부분일 것이다. 소설은 그와 같은 또 다른 책의 종착점을 보여주면서, 그곳에서 '위대한' 일을 하는 '하찮아 보이는' 사람을 조명한다. 


인간을 위해, 인간의 정신과 문화를 뒤로 하는 아이러니


어느 날, 한탸는 부브니에 엄청난 크기의 수압 압축기가 들어섰다는 소식을 듣고는 직접 찾아가본다. 그는 일전에 느껴본 적 없는 충격을 받는다. 그에겐 폐지 더미 속에서 희귀한 서적을 발견하는 그 순간이 축제나 다름 없었는데, 이곳에서는 그런 기쁨에, 폐지가 지닌 매력에 마음을 두는 사람이 아무도 없는 게 아닌가. 책들은 컨베이어 벨트를 타고 가다가 으스러진 후 커다란 용기 속으로 밀려들어가 파괴되었다. 


아무도 책의 가치를 발견하지 못한다는 것, 아무도 책의 가치를 발견하고 싶어하지 않는다는 것은 인간의 정신과 문화를 최후의 순간에 지킬 사람이 더 이상 없다는 걸 의미한다. 반면 전에 없이 월등한 능력의 압축기는 현대 사회가 갖는 더할 나위 없는 효율적 일처리를 의미한다. 인간을 위해, 인간의 정신과 문화를 뒤로 하는 아이러니. 


더불어 한탸를 비롯해 뜻하지 않게 교양을 쌓게 된 그처럼 늙은 압축공들이 누렸던 '좋은' 시절도 끝나버리고 만 것이다. 사고 방식이 달라졌고, 일 방식이 달라졌다. 새 인간, 새 방식, 새 시대! 한탸가 할 수 있는 게 무엇일까. 새 시대에 맞게 그도 오로지 일 효율을 극대화시키기 위해 책은 거들떠도 안 보고 파괴 행위에 몰입할 것인가? 아니면 도태되어 밀려나 '쓸모 없는' 인간이 될 것인가?


그가 하는 일은 생각에 따라 방식에 따라 인간에 따라 정녕 위대할 수 있다. 하지만 이렇게 된 이상 그가 하는 일은 '파괴 행위' 그 이상도 이하도 아닌 것이다. 문제는, 그 일을 하는 사람들이 한탸와 같은 일종의 의무를 반드시 지녀야 하는가? 이다. 아무도 강요할 수 없다. 안타깝지만 세상은 그 쪽으로 흘러가고 있다. '위대한' 한탸가 할 수 있는 건 아무것도 없는 것이다. 


사라져가는 인간성, 우리에겐 희망이 있는가? 


도처에 '사라져가는 것' '사라진 것'들이 많다. 거기엔 어김 없이 우리를 우리이게 한 기억들이 있다. 골목길, 구멍가게, 동네서점, 손편지, LP와 CD 등. 그것들이 사라지고 난 후 대체한 것들은 하나 같이 비인간적인 것들이다. 물론, 이는 지극히 구시대적이고 시대에 뒤떨어지는 생각일 수 있다. 결국 인간을 위해 만들어진 것들인데 말이다. 


좋다, 한 발 양보해 적어도 한탸의 위대한 생각을 발현하는 폐지압축공이 사라지는 건 비인간적으로 가는 길이 아니겠는가 생각한다. 인간성 상실로의 길. 한탸가 아니고서 다른 누군가가 그와 같은 생각으로 그와 같은 일을 한다는 걸 바랄 수는 없다. 그 지점이 한탸와 함께 사라질 인간성에 대한 안타까운 부분이다. 


인간을 위한다는 건 '진보'를 의미할 것이다. 더 나은 미래를 위한 변화, 이보다 더 좋은 말도 찾기 힘들다. 나 또한 일면 진보를 옹호하고 외치는 사람이다. 하지만, 하지만 말이다. 퇴보적 진보도 존재하지 않을까. 소설에서 한탸도 끊임없이 고민하는 부분인데, 일면을 위해 진보적 길을 택하지만 그 길이 일면 퇴보적으로 다가올지 모르는 것이다. 어떤 것들은 시대적 사명을 뒤로한 채 진보적 보수를 택해야 하지 않을까. 적어도 한탸의 생각이 발현된 폐지압축공이 사라져선 안 된다. 


우리에겐 희망이 있는가. 인간성 상실로의 필연적 길을 목도함에도 아무것도 할 수 없는 우리를 직시하고서도 희망이 있다고 말할 수 있는가. 소설은 말한다. 한탸가 있었다는 것만으로도, 그가 끝까지 지니고 있던 인간성 그 자체만으로도 희망이 있다고 말이다. 우린 그에게서 발견할 수 있다, 아니 발견해야 한다. 그가 지녔던 인간성을, 그 아름다움을, 그 강인한 믿음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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冊으로 策하다. 책으로 일을 꾸미거나 꾀하다. 책으로 세상을 바꿔 보겠습니다. singenv@naver.com Since 2013.4.16




[지나간 책 다시 읽기] 우라사와 나오키의 <몬스터>


만화 <몬스터> 표지 ⓒ서울문화사



뇌리에 박혀 한 장면, 어쩌면 인생의 터닝 포인트가 될지 모르는 한 장면, 누구에게나 그런 한 장면이 있을 테다. 나에게도 여러 장면이 있는데, 그 중 한 장면이 만화책에 관한 것이다. 여전히 만화책은(만화가 아닌 만화책이다) 내 인생에서 중요한 자리를 차지하고 있는 바, 그 장면이 종종 생각난다. 


막 중학생이 되었을 때 쯤이었나, 그때는 아직 동네에 도서대여점이 성행 중이었다. 반경 500미터 안에만 족히 5개는 있었을 것이다. 여하튼 당시 내가 주로 보는 장르는 학원물, 스포츠물, 판타지물 등이었다. 그야말로 그 나이에 걸맞는 장르가 아닌가. 그런데 한두 살 정도나 많은 형이, 당시 내가 전혀 생각지도 못하고 전혀 보고 싶지도 않은 장르의 만화책을 빌려가는 게 아닌가. 우라사와 나오키의 <몬스터>였다. 


한두 번이었으면 그러려니 했을 텐데, 우연히 계속 보게 되었다. 한두 권이 아니라 18권이나 되었으니까. 뭔가 어려워 보이고, 뭔가 수준 높아 보이는 그런 만화책. 왠지 내가 좀 수준 낮아 보여 그 형이 <몬스터>를 빌려갈 때면 난 기다렸다가 한참 뒤에 빌려가곤 했다. 내가 <몬스터>를 보게 된 건 스무 살이 넘어 어른이 되었을 때다. 


우라사와 나오키 만화 중 가장 애착이 가는 작품 <몬스터>


시간이 흘러 이제는 내가 접한 모든 콘텐츠 중에서 가장 상위권에 위치해 있는 '우라사와 나오키의 만화', 내가 읽는 그의 작품은 <파인애플 아미> <마스터 키튼> <몬스터> <20세기 소년> <플루토> <빌리 배트>, 즉 국내에 나온 그의 작품 대부분을 접한 것이다. 그중 가장 좋아하는 작품은 <마스터 키튼>, 가장 애착이 가는 작품은 <몬스터>.


내용은 굉장히 미드스럽다. 안 그래도 미드로 제작 중에 있다고 하는데, 언제 나올지는 미지수다. 일본 국적의 독일의료계 신성 텐마는 천재뇌외과의사로 명성이 자자하다. 병원장 딸과 연애도 하고 있는 바, 차기 병원장이라고 봐도 무방할 정도다. 그는 병원 정치에 발을 내딛고 있기에 온갖 술수에 희생양이자 앞장이가 될 수밖에 없다. 자신의 논문을 병원장 이름으로 내고, 터키인보다 오페라 가수를 살리는 게 우선이다. 


자신의 처지를 한탄하고 있던 찰나 사건이 터진다. 망명 온 동독의 고문 가족이 피살당한다. 부모는 죽고 쌍둥이 아이들은 살았지만 남자 아이가 머리에 총상을 입어 중태에 빠진 것. 텐마는 이 아이의 담당으로 배정되지만, 뒤이어 실려온 시장의 담당으로 다시 배정된다. 고민하는 텐마, 결국 그는 병원장의 명령을 어기고 아이를 살려낸다. 반면 중요한 인물이었던 시자은 죽고 만다. 텐마는 곧바로 치프 자리를 빼앗긴다. 


살려놓은 아이 '요한' 앞에서 병원장과 끄나풀들의 죽음을 간절히 바란 텐마, 며칠 뒤 거짓말처럼 병원 고위층이 한 자리에서 독살당하는 사건이 발생한다. 그러고는 감쪽같이 사라진 요한과 여동생 안나. 새로 부임한 병원장은 텐마를 외과과장에 앉히고, 그렇게 10년이 흘러간다. 어느 날, 우연한 사건으로 텐마는 자신이 살려낸 요한이 돌이킬 수 없는 짓을 일삼는 괴물임을 알고 그를 죽이기 위해 모든 걸 내려놓고는 길을 나선다. 아울러 그는 연쇄살인사건의 중요참고인 혹은 용의자로 수배된다. 


이 만화의 무궁무진한 포인트와 등장인물들


이 만화의 포인트는 무궁무진하다. 억울한 누명을 쓴 채 쫓기는 천재외과의사, 그는 나락으로 떨어진 인생은 둘째치고 자신이 살려낸 괴물을 죽이고자 외로운 길을 떠난다. 그가 쫓는 괴물 요한의 정체는? 그의 쌍둥이 여동생 니나와의 접점은? 이 괴물은 인간이라면 누구에게나 존재하는 또 하나의 인격인가, 누군가에 의해서 만들어진 괴물, 즉 피해자인가. 그가 궁극적으로 하고자 하는 건 무엇인가. 


까도 까도 끝없이 까지는 양파처럼 이 만화에는 수많은 포인트뿐만 아니라 수많은 사람들이 등장한다. 하나하나가 인간 군상의 개개인을 상징하고 있는 바 그냥 지나칠 수 있는 캐릭터가 없다. 결국 모든 게 괴물 요한이라는 포인트로 수렴되지만 모두 자신들만의 이야기를 지니고 있어 공감이 간다. 


요한은 수많은 사람들을 죽음으로 몰고 간 괴물, 그뿐이랴? 그는 궁극의 혼란, 궁극의 파괴, 궁극의 고독을 원한다. 그런데 그에게 가까이 갈수록 슬픔을 느낀다. 그것이 과연 그가 원하는 것일까. 그가 원하도록 만들어진 게 아닐까. 그 부분이 이 이야기가 가지는 매력이자 힘이다. 


'의사' 텐마가 요한을 죽이려는 건 결국 그를 '치료'하고자 하는 게 아닐까 싶다. 또한, 그를 찾아내어 처치하려는 것 자체가 엄청난 모험인데, 도중에 만나는 사람들도 치료한다. '네가 태어난 의미는 반드시 있어. 네가 살아갈 의미도 있어. 포기하지마. 희망을 가져.' 많은 이들이 요한으로 인해 남에게 피해를 끼치고 삶을 포기하려 하는데, 텐마는 그들에게 삶의 의미를 부여하고 희망을 불어넣는다. 


우리가 고전 서사를 즐기는 이유, <몬스터>를 즐기는 이유


우리는 여전히 고전 서사를 즐긴다. 거기엔 인간의 전형이 있기 때문이다. 고전 서사를 변형한 콘텐츠도 부지기수인데, <몬스터> 또한 고전 서사의 변형으로도 볼 수 있다. 모든 걸 원상태로 되돌려 놓기 위한 한 인간의 사투, 자신이 되살려 놓은 악을 섬멸하기 위해 세상의 모든 짐을 홀로 짊어진 채 떠나는 한 인간의 모험, 악의 근원은 계속해서 거슬러 올라가고 선의 근원은 지금 이 자리에서 시작되어 내려가는 순환. 


이처럼 <몬스터>는 서사가 가지는 힘을 잘 알고 그를 극대화시켜 내보낼 줄 아는 작가의 능력이 극대화된 콘텐츠라 하겠다. 거기에 오그라들 만하지만 빠져들 수밖에 없는 장치들을 곳곳에 배치해놓았다. 노소를 불문하고 말이다. 캐릭터들의 생각이나 행동은 소년에게, 당대 정세나 상황 설정은 장년에게 먹힐 만하다. 


이 세상에 나홀로 남게 되었을 때 가장 견디기 힘든 건 무얼까. 아무도 나의 이름을 불러주지 않는 거라고 만화는 말한다. 그건 비단 진정 이 세상에 아무도 없지 않아도 가능하다. 이 세상에 수많은 사람이 있지만 나를 아는 사람은 한정되어 있는 바, 나를 아는 사람이 모두 죽으면 나는 자연스레 존재하지 않는 게 되지 않을까. 요한이 본 '종말'이 바로 그런 모습, 그가 모든 이에게 선사하고 싶은 바도 그런 모습. 


'세상이 만들어낸 슬픈 몬스터', 요한에게도 통용되는 말일까. 그가 가진 몬스터의 요소 중 하나일뿐, 온전히 설명하는 요소는 아닌 것 같다. 우린 이 만화에서 '몬스터'보다 '인간'에게 눈길이 갈 것이다. 몬스터의 슬픔보다 인간의 희망에 기대를 걸게 될 것이다. '포기하지마'라는 전언이 깊이 새겨질 것이다. 그 전언이 몬스터도 용서하고 포용할 수 있는 큰 배를 만드는 데 도움을 줄 것이다. 우린 그런 배를 만들어야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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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리뷰] <해에게서 소년에게>



영화 <해에게서 소년에게> 포스터 ⓒ디씨드


사이비 종교에 빠져 집이 풍비박산 난다. 오랜 시간 형의 병수발을 하다가 엄마가 사이비 종교에 빠져 버린 것이다. 아빠는 빚쟁이에 쫓겨 집을 나가고, 엄마는 삶의 무게를 견디지 못하고 자살한다. 형도 죽음을 면치 못했다. 그렇게 시완은 철저히 혼자가 되고, 복수할 일념으로 전도사 승영이 지내고 있는 PC방으로 찾아간다. 그곳은 엄마와 알고 지내던 신도 진숙이 운영하고 있었다. 


시완은 칼로 전도사 승영을, 자신의 집안을 풍비박산 나게 한 장본인인 사이비 종교 전도사 승영을 찌르려 한다. 하지만 어디 쉽겠는가. 외려 그들은 점점 친해진다. 승영이 예의 따듯한 미소와 말로 시완을 대한다. 어딜 봐도 사이비 종교 전도사 같은 모습은 보이지 않는다. 더불어 진숙의 딸 민희도 시완을 스스럼 없이 대한다. 시완은 승영을 형이라 부르기 시작하고, 민희에게는 환한 미소로 대하기 시작한다. 


깊은 아픔을 간직한 소년의 성장기?


영화 <해에게서 소년에게>는 깊은 아픔을 간직한 한 소년이 그 아픔의 원인과 함께 '공동체'를, '새로운 가족'을 형성해 가는 과정을 담은 듯 보인다. 피가 섞이지 않은 사람들끼리 모여 가족을 이룰 수 있는가 하는 물음을 넘어서, 원수와도 같은 사람과도 가족을 이룰 수 있는가 하는 물음을 던지는 듯 보인다. 


중반까지 이 영화의 중심에 그런 물음이 있었고, 영화는 그 물음에 'Yes'라는 답을 보낸다. 그렇게 그들은 가족이 되어 가고 있었다. 거기에 사이비 종교와 죽음이라는 암울한 그림자가 끼어들 자리는 없어 보였다. 승영과 시완과 민희는 운동장에서 함께 놀고, 함께 아이스크림을 먹고, 함께 밥을 먹고, 함께 한 방에서 각자 할 일을 했다. 



영화 <해에게서 소년에게>의 한 장면 ⓒ디씨드



새로운 시대에 맞는 새로운 가족의 모습을 탁월하게 보여주고 있었다. 새로운 가족에겐 혈연이나 그에 맞는 역할보다 '관계'가 중요하다. 이들이 함께 하는 가족은 역할보다 관계가 우선이다. 자연스레 소통이 이뤄지고 서로에 대한 배려와 절제가 앞선다. 그러는 한편 미성년자로서 보호 받아야 할 대상인 시완을 챙겨준다. 승영은 시완의 형이 되고 보호자가 된다. 진숙은 시완의 어머니가 된다. 민희는 시완의 친구이자 남매가 된다. 이건 역할이라기 보다 관계의 이상적 모습이다. 


어른들의 일방적 처사, 소년을 압박하다


그런데 영화는 급반전 된다. 쓰러져 가는 교회를 다시 살려보자는 진숙과 목사의 성화에 전도사 승영은 목사가 되기로 하고 부흥을 결심한다. 그러며 시완에게 간증을 요구하는 것이었다. 시완에게는 가장 잊고 싶은, 집안을 풍비박산 시킨 주체를 다시금 떠올리게 하는 것도 모자라 그 주체와 함께 하라는 요구였다. 그야말로 간악한 처사였다. 


그것도 모자라 진숙의 포악한 남편이 그들을 괴롭힌다. 평소에도 술만 마시면 폭력을 휘두르곤 했는데, 어디서 사기를 당하고 온 뒤 폭력의 수위가 높아진다. 이를 말리다가 시완은 실수를 하고 이 사건은 시완에게 결정적 타격을 입히고 만다. 시완은 그들을 지키고자 그랬는데, 그들은 시완을 지킬 마음이 사라져 버렸다. 새로운 가족의 탄생은 그렇게 어른들의 일방적 처사로 물거품이 되어 버렸다. 



영화 <해에게서 소년에게>의 한 장면 ⓒ디씨드



영화는 시종일관 어둡기 짝이 없다. 채도를 낮춘 듯한 화면에서, 도무지 희망을 찾을 수 없다. 쨍쨍한 햇볕과 푸른 하늘마저도 뿌옇다. 그건 이들이 함께 해 가족의 모습을 보여주는 장면에서 더욱 빛을 발한다. 그런 장면에서 더욱 선명한 대비를 이뤘던 것이다. 그 끝이 결코 좋지 않을 것이라는 걸 예견하고 있는 듯하다. 사이비 종교의 부흥은 관심 밖이다. 시완은 어떻게 될까. 그게 궁금할 뿐이다. 


소재의 한계와 보편적 주제


사이비 종교, 빛쟁이, 자살, 죽음, 가출, 원수와의 공동체 등. 이 영화에서 우리가 쉽사리 공유, 공감할 만한 것들이 별로 없다. 있는 듯 하면서도 별로 없다. 주요 공간이 사이비 종교 기도원이자 PC방이라는 정도? 그것마저도 마냥 PC방이 아닌 점에서 공유, 공감할 만하지 못하다. 이 영화의 소재가 갖는 한계다. 


반면 이 영화의 주제가 갖는 한계는, 보편적이라고 까지 할 수는 없겠지만 소재보다 훨씬 넓다. 도대체 아이들에게 무슨 잘못이 있는가? 아무 잘못도 없는 아이들은, 왜 그토록 고생을 하고 있는 것인가. 왜 이 세상에 태어나게 했는가, 하는 질문마저 하게 만든다. 사회적 안전망이 턱없이 부족한 이 나라에서, 역시 세상살이에 힘든 어른들로 인해, 아이들은 가해자로의 길을 가고 있다. 세상 모든 것들이 그들을 그 길로 몰아넣고 있다. 



영화 <해에게서 소년에게>의 한 장면 ⓒ디씨드



이 굴레를 벗어나는 길은 어디에 있는가. 영화는 가르쳐 주지 못한다. 다만 보여줄 뿐이다. 보여주는 것 만으로도 큰 용기와 깊은 자기 반성이 필요하다. 이 불편한 영화는 그렇게 내 마음 속에 남아 용기와 자기 반성의 깊이를 더해줄 것이다. 그게 세상을 바꾸는 게 아니고 무엇이겠는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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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국 대표 소설 읽기] <어둠의 혼>



<어둠의 혼> 표지 ⓒ아시아



남북 분단은 한국 근현대사를 규정하는 가장 큰 줄기이다. 해방의 기쁨을 제대로 맞이하기도 전에 찾아 왔기 때문에, 오히려 해방보다 더 크고 깊게 그 그림자를 드리우고 있을 것이다. 그 이면에는 단연 '이데올로기'가 자리 잡고 있다. 남한과 북한, 미국과 소련(중국), 우익과 좌익, 자본주의와 공산주의 등에서 비롯된 이데올로기의 첨예한 대립이 한반도에서 폭발했다. 


대폭발의 결과는 분단이었고 미국과 소련 정권은 분단된 남북을 손아귀에 쥐고 완전 고착화를 실행에 옮기려 했으며 남한과 북한 정권은 그 대치 상태를 이용해 독재 체제를 구축하였다. 그러고는 문제의 핵심을 '분단'에서 다른 것으로 옮기려 했다. 이런 상황을 지식인, 소설가들이 그냥 지나칠 수 없었느니, 곧 '분단 소설'의 탄생이다. 


분단 소설이라 하면 굉장히 고루하고 진부하다고 생각할 수 있겠다. 그 초점이 분단을 그리는 '소설'에 있든 소설에서의 '분단'에 있든 지금에 와서는 그러지 않다고 말 할 수 없겠지만, 우리가 발을 딛고 선 현실이 여전히 분단이기 때문에 그 이상의 가치가 있을 것이다. 감히 말하지만, 남북 분단이 한국 근현대사를 규정하는 가장 큰 줄기인 만큼, 분단 소설 또한 한국 근현대 문학사에서 가장 큰 줄기라고 생각한다. 


10대 안팎에 겪은 이데올로기의 아픔


분단 소설은 분단과 전쟁을 직접적으로 체험한 세대와 직접적이지만 간접적에 가깝게 체험한 세대, 그리고 간접적으로 체험한 세대로 나눌 수 있을 것이다. 김원일 소설가의 <어둠의 혼>은 두 번째에 해당한다. 즉, 소설가 본인이 분단을 직접 체험하긴 했지만 체험할 당시의 나이가 많지 않았던 것이다. 아직 전쟁이 무엇인지 이데올로기가 무엇인지 정확히 인지하지 못할 10대 안팎의 나이 말이다. 


소설은 한국 전쟁이 일어나기 일 년 전인 1949년을 배경으로 한다. 주인공인 갑해의 시점으로 보자면, 좌익 운동에 가담했던 아버지가 체포되어 총살 당한 모습을 직접 목격하게 되기까지의 하루를 그렸다. 갑해는 아버지가 돌아가신다는 게 슬플 뿐 당장 해결해야 할 지독한 배고픔에 괴롭다. 그는 아버지가 왜 좌익 활동을 하게 되었는지, 무엇을 하려고 했는지 알지 못하고 궁금하지도 않다. 현실이 괴로울 뿐이다. 


분단 소설이라 하면 으레 분단을 직시하고 안타까워하며 그에 대한 어떤 메시지를 던져야 할 것이다. 노동 소설이 노동자들의 억울함을 대변하는 것처럼, 농촌 소설이 무너져 가는 농촌과 화려해지기만 하는 도시를 대비해 어떤 메시지를 던져야 하는 것처럼 말이다. 반면 이 소설 <어둠의 혼>은 아이의 시선을, 아이의 상황을 따라 '모르쇠'로 일관한다. 다만 현 시대에 대한 부당함을 드러낸다. 이는 이데올로기니 전쟁이니 하는 것들 때문에 아무것도 모르는 아이들까지 불안과 공포에 떨게 하는 시대를 고발하는 것이다. 


이 소설이 가지는 기막힌 문학적 균형


그렇다면 아버지가 갑해에게 했던 말은 무엇인가? 빨갱이고 좌익이고 알지 못하지만 그 일을 한 아버지가 죽어야만 한다면, 아버지가 말씀하셨던 '모두에게 행복과 평등을 가져다주는 길'은 무엇이냐 말이다. 이해할 수 없고 알 수 없는 것들 투성이인 세상이다. 작가가 본 해방 직후의 세상 또한 갑해와 다르지 않은 것이다. 그 알 수 없는 두려움. 


소설의 마지막, 갑해는 두려움과 함께 어떤 깨달음을 얻는다. 살아가는 데 용기를 가져야 하고 어떤 어려움과 슬픔도 이겨내야 한다는 내용의 깨달음. 이 급작스러운 희망에의 역설은 무엇인가. 이 희망이야말로 이 소설이 가지는 기막힌 문학적 균형이며, 이 소설만이 던질 수 있는 메시지이다. 


이는 '아이의 시선'이라는 한 뿌리에서 시작한다. 아이가 아무것도 모르는 무의 상태이기에 쉽게 희망을 가질 수 있는 것이고, 그러하기에 시대에 휩쓸리지 않고 또 자기 무력감이나 자신을 망치는 신념에 휘둘리지 않고 앞으로 나가며 성장할 수 있는 것이다. 그야말로 반전에 가까운 배치이다. 절망에서 갑자기 쏟아 오른 희망에의 메시지. 하지만 무의 상태이기에 절망에서 희망을 쉽게 낚아 올릴 수 있다. 


아이의 시선은 작가의 어쩔 수 없는 의도이기도 했던 것 같다. 소설이 쓰인 1970년대는 서슬 퍼런 독재 시대였다. 직접적으로 분단을 이데올로기를 전쟁을 이야기할 수 없었다. 그러하기에 어른도 아닌 아이의 시선을 통해 우회적으로 메시지를 전달하려 했던 게 아닐까. 그 탁월한 선택은 40년이 훌쩍 지난 지금까지 생생하게 남아 당시의 상황을 전해주고 있다. 


아시아 출판사에서 후원하는 '한국 대표 소설 읽기'의 일환입니다. 

'바이링궐 에디션 한국 대표 소설'과 함께 앞으로 계속 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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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서평] <팝, 경제를 노래하다>


<팝, 경제를 노래하다> 표지 ⓒ아트북스

예술은 가치는 무엇인가? 먼저 미적 가치가 있다. (위대한) 음악을 들으면, 그림을 보면, 건축물을 감상하면 거기서 느낄 수 있는 미(美)로 황홀함을 느낄 수 있다. 마냥 기분이 좋아지고, 차분해지고, 세상이 아름답게 보인다. 우리가 예술 작품을 보는 가장 큰 이유일 것이다. 


다음으로 해석 가치가 있다. 예술 작품을 보고 시대적 배경과 맥락을 들여다보고 숨겨진 메시지를 푸는 것이다. 예술의 해석 가치를 더욱 높이 사는 사람들은 예술의 미적 가치를 추구하는 사람들을 깎아내리곤 한다. 어찌 보면 미적 가치를 추구하는 것도 해석의 일종이라고 할 수 있지만 말이다. 여기서 많이 쓰이는 해석은 시대적 배경과 맥락이다. 그 중에서도 그 시대를 살아가는 사람들이 직접적으로 느끼는 경제, 정치 등이 핵심이 아닐까 한다. 


돈에 대한 찬가를 '비틀스'가 노래했다?


현존 최고의 대중음악 평론가라 할 수 있는 임진모 평론가의 신작 <팝, 경제를 노래하다>(아트북스)는 예술의 해석 가치를 추구하는 이들에게 적합한 책이다. 제목에서도 알 수 있듯이 팝(노래)로 경제(정치와 사회도 포함)를 해석하려는 시도이다. 또는 반대로 경제를 통해 노래를 해석하는 시각으로 읽어도 무방하다. 


책은 일단 팝이 주(主)가 되고 경제가 부(副)가 되는 양상이다. 겉으로 보나 안에서 보나 노래가 원문과 함께 곳곳에서 빛을 발하고 있기 때문이다. 사실 그 노래의 가사만 읽어봐도 당시의 시대가 눈앞에 그려지는 것 같다. 그만큼 직설적인 노래 가사가 많다. 예를 하나 들어 본다. 


사랑이 나를 설레게 하지만 / 그렇다고 내 청구서를 내주는 것은 아니야 / 내게 돈을 주라구 / 

돈이 내가 원하는 거라구 / 돈이 내가 유일하게 원하는 거야 / 그게 내가 원하는 거야 / 

물론 돈이 모든 걸 다 주지는 않아, 그건 사실이야 / 하지만 돈이 없으면 아예 쓸 수도 없어


'(내가 원하는 것은) 돈'이라는 제목의 이 직설적인 노래는 누구의 노래일까? 영국 리버풀 출신의 찢어지게 가난한 노동계급의 후손들이자, 역사상 최고의 슈퍼스타(모든 방면을 막론하고)인 '비틀스'의 노래이다. 그들은 1950년대 중반에서 1960년대 초반 전후 영국의 오랫동안 계속되는 차가운 경제 현실 속에서 오로지 성공을 위해 내달렸다. 당시 정반대로 호황의 절정에 있었던 미국의 슈퍼스타 '엘비스 프레슬리'를 동경하면서 말이다. 


임진모 평론가의 대중음악에 대한 해박한 지식, 특유의 과도함에서 한 발자국만 물러서 있는 화려한 수식어들, 그리고 손에 잡힐 듯 읽히는 경제까지. 특별하게 이질감이 느껴지지 않는 구성이고 진행이다.  평소 그의 평론에서 보았던 남다른 시각과 지식이 빛을 발하고 있는 듯하다. 


음악과 경제의 균형 잡힌 이야기


책은 그러나 읽다 보면 경제가 주(主)가 된다. '팝을'이 아니라 '팝으로'이기 때문이다. '팝으로' 또는 '팝을 통해서' 경제를 읽는 기획이기 때문에, 사실 경제 이야기가 더 많이 나온다. 또 그렇기 때문에 이 책이 더 감탄을 불러 일으키는 게 아닌가 싶다. 


이런 식의 기획은 많은 단행본에서 접할 수 있다. 특히 철학을 주로 영화, 그림 등을 접목 시키는 시도가 많이 이루어진다. 그런 책들을 보면 단연 철학 이론들이 눈에 띈다. 즉, 영화나 그림 등은 어려운 철학 이론을 가리기 위한 눈속임에 지나지 않는 경우가 허다한 것이다. 얼마 전에도 그런 책을 읽다가 얼마 못 읽고 접고 말았다. 시작과 끝은 영화 얘기로 하면서 하고자 하는 얘기는 전부 철학으로 채워 놓지 뭔가. 


반면 이 책 <팝, 경제를 노래하다>(아트북스)는 균형을 잘 잡고 있다는 느낌이다. 다행히(?) 저자가 경제 전문가가 아니기 때문에, 경제 관련된 어려운 용어를 늘어놓지 않고 자신이 아는 한도 내에서 최대한 쉽게 풀어 쓰려는 듯한 뉘앙스가 풍긴다. 한편 음악 관련해서는 자신이 누구보다 잘 알기 때문에 쉽게 전달하려는 의도가 있고 또 쉽게 풀어 쓸 능력도 있다. 


오죽했으면 예술로 까지 경제를 말할까?


하지만 읽다 보면 어쩔 수 없는 아쉬움, 그리고 안타까움이 있다. 아쉬움은 반복되는 경제의 순환 때문이다. 1930년대 대공황부터 시작해 2008년 세계금융위기까지 17개의 파트로 나뉘는 이 책은, 거의 완벽한 순환을 보인다. 무슨 말인고 하면, 경제의 폭락과 폭등이 끊임없이 이어지는 것이다. 그것도 미국과 영국이 번갈아 가면서 말이다. 


대공황의 폭락, 아메리칸 드림의 폭등, 같은 시기 영국의 폭락, 1970년대(베트남 전쟁, 오일 쇼크 등)의 폭락, 레이건과 대처 시대의 폭등, 1980년대 후반과 1990년대 초반의 폭락, 그리고 다시 클린턴과 토니 블레어 시대의 폭등, 이후도 계속되는 폭락과 폭등, 다시 폭락... 이 끝없이 이어지는 폭락과 폭등의 순환은 자연스레 시대를 해석하는 음악들의 지루함으로 이어진다. 즉, 음악은 다르지만 옛날에 했던 말을 다시금 반복하고 있다는 느낌이 드는 것이다. 


안타까움은 예술로 까지 경제를 말해야 할까 하는 근본적인 물음에서 비롯된다. 현재 우리의 상황이 그야말로 '다시는 겪지 못할 것 같은 호황'을 뒤로 한 채 '다시는 겪기 싫은 불황'을 몸소 겪고 있지 않은가. 그 어느 때보다 '경제'에 목을 메고 '경제'가 중요해진 시기라는 것이다. 이런 시기에는 어떤 무엇을 가져다 놓든 전부 경제와 연관 시키게 되는 것일까. 책을 덮고 나면 뜻하지 않은 곳에서 진하게 묻어 나오는 안타까움이 있다. 저자의 마지막 말이 그래서 더욱 쓸쓸하게 다가온다. 


"우리가 다시 일어서기 위한 버팀목은 분명 희망과 꿈일 것이다." (본문 중에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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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래된 리뷰] <칠드런 오브 맨>


<칠드런 오브 맨> ⓒUPI


전장에 울려 퍼지는 아이의 울음 소리는 전쟁의 폐해이자 전쟁으로 인한 절망을 상징한다. 전쟁으로 인해 모든 것을 잃고 할 수 있는 게 우는 것 밖에 없는 것이다. 이는 물론 어른에게도 통용되는 말이다. 그런데 영화 <칠드런 오브 맨>에서의 전장에 울려 퍼지는 아이의 울음 소리는, 이와는 완연히 다른 의미를 지닌다. 마지막 남은 단 하나의 '희망'. 아이의 울음 소리를 듣는 순간, 피 튀기는 전장의 모든 소음이 일순간 멈추는 기적을 연출하게 되는 것이다. 


<칠드런 오브 맨>은 어떤 특정한 서사적 줄거리를 갖추지 않은 채 오직 마지막 남은 '희망'인 아이의 구제를 위한 방향으로 따라가기만 한다. 주인공을 포함한 모든 인물들과 영화의 스토리와 심지어 카메라 워킹까지 그 아이에게 시선을 두는 것이다. 이는 감독의 철저한 연출에 기인한 것으로 보인다. 


이 영화의 감독은 '알폰소 쿠아론'이다. <그래비티>로 2014년 아카데미에서 감독상을 포함해 7관왕을 수상한 바 있다. 그가 <그래비티>에서 보여준 연출은 상당 부분 <칠드런 오브 맨>에서 영향을 받은 것으로 보인다. 암울한 상황 설정, 스토리보다 캐릭터에게 초점을 맞추는 설정, 비록 영화는 전체적으로 정적이지만 순간적으로 굉장한 동적 연출을 시행하는 설정, 그리고 '희망'에 모든 것을 거는 설정까지. 그래서 <칠드런 오브 맨>은 알폰소 쿠아론에게도 터닝포인트이자 하나의 희망이기도 했을 것이다. 


<칠드런 오브 맨>의 한 장면. 전장에 울려 퍼지는 희망의 울음 소리. ⓒUPI



특히 감독의 연출력이 빛났던 장면이 있다. 영화 후반부 주인공들이 전투에 말려 들어간 장면이다. 이 씬에서 카메라는 주인공 테오를 따라가면서 '핸드헬드 촬영 기법'(카메라가 기계적 안전 장치에 부착되지 않아 불안정한 상태를 고스란히 전달할 수 있음)을 이용해 찍고 있다. 전투의 한 가운데에 있어 두렵지만 반드시 행해야 하는 바가 있는 주인공의 심리상태를 잘 표현하고 있다. 그러다가 아이가 울자 모든 전투가 멈추고 소음이 멎으며 한 마음으로 아이의 안녕을 바랄 때는 카메라의 워킹이 안정을 찾는 것이다. 이 영화가 말하고자 하는 바를 집약적으로 보여줌과 동시에, 감독의 연출력이 빛났던 장면이다. 


영화의 배경은 2027년 영국 런던이다. 이 세계에는 '희망'이 없다. 인류는 더 이상 아기를 가질 수 없게 되었기 때문이다. 그리고 마지막 남아 있던 18세의 소년이 사망하는 사건이 발생한다. 미래가 존재하지 않는다는 절망은 인류를 재앙과 자멸의 시대로 인도했다. 곳곳에서 테러가 발발하고, 무정부주의자들은 폭력으로 국가를 질책하며, 도처에 불법 이민자들이 넘처난다. 사람들은 평온한 죽음을 맞이 하기 위해 자살약을 섭취하곤 한다. 


<칠드런 오브 맨>의 한 장면. 곳곳에서 테러가 발발하는 재앙과 자멸의 시대. ⓒUPI



이런 와중에 테오(클라이브 오웬 분)는 관료주의자로 허송세월을 보내고 있었다. 어느 날 찾아온 옛 여인 줄리엔을 만나기 전까지는 말이다. 줄리엔은 과격한 무정부주의자로, 런던에서 악명을 떨치고 있었다. 그녀가 테오를 찾아온 이유는, 테오의 고위직 사촌의 힘을 이용해 한 소녀의 여행증을 구해달라는 것이었다. 이에 테오는 여행증을 구해주었는데, 뜻밖의 사실을 알게 된다. 그 소녀가 '임신'을 했다는 사실이었다. 


테오는 이 사실을 알고 '희망'의 안전한 운반을 위해 목숨을 거는 선택을 한다. 그녀가 흑인이든, 불법이민자든 그런 건 더 이상 중요하지 않은 사항이었다. 과 자신과 줄리엔의 아이가 죽어갔던 전력이 있기 때문일까, 아니면 그가 사회운동가 출신이기 때문일까. 둘 다 아닐 것이다. 영화는 테오의 선택이 모든 이들의 바람이자 선택이었다는 걸 보여준다. 


코맥 매카시의 소설 <로드>를 영화화한 존 힐코트 감독의 <더 로드>에서 아버지는 아들에게 말한다. "우리는 불을 운반하는 사람들이야" 하루 아침에 잿더미로 변해버린 세계에서 마지막 남은 (남을 것이라 생각되는) 이들은 마지막 남은 '희망'을 운반하고 있는 것이다. 그리고 결국 아버지는 죽고 아들이 살아남아 '희망'의 운반은 성공한다. <칠드런 오브 맨>은 이와 맥락을 같이 한다. 


그리스 신화를 보면, 제우스가 판도라에게 상자를 선물하며 절대로 열어 보지 말라고 말한다. 이에 판도라는 궁금증을 참지 못하고 상자를 열고 만다. 그곳에서 나온 수많은 끔찍한 재앙들. 그녀는 황급히 상자를 닫는다. 그 때문에 빠져 나오지 못한 것이 하나 있었으니, '희망'이었다. 


혹자는 희망이 있어 절망 속에서도 살아간다고 하고, 혹자는 희망때문에 헛된 기대를 품고 결국 실망으로 귀결된다고 한다. 그런 면에서 이 영화는 전자에 해당된다. 후자는 아예 생각조차 하지 않는다. 그 희망이 나중에 어떻게 발현되는지는 확인할 길이 없다. 영화는 단지 그 과정을 보여줄 뿐이다. 이 지독하게 절망적인 현실을 이겨내기 위해서는 어떻게든 희망이 필요하다는 것이다. 그렇지만 이것이 부정적으로 다가오지 않는다. 영화에서 비춰지는 마지막 희망이 가지는 의미가 너무나도 뚜렷하고 어마어마한 것이기 때문이다. 그건 영화의 제목만 봐도 알 수 있을 것이다. 

'인류의 아이'. 


<칠드런 오브 맨>의 한 장면. 인류의 마지막 희망을 잉태하다. ⓒUPI



"아이를 지켜. 무슨 일이 있던 남들이 뭐라 하던, 아이를 지켜"


한편, 이 영화는 너무나도 현실적으로 다가온다. 2027년이라는 멀지 않은 미래를 그린 것도 그렇지만, 영화의 세계에서 보여지는 면면들은 지금 이미 세계 곳곳에서 일어나고 있다. 테러, 폭력, 불법, 전쟁, 기아, 바이러스 등. 그리고 무엇보다 출산율 저하는 3포 세대(취업, 결혼, 출산 포기)로 일컬어지는 현재의 문제점이기도 하다. 


그렇다면 우리가 지금 할 수 있는 일이란 무엇인가. 이렇게 가다보면 2027년쯤 영화 속 세계처럼 되지 말라는 법이 없지 않은가. 아니, 그렇게 될 가능성이 높다는 걸 누구나 직감하고 있지 않은가. 영화가 말하고자 하는 바 그리고 아마 여러 정답 중 하나는, 공존공생의 길이 아닐까 싶다. 그 방법론까지 논할 수는 없지만, 아이가 그 공존공생의 구심점 역할을 할 수 있을 것이라는 영화의 메시지는 충분한 설득력을 가진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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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나간 책 다시읽기] 코맥 매카시의 소설 <로드>


<로드> ⓒ문학동네

세계 문학계의 주류인 미국 문학과 유럽 문학. 당초 두 문학은 그 뿌리가 같다. 하지만 필자가 읽었던 소설들에게서 느꼈던 바는 사뭇 다르다. 한 마디로 정의를 내릴 수는 없겠지만, 미국 문학은 간결한 가운데 유머가 있고 유럽 문학은 끈덕진 가운데 클래식하다고 말할 수 있을 것 같다.

 

그런 점에서 볼 때, 미국 문학은 날카로운 비판과 함께 조금은 밝은 분위기가 함께 한다고 볼 수 있다. 반면 유럽 문학은 묵직한 주제 위에서 조금은 어두운 분위기가 함께 한다고 볼 수 있을 것이다.

 

그렇다면, 묵직한 주제 위에서 지극히 어두운 분위기가 감도는 미국 문학은 어떤 느낌일까? 거기에 미국 문학의 특징인 간결한 문체가 함께 한다면? 미국 현대문학을 대표하는 작가 중 한 명인 코맥 맥카시의 2006년도 작품 <로드>가 바로 그런 작품이다.

 

허무 위에 새겨진 소멸의 이미지를 그리다

 

문장의 대가 김훈 작가의 <칼의 노래>(문학동네)를 들여다본다. <칼의 노래>의 첫 소절은 이렇다. 우울할 겨를도 없이 허무와 싸웠던 이순신을 그린 <칼의 노래>.

 

“버려진 섬마다 꽃이 피었다. 꽃 피는 숲에 저녁노을이 비치어, 구름처럼 부풀어오른 섬들은 바다에 결박된 사슬을 풀고 어두워지는 수평선 너머로 흘러가는 듯싶었다. 뭍으로 건너온 새들이 저무는 섬으로 돌아갈 때, 물 위에 깔린 노을은 수평선 쪽으로 몰려가서 소멸했다.”

 

이번엔 <로드>의 초반 부분 중 한 소절을 읊어본다. 군더더기 없는 김훈 작가의 문장과 분위기상으로 상당히 비슷한 느낌을 준다. 허무 위에 새겨진 소멸의 이미지. 단 몇 줄로 그 이미지를 이리도 완벽하게 표현해낼 수 있을까 하는 감탄이 든다.

 

“강이 있는 골짜기 건너편에서 길은 완전히 검게 타버린 곳을 통과했다. 가지를 잃은 채 숯이 돼버린 나무줄기들이 사방으로 뻗어 있었다. 길 위에서 재가 움직였다. 검게 변한 전신주에서 뻗어나온 늘어진 손 같은 눈먼 전선들이 바람에 가늘게 훌쩍였다.”(본문 속에서)

 

명백한 죽음의 길을 가는 부자(父子)

 

알 수 없는 대재앙으로 모든 것이 불에 탔고, 재가 하늘을 덮어 하늘을 볼 수 없다. 햇볕이 들지 않는 대지에는 살아있는 생물이 없고, 죽어있는 사물만 있다. 살아남은 이들은 사물을 쟁취하려 서로를 죽이고, 유일하게 살아있는 생물을 잡아먹으려고 서로를 죽인다.

 

아버지와 아들은 그 죽음의 길을 끊임없이 걷고 또 걷는다. 아내이자 엄마는 그 길 끝에 결국 죽음 밖에 없을 거라는 걸 직시하고 자살을 택했다. 그 상황에서는 누구도 욕할 수 없는 현명한 선택이었다. 반면 아버지와 아들은 그 힘든 길을 택한 것이다. 명백한 죽음의 길.


그들은 시종일관 추위와 배고픔에 직면한다. 그에 모자라 살아남은 다른 인간들의 위협에도 직면해 있다. 이 세상 어디를 둘러봐도 나를 도와줄 사람이 없고, 내가 도와줄 사람 또한 없다. 그럼에도 그들이 명백한 죽음의 길을 가며 기어코 살아가는 이유는 무엇일까.

 

죽는 게 두려워서? 그렇지 않다. 소설 속에서 아버지는 언제든 죽을 마음의 준비가 되어 있다. 그건 심지어 아들도 마찬가지이다. 그렇담 산전수전 다 겪은 어른들이 말씀하시는 것처럼, “그냥 사는 거지, 뭐”와 같은 당위론적인 이유일까? 그렇지 않다. 소설은 종말 이후의 세계를 배경으로 하고 있다. 대부분의 사람들이 죽었고, 세계 또한 대부분 파괴되었다. 차원이 다른 어려움과 두려움에 직면하게 되었을 때 어떤 느낌이 들지 알 수 없지만, “그냥”이라는 말을 붙일 수 없을 것이다. 그렇다면 남은 건 하나다. ‘희망’

 

우리는 불을 운반하는 사람들이다

 

이 절망의 한계를 넘어선 세계에서, 그들에게 남은 건, 서로의 존재뿐이다. 아마도 그들은 서로가 아니었으면 벌써 죽고 없었을 것이다. 그렇게 그들은 서로를 의지한 채 순간순간을 견디고 한 발 한 발 내딛는다. 그들의 순간순간이, 한 발 한 발이 기적과도 같아 보인다.

 

“나중은 없다. 지금이 나중이다. 우아하고 아름다운 모든 것들, 너무 우아하고 아름다워 마음에 꼭 간직하고 있는 것들은 고통 속에서 나온 것이기도 하다. 슬픔과 재 속에서의 탄생. 남자는 잠든 소년에게 작은 소리로 말했다. 그래서, 나한테는 네가 있는 거야.”(본문 속에서)

 

그리고 ‘희망’ 어딘가 반드시 ‘정상적인’ 인간이 있을 거라는 희망(종말 이후의 세계에서는 ‘정상’이란 기준이 달라졌을 테지만, 종말 이전의 ‘정상’ 개념으로 상정해서), 그래서 살아남을 수 있을 거라는 헛된 희망, 어떻게든 아들만은 살아남을 수 있을 거라는 아버지의 희망, 그리고 아직 종말 이전의 정상적인 인간의 마음씨(착하고 순수한)를 간직하고 있고 이를 실천할 수 있을 거라는 아들의 희망. 이 희망들로 그들은 길을 가고 있다.

 

“남자는 이제 죽음이 다가왔다고, 남들 눈에 띄지 않고 숨을 수 있는 곳을 찾아야 한다고 생각하기 시작했다. 남자는 소년이 자는 모습을 지켜보고 있다가 걷잡을 수 없이 흐느끼곤 했다. 하지만 죽음 때문이 아니었다. 남자는 무엇 때문인지 잘 몰랐지만, 아마 아름다움이나 선(善) 때문일 거라고 생각했다.”(본문 속에서)

 

그들이 궁극적으로 품었던 희망이자 이 소설이 궁극적으로 말하고자 하는 건 아들의 희망일 것이다. 아버지가 아들의 자는 모습을 볼 때 걷잡을 수 없이 흐느끼곤 했던 이유가 죽음 때문이 아니라 아름다움이나 선(善)때문일 거라고 생각하는 장면을 통해 알 수 있다.

 

아버지는 모든 기력을 동원해 아들만을 보호하려고 다른 무엇도 신경 쓰지 않는다. 아니, 못한다. 반면 아들은 이 묵시록보다 더욱 참혹한 세계에서도 ‘인간’임을 잊지 않았던 것이다. 길 잃은 아이와 노인을 보고 그냥 지나치지 못하고 아버지를 다그쳤던 것이다. 지금 세계에서는 어찌 보면 당연한 생각일지 몰라도, 종말 이후의 세계에서는 너무나도 위험한 생각일 수 있다.

 

하지만 넓게 멀리 생각해보면 아들의 이 생각은 인류에게 남은 마지막 희망일지도 몰랐다. 아버지는 그걸 깨달았을 것이다. 그래서 자신은 죽어가지만 죽음이 두렵지 않았고, 혼자 남게 될 아들을 걱정하지도 않았다. 아들이라면 어떻게든 살아남아 이 세상을 밝힐 수 있을 것이었다. 아버지는 아들에게 말한다.

 

“우리는 불을 운반하는 사람들이다”(본문 속에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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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나간 책 다시읽기] <오늘을 잡아라>나른한 주말 오후 서울 외곽에라도 나가 시원하게 펼쳐진 호밀밭으로 간다. 눈이 행복하고 코가 행복하고 귀가 행복하다. 자연스레 두 팔이 펼쳐진다. 너무나도 행복한 지금이다. 그리고 행복에 겨운 입에서 자연스레 말이 나온다. "카르페 디엠". "지금 살고 있는 현재 이 순간에 충실하라". 지금 이 순간 을 즐기고 싶다. 너무 행복에 겨워 눈물이라도 날 판이다. 

영화 <죽은 시인의 사회>에서 '카르페 디엠(Carpe diem)! 오늘을 즐겨라, 소년들이여. 삶을 비상하게 만들어라'는 말이 나온다. 존 키팅 선생(로빈 윌리엄스 분)이 학생들에게 외친 말이다. 키팅은 학생들이 불안한 미래(대학입시와 직장선택, 직장생활, 결혼생활, 노후 등) 때문에 현실(학창시절)을 즐기지 못하는 것을 보고 현실을 살라고 말하는 것이다. 

학생들은 이를 학교의 전통과 규율에 도전하고 투쟁하는 젊은이의 정신으로도 해석하여, 자신들이 정녕 하고 싶은 일이 무엇인지 어떤 삶을 살고자 하는지에 대한 진지한 성찰을 하기에 이른다. 위의 대사는 2005년 미국 영화 연구소(AFI)가 선정한 미국 영화 역사에서의 100대 명대사 기록에서 95번째 항목으로 선정될 정도로 수많은 사람들에게 영향을 주었다. 

'카르페 디엠'은 사실 로마 시인 호라티우스의 시에 나오는 문장이다. 이 구절은 영어로 번역된 구절인 '현재를 잡아라(Seize the day)로도 잘 알려져 있다. 호라티우스는 미래를 걱정하는 여인에게 시간이 얼마나 덧없는지 설명하면서 이렇게 말을 맺는다. 

Carpe diem, quam minimum credula postero.(현재를 즐겨라. 미래에 최소한의 기대만 걸면서)

이처럼 현재를 살아간다는 것은 너무나도 중요하다. 그리고 실용적이고 합리적이기까지 하다. 그런데 너무 어렵다. 과거에 대한 후회 또는 그리움, 미래에 대한 걱정 또는 기대가 현재를 사려는 나를 가만히 놔두지 않는다. 시종일관 괴롭힌다. 

실패로 점철된 현재를 잡으라고?

<오늘을 잡아라> 표지 ⓒ 민음사

노벨 문학상 수상자 솔 벨로의 1956년 작 <오늘을 잡아라 Seize the day>(민음사)는 호라티우스의 시에서 테마를 가져온 듯하다. 

제목만 보고 바로 구매를 하게 되었다. 어떤 주옥같은 잠언들이 나에게 조금이나마 힘을 줄지 기대하면서. 소설로 '힐링'을 받고 싶었나 보다. 과거와 미래의 내가 보내오는 수많은 부정적 메시지들이 나를 너무 피곤하게 했던 것이다. 

내용은 너무 심플했고, 기대했던 잠언은 매우 짤막했다. 결정적으로 과거에 대한 후회와 미래에 대한 걱정, 현재에 대한 좌절로 완전한 실패를 맛본 주인공은 시종일관 실패자이다. 또한 그에게 사기를 치는 정신과 의사가 그를 달래기 위해 충고하는 사상이 '바로 지금' 철학이다. 

"사람들을 '바로 지금'으로 데려와야 해. 현실 세계로. 현재 이 순간으로 말이야. 과거는 우리에게 아무 소용이 없어. 미래는 불안으로 가득 차 있지. 오직 현재만이 실재하는 거야. '바로 지금'. 오늘을 잡아야 해."(본문 중에서)

심플한 내용은 실패로 가득 차 있고, 짤막한 잠언조차 사기꾼의 철학에서 나온 말들이다. 소설이 끝나기 직전까지 이런 실패와 사기로 점철된 '카르페 디엠' 철학은 계속된다. 곤란하고 막막하다. 희망 없는 현재를 잡으라고 하니 참으로 어이없다. 그래도 끝까지 보고 긍정적으로 해석해본다. 

모든 것으로부터 버림받은 실패자 인생

주인공 '토미 윌헬름'은 직업을 잃고 가족으로부터 버림받았으며, 주지했듯이 과거의 실패만을 곱씹으며 후회하고 미래에 대한 걱정에 대부분에 시간을 할애하며 현실의 지독한 가난과 절망에 어찌할 바를 모르고 호텔을 전전하고 있다. 

나름 부자 아버지를 두었고, 잘 생긴 외모를 가진 그는 자신만이 인지하고 있는 인생의 완전한 실패자이다. 스스로 알고 있듯이 더 이상 손써볼 수 없을 지경이다. 그는 같은 호텔에 기거 중인 아버지를 찾아가 금전적·정신적 도움을 요청하지만 받아들여지지 않는다. 오랜 시간 쌓아온 업보인가 보다. 의사인 아버지의 뒤를 이어 의사가 되라는 아버지의 바람을 어겼던 것이다. 

어린 시절 대학교를 중퇴하고 영화배우가 되려했던 때를 떠올리기도 한다. 잘 생긴 얼굴과 어느 정도의 연기 실력과 끼를 믿고 덤벼들었다가 호되게 깨진 바 있다. 인생의 전환점이자 그의 실패 인생의 화려한 시작을 알린 사건이다.

그는 아내한테도 버림을 받았다. 다름 아닌 바람을 핀 것 때문에. 그 나름대로 이유가 있지만, 씨알도 안 먹힌다. 사실 변명의 여지가 없는 짓이다. 그의 실패 인생에 제일 큰 몫을 차지하고 있다고 봐도 무방하다. 

그는 회사에서도 잘렸다. 화려한 임원으로의 길을 앞에 두고 밀려났다. 사장의 친척이 그 자리에 올랐다. 매우 운이 나쁘다고 밖에 할 말이 없다. 엎친 데 덮친 격이라고나 할까. 

그 앞에 탬킨 박사라고 하는 사람이 나타나 자신에게 전 재산을 맡기라며 투자를 중용한다. 토미는 사기라는 걸 알면서도 의지할 수밖에 없다. 결국 사기꾼 탬킨 박사는 투자받은 돈을 들어 도망가 버리고, 낙동강 오리알 신세가 된 토미는 방황한다. 

인류 전체를 대변하는 문학의 힘

토미의 모습은 나의 모습과 하등 다를 바가 없다. 아니, 어느 누구든 그의 생각과 그의 인생을 공유할 수 있다. 5년 전쯤인가. 외국에서 잠시 머물렀을 때, 우울증 비슷한 걸 겪었었다. 돌이켜 생각해보니, 그 원인은 과거에 대한 후회와 그리움이었다. 외국 생활이라는 인생에 다시 없을 현재를 즐기지 못하고 과거로 도망쳤던 것이다. 그때는 과거에 살았다. 오늘을 잡을 생각 따윈 생각조차 못했다. 

시간이 흘러 다시금 현재를 찾았다. 더 이상 과거를 후회하지도 회상하지도 않았고 과거로 도망치지도 않았다. 그런데 미래가 괴롭혔다. 나이를 한 살 두 살 먹다보니 미래에 대한 불안과 걱정, 그리고 기대가 나를 가득 채웠다. 지금, 그 상태이다. 

더 무서운 건 가끔씩 엄습하는 좌절의 현실이다. 무한 경쟁 시대이기 때문이겠지만, 자꾸만 남과 비교하며 자격지심이 하늘 높은 줄 모르고 솟아오르는 것이다. 오늘을 잡으려 하지만, 실패로 점철된 오늘을 잡고 싶지는 않다. 

토미는 그런 상태에 놓여 있는 것이다. 소설이 끝나갈 때까지 나는 그의 기막힌 인생 스토리와 실패자로 지내고 있는 현재의 모습을 보고, 위로를 받을 수밖에 없었다. 이걸 위로라고 할 수 있다면 말이다. 그런데 이것이 바로 문학의 힘이다. 어느 누가 보아도 공감할 수 있는 스토리. 힐링 따위는 집어 치우고서라도. 힐링보다 더욱 필요한 것은 공감이다. 

공감은 주인공 토미에게만 통용되지 않는다. 다른 인물들의 생각과 행동에도 공감을 불러일으키는 그 무엇이 있다. 내가 토미의 아버지였더라도 토미가 못마땅하고 못미더웠을 것이고, 내가 토미의 아내였더라도 그를 절대 용서하지 않았을 것이다. 심지어 내가 탬킨 박사였더라도 토미를 등쳐 먹으려는 생각을 했을 것이다. 그걸 실행에 옮기는 건 미지수일지라도. 

소설은 마지막에 와서야 희망을 말한다. 토미는 탬킨 박사를 찾으러 밖을 횡행하게 되는 데, 장례 행렬에 휩쓸려 장례식을 목도하게 된다. 그때 토미는 죽은 자의 모습을 보고 주체할 수 없는 눈물을 흘린다. 후회할 과거도 걱정할 미래도 좌절할 현재도 없는 죽은 자에게서 위로를 받았던 것일까. 위로와 공감은 올림이 아니라 내림인 것 같다. 자식의 올림사랑은 불가능할지라도 부모님의 내리사랑은 당연한 것처럼. 

"눈물이 앞을 가려 보이지 않는 윌헬름의 눈에는 꽃과 불빛이 황홀하게 뒤섞였다. 파도 소리 같은 무거운 음악이 귓가에 들려왔다. 눈물이 가져다주는 위대하고 행복한 망각으로 인해 군중들 한가운데에 자신의 몸을 숨기고 있던 그에게 음악 소리가 밀려왔다. 그는 그 음악을 듣고, 흐느낌과 울음에서 헤쳐 나와 그의 가슴이 궁극적으로 요구하는 극치를 향하여, 슬픔보다도 더 깊은 심연으로 빠져들어 갔다."(분문 중에서)

문득 생각나는 한 장면이 있다. 만화 <슬램덩크>의 한 장면이다. 한때 잘 나갔던 정대만이 부상으로 농구계에서 모습을 감추고 삐뚤어져만 가고 있을 때, 옛날의 은사이자 존경하는 안한수 감독이 모습을 드러낸다. 토미처럼 실패자의 인생을 살고 있을 때 나타난 과거의 은사가 나타난 것이다. 과거에 대한 후회로 인한 폭력은 곧 과거에 대한 속죄의 눈물로 바뀌고 그는 그의 가슴이 궁극적으로 요구하는 극치를 향하였다.

토미가 흘리는 눈물은 무엇일까. 과거에 대한 속죄일까. 그의 가슴이 궁극적으로 요구하는 극치는 무엇이고, 슬픔보다도 더 깊은 심연은 어디일까. 일말의 희망일까. 무엇일지 모르지만, 그에게 최소한 밝은 미래가 기다리고 있기를 바란다.


"오마이뉴스" 2013.5.14일자 기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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