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리뷰] <랜드 오브 마인>


제2차 세계대전에 수많은 입장들이 존재한다. 전쟁 전, 중, 후에도 마찬가지. <랜드 오브 마인>은 전쟁 후의 어떤 입장이다. ⓒ싸이더스




영화 <랜드 오브 마인>은 제2차 세계대전을 배경으로 한 만큼, 전쟁영화의 외형을 띠고 있다. 정확히는 전쟁을 반대하는 반전영화겠다. 거기엔 가해자와 피해자가 뒤바뀌는 세상살이의 도식이 존재하지만, 자세히 들여다보면 오직 피해자만 있다는 사실을 깨닫게 되기 때문이다. 피해자만 양산하는 전쟁 따위를 왜 해야 하는가.


수많은 제2차 세계대전 관련 영화가 미국, 영국, 소련의 손에 만들어졌다. 승전국이자, 피해자라 할 수 있는 입장에서 만들어진 것이다. 물론 패전국이자 가해자인 독일, 일본 입장에서도 만들어졌다. 가해를 정당화하거나 반대로 가해 사실을 공표하는 듯한 모습을 보이진 않는다. 일본은 종종 '피해자 코스프레'를 하여 비난 받아왔다. 많은 경우, 진정한 가해자의 손에 피해를 입은 자국민들이나 성숙하기 전에 전쟁에 투입되었던 소년병들을 다루곤 한다.


그렇게, 제2차 세계대전은 수많은 입장들을 대변하는 수많은 콘텐츠를 양산해 왔고 앞으로도 계속 양산할 것이다. <랜드 오브 마인>은 그동안 종종 보아왔던 독일군 소년병 포로들의 이야기를 조심스럽게 다룬다. 그것도 종전 후의 이야기이다. 종전 70년이 지나가는 시기에서, 전쟁 '중'의 이야기가 아니라 전쟁 '후'의 이야기가 나오고 있는 것 같다.


전쟁의 잔해를 제거하는 임무를 맡은 소년들


패전국 나치독일, 그들이 전쟁 중에 남긴 치명적인 잔해들을 소년병들이 목숨 걸고 치운다. ⓒ싸이더스



1939년 9월 독일의 폴란드 침공으로 발발한 제2차 세계대전, 이듬해 4월에는 덴마크와 노르웨이를 침공한다. 덴마크는 즉시 항복, 독일은 덴마크 서해안 전역에 방어선을 구축한다. 연합군의 상륙을 저지하기 위함이었다. 하지만 연합군의 상륙은 프랑스였고, 덴마크 서해안 방어선은 종전 후에도 그대로 남는다.


나치독일이 저지른 전쟁의 잔해, 덴마크는 나치독일 포로들에게 지뢰 제거 임무를 맡긴다. 그 중 상당수가 소년병이었다고 하는데, 영화는 다름 아닌 소년병들의 지뢰 제거 임무를 주로 삼는다. 그 어떤 도구도 사용할 수 없는, 맨손과 막대기 하나에 의존한 지뢰 제거. 그야말로 목숨과 바꾼 임무다.


엄청나게 위험한 작업인 만큼 사전 연습부터 철저해야 한다. 사전 연습도 실전처럼, 연습에서도 죽고, 실전에서도 죽어 나간다. 이 임무를 맡은 덴마크군의 칼 상사는 처음에는 눈도 깜짝하지 않지만, 시간이 갈수록 계속해서 죽어 나갈수록 느낀다. 이 아이들은 전쟁에 투입되어 명백한 죄를 저질렀지만, 지뢰 제거 임무를 맡아야 할 건 최소한 이 아이들은 아니라고.


그렇지만, 그런 생각은 누구한테건 씨알도 안 먹힐 것이다. 그들이 전쟁 중에 저지른 '짓'을 보면 그런 생각을 할 수 있겠는가? 아무리 그들이 성숙하지 못한 상태에서 오로지 명령에 따라 한 행동이었다고 해도 말이다. 그들이 저지른 짓을 합당화 할 수 있는 건 아무것도 없다. 그들의 총탄에 쓰러진 수많은 이들을 생각해서라도.


그런 식의 '방법'과 그런 '방향'은 잘못 되었다


복수를 하는 건 좋다. 승전국이니만큼 어느 정도의 것들은 예상된다. 하지만 명백히 방법과 방향이 틀린 게 존재한다. 이 영화는 그걸 보여준다. ⓒ싸이더스



여기서, 단순히 가해자와 피해자는 없고 그저 고통만 있었다는 식으로 풀어갈 순 없다. 이 나치독일 소년병 포로들이 가해자였다는 걸 부정할 수 없다. 종전 후의 모습만, 그것도 포로가 된 모습만 보여주기 때문에 선량해보일 수 있을지 모르지만, 전쟁 중에 그들이 잔악한 모습을 보이지 않았다고 말 못할 것이다. 미성숙을 앞세워, 잔악한 명령을 그 누구보다 앞서 실행했을지 모를 일이다.


문제는 그들이 아닌 그들에게 말도 안 되는 일을 시킨 이들의 모습이다. 감독이 의도한 것일 수 있겠는데, 종전 후 나치독일 포로들에게 덴마크군이 보이는 행동은 나치독일이 보여준 잔악함 못지 않았다. 그들의 행동은 '방향'과 '방법'이 잘못된 것이었다고 생각한다. 최소한 소년병 포로들에게 그런 일을 시키면 안 되는 것이었고, 아무런 제대로된 도구 없이 굶어 죽을 듯이 일을 시키면 안 되는 것이었다.


범죄에는, 주범이라는 게 존재한다. 주도하고 기획하고 결정하고 명령을 내리고 책임지고 가장 많은 것들을 얻을 수 있는 존재 말이다. 제2차 세계대전의 경우, 종전 후 주범 중 상당수가 스스로 목숨을 끊었고 전쟁 중에 혹은 내분으로 인해 죽었다. 물론 많은 주범들이 사형 당했다. 그렇지만 그 바로 밑의 이들에겐 아마 정치적일 거라 예상되는 이유로 무죄 판결이 내려지기도 했다.


누구는 주범이 아니라는 이유로 무죄 판결을 내려 잘 살아가고, 누구는 종전 후에도 전쟁 중보다 더 죽음에 직면한 작업을 계속해 나가야 하는 게 말이 되느냐고 말하려는 게 아니다. 각각 저지른 짓에 따른 각각의 속죄가 필요할 테니까. 그리고 결정적으로 세상은 불공평하니까. 문제는 그렇게 내려온 죄의 무게를, 왜 가장 '인간'에 가까울 이들이 짊어져야 하느냐는 것이다. '악마' 같은 이들이 해결해야 할 사항이 아닌가. 설사 그들이 짊어져야 한다고 쳐도, 그런 식으로라면 얘기가 되지 않는다. '이에는 이, 눈에는 눈'으로 맞대응하면 똑같이 된다는 건 너무도 당연한 얘기가 아닌가. 더욱이 덴마크는 저항 한 번 하지 않고 곧바로 항복했다.


그들을 인간으로 대해야만, 그들은 뉘우칠 수 있다


마냥 인간적인 차원에서 그들을 인간으로 대해줘야 하는 건 아니다. 그들을 인간으로 대해주어야만, 그들은 스스로를 인간이 아닌 병사라고 생각한다. 그래야만 뉘우칠 수 있다. ⓒ싸이더스



감정적으로 이해는 한다. 누구라도 그 상황이었다면 그렇게 대응했을 것이다. 내 국토와 내 가족를 무참히 짓밟은 이들. 대상의 구체적 물상을 들여다볼 필요도 없이 대상이 속해 있는 집단의 악마성에 분노를 터뜨릴 수밖에 없을 것이다. 그게 인간이니까. 그렇지만 그 시간이 지나고 들여다볼 수 있는 상황이 되었을 때, 보여야 한다. 용서할 순 없더라도 인정은 해야 한다는 걸. 그들도 우리와 같은 인간이라는 걸 말이다.


영화는 인간을 보여주려 애쓴다. 아니, 애쓸 필요도 없다. 인간이라 할 수 없는 나치독일이 남긴 잔해를 인간들이 처리하고 있는 것과 다름 없다. 아름다운 해안을 뒤로 하고 무참하게 죽어가는 건 광포에 휩싸인 병사들이 아닌 두려움과 배고픔에 벌벌 떨고 집으로 돌아가고 싶어 하는 인간들 뿐이다. 그들을 그렇게 대하는 순간, 과거는 사라지고 없는 것이다.


만약 그들을 포로답게 대했다면 오히려 그들을 인간이 아닌 병사로 생각했을 듯하다. 이런 비인간적인 처사를 통해 그들의 인간성을 발현시키지 않았다면, 그들은 자신의 잘못을 계속해서 떠올렸을 것이다. 잘못을 뉘우치던가 계속해서 광기에 휩싸였던가 하는 건 그 이후의 일이겠다. 그것이 오히려 '이쪽'을 위한 길이 아니었을까, 싶다.


매우 힘든 일이었겠지만 이성적으로 대처했다면 방향과 방법을 달리했을 것이고, 그들은 자신의 죄 이상으로 지독했던 전쟁 이후의 기억이 아닌 자신이 저지른 죄를 생각하며 살아갔을 테다. 그들을 병사가 아닌 인간으로 인정하고 인간으로 대할 수밖에 없게 한 파렴치한 짓은 정말 바보 같았다.


피해자가 가해자가 되고 가해자가 피해자가 되는 도식을 넘어, 미성숙한 이들에게 저지른 잔혹한 행위의 부당위성을 넘어, 그들도 인간이라는 점을 인정해야 한다는 점까지 넘어, 즉 선악의 개념을 넘어 그들에게 행한 행위의 무뇌아적 지점을 지적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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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래된 리뷰] <한공주>


압도적일 게 없을 것 같은 연출로 그 어느 영화보다 압도적인 힘을 보여주었다. 영화가 갖는 소재도 소재이지만, 그 소재를 어떻게 쓰느냐에 따라 달라질 것이다. ⓒ무비꼴라주



"전 잘못한 게 없는데요."


어른들에게 둘러싸인 한 소녀, 꾹꾹 눌러왔던 말 한마디를 애써 웃음 띤 얼굴로 내뱉는다. 그런데 이내 그녀는 선생님과 전학 수속을 밟으러 다른 학교를 찾는다. 잘못한 게 없다는 그녀가 떠나는 것이다. 명백한 모순이 아닌가, 이 상황은. 무서워서 피하는 건가, 더러워서 피하는 건가. 아직까진 알 수 없다. 그녀의 앞날을 지켜보는 수밖에. 


그녀의 이름은 '한공주', 하필 공주다. 그녀의 시련은 전 인생에 걸쳐 있다. 부모님은 이혼해서 엄마는 다른 이와 살림을 차렸고 아빠는 일 때문에 몇 달에 한 번 볼까 말까이다. 그래도 알바와 학업을 병행하며 씩씩하게 살아가는 그녀, 편의점 사장 아들, 딸과 친하게 지내며 의지도 되어준다. 이겨낼 수 있을 정도의 시련이다. 


알 수 없는 이유로 전학을 가게 된 공주, 분위기가 전과는 완연히 다르다. 뭔가 얼이 빠진 느낌이랄까. 그녀에게 남은 건 오직 음악뿐인 듯하다. 음악 덕분에 친구도 생긴다 또 수영을 배우는 그녀, 이유가 살고 싶어질 때를 대비해서란다. 뭔가 그 사이에 크나큰 일이 있었던 것 같다. 전 학교 담임 선생님 집에서 선생님의 엄마와 지내게 된 공주, 운영하는 마트 일도 도와주며 호감을 얻는다. '다시 시작'할 수 있을 것 같다는 실날 같은 희망을 자신도 모르게 품게 된 공주, 하지만 학교로 찾아온 어른들로부터 도망치는데... 이제 어디로 가야 할까. 왜 도망쳐야 할까. 무슨 일이 있었던 것일까. 


피해자가 도망치는 현실, 이게 현실이다


왜 공주가 도망쳐야 할까, 왜 피해자인 공주가 도망쳐야 하는 것일까, 왜 급기야 공주가 가해자처럼 되어버린 것일까. 우리 모두의 책임이다. ⓒ무비꼴라주


지난 2014년 4월 17일, 세월호가 침몰된 지 하루 뒤에 개봉한 영화 <한공주>는 국민적인 공분을 사며 뛰어난 연출과 연기에 힘입어 흥행과 비평에 성공했다. 독립영화의 영역을 뛰어넘은 것이다. 개인적으로 이 작품을 당시 보지 못한 건, 대략의 내용을 알고서 도저히 볼 용기가 나지 않았던 탓이었다. 또한 그동안 생각해왔던 가해자와 피해자의 뒤바뀐 양상을 또 다른 시각으로 완벽하게 보여준 탓이겠다. 


영화는 가해자가 될 수밖에 없는 피해자의 어쩔 수 없는 상황을 보여주었던 기존의 독립영화론에 일종의 반기를 든다. 그동안 피해자는 세상으로부터 사회로부터 개인으로부터 받은 끔찍한 피해를 '가해자'가 되어 되돌려주려 했다. 아니, 그렇게 할 수밖에 없었다. 다른 방도를 찾을 수 없는, 끊임없이 되풀이 되는 폭력의 뫼비우스 띠. 


이 영화는 어떤가. 공주가 당한 건 끔찍하다 못해 악마적인 행위. 입으로도 손으로도 언급하기 역겨운 43명에 의한 집단 성폭행. 피해자 공주는 어떤가. 홀로 강하게 큰 그녀이지만, 한없이 약한 그녀이기도 하다. 그녀는 가해자가 되기는커녕 도망 치는 것 말고는 할 수 있는 게 아무것도 없다. 


또 다른 가해자들인 가해자들의 부모, 자기 아들 삶을 망가뜨리지 말라는 협박과 호소와 부탁 때문이다. 차라리 공주가 가해자가 되어 그 악마들에게 평생 씻을 수 없는 무엇을 남길 수 있다면, 그러면 내 마음이 덜 아플 것 같다. 하지만 알고 보니 그건 현실에서 불가능한 일이었던 것, 현실은 이렇다. 


끔찍한 와중에 다가오는 포근하고 아련한 감성


그 와중에 포근하고 아련한 감성을 선보인다는 건 거의 믿을 수가 없을 지경이다. 아... 공주가 가엽다. 공주가 하고 싶은 음악을 할 수 있게 도와주고 싶어진다. ⓒ무비꼴라주


이 영화가 대단한 이유는 비단 이것 뿐이 아니다. 마음이 뒤틀리는 공주의 상황을 알게 됨에도 불구하고, 순간순간 지극히 감성적으로 될 수 있다는 데 있다. 그건 공주가 진정 하고 싶었지만 이제 다시는 할 수 없는 '음악'에서 기인된다. 공주가 음악과 함께 일 때 느껴지는 감성은 한없이 포근하고 아련하다. 


이 감성은 <파수꾼>에서 기태가 함께이고 싶었지만 다시는 그럴 수 없는 친구들과의 즐거운 시간, <해에게서 소년에게>에서 시완이 계속되길 원했지만 다시는 그럴 수 없게 된 가족들, <성실한 나라의 앨리스>에서 수남이 열심히 일해서 장만하고 싶었지만 결국 빛으로 사게 된 집과 궤를 같이 한다. 


그렇지만 <한공주>에서 공주가 보여주는 감성은 타의 추종을 불허하는 바, 그녀가 당한 짓이 그만큼 강렬하다는 반증일 것이다. 극은 극으로밖에 해결하지 못한다는 걸 말하고자 하는 걸까. 영화를 다 보고 난 후엔 아이러니 하게도 공주의 괴로운 모습이 아니라 즐거운 모습이 뇌리에 남는다. 


우린 공주를 온전히 받아들일 수 있을까. 공주의 괴로움을 뒤로 하고 즐거움을 취하면서. 아무렇지도 않게, 대수롭지도 않게. 그러면서 그녀 안에 영원히 없어지지 않을 괴로움을 조금씩 치료해주면서 말이다. 아마 결코 쉽지 않을 것이다. 공주가 전학 간 학교에서 큰 관심을 보이는 은희도 결국 온전히 받아들이지 못하지 않았는가. 이게 현실이라는 말을 다시금 하게 된다. 


'혼자'라는 사실보다 더 잔혹하고 가혹한 게 있을까


공주의 모든 걸 알고 온전히 그녀를 받아들일 수 있는 사람은, 적어도 영화에선 아무도 없었던 것 같다. 그 아픔이 너무도 큰 탓에 나도 휩쓸릴 것 같기 때문일 테다. 그렇지만 현실은... 현실도 마찬가지일 터. 과연 나는? ⓒ무비꼴라주


이 영화가 보여주는 현실은, 생각해보고 들여다보면 너무나도 잔혹하고 가혹하다. 백도 없고 집도 없고 부모님도 없고 친구도 없는 어린 여고생이 할 수 있는 게 무언가. 뭐라도 해서 희망의 불씨가 있다는 걸 보여주어야 하지 않겠나, 싶은 게 개인적인 바람이다. 하지만 그건 공염불에 불과하지 않나. 실상은 이런데.


단도직입적으로 말해, 그녀에게는 그녀의 아픔을 가슴 절절히 공감하고 외치고 기억해줄 이가 아무도 없다. 누군가는 다수의 가해자가 한 목소리로 외치는 '개소리'를 듣고 가해자를 옹호하고, 누군가는 가해자와 피해자 사이에서 갈피를 잡지 못하며, 누군가는 한순간의 망설임으로 그녀를 떠나보낸다. 그녀는 혼자다. 


많고 많은 사람이 사는 이 크나는 세상에 '혼자'라는 사실보다 더 잔혹하고 가혹한 게 있을까. 더욱이 잘못한 게 없는데, 오히려 피해를 당했는데, 누군가에게는 가해자로 인식되기까지 하다니. 숨이 턱턱 막히고 알 수 없는 소름이 덮친다. 가만히 있기가 힘들다. 세상이 어떻게 이럴 수 있을까, 하고 생각하는 것도 귀찮다. 그저 사라지고 싶다.


그런데, 공주는 수영을 배운다. 다시 살고 싶을까봐, 다시 시작하고 싶을까봐. 그러면 너무 억울하니까. 그녀는 알고 있는 것이다. 언젠가 마지막을 선택하게 될 거라는 걸. 그때를 대비해 수영을 배운 것이다. 이건 치를 떨지 않을 수 없다. 눈물을 흘리지 않을 수 없다. 무너져 내리지 않을 수 없다. 


이 영화를 보고 결심한 게 있다. 받아들이겠다고 말이다. 타의에 의해 세상으로부터 버려져 혼자가 된 이들을 받아들일 것이다. 정녕 어려운 일이다. 그래도 누군가는 해야 한다. 다름 아닌 내가 하고 싶다. 이 영화 <한공주>를 보고 난 후부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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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서평] <조국과 민족>


<조국과 민족-상> 표지 ⓒ비아북



아직도 한 단어도 틀리지 않고 외울 수 있다. 국기에 대한 맹세다. "나는 자랑스런 태극기 앞에 조국과 민족의 무궁한 영광을 위하여 몸과 마음을 바쳐 충성을 다할 것은 굳게 다짐합니다." 2007년에 수정되었다고 하는데, 여하튼 고등학교 때까지 아침 조례 시간이면 빠짐 없이 행하던 그 맹세. 군인이었을 땐 국기 게양 음악이 나오면 언제 어디서 무얼 하든 동작을 멈추고 그곳을 향해 몸을 돌려 엄숙한 자세로 경례를 하였다. 지금도 그 음악이 어디선가 들리면 그냥 지나치지 못한다. 조국과 민족을 향한 몸에 봰 동작이자 감성이다. 


그땐 알지 못했고 알고 싶지도 않았다. 내가 무얼 하고 있는지, 왜 그래야 하는지, 내가 충성을 다짐한 '조국과 민족'이 무엇인지. 깨우쳐서 알게 된 건 아니라서 '알았다'는 말이 정확한 수사인지는 모르겠지만, 하나는 알았다. '나라를 사랑해야 한다' 나아가 '(나는) 나라를 사랑한다' 나라를 사랑하는 건 너무나 당연한 것이고, 나라를 위해서 무엇이든 해야 한다는 생각도 당연했다. 학생이 공부를 열심히 하는 건 학생의 본분, 학생의 본분을 다하는 건, 나라를 위해 학생이 할 수 있는 최선. 


머리가 크니 조국과 민족이 국가를 위해 본분을 다하는 국민을 지켜주지 못한다고 느끼기 시작했다. 지켜주기는커녕 국민이 낸 혈세로 개인의 잇속을 챙기질 않나, 국민 대다수가 반대하는 사업을 역사에 길이남을 만한 돈을 쓰며 밀어부치지 않나, 급기야 국민 몰래 나라를 통째로 넘기려들지 않나... 국가라는 게 무엇인지, 국가는 국민을 위해 존재하는 게 아닌지. 국가라는 이름 하에 거행되는 짓거리가 한심하고 어이없고 무섭기까지 하다. 그런 짓거리는 불과 30여 년 전까지만 해도 드러내 놓고 거행되었다. 


<조국과 민족-하> 표지 ⓒ비아북


국가라는 이름 하에 거행된 '조국과 민족'을 위한 짓거리의 가해자


만화 <조국과 민족>(비아북)은 국가라는 이름 하에 거행된, '조국과 민족'을 위한 짓거리를 색다른 시각으로 조명했다. 바로 '가해자'의 입장에서, '가해자'가 주인공이 되어, 서술된 이야기이다. 자칫 감화될까봐 알고 싶지 않았고, 차마 그 짓거리들을 두고 볼 수 없어서 알 수 없었다. 그렇지만 궁금한 건 사실. 왜 그들은 그러했을까, 어째서 그들은 그런 생각과 행동을 했을까. 누구를 위해서? 무엇을 위해서?


때는 1987년. 안기부로 유추되는 정보기관에서 고문기술자로 명성을 떨치는 젊은 청년 박도훈, 그는 장실장의 인도 하에 조국과 민족의 영광을 위해 바쁜 나날을 보내고 있다. 불행하고 특이한 어린 시절을 장실장 덕분에 잘 보내왔다고 믿는 도훈은, 장실장이 멘토이자 롤모델이다. 도훈은 일본과 금괴 밀수를 추진하다가 고정간첩 '광명산'의 마약 밀수를 돕게 된다. 그리고는 어쩔 수 없이 이중간첩 아닌 이중간첩이 된다. 하지만 장실장과 가깝게 지내는 이중고정간첩 '량강 1호'의 첩보로 광명산이 잡히게 되고 도훈은 위기에 처한다. 도훈의 앞날은?


도훈과 함께 일하는 김대한은 수단 방법을 가리지 않고 굴지의 건설사 회장 자리에 오른 김판구의 아들이다. 그는 '빨갱이'를 잡아 족치며 여기까지 왔다는 자부심이 대단한대, 대한은 다름 아닌 그가 조총련계와 연결되어 있다는 첩보를 입수한다. '조국과 민족'에 대한 대단한 신념을 지닌 대한은 아버지임에도 불구하고, 김판구를 나락으로 떨어뜨리려 한다. 그러는 한편, 장실장의 명령을 받아 홍콩에서 한 남자가 아내를 죽인 사건을 파헤친다. 그런데 그 사건을 간첩의 짓으로 둔갑시키라는, 말도 안 되는 명령이 이어진다. 대한은 어떤 선택을 할까? 


만화는 여러 실제 사건과 인물을 참조한 것 같다. '악의 축' 장실장은 장세동을, '고문기술자' 박도훈은 이근안을, 홍콩간첩조작사건은 '수지킴간첩조작사건'을 참조했다. 이밖에도 당시 전두환 정권 하에서 벌어진 기상천외하고 황당무계하고 무시무시한 조작 사건들을 다뤘다. 저자가 만든 이야기에 실제에서 빌린 인물과 사건을 곳곳에 배치하니 멋진 첩보물이 탄생했다. 기시감을 줄이고 생생함을 더했다. 


'보통 사람'의 조국과 민족을 위한 진심


작가는 만화를 통해서 말한다. 이 가해자들이 조국을 위해서, 민족을 위해서 그러했다고 말이다. 말도 되지 않는 헛소리를 짓거리고 있다고 생각되는데, 그게 이 작품의 노림수인 것 같다. 여기서 더욱 무서운 건 뭐냐고? 그들은 지극히 평범한 '보통 사람'이라는 것. 특수하게 길러졌거나 훈련받은 게 아니다. 또한 그들은 지극히 정상적인 사고 체계를 통해 '진심으로' 조국과 민족을 생각했다는 것. 마약을 상시 복용해서 정신이 돌아버렸거나 애초에 이상이 있는 바보라서 그런 게 아니다. 


만화를 보며 그림체, 말투, 배경 등 모든 면에서 느낄 수 있다. 적어도 실무자들은 그들이 행하는 끔찍한 일을 그저 '일'로 받아들이고 있다는 것을. 그런 생각을 한다는 것에서 영화 <박하사탕>을 보고 받은 충격을 다시 한 번 받았고, 그 눈쌀 지뿌려지고 가슴이 오므라들게 하는 잔인함은 영화 <남영동 1985>와 <변호인>을 생각나게 했다. 그들 모두는 '조국과 민족'을 위해 일했다. '일했다고 믿었다' 라고 말하고 싶지만, '일했다'고 하는 게 가해자의 진심이다. 


이쯤 되면 혼란이 찾아오지 않을 수 없다. 방법이 잔인했을 뿐 진심으로 조국과 민족을 위해 일을 했다는 그들, 그들도 또 다른 피해자가 아닌가 라는 생각이 들지 않을 수 없는 거다. 더군다나 평범하다 못해 귀엽기까지(?)한 그들의 모습을 보고 있노라면, 더 이상 잔인하지도 끔찍하지도 않게 느껴질 때가 온다. 장난처럼 느껴지는 거다. 


작가는 왜 그런 그림체로 가해자의 입장에서 한국 현대사의 가장 어두운 그림자를 그려냈을까. 아이히만으로 상징되는 한나 아렌트의 '악의 평범성'을 떠올리게 하려는 의도일까. 홀로코스트가 광신도나 반사회적 성격장애자가 아닌 상부의 명령에 순응한 지극히 평범한 사람들에 의해 자행되었음을 말하는 개념이다. 유대인 말살을 저지른 아이히만은 그저 자신의 직무를 성실히 수행한 것에 불과하다는 것. 여기에 <조국과 민족>의 주인공 가해자들은 나라를 사랑하고 나라에 충성하는 진심이 얹혀 있다. 


'악의 평범성'과 차원을 달리하는, 계속되는 반인륜적인 짓


이슬람의 꾸란에서 최초로 시작되었다는 '고의적인 살인'과 '고의적이지 않은 살인'의 구분. 고의적인 살인에는 사형을 내렸고, 그렇지 않은 살인에는 벌금을 물었다고 한다. 그렇다면 조국과 민족을 위해서든 지시에 충실히 따르든 그들이 저지른 반인륜적인 짓거리는 고의일까 고의적이지 않은 걸까. 자기의 행위에 의하여 일정한 결과가 생길 것을 인식하면서 그 행위를 하는 짓임이 분명하기에 '고의'라고 하겠다. 직무를 성실히 수행하는 것과는 별개로 그 행동이 나라에 충성하는 거라고 믿었기 때문이다. 


그런 면에서 <조국과 민족>이 내포하고 있는 바는, 말하고자 하는 바는 무시무시하다. '악의 평범성'과는 차원을 달리한다. 거기에는 상명하복에서 오는 복종과 갈등 없는 기술적 임무만이 존재해 틀이 깨지면 일순간에 무너진다. 하지만 여기에는 자신도 어쩔 수 없는 맹목적 사랑과 충성이 도사리고 있기에, 틀이 깨져도 무너지지 않는 것이다. 아주 오래도록 암약하며 다른 형태로 계속된다. 


우리나라가 수십 년이 지나도 바뀌지 않은 것처럼 느껴지는 이유 중 하나가 거기에 있지 않을까, 싶다. '고문도 예술'이라는 망언 중에 망언도 서슴지 않았던 고문기술자 이근안이 하나의 사례가 될 텐데, 그는 김근태 의원을 고문하고 납북어부 김성학 씨를 감금한 혐의로 지명수배된 후 10여 년의 도피생활 끝에 자수해 감옥살이를 하는 도중 목사 안수를 받기도 했다. 2011년 말에 김근태 의원이 사망하고는 2012년 2월에 책을 펴냈는데, '그 당시에는 애국으로 한 일. 그때로 돌아간다 하더라도 똑같을 것이다'라며 사죄를 회피했다. 또한 '정치형태가 바뀌니 역적이 됐다. 멍에를 내가 지고 가고 있다'며 변명하기도 했다. 이 행태를 어떻게 설명할 수 있을까. 


이근안을 '시대가 만들어낸 괴물'이라고 표현하는 이들도 있다고 한다. 참으로 가져다 붙이기 쉬운 수식어다. 누구라도 어느 정도 납득이 가게 만드는 수사이기 때문이다. 그런데, 그는 국가의 명을 받는 사람임과 동시에 국가가 무엇을 원하는지 예측하고 행동하기도 하는 바 누군가에게는 국가 그 자체로 비치기도 할 것이다. 


조국과 민족을 사랑하는 진심어린 마음에서 충성과 애국심으로 똘똘 뭉쳤다고 해서, 그렇게 저지른 반인륜적인 짓을 용서해야 할까. 용서할 수 있을까. 그땐 그럴 수밖에 없었다고, 그땐 다른 무엇도 아닌 바로 그것이 애국의 길이었다고 말이다. 그에게도 그들에게도 만화에 나오는 것처럼 분명 어떤 사연이 있을 거다. 하지만 분명한 건, 그들도 인지하고 있었다는 것이다. '애국'이지만 '나쁜 짓', 조국과 민족이라는 대의를 위해선 소수의 희생이 필요하다는 당위 또는 자기 합리화. 그 시대를 다시 돌아봐야 한다. 더 다양한 시각으로, 더 깊이 있게, 더 활발하게. <조국과 민족>은 이 세 층위를 고루 만족시킨 수작이라 하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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冊으로 策하다. 책으로 일을 꾸미거나 꾀하다. 책으로 세상을 바꿔 보겠습니다. singenv@naver.com Since 2013.4.16




[지나간 책 다시읽기] 최고의 데뷔작 <13계단>


최고의 데뷔작 <13계단> 표지 ⓒ황금가지



우리나라는 1997년 이후 사형 집행을 하지 않아 '실질적 사형제도 폐지' 국가이다. 하지만 여전히 사형 판결은 내려지고 있는 바, 유형철, 강호순, 조두순, 김길태 등 최악의 흉악 범죄가 벌어질 때마다 사형 제도 존폐 논쟁이 뜨겁게 달아오르기 때문이다. 첨예한 대립 속에서 집행을 하지도 폐지를 하지도 못하는 것이다. 그래서 판결은 내리고 집행을 하지 않는 양상이 20년 동안 계속되어 왔다. 


그 와중에 가까운 나라 중국은 물론이거니와 일본도 사형을 집행하고 있다. 2012년 아베의 재집권 이후 17명의 사형수에게 사형 집행을 내렸다. 당연히 첨예한 논란과 대립이 있지만, 피해자 측의 손을 들어주면서 가해자의 인권보다 사회 정의 발현 목소리에 초점을 맞춘 것이겠다. 


개인적으로 사형 집행을 찬성하는 바, 여기서 또 다른 문제가 발생한다. 아무리 살인 이상의 흉악 범죄를 저지른 '인간 이하'의 목숨을 앗아가는 일이로서니, 누가 그 일을 할 수 있을 것인가. 누가 사형 판결이 아닌 '사형 집행' 명령을 내릴 수 있을 것인가. 돌이킬 수 없는 '집행'(또는 판결)을 한 후에 누명인 게 밝혀지면 누가 어떻게 책임질 수 있을 것인가. 고의가 아닌 살인은 어떻게 할 것인가. 살인을 저지르고는 회개하고 뉘우치며 피해자와 유족에게 진심어린 사죄를 하는 경우엔? 유족이 받아들인다면?


사형 제도를 둘러싼 첨예한 대립과 논란을 소설적 재미로


일본의 유명 추리 소설가 다카노 가즈아키의 최고의 데뷔작이자 문제작 <13계단>은 사형 제도를 둘러싼 첨예한 논쟁 속에서 펼쳐지는 기가 막힌 이야기를 담았다. 그 이야기에는 가해자와 피해자, 유족은 물론이거니와, 사형 집행 실행자, 그리고 사형 집행 명령 절차가 출현한다. 무엇보다 그 중심에는 다양한 유형의 가해자, 즉 사형수가 있다. 고의에 의한 흉악 살인, 합당한(?) 이유에 의한 살인, 미심쩍은 살인, 정당방위 살인, 살인 누명 등이다. '사형 집행'이 필요하되, 반드시 철저한 규명이 선행되어야 한다는 생각이 들게 한다. 


한편 소설 자체는 극강의 재미를 선사한다. 첨예한 대립과 논란이 될 만한 요소를 가져와 소설적 재미를 극대화시키는 데 쓰이게 한다. 주요 인물들의 면면을 살펴보는 것과 그들이 행하는 바를 들여다보는 것으로도 충분하다. <13계단>은 이런저런 생각을 할 겨를도 없이 사형 집행을 기다리는 사형수의 피말리는 모습을 그리며 시작된다. 멀리서부터 들려오는 간수의 발자국 소리, 그 저승사자가 멈추는 그곳에 헤아리기 힘든 죽음의 공포가 스며드는 것이다. 이 짧은 프롤로그로 독자는 이미 소설 속으로 빨려들어갔다. 다른 이의 목숨을 앗아간 이들이 느끼는 죽음의 공포를 통해 '죽음'이란 무엇인지 '사형'이란 무엇인지 뼈져리게 느끼게 되는 것이다. 


이어 두 명의 주인공이 등장한다. 한 명은 교도관 난고. 오랫동안 이어온 교도관 생활을 청산하고 가족과 재회해 제2의 인생을 꿈꾸고 있다. 그러기 위해선 거금이 필요한대 우연히도 때마침 의뢰가 들어온다. 사건 당시 교통사고로 기억상실증에 걸린 사형수 사카키바라 료의 무죄를 입증하라는 것. 몇몇 석연치 않은 점들과 그가 교통사고로 기억상실증에 걸렸다는 점, 그리고 최근 우연히 돌아온 기억 속의 '계단'이 전부다. 


다른 한 명의 주인공은 전과자 준이치. 다툼 도중에 상대방을 죽이게 해 상해 치사죄로 2년을 복역하다 얼마 전에 출소했다. 그는 부모님이 엄청난 거금을 피해자 유족에게 지불해 어려움에 처한 걸 알고는, 난고의 제의를 받아들인다. 거금을 받으며 난고가 하려는 일을 도우라는 것. 료의 무죄를 입증하고 진범을 찾아내 바로 그를 사형에 처하게 만드는 게 목표였다. 하지만 남은 시간은 3개월 남짓. 그 이후엔 료의 사형 집행이 거의 확실시된다. 그러면 아무 소용이 없지 않은가. 


속출하는 다양한 유형의 피해자들


기억을 잃은, 즉 자신이 살인을 저질렀는지 알 수조차 없는 이가 사형 판결을 받아 사형 집행을 앞두고 있다. 당연히 그에게서는 잘못을 뉘우칠 기미가 보이지 않으니, 사형 집행은 기정사실화되어 있는 거나 다름 없다. 사형 제도의 첨예한 논쟁 속에서, 또 다른 논쟁을 불러일으킬 만한 게 여기에 있는 것이다. 그는 그렇게 죽어도 괜찮은가. 


최근 '삼례3인조' 사건의 사법피해자들의 무죄가 확정되었다. 17년 만에 누명을 벗은 것이다. 그에 이어 '약촌오거리 택시기사 살인사건'이 재심에서 무죄가 확정되었고, 진범으로 추정되는 이가 잡혔다. 16년 만에 누명을 벗은 것이다. 소설 속에서 사형수 료는 7년 째 복역 중이며 사형 집행이 코앞으로 다가온 상황이었다. 이야기의 정황 상 그의 무죄가 드러날 텐데, 그 억울함은 누가 보상해줄 수 있을 것인가. 


그렇지만 그 무죄가 드러나기 전까지, 그 억울함과는 별개로 피해자 유족의 억울함은 어떠한가. 가해자가 사형을 당한다 해도 피해당사자가 살아돌아오지 못한다. 평생 지옥같은 나날을 보내야 하는 것이다. 그들에겐 그나마 가해자의 사형이 유일한 안식일지 모른다. 어느 누가 그들을 욕하랴? 어느 모로 보나 가해자는 죽어 마땅하다. 


그 와중에 또 다른 피해자가 존재한다. '사형'은 국가의 입장에서 보면 사회 정의를 실현하는 행태의 하나지만, 사형을 집행하는 한 개인의 입장에서 보면 '살인'에 다를 바 없다고 생각할 테다. 누군가는 손으로 직접 행해야 하는. 그야말로 가해자 아닌 가해자, 피해자 아닌 피해자로서, 경계에 서서 괴로워할 수밖에 없는 운명이다. 비록 자신이 하고 싶어서 한 일이지만, 누가 그 마음을 헤아려 줄 수 있을 것인가. 


피해자는 속출한다. 실질적으로 가해를 행한 이들 중에도 피해자가 있다. 아니, 있다고 확정적으로 말할 순 없고 있을 거라 생각한다. 누명을 쓴 이들은 제쳐두고, 비록 살인을 저질렀지만 그 이유가 합당하다고(?) 생각되는 경우다. 이 또한 첨예한 논쟁을 불러일으킬 수 있는 요소가 다분한대, 생각해볼 여지는 있다. 그렇지만 아마 직접적으로 의견을 입 밖에 내진 못할 것이다. 그래서 영화나 소설 속에 등장하는 것이리라. 


무엇보다 공분을 살 '사형 집행 절차'의 황당함


<13계단>에서 무엇보다 공분을 살 내용은 '사형 집행 절차'에 있다. 황당하기 짝이 없는 절차. 곳곳에서 드러나는데, 열거하는 것만으로도 이 소설이 말하고자 하는 메시지를 여실히 알 수 있을 것이다. 사형 제도 찬반 논쟁은 여기서 큰 의미를 지니지 않는다. 거대하고 그칠 줄 모르는 그 논쟁 속에 존재하는 실질적이고 문제 많고 가려진 문제들이 훨씬 더 많다. 그리고 더 중요할 수 있다. 


"160번은 법이 지켜야 할 이익, 법익을 침해했기에 처형당한다. 난고는 유족의 편지를 다시 읽었다. 이 여성은 가족을 모두 살해당하고도 피고인의 사형을 원치 않는다. 내일의 처형은 누구를 위해 진행되는가. 피해자 유족의 의지와는 달리 범죄자에게 절대 응보를 과하는 것은 더 더욱 범죄 피해자에게 상처를 입히는 행위가 아닐까." (본문 186~187쪽 중에서)


"난고는 휴, 하고 한숨을 내쉬었다. 그리고 얄궃은 미소를 띠었다. 같은 해에 체포된 사키카바라 료가 이미 사형 집행을 기다리는 상황에서 이 오하라는 아직 확정도 되지 않았다. 이는 일본의 재판 제도가 지닌 문제였다. 사형에 해당하는 사건을 범한 경우, 한 명이라도 많은 사람을 죽인 쪽이 심의 과정이 지체되면서 오래 살 수 있다." (본문 215~216쪽 중에서)


"역대 법무 장관 중에는 자신이 믿는 종교를 방패 삼아 사형 집행 명령을 거부한 장관이 있었다. 또한 이유를 명언하지 않더라도 명령서에 서명하지 않은 장관도 몇이나 있다. 그러한 행동은 사형 제도 반대론자들에게는 환영받을지 몰라도 명확한 직무 유기였다. 집행 명령이 법률에 장관의 직무로 규정된 이상, 그게 싫으면 장관 취임을 거절해야 마땅하다. 법을 무시해 가면서까지 하기 싫은 일은 하지 않고 권력의 자리에만 앉으려 하는 것은 법무 당무에 있는 자로서 납득할 수 없다." (본문 240쪽 중에서)


"누가 이것을 보상해 줄까요. 민사 재판이 성사되었더라도, 위자료라는 이름의 푼돈으로 유리의 마음을 다시 사 들일 수는 없습니다. 육체의 상처에만 상해죄가 적용되고, 망가진 사람의 마음은 방치되는 것입니다. 법률은 옳습니까? 진정 평등합니까? 나쁜 인간은 범한 죄에 걸맞게 올바르게 심판받고 있는 것입니까?" (본문 367쪽 중에서)


추리소설과 사회파 소설의 조합 그 이상


<13계단>은 추리 소설다운 서스펜스와 사회파 소설이 가지는 문제제기가 굉장히 훌륭하게 버무러져 있는 소설이다. 거기에 군더더기 없는 문체와 영화를 보는 듯한 전개, 그리고 정녕 관련 논문 이상 가는 정보와 이론과 주장과 실제는 환상적이라 할 만하다. 사형 제도와 관련해 어느 한 쪽으로 치우치지 않는 균형의 서술 또한 이 소설이 단순한 추리 소설 이상가는 소설이라는 점을 입증해주기에 충분하다. 


작가의 다른 소설을 읽어 보지 않을 수 없게 만드는데, 지금은 그의 또 다른 걸작이자 대작 <제노사이드>를 읽고 있다고 살포시 고백한다. 일반 대중을 위시한 재미, 평단 제위를 위시한 메시지와 소설다움, 그 사이 어딘가를 위시한 '있어 보이는, 실제로 뭔가 있는' 소설로서의 매력까지 두루 갖춘 소설을 본 후인 만큼 기대하지 않을 수 없다. 


소설의 주요 등장 인물들은 모조리 가해자다. 그런 면에서도 굉장히 특이한 이력을 지닌 이들이라 할 수 있는데, 또 그들은 모조리 피해자이기도 하다. 이런 류의 '가해자'와 '피해자'의 얽히고설킴을 볼 때마다 생각하는 것인데, 모든 인간이 그러하지 않을까 하는 것이다. 우리는 거기에서 많은 걸 느낄 수 있다. 아니 반드시 느껴야 한다. 


살인을 하여 사회에 큰 물의를 일으킨 자가 사회를 위해 다른 이를 위해 무엇인가를 할 수 있을까? 무엇을 하게끔 허락해야 하는가? 그들은 교화의 대상인가, 응보의 대상인가. '가해를 위한 가해'는 애초에 생각의 대상이 아니다. 여지가 없다. 반면 가해와 피해의 경계에서 서 있다가 어쩔 수 없이 가해 쪽으로 발을 딛게 된 이들은 대상이 되지 않을까. 여지는 있지 않을까. 알 수 없다. 내 곁에 그런 이들이 있다면, 그들을 도와줄 수 있을까? 그들의 도움을 받을 수 있을까? 극 중에서 사키카바라 료가 무죄로 방면되면 어떻게 할 것이냐는 물음에 막힘 없이 대답하는 친구의 대답이 일품이다. 


"그때는 또 녀석과 함께 열심히 할 겁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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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서평] 히가시노 게이고의 <천공의 벌>


<천공의 벌> 표지 ⓒ재인



지난 9월 12일 경주에서 역대 최대 규모인 5.8 지진이 발생했다. 무엇보다 걱정이었던 건, 2011년 동일본 대지진을 연상케 하는 '원전 사고' 여부였다. 이번 대지진의 진앙지인 경주에서 불과 27km 떨어진 곳에 월성 원전이 있었기 때문이다. 월성 원전은 이번 지진으로 가동을 중단할 수밖에 없었다. 이는 우리나라에서 최초로 발생한 사건이다. 월성 원전은 규모 6.5를 견딜 수 있도록 설계되었는데, 우리나라에서 5.8 정도의 지진이 일어날 거라는 건 전혀 염두에 두지 않은 설계라 할 것이다. 그래서였을까. 일이 터지고 제대로 대처하지 못했다. 원전 사고는 더 이상 남의 나라 이야기가 아니다.


지난 1995년 일본 고베에 규모 7.0을 넘어서는 대지진이 발생했다. 이는 일본 역사 70년 만에 최악의 피해를 주는데, 수천 명이 죽고 수만 명이 부상당했으며 당시 일본 GDP의 2.5%에 달하는 돈이 허공으로 날아갔다. 같은 해 12월에는 '꿈의 원자로'라 불린 고속 증식로 '몬주'의 나트륨이 유출되는 사건이 발생했다. 사실 방사능이 유출된 건 아니었지만, 사고 후 제대로 대처하지 못한 게 많은 비난을 샀다. 일은 언제든 터질 수 있다. 제대로 대처하는 게 중요한 것이다. 


지진과 원전은 떼려야 뗄 수 없는 관계다. 지진이라는 게 예측하기 힘든 사고라서 원전처럼 절대적 안정이 필요한 것에 상극인 것이다. 원전을 주체로 둔다면, 위험한 건 지진뿐만 아니다. 일어날 수 있는 모든 일에 제대로 대처할 수 있어야 한다. 그런데, 과연 그럴까? 수많은 지진으로 그에 대한 대비라면 세계 최고 수준을 자랑하는 일본이, 2011년 동일본 대지진으로 속절없이 무너졌다. 후쿠시마 원전 주위는 아무도 살지 못하는 폐허가 되었단 말이다. 이건 이제 우리 모두에 해당하는 이야기가 되었다.


최고의 안전성이 필요한 원전에 테러 위협이 가해지다


일본 추리 소설가 히가시노 게이고는 데뷔 10년 후인 1995년, 한신 대지진과 고속 증식로 몬주의 나트륨 유출 사건 사이에 소설 <천공의 벌>(재인)을 내놓는다. 다름 아닌 '몬주'를 모델로 한 고속 증식로 '신양'을 무대로 한 테러 스릴러다. 소설이 나온지 얼마 되지 않아 실제 모델에서 그런 사건가 발생했으니 그야말로 '예언'이나 다름 없는 '소설'이었는데, 16년 후엔 소설에서 내보인 '경고'가 실체화되었으니 씁쓸하기 그지 없다 하겠다. 추리 스릴러 소설에서조차 경고를 보인 원전 사고가 실제로 터졌으니 기가 막힐 따름이다. 


소설은 그 어떤 일에도 제대로 대처해야 하는 최고의 안정성이 필요한 원전에, 상상할 수 없는 일이 벌어지는 이야기를 다룬다. 극비리에 일본 자위대에 납품할 예정인, 어마어마한 크기를 자랑하는 헬기 '빅 B'. 최종 비행만을 남겨두고 있는 때에 누군가에 의해서 접수당한다. 헬기는 테러범에 의해 무선 조종으로 고속 증식로 '신양' 상공으로 가 호버링 한다. 시간이 지나면 연료가 떨어져 대량의 폭발물과 함께 추락하게 될 것이었다. 그럼 원전 대폭발이 일어날 건 자명한 일, 남은 시간은 8시간이다. 


테러범이 전국민이 알게끔 하는 걸 전제로 요구한 건 다음과 같다. 현재 가동 중인 모든 원전을 사용 불능 상태로 만들 것, 현재 건설 중인 원전은 건설을 중지할 것, '신양'은 정지하지 말 것. 헬기를 이동시키려 하지 말 것. 일본 정부를 비롯해, 자위대, 원전 관계자, 경찰들이 총출동하는데, 그들은 과연 어떤 선택을 하게 될까? 테러범의 요구대로 모든 원전을 정지할까? 엄청난 혼란을 감수하고서라도? 아니면 주민들을 대피시키며, 헬기가 추락해 원전이 폭발할 것을 감수하고 테러범과 협상에 들어갈까?


소설은 다분히 문제의식을 표출하며, 실수로 헬기에 아이가 타게 되는 사고를 넣어 서스펜스를 극대화 하는 한편, 일찌감치 범인의 정체를 보여 주고는 각각 다른 지방의 경찰이 범인의 윤곽을 서서히 좁히는 과정을 긴장감 있고 치밀하게 서술한다. 무엇보다 압권이자 소설의 중추는 '원전'이다. 혹여 어마어마한 사고가 터질지도 모르는 '신양'을 둘러싸고 여러 이해관계자들이 벌이는 설전과 암중모색, 대책강구 등이 이 소설을 보는 최대 묘미이다. 정녕 선택이 쉽지 않은 딜레마다. 이는 곧 어떤 일이 터졌을 때 제대로 된 대처를 할 수 없는 원전의 실체와 같다. 


무관심으로 일관하는 사람들의 경각심을 깨워라!


"원전이 대형 사고를 일으키면 아무 상관이 없는 사람도 피해를 입게 돼. 말하자면 나라 전체가 원전이라는 비행기에 타고 있는 셈이지. 아무도 탑승권을 산 기억이 없는데 말이야. 하지만 사실은 그 비행기를 날지 않도록 하는 게 불가능한 일은 아니야. 그럴 의지만 있다면. 그런데 그런 의지가 보이지 않아. 승객들의 생각도 모르겠고. 일부 반대파를 제외하곤 대부분 말없이 좌석에 앉아 있을 뿐 엉덩이조차 들려고 하지 않아. 그러니 비행기는 계속 날 수밖에 없잖아. 그리고 비행기가 나는 이상 우리가 할 수 있는 일은 그 비행기가 잘 날도록 최선을 다하는 것밖에 없어." (본문 423쪽 중에서)


소설에서 사람들 눈을 속이며 자연스레 행동하는 범인이 피력하는 주장이다. 그는 비록 테러를 일으키고자 하는 악질일지 모르지만, 그가 말하는 바는 원전 사고의 핵심을 정확히 찌른다. 이번 경주 '대지진'이 일어났을 당시 나는 어떤 생각을 했는지, 그때 내가 원전을 걱정했을리는 없다. 내 일이 아니라고 생각했으니까. 동일본 대지진 때는 말할 필요도 없을 것이다. 


하지만 범인은 그렇지 않다고 말한다. '나라 전체'가 원전에 관련이 있다고 말하는 것이다. 원전은 위험하기 짝이 없기에 모두가 한목소리를 내면 없애버릴 수 있지만 그렇지 않는다. 관심조차 없기 때문에. 그렇다면 원전을 안전하게 잘 돌아가게끔 하면 될 일이다. 그것도 가능하지 않다. 역시 관심조차 없기 때문이다. 


어떻게 하면 좋을까. 어떻게 하면 사람들이 경각심을 갖고 원전을 대할 수 있을까. 방법은 하나뿐일 거다. 계속해서 원전 사고가 일어나는 것. 일은 일어나고 대처하는 거라고, 사고가 일어나야 그나마 경각심을 갖지 않을까? 범인은 그런 논리 하에 이와 같은 초유의 테러 위협 범죄를 저지른 것이다. 개인적으론 '모순에 부딪혀 돌파구 없는 분노' 때문일 것이고. 그 분노가 사람들 무관심의 발로에 다름 아니다.


지금 우리들에게, 이 소설은 더 이상 소설이 아니다


"결국 료스케의 고통이나 도모히로의 죽음이나 그 원인은 같은 것에 있지 않을까. 둘 다 피해자이기는 마찬가지다. 그렇다면 그 피해의 근원은 무엇인가... (중략) 집단 괴롭힘이 있었는지 확인하기 위해 도모히로와 같은 반이었던 아이들을 만났을 때 보았던 그 가면 같던 얼굴들. 아이들만 그런 얼굴을 하고 있는 게 아니라는 사실을 그는 깨달았다. 다수의 사람들이 어른이 돼서도 가면을 벗지 않는다. 그리고 그들은 '침묵하는 군중'을 형성한다. (본문 632쪽 중에서)


범인이 그와 같은 범죄를 저지르게 된 결정적 사건은 아마도 아들의 죽음일 것이다. 아들의 죽음에는 반 친구들의 따돌림과 괴롭힘이 있었을 거라 추측된다. 하지만 그들도 피해자다. 범인의 아들은 원전 관계자의 아들이라는, 아들을 괴롭힌 아이들의 리더는 반원전 관계자의 아들이라는 꼬리표가 달려 있었다. 더 큰 문제이자 분노의 진정한 발화점은, 그 사건을 확인하면서 보게 된 '가면 쓴 얼굴'들. 그 얼굴은 곧 '침묵하는 군중'에 다름 아니다. 침묵은 원전 사고라는 크나큰 대재앙 앞에서도 그 위력을 톡톡히 발휘해 그 자신을 포함한 많은 사람들을 위험으로 몰아간다. 그들은 명백한 피해자이지만, 또한 명백한 가해자이기도 하다. 피해 자각이 없는 피해자, 가해 자각이 없는 가해자. 어찌 이럴 수 있는 것인지. 


지금 우리들에게, 이 소설은 더 이상 소설이 아니다. 아니, 소설로 읽었다면 다시 읽어야 한다. 그리하여 우리가, 침묵하는 군중은 아닌지, 자각 없는 피해자 혹은 가해자가 아닌지, 국민을 속이려 드는 정부 관계자는 아닌지, 제대로 대처하지 못해 우왕좌왕하는 원전 관계자는 아닌지, 자문해 보아야 한다. 


지진은 더 이상 남의 나라, 남이 당한 불가항력의 사고가 아니라, 내 주변에서 일어날 수 있는 일이자 다른 누구도 아닌 내게 일어날 수 있는 일이다. 아직 원전에 이상이 생길 정도의 지진은 일어나지 않았다. '아직'일 뿐이다. 5.8이 일어났으니, 우리나라 원전 평균 내진 설계 기준인 6.5가 일어나지 않을리 없지 않겠는가. 하지만 우리는 여전히 그에 관한 한 '침묵하는 군중'임에 분명하다. 침묵하는 군중은 '침몰하는 배'를 절대 끌어올리지 못한다. 함께 침몰할 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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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리뷰] <머니 몬스터>


세계 금융시장의 중심가, 미국 뉴욕의 '월 스트리트'. 월 스트리트를 좌지우지 하는 버라이어티 경제쇼 '머니 몬스터'. 그곳에 괴한이 출현해 진행자를 위협하는데... ⓒUPI코리아



세계 금융시장의 중심가, 미국 뉴욕의 '월 스트리트'. 월 스트리트를 좌지우지 하는 버라이어티 경제쇼 '머니 몬스터'. 머니 몬스터는 세계 금융시장을 쥐락펴락하는 TV 프로그램이다. 진행자 리 게이츠는 정신이 제대로 박혀 있진 않지만, 진행 하나는 최고다. 현장을 완벽히 컨트롤 하는 프로듀서 패티 펜이 있기 때문. 


그날도 어김 없이 생방송이 시작되었다. 그런데 택배 기사로 보이는 남성이 카메라에 잡힌다. 생방송의 묘미를 살려 남성을 이용해 보려는 리와 패티. 하지만 남성은 다자고짜 총을 꺼내 들고는 천장으로 쏘며 진행자를 위협한다. 그러며 하룻밤 만에 8억 달러를 날려 버린 'IBIS'의 진실을 폭로하고 회장이 사과하는 걸 요구한다. 


새로울 게 없는 설정, 아쉽다


어디서 본 듯한 설정, 2013년에 개봉한 하정우 주연의 <더 테러 라이브>가 스친다. 생방송 도중에 걸려온 장난 전화, 하지만 장난이 실제가 되면서 이야기는 급박하게 흘러간다. 그 모든 걸 생중계하여 시청률을 올려보겠다는 심산까지. <머니 몬스터>와 <더 테러 라이브>를 모두 본 사람이라면 누구라도 떠올리지 않을 수 없을 듯하다. 


다만, <머니 몬스터>가 조금 더 스케일이 크다. 보여지는 건 <더 테러 라이브>가 더 화려하고 스펙터클하고 심장을 쫄깃하게 만들 텐데, <머니 몬스터>가 말하고자 하는 바가 더 크다. 다만, 하룻밤 만에 증발해버린 유망 기업의 주식 8억 달러의 실체를 밝혀라. 사실 그 뿐이다. 다양한 면에서 잘 살리지 못했다. 발만 담궜을 뿐이다. 


가해자와 피해자의 얽히고설킴, 여기저기에서 많은 접해온 클리셰다. 새로울 게 없는 설정이다. 그걸 뛰어넘는 무엇이 있을까? ⓒUPI코리아



피해자가 가해자로 둔갑할 수밖에 없는 상황, 불쌍한 가해자를 이해하고 진정한 가해자를 응징하는 데 힘을 보태는 피해자, 그렇지만 그 피해자 또한 가해자와 동조해 왔으니 가해자다. 거기에 또 다른 넓은 의미의 가해자도 있다. 우린 이런 류의 클리셰를 많은 영화, 뿐만 아니라 다양한 콘텐츠를 통해 접해 왔다. 더 이상 새로울 게 없는 설정이다. 이 중 한 개라도 집중해 치명적인 딜레마와 안타까운 파국을 보여줬으면 어땠을까 하는 아쉬움이 든다. 


영화 같은 영화, 재미는 어디로?


2008년 '미국 발' 금융 위기 이후 할리우드에서 경제 영화, 그중에서도 특히 금융위기 당시를 생각나게 하는 '주가 조작' 영화가 자주 출몰한다. 얼핏 기억나는 영화만 해도 <월 스트리트> <인사이드 잡> <마진 콜> <더 울프 오브 월 스트리트> <빅 쇼트> 등, 일 년에 최소 한 편 이상은 만들어지는 것 같다. 와중에 <머니 몬스터>는 별종이다. 위엣것들이 현실 그 자체를 그렸다면, 이 영화는 영화 같은 영화다. 


문제는 재미가 있는가 하는 점이다. 다큐멘터리까지는 아니더라도 지극히 진지하게, 지극히 풍자적으로 심각한 상황을 전했었다. 이 영화는 어떤가? 조금 더 다층적으로 접근한다. 하룻밤 만에 어마어마한 돈이 증발해버리는 영화 같은 상황에, 생방송 도중 괴한이 침입해 총과 폭탄을 들고 진행자를 위협한다는 영화 같은 설정을 넣은 것이다. 초첨을 어디에 맞추는 지가 굉장히 중요해진다. 


이 영화의 괴한은 어수룩하다. 그는 일종의 딜레마를 상징한다. 죽음도 없고 영웅도 없다. 재미는 있을까? ⓒUPI코리아



90년대 스타일이라면 괴한이 두뇌 회전이 빠르고 눈치도 빠르고 잔혹하고 만반의 준비까지 한 인물일 것이다. 몇 명이 죽을 것이고, 심장은 한 없이 쫄깃해질 것이고, 영웅 한 명이 어떤 수를 써서든 괴한을 무찌를 것이다. 반면 이 영화는? 괴한이 어수룩하다. 왜? 그도 원래는 피해자니까. 일종의 하소연을 하러 온 거니까. 요즘 나오는 많은 영화의 특징이기도 하다. 딜레마. 죽음도 없고 쫄깃도 없고 영웅도 없다. 재미도 없다. 


예전 스타일처럼 만들 게 아니라면, 또는 비주얼적으로 뭔가 보여줄 만한 게 조금이라도 있는 게 아니라면 왜 이런 영화를 만들었는지 의문이다. 재미가 있을 것처럼 시작만 했을 뿐, 가면 갈수록 당최 알 수가 없지 않은가. 재미가 없지 않은가. 다층적이고 색다른, 현대적인 접근이 오히려 내용도, 재미도, 감동도 담보하지 못했다. 


시종일관 짙게 묻어나는 아쉬움


1990년대 최고의 탑스타 조지 클루니와 줄리아 로버츠, 거기에 떠오르는 신성 잭 오코넬, 그리고 조디 포스터 감독. 이들은 꿍짝이 잘 맞았을까? ⓒUPI코리아



미덕을 찾아보자. 주연 3인방, 조지 클루니, 줄리아 로버츠, 잭 오코넬의 이름값. 안타깝지만 눈요기 감도 안 되었다는 말을 전한다. 조지 클루니는 2010년대 이후 <디센던트>에서 정점을 찍고 한 없이 추락하는 중이고, 줄리아 로버츠는 굳이 필로그래피를 언급하지 않아도 극 중에서 전혀 빛을 발하지 못했다. 잭 오코넬은 피해자 코스프레를 연상시키는 만큼 지질한, 즉 괜찮은 연기를 펼쳤지만 극 중 역할 자체가 너무 매력적이지 않았다. 아쉽지만 영화와 배우가 꿍짝이 잘 맞지 않았다. 


까메오나 단역, 조연의 역할이 영화에 지대한 영향을 끼칠 때가 많다. 이 영화에도 감초 같은 조연이 나오는데, 이 심각한 국면에서 코믹에 가까운 역할을 부여받았다. 잘 들어 맞았다면 영화의 급 자체를 끌어 올렸을지 모른다. 진중함과 코믹함을 자유자재로 옮겨가니 말이다. 


그런데 정말 아쉽게도 그 역할이 영화 내내 헛돌았다. 전혀 아무런 감흥을 주지 못했다. 차라리 없었으면 하는, 나름 진중한 분위기에 쉬어가는 페이지가 아니라 찬물을 쫙 끼얹는 느낌이랄까. 그리 생각하니 다양한 느낌을 형성하는 역할들이 곳곳에 자리 잡았더라면, 하는 아쉬움이 남는다. 감독의 역량이 부족하다 해야 할까. 


100분이 채 안 되는 짧은 러닝 타임이 미덕이라면 미덕일까. 마음 놓고 킬링타임 용으로 즐길 만한 영화가 안 되는지라, 그것조차 미덕이 아닐 수 있다는 게 정말 너무나도 안타깝다. 차라리 여타 영화보다 조금이라도 더 길어서 더 많은 이야기를 전해주었으면 어땠을까... 나름 전달하는 메시지에 의미 부여를 하고 미덕을 찾을 수 있을까 싶었지만, 그조차 너무 식상하지 않나 싶다. 끝까지 아쉬움만 남는다. 미덕을 찾아보는 재미는 남아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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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리뷰] <아이 인 더 스카이>


영화 <아이 인 더 스카이>는 작금 전 세계에서 벌어지는 수많은 테러와 그에 따른 무고한 피해를 눈 앞에서 보고 있는 우리들에게 답을 찾기 힘든 딜레마적 상황을 던진다. 영화 <아이 인 더 스카이> 포스터. ⓒ엔터테인먼트 원



케냐의 수도 나이로비. 한 여자 아이가 평화롭게 훌라후프를 돌린다. 그러며 시내에 나가서 빵을 팔기도 한다. 지극히 평범하고 평화로운 아이의 모습이 왠지 을씨년스럽다. 무슨 일인가 벌어질 것만 같다. 


소말리아의 극단주의 테러 조직 알 샤바브의 수장급들 생포를 위해 미국, 영국, 케냐가 합동 작전을 펼친다. 그들이 모인 곳은 케냐의 수도 나이로비의 한적한 곳. 생포 작전에 돌입하려던 찰나, 최첨단 초소형 드론의 활약으로 그들이 자살 폭탄 테러를 하려는 사실을 알아낸다. 우여곡절 끝에 생포 작전은 사살 작전으로 바뀐다. 사살 작전을 위해선 드론 미사일 투하가 필요하다. 


답을 찾을 수 없는 딜레마 상황


도무지 답을 찾을 수 없는 딜레마가 있기 마련이다. 반드시 수많은 인명 피해가 수반될 자살 폭탄 테러를 사전에 제거하기 위해 어느 정도의 부수적 피해를 감수해야 하는가. 아니면 아직 벌어지지도 않은 일로 부수적 피해를 감수할 수는 없는 것인가. 영화 <아이 인 더 스카이>는 작금 전 세계에서 벌어지는 수많은 테러와 그에 따른 무고한 피해를 눈 앞에서 보고 있는 우리들에게 답을 찾기 힘든 딜레마적 상황을 던진다. 


사살 작전을 위한 미사일 투하 진전 한 여자 아이가 중상 이상의 피해가 확실시되는 곳으로 와서 빵을 판다. 총리, 장관, 장군, 작전지휘관, 미사일 조종사 등 작전에 관련된 그 누구도 판단을 내리기 힘들다. 영화 <아이 인 더 스카이>의 한 장면. ⓒ엔터테인먼트 원



급기야 사살 작전을 위한 미사일 투하 진전 한 여자 아이가 중상 이상의 피해가 확실시되는 곳으로 와서 빵을 판다. 총리, 장관, 장군, 작전지휘관, 미사일 조종사 등 작전에 관련된 그 누구도 판단을 내리기 힘들다. 법적으로, 정치적으로, 도덕적으로, 완벽한 결정이 있을 수 없다. 어떻게 해야 할까. 


도덕과 법, 누구의 선택과 결정이 옳은가?


영화는 미사일 투하에 대한 논쟁과 선택과 결정이 주를 이룬다. 작전에 직접적으로 관련이 있는 지휘관과 장군은 자살 폭탄 테러로 입게될 엄청난 인명 피해를 사전에 없애기 위해 반드시 미사일을 투하해야 한다고 주장한다. 그에 반해 내무장관, 법무장관, 국무장관, 국방장관들은 정치적 후폭풍을 두려워 하면서 결정을 서로 미룬다. 이해는 되지만 정녕 비열하고 저열한 행태가 아닐 수 없다. 


한편 작전의 직접적 지휘관은 그 어떤 정치적, 도덕적 판단 없이 오로지 법적인 판단을 앞세우며 '임무 완수'에만 매달린다. 물론 추후 입게 될 수 있는 엄청난 인명 피해를 사전에 제거한다는 명분이 확고하다. 그렇지만 부수적 피해를 조작하면서까지 임무를 완수해야 할 이유는 뭘까. 결국 임무 완수에 따른 자신의 위신과 영달이 아닌가. 


작전 지휘관은 어떤 정치적, 도덕적 판단 없이 법적인 판단을 앞세우며 '임무 완수'에만 매달린다. 부수적 피해를 조작하면서까지 임무를 완수해야 할 이유는 뭘까. 자신의 위신과 영달이 아닌가. 영화 <아이 인 더 스카이>의 한 장면. ⓒ엔터테인먼트 원



이 딜레마에서 가장 큰 문제는 어느 누구의 선택과 결정은 옳고 어느 누구의 선택과 결정은 그르지 않다는 점이다. 전부 다 옳다고 할 수도 있고 전부 다 그르다고 할 수도 있다. 보는 이에 따라서, 처한 상황에 따라서, 신념과 환경에 따라서. 그래서 장관들의 비열하고 저열한 행태와 지휘관의 막무가내 임무 완수의 이유를 무조건 그르다고 할 수 없는 것이다. 누구라도 그때 그 자리에 있다면 그렇게 했을 수 있다. 


사태를 바라보는 넓은 시야가 필요하다


영화는 직접적 피해자(폭탄 테러 조직)의 입장은 아예 다루지 않은 채 직접적 가해자와 간접적 가해자, 간접적 피해자를 다룬다. 사실 간접적 피해자도 입장 서술이 전혀 되지 않고 일방적으로 당하기 때문에 다뤄지지 않는다고 보면 맞겠다. 그렇게 볼 때 오로지 가해자의 입장만 서술하고 있는 것이다. 


여기서 간접적 가해자의 입장이 애매하다. 다름 아닌 조종사인데, 미사일 투하 버튼을 누르는 이로서 윗선의 결정에 따라 실행만 할 수 있다. 그 결정에 따라 무고한 생명의 목숨을 빼앗게 되더라도 실행을 해야 하고 그 심리적 피해는 고스란히 실행자에게 돌아온다. 가해자이자 피해자이다. 그렇지만 아무도 그들의 피해는 보상해주지도 보살펴주지도 않는다. 


영화가 가해자의 입장만 서술한 건 영화적으로 괜찮은 선택이었다. 피말리고 답답하고 한숨 나오는 결정의 시간을 긴박감있게 보여줄 수 있었기 때문이다. 어설프게 폭탄 테러의 당위성을 보여주며 스케일을 확장시켰다면 자칫 이도저도 아니게 될 수 있었다. 그들이 테러를 하려는 이유를 아예 배제함으로서 가해자의 딜레마에 더 집중할 수 있었고, 이 사태의 한 면을 거의 완벽하게 들여다볼 수 있었다. 


사태를 바라볼 땐 더 넓은 시야가 필요하다. 맹목적이고 절대적인 사고를 지양해야 한다. 극단적 사고와 행동을 보이는 그들을 극단적으로 제압하려고 할 때는 심사숙고가 필요하다. 영화 <아이 인 더 스카이>의 한 장면. ⓒ엔터테인먼트 원



그렇지만 모든 일에는 양면이 있다. 영화는 영화고, 사태 자체를 바라볼 땐 더 넓은 시야가 필요하다. 맹목적이고 절대적인 사고를 지양해야 한다. 극단적 사고와 행동을 보이는 그들을 극단적으로 제압하려고 할 때는 심사숙고가 필요하다. 물론 그것이 필요한 것과 그것이 가능하다는 건 또 다른 얘기다. 누구라도 필요하다는 건 알겠지만 가능할지는 모르지 않을까. 그래도 해야하는 건, 어쩌다가 이 지경이 된 건지 태초의 연유부터 따져보는 게 아닐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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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서평] <예민해도 괜찮아>

<예민해도 괜찮아> 표지 ⓒ북스코프


직장 내 성희롱 피해자로 삼성을 상대로 싸워 이긴 후 로스쿨에 진학해 변호사로 돌아온 이은의 변호사가 쓴 책 <예민해도 괜찮다>(북스코프), 삼성과 로스쿨 시절에 겪었던 이야기와 변호사로 살아가며 보고 듣고 경험한 이야기들을 책으로 엮어냈구나 하는 짐작이 가능하다. 이 짐작이 맞긴 맞되, 본질은 완전히 다르다. 단순히 여성의 성희롱과 성폭행에 관한 이야기가 아니라는 것이다. 

저자는 현재 변호사 일을 하고 있다. 그 전에는 37살 늦은 나이에 전남대학교 로스쿨에 들어갔다. 이전에는 몇 안 되는 대졸 여사원으로 대기업 삼성에 들어가 제법 잘나가는 해외영업 사원으로 일했다. 그녀의 경력을 보면 일명 '엄친딸'이라고 할 만하다. 능력 있고 운도 좋고 자신감과 자존감까지 갖춘 완벽한 여자라 할 수 있지 않을까. 그런 그녀가 어째서 이런 책을 썼을까?

그녀의 경력을 조금만 더 자세히 들여다보자. 그녀는 '피해자 편에 서서' 변호사 일을 하고 있고, 늦은 나이에 법학을 전공하지 않은 채 로스쿨에 들어가 많은 '서러움과 차별'을 받았으며, 12년 넘게 일한 대기업 삼성에서는 '4년 넘게 회사와 전쟁을 했기 때문에' 그 생활이 평탄하지 않았고 나아가 불행하기까지 했다. 이를 관통하는 게 여성으로서 받게 되는 성차별과 성피해다. 

그런데 저자는 그런 것들이 단순히 성 문제가 아니라  갑을 관계, 즉 권력 관계의 문제라고 말한다. 남성과 여성의 성 문제가 아니다. 인간 대 인간의 문제이고 가해자든 피해자든 주변인이든 그런 시선으로 바라보고 생각해야 한다는 것이다. 그래서 제목 '예민해도 괜찮아'에서 예민해야 할 주체는 오로지 여성 만이 아니고, 대상은 오로지 남성이 아니다. 여성이 그 주체가 되기 쉬우며 대상이 남성이 되는 경우가 많을 뿐이다. 주체는 인간이며, 대상은 권력이라고 할 수 있겠다. 

생상한 체험을 바탕으로 성 문제를 다루다

그럼에도 이 책에서 저자가 천착하는 건, 천착할 수밖에 없는 건 여성을 대상으로 한 남성의 성희롱, 성추행, 성폭력 등의 성 문제이다. 저자는 자신의 생생한 체험을 바탕으로 이야기를 이끌어 간다. 자신을 찾아온 수많은 성범죄 피해자들의 이야기, 그 이야기들에서 핵심을 뽑아 정보를 전하고 교훈을 전하고 담론도 생성한다. 

성범죄 사건에서는 피해자와 가해자, 그리고 주변인이 굉장히 중요하다고 말한다. 우리 대부분은 가해자나 피해자가 아닌 주변인이 될 확률이 높은데, 성범죄 사건에서 '처리가 어떻게 되느냐'는 실상 주변인들의 시선과 태도에 달려 있다. 그런데 우리 사회는 지나치게 가해자의 시선에 동일시되어 있다는 것이다. 저자는 주변인이 존중과 배려, 그리고 피해자의 시선에 동일시하고자 노력해야 한다고 말한다. 

데이트폭력에 대한 새로운 해석도 흥미롭다. 아니, 엄밀히 새로운 해석은 아니다. '재인지'라고 하는 게 맞겠다. 저자는 데이트폭력을 '폭력'으로 바라봐야 한다고 말한다. 데이트는 그저 폭력을 행사하기 위한 장치에 불과하다는 것이다. 그러하기에 데이트폭력을 근절하기 위해서는 '데이트+폭력'으로 바라보는 것이 아니라 폭력 자체로 바라보는 것이 중요하다. 그렇게 인지해야 발생 초기에 관계를 차단하거나 신고 절차를 밟을 수 있다. 폭력 앞에 사랑 없고, 폭력 뒤에도 사랑은 있을 수 없다. 

보이지 않는 차별과 피해자들의 용기

저자는 '여자들이 살기 편해진 세상'이라며 여성 차별이 존재하지 않게 된 것처럼 되어 버린 세상이라, 오히려 더 무섭다고 한다. 바로 잘 보이지 않는 차별 때문이다. 여전히 기업에서 채용한 인재의 남녀의 성비는 평등과는 거리가 멀고, 상위 직급으로 갈수록 여성이 희소 해지는 게 사실이다. 젊음이 소진된 여성 인력은 교체해야 하는 대상인 양 생각하기 일쑤다. 

"여성들에게 유리해진 부분은 여성이란 존재에 대한 우리 사회의 존중 의식이 높아져서가 아니다. 우선은 IMF 이후 가족의 부양의무를 가장에게만 떠안기기가 어려워졌기 때문이다. 그리고 여성 인력을 필요로 하는 수요 역시 늘어나면서 맞벌이를 하는 것이 자본주의의 입맛에 더 맞았기 때문이다." (136쪽)

한편 저자는 피해자들이야말로 사회를 바꿀 수 있다고 말하며 용기를 내야 한다고 말한다. 이 부분에 대해서는 100% 동의하기 힘들다. 용기를 내라고 강요할 수 만은 없는 부분이 아닌가 싶다. 물론 용기를 내어 세상이 바뀌는 큰 결과를 얻어냈다고 하더라도 그 과정은 더할 나위 없이 힘들었을 게 아닌가. 이런 사건의 경우, 각자의 판단에 맞기는 게 맞지 않은가 생각한다. 오히려 당사자들이 아닌 주변인들이 조심스럽게 나마 나서야 할 것이다. 피해자들 만의 연대가 아닌 피해자와 주변인의 연대가 필요하다. 

이 시대에 충분한 울림을 주다

저자가 궁극적으로 말하고자 하는 바는 '힘희롱'이다. 이 힘희롱 안에 성 문제가 크게 자리 잡고 있다. 즉, 보다 근원적인 문제인 것이다. 이 프레임이 반드시 옳다고 말할 수 없겠다. 하지만 저자는 이런 시선으로 바라 보아야만 근본적으로 다가갈 수 있고, 근본적으로 세상을 바꿀 수 있다고 보았다. 성 문제를 성의 프레임으로만 바라보고 접근한다면 대다수를 차지하는 주변인들에게 큰 울림과 변화를 줄 수 없다. 

이 책은 어떻게 보든 상당히 여성 중심적이다. 그래서 필자 같은 남성이 보기엔 조금 거북할 수 있다. 아무리 남녀 문제나 남녀 간의 성 문제가 아니라 소수자 문제이자 권력 관계 문제라고 봐야 한다고 말하고 있더라도 말이다. 저자는 여자들끼리 손잡고 여성 피해자들이 뭉쳐야 한다고 말하고 있다. 

남자와 여자를 떠나, 개인적으로는 저자의 생각에 전적으로 동의한다. 남자와 여자의 완전한 평등을 지향하고, 평등을 전제로 사고를 펼치는 것. 그러기 위해선 남자 뿐만 아니라 여자의 생각과 행동도 변해야 한다는 것. 똑 소리 나는 현실 판단과 과감한 비판, 믿음직하고 의지가 되는 이론의 정립과 방향 제시. 저자의 존경할 만한 생각의 지도는 이 시대에 충분한 울림을 주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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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리뷰] <오피스>



영화 <오피스> 포스터 ⓒ리틀빅픽쳐스


저는 직장인입니다. 많고 많은 직장인 중에 한 명이지요. 오피스에서 일을 합니다. 회사가 크지 않고, 일하는 사람도 그리 많지 않아요. 그 안에서도 참 여러가지 일이 일어납니다. 사정 상 현재는 상명하복 체계가 덜 갖춰져 있어요. 각자 자신이 담당하는 게 확실히 구분되어 있어서 이기도 할 겁니다. 요즘 많은 회사들이 이런 식으로 바뀌고 있는 추세라고 하죠. 회사마다 다 사정이 있을 거라 생각합니다. 


잘은 모르지만 조직이 큰 대기업의 경우는 상명하복 체계가 갖춰져야만 하는 것인지요? 위로 갈수록 책임과 권리가 비례하게 올라가는 그런 구조 말이죠. 그런데 반드시 그런 경우가 생길 거예요. 나보다 위에 있는데, 실력은 나보다 아래인 사람이 부서마다 꼭 있다는 거요. 제가 군대에 있을 때도 그런 사람이 있어서 고생했던 기억이 나네요. 정말 난감한 상황이죠. 


이런 경우는 어때요? 누가 봐도 일은 끝내주게 잘해요. 아래 사람한테나 윗사람한테나 믿음직하죠. 그런데 해도 해도 너무 열심히 해요. 융통성 없고 고지식해서 주위 사람들하고 잘 어울리지 못하죠. 주위 사람들이 싫어합니다. 조직 생활에서는 일 못하는 사람보다 이런 식의 사람이 더 힘들 거예요. 


영화 <오피스>의 김병국 과장이 바로 이런 사람이에요. 일은 잘 하지만 융통성 없고 고지식하고 재미 없는 사람이죠. 모르긴 몰라도 윗사람한테 아부를 하지 못하고, 아래 사람들에게 농담 한 마디 하지 못할 거예요. 회사에는 오직 일만 하러 오죠. 그런데 결코 나쁜 사람이 아니에요. 오히려 착하기 그지 없을 거예요. 그런 그가 평소와 다를 바 없이 퇴근을 해서 가족들과 시간을 보내다가, 다짜고짜 망치를 들고 오더니 가족들을 무참히 살해합니다. 그는 도대체 왜 그랬을까요. 그에게 어떤 일이 있었을까요. 



영화 <오피스> 한 장면 ⓒ리틀빅픽쳐스



다음날 광역수사대가 회사로 출동합니다. 집보다 회사에서 오래 있는 직장인이니 만큼 당연한 수순이겠죠. 집이 아닌 회사에서의 어떤 일 때문인 게 분명합니다. 그런데 사람들이 조금 이상해요. 하나 같이 김병국 과장을 두둔합니다. '과장님은 그럴 사람이 아닙니다.' 라고요. 다들 그가 착하고 유순하다는 걸 알고 있다는 거겠죠. 다만, 그 말투가 비꼬는 듯해요. 마음에 들지 않는 거죠. 다들 여우 같아요. 


김병국 과장이 범인인 건 모두가 다 아는 사실이에요. 영화는 김병국 과장이 어떻게 살인을 저질렀는지는 간단히 처리하고, 도대체 왜 살인을 저질렀는지에 초점을 맞추죠. 회사 때문인 게 분명한데, 회사에서 숨기고 있어서 인지 아니면 다른 무엇 때문인지 이유를 찾기가 힘들어요. 하지만 그건 영화 속 형사의 입장에서 이고, 관객은 누구나 짐작할 수 있어요. 특히 직장인이라면요. 


도저히 참을 수 없는 거예요. 대부분의 직장인들이, 회사 일이 힘들 때면 그만 두고 싶다는 생각을 제일 먼저 할 거예요. 하지만 그 이후를 생각하곤 생각을 접죠. 그만 두면 뭐하죠? 회사를 직접 차리지 않는 이상, 다른 회사를 다녀야겠죠. 그러면 뭐가 달라질까요? 현재와 비슷하겠죠. 그럴 바에는 어떻게 하든 현 상태를 유지할 수밖에 없게 되죠. 


그런데 그 상태가 계속 되면 어떻게 될까요. 참고 참고 또 참고... 내 손에 일가족의 생계가 달려 있는 상황이라면 그 사면초가의 상황을 어떻게 타계해야 할까요. 일을 잘 못하면 짤릴까봐 전전긍긍하며 어떻게 일을 더 잘 할까 고민하겠죠. 하지만 일과 회사, 그리고 사람들 자체에 신물이 나서 버틸 수 없을 것 같으면 어떻게 해야 하는 것이죠. 김병국 과장에게 닥친 문제가 바로 이런 게 아니었을까 추측해 봅니다. 많은 직장인들에게도 해당하는 문제겠죠. 



영화 <오피스> 한 장면 ⓒ리틀빅픽쳐스



그렇게 김병국 과장은 괴물이 되었어요. 영화는 김병국 과장이 왜 일가족을 살해했을까 에서, 김병국 과장이 회사 사람들을 하나하나 살해 하는 모습에 초점을 맞춥니다. 그러면서 회사 사람들 하나하나의 진짜 모습을 천착해 들어가죠. 가지각색입니다. 그렇지만 크게 보면 한통속이죠. 부장이 과장을 쪼면, 과장은 대리를 쪼고, 대리는 사원을 쪼고, 사원은 인턴을 쫍니다. 김병국 과장과 비슷한 부류라는 이미례 인턴을 제외하곤, 김병국 과장에게 죽어가죠. 괴물이 된 그에게 말이에요. 


이 모습을 보고 몇 가지 생각이 납니다. 김병국 과장이 많은 직장인을 대표하는 캐릭터이긴 합니다만, 그처럼 괴물이 되는 직장인이 많을까요? 일가족을 죽이고, 회사 사람들을 하나하나 죽이는? 물론 거의 없을 거예요. 아니, 없다고 보는 게 무방하겠죠. 이 영화를 보고 이런 생각을 하는 분이 많을 거예요. 너무 오버 한다고, 말이 되는 스토리를 보여주라고 말이에요. 


그런데 이 영화는 그런 모습을 보여주는 게 목적은 아닌 것 같아요. 김병국 과장으로 대표 되는 평범하기 그지 없는 직장인이 얼마나 아프고 마음이 곪았는지를 상징적으로 보여주려 한 거라 봐요. 날카로운 칼을 들고는 마음이 편안해 진다고 하는 그의 모습은 그야말로 우리네 직장인의 자화상이 아니고 무엇이겠습니까. 회사를 넘어 결국은 이 사회가 그렇게 만든 것이죠. 그러고는 그에게 쥐어주는 게 칼입니다. 


또 하나는 이런 거예요. 김병국 과장은 자신이 일하는 영업 2부 사람들을 하나하나 찾아가 죽이죠. 그 죽이는 장면 하나하나가 일품이었어요. 스릴러 영화로서 보여줄 수 있는 최대치에 근접했죠. 심장이 쫄깃쫄깃한 게, 그 여파가 쉽게 가시지 않았어요. 이런 영화적 접근도 접근이지만, 더 중요한 게 있지 않을까 싶어요. 한 마디로, 부서원들만 죽이면 뭐합니까? 변하는 건 없는데요. 


김병국 과장은 할 수 있는 게 없어요. 그렇게 센세이션할 일을 저질러도 세상은 바뀌지 않는 다는 것이죠. 물론 영화에서 그가 세상을 바꿀 요령으로 그러진 않았어요. 괴물이 되어서 저질렀을 뿐이죠. 그 자리에서 이 영화는 멈춘 거예요. 더 이상 나갈 수 없었죠. 훌륭하게 문제 제기를 했지만, 대안을 제시하지 못했어요. 오히려 또 하나의 괴물을 등장 시켜 문제 제기 차원에서, 영화적 재미를 더하는 쪽으로 급 선회를 하죠. 그 때문에 영화가 조금 애매해졌다고 생각해요. 안타깝죠. 



영화 <오피스> 한 장면 ⓒ리틀빅픽쳐스



한편 피해자가 가해자로 되어 가는 모습에 관해서는 더 이상 할 말이 없을 정도예요. 너무 많은 곳에서 일어나는 현상이기 때문이죠. 그만큼 우리 사회가 병들어 있다는 반증이 아닐까요. 사회가 정상적이라면 어떻게 피해자가 가해자로 될 수 있을까요? 그러면 결국엔 진짜 가해자가 피해자로 둔갑하는 거잖아요. 이런 콘텐츠를 볼 때 절대적으로 꼼꼼히 살펴보아야 할 게 바로 이 부분이에요. 꼭. 


시종일관 씁쓸했어요. 남의 일 같지 않아서 더욱 그랬죠. 어느 정도의 공감이 갔어요. 오피스라는 소재에서 그럴 수밖에 없었죠. 학창 시절, 회사, 가족, 사랑 이야기는 공감이라는 기본 무기가 장착되어 있어서 좋겠지만 식상하다는 평가를 피하기 힘들어요. 그런 면에서 <오피스>는 나쁘지 않았습니다. 호흡이 좀 길었으면 좋았을 텐데요. 영화보단 드라마로 만드는 게 좋았을까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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冊으로 策하다. 책으로 일을 꾸미거나 꾀하다. 책으로 세상을 바꿔 보겠습니다. singenv@naver.com Since 2013.4.16




[한국 대표 소설 읽기] <아베의 가족>



<아베의 가족> 표지 ⓒ아시아


"황량한 들판에 던져진 그 시든 나무들의 꿋꿋한 뿌리가 돼줄는지도 모를 우리의 형 아베의 행방을 찾는 일도 우선 그 무덤에서부터 시작할 생각이었다."


전상국의 소설 <아베의 가족>이 한국 분단 문학에서 갖는 의미는 특별하다. 60년이 넘도록 여전히 한반도에 깊이 아로새겨진 한국전쟁의 폭력성과 그로 인해 만들어진 분단의 비극을 능수능란하게 여과 없이 그리고 알아듣기 쉽게 전하고 있기 때문이다. 그 만으로도 충분한데 이 총체적 비극의 해결을 모색하고 있다. 거기서 이 소설은 분단 문학을 넘어 한국 문학에서도 특별하게 되었다. 


이 소설이 전하는 한국전쟁의 폭력성, 분단의 비극 그리고 비극 해결 모색을 들여다보자. 이를 들여다보는 건 한국전쟁을 이해하는 데에서만 그치는 게 아니라, 한국 사회와 한국인을 이해하는 데 큰 도움이 될 것이다. 전쟁의 폭력성과 분단의 비극을 상징하는 '아베'가 꿋꿋한 뿌리가 돼줄 것이지만, 상흔은 깊이 남아 있기 때문이다. 이를 받아들이는 동시에 풀어야 할 숙제가 된다. 반드시 풀어야 할 숙제. 


짊어지지도 짊어지지 않을 수도 없는 전쟁의 비극


진호의 가족은 미국으로 이민을 가게 된다. 어떻게든 적응을 하려 하지만 쉽지 않다. 어머니는 본래 강한 사람이었는데 미국에 오니 시든 병아리 마냥 힘이 없고 우울하다. 그건 '아베'를 한국에 남겨왔기 때문이었다. 아베는 누구인가. 그는 한마디로 백치. 가난한 진호의 가족들은 그들의 가난을 아베 때문으로 돌렸다. 미국에 와서는 아무도 아베를 입에 올리지 않았다. 그렇지만 그들은 나사가 하나 빠진 느낌으로 살고 있었다. 아베 때문이라고는 생각도 하지 못한 채 말이다. 


그러던 어느 날 진호는 어머니의 수기를 우연히 읽는다. 충격 그 자체였다. 그 수기에는 어머니와 아버지,아베의 과거가 낱낱이 그려져 있었다. 진호는 급기야 아베를 찾으러 한국에 가기로 마음 먹는다. 도대체 수기에는 어떤 기막힌 과거가 그려져 있는 것일까? 


어머니와 아버지의 행복한 시절이 있었다. 그 시절은 한국전쟁으로 단숨에 깨진다. 아버지가 전쟁에 끌려간 것이다. 어머니는 동맹국 미국군에 의해 강간을 당한다. 그렇게 태어난 게 아베다. 아베는 제대로 태어나지 못했다. 그 아베를 잘 보살펴준 게 지금의 아버지다. 그것은 아버지의 과거 때문이었다. 아버지는 군인이었는데 탈영을 하여 민가에 들어가 그곳에 사는 사람들을 죽였었다. 그 장면을 백치 아이가 고스란히 보고 있었는데, 아베가 그 백치 아이를 연상시켰고 아버지는 그 백치 아이에 대한 미안함을 아베에게 투영하여 속죄하려 한 것이었다. 


미국군이 어머니를 강간한 것과 아버지가 민가의 사람들을 죽인 것 모두 전쟁의 폭력성을 보여준다. 잘못 태어난 아베는 비극을 상징할 것이다. 폭력을 당한 사람, 폭력을 행한 사람 모두 비극을 안고 살아간다. 다만 그 비극의 이면, 감춰진 비밀을 누구한테도 말할 수 없다. 결국 비극이 가져다주는 아픔을 끝까지 짊어지지 못한다. 그렇다고 멀리한다고 아프지 않는 것은 아니다. 전쟁의 폭력이 가져다준 비극이란 그런 것이다. 짊어지지도 짊어지지 않을 수도 없다. 


피해자이자 가해자의 굴레


지금 우리 사회에 만연해 있는 딜레마 중 하나는 이렇다. 누구든 피해자이자 가해자의 굴레에서 벗어나기 힘들다는 것. 어떻게 피해자가 가해자가 되고, 가해자가 피해자가 된단 말인가? 그렇지만 이 극도의 모순이 우리 사회에 지극히 존재한다. 시대를 표현하는 데 가장 탁월한, 그중에서도 사회의 진짜 모습을 그리는 데 천착하는 독립 영화가 가장 많이 그리는 것이 바로 이 '피해자이자 가해자의 굴레'인 걸 보면 알 수 있다. 


<아베의 가족>이 보여주는 말할 수 없는 비밀이 바로 이 피해자이자 가해자의 굴레이다. 한국전쟁으로 인해 한국인은 피해자(미국군에 의해 강간을 당한 어머니)이자 가해자(군대에서 탈영하여 민가로 들어가 사람들을 죽인 아버지)의 굴레에 말려들어 갔다. 문제는 결과와는 달리 원인은 그들 자신이 아니라는 것이다. 다른 누구에 의해 그들로 하여금 그렇게 할 수밖에 없게 만들었다. 


개인의 경우는 이렇겠고 국가의 경우도 크게 다르지 않다. 36년의 치욕적인 일제강점기를 한국인에 의해 끝내지 못했고(김구 선생은 타국에 의한 한국의 광복을 한탄했다.) 분단 또한 한국인만의 의지가 아니었다. 비극의 원인이 다른 누구에게 있고 그렇게 만들어진 피해자이자 가해자의 굴레는 우리가 진 채 살아가고 있다. 


소설은 아베를 짊어진 채 살아갈 수밖에 없고 살아가야 한다고 말하고 있다. 그 말할 수 없는 비밀을 말하지 않은 채 살아갈 순 없다고 본 것이다. 비극의 원죄를 묻는 데 앞서 앉고 같이 가야 한다고 말하고 있다. 그 상처는 결국 곪아갈 것이고 그로 인해 몸은 시들어갈 뿐이다. 아베를 두고 온 어머니가 시들어가고 무기력해진 것처럼 말이다. 아프고 치욕적이지만 우리의 뿌리임이 분명한 아베다. 그 뿌리를 인정하고 받아들이지 않는 이상, 지금까지 우리 사회에 만연해 있는 딜레마를 극복하기란 쉽지 않을 것이다. 


아시아 출판사에 후원하는 '한국 대표 소설 읽기'의 일환입니다. 

'바이링궐 에디션 한국 대표 소설'과 함께 앞으로도 계속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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