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리뷰] <폭력의 씨앗>


올해 거의 마지막이 될 독립영화 명작이다. '폭력'의 시선 확대에 큰 기여를 한듯. ⓒ찬란



'폭력', 인류가 오랫동안 천착해 온 주제이다. 그 어느 누구도 이 폭력이라는 놈이 쳐놓은 그물에서 벗어날 수 없기 때문이다. 개인적으로도 폭력이라는 소재와 주제에 계속 관심을 가지고 천착해왔다. 영화, 그중에서도 한국 독립영화에 국한한다면, 가해자가 피해자가 되고 피해자가 가해자가 되는 폭력의 악순환이 가장 큰 주제를 형성했다. 


윤종빈 감독, 하정우 주연의 <용서받지 못한 자>가 그 시작으로 보는데, 여기서 '용서받지 못한 자'는 누구일까. 구성원 모두가 피해자이기도 하지만 용서받지 못한 자이자 가해자라 할 수 있는 이 영화에서, 결국 진정한 최후의 가해자는 '군대' 그 자체이다. 그들이 군대라는 곳이 아니었다면 그 정도의 폭력을 휘두르고 그런 돌이킬 수 없는 선택을 하고 그런 극단적 후회를 했었을까?


이후 한국 독립영화는 거의 매년 폭력의 악순환에 관한 수작을 선보여 왔다. 요즘도 여전히 폭력을 말하지만 시선이 다른 것 같다. 사회가 해결해주지 못하는 폭력의 굴레를 개인이 직접 나서서 해결하려는 움직임을 포착해 스크린에 옮겨 놓는 작업이 잇따르고 있다. 폭력의 악순환보다 더 넓은 시야와 더 구체적인 연출이 필요해 보인다. 


한편 가장 폭력에 많이 노출되어 있다고 해도 과언이 아닌 일명, 군대 영화는 연성호 감독의 애니메이션 <창> 정도를 제외하고는 거의 만들어지지 않았다. <용서받지 못한 자>의 아성이 높고 깊기도 했거니와, 군대가 이전과는 비교도 안 되게 좋아지고 있다는 인식이 군대 영화의 필요를 무색케 했다. 이번에 나온 <폭력의 씨앗>은 그래서 의미 있고 눈여겨볼 만한 영화다. 


이미 오래전 발아하고 있던 폭력의 씨앗인가


상당히 노골적인 제목 '폭력의 씨앗', 그 씨앗이 어디서 어떻게 왜 발아되었는가 살펴보고 생각하게 만든다. ⓒ찬란



단체외박을 나가는 한 무리의 군인들, 상병 이상 고참들과 이등병들은 아무것도 하지 않고 일병만이 모든 일을 처리하다시피 한다. 각자 하고자 하는 일을 하기 전 모여 술 한잔 하는 그들, 일병 주용은 최고참 선임으로부터 청천벽력 같은 소식을 듣는다. 누군가가 지난번에 이어 선임으로부터 폭행을 당했다고 중대장에게 말하려 했다는 것. 


주용의 맞후임인 이등병 필립은 이번만은 절대 자신이 아니라고 애원하지만 주용을 위시한 고참들은 당연히 필립이 한 짓이라고 생각한다. 그럼에도 끝까지 이번만은 자신이 아니라고 우기는 필립을 주용이 일차로 위협을 가하지만, 여전히 굴복하지 않자 분대장이 가차없이 팬다. 


입술이 터지고 이빨이 부러진 필립, 주용은 만나기로 했던 친누나와 연락이 되지 않자 필립과 함께 직접 인천으로 점프를 뛰면서까지 찾아간다. 매형이 치과의사였다. 인천으로 가는 도중, 인천에 도착하고서, 인천에서 다시 복귀하기까지 주용과 필립은 부딪힌다. 사소하게 시작한 부딪힘은 주용으로하여금 참을 수 없는 분노를 느끼게 한다. 


하지만, 그것으로 끝난 게 아니었다. 주용은 매형과 누나에게서 느껴지는 이상한 기류를 눈치채고 그들을 추궁한다. 사실 매형이 누나에게 물리적 폭력을 가한 전력을 주용 또한 알고 있었던 것이다. 그 이상한 기류에는 이런 전력이 한몫했던 듯. 주용의 선한 얼굴에 내재된 폭력의 씨앗은 이미 예전에 발아하고 있었던 건가.


사회, 가정, 군대를 아우르는 폭력의 굴레


'군대의 폭력은 군대에서 시작된 게 아니다.'라고 영화는 말한다. ⓒ찬란



영화는 시종일관 긴장의 연속이다. 목숨이 오갈 정도의 끔찍한 일, 나라의 명운이 달린 큰 일은 없지만, 주용에게 남은 군대에서의 나날들에 암흑이 내릴 일들이 점점 더 그 강도를 더한 채로 덮쳐온다. 그가 생각하기에 그 모든 건 필립 때문이다. 나는 정말 잘하고 있는데, 이 새끼가 평범하게만 했어도...


사회에 나와서도 똑같겠지만, 군대에서야말로 어리바리 후임을 둔 사수의 고충은 이만저만이 아니다. 2년여 동안 죽이 되든 밥이 되든 절대 바꿀 수 없는 한 운명체인 게 더 곤혹스럽다. 그렇지만 어느 누구에게나 피해갈 수 없는 그때 그 어리바리 시절이 있었다는 걸 알아야 한다. 그래서 내리갈굼으로 대표되는 폭력의 악순환은 어쩔 수 없는 게 아니라, 누군가가 끊어버릴 수 있는 성격의 것이다. 


그런 의미에서 주용에게 내재된 폭력의 씨앗은 군대에서 필립에게 가하는 폭력의 형태로 처음 발아된 것이 아닐 테다. 만약 그것이 처음이라면 그는 군대에 오기까지 폭력의 한 면도 보지 못한 온실 속 화초에서 지내왔을 것이다. 하지만 그럴리는 없으니, 그는 이미 폭력이 무엇인지 대략이나마 알 뿐더러 이미 폭력을 당해봤거나 폭력을 행사해본 적이 있다는 말이 된다. 


영화의 시선은, 폭력을 바라보는 시선은 군대에서 사회 또는 가정으로 옮겨간다. 그건 즉, 폭력의 최정점에는 사회 내지 가정이 있었다는 뜻이다. 군대에 적을 두고 있어도 이전까지 그리고 이후에 있을 곳은 군대가 아니지 않은가. 군대의 폭력, 사회 또는 가정의 폭력은 결코 '또 다른' 폭력이 아닌 하나로 이어지는 폭력의 굴레다. 


인지하지 못한 채 우리를 뒤흔드는 일상 폭력


우리가 아마 절대 인지하지 못할 수많은 소소한(?) 폭력들이 우리 일상을 지배한다. ⓒ찬란



영화가 보여주는 폭력은 사실 이것이 전부가 아니다. 잘 인지하지 못한 채 당하기도 하고 행하기도 하는 일상의 폭력들을 극히 자연스럽게 보여준다. 지금까지 봐 왔던 그 어떤 폭력의 양식이나 행태보다 심각하고 무섭다. 앞서 말했던 목숨이 오가는 끔찍한 일이나 나라의 명운이 달린 큰 일보다 오히려 더 우리를 뒤흔드는 일이 아닐까 싶다. 


시종일관 우리를 덮쳐오는 긴장은 이런 일상적 폭력에서 기인한 것일 테다. '알 수 없음'에서 발인한 사소한 실수에 반응하는 언어적 폭력, 호의라는 이름으로 아름다우리만치 포장된 권위적 폭력, 도움이라는 행동으로 자행된 상대방은 물론 주위를 생각하지 않는 무개념 폭력 등. 이보다 훨씬 많은 폭력들에서 우리는 살아 간다. 


차라리 눈에 확연히 보이는 갈등 속 폭력이나 치고박고 싸우며 피가 난무하는 폭력의 양상에서 긴장은 덜 느껴진다. 영화를 100% 핸드헬드 기법으로 촬영했다고 하는데, 그래서 긴장의 끈이 절대 풀어지지 않는 것이었겠지만 오히려 일상적 폭력의 장면들이 긴장을 더 이끌어낸다는 게 신기할 따름이다. 


우리는 해결해야 할 수많은 문제들과 함께 살아간다. 개중엔 해결은커녕 문제가 무엇인지조차 알지 못하는 문제가 아주 많은 것이다. 거기에 진짜 문제가 있다. 문제를 문제라 인식할 정도의 큰 문제들은 누구나 인지하고 해결방도를 찾으려 노력한다. 하지만 문제를 문제라 인식하지도 못할 정도의 작은 문제들은 모두가 자신도 모르게 행하고 있을 가능성이 다분하다. 


그러면 그건 더 이상 문제가 아니라고 생각할 수도 있겠다. 폭력도 그러한가? 거기에 폭력을 대입해도 그렇게 생각할 수 있는가? 그렇게 생각하는 사람은 많지 않을 것이지만, 아니 없다시피 할 테지만, 그렇게 행동하고 있는 사람은 부지기수일 거다. 지금의 폭력의 씨앗들은 계속 발아해 무럭무럭 자라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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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나간 책 다시읽기] <카타리나 블룸의 잃어버린 명예>


소설 <카타리나 블룸의 잃어버린 명예> 표지 ⓒ민음사



미국의 신문왕 조셉 퓰리처에겐 두 가지 얼굴이 있다. 언론과 신문의 최고 명예와 같은 '퓰리처상'이 조셉 퓰리처의 유언에 따라 제정되어 100년 넘게 최고의 권위를 자랑하고 있다. 반면 언론과 신문의 최악 수치와 같은 '옐로저널리즘'이 퓰리처에 의해 처음 시작되어 역시 100년 넘게 맹위를 떨치고 있다. 


옐로저널리즘은 언론의 '표현의 자유'를 악용해 선정적이고 자극적인 찌라시로 돈을 벌려는 자들을 일컫는데, 자본주의 팽창의 폐해라고 볼 수도 있다. 자본가들의 언론을 이용한 광고 수집에 언론들이 놀아날 수밖에 없는 것이다. 언론들끼리의 경쟁에서 대중들의 이목을 끌기 위해 더 자극적인 기사를 보낼 수밖에 없기도 할 것이다. 


옐로저널리즘은 개인을, 사회를, 나라를, 시대를 속절없이 망쳐버리기도 한다. 한 개인을 망치는 건 어렵지 않다. 1972년 노벨문학상 수상자 하인리히 뵐이 1975년 내놓은 <카타리나 블룸의 잃어버린 명예>는 옐로저널리즘의 폐해를 넘어 그 폭력의 자화상을 적나라하게 드러낸다. 


살인을 부른 옐로저널리즘 폭력


카타리나 블룸은 1974년 2월 24일 일요일 저녁 7시 4분경에 발터 뫼딩 경사의 집 초인종을 누르곤 놀란 뫼딩에게 자수한다. 자신이 12시 15분경에 자기 아파트에서 베르너 퇴트게스 기자를 총으로 살해했다고 말이다. 곧 수사가 시작되었고, 시간을 거슬러 2월 20일 수요일에 당도한다. 


그녀는 가정부로 일하며 성실하고 한편 적막하게 사는 평범한 여성. 2월 20일 저녁 볼터스하임 부인 집에서 열린 작은 파티에 참석한다. 그녀는 오직 루트비히 괴텐이라는 자와 춤을 추었고 함께 그녀의 집으로 간다. 그녀의 집은 철저한 감시 하에 있었다. 괴텐이라는 자가 은행강도이자 살인범으로 수배되고 있던 자였기 때문. 


목요일 오전 경찰은 카타리나 집을 급습한다. 하지만 괴텐은 이미 모습을 감췄다. 곧 카타리나에 대한 심문이 시작되고 당연한듯 옐로저널리즘에 의해 그녀에 대한 모든 것이 철저하게 공표된다. 그것도 전혀 의도하지 않은 부정적이기 짝이 없는 형태로. 비단 그녀뿐만 아니라, 마수는 그녀와 조금이라도 관계된 모든 사람들에게로 뻗는다. 괴텐을 진정 사랑했던 카타리나는, 사랑을 얻고자 명예를 잃는 선택을 한다. 


과연 그녀가 할 수 있는 게 있었을까. 그녀에게 '명예'라는 게 있었는가 싶을 정도로 <차이퉁>지와 <존탁스차이퉁>지는 그녀를 사지로 몰아넣는다. 마치 그녀로 하여금 되돌릴 수 없는, 하지만 그렇게 할 수밖에 없기도 한 짓을 저지르게끔 몰아간 것 같다. 카타리나가 퇴트게스 기자를 총으로 쏴죽인 것과 퇴트게스 기자가 카타리나를 옐로저널리즘 기조의 기사로 갈갈이 찢어발긴 것, 어느 것에 '높은' 점수를 줄 수 있을까. 


언어들의 혼합되고 혼란한 집합이 만들어낸 무명, 무지, 무책임의 폭력


카타리나의 '잃어버린 명예'는 '인격'과 다름 아니다. '인격살인'이라는 말을 들어보셨는가. 인간이 인간일 수 있는, 인간만이 가지고 있는 독자적 체(體)를 살해한 것이다. 비록 육체적 살인은 아닐지 모르지만, 육체 안에 자리잡은 인격의 살인은 사실 인간 자체의 살인과 다르지 않다. <차이퉁>과 <존탁스차이퉁>이 '표현의 자유'와 '무지'를 앞세워 카타리나를 향해 던진 돌은 명백히 살인자의 돌이었다. 


이 책의 부제 '혹은 폭력은 어떻게 발생하고 어떤 결과를 가져올 수 있는가'는 인간을 자본에 종속된 하수인보다 못한 존재로 보고 고의를 빙자한 무지의 소산인 언어적 폭력이 어떤 식으로 시작되고 어떤 식의 결말에 다다르게 되는가를 유추할 수 있게 한다. 혹, 책에서 카타리나가 저지른 폭력의 원인과 결과를 가리키는 것이기도 하겠다. 


작가가 저격하는 대상은, 결코 <차이퉁>, <존탁스차이퉁>을 비롯한 옐로저널리즘 따위가 아닐 것이다. 그들이 아무리 말을 비틀고 사실을 날조해 선정적이고 자극적이기 짝이 없는 기사를 날리려 해도, 최소한의 기본 바탕이 되는 말, 언어가 있어야 한다. 무명으로부터 시작된 소문, 삶 자체를 의심하는 경찰의 수사 및 조사, 아무렇지 않게 내뱉은 한 마디, 이 모든 게 자신들도 모르는 새에 범접할 수 없는 강물을 이룬다. 


이 책은 긍극적으로 그런 언어들의 혼합되고 혼란한 집합이 만들어낸 무명, 무지, 무책임의 폭력에게 화살을 쏘아보내려 하는 것이다. 그 위엔 옐로저널리즘의 탄생에 전적인 책임이 있는 자본주의 체제 따위가 아닌 폐허가 자리하고 있다. 자본주의에 의한 풍요에 가려 절대로 볼 수 없는 정신적 폐허 말이다. 


그래서 카타리나 블룸의 '잃어버린 명예'는 비단 카타리나뿐 아니라 이 세계를 살아가고 있는 모든 사람의 잃어버린 명예이기도 하다. 부지런하고 능력 있고 지극히 비정치적이며 경제적으로 번창하고 있는 한 사람, 카타리나 블룸에게 일어난 사건. 아주 다반사로 일어나고 누구에게나 일어날 수 있지만, 나한테 일어나진 않을 거라 생각하는 사건의 주인공은 당연히 누구라도 가능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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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래된 리뷰] 양익준 감독·각본·주연 <똥파리>


똥파리 같은 삶을 사는 이가 있다. 모두가 다 피하는 그. 그는 어쩌다가 그런 삶을 살게 되었을까? 그는 어떤 삶을 살게 될까? ⓒ(주)영화사 진진



용역 깡패 상훈(양익준 분)은 닥치는 대로 욕을 하고 폭력을 휘두른다. 돈을 받아와야 할 대상은 물론, 같이 일하는 후배들도 마음에 안 들면 가차 없이 팬다. 그런 그도 이복 누나와 그 아들인 이복 조카한테는 그나마 대해주는 편이다. 상훈은 사람을 패서 번 돈을 조카 손에 쥐어주며 그 표현을 한다. 


한편 상훈은 길을 가다 우연히 여고생 연희(김꽃비 분)와 시비가 붙는다. 안하무인 상훈에게 대적할 사람이 과연 이 세상에 있을까 하는데, 연희는 전혀 주눅들지 않고 상훈에게 대들며 욕을 날리고 침을 뱉고 때리기도 하지 않는가? 이에 상훈도 주먹을 날리고는 곧 둘은 그들만의 방식으로 가까워진다. 그들에겐 어떤 사연이 있는 것일까? 


상훈은 15년 만에 출소한 아버지를 찾아가 무지막지한 폭력을 가한다. 그는 왜 아버지에게 폭력을 날리는 것인가? 곧 기가 막힌 사연이 밝혀진다. 상훈이 어린 시절 아버지는 어머니에게 무차별 폭력을 휘둘렀다. 어느 날 급기야 식칼로 위협을 하려 하는데, 여동생이 사이에 끼어들어 대신 칼에 맞고 죽는다. 상훈이 여동생을 들쳐엎고 병원으로 향하고 뒤따라 오던 어머니는 차에 치여 유명을 달리한다. 그리고 이미 아버지는 새살림을 차렸던 것이다. 


연희에게도 사연이 있다. 엄마는 포장마차를 운영하다 용역 깡패에 맞아 죽고 없다. 아빠는 정신 이상으로 집에서 놀고 먹는데, 허구헌날 죽고 없는 엄마 타령이다. 오빠라고 있는 영재는 하는 일 없이 연희에게 돈을 뜯어가며 욕을 하고 폭력을 휘두른다. 여고생에 불과한 연희는 공부는 물론 알바를 해서 돈을 벌고 집안일을 도맡아 한다. 


양익준 원맨쇼의 수작 <똥파리>


개인적으로 생각하는 한국 독립영화 르네상스 한 가운데에 <똥파리>가 있다. ⓒ(주)영화사 진진



2009년작 독립영화 <똥파리>는 양익준 감독·각본·주연의 원맨쇼에 가까운, 그럼에도 수작 중 수작이라 할 만한 작품이다. 악마의 폭력을 휘두르는 가해자와 그로 인해 어떤 식으로든 인생을 송두리째 빼앗긴 피해자가 가족이라는 울타리 안에 함께 살아가면 어떻게 되는지 보여주거니와, 그 해결 방도를 나름대로 제시하고 또 피해자였던 가해자의 흔하디 흔한 자기 변명을 정면으로 응시한 문제작이다. 


이 작품은 2010년을 좌우한 독립영화의 르네상스 한가운데에 위치한다. 개인적으로 우리나라 독립영화 3대 작품으로 2005년작 <용서받지 못한 자>, 2009년작 <똥파리>, 2011년작 <파수꾼>을 뽑는데 <똥파리>가 그중 가장 덜 어렵고 가장 직선적인 작품이다. 그래서 역설적으로 가장 성공한 독립영화 중 하나이다. 


사실 이 영화는 상대적으로 그리 폭력적으로 비춰지진 않는다. 육체적 폭력의 수위 자체가 그리 높진 않은 것이다. 다만, 폭력의 주 상대가 다름 아닌 가족이라는 점에서 거부감이 크게 다가온다. 그리고 영화 내내 쉬지 않고 나오는 쌍욕도 거북하게 다가온다. 욕은 육체적 폭력의 전조처럼 느껴지기에 더 두렵고 무서운 것이다. 


그렇다면 우린 이 영화의 폭력 수위 자체가 아닌 폭력의 주 상대와 그 연유에 집중해야 한다. 혹여 거기서 폭력의 미학이라든지 폭력의 정당함 따위를 찾으려고 해서는 안 될 것이다. 폭력의 되물림이 결코 정당방위처럼 여겨져서는 안 된다. 나는 상훈의 폭력성이 아닌 상훈의 자상함과 따뜻함, 착함을 찾으려고 노력할 것이다. 


<똥파리>가 남겨둔 기회의 희극 가능성


일말의 가능성도 없이 나락 같은 비극으로 끝나기 마련인 폭력에 관한 영화들 와중에 기회의 희극 가능성을 남겨둔 <똥파리>. ⓒ(주)영화사 진진



위에서 언급한 <용서받지 못한 자>나 <파수꾼> 또한 다분히 폭력에 관한 영화이다. 자신도 모르는 사이에, 또는 인지 정도는 하고 있는 사이에 '폭력의 되물림'의 희생자가 된 이들이 주인공이다. 그들은 그 사슬을 끊고 과거의 나와 단절하고자 도움을 청하고 자신을 바꾸려고 노력하지만 결국 받아들여지지 않는다. 그 대상은 어쩔 수 없이 폭력의 되물림과 연관된 자들이다. 결국 주인공은 자살을 택한다. 


<똥파리> 주인공 상훈 역시  '폭력의 되물림'의 희생자다. 그 역시 그 사슬을 끊고자 다짐하고 자신을 바꾸고자 하려는데, 어이없게도 그는 죽임을 당한다. 그 대상은 예상했듯이 폭력의 되물림과 연관된 자이다. 누군가가 시작했을 이 폭력들은 결론적으로 가해자 없이 피해자만 속출시킨다. 


하지만 <똥파리>는 다른 작품과 달리 여지를 남겨둔다. 비극적 요소는 당연한 것이지만, 한편으론 기회의 희극 가능성, 그 씨앗을 완전히 거두어들이진 않는다. 상훈이 죽고 나서, 그를 제외한 거의 모든 이들이 함께 하는 모습이 보인다. 상훈의 아버지, 상훈의 이복누나와 남편, 그 어린 아들, 그리고 연희까지. 여기서 다른 누구도 아닌 상훈의 아버지가 눈에 띈다. 아이러니하지만, 어떤 '희망'과 '기회'의 열망을 엿볼 수 있다. 


물론, 다분히 비극적 요소도 있다. 그 연결고리는 제2의 상훈이라고 할 수 있는, 연희의 오빠인 영재. 그는 비록 불우하기 짝이 없는 가정환경이지만 꿋꿋하게 살아가는 연희와는 달리 상훈처럼 용역깡패의 길을 간다. 다름 아닌 그가 상훈을 죽이는데, 상훈의 아버지조차 희망과 기회의 공동체 안에 속하지만 그만은 속하지 못한다. 그리고 그 안엔 연희와 영재의 엄마를 죽게 한 이가 상훈이라는 비극의 선대(先代)가 있었으니...


폭력의 사슬을 끊어내는, 최소한의 해결 또는 방편


이 뫼비우스의 띠 같은 폭력의 사슬을 끊어낼 방법이 있는가? 이 영화는 그걸 몸소 보여준다. ⓒ(주)영화사 진진



어떤 종류의 폭력이든, 그것이 잉태된 이후에는 수많은 길이 존재한다. 하지만 가장 악질적인 폭력인 '가족에의 폭력'은 누가 어떻게 구원할 수 있을까. 거기엔 과연 길이 존재할까. 오직 비극으로의 길밖에 없지 않은가. 영화에서처럼 당사자들 중 누군가가 어떤 식으로든 사슬의 고리를 끊어내야 하는데, 그 사이에 퍼진 암세포들이 언제 들이닥칠지 모를 일이다. 이쪽이 해결되는 저쪽이, 저쪽이 해결되면 그쪽이 문제다. 


양익준 감독은 이런 거시적인 관점까지 완벽하리만치 균형있게 그려냈다. 이 세상에 완벽한 해결이라는 건 없다는 진리 위에, 비극의 계속되는 잉태와 희망을 꿈꾸고 기회를 주어야 한다는 양면을 올려놓은 것이다. 그는 불안하지 않은 상태를 불안해 하는 현대인의 모순적인 정상을 이런 식으로 포착해낸 듯하다. 


나 또한, 우리 또한 어떤 식으로든 폭력의 사슬 위에 서 있다. 생각하고 싶지도 않지만, 무수히 많은 종류의 폭력들이 지난 세월 나를 괴롭혀 왔다. 그건 즉, 나 또한 누군가를 괴롭혀 왔다는 뜻이다. 내가 알기론, 사람은 받은 것을 최소한은 돌려주려는 습성이 있다. 문제는, 그걸 당사자한테 돌려주긴 쉽지 않으니 다른 누군가에게도 전해지는 것이다. 그건 설사 내가 의식하고 있어도 할 수밖에 없는 부분이다. 


거기엔 당사자 또는 당사자가 포함된 집단에 어떤 큰 결단 내지 큰 사건이 수반되어야 한다. 그게 어떤 결과를 낳을지 전혀 알 수 없음에도 말이다. 심지어 그 결과가 대부분 그리 좋지만은 않다는 걸 알고 있음에도 말이다. 영화는 그 잔인하기 짝이 없는 속성에도 불구하고, 그것이 최소한의 해결 또는 나아감을 위한 방편이라고 말하고 있다. 


나는 다르다. 제3의 인물이 도울 수 있다고 생각한다. 비슷한 아픔을 겪은 사람이라면 비록 애초에 다가가기 힘들겠지만 훨씬 더 가깝고 이해 가능한 도움을 줄 수 있을 테지만, 그저 그(그녀)를 사랑하는 사람이라면 그 이후를 생각하지 않은 불행한 끝을 막을 수 있다고 생각한다. 인생이라는 게 멀리서 보면 희극이고 가까이서 보면 비극이라지만, 그 반대의 경우도 있을 수 있지 않은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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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래된 리뷰] <말죽거리 잔혹사>


검증이 안 된 신세대 스타를 앞세운 유하 감독의 차기작은 어땠을까? 주연뿐만 아니라 조연도 대부분 신인을 벗어나지 못했다. 감독의 의도일까? ⓒ싸이더스



2004년 당시 데뷔 3년이 채 안 된 두 신세대 스타를 앞세운 영화가 개봉한다. 영화 <동갑내기 과외하기>와 드라마 <천국의 계단>으로 최고의 주가를 올리고 있던 권상우, 여고 시절 KBS 도전 골든벨 출연 후 단번에 CF를 찍고 드라마 주연을 꿰차며 스타 반열에 오른 한가인이 그들이었다. 거기에 90년대 후반 패션모델로 데뷔한 후 연기자의 길을 꾸준히 걸으며 여러 드라마와 영화에서 얼굴을 보인 이정진이 주연의 중심을 잡았다. 지금의 기준으로 보면 상당히 파격적인 캐스팅이라 하겠다. 


조연의 면면도 비슷했다. 나름 잔뼈가 굵은 김인권을 제외하고는 이종혁, 박효준 등 경력은 물론 인지도에서도 거의 신인과 다름 없었다. 지금은 충무로 대세 배우 중 한 명인 조진웅은 이 영화에서 대사 한마디를 날리며 화려하게 데뷔(?)했다. 감독의 의도였을까, 제작비 등의 어쩔 수 없는 선택이었을까. 


주연, 조연 할 것 없이 화려하기 그지 없는 현재의 영화 캐스팅 수준과 비교를 해서 그렇게 느끼는 것일 수도 있겠지만, 경력을 떠나 인기나 연기 면에서 이 영화처럼 확실한 인지도 없는 이들이 대부분인 경우가 있었나 싶을 정도다. 독립영화라면 모를까 엄연한 상업영화에서 말이다. 


곤혹스러울 정도의 연기가 아쉽다


보는 사람으로 하여금 곤혹스러움을 느끼게 하는 두 주연배우의 연기는, 시간이 지나서 다시 보니 영화의 즐거움을 배가시킨다. 하지만 당시엔 얼마나 힘들었을까. ⓒ싸이더스



<결혼은 미친 짓이다>로 오랜만에 충무로에 돌아와 괜찮은 흥행과 비평에 성공한 유하 감독은 차기작으로 학교, 추억, 폭력의 앙상블 영화를 기획한다. 거리 3부작의 시작이기도 한 <말죽거리 잔혹사>다. 유하 감독은 학창 시절 경험을 바탕으로 시나리오를 썼다고 하는데, '남자'라면 누구나 꿈꿔봤음직한 그때 그 시절을 깔끔하게 보여준다. 


전남 보성에서 강남 말죽거리로 이사온 모범생 현수(권상우 분), 태권도장을 하는 아버지의 폭압적인 가르침 덕분에 공부도 곧잘하고 달리기나 농구도 곧잘하는 평범하지만 여러 모로 평균 이상의 학생이다. 그 덕분인지 학년 전체를 주름잡는 싸움꾼 우식(이정진 분)의 눈에 띄어 친구가 된다. 


그는 오지랍이 넓은 건지 태권도 정신에서 비롯된 정의감이 투철한 건지 생각이 없는 건지 나서지 말았으면 하는 데에 나서서 일을 자초하곤 한다. 그 와중에 천눈에 반한 은주(한가인 분)를 구해주려다가 일 아닌 일에 휘말리기도 한다. 그녀를 향한 사랑은 현수뿐만 아니라 우식이에게도 있었다. 결국 사귀게 된 건 우식과 은주, 소심하기만 한 현수는 주위를 맴돌기만 할 뿐이다.  


10년이 훌쩍 지난 작품이고, 신인들을 내세웠다지만, 아무리 봐도 형편 없는 연기는 웃음만 자아낼 뿐이다. 그 중심에는 현수와 은주, 즉 권상우와 한가인이 있다. 현수는 후반에서의 싸움 시작과 끝에서만 톤이 올라갈 뿐 시종일관 힘 없고 우울한 톤을 한 음으로 유지하고, 은주는 처음부터 끝까지 역시 힘 없고 우울한 톤을 한 음으로 유지한다. 여기서 질문을 던지지 않을 수 없다. 이건 의도된 연기인가?


70년대 후반을 배경으로 한 만큼 목소리에 있어서 당시의 느낌을 살리려 했을 지도 모른다. 당시 영화들을 보면 굉장히 연극톤이지 않은가. 그런 걸 의도한 것일까. 그렇다고 보기엔 다른 이들의 연기는 너무 다르다. 지극히 현대적이다. 이 두 주연배우의 연기, 특히 연기에서 굉장히 중요한 요소인 발성이 터무니 없이 형편없다는 걸 알 수 있다. 영화에는 이 둘만 등장하는 장면이 꽤 있는데, 이상하게 그 장면에서는 어색하기 짝이 없다. 눈과 귀를 둘 곳이 없다. 그들도 곤혹스러워하는 게 느껴질 정도다. 감독은 왜 그런 연기를 그 정도로 넘어갔을까. 의문이다. 


이런 식의 교육은 폭력 이상의 악질이다


교육이 아닌 교화를 하는 학교. 모든 학생이 똑같을 순 없는데, 똑같으라고 강요하는 학교. 지금도 여전할까? 그때는 참으로 잔혹했다. ⓒ싸이더스



영화는 현수의 성장 스토리로 읽힐 수 있다. 평범한 학생이 일진을 모조리 깨부수고 퇴학까지 당하는 처지가 되니까 말이다. 이게 도대체 왜 성장이냐고 의문을 가질 만하다. 학교폭력을 미화하는 게 아니냐고 되받아칠 만하다. 하지만 당시 시대를 본다면, 당시 국가상을 들여다본다면, 그들이 어떻게 학생들을 통제했는지 듣는다면, 현수의 그와 같은 행동을 성장으로 해석할 수 있음에 충분히 동의할 수 있을 것이다. 


때는 1978년, 박정희의 친위 쿠데타 이후의 유신 시대 한복판이다. 학생들은 등교하면서 선도부에게 '충성'을 외치고, 학교에는 학생 교화를 이유로 군인이 상주했다. 학생들에게 국가에 대한 충성을 요구하며, 국가가, 학교가 원하는 인간이 되길 바랐다. 그렇지 않을 때엔 가차 없는 폭력이 날아왔다. 


그 폭력에는 육체적 폭력, 정신적 폭력, 성적 폭력, 언어 폭력, 인권 유린 폭력 등 모든 종류가 망라되어 있었다. 차라리 단순무식한 육체적 폭력이 가장 낮은 수위의 폭력으로 생각될 정도였다. 그 나이 또래라면 누구나 한 번쯤 해봤음직한, 해보고 싶음직한 행동을, 학교에서는 상상을 초월할 정도의 폭력으로 교화시키려는 것이었다. 


엇나가는 게 당연한 거라 생각할지 모른다. 그걸 당연하다고 생각하면 현수의 성장 스토리는 더 이상 성장이 아니게 된다. 하지만 그와 같은 엇나감은 당연한 게 아니었다. 그런 폭력을 당하는데 당연히 움츠려들며 더욱더 국가가, 학교가 원하는 사람이 되려하는 게 정상 아니겠는가. 대부분의 아이들이 그런 인간이 되어 갔다. 어떤 인간으로 되어 갔든 그들의 잘못도 그들의 자발적인 선택도 아니었다는 게 중요하다. 


반면 현수는 최소한 자발적인 선택을 했다. 반항심과 함께 체력을 키워 가며 반발했다. 그렇다고 그가 돌이킬 수 없는 짓을 저지른 것도 아니었다. 그저 싸움에 휘말렸고 약간의 다툼을 했다. 그리고 성적이 떨어졌다. 학교는 그를 잡아주려 하지 않았다. 그저 '악질'이라고 몰아세울 뿐이었다. 그가 퇴학을 당하는 대형 사건을 저지른 건, 다른 누구도 아닌 학교의 책임이 아닌가. 최소한 '너의 미래를 위해서는, 그렇게 하면 안 된다'라는 제스추어는 취해야 하지 않겠는가. 무조건 '이거 악질이네. 안 되겠어. 혼 좀 나야겠다' 하고 끝나면 그게 무슨 교육인가. 


잔혹의 시대를 살아간 청춘을 위로하다


한 시대가 저무는 1978~9년. 그들이 헤쳐온 잔혹의 시대도 저무는가. 이 영화는 그 시대를 살아간 모든 청춘을 위로해준다. 하지만 그 상처는 쉬이 아물지 않을 듯하다. ⓒ싸이더스



영화는 이소룡으로 시작해 이소룡 대 성룡으로 끝난다. 무슨 말인고 하면, 영화의 시작이 이소룡 영화를 좋아해 빠져들듯 보는 현수의 어린 시절이었고, 영화의 끝이 영화관에 이소룡 영화와 성룡 영화가 동시에 걸렸을 때 현수의 이소룡 옹호와 흉내, 그리고 친구 햄버거의 성룡 옹호와 흉내가 대결하는 장면이었다. 


성룡이 본격적으로 이름을 알린 게 영화 <취권>이었는데 1978년에 나와 우리나라에는 1979년에 들어 왔다. <말죽거리 잔혹사>의 배경이 되는 1978~9년과 정확히 일치하는데, 그때까지도 아직 이소룡의 인기가 훨씬 우위에 있었다. 그렇지만 곧 성룡의 전성 시대가 열리는 바, 한 시대가 저물고 새로운 시대가 떠오른다는 말이겠다. 


박정희 유신시대도 1979년에 비극적으로 종말을 고하는 것과 궤를 같이 한다. 또한 그건 곧 현수와 친구들의 '말죽거리 잔혹사'도 비로소 끝났다는 게 아닐까. 한 시대가 저물고 새 시대가 열리는 건 시원섭섭하고 슬프고 흥분되고 기대되는 일이다. 하지만 어떤 건 그렇고 어떤 건 그렇지 않을 테다. 


이소룡의 시대가 저물고 성룡의 시대가 오는 건 그럴 테지만, 그들의 잔혹의 시대가 가는 건 조금은 다른 차원이다. 평생 다시 오지 않을, 사랑과 우정과 청춘의 학창 시절을 자기 손으로 지워버릴 수밖에 없었던 그들의 찢어진 마음을 보상해줄 이가 어디 있겠는가. 그들을 이해조차 하지 않을 이들이 대부분이 아닐까. 영화는 그런 시대를 살아간 모든 청춘들을 위해 나름의 방식으로 위로하는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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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래된 리뷰] 유하 감독의 <비열한 거리>


문인 출신을 대표하는 유하 감독, 그를 대표하는 '거리 3부작', 그 중에서도 대표격인 <비열한 거리>다. ⓒCJ엔터테인먼트



거장 이창동 감독과 함께 한국 영화판의 대표적 문인 출신 감독으로 유명한 유하 감독. 1988년에 등단해 90년대 초 문명을 날렸다. 시집 <바람 부는 날이면 압구정에 가야 한다>가 평단으로부터 주목을 받고 대중으로부터 인기를 얻었다. 베스트셀러가 되니, 영화 제작 제의가 들어 왔다. 이미 1990년에 영화 감독으로 데뷔한 그는, 거액의 판권 계약을 거절하고 직접 연출에 이른다. 잘못된 선택이었을까. 이후 10여 년 동안 그는 영화를 만들지 못했다. 


10여 년 만에 들고 온 <결혼은 미친 짓이다>는 수작이었다. 새천년을 시작하는 시점에서 제목부터 센세이션했다. 동명의 소설을 영화화한 이 작품은, 지금은 고유명사를 넘어 보통명사가 되었다. 이후 3년 만에 기대를 안고 찾아 온 <말죽거리 잔혹사>. 이 작품으로 '유하'라는 이름이 고유명사가 되었다. 10년 간 이어질 '거리 3부작' 혹은 '강남 3부작'의 시작이다. 


이 3부작 중 2번째 작품이자 유하 감독의 대표작, '유하'를 보통명사로 만들어 줄 작품은 <비열한 거리>다. 세계 영화사에 길이 남을 명작인 마틴 스콜세지 감독의 <비열한 거리>와 같은 제목이다. 한국 느와르에서도 길이 남을 만하니, 그 제목에 큰 누를 끼치진 않을 듯하다. 


완벽한 시나리오, 헤어나올 수 없는 개미지옥으로


가장 먼저 시나리오를 언급하지 않을 수 없다. 벼르고 벼른 듯한 완벽한 시나리오 그리고 편집이다. 영화의 처음부터 끝까지 빈틈 없이 꽉 짜여 있다. 주인공이 그렇게 될 수밖에 없었다는 느낌이 강하게 들게 만든다. 선택의 여지는 없었을까? 어딜 봐도 찾기 힘들다. 그는 그런 선택을 할 수밖에 없었다. 신의 기계적 출현을 의미하는 '데우스 엑스 마키나'를 철저히 배제했다. 


'비열'하기 짝이 없는 판에서 '순수'한 영혼의 병두. 그는 식구들을 건사하기 위해 돌이킬 수 없는 길을 건넌다. 그를 낚는 황 회장. ⓒCJ엔터테인먼트



병두(조인성 분)는 여러 동생들을 건사하는 건달이다. 스폰서를 잘못 만나 허송세월 보낸 것도 모자라 빈털털이가 되었다. 그래도 식구들을 건사하고 동생들을 챙겨야 하기에, 돈 찾아와서 형님께 바치고 일정 부분을 받고 성인 오락실을 운영하며 어떻게든 살아가려 한다. 그런데 그것도 쉽지 않다. 형님은 돈을 적게 나눠 주고, 성인 오락실도 라이벌 조직에게 박살났다. 결국 그 때문에 후배한테 성인 오락실이 넘어가기도 했다.  

뭐든 했다고 생각하는 병두. 실상은 조직의 보스이지만 겉으론 엄연히 사업가인 황 회장은 끝없이 자신을 괴롭히는 박 검사 때문에 두 발 뻗고 살 수가 없다. 그를 '보고' 싶다. 그런데 최측근이자 병두의 형님인 상철이 못한댄다. 그 기회를 잡은 병두, 박 검사를 죽이면 황 회장이 스폰서를 서주고, 그는 다시금 메인이 되며, 식구들을 건사할 수 있다. 그는 돌이킬 수 없는 짓을 저지르고, 그의 인생은 그야말로 헤어나올 수 없는 개미지옥으로 빨려 들어간다. 


빛나는 폭력성, 비열하지만 순수한 이들


영화는 조직폭력배의 실상을 통해 극대화된 폭력성을 선보인다. 병두로 하여금 돌이킬 수 없는 짓을 저지르게 한, 극도로 사실적인 조폭들끼리의 싸움신이 초반에 펼쳐진다. 여러 조폭 영화들에서 봐 왔던, '준비, 시작' 류의 싸움과는 차원이 다르다. 다짜고짜 덤벼 싸우다가 칼을 꺼내 급소만 피해서 찌르고 베고 찍고. 이게 진짜겠구나 싶다. <죽거나 혹은 나쁘거나>의 섬뜩한 싸움신에 버금가는, 폭력성이 빛나는 명장면이다. 


또다른 장면은, 병두가 살인을 저지르는 장면이다. 여기에는 복잡한 감정이 소용돌이 친다. 폭력성 이상의 '욕망'이, 헤어나올 수 없는 욕망의 시작과 현재와 미래를 보여준다. 그가 조폭이 아니었더라도, 그와 같은 짓을 저지를 수 있었을 것이다. 욕망에서 비롯된 행동이니까 말이다. 그 욕망이라는 게 누구나 가지고 있는 거다. 가장 큰 건, 식구들 건사해야겠다는 의지 그리고 위로 더 올라가고 싶다는 본능, 지인들에게 잘 보이고 싶다는 생각 등. 일반 회사원의 욕망과 다를 게 무언가. 


<비열한 거리>는 폭력을 극대화한다. 싸움과 살인을 대표로 내세웠는데, 그 한 가운데에 병두가 있다. 극도의 사실주의에서 오는 소름. '이것이 진짜다.' ⓒCJ엔터테인먼트



그래서 병두는 이 영화에서 가장 비열하지만 가장 순수하다. 아니, 정확히 말하자면 자신이 가장 비열하다고 생각해 속을 끓이지만 사실 가장 순수하다는 것이다. 그에 비하면 황 회장을 비롯해 형님 상철, 친구 민호, 동생 종수 등은 비열하기 짝이 없다. 그 사실을 그만 빼곤 누구나 알고 있으니, 참으로 비극적이기 짝이 없는 캐릭터다. 


감독은 소름끼치는 싸움신과 이들의 비열한 모습을 통해, 이야말로 진짜 조폭의 세계라고 말하고 싶었던 것 같다. 그의 의도는 정확히 적중했다. 내가 죽지 않기 위해 누군가를 죽이는 적자생존, 단순히 내가 더 높이 올라가기 위해 누군가를 죽이는 게 아니다. 어제의 적이 오늘의 동료이자 형제가 되고, 어제의 식구가 오늘의 적이 되어 나를 죽인다. 그런데, 이들은 비열한가? 이들도 병두와 다를 바 없는 것 같은데, 다만 병두보다 조금 덜 순수한 것 같은데, 조금 더 순수한 병두 덕분에 살아남은 것 같은데, 이들도 비열한 건가? 진짜 비열한 건 이들로 하여금 그렇게밖에 할 수 없게 만든 누군가 혹은 운명이라는 헤어나올 수 없는 굴레가 아닌가?


'강남' '거리' '욕망' '폭력' 3부작


<비열한 거리>를 논할 때면, <말죽거리 잔혹사>와 <강남 1970>을 앞뒤로 둔 '거리 3부작' 또는 '강남 3부작'을 언급하지 않을 수 없다. 합쳐서 '강남 거리 3부작'이라고 해야 할까. 잘 들여다보면, '욕망 3부작'이라고 하는 게 맞겠다 싶다. 더 포괄적이고 핵심에 가깝다. 그렇지만 큰 얘기라 미시적으로 접근할 필요가 있다. 박찬욱 감독의 <박쥐>, <스토커>, <아가씨>도 '욕망 3부작'이고, 박범신 소설가의 <촐라체>, <고산자>, <은교>도 '욕망 3부작'이라 칭할 수 있다. 그러니 유하 감독의 3부작은 욕망 중에서도 '폭력'을 말하는 것이니 앞엣것보다는 '폭력 3부작'이라 하는 게 맞겠다. 


우린 여기서 한 개의 '라인'을 발견할 수 있다. '강남'에서 '폭력'으로 이어지는 라인이다. 화려하게 치장된 그곳이 태초에 폭력과 욕망이 서로를 잉태하고 서로를 죽이는, 그야말로 아수라의 지옥이다. 그 정점이 바로 이 <비열한 거리>인 것이다. 


한번 시작하면 돌이킬 수 없다는 걸 안다. 하지만 가야 한다. 가지 않는 것도 돌이킬 수 없기 때문이다. 아수라의 지옥으로 가야만 한다는, 고뇌. ⓒCJ엔터테인먼트



유하 감독의 '폭력 3부작' 앞에는 '청춘'이 따라다닌다. 그렇지만 거기에 '여성'은 없다. 여성은 남성의 전유물 또는 주위 인물로 비춰질 뿐이다. 그러는 한편 폭력의 한 가운데 던져진 남성이 유일하게 안식을 찾을 수 있는 안식처이기도 하다. 여하튼 중심이 될 순 없으니, '폭력 세계'에 발을 들여다 놓지 않게 하려는 의도의 산물일까 아니면 폭력으로 움직이는 이 '인간 세계'의 주변 인물인 걸까. 아무래도 전자가 맞지 않나 싶다. 감독이 그린 폭력 세계는, '폭력' 자체는 보편적일지는 몰라도 '세계'는 특수성을 띠고 있기 때문이다. 


폭력이라는 게, 욕망이라는 게, 반드시 시작이 있다. 누구나 그때가 있다. 그건 한 번 시작되면 돌이킬 수 없는, 헤어나올 수 없는 종류의 것이다. 우린 그렇게 살아간다. 인간이기에, 수위를 조절하면서 내보이지 않으면서 자신과 싸우면서 욕망에 먹히지 않을 수 있다. 그런데, 나도 모르는 새 욕망이 이끄는 대로 가버리면 어떡하지, 정신을 차려보니 돌이킬 수 없는 상황이면 어떡하지, 그것이 내가 어떻게 할 수 없는 운명이면 어떡하지... 순간 치를 떠는 생각을 하게 되는 나를 발견하곤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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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리뷰] <서프러제트>


지금은 당연한 것들 중 하나인 '민주주의’. 그리고 민주주의의 꽃 ‘선거’. 여성과 흑인의 참정권은 민주주의가 자리를 잡고 나서도 오랫동안 주어지지 않았다. 여성의 경우 그 어떤 참정권 운동보다 길었다. 결정적으로 과격했다. 영화 <서프러제트> 포스터 ⓒUPI코리아


영화 <서프러제트>는 일방적이다. 20세기 초 영국, 50년 동안 계속된 여성 참정권 운동에도 불구하고 정부는 끄떡없다. 운동에 참여한 여성들은 과격해진다. 그들 말마따나 정부가 유일하게 이해하는 말이 폭력이기 때문이다. 돌을 던져 건물 유리창을 박살내는 걸 시작으로, 비어 있는 건물에 불을 지르고 유력 정치가에 폭력을 휘두르기도 한다. ‘말이 아닌 행동으로라는 급진적 구호를 내건 서프러제트의 주요 활동이었다.

 

가상의 인물 모드 와츠가 어떻게 서프러제트의 일원이 되어 과격한 폭력 활동까지 하며 여성 참정권 운동에 전력을 다하게 되었나를 앞뒤 가릴 것 없이 직진하는 식으로 그려낸 영화는, 심오한 고민이나 산재한 문제들을 뒤로 하고 현상에 집중한다. 엄연히 존재하는 역사의 한 면과 본질을 무시한 것인데, 하등 이상할 것 없는 괜찮은 선택이었다. 서프러제트를 이끈 전설적 인물 에멀린 팽크허스트가 아닌 그녀에게 감화된 수많은 여성 중 한 명을 가상의 인물로 내세운 점만 봐도 그렇다. 감독은 역사적 사실을 바탕으로 하고 싶은 얘기를 한다.

 

지금은 당연한 것들이 당연하게 될 때까지 수많은 시련이 있었다는 걸 안다. 그중 하나가 민주주의이고, 민주주의의 꽃 선거. 특히 여성과 흑인의 참정권은 민주주의가 자리를 잡고 나서도 오랫동안 주어지지 않았다. 여성의 경우 그 어떤 참정권 운동보다 길었다. 결정적으로 과격했다. 마틴 루터 킹 목사의 비폭력 투쟁과 결이 완전히 반대인바, 그녀들의 이야기를 어떻게 읽고 받아들여야 하는지 망설이지 않을 수 없다.


흔한 여성 노동자가 용기 있는 선택을 하기까지


영화는 세탁공장에서 일하는 흔한 여성 노동자인 모드 와츠(캐리 멀리건 분)가 남성 고용주의 부당한 심부름(남자가 해야 하는 일을 떠맡김)을 가는 도중 서프러제트에 의한 폭력 활동을 목격하며 시작된다. 이후 세탁공장에서 일어나는 여러 남녀차별에 차츰 눈을 뜬다. 우연히 엉겁결에 의회에서 증언을 하게 되는 모드, ‘인생을 바꿀 수 있을 것 같아서증언했다는 진심어린 말이 여기저기 회자된다. 때문에 정부에서 찍은 요주의 인물이 된다.



세탁공장에서 일하는 흔한 여성 노종다인 모드 와츠는 우연히 서프러제트의 폭력 활동을 목격한다. 이후 세탁공장에서 일어나는 여러 차별에 차츰 눈을 뜬다. 영화 <서프러제트>의 한 장면. ⓒUPI코리아



여성 참정권 가부 발표가 있던 날 현장에 참여했다가 체포되는 모드, 감옥에서 여성의 굴욕을 맛보고는 발을 빼려 한다. 하지만 더 심해진 차별을 보고 다시 현장으로 향한다. 그때 에멀린 팽크허스트의 연설을 듣고 감화된다. ‘물러서지 말아요, 끝까지 싸웁시다, 우리는 이길 거예요. 노예가 되느니 반역자가 됩시다!’ 한 번 더 잡혀갈 위기에 처한 모드, 그런데 감옥이 아닌 집 현관으로 끌고 가는 게 아닌가? 남편한테 맡기면 알아서 할 거란 말과 함께.


남편의 행동에서 여성 참정권 운동의 진정한 적이 무엇인지 알 수 있다. 정부가 행하는 폭력에 비할 바가 아니다. 남편은 그녀를 쫓아내고는 아이를 혼자 키울 자신이 없다는 이유로 입장 보내 버린다. 남자인 남편의 머릿속에 뿌리박힌 사상, “‘아내이고 아이의 엄마일 뿐 그 이상도 이하도 아니다.” 그녀들이 맞서야 했던 건 참정권이 아니라 세상 거의 모든 남자, 나아가 여자들에게도 뿌리박힌 그와 같은 사상이었다.


그로부터 100년이 훌쩍 지난 지금은 달라졌을까. 지금은 물론 여성에게도 참정권이 있다. 그러나 문제는 그게 아니다. 참정권은 돌아갔지만, 뿌리 깊은 사상은 아직 인 것 같다. 여전히 여자를 남편의 아내이자, 아이의 엄마로만 생각한다. 아직 갈 길이 멀다.

 

가장 효율적으로 강한 목소리 내기, '폭력'

 

쫓겨난 모드가 갈 곳은 서프러제트 일원의 집뿐이다. 그녀를 온전히 이해하고 받아줄 사람이 어디 있겠는가. 가족에게까지 한순간에 내팽개쳐진 그녀는 서프러제트 활동에 매진한다. 아무도 그녀들의 말에 귀 기울이지 않는 상황, 가장 뼈아픈 건 같은 여성들도 마찬가지라는 사실이다. 대다수 여성들은 위험을 무릎 쓰고 현실을 바꿀 마음이 없다. 그렇게 태어나 그렇게 살다가 가는 게 운명이니 하고 당연하게 받아들이는 것이다.



20세기 초 영국, 50년 동안 계속된 여성 참정권 운동에도 불구하고 정부는 끄떡없다. 운동에 참여한 여성들은 과격해진다. 정부가 유일하게 이해하는 말이 ‘폭력’이기 때문이다. 서프러제트는 '말이 아닌 행동으로’라는 급진적 구호를 내걸고 활동한다. 영화 <서프러제트>의 한 장면. ⓒUPI코리아



남은 건 뭘까. 격렬히 시위하고 유리창을 깨고 의회에 청원해도 그녀들의 목소리는 속절없이 묻히지 않는가. 정부는 그 행위를 관심을 얻어 보려는수작으로 치부하고 만다. 그렇다면 남은 건 차원을 달리하는 행동이다. 그들이 행하는 짓보다 더한 행위, 힘없고 무능하다고 여기는 여성이 보여줄 수 있는 가장 유능한 행위인 폭력말이다. 그것도 생각하기 힘든 폭력.

 

폭력은 격렬한 고민을 수반한다. 아니, 반드시 수반해야 한다. 폭력이라는 건 인간이 하지 말아야 할 가장 악랄한 행동이기 때문이다. 서프러제트는 폭력을 목소리로 인지했다. 가장 효율적으로 강한 목소리를 낼 수 있는 방편으로 말이다. 그 대상이 다름 아닌 남성이었기에.

 

지금 한창 목소리가 높아지고 있는 페미니즘과는 결이 다르다는 걸 말할 필요가 있겠다. 여성 참정권 운동이 페미니즘에 속해 있긴 하지만, 여성 참정권은 겉으로 드러난 활동이자 시작일 뿐이다. 거기서 끝나는 건 아무 것도 아닌 것과 다름없다. 진정 쟁취할 건 남녀평등에 있겠다. 아직 여러 면에서 남녀평등은 실현되지 않았다.

 

올바른 일이라면 행동하라

 

남녀평등에 대해 말할 때 굉장히 조심하는 편이다. 남성과 여성의 차이를 말할 때는 가끔 말을 더듬기도 할 정도다. 조심도 조심이지만, 스스로 남녀평등에 대해 절대적이리만치 선을 그어놓고 있기 때문이다. ‘남자는-’ ‘여자는-’이라는 말 자체가 나오지 않아야 하지 않겠냐는 생각 말이다. 그런데 그게 정말 쉽지 않다. 남자를 옹호하고 있는 자신을 발견하곤 한다. 특히 민감한 사항인 군대, 결혼 얘기가 나올 때가 그렇다.

 

여자들이 여자니까 ~일 수밖에 없다는 식으로 말할 때 받아들이기가 힘들다. 영화에서 남자들의 생각에 당연한 듯 동조하는 여자들의 심리처럼 말이다. 그런 이들이 남녀평등을 외치면서 남자는~’이라고 말하면 내 머릿속에서 남녀평등이 흔들리곤 하는 것이다.


요즘 페미니즘에 관해 수많은 논란이 오고간다. 이 영화는 그 시작이 성스러웠음을 보여준다. 비록 폭력을 동반했지만, 합당한 권리를 찾기 위한 그들의 행동은 지극히 당연했다. 영화 <서프러제트>의 한 장면. ⓒUPI코리아


 

영화는 그런 나의 고민을 붙들어 주었다. 다른 건 생각하지 않은 채 오로지 여성 참정권을 되찾기 위해 전진하는 그녀들의 모습이 성스럽게 다가왔다. 올바른 일이라면 행동해야 한다고 말하고 있는 것 같다. 물론 거기엔 많은 고민과 고충이 뒤따르겠지만, 실제로 뒤따랐겠지만 적어도 영화는 그렇게 보여주지 않았다. 행동만이 필요할 때가 있다는 걸 인정해야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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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국 대표 소설 읽기] <필론의 돼지>


<필론의 돼지> 표지 ⓒ아시아



"필론이 한번은 배를 타고 여행을 했다. 배가 바다 한가운데서 큰 폭풍우를 만나자 사람들은 우왕좌왕 배 안은 곧 수라장이 됐다. 울부짖는 사람, 기도하는 사람, 뗏목을 엮는 사람… 필론은 현자인 자기가 거기서 해야 할 일을 생각해 보았다. 도무지 마땅한 것이 떠오르지 않았다. 그런데 배 선창에는 돼지 한 마리가 사람들의 소동에는 아랑곳없이 편안하게 잠자고 있었다. 결국 필론이 할 수 있었던 것은 그 돼지의 흉내를 내는 것 뿐이었다." (본문 58~59쪽 중에서)


많은 사람의 정곡을 찌를 우화이다. 굳이 내가 무엇을 하지 않아도, 세상은 돌아가게 마련이다. 관성의 법칙도 있지 않은가? 세상은 제자리로 돌아오게 마련인 것이다. 그런데 조급하게 나서서 뭐라도 해보려고 하니, 현자가 보기에는 딱할 따름이다. 그러고 보니 필론이 현자가 아닌 거다. 


필론과 돼지의 우화로 사회를 바라보다


이문열의 <필론의 돼지>는 필론과 돼지의 우화를 바탕으로 사회를 바라보았다. 이 소설도 그의 스타일에 맞게, 어떤 특수한 상황을 설정하고 그곳에 여러 인간 군상을 배치시켰다. 곧 사회의 축소판이다. <필론의 돼지>의 특수한 상황은 이렇다. 1980년대 대학을 졸업한, 우쭐댈 만한 학력을 가진 주인공이 군대를 제대하고 군용열차에 올랐다. 그곳에서 멍청하기 짝이 없었던 훈련소 동기 '홍'을 만나고, 얼마쯤 지나 술 취한 '검은 각반 두른 현역' 즉, 특전사 현역이 난장을 피우며 돈을 빼앗는 장면을 목격한다. 백 명에 육박하는 육군 예비역들은 다섯에 불과한 특전사들에게 꼼짝도 못하거니와, 그 또한 아무것도 못하고 똑같이 돈을 빼앗길 뿐이다. 


그에게 특전사보다 앞 선 문제는 다름 아닌 홍이다. 본명이 홍덕동인 홍은 워낙 멍청했기에 '홍 똥덩이'라고 불렸는데, 그런 홍이 자꾸 자신과 맞먹으려 하는 게 아닌가. 그가 이 상황에 대해 생각하고 있는 바를 홍도 비슷하게 생각하고 있는 것이다. 정확하게는, 홍은 분노는 커녕 좋은 게 좋은 거라며 아무렇지 않은 듯 행동하는 반면 그는 이 상황에 분노하고 있다. 하지만 그도 결국은 홍처럼 행동하고 만다. 


그런 경험 한 번쯤 있을 것이다. 어느 모로 보아도 나보다 못한 사람과 섞이기 싫어할 때가, 그런데 생각은 다를지 몰라도 그나 나나 다를 바 없는 행동을 하고 있는 걸 알게 될 때가, 그렇게 분노와 좌절과 자기혐오를 느낄 때가 말이다. 내가 그 반대로 못한 사람일 때는 움츠려들고 아무것도 못하곤 하는데, 하필 내가 잘난 사람인 것 같을 때는 그렇게 되곤 한다. <필론의 돼지>에서 그는 현자 필론이고, 홍은 돼지일 거다. 행동하지 않는 지식인은 '말짱 황'이다. 


정작 중요한 건 '폭력'의 정당성 여부


술취한 특전사 현역 다섯 명이 육군 예비역 100여 명이 몸을 실고 기분 좋게 집으로 향하는 객실로 난입해, 되지도 않는 노래를 부르며 돈을 갈취한다. 대부분의 예비역들은 3년 간 '당했던' 뼛속 깊은 무력감으로 순순히 돈을 준다. 종종 저항의 불꽃이 일지만 더 이상 번지지 못하고 사그라든다. 그 또한 분노로 치를 떨지만 할 수 있는 건 아무것도 없다. 아니, 아무것도 없다고 생각한다. 


그러던 중, 익명의 목소리가 들린다. 100명이 다섯 명을 이기지 못할 이유가 도대체 무엇이냐고 말한다. 다같이 달려들면 당연히 이길 거라고 말한다. 이 선동에 맞춰 수많은 발길질이 특전사 현역 다섯이 아닌 한 명씩으로 향한다. 아무리 단련된 그들이라고 당해낼 도리가 없다. 무참히 쓰러져 얼마 전까지 그들이 행했던 바를 그들이 당한다. 소수 권력의 무참한 말로다. 


이 지점이 논란 거리가 될 수 있다. 이 소설은 주인공으로 대표되는 이 시대의 지식인이 행동하지 않을 때 돼지와 다를 바 없다는 걸 역설하고 있다. 하지만 정작 중요한 바는 '폭력'의 정당성 여부에 있다. 작가는 주인공의 생각을 빌어 폭력의 악순환을 비판하고자 한 것 같다. 


"만약 이들을 진실로 죽여야 할 대의가 있다면, 그에게도 동료 제대병들과 함께 살인죄를 나눌 양심과 용기는 있었다. 그러나 이미 그곳을 지배하는 것은 눈먼 증오와 격양된 감정이 있을 뿐, 대의는 없었다."(본문 68쪽 중에서)


지배자의 폭력과 피지배자의 폭력은 같지 않다


과연 그럴까. 과연 그런 것일까. 주인공의 눈에는 지배자의 폭력과 피지배자의 폭력이 같아 보이는가. 작가도 그렇다. 주인공이 돼지와 다를 바 없다는 걸 보여주기 위해서 그곳에 대의가 없다는 핑계를 댔다고 치더라도, 그렇게 생각하고 말하고 행동하게 해서는 안 되는 거였다. 그곳에서 아무것도 한 게 없는 주인공에게서 그런 생각이 나오는 건 어불성설이다. 물론 하나의 우화로 작동하는 것이겠지만, 폭력에 대한 생각은 우화로 볼 수 없다. 


그렇다면 일제 시대 친일 부역자들을 모조리 잡아 그에 맞는 벌을 받게 하는 것이 부당하다고 말할 수 있다는 것인가? 그냥 좋은 게 좋은 것이야, 하면서 그들은 그들대로 나는 나대로 살아가면 된다는 것인가? 말도 안 되는 생각이다. 많이 오버된 것 같지만, 충분히 같은 맥락이다. 


물론 크게 보면 특전사 현역이나 육군 예비역이나 국가와 시대가 낳은 피해자일 것이다. 그런 식으로 생각하면 얘기는 달라진다. 하지만 이 소설은 그런 생각이 일언반구 들지 않게 한다. 단지 폭력에 당한 만큼 폭력으로 갚는다는 것이 대의에 맞지 않는다고 보고 있을 뿐이다. 현상만 볼 뿐 본질은 보지 '않은' 것 같다. 본질을 보았으면, 한 발 더 나아가 폭력과 폭력이 만나게 된 그 상위층의 폭력에 대해 생각했어야 했다. 


<우리들의 일그러진 영웅> 못지 않은 탁월한 알레고리 형식으로 1980년대 우리 사회를 들여다본 이 소설은, 그러나 이처럼 잘못된, 좋게 말해 논란 거리가 되는 바를 남겼다. 그럼에도 하나는 확실하다. '필론의 돼지'는 1980년대 우리 사회뿐만 아니라 그 어느 때 어느 곳에도 존재한다는 것을, 그들이야말로 그 누구보다 '현명하게' 세상을 살아가고 있다는 것을 말이다. 어떻게 보든 '그들'은 분명 혐오스러운 존재다. 


그런데, '그들'이 언제까지 '그들'일까. '우리'일 수도 있고 '나'일 수도 있지 않을까. 그럴 때도 여전히 혐오스러운 존재일까. 문제는 그 혐오스러운 존재들이 그 어느 때보다 지금 많이 있다는 것이다. 더욱 큰 문제는 그 혐오스러운 존재들을 환영하고 그들이 더 많아지길 바라는 존재들이 있다는 것이다. 필론의 돼지가 스스로가 아닌 그들이 만들어낸 거라면, 세상이 어떻게 될지 심히 걱정된다. 


아시아 출판사가 후원하는 '한국 대표 소설 읽기'의 일환입니다. 

'바이링궐 에디션 한국 대표 소설'과 함께 앞으로도 계속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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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나간 책 다시 읽기] <소년이 온다>


<소년이 온다> 표지 ⓒ창비



5.18은 내게 결코 가깝지 않았다. 어릴 때부터 이승복 기념관을 해마다 찾았고, 그 '투철한 반공정신' 때문에 희생된 이승복 어린이의 정신을 길이 새기며 치를 떨었다. 5.18은 저 멀리 있어 보이지도 않았다. 그래도 다행인 건, 이승복 어린이와 일가족이 처참하게 죽어간 그 모습만 떠오를 뿐 그 이면의 정신과 사상이 떠오르진 않는다는 것이다. 그 폭력과 상처만 깊이 남아 있을 뿐이다. 그렇게 5.18이 다가올 수 있었다. 


5.18을 온전히 폭력과 상처의 입장으로 보아야


5.18은 상당 기간 논란거리였다. 지금도 그렇다. 수많은 추측이 난무하는 와중에 정치적으로 다양하게 이용해먹었다. 지금도 그렇다. 그렇지만 부정할 수 없는 게 있다면, 그곳엔 폭력과 상처가 있었다는 것이다. 이젠 거기에 도달할 때가 되었다. 거기서부터 시작해야 한다. 그래야 5.18을 제대로 본다고 할 수 있지 않을까. 한강 작가의 <소년이 온다>(창비)는 그 시작점이자 정점이다. 5.18을 온전히 폭력과 상처의 입장에서 보는 것. 


잘 알려져 있다시피 5.18이 한강 작가에게 끼친 영향은 엄청나다. 광주에서 태어나 서울로 이사한 후 아버지(한승원 소설가)가 구해온 5.18 사진집을 몰래 펼쳐보고 '내 안의 연한 부분이 소리 없이 깨졌고'(199쪽) '인간에 대한 근원적인 질문을 하게 된 비밀스러운 계기가 됐다'고 한다. 그에게 <소년이 온다>는 소설가로서 인간으로서 반드시 넘어야 할 산이었던 것이다. 5.18을 온전히 폭력과 상처로 보는 시작점이자 정점이 <소년이 온다>라면, 한강 작가 개인에게도 소설가로서 인간으로서 넘어야 할 산의 시작점이자 정점이 <소년이 온다>라고 할 수 있겠다. 


당연하겠지만, 그동안 5.18에 대한 소설은 상당히 많이 나왔다. 임철우의 <직선과 독가스> <봄날>, 홍희담의 <깃발>, 박혜강의 <꽃잎처럼> 등이 있다. 소설은 물론 영화로도 웹툰으로도 나온 바 있다. 장선우 감독의 <꽃잎>, 김지훈 감독의 <화려한 휴가> 그리고 강풀 작가의 <26년>이 그것들이다. 어쩌다 보니 5.18에 대한 거의 모든 콘텐츠를 접했는데, 하나같이 치명적으로 다가왔던 기억이 있다. <소년이 온다>는 여기서도 정점을 이룬다. 


작가가 들려주는 6개의 광주 이야기


중학교 3학년생 동호는 가족과 주위 사람들의 만류에도 도청에 남으려 한다. 그건 곧 죽음을 의미하지만, 그는 자신을 용서할 수 없다. 친구 정대를 버리고 도망친 자신을 말이다. 정대는 죽었다. 그의 혼은 아직 그의 육신에서 완전히 떠날 수 없다. 결국 자유로워진 그의 혼은, 그렇지만 갈 곳도 없다. 어디든 갈 수 있지만 갈 수 없다. 


은숙은 5.18에서 살아남았다. 처음부터 살아남으려고 했던 건 아니지만, 결국 살아남았고 그녀의 영혼은 부서졌다. 그렇게 살아남아 출판사 직원이 되었고, 그녀가 할 수 있는 건 그들을 기억하는 것이다. 진수는 도청에 끝까지 남아 항전한 이들을 이끌었다. 결국 붙잡혀서 모진 고문을 받은 후 수감되었다. 풀려나고서도 그는 제대로 된 삶을 살 수 없었다. 유리 조각 같이 산산히 부서진 영혼을 되살릴 방도가 없었다. 


작가가 들려주는 6개의 이야기는 서로 얽히고설켜 있다. 모두 5.18 당시의 폭력과 상처로 얼룩진 열흘에 대한 이야기다. 너무 아픈 그 이야기들은, 처음엔 살며시 다가와 조곤조곤 가벼울 수 있는 폭력의 기억을 전하다가 갑자기 그날의 칼날 같은 기억을 전하며 돌이킬 수 없는 상처를 남긴다. 그날의 기억이 영혼을 도려내고 부숴버린다면, 그날이 아닌 그날에서 파생된 폭력의 기억은 가볍기까지 한 것이다. 


아이러니한 건, 그가 들려주는 폭력과 상처의 서사가 왜 그렇게 아름다워 보이냐는 것이다. 단순히 문장이 가진 아름다움이나 인간의 역사가 아이러니하게도 폭력과 아름다움을 추구해왔다는 당위론적인 얘기가 아니다. 분명 이 소설은 고통스럽기 짝이 없다. 만약 그 잔혹한 참상만을 드러내는 데 천착했다면 이토록 고통스럽지는 않았을 것이다. 그는 그 참상과 폭력에 더해 기억과 상처를 드러냈다. 우린 그 기억과 상처에서 예상치 못한 충격과 더 심한 고통을 느끼는 것이다. 


아름다움의 원천, '기억의 복원'


그렇다면, 바로 그 예상치 못한 충격과 더 심한 고통에서 일종의 가학적인 아름다움을 느끼게 되는 것일까? 아니면 한강 작가가 특기를 살려 그려낸 금식한 충격과 고통에 대응하는 극도의 아름다움을 곳곳에 심어놓은 것일까? 내 생각은 이렇다. 이 소설은 다분히 한강 작가의 시선에서 바라보아야 한다는 것이다. 


한강 작가가 그동안 추구했던 '인간에 대한 근원적인 질문'. 그는 그 답으로 폭력과 그로 인한 고통을 짊어지고 사는 게 삶이라고 말해왔다. 거기서 더 나아갈 수 없다고도 말해왔다. 이 소설 또한 그 연장선상에 있다고 보면 되는데, 한 단계 더 나아간 듯하다. 태초의 폭력과 고통으로 돌아가서 그 안에 상처받은 존재들을 보듬는, '기억의 복원'까지 진전된 것이다. 바로 그 기억의 복원이 아름다움의 원천이 아닐까. 단지 기억하는 것조차 어려운 그날을, 기어코 기억하려는 것 자체가 아름다운 게 아니고 무엇이겠는가. 그날 광주에는 울려 퍼졌다. 


"여러분, 지금 나와주십시오. 계엄군이 들어오고 있습니다... 시민 여러분, 우리는 광주를 사수할 것입니다. 우리를 잊지 말아주십시오. 그리고 기억해 주십시오."


그날은 많은 사람들에게 잊고 싶은 기억일 것이다. 수많은 사람들이 희생당했지만, 대다수 사람들이 아무것도 할 수 없었다. 이 소설은 그날 희생당한 사람들을, 그리고 아무것도 할 수 없던 사람들을 되살린다. 특히 절대적 피해자였지만 살아서도 가해자로 자신을 인지하고 불우하게 살았던 이들의 기억을 복원하는 게 크게 다가온다. 아프고 고통스럽고 또다시 상처받겠지만, 잊지 말고 그날을 억해야 한다. 그날은 당사자들만의 기억도, 광주만의 기억도 아니다. 우리나라의 기억인 것이다. 


언제쯤 우린 매일 같이 소년이 찾아 와도 웃으며 맞이 하고 그 아픈 기억을 보듬을 수 있을까. 아마 불가능할 것이다. 아니, 그래선 안 될 것이다. 그 아픔은 평생 함께 짊어지고 가야 한다. 그리고 계속해서 인지하고 기억해야 한다. 다시는 그와 같은 아픔과 상처를 되물림하지 않기 위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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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서평] <음의 방정식>


<음의 방정식> 표지 ⓒ문학동네


올해로 데뷔 30년 차를 맞은 일본 최고의 작가 중 한 명. 대중성과 작품성을 두루 겸비한, 탁월한 스토리텔러. 사회 병폐의 핵심을 찌르면서도, 인간의 모습을 따뜻하게 그릴 줄 안다. 그를 대표하는 추리소설을 비롯해, 사회, 역사, 청소년, SF소설을 두루 섭렵했다. 남성 작가에 히가시노 게이고가 있다면 여성 작가엔 그가 있다. 다름 아닌 미야베 미유키다. 


히가시노 게이고와 미야베 미유키, 둘의 추리소설을 최소 1편 이상은 접해보았는데, 공통점이라 한다면 탁월한 가독성에 있다. 이는 곧 대중성으로 이어진다. 그러면서도 무엇이든 생각하게 만드는 경향이 있는데, 이는 곧 작품성으로 이어진다. 또 하나의 공통점은 다작(多作) 작가라는 것. 엄청난 작품 수를 자랑하는 이들인데, 출간되었다 하면 거의 베스트셀러가 된다. 그럼에도 거품 논란 없이 활동을 꾸준히 이어가는 걸 보면 대단하다는 생각이 든다. 결코 작품성을 놓지 않기 때문일 것이다. 


둘 중에 굳이 고르라면 미야베 미유키를 고르겠다. 워낙 방대한 작품 세계를 자랑해 한 권의 분량이 많아서 그의 소설을 덜 접한 게 사실이지만, 상대적으로 작품 개개가 더 믿음이 간다. 더 공력을 들였다는 게 느껴지고, 생각할 요소들이 더 많다. 그리고 소설에서 작가의 생각과 시선이 느껴진다. 


다시 돌아온 미야베 미유키의 교내 미스터리 


<솔로몬의 위증>은 미야베 미유키의 대표작 중 하나이다. 한 중학교에서 일어난 의문의 추락사를 바탕으로, 무너지는 학교라는 성역과 예민한 10대들의 심리를 담아냈다. 그렇게 현대사회의 속살을 집어내려 했다. 학교는 사회를 비추는 거울과 같은 곳이 아닌가. <솔로몬의 위증> 이후 20년, 당시 10대 주인공 중 한 명이었던 후지노 료코가 변호사가 되어 다시 한 번 교내 미스터리를 해결하기 위해 왔다. 


<음의 방정식>(문학동네)은 <솔로몬의 위증>에 이은 교내 미스터리 소설이다. 신흥 사학인 학교법인 세이카 학원이 배경이다. 이 학교는 A, B, C, D반으로 나뉘는데, 곧 등급 순이다. 이 등급은 고등부에 올라가서도 답습되고 대학 진학에도 영향을 미친다. 사건은 D반이 교내에서 '피난소 생활 체험캠프'를 열었던 토요일 밤에 일어난다. 대규모 자연재해가 발생했을 때의 피난소를 가정해 교실에서 침낭을 깔고 하룻밤을 보내는 것이다. 


사건의 발단은 소등 후 밤 열한 시쯤 히노 선생이 D반 남학생 일곱 명이 모여 있는 3층 교실로 순찰을 왔을 때였다. 히노 선생은 과제를 하나 낸다. 모두가 살아남을 수 없는 절망적인 상황에 처했다는 가정 하에 한 명을 희생 시켜야 하면 누구를 선택하겠냐는 것이었다. 그는 신중하게 선택하라는 말을 남기고 갔다. 


아이들은 당황했지만 웃으며 지나쳤다. 하지만 리더 시모야마 요헤이가 도망쳐 엄마에게 전화를 걸어 사정이 밝혀졌다. 하지만 히노 선생은 일련의 사태를 모조리 부인한다. 선생과 학생 중 한 쪽은 거짓말을 한 것이리라. 얼마 후에는 아키요시 쇼타가 더는 못 참겠다는 메모를 남겨 놓고 수면유도제를 있는 대로 긁어모아 삼키는 자살 소동도 있었다. 과연 누가 거짓말을 하는 것일까. 왜 거짓말을 하는 것일까. 


사회의 거울이자 바탕이 되는 학교에서 일어나는 문제들


스승과 제자. 인생에서 한 명의 진정한 스승만 있다면 얼마나 좋을까 하는 생각을 해본다. 꼭 학창 시절에 국한되어 있는 건 아니지만, 인생을 살아가는 기본 소양과 지식을 그때 배우기 때문에 인생의 스승 또한 그 시절에 만나기 쉽다. 그만큼 그때의 스승이 큰 영향을 끼친다는 걸 반증하는데, 반대로 나쁜 영향을 끼칠 수도 있다. 윽박 지르고 위협하고 지배하려 하고 억압하려는 스승이 있기 마련이다. 많은 이들이 그런 스승과의 에피소드를 기억하고 있을 것이다. 그건 제자에 대한 스승의 기억도 마찬가지겠지만, 스승은 한 명이고 제자는 다수이니 상대적으로 옅다. 


그렇게 볼 때 이 사건에서 거짓말을 한 이는 스승일 가능성이 크다. 정황 상으로도 한 명인 스승과 다수인 제자이니, 다수 간의 협의가 힘든 만큼 잘 맞추면 더 힘을 발휘할 수 있을 것이다. 그리고 교육자라는 입장에서 볼 때 제자를 골탕 먹이려는 행동을 하진 않을 거라 생각된다. 


제는 여기에 있다. 만약 이것이 사실이라면, 제자들은 스승의 위협과 억압을 막기 위해 스승을 골탕 먹이려는 행동을 하게 되었다는 것. 이 사건에서 중요한 게 사건 자체보다 그 원인에 있다고 보았을 때, 진짜 나쁜 짓을 한 건 스승이 된다는 점이다. 참으로 안타까운 지점을 작가는 교묘히 잘 건드렸다. 


"음의 방정식이라고 나는 생각했다. 선생과 학생, 가르치는 쪽과 배우는 쪽, 이끄는 쪽과 따르는 쪽, 억압하는 쪽과 억압받는 쪽의 조합부터 잘못되었고, 그러니 어떤 숫자를 넣어도 마이너스 답만 나온다." (본문 116쪽)


사회의 거울이자 바탕이 되는 학교. 그런 곳에서 교묘히 오가는 알력. 빙산의 일각과 같은 사건 뒤에 훨씬 더 크고 본질적이고 고질적인 문제. 모르긴 몰라도 수많은 학교에서 이와 같은 일들이 오랜 세월 되풀이되고 있을 것이다. 언제 쯤이면 마이너스가 아닌 플러스 답이 나올 수 있을까. '음의 방정식'이 서글프게 다가온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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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서평] <독재자를 무너뜨리는 법>



<독재자를 무너뜨리는 법> 표지 ⓒ문학동네


혁명. 대의를 위해 수많은 사람이 죽어나가는 피 튀기는 투쟁 끝에 독재자를 끌어내린다. 자연스레 새로운 세상이 펼쳐지고 독재 정권 아래서 힘들게 살아왔던 이들이 활짝 기지개를 편다. 모든 것들이 제자리를 찾고, 꿈 같은 현재를 즐기며 행복한 미래를 꿈꾼다. 혁명, 이토록 좋은 세상을 주는데 누구든 뛰어들지 않을 이유가 없다. 그런데 왜 혁명은 일어나지 않는가. 


먼저, '수많은 사람이 죽어나가는' 혁명에 동참할 사람이 얼마나 많을까? 자신의 모든 걸 뒤로 한 채 독재자를 끌어내리고 세상을 바꾸고자 죽음을 무릅쓰고 혁명에 동참할 사람이? 5,000만 명의 인구에서 5만 명이라도 있다면 엄청나다고 생각한다. 역사를 들여다보면, 그렇게 장렬히 산화한 이들이 많다. 


어떤 방법으로든 독재자를 끌어내렸다고 하자. 그런 다음엔 어떻게 할 것인지 구체적으로 생각하고 계획하고 있는지? 이 독재 정권을 파괴하는 데만 해도 벅찬대 어찌 그 이후의 일을 생각하겠는가 하고 생각하고 있을 게 다분하다. 하지만 만약 그렇게 생각하고 있다면 독재자를 끌어내려고 또 다른 독재자가 그 자리를 꽤 찰 것이다. 이 역시 역사를 들여다보면 무수히 발견할 수 있는 경우다. 


과연 독재자를 끌어내리고 체계적인 계획으로 훌륭한 민주주의 정권을 세웠다고 하자. 그렇게 하면 끝나는 걸까? '모든 것들이 제자리'를 찾을까? 저절로 행복한 미래가 만들어질까? 그럴 수도 있을 것이다. 하지만 그렇게 놓아버리면 모든 것이 수포로 돌아갈 가능성이 다분하다. 혁명에 시작은 있지만 끝은 없다고 생각하는 이유가 여기에 있다. 


비폭력 투쟁은 무엇이고, 왜 해야 하는가


'혁명'하면 가장 먼저 누가 떠오르는가. 체 게바라, 레닌, 마오쩌둥. 반면 간디, 넬슨 만델라, 마틴 루서 킹은? 이들은 모두 혁명의 세기인 20세기 인물들로 인류 역사를 대표할 만한 이들이다. 다만, 앞의 세 명은 유혈이 낭자한 폭력 투쟁을, 뒤의 세 명의 비폭력 투쟁을 하였다. 그런데 가장 먼저 떠오르는 이들은 폭력 혁명가들이다. 그들은 카리스마가 넘치고 그들의 삶은 화려하다. 반면 비폭력 투쟁은 그렇지 않다. 무엇이 진정한 투쟁인가? 이에 세르비아의 세계적인 비폭력 운동가 스르자 포포비치는 <독재자를 무너뜨리는 법>(문학동네)를 통해 비폭력 혁명을 설파한다. 


이 책은 제목 그대로 '방법'을 설명하는데, 먼저 비폭력 투쟁의 모습과 특징을 보여주며 이어 비폭력 투쟁을 적용하는 실질적 방법을 살펴보고 있다. 먼저 저자에 대해 말하자면, 저자 스르자 포포비치는 세르비아의 세계적 반독재 비폭력 운동 단체 오트포르!의 리더였으며, 비폭력 행동주의와 전략 응용 센터인 캔바스를 설립해 여러 나라의 민주화 운동에 직접적인 도움을 주었다. 이 책은 '오트포르!'와 '캔바스'의 활동, 그리고 '직접적인 도움'과 함께 '여러 나라의 민주화 운동'을 사례로 풀어나간다. 그리고 역사상 수많은 비폭력주의 운동 사례가 함께 한다. 


저자의 '강의'를 요약해보자. 먼저 이길 수 있는 작은 전투가 무엇인지, 내 편에 얼마나 많은 사람을 세울 수 있는지 깨달아야 한다. 하지만 이건 싸움의 절반에 불과하고 나머지 절반은 새롭게 얻은 지지자들에게 그들이 믿을 수 있는 무언가를 제공할 수 있는가에 달려 있다. 그건 다름 아닌 비전이다. 사람들이 바라는 게 무엇인지 귀 기울이고 비전에 그들이 바라는 바를 포함 시켜야 한다. 사람들에게 정말 소중한 게 무엇인지 반드시 알아야만 하는 것이다. 


이렇게 비로소 비폭력주의 운동이 시작되었다. 이제 권력을 지탱하는 기둥이 어떤 모습인지 알아야 한다. 저자는 '비폭력 투쟁 이론의 아버지'로 알려진 미국학자 진 샤프의 이론을 들어, 모든 정권은 몇 안 되는 기둥에 유지되며 기둥 한두 개에 압력을 가하면 체제 전체가 붕괴된다고 말한다. 모든 독재자는 경제적 기둥에 의지하며, 다름 아닌 평범한 국민들에 의해 유지된다. 즉, 평범한 국민들에 의해 모든 것이 정상적으로 흘러가면 독재자는 권력을 유지한다는 것이다. 여기에 웃음과 유머 전략, 역풍 전략을 얹어라. 


당신들만의 싸움이 아니라 우리들의 싸움이기도 하다


다음으로 구체적인 방법을 제시한다. 제일 먼저 이야기하기에 제일 중요한 건, 바로 '통합'이다. 운동을 하려면 언제나 가장 많은 수의 사람들에게 호소할 수 있어야 한다는 것이다. 저자는 2011년 미국의 오큐파이 운동을 대표적 실패 사례 중 하나로 뽑았는데, 이 운동을 엄청난 유명인들이 지지했지만 미국 내에서 매우 구체적인 특정 계층에게만 큰 호소력을 지녔다고 일침 한다. 이는 제대로 된 통합을 하지 못한 채 선거를 치러 질 수밖에 없는 상황을 만드는 현재 대한민국 정치계의 야권에게 보내고 싶은 메시지의 대신이다. 제발 좀 통합합시다. 더 광범위하게. 당신들만의 싸움이 아니라 우리들의 싸움이기도 하니까. 


비폭력주의 운동의 역사적 인물인 넬슨 만델라는 본래 비폭력적인 방법으로 남아공 아파르트헤이트 정권에 맞섰다. 그러다가 몇 번이나 체포되어 투옥되었고 이후 극단적 폭력주의자가 되었다. 수없이 많은 공격을 감행했고 정부의 가장 두려운 적이 되었다. 그는 다시금 체포되어 27년 간 투옥되었는데, 노선을 완화해 다시금 비폭력의 상징이 되었다. 폭력으로는 그와 국민이 누리고자 하는 미래를 성취할 수 없음을 알게 된 것이다. 숫자 상으로도 비폭력 투쟁의 성공 확률이 폭력 투쟁의 성공 확률을 앞선다고 한다. 26%대 53%다. 저자는 통합, 계획, 그리고 비폭력이 성공적 투쟁의 삼위일체라고 말한다. 


마지막으로 마무리가 있다. 위에서 말했던 '혁명에 시작은 있지만 끝은 없다' 라는 생각과 이어진다. 무슨 말인고 하면, 독재 정권을 무너뜨리는 성과는 제대로 민주주의를 정착 시키는 과제를 마친 후에야 비로소 승리로 간주될 수 있다는 얘기다. 원하던 목적을 이룬 순간이 언제인지 파악하고 제때에 승리를 선언해야 한다. 그리고 무엇보다 '민주주의'를 잊으면 안 된다. '독재자 퇴진'이 끝이 아닌 것이다. 


이 책의 매뉴얼 중 하나만 정확히 따르자


우리나라는 4.19 혁명, 부산마산 항쟁, 6.10 항쟁을 통해 우리 힘으로 독재자를 끌어내리고 민주화를 달성한 역사가 있다. 그 정신은 1919년 3.1 혁명으로부터 이어진, 굉장히 유서 깊은 '전통'과도 같은 것이다. 하지만 지금, 혁명의 깃발을 내세우고 시위에 나선 이들을 바라보는 우리의 시선은 어떤가. 다른 누구도 아닌 나부터도 그들을 바라보는 시선은 결코 곱지 않다. 그들을 지지하지만 함께 하고 싶은 생각이 쉽게 들지 않는다. '그들'은 '우리'가 될 수 없을 것 같은 느낌이 드는 것이다. 


정치권도 마찬가지다. 유권자들 상당수가 특정 정당을 응원하며 선거를 하고 있지 않는 것 같다. '그나마' 낫다거나, '어쩔 수 없이' 찍고 있는 것 같다. 나부터 그러니까. 이 역시 '우리'와는 상관 없는 '그들' 만의 리그 같다는 느낌 때문이다. 그래도 최소한 이대로는 안 된다는 걸 알고 있기에 뜻을 보태야 하겠다. 


이 책의 매뉴얼 중 하나 만이라도 정확히만 따를 수 있다면 좋을 것 같다. 수단의 운동 단체 기리프나의 '우리는 이제 신물이 난다', 오트포르!의 2010년 메시지 '그는 끝났다' 같은 여러 이익 단체의 다양한 이해관계를 통합할 수 있는 하나의 메시지를 통해 광범위한 통합을 이끌어낼 수 있다면, 그것 만으로도 싸워볼 수 있지 않을까 싶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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singenv

冊으로 策하다. 책으로 일을 꾸미거나 꾀하다. 책으로 세상을 바꿔 보겠습니다. singenv@naver.com Since 2013.4.16