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서평] <악의 해부>


<악의 해부> 표지 ⓒ에이도스



제2차 세계대전 하면 생각나는 건 단연 '홀로코스트'다. 통칭으론 대학살을 뜻하지만, 일반적으론 제2차 세계대전 중 나치에 의해 자행된 유대인 대학살을 말한다. 인류 역사상 수많은 전쟁과 대학살이 있어 왔지만, 이토록 어마어마한 전쟁과 대학살이 동시에 이뤄진 건 일찍이 없었다. 


당연히 홀로코스트에 대한 시각은, '왜'와 '어떻게'로 쏠린다. 왜 나치는 홀로코스트를 자행했고, 나치는 홀로코스트를 어떻게 자행했는가. 거기에 홀로코스트를 결정하고 실행에 옮긴 핵심인사들을 향한 관심도 있다. 히틀러, 히믈러, 하이드리히, 아이히만 등이 그들이다. 


이들을 비롯 나치는 그렇게 '악마'가 된다. 나라 대 나라의 전쟁이 아닌 일방적인 학살로 수백만 명에 달하는 사람을 죽게 한 그들이 악마가 아니라면, 무엇으로 설명할 수 있을 것인가? 그들은 악마여야 한다. 여기서 '왜'는 충분히 설명되어 진다. 그러면 '어떻게'가 남고, 잔인함을 넘은 악마적 학살 방법들이 전해져 내려온다. 


우린 그 방법들을 전해듣고 그저 치를 떨 뿐이다. 하지만 그러면 그럴수록 역설적으로 '누구'에 대한 설명은 부족해진다. 위에 명명된 이름들은 생생하게 다가오는 개인이라기보다 악마적 존재들의 집합체인 나치에 속한 수많은 조직원들 중 하나일 뿐이다. 과연 그게 최선일까? 나치를, 제2차 세계대전을, 홀로코스트를 생각하는 최선일까?


나치 전범을 통해 들여다보는 '악'


정신의학자가 치밀하게 돌아본 '악마' 나치 전범들의 심리를 <악의 해부>(에이도스)로 들여다볼 수 있다. 저자는 책을 통해, 나치 전범을 통해 '악'이란 무엇인지 생각해보고자 한다. 제2차 세계대전이 연합군의 승리로 끝을 맺고 다수의 나치 전범들을 수용한 룩셈부르크 아쉬칸 포로수용소에서 시작된다. 앤드러스 대령 교도소장과 정신과의사 더글러스 켈리, 그리고 나치의 제국원수 헤르만 괴링이 등장한다. 


오래지 않아 뉘른베르크 전범재판을 위해 무대가 독일 뉘른베르크로 옮겨진다. 와중에 독일노동전선 수장 로베르트 레이와 반유대주의자 신문 《데어 슈튀르머》 편집자 율리우스 스트라이허가 소개된다. 그리고 대망의 나치 부총통 루돌프 헤스. 또 한 명은 더글러스 켈리와 치열한 나치 전범 심리 분석 대결을 펼칠 심리학자 구스타브 길버트다. 켈리와 길버트에 의한 나치 전범 심리 분석이 시작되는 동시에 뉘른베르크 전범재판으로의 길 또한 열린다. 이 재판을 둘러싼 이야기들이 책의 한 축을 이루며 흥미진진하게 나아간다. 일찍이 들어본 적 없는 상황들이다. 


책에서 주요하게 다뤄지는 요소는 크게 두 가지다. 먼저 위에서 열거한 나치 전범 네 명에 대한 케리와 길버트의 심리 분석. 이 악마들을 어떤 얼굴을 하고 있을까. 먼저 로베르트 레이, 광적인 히틀러 추종자로 반유대주의자였지만 전쟁 중에 행한 활동을 뉘우치기도 한 복잡다다한 인물이었다. 전범 중 유일하게 뇌를 부검할 수 있었는데, 실제로 뇌에 손상이 있었던 만큼 많은 이들이 그의 악을 손상된 뇌에서 기인한 것이라고 보았다. 


루돌프 헤스 또한 같은 맥락이다. 그는 오늘날 병명으로 하면 '편집성 조현병'이라 할 수 있는데, 정신분열증을 겪은 것이다. 거기에 당시 기억상실증도 겪었다고 하지만 꾀병으로 밝혀졌다. 그럼에도 정신병은 인정되어 사형당하지 않고 종신형을 받았다. 이들의 '악'은 말그대로 뇌의 '이상'에서 비롯된 것일까. 


반면 헤르만 괴링은 '진정한' 나치였다. 그는 감옥에서 자살했는데, 그 이유가 연합국 측에 모욕을 안기고 순교하려는 의도였을 정도다. 그는 사과도 변명도 일절 하지 않았고, 재판에서 외려 연합국 측과 치열하게 공방해 일말의 승리를 얻기도 했다. 그는 엄청난 매력의 소유자인 동시에 피도 눈물도 없는 잔인한 사람이었다. 저자는 그를 '호감형 사이코패스'라 칭한다. 


율리우스 스트라이허는 어땠을까. 저자가 단도직입적으로 '나쁜 남자'라 칭하는 그는, 여기서 소개한 여타 나치 전범들과는 다르게 장점이라곤 찾을 수 없는 완전하게 비열한 인물이다. 그는 성격에 '장애'가 있는 게 아니고, 성격이 심각하게 나쁜 거였다. 같은 편조차 그를 좋아하는 사람이 없었다고 한다. 


나치 전범은 악의 화신인가, 악은 어디서든 자라날 수 있는가


이들의 심리를 분석하며 더글라스 켈리가 내린 결론은 이들이 지극히 평범하거니와 비정상이 아니라는 것이었다. 그들은 그저 과도한 야망, 낮은 윤리기준, 강한 민족주의를 가졌을 뿐이었다고 말한다. 누구에게나 일말의 악은 있으며 이를 결정짓는 것은 사회적 맥락이라는 게 켈리 주장의 핵심이다. 


반면 구스타브 길버트는 나치 전범들이야말로 악의 화신, 악마의 사이코패스라고 말한다. 그들의 악은 특수한 악의 범주에 해당한다는 것이다. 이미 나치 전범들이 악이라는 명제를 모든 주장의 전제에 놓았다. 사실 길버트의 주장은 당시 전 세계적인 대세였다. 그와 같은 악행을 저지른 나치 전범들을 일반인과 같은 평범의 범주 안에 놓는 걸 용납할 수 없는 것이다. 길버트가 가난한 유대인 망명자 가정에서 태어났다는 사실이 객관적 대신 주관적으로 작용하지 않았을까 싶기도 하다. 


저자의 시선은 당대에는 비주류였지만 추후 심리학의 핵심을 이루는 켈리의 주장에 가 닿아 있다. 악은 어디서든 자라날 수 있다는 그의 확신이 악에 대한 다양한 사회심리학적 해석 발전의 토대가 된 것이다. 이후 대단히 영향력 있는 연구 네 건이 이 관점의 함의들을 파고들었다. 우리가 익히 알고 있는 유명한 학자들과 그들의 연구다. 


먼저 한나 아렌트, <예수살렘의 아이히만>으로 더 없이 유명한 그녀의 '악의 평범성'은 켈리의 주장을 정통으로 잇는 연구다. 그녀는 이에 '악은 주변을 폐허로 만들어버리는 곰팡이 같은 것. 그것에 깊이나 악마적 차원은 없다'고 말했다. 스탠리 밀그램은 '복종'에 대해 연구했다. 그렇게 얻은 결론은 정상적인 사람들도 비정상적인 지시에 따른다는 것이었다. 한 개인이 스스로를 타인이 원하는 일을 수행하는 도구로 보게 되어, 더 이상 자신을 행위의 책임 주체로 보지 않는다는 사실이다. 


존 달리와 빕 라타네의 '방관자 무관심' 실험도 켈리를 잇는다. 1964년 3월 뉴욕 시의 제노비스 살인 사건이 세계를 뒤흔든다. 38명이 살인 현장을 목격했지만 아무도 돕지 않은 것이다. 그들은 실험을 통해 어느 목격자가 다른 목격자들이 아무것도 하지 않고 있는 것을 보면 그 사람 역시 아무것도 하지 않는다는 사실을 도출해냈다. 마지막으로 필립 짐바르도는 '스탠퍼드 감옥 실험'을 강행한다. <엑스페리먼트>라는 영화가 이 실험을 바탕으로 해서 약간의 센세이션을 일으켰는데, 역할을 부여받았다는 사실이 한 사람으로 하여금 완전히 다른 사람으로 만들어버릴 수 있다는 사실을 도출해낸다. 사회적 맥락은 그 자체만으로 엄청난 저열함을 조장할 수 있다는 것이다. 


그렇다면, 길버트의 뒤를 이은 주장은? 켈리의 주장 전통에는 빈 서판으로 세상에 태어나 타자들과의 상호작용에 의해 형태를 갖추게 된다는 대전제가 있다. 하지만 애초에 빈 서판 자체를 가지고 있지 않은 사람이 있다면? 기본값이 훨씬 더 어두운 쪽에 치우쳐 있다면? 사이코패스, 즉 나쁜 뇌, 병든 뇌가 존재하는 건 사실이다. 


하지만 결정적으로 그 무엇으로도, 아니 정확히는 나치 전범의 심리를 분석한 켈리와 길버트가 남긴 것들로는 진정한 '악'의 근원을 알 수 없었다. 저자는 실망을 금치 못했지만, 생각 끝에 켈리와 길버트 모두가 옮다는 결론에 다다른다. 켈리는 모든 사람에게서 약간씩의 어둠을 찾아냈고, 길버트는 몇몇 사람들에게서 보기 드문 어둠을 찾아냈다는 것. 악은 언제나 우리 가까이에 있다는 섬뜩한 결론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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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서평] <영속패전론>


<영속패전론> 표지 ⓒ이숲



우리의 역사인식에서 '일본'은 절대 떼려야 뗄 수 없다. 조선이라는 나라의 운명을 바꿀 만한 초유의 전쟁인 임진왜란은 그렇다 치더라도, 19세기말에서 20세기, 나아가 21세기에 이르는 일본에 의한 한반도 침략과 수탈과 망언의 역사는 지겹도록 계속되고 있다. 지금 이 순간에도 변함없이 말이다. 


그래, 침략과 수탈까지 다 좋다. 인류 역사상 수많은 나라들이 침략과 수탈을 자행했다. 그런데 여전히 계속되는 망언의 이유는 무엇인지, 왜 이해할 수 없고 납득하기 힘든 언행을 반복하는 것인가. 잊을 만하면 튀어나오는 망언들은 이젠 한 귀로 듣고 한 귀로 흘리는 정도가 되었다. 그래도 궁금하다, 그 메커니즘이. 도대체 왜?


일본의 젊은 정치사상가 시라이 사토시 교수의 <영속패전론>(이숲)은 정녕 허무할 정도로 속시원하게 그 궁금증을 해소해준다. 그건 일본(의 내셔널리즘)의 제2차 세계대전 '패전 부인'에서 시작된다. 저자는 이것이 전후 일본의 핵심이라고 단언한다. 여기엔 '평화와 번영'이라는 전후 일본의 본래 핵심의 종언이 자리잡고 있다. 그리고 이어지는 미국에의 종속...


일본 왈, '우리는 전쟁에서 패하지 않았다'


이 책은 다분히 학술적인 면모를 풍기는데, 워낙 시원시원하게 그러면서도 꼼꼼한 자료와 논리를 바탕으로 주장을 밀고 나가기에 지루하지 않다. 분명히 어려운 내용인데 어렵다고 느껴지지 않고 오히려 재밌다고 느껴지기까지 한다. 저자의 주장 흐름이 굉장히 서사적이기 때문이기도 하겠다. 


2차 대전에서 무참히 패하며 초토화가 되었음에도 이후 일본은 대번영의 길을 걷는다. 그런 한편 비록 겉으로만 일지라도 평화주의를 표방한다. 하지만 1980년대 유례없는 버블 경제 대붕괴를 겪고 90년대 이후 '잃어버린 20년'의 장기침체에 돌입한다. 번영이 사라지니 평화도 사라진다. 기존의 전후가 사라진 것이다. 그리고 새로운 기조가 자리잡는다. 그 옛날의 '대일본제국', 그리고 영속패전. 


문제는 미국이다. 대일본제국에의 긍정은 곧 미국과의 전쟁을 의미한다. 하지만 그건 말도 안 되는 일. 이미 일본 깊숙이 들어와 있는 미국이다. 그래서 일본은 미국에의 종속을 영위하는 대신 자국을 비롯 아시아를 향해 울부짖는 것이다. 자신들은 전쟁에서 패하지 않았다고 말이다. 저자는 말한다. 결국 그 끝에 있는 건 전쟁이라고, 그리고 종국엔 패배하고 말 거라고. 패전 부인은 다시 패전을 부른다는 것, 영속패전이다. 


정녕 깔끔한 논리의 기막힌 결론이라 아니할 수 없다. 단번에 현재 일본의 정치군사적 상황과 앞으로의 방향, 가장 궁금했던 원인과 이유를 알 수 있게 한다. 또한 지난 2011년 3.11의 의미도 명백해진다. 번영과 평화라는 전후의 확실한 종말로, 어느 누구도 이 대참사에 책임을 지지 않는 모습이 전쟁 패전을 부인하는 모습과 겹쳐진다. 


일본의 패전 부정, 한국의 식민지 부정


저자는 오에 겐자부로가 나카노 시게하루의 표현을 인용한 "우리는 모욕 속에 살고 있다"를 재인용하며 3.11 이후 일본이 놓여 있는 상황을 적확하게 표현했다. 지난 날을 돌아보자. 우리도 2014년 4.16의 대참사를 당했다. 이후 정부의 움직임은 실로 기괴했다. 3.11에 대한 일본의 '무책임'과 상당히 겹친다. 


우린 그로부터 2년반 후에 시민혁명을 이룩하며 4.16 이후로 계속되어온 무책임에 대한 책임을 물었다. 그러며 숱하게 당해왔던 모욕을 어느 정도 풀었을지도 모르겠다. 하지만 보라. 저들의 '영속패전'이 그리 이질적으로 느껴지지 않지 않는가. 우리네 내셔널리스트들도 똑같이 미국에 종속되어 있으면서 국내에서는 식민지를 부정하고 있지 않은가. 저들이 패전을 부정하고 있는 것처럼 말이다. 


저자는 이대로라면 결국 또다시 전쟁이 시작되어 불보듯 뻔한 패전의 길로 나아갈 거라 말하는데, 그걸 그대로 우리의 경우에 이식해볼 수 있다. 일본에 의한, 미국에 의한 식민지가 모두 우리를 위해서라고, 덕분에 우리 삶의 질이 더욱더 향상될 수 있었다고 주장하는 이들의 바람은 결국 또다시 식민지이다. 그래야 그들은 그들 자리를 계속 유지할 수 있다. 그들은 그들 자신 이외의 것에는 아무런 관심이 없다. 이 나라는 목적을 위한 수단일 뿐이다. 


이 얇은 책 한 권으로 속속들이 완벽히 알긴 힘들 것이다. 하지만 '명백히' 알 순 있었던 것 같다. 일본이나 한국이나 모두 모욕 속에서 살아가고 있다는 사실 말이다. 정권이 바뀌고 '우린 해냈다!'고 자평한 지 100일이 훌쩍 지났다. 하지만 우리에게 모욕을 준 이들의 목소리는 여전히 크고 우렁차다. 또다시 모욕 속에서 살지 않기 위해선 명백히 알거니와 속속들이 알아야 하지 않을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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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리뷰] 크리스토퍼 놀란의 <덩케르크>


나오는 작품마다 끝없는 기대를 불러일으킴과 동시에 그에 충족하는 작품을 들고 나오는 몇 안 되는 감독 크리스토퍼 놀란의 신작 <덩케르크>. ⓒ워너브라더스코리아



크리스토퍼 놀란은 작가주의 감독이 아니다. 분명 그의 영화엔 그가 말하고자 하는 바와 보여주고자 하는 바가 명명백백하게 담겨 있지만, 많은 부분들이 영화를 만드는 이와 영화를 보는 이에게 맞춰져 있는 듯하다. 영화 산업에 종사하는 이 중 하나로서, 놀란은 굉장히 사려 깊은 사람이라 할 수 있겠다. 


그래서 그의 영화들에는, 특히 그가 단독으로 각본을 맡은 영화들은 사실 이야기를 이야기답게 즐길 수 있는 요소가 많지 않다. 대신 그 빈자리를 제대로 된 영화적 감각으로 채워 모자람이 없게 한다. 배경, 촬영, 음악, 음향, 편집, 캐릭터, 상황 등 영화에는 수많은 요소들이 있지 않은가. 놀란은 누구보다 잘 활용할 줄 안다. 


그 와중에도 그는 반드시 무엇 하나를 던진다. 절대 장황하지 않게, 아주 짧은 한 문장 정도의 물음이나 명제를 우리에게 제시하는 것이다. 그게 영화 내적일 때가 더 많기에, 우린 정확히 놀란의 '이야기'보다 '영화'에 열광한다. 그의 영화를 소비하고 향유하다 보면, 자연스레 이야기가 수면 위로 올라오는 형태다. 


역사에 길이 남을 '덩케르크 철수 작전'


전쟁에서 '철수'는 곧 '패퇴'다. 불명예로 남을 게 분명하다. 하지만 '덩케르크 철수 작전'은 그 과정과 그 이후를 생각했을 때 정녕 위대한 철수다. ⓒ워너브라더스코리아



<덩케르크>는 그의 19년 경력 동안 불과 10번째 작품이다. 동시에 <미행>과 <인셉션>에 이은 3번째 단독 각본 작품이다. 그의 필모를 살펴보면 알겠지만, 그의 1번째 실화 바탕 작품이기도 하다. 사실 그의 전작들에서 어떤 작품에서도 비슷한 결을 찾을 수 없지만, 그나마 <인셉션>과 <인터스텔라>가 비슷하다 하겠다. 인간 존재를 훨씬 초월하는 상황에서의 인간을 그렸다는 점에서 말이다. 


한국에서라면 알 만한 사람이 그리 많지 않지만, 영국에서라면 모르는 사람이 그리 많지 않을 제2차 세계대전 초기의 '덩케르크 철수 작전'. <덩케르크>는 이 작전을 기반으로 한다. 제2차 세계대전 발발 후 독일군과 영프 연합군은 꽤 오래 대치만 한다. 그러던 1940년 5월 독일군의 대대적인 공격이 시작된다. 연합군은 독일군의 기만에 속아 프랑스 북동부 해안에 갇혀 포위당하고 전멸될 위기에 처한다. 그리고 다른 항구들은 모두 독일군이 점령, 덩케르크만 남은 상황이 된다. 


영화는 덩케르크만 남은 상황에서 처절한 철수작전이 시작되고 있던 시점에서 시작된다. 덩케르크에는 자그마치 영국군과 프랑스군이 자그마치 34여 만 명이 남은 상황, 어떻게 해서든 영국으로 철수해야 한다. 이제 곧 독일군의 총공세가 시작될 상황이었다. 남아 있는 이들만으로는 절대 철수가 불가능한대, 어떻게 철수할 것인가?


윈스턴 처칠 수상은 그 유명한 연설, “우리는 자신감과 힘을 길러내어 하늘에서 싸울 것입니다. 우리는 어떤 대가를 치르더라도 영국을 지켜낼 것입니다. 우리는 해변에서 싸울 것입니다. 우리는 상륙지점에서 싸울 것입니다. 우리는 들판에서, 또 거리에서 싸울 것입니다. 우리는 언덕에서 싸울 것입니다. 우리는 절대로 항복하지 않을 것입니다”를 덩케르크 철수 작전이 성공한 직후 했다고 한다. 


놀란은 이 작전에서 영화의 모티브를 얻었을 게 분명하지만, 다름 아닌 이 연설에서 영화의 얼개를 얻었을 게 분명하다. 영프 연합군 보병들의 생존 투쟁을 그린 육지 해안에서의 일주일, 영국 어부들의 목숨 건 연합군 철수 도움을 그린 바다에서의 하루, 영국 공군의 독일 공군과의 필사적인 전투를 그린 하늘에서의 한 시간. 영화가 덩케르크 철수 작전을 바라본 시간과 공간과 사람들이다. 여기에 이 영화의 모든 것이 담겨 있다. 


전쟁과 재난의 상관 관계


<덩케르크>는 전쟁영화의 꼴을 한 재난영화다. 전쟁 자체가 재난이라는 말이기도 할 것이다. 재난은 전쟁의 비인간적인 면모를 부각시키기 위한 역수단이다. ⓒ워너브라더스코리아



<덩케르크>를 본 사람이라면 누구나 한 마디씩 했음직한, '이 영화는 전쟁영화가 아니다. 재난영화다'. 누구보다 전쟁영화를 많이 봤다고 자부할 수 있는 필자의 눈에도 완벽한 재난생존영화 그 자체였다. 대부분의 전쟁영화는 '전쟁'이라는 눈에 보이지 않지만 엄연히 실제해 눈에 보이고 예상이 가능한 위협을 주는 상황 하에 놓인 여러 인간 군상을 말하고자 한다. 아니면 부조리하고 무의미한 '전쟁' 그 자체를 논하거나. 


반면 이 영화는 도무지 예측불가능하고 예외없이 무차별적이며 상황은 미시적으로 보여주지만 상황에 처한 인간들은 거시적으로 보여주는 등 전형적이고 실제적인 재난재해의 무서움을 역설한다. 보병들의 육지 해안에서의 생존 투쟁이 이를 가장 잘 보여주는데, 오히려 결국 말하고자 하는 건 재난재해가 아닌 전쟁이 아닌가 싶다. 전쟁을 수단으로 재난을 보여주고, 다시 재난을 역수단으로 전쟁을 말하고 있는 것이다. 


전쟁에 처한 말단 병사들의 생각(집에 가고 싶다)과 행동(그저 살고 싶을 뿐)이 재난재해에 처한 사람과 똑같다고 말함으로써, 전쟁의 비인간적이고 무차별적인 면모를 부각시키고 있는 것이다. 그 와중에 영국의 일반인 어부가 목숨을 걸어가면서 지옥이 펼쳐지는 덩케르크로 향하여 '아이들'을 구하고자 하는 마음이, 전쟁의 비인간성을 폭로하는 데 크게 작용하고 있다. 


너무나도 휴머니즘적인 요소들의 향연, 자칫 감상적인 전쟁으로서의 역주행 가능성을 놀란은 한스 짐머의 음악으로 완전히 급반전 시킨다. 신디사이저를 이용해 귀는 물론 가슴을 꾸준히 묵직하게 짓누르는 음악으로 생존 투쟁과 죽음의 한복판의 전장에 몰입하게 만드는 것이다. '여기는 전쟁의 한 가운데다'라는 걸 깊이 새길 수밖에 없게 만드는 음악들, 이 영화의 태반을 차지했다고 해도 과언이 아니다. 


비인간적인 전쟁을 이기는 건 인간적인 숭고함


결국 '인간'이다. 가장 무자비하고 비인간적인 폭력인 전쟁 앞에서도 무너지지 않고 오히려 숭고함을 더하는 인간이란... <덩케르크>를 보면 알 수 있다. ⓒ워너브라더스코리아



전쟁의 비인간성을 폭로함과 동시에 인간 존재를 부각시키고자 한 게 <덩케르크>의 목표인 듯하다. 아무것도 하지 못하고 그저 철수만 기다리고 있는 수많은 이름 없는 연합군 병사들의 겉모습과 툭툭 던지는 말엔 한없는 자기혐오의 그림자가 어려 있다. 그들은 자타공인 패전병이기 때문이다. 


반면 독일군은 총소리, 대포소리, 폭탄소리로만 대변될 뿐 그 모습조차 잘 찾아볼 수 없다. 이는 재난재해에 빗댈 정도의 비인간적이고 무차별적인 전쟁의 면면을 보여주는 것이기도 하지만, 처참할 정도로 힘없는 연합군에 반해 당시 최강최악의 힘을 자랑하는 독일군의 대단함을 보여주는 것이기도 하다. 


그리하여 철수할 수밖에 없는 상황 하에서 철수하는 자의 비참함과 살고 싶어하는 자의 비애감을 동시에 보여준다. 이 극대화된 모순의 자장 안에서 '철수'가 '패퇴' 아닌 '생존'으로 이어진다. 곧 '감성'이 '이성'으로 '감성적인 승화'를 이룩하는 순간이다. 질 수밖에 없는 상황을 만든 건, 생존 투쟁을 한 이들이 아닌 덩케르크에서는 볼 수도 없는 이들이다. 그런 사실상의 사면초가 상황에서 살아 돌아온 건 위대한 승리라 아니할 수 없는 것이다. 


영화는 그런 면면들까지도 우리가 이해하고 받아들일 수 있게, 친절하다면 친절하게 보여준다. 비인간적인 전쟁을 이기는 건, 더욱 비인간적인 무기와 역시 철두철미하게 비인간적인 작전이 아닌, 지극히 인간적인 숭고함이 아닌가. 영화는 그런 인간성들을 곳곳에 뿌리째 박아 놓는다. 절대 흔들리지 않는 그 뿌리들은 육지에서, 바다에서, 하늘에서 수많은 이들을 생존으로 이끈다. 영화를 보고난 후 한동안 우리의 오감은 오롯이 그곳에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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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리뷰] <랜드 오브 마인>


제2차 세계대전에 수많은 입장들이 존재한다. 전쟁 전, 중, 후에도 마찬가지. <랜드 오브 마인>은 전쟁 후의 어떤 입장이다. ⓒ싸이더스




영화 <랜드 오브 마인>은 제2차 세계대전을 배경으로 한 만큼, 전쟁영화의 외형을 띠고 있다. 정확히는 전쟁을 반대하는 반전영화겠다. 거기엔 가해자와 피해자가 뒤바뀌는 세상살이의 도식이 존재하지만, 자세히 들여다보면 오직 피해자만 있다는 사실을 깨닫게 되기 때문이다. 피해자만 양산하는 전쟁 따위를 왜 해야 하는가.


수많은 제2차 세계대전 관련 영화가 미국, 영국, 소련의 손에 만들어졌다. 승전국이자, 피해자라 할 수 있는 입장에서 만들어진 것이다. 물론 패전국이자 가해자인 독일, 일본 입장에서도 만들어졌다. 가해를 정당화하거나 반대로 가해 사실을 공표하는 듯한 모습을 보이진 않는다. 일본은 종종 '피해자 코스프레'를 하여 비난 받아왔다. 많은 경우, 진정한 가해자의 손에 피해를 입은 자국민들이나 성숙하기 전에 전쟁에 투입되었던 소년병들을 다루곤 한다.


그렇게, 제2차 세계대전은 수많은 입장들을 대변하는 수많은 콘텐츠를 양산해 왔고 앞으로도 계속 양산할 것이다. <랜드 오브 마인>은 그동안 종종 보아왔던 독일군 소년병 포로들의 이야기를 조심스럽게 다룬다. 그것도 종전 후의 이야기이다. 종전 70년이 지나가는 시기에서, 전쟁 '중'의 이야기가 아니라 전쟁 '후'의 이야기가 나오고 있는 것 같다.


전쟁의 잔해를 제거하는 임무를 맡은 소년들


패전국 나치독일, 그들이 전쟁 중에 남긴 치명적인 잔해들을 소년병들이 목숨 걸고 치운다. ⓒ싸이더스



1939년 9월 독일의 폴란드 침공으로 발발한 제2차 세계대전, 이듬해 4월에는 덴마크와 노르웨이를 침공한다. 덴마크는 즉시 항복, 독일은 덴마크 서해안 전역에 방어선을 구축한다. 연합군의 상륙을 저지하기 위함이었다. 하지만 연합군의 상륙은 프랑스였고, 덴마크 서해안 방어선은 종전 후에도 그대로 남는다.


나치독일이 저지른 전쟁의 잔해, 덴마크는 나치독일 포로들에게 지뢰 제거 임무를 맡긴다. 그 중 상당수가 소년병이었다고 하는데, 영화는 다름 아닌 소년병들의 지뢰 제거 임무를 주로 삼는다. 그 어떤 도구도 사용할 수 없는, 맨손과 막대기 하나에 의존한 지뢰 제거. 그야말로 목숨과 바꾼 임무다.


엄청나게 위험한 작업인 만큼 사전 연습부터 철저해야 한다. 사전 연습도 실전처럼, 연습에서도 죽고, 실전에서도 죽어 나간다. 이 임무를 맡은 덴마크군의 칼 상사는 처음에는 눈도 깜짝하지 않지만, 시간이 갈수록 계속해서 죽어 나갈수록 느낀다. 이 아이들은 전쟁에 투입되어 명백한 죄를 저질렀지만, 지뢰 제거 임무를 맡아야 할 건 최소한 이 아이들은 아니라고.


그렇지만, 그런 생각은 누구한테건 씨알도 안 먹힐 것이다. 그들이 전쟁 중에 저지른 '짓'을 보면 그런 생각을 할 수 있겠는가? 아무리 그들이 성숙하지 못한 상태에서 오로지 명령에 따라 한 행동이었다고 해도 말이다. 그들이 저지른 짓을 합당화 할 수 있는 건 아무것도 없다. 그들의 총탄에 쓰러진 수많은 이들을 생각해서라도.


그런 식의 '방법'과 그런 '방향'은 잘못 되었다


복수를 하는 건 좋다. 승전국이니만큼 어느 정도의 것들은 예상된다. 하지만 명백히 방법과 방향이 틀린 게 존재한다. 이 영화는 그걸 보여준다. ⓒ싸이더스



여기서, 단순히 가해자와 피해자는 없고 그저 고통만 있었다는 식으로 풀어갈 순 없다. 이 나치독일 소년병 포로들이 가해자였다는 걸 부정할 수 없다. 종전 후의 모습만, 그것도 포로가 된 모습만 보여주기 때문에 선량해보일 수 있을지 모르지만, 전쟁 중에 그들이 잔악한 모습을 보이지 않았다고 말 못할 것이다. 미성숙을 앞세워, 잔악한 명령을 그 누구보다 앞서 실행했을지 모를 일이다.


문제는 그들이 아닌 그들에게 말도 안 되는 일을 시킨 이들의 모습이다. 감독이 의도한 것일 수 있겠는데, 종전 후 나치독일 포로들에게 덴마크군이 보이는 행동은 나치독일이 보여준 잔악함 못지 않았다. 그들의 행동은 '방향'과 '방법'이 잘못된 것이었다고 생각한다. 최소한 소년병 포로들에게 그런 일을 시키면 안 되는 것이었고, 아무런 제대로된 도구 없이 굶어 죽을 듯이 일을 시키면 안 되는 것이었다.


범죄에는, 주범이라는 게 존재한다. 주도하고 기획하고 결정하고 명령을 내리고 책임지고 가장 많은 것들을 얻을 수 있는 존재 말이다. 제2차 세계대전의 경우, 종전 후 주범 중 상당수가 스스로 목숨을 끊었고 전쟁 중에 혹은 내분으로 인해 죽었다. 물론 많은 주범들이 사형 당했다. 그렇지만 그 바로 밑의 이들에겐 아마 정치적일 거라 예상되는 이유로 무죄 판결이 내려지기도 했다.


누구는 주범이 아니라는 이유로 무죄 판결을 내려 잘 살아가고, 누구는 종전 후에도 전쟁 중보다 더 죽음에 직면한 작업을 계속해 나가야 하는 게 말이 되느냐고 말하려는 게 아니다. 각각 저지른 짓에 따른 각각의 속죄가 필요할 테니까. 그리고 결정적으로 세상은 불공평하니까. 문제는 그렇게 내려온 죄의 무게를, 왜 가장 '인간'에 가까울 이들이 짊어져야 하느냐는 것이다. '악마' 같은 이들이 해결해야 할 사항이 아닌가. 설사 그들이 짊어져야 한다고 쳐도, 그런 식으로라면 얘기가 되지 않는다. '이에는 이, 눈에는 눈'으로 맞대응하면 똑같이 된다는 건 너무도 당연한 얘기가 아닌가. 더욱이 덴마크는 저항 한 번 하지 않고 곧바로 항복했다.


그들을 인간으로 대해야만, 그들은 뉘우칠 수 있다


마냥 인간적인 차원에서 그들을 인간으로 대해줘야 하는 건 아니다. 그들을 인간으로 대해주어야만, 그들은 스스로를 인간이 아닌 병사라고 생각한다. 그래야만 뉘우칠 수 있다. ⓒ싸이더스



감정적으로 이해는 한다. 누구라도 그 상황이었다면 그렇게 대응했을 것이다. 내 국토와 내 가족를 무참히 짓밟은 이들. 대상의 구체적 물상을 들여다볼 필요도 없이 대상이 속해 있는 집단의 악마성에 분노를 터뜨릴 수밖에 없을 것이다. 그게 인간이니까. 그렇지만 그 시간이 지나고 들여다볼 수 있는 상황이 되었을 때, 보여야 한다. 용서할 순 없더라도 인정은 해야 한다는 걸. 그들도 우리와 같은 인간이라는 걸 말이다.


영화는 인간을 보여주려 애쓴다. 아니, 애쓸 필요도 없다. 인간이라 할 수 없는 나치독일이 남긴 잔해를 인간들이 처리하고 있는 것과 다름 없다. 아름다운 해안을 뒤로 하고 무참하게 죽어가는 건 광포에 휩싸인 병사들이 아닌 두려움과 배고픔에 벌벌 떨고 집으로 돌아가고 싶어 하는 인간들 뿐이다. 그들을 그렇게 대하는 순간, 과거는 사라지고 없는 것이다.


만약 그들을 포로답게 대했다면 오히려 그들을 인간이 아닌 병사로 생각했을 듯하다. 이런 비인간적인 처사를 통해 그들의 인간성을 발현시키지 않았다면, 그들은 자신의 잘못을 계속해서 떠올렸을 것이다. 잘못을 뉘우치던가 계속해서 광기에 휩싸였던가 하는 건 그 이후의 일이겠다. 그것이 오히려 '이쪽'을 위한 길이 아니었을까, 싶다.


매우 힘든 일이었겠지만 이성적으로 대처했다면 방향과 방법을 달리했을 것이고, 그들은 자신의 죄 이상으로 지독했던 전쟁 이후의 기억이 아닌 자신이 저지른 죄를 생각하며 살아갔을 테다. 그들을 병사가 아닌 인간으로 인정하고 인간으로 대할 수밖에 없게 한 파렴치한 짓은 정말 바보 같았다.


피해자가 가해자가 되고 가해자가 피해자가 되는 도식을 넘어, 미성숙한 이들에게 저지른 잔혹한 행위의 부당위성을 넘어, 그들도 인간이라는 점을 인정해야 한다는 점까지 넘어, 즉 선악의 개념을 넘어 그들에게 행한 행위의 무뇌아적 지점을 지적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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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서평] <동급생>


소설 <동급생> 표지 ⓒ열린책들



예술에 있어 '소품'과 일명 '작은 걸작'은 한 끗 차이다. 공통적으로 규모가 작거나 소소한 이야기를 전하려 한다면 범주 안에 들어갈 것이다. 제89회 아카데미에서 작품상의 영예를 안으며 2016년 최고의 영화로 우뚝선 <문라이트>는 제작비가 불과 500만 달러에 불과한 작은 영화다. 하지만 이 영화는 소품이 아닌, 작은 걸작이라 할 수 있겠다. 무엇을 어떻게 전달하려는지에 따라 달라진다. 


1971년에 초판이 나오고 1977년에 재출간되어 전 세계적으로 큰 주목을 받았던 프레드 울만의 작은 소설 <동급생>(열린책들)이 재출간 40년만에 한국에 상륙했다. 작은 판형임에도 130쪽도 채 되지 않는 이 작은 소설은 어떨까. 그 자리에서 완주가 가능하기에 바로 판단할 수 있다. 결론부터 말하자면, 소품을 가장한 작은 걸작이다. 


한스와 콘라딘의 꿈 같은 우정, 최선의 행복


독일 슈투트가르트의 카를 알렉산더 김나지움을 다니는 유대인 의사의 아들 한스 슈바르츠, 1932년 2월에 가장 큰 행복과 가장 큰 절망의 원천이 될 소년이 전학온다. 저명한 독일 귀족인 콘라딘 폰 호엔펠스. 뭔가 '다른' 그 소년에게 끌리지 않을 사람이 없었는데, 함부로 다가가 그와 함께 할 수 있는 사람은 없었다. 반면 한스는 콘라딘이 친구가 되리라는 것을 믿어 의심치 않게 되었다. 한스에게 콘라딘은 우정의 로맨틱한 이상형을 완벽히 충족시켜줄 수 있는 친구였다. 


한스는 콘라딘의 눈에 들기 위해 자신의 능력을 뽐내기 시작한다. 문학과 체육이라는 극점에 있는 것에서 말이다. 이내 그들은 둘도 없는 친구가 된다. 그 무엇도 그들의 우정을 방해할 순 없었다. 벽에 나치의 하켄크로이츠 표식이 나타났다든가 유대계 시민이 괴롭힘을 당했다든가 공산주의자들이 두들겨 맞았다든가 하는 '대수롭지 않은' 일들이 있었지만, 슈투트가르트는 평온하고 합리적인 곳으로 보였다. 


화가 출신 작가는 이들의 우정을 너무나도 황홀하게 표현해낸다. 암울했을 당시 독일과 대비되는 자연 풍경은 한스로 하여금 모든 것에 평화로움과 현재에 대한 믿음과 미래에 대한 희망을 느끼게 하기에 충분했다. "슈바벤의 완만하고 평온하고 푸르른 언덕들은 포도밭과 과수원들로 덮이고 성채들로 왕관이 씌워졌다'와 같은 구절은 그 자체로 아름다운 시가 생각나게 할 정도로 황홀함을 선사한다. 


한스의 삶에서 가장 행복한 나날들이었을 그 시절은 횔덜린의 아름다운 시로밖에 표현해낼 수 없을 정도다. 시에 일가견이 있는, 시인이 인생의 꿈이기도 한 한스가 가장 좋아하는 시인 횔덜린이기도 한대, '이탈리아의 전령인 부드러운 미풍이여/그 모든 미루나무와 함께하는 사랑스러운 강이여'(<귀향>의 일부)와 같은 구절은 더 이상 바랄 게 없는 최선의 행복을 표현한다. 한스와 콘라딘의 우정이 이 정도였고, 한스의 가슴 속에 맺힌 행복의 이슬이 이 정도였다. 


마지막 한 줄로 위대한 소설이 되다


열여섯 살에 불과한 그들이 알 수 있었을까. 종말이 코앞에 와 있었다는 걸. 그들이 대수롭지 않게 여겼던 것들이 사실 종말의 전조들이었다는 걸. 1930년대 독일에서 독일 귀족과 유대인의 차이는 하늘과 땅 그 이상이었다. 독일을 당연히 조국이라 생각하고 그에 충성을 다하며 자연스레 '독일인'이어도, 히틀러의 광기 앞에서 유대인은 유대인이었다. 그들도 피해갈 수 없었다. 


졸지에 '독일을 망치고 있는 유대인'이 된 한스, 콘라딘과의 불가항력적인 멀어짐도 비슷한 이유였다. 급기야 콘라딘을 피하기 시작한 한스, 다시 외톨이가 된다. 그리고 얼마 있어 미국으로 도망간다. 그곳에서 성공을 거둔 한스, 어느 날 제2차 세계 대전 때 산화한 카를 알렉산더 김나지움 동창들을 기리는 추모비 건립에 기부해 달라고 요청하는 호소문이 도착한다. 산화한 동찰들 리스트를 읽어내리는 한스, 그곳에서 더없이 충격적인 소식을 듣는다. 


다 읽고 나면, 마치 소설 전체가 마지막 한 줄을 향해 수렴되는 것처럼 느껴진다. 그 한 줄을 읽는 순간, 그 한 줄을 제외한 모든 내용이 머릿속에서 스르르 사라진다. 그러곤 지체없이 다시 처음부터 읽게 되는데, 그제서야 비로소 이 소설의 진가를 알 수 있다. 이 소설의 태반을 차지하는 한스와 콘라딘의 우정을 그렇게도 아름답게 그린 이유를 알 수 있는 것이다. 그럼에도 마지막 한 줄이 주는 충격은 여전하다. 


한 층위는 영화 <브로크백 마운틴>의 마지막 장면을 떠오르게 한다. 하찮은 인간이 지닐 수 있는 우정 또는 사랑의 총량이 이리도 엄청날 수 있을까. 영화는 그 다른 층위를 '동성애'라는 코드로 풀어내 더없는 감동을 선사했다. 반면, 이 소설 <동급생>은 어떨까. 한 층위는 비슷한 수위라고 할 수 있겠지만, 다른 층위가 주는 수위는 비교할 수 없을 정도겠다. 자신과 가족과 시대까지도 뛰어 넘는, 즉 모든 걸 뛰어 넘는 우정의 총량을 보여준 게 아니겠는가. 이 한 줄로 그 어떤 제2차 세계 대전과 홀로코스트 관련 콘텐츠를 가볍게 뛰어 넘거니와, 위대한 콘텐츠들과 어깨를 나란히 하게 되었다. 


그 어떤 홀로코스트 작품보다 큰 울림


이 소설이 어줍잖게 홀로코스트를 끼워넣었다면, 명백한 소품이라 할 수 있었을 것이다. 그런 면에서 소설 <동급생>과 굉장한 유사점을 발견할 수 있는 영화 <줄무늬 파자마를 입은 소년>는, 비록 슬프고 아름답고 충분히 위대한 감동과 역설을 선사하지만 '작은 걸작'이 아닌 '소품'이라고해도 무방하다. 누구나 너무나도 잘 알고 있는 홀로코스트의 중심에서는, 생각보다 그 울림이 작다. 


아무리 생각해 봐도, <동급생> 이상의 밀도를 가지고 충격을 주고 생각할 여지를 주는 작품을 찾기 힘들다. '홀로코스트' 하면 즉각적으로 영화 <쉰들러 리스트>, 그래픽노블 <쥐>, 책 <죽음의 수용소에서> 등의 위대한 작품들이 생각나지만, 솔직히 이 정도의 파급력을 느끼진 못했다. 물론, 이 작품들에서 홀로코스트에 대한 보다 더 심도 있고 치열한 단면을 엿볼 수는 있다. <동급생>은 홀로코스트를 작품의 중심에 놓지 않았다는 것이다. 그럼에도 더욱 끔찍히도 와 닿는다. 


조금 더 길었으면 어땠을까. 더 깊은 우정을 통해 많은 황홀함과 아름다움을 표현해내고, 홀로코스트가 주는 절망감을 더 절절하게 전달하여, 더욱더 엄청난 충격을 받게 될지 모를 일이 아닌가. 그랬다면 마지막 한 줄에서 받는 충격이 오히려 적었을 것이다. 그건 작품이 갖는 위치는 격하시키는 일이다. 더도 말고 덜도 말고 딱 이 정도였기에 이 작품이 위대할 수 있었다. 작가의 탁월한 솜씨와 선택에 박수를 보낸다. 덕분에 또 하나의 '사랑하는 작품'을 만나게 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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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서평] <네메시스>



<네메시스> ⓒ문학동네



제2차 세계대전이 한창인 1944년 미국 뉴저지의 뉴어크 지역, 폴리오 바이러스가 발병한다. 이 치명적인 전염병은 주로 열여섯 이하의 아이들에게 걸리며, 마비로 인해 기형적인 불구자가 되거나 죽음에 이르게 했다. 백신이 없는 상태였기에 발병하지 않도록 예방하는 수밖에 없었다. 하지만 감염된 사람에게 가까이 있기만 해도 옮을 수 있었기에 쉽지 않았다. 동네는 불안에 사로잡혔고 평화는 깨졌다. 아이를 보호하는 최선의 방법은 도시를 벗어나 산이나 시골의 여름 캠프에 보내는 것이라고 생각했다. 


메르스 사태와 흡사한 라인을 가진 이 이야기는 필립 로스의 마지막 소설이라 일컬어지는 <네메시스>의 초반부이다. '네메시스'라 하면 '보복'에 해당하는 그리스어로, 그리스 신화에 등장하는 보복의 여신이다. 그렇다면 이 소설은 바이러스와 복수에 얽힌 이야기를 할 것인가? 일단 제목의 뜻풀이와 소설 배경의 조화가 합격점. 문제는 필립 로스가 마지막으로 던지는 메시지는 과연 무엇인가 이다. 


훌륭한 만큼 죄책감에 시달린 청년


소설은 놀이터 감독인 이십삼 세 청년 버키 캔터를 중심으로 진행된다. 버키는 키는 작지만 단단한 몸에 운동선수로서 능력이 출중하고 강인한 의지로 가득 차있는 인물이었다. 그는 전쟁터에 싸우러 나가지 않은 극소수의 청년 중 하나였는데, 치명적으로 시력이 약했기 때문이었다. 버키는 자신이 어찌할 수 없는 상황을 두고 하염없이 죄책감에 시달렸다. 그런 자신을 용납하기 힘들었다. 


그래서 그가 택한 방법이 놀이터 감독으로서 아이들을 폴리오에게서 방어하는 것이었다. 폴리오 방어를 제2차 세계대전과 버금가는 전쟁으로 생각하고서 말이다. 버키는 자신이 있었다. 할아버지와 할머니한테서 받은 따뜻하고 다감하며 강인하고 건전한 몸과 마음의 균형이 그를 지탱하고 있기 때문이었다. 하지만 그의 형편없는 시력이 그로서는 어쩔 수 없는 것이었듯이, 폴리오가 아이들을 위협하는 것도 그가 어찌할 수 없는 것이었다. 그가 관리하는 놀이터에 폴리오가 침투하기 시작한다. 


어떤 일을 수행함에 있어 완벽함을 추구하며 과도한 스트레스를 받는 사람이 있다. 그런 사람이 완벽하게 일을 수행하지 못했을 때 받게 되는 죄책감은 상상을 초월할 것이다. 충분히 할 수 있는 건데 하지 못했고, 나 때문에 일을 수행하지 못했다. 나는 정말 못난 사람이고, 가치가 없는 사람이다. 이런 경우 파국으로 치닫기 쉽다. 그렇지만 그는 누가 봐도 강인하고 훌륭한 사람이다. 


계속되는 죄책감 퍼레이드, 그리고 최악의 결과


훌륭한 젊은이 버키도 이와 비슷하다. 그는 그 훌륭함에 버금가는 죄책감을 지니고 있다. 폴리오에게서 아이들을 지켜내지 못했을 때 그가 괴로워하며 죄책감을 느낀 이유는 그가 그만큼 훌륭한 생각을 가진 사람이기 때문이다. 아이러니도 이런 아이러니가 없다. 


그의 죄책감 퍼레이드는 놀이터를 떠나 파라다이스에서도 계속된다. 그는 폭염의 뉴어크를 떠나 약혼녀가 있는 인디언 힐 여름 캠프로 간다. 그곳의 물놀이 감독이 징집 되어 그 자리를 이어받기 위해서 였다. 약혼녀 마샤의 입김이 많이 작용했는데, 그녀는 버키가 폴리오 때문에 위험한 뉴어크를 떠나 안전한 인디언 힐로 왔으면 했던 것이다. 하지만 그들의 선택은 최악의 결과를 낳고 만다.


폴리오는 인디언 힐도 덮친 것이다. 문제는 이번에도 버키의 죄책감이었다. 버키는 인디언 힐에 폴리오를 옮긴 사람이 자신이라는 판단을 스스로 해버렸고, 나아가 뉴어크 놀이터에 폴리오를 옮기게 한 사람도 자신이라고 생각하게 되었다. 그 놀이터에 이탈리아인이 찾아왔을 때 제대로 대응을 못했기 때문이라는 것이었다. 사실 그는 누구보다도 그들의 행패에 잘 대응했었다. 버키는 그런 사람이었다. 


의무와 죄책감과 의지 그리고 두려움


소설은 뒷부분에 반전을 숨겨두고 있다. 그 반전으로 소설은 훌륭하게 균형을 잡으며 끝을 맺는다. '그런 사람'인 버키는 아마도 쉬운 길을 택하지는 않았을 것이다. 남들이 보기엔 이해할 수 없는 생각과 행동을 하며 살아갔을 것이다. 그렇다면 그는 올바른 삶은 산 것일까? 올바르지만 멍청한 삶을 산 것일까? 어떻게 사는 게 맞는 것일까? 


소설은 사망에 이르게 하는 무서운 전염병인 폴리오를 주요 소재로 그리고 있다. 생각만 해도 등골이 서늘해지며 오싹함과 두려움을 감추기 힘들다. 메르스에 공포가 확산일로에 있는 현재, 폴리오에 대한 감정이입이 훨씬 쉽기 때문이다. 죽지는 않을 지라도 평생 불구로 살아가게 될 거라는 무시무시한 전언은 덤이다. 하지만 버키에게 그보다 더 두려웠던 건 다른 데 있었다. 


버키의 심경은 다음과 같이 변해 간다. 아이들을 지켜야 한다는 의무, 아이들을 지키지 못한 죄책감, 신을 향해 포효하며 현실에 대해 분개하는 의지, 자신에게 들이닥칠지 모르는 알 수 없는 병에 대한 두려움. 버키는 자신이 두려워하는 걸 두려워했다. 그런 자신을 용서할 수 없던 것이다. 그러다 보니 의무와 죄책감 그리고 분노만 쌓여갔다. 두려워하면서 빠져나갈 구멍을 만들지 못했고 파국으로 치달았다. 


그렇지만 버키가 보여준 일련의 심경은 국민을 지켜야 하는 수장의 그것과 동일하다. 아니, 수장이 버키의 심경과 동일해야 한다. 그 자신을 파국으로 몰고 가라는 게 아니라, 그때까지 심경이 같아야 한다는 것이다. 의무와 죄책감과 분노 그리고 의지를 보여줘야 하는 게 수장이 아닐까. 버키가 뉴어크에서 인디언 힐로 갈 때 놀이터의 관리자가 버키에게 한 치명적인 말을 옮겨 본다. 


"선택의 여지가 없다고, 응? 당연히 선택할 수 있지. 자네가 지금 하고 있는 걸 바로 선택하는 거라고 해. 자네는 지금 폴리오한테서 도망치는 거야. 일을 하겠다고 계약을 했는데 폴리오가 발생하니까 일 같은 건 난 모르겠다, 약속 같은 건 난 모르겠다, 하고 있는 힘을 다해 미친듯이 달아나는 거야. 자네가 하는 건 그저 달아나는 것일 뿐이라고." (본문 중에서)


네메시스 - 8점
필립 로스 지음, 정영목 옮김/문학동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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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리뷰] <이미테이션 게임>



영화 <이미테이션 게임> 포스터 ⓒ메가박스 플러스엠


천재에 대한 영화를 몇몇 알고 있다. <굿 윌 헌팅> <뷰티풀 마인드> <어거스트 러쉬> <샤인> 등. 앞의 두 영화는 수학 천재, 뒤의 두 영화는 음악 천재를 다룬다. 느낌은 다르다. 이 영화들을 보면 수학 천재는 사람들에게 환멸의 시선을 받는 반면, 음악 천재는 사람들에게 찬사를 받는다. 이 두 종류의 천재 영화를 비교하면 수학 천재를 다룬 영화에 더 애착이 간다. 


수학을 천재적으로 잘 하는 사람이 일반인에게 찬사를 받기란 거의 불가능하다. 일단 그는 '다른 사람', 나아가 '틀린 사람' 취급을 받기 때문에 경외의 시선보다는 환멸의 시선을 받는다. 정신병자 같이 바라볼 때도 있다. 수학에 관해서는 다른 차원에 있는 사람이기 때문이다. 나와 다른 사람들에 대해 느끼는 감정은 언제 어느 때나 같은 것 같다. 그래서 천재들 자신도 자신이 단지 이상한 사람이라고만 알고 있기도 한다. 


<굿 윌 헌팅>과는 다르게 <뷰티풀 마인드>는 이런 경향의 시선을 잘 보여준다. 천재라서 남들과 다르고, 그러하기에 남들에게 좋지 못한 시선을 받고, 자신은 그걸 의식하지 못한 채 소심하고 고지식하고 융통성 없게 변해간다. 하지만 그야말로 아무도 실행에 옮기지 못한 위대한 생각으로 세상을 바꾸는 것이다. 


세상을 바꾸는 위대한, 그러나 평범하지 않은 생각과 실행력을 가진 이


영화 <이미테이션 게임>은 이런 절차를 충실히 실행한다. 세상을 바꾸는 위대한, 그러나 평범하지 않은 생각과 실행력을 가진 이가 있다. 그의 이름은 앨런 튜링. 그는 어린 시절부터 남들과 달랐고 고독했다. 영화는 그의 어린 시절, 제2차 세계대전 당시 나치독일의 악마적 암호 시스템 '이그니마'를 푸는 과정, 그리고 전쟁이 끝나고 난 후 튜링의 감춰진 행적을 쫒는 형사의 시선, 세 개의 시간으로 나눠 이야기를 풀어나간다. 시간순으로 나열되지 않고 교차로 마구잡이로 나왔다 들어간다. 


어린 시절 그는 왕따와 함께 일상적인 구타를 당하기 일쑤였다. 그런 그를 도와주는 한 친구가 있었다. 그는 그 친구에게 남다른 감정을 느끼지만, 그 친구는 결국 결핵으로 죽고 만다. 그야말로 유일한 친구가 사라진 그에게 남은 건 무엇이었을까?



영화 <이미테이션 게임>의 한 장면 ⓒ메가박스 플러스엠



제2차 세계대전이 발발하고 나치독일은 빠른 속도로 유럽을 점령 중이었다. 거의 유일하게 바다 건너 섬나라 영국만이 점령당하지 않고 대항할 수 있었다. 영국은 천재적인 언어학자, 수학자, 체스 챔피언, 퍼즐 천재 등을 모아 나치독일의 암호 시스템 '이그니마'를 풀고자 했다. 그 암호만 푼다면 나치독일의 현재와 미래를 속속들이 알 수 있게 되고 전쟁을 승리로 이끌 수 있을 것이었다. 앨런 튜링은 천재 수학자로 팀에 합류해 매일 24시간마다 새롭게 바뀌는 이그니마를 풀고자 최선을 다한다. 과연 풀 수 있을까?


제2차 세계대전이 끝난 한참 후 어떤 형사가 튜링의 과거 행적을 추적한다. 그의 행적으로 보아 소련 스파이가 의심되는 이유에서였다. 그를 집적 불러와 취조를 하고 과거 행적까지 낱낱이 팠지만, 돌아온 결과는 소련 스파이가 아니었다. 그렇게 들쑤신 결과 돌아온 답은 '동성애자'였다. 그렇다. 그는 동성애자였던 것이다. 형사는 허탈함을 감추지 못한다. 


'천재'가 아닌 '다름'에 포커스를 맞추다


영화는 다름 아닌 바로 이 '동성애자'에 포커스를 맞춘다. 천재인 것도 모자라 동성애자였다니, 영화보다 더 영화 같은 스토리를 형성할 수 있을 것이었다. 지금에야 동성애에 대한 큰 진보를 이뤘지만, 당시만 해도 동성애는 묻지도 따지지도 않고 불법이었다. 천재는 '다르'지만, 동성애는 '틀린' 것이었다. 그가 전쟁을 종결시키고 1,400만 명의 인명을 구하는 데 큰 일조를 했다고 해도 말이다. 


튜링은 천재들을 모아 놓은 팀 중에서도 단연 튀는 사람이었다. 그는 이그니마에 대항할 수 있는 기계를 만들고자 했던 것이다. 그 기계는 인간 같이 생각하면서도 인간보다 훨씬 뛰어난, 또한 일시적이지 않고 계속해서 돌아가는 기계였다. 지금은 튜링 기계라고 불리는 인공지능 기계, 컴퓨터의 시작이었다. '아무것도 아니라고 생각했던 사람이, 아무도 생각할 수 없는 일을 해낸' 것이다. 



영화 <이미테이션 게임>의 한 장면 ⓒ메가박스 플러스엠



영화는 시종일관 앨런 튜링을 통해 '다름'에 대해 천착한다. 제목인 '이미테이션 게임'이 그 줄기의 시작이라고 할 만한데, 이 게임을 통해 인간인지 기계인지 판단한다고 한다. 즉, 기계가 인간을 완벽하게 모방할 수 있는지를 기계가 지능을 가졌다고 판단할 수 있는 근거로 삼는 것이다. 이 게임은 튜링이 고안했기에 '튜링 테스트'라고도 불린다. 튜링은 이 게임을 자신과 빚대어 말한다. 


"나는 누구입니까. 인간입니까? 기계입니까? 전쟁영웅입니까? 범죄자입니까?"


그는 당시 제2차 세계대전을 종결시키는 데 지대한 영향을 끼친 튜링 기계를 만든 전쟁영웅이자, 동성애자인 범죄자였다. 그리고 지금은 '컴퓨터의 아버지'로 불리기도 한다. 그의 진짜 모습이 무엇이든 그는 그에 합당한 존경을 받지 못했고 단지 남들과 다르다는 것 하나로 멸시만 당했다. 


전쟁영웅도 범죄자도 아닌, 인간을 그리다


오랜 세월이 지나 많은 진보를 이룩한 지금도 남들과 다른 사람을 대하는 태도는 과거와 크게 다르지 않다. 모든 사람들이 그런 건 아니지만 자기만의 세계에 빠져 있는 외골수는 말이 통하지 않는 사람으로, 천재는 다른 차원의 사람으로, 비 이성애자는 더럽고 혐오스러운 사람으로, 생각이 트이고 자유로운 사람은 또라이로 비춰지기 일쑤인 것이다. 이런 멸시와 혐오스런 시선을 받기 싫으면 자신을 감추고 어느 누군가를 모방하며 살아갈 수밖에 없다. 앨런 튜링은 결국 그렇게 살다가 자살로 생을 마감하고 만다. 



영화 <이미테이션 게임>의 한 장면 ⓒ메가박스 플러스엠



영화는 그런 앨런 튜링을 전쟁영웅으로도, 범죄자로도 그리지 않는다. 인간으로 그리고자 한 것 같다. 그리고 남들과 다르다는 걸 감추고자 하지도 않는다. 달랐기에 위대한 생각으로 인류에게 큰 공헌을 했다고 보고 있다. 그 자신이 결국 불행에서 헤어나오지 못한 게 안타깝지만, 그만큼 그에 대한 존경의 마음이 가슴 깊은 곳에서 올라온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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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리뷰] <퓨리>



영화 <퓨리> 포스터 ⓒ소니픽쳐스 릴리징 월트디즈니 스튜디오 코리아(주)



<인터스텔라>의 태풍 속(북미와 중국에 이어 한국은 <인터스텔라> 전세계 3위 흥행 국가이다.)에서 살아남은 영화가 과연 존재할까 싶은 요즘, 조용하게 자신의 존재 가치를 보이고 있는 영화가 있다. 한국이 사랑해 마지 않는 배우인 '브래드 피트'를 앞세운(주연에 제작까지) 전쟁 영화 <퓨리>이다. 


하반기 기대작 중 한국 영화 <나의 독재자>, <빅매치> 해외 영화 <헝거게임> 등이 추풍낙엽처럼 나가 떨어지거나 기대 이하의 성적을 보이는 가운데, <퓨리>의 흥행은 의외다. '브래드 피트'의 힘인 것인가, 탱크 '퓨리'의 힘인 것인가. 앞의 것은 여성의, 뒤의 것은 남성의 지지를 받는다고 할 수 있는데 그렇다면 여성과 남성 모두의 마음을 훔친 것인가? 그것도 아니라면 이 영화에 다른 무엇이 존재하는가?


제2차 세계대전이 막바지에 이른 1945년 독일, 최고의 무훈을 세운 주인공 '워대디'(브래드 피트)와 탱크 '퓨리'는 여전히 살아 있다. 전쟁이 계속 되고 있는 와중에 계속해서 살아 있다는 것은 그 자체로 이미 수많은 죽음을 헤쳐 나왔다는 의미다. 그들은 죽거나 전쟁이 종료될 때까지 싸울 수밖에 없는 운명이기도 하다. 영화 <퓨리>는 이 사실에 기반한다. 


알고 보면 알콩달콩 '가족 영화'?


워대디에게는 3명의 가족 같은 부하들이 같이 한다. 큰 아들 격인 부대장이자 포수 바이블. 그는 굳건한 신념과 완벽한 실력으로 워대디를 도운다. 둘째 격인 운전병 고르도. 탁월한 운전 솜씨와 책임감 있는 모습을 보여준다. 셋째 격인 장전병 쿤 애스. 다혈질적이고 거칠지만 실력 하나는 최고이다. 탱크인 퓨리라는 '집'의 보호 아래에서 먹고 자고 싸우고 나아간다. 삶을 공유한다. 그들은 이 탱크를 절대적으로 믿으며, 자신들이 탱크와 함께 하는 것이 깊은 자부심을 느낀다. 나아가 '최고의 직업'이라고 까지 말한다. 


그런 그들 앞에 8주 밖에 안 된 새파란 애송이 노먼이 나타난다. 배운 거라고는 타자기 밖에 없는 그는, 아무것도 모른 채 아무런 정신적 무장 없이 전선에 배치된다. 이 막내 아들의 모습을 본 워대디. 이대로 라면 얼마 후에 죽을 것이 뻔하다. 정신 무장을 단단히 시켜야 한다. 그는 마구 때리면서 까지 하면서 노먼을 가족의 일원으로 받아들이려는 노력을 마다하지 않는다. 노먼은 차라리 자신을 죽이라며 고집을 부리지만, 그 때문에 눈앞에서 동료가 죽자 정신이 번쩍 든다. 독일군 죽이는 거 아무것도 아니다. 



영화 <퓨리>의 한 장면 ⓒ소니픽쳐스 릴리징 월트디즈니 스튜디오 코리아(주)



이 영화는 전쟁에 정확히 말해서 전투를 소재로 하고 있는 영화이지만 이처럼 '가족 영화'이기도 하다. 가족을 책임지기 위해서 권위적이고 강한 모습을 보이고자 하지만, 때론 눈물도 흘리는 가장 '워대디'. 지지고 볶고 티격태격 하지만 서로에 대한 믿음과 신뢰, 그리고 집(?)과 같은 탱크 퓨리에 대한 깊은 자부심까지 지니고 있는 3명의 부대원들. 그리고 새로 들어온 막내 신입을 살리기 위해 일부러 혹독하게 대하는 모습까지. 일면 노먼의 성장 영화로 보일 수 있겠지만, 가족 영화로 보이는 면모가 더 크다. 


아기자기한(?) 스케일에서 보여주는 극도의 리얼리티


이들 무적의 5인방과 퓨리는 계속해서 무훈을 드높이며 나아간다. 한번은 적진에 발이 묶인 아군 보병들을 구출해내기 위한 작전에서 멋지게 성공한다. 드넓은 평지에서 무지막지하게 포탄을 날리는 탱크들의 위용은 가히 어마어마하다. 


그렇지만 여지없이 위기에 맞닥뜨린다. 퓨리를 비롯해 다른 3대의 셔먼 탱크가 진군 하던 중, 독일군의 티거를 만난 것이다. 티거 한 대면 셔먼 탱크 4~5대를 상대할 수 있었다. 죽음을 각오한 혈투. 다른 3대의 셔먼 탱크들이 폭사 당하고, 워대디의 퓨리는 상대적으로 가볍고 이동이 용이한 셔먼 탱크의 장점을 살려 겨우 이길 수 있었다. 



영화 <퓨리>의 한 장면 ⓒ소니픽쳐스 릴리징 월트디즈니 스튜디오 코리아(주)



이번에는 <퓨리>가 남성 관객을 사로잡을 차례다. 전쟁 영화가 갖는 미덕 중 하나는 바로 '리얼리티'인데, 이 영화의 리얼리티는 탱크의 탱크에 의한 탱크를 위한 맞춤이다. 감독 '데이비드 에이어'는 2012년 작인 <엔드 오브 왓치>로 리얼리티의 극치를 보여준 바 있는데, 이번에도 그 미덕을 발휘한다. 흔히 전쟁 영화에서 보이곤 하는 어마어마한 스케일 대신, 아기자기한(?) 스케일에서의 리얼리티라 더욱 실감이 난다. 


아쉬운 점도 있지만, 이를 커버하고도 남는 연기력!


이게 전부라면 얼마나 좋을까? 오랜만에 찾아온 전쟁 영화를 색다르게 봤으니 말이다. 하지만 이 영화가 갖고 있는 결함들도 눈에 띈다. 너무나 예상 가능한 진부하기 짝이 없는 스토리 라인과 마지막 전투 때문이다. 도대체 워대디는 왜 도망가지 않았을까? 그나마 빈약한 스토리를 더욱 빈약하게 만들 수는 없기에 어떻게 진행되었는지 말할 수는 없지만, <라이언 일병 구하기>가 생각난다고 말해둔다. 노먼은 <라이언 일병 구하기>에서 겁쟁이 '업햄'이 생각나고, 마지막 전투의 양상도 비슷하다. 


마지막으로 빼놓을 수 없는 부분이 이들 5명의 '연기'다. 과거 '꽃미남 스타'에서 진정한 배우로 거듭나고 있는 브래드 피트는 제쳐 두고서 라도, 바이블 역의 샤이아 라보프는 예전 <트랜스포머>에서 보여줬던 촐싹 맞고 안정적이지 못한 면모를 완전히 지워냈다. 고르도 역의 마이클 페나는 <크래쉬>에서 인상적인 연기로 남우주연상을 휩쓸며 연기파 배우로 우쑥 선 배우답게 안정적인 연기를 보여주었다. 


쿤 애스 역의 존 번탈은 미국 최고의 드라마 <워킹데드>에서 보여줬던 모습에서 크게 달라지지 않았지만 그 자체로 워낙 잘 어울리는 역이라서 전혀 이질감 없이 다가왔다. 마지막으로 노먼 역의 로건 레먼은 그동안은 '포텐'이 터지지 않아 아쉬운 모습이었지만 이 영화에서는 자신의 매력을 유감 없이 발휘했다. 노먼 역이야말로 로건 레먼이 아니었으면 할 사람이 없을 것 같은 그런 느낌이었으니 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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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서평] <조용한 대공황>


<조용한 대공황> Ⓒ동아시아

"한국의 높은 가계부채는 앞으로 심각한 문제를 불러 일으킬 가능성이 있다. 계속 확대된 소득 격차와 지역 간 격차를 줄이기에는 한국 정부의 지출 규모가 너무 작다. 통화 가치의 급격한 변동에 따라 글로벌 기업의 실적이 오락가락하는 불안정한 경제 상태도 계속될 것이다. 일본 이상으로 무역 의존도와 시장 개방도가 높은 한국은 글로벌 경제의 혼란으로 발생하는 악영향을 일본 이상으로 고스란히 뒤집어쓰게 되어 있다." (한국어판 서문 중에서)


정확한 현실 직시와 돌직구적인 발언으로 시선을 끄는 이 책 <조용한 대공황>(동아시아). 이 책은 제목에서 어렴풋이 짐작할 수 있듯이, 2007년 미국 서브프라임 모기지 사태로부터 촉발된 세계 금융 위기가 1930년대의 세계 대공황과 유사하다는 내용을 담고 있다. 


나아가 세계 금융 위기에 관해 다룬 대부분의 책들에서 '세계 금융 위기는 일시적인 것이다'라고 피력하는 것과는 다르게, 작금 세계 금융 위기는 결코 일시적으로 끝날 성질의 것이 아니라고 말하고 있다. 그 가장 큰 이유에는 세계화와 자유화가 있다. 1997년 외환 위기를 타개한 제일의 선봉장이었던 세계화가 어찌 위기를 확산 시킬 주범이 되는 것인가? 


19~20세기의 전 세계적인 경제 지표


먼저, 19~20세기의 전 세계적인 경제 지표를 살펴볼 필요가 있다. 이는 학교에서 교과서로 배운 내용이기도 하고 책에 나오는 내용이기도 하다. 19세기까지 서양 제국주의 나라들은 월등한 군사력과 기술력을 앞세워 세계적인 수탈을 계속한다. 동시에 찾아온 전 세계적인 무역의 시대. 저자에 따르면 지금부터 100년 전에 이미 현대와 비슷한 수준의 세계화가 진행되었다고 한다. 


이처럼 자유방임주의에 의한 세계화의 가속은 단기 자본의 유입으로 버블이 형성되고 그 거품이 꺼지면서 대공황에 직면하게 되었다는 것이다. 그 전에 세계화가 한창 진행될 시점에 제1차 세계대전이 발발하기도 하였다. 이 전쟁 뒤에 찾아온 부흥은 버블을 더욱 가속 시켰다. 결국 세계 대공황을 타개하기 위해 뉴딜 정책으로 대표 되는 큰 정부에 의한 극도의 보호주의와 블록화가 실시된다. 이 보호주의는 당시 신흥 대국으로서의 기반을 닦고 있던 독일과 일본 등에게 치명적으로 작용했고, 이들이 곧 전쟁을 일으키게 되었다는 것이다. 치열한 국가 간의 경제전쟁이 제2차 세계대전의 발발로 이어졌다는 분석이다. 


그 뒤 전전의 통화 절하 경쟁과 블록화 실패에 대한 반성 아래 마련된 브레튼우즈 체제. 전후 세계 최고의 패권 국가인 미국의 힘 아래에서 수립된 이 체제로, 주요국의 내수가 확대되고 사회제도가 충실해짐에 따라 '자본주의의 황금시대'가 도래하였다. 하지만 이후 석유파동 등으로 다시 찾아온 위기로 막을 내리고, 세계적으로 다시금 신자유주의에 의한 세계화와 자유화가 추진되었다. 저자는 이를 제2차 세계화라 명명하였다. 제1차 세계화는 100여 년 전에 진행되었던 세계화이다. 


그리고 지금이다. 세계 금융 위기의 시대. 저자는 세계 경제 역사를 꼼꼼히 반추하면서, 작금 세계 금융 위기의 원인을 고찰했다. 주지했듯이 그 원인은 세계화와 자유화에 있다고 한다. 그리고 그 확실한 증거는 바로 100년 전 제1차 세계화이다. 그 당시 세계 경제의 통계가 현재와 매우 유사한 패턴을 보여주고 있다는 것이다. 


조용한 대공황


문제는 많은 사람들이 현실을 제대로 직시하고 있지 못하고 있다는 것에 있다. 사실 작금의 위기는 1930년대 세계 대공황 당시보다 훨씬 더 심각한 문제를 떠안고 있지만, 상대적으로 조용하기에 문제가 별로 심각하지 않은 것처럼 느껴진다. 그 이유는 2008년 이후 각국 정부가 완전히 체면을 가리지 않고 온갖 구제책을 적극적으로 동원했기 때문이라는 것이다. 


"전전의 대공황 시절과 비교해볼 때 경제 운영의 지혜가 쌓이고 정부 활동의 여지가 커졌기 때문에 과거와 같은 경제 붕괴는 피할 수 있었다고 여겨진다. 그러나 본질적으로는 대공황에 필적하는 위기 수준이라고 생각해야 한다. 붕괴된 버블의 규모를 보아도 과거의 대공황 이전에 부풀었던 버블을 훨씬 웃돌기 때문이다." (본문 중에서)


국가에 의한 적극적인 구제책으로 조용히 흘러가고 있는 듯한 작금의 위기. 이는 사실 세계 어느 나라보다 지금 한국에 통용되고 있다고 생각된다. 일본은 1980년대 엄청난 버블 붕괴로 나라 살림이 반토막 난 적이 있다. 이를 두고 '잃어버린 10년' 내지 '잃어버린 20년'이라고 하는데, 당시는 세계화가 시작하는 단계라 일본의 위기가 세계 위기로 번지지는 않았다. 이야말로 조용한 대공황이라고 말할 수 있을 것이다. 


하지만 지금은 완벽한 세계화의 정점에 이르렀기 때문에 미국과 같은 주요국에서 위기가 발생하면 그 위기가 전 세계로 파급 된다. 지금은 그 불씨가 유럽으로 튀어 혼란을 빚고 있지만, 언제 한국이나 일본으로 옮겨 붙을지 알 수 없다. 내수는 형편없고 수출로 먹고 사는 이 두 나라야 말로 세계화와 자유화의 최전선에 서 있지 않은가. 저자는 그 핵심을 찌르며 고름을 짤 것을 촉구하고 있다. 


세계 금융 위기의 미래


세계 금융 위기의 원인은, 주지했듯이 세계화와 자유화에 있다. 그렇다면 이 위기의 다음은 무엇일까? 어떤 결과로 귀결될까? 역사에서 살펴보았듯이 보호주의와 블록화가 진행되고 그 다음은 전쟁일까? 원인을 알았으니 이제 궁금한 건 결과에 있을 것이다. 저자는 이 역시 역사에 반추해 단호하게 그러나 확신을 두지 않는 선에서 주장한다. 이렇게 계속해서 세계화와 자유화를 앞세운 정책을 펼칠 시, 최소한 '경제전쟁(통화전쟁)'은 발발(?)할 것이라고 말이다. 


저자가 말하길, 세계화와 자유화로 인해 단기 자금이 유입되고 버블이 일어나 붕괴되었고, 그 파급 역시 세계화와 자유화로 인해 전 세계로 퍼져나갔다. 위기를 타개하기 위해 보호주의와 블록화는 당연한 수순. 그렇게 될 시 신흥국들은 100여년 전 독일과 일본이 그랬던 것처럼 강한 반발을 일으킬 수 밖에 없다. 그 자체로 이미 경제전쟁이 시작된 것이다. 


자, 그렇다면 어떻게 해야 하는가? 저자는 먼저 국가자본주의를 지향해야 한다고 말한다. 


"세계 경제의 안정을 도모하기 위해서는 각국의 내수를 늘리고 글로벌 임밸런스의 시정을 추진하는 것이 불가피하다. 그러기 위해서는 국내 소비와 투자를 증진시키는 노력이 필요하고, 각국이 소득 격차를 줄이는 노력 또한 불가결하다." (본문 중에서)


이어 경제의 재국민화를 말하고 있다. 재국민화는 1930년대 대공황 발생 이후 일종의 경제 통제 쟁책을 취함으로써 자국 경제를 자국민의 손에 돌려주려 한 움직임을 말한다. 물론 전전의 경제 통제를 칭찬하려는 생각도 없고 전쟁이라는 결말을 옹호할 수도 없지만, 이 시기에 시작된 우호적인 움직임인 것만은 분명하다. 


마지막으로 케인즈가 말했던 '투자의 사회화'를 언급한다. 투자의 사회화란 통상적인 해석으로는 정부에 의한 공공 투자를 의미한다. 여기에 저자는 자신의 생각을 덧붙인다. 말의 의미를 확장시켜, 자본의 개념을 확장시켜야 한다는 것이다. 유형 자본을 넘어서 무형 자본까지, 자본의 개념에 편입시켜야 한다는 생각이다. 


"자본이라는 말에는 단순히 물적인 자본만이 아니라 공동체의 인간 관계나 조직의 신뢰 같은, 딱히 화폐로 환산할 수 없는 무형의 자본도 들어간다. 그런 것들이 바탕에 깔린 뒤에야 기업의 활동이나 나날의 경제 활동이 존재한다. (중략) 유감스럽게도 오늘날의 사회과학에서 이런 무형의 자본은 정당하게 평가받지 못하고 있다. (중략) 그러나 화폐로 환산 가능한 유형의 자본뿐만 아니라 화폐로 환산이 불가능한 무형의 자본도 늘어나지 않으면 우리의 생활이 풍요로워지지 않게될 것임은 불문가지이다."(본문 중에서)


책에 대한 코멘트


책에 대해서 간단히 코멘트 하자면, 일단 굉장히 재미있다. 딱딱한 경제 이야기라고는 믿을 수 없을 만치 잘 읽힌다. 개인적으로 경제에 대해서 거의 문외한에 가까운데, 이 책은 경제뿐만 아니라 정치, 역사, 사상에 이르기까지 다방면의 지식을 끌어다 써서 이해에 있어 많은 도움을 주었다. 그렇다고 결코 가볍게 볼 책은 아니다. 채 200페이지가 되지 않지만, 기름기를 쪽 빼낸 단백질 덩어리같은 책이기에 시종일관 긴장감을 늦춰선 안 될 것이다. 


다만 표지와 약표제에서 조금의 아쉬움을 보였다. 'WE ARE THE 99%!'라고 큼지막하게 써놨는데, 책 내용과 거의 맞지 않는 듯한 느낌이다. 대다수 서민을 뜻하는 99%에 대한 발언은 책에서 딱 한 번 나온다. 세계화가 추진되면 기업은 살지만 노동자는 값싼 노동력에 밀려나게 되는데, 그로 인해 계층 간의 격차가 벌어진다는 것이다. 물론 이 사실은 책에서 중요한 부분을 차지하지만, 책의 표지를 차지할 만큼의 비중은 안 된다고 생각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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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서평] <히틀러에 붙이는 주석>


<히틀러에 붙이는 주석> ⓒ돌베개

'희대의 악마', '악의 화신', '악마의 자식' 이 모든 수식어들이 단 한 사람을 위한 것이라면 믿어지는가? 누구나 그 이름만 들어도 치를 떨 사람. 아돌프 히틀러다. 그는 독일을 넘어, 당대를 넘어, 인류까지 넘어, 지구 역사상 가장 유명하다고 해도 과언이 아닐 것이다. 물론 나쁜 의미로 말이다. 


한때 히틀러를 생각하면 가장 먼저 생각나는 단어가 '독재자'였다. 이후 탁월한 '연설가'였다가,  '학살자'가 되었고, 언젠가 '미치광이'가 되었다가, '불우한 사람'이 되기도 하였다. 현재는 '중요한 세계사적 인물'이라고 할 수 있지 않을까 싶다. 이는 '히틀러'를 히틀러 개인에게 한정 시키기에는 너무나 큰 의미를 지니고 있기 때문이다. 히틀러는 하나의 현상인 것이다. 


그렇다면, 히틀러에 대해 잘 알아야 할 필요가 있다. 어설프게 알았다가는 그 마성에 이끌려 빠져들거나, 밑도 끝도 없는 무조건적인 부정을 행사할 수가 있다. 이는 히틀러 본인이 원했던 바이기도 하다. 그가 생의 마지막에서 원했던 바는 '히틀러'에 관련된 거대한 무덤을 만들고 그 근처에 아무도 접근하지 못하게 하는 것이었다. 일종의 복수 행위였다고 한다. 특히 독일에 대한 복수. 


이런 해석은 <히틀러에 붙이는 주석>(돌베개)의 마지막 부분에 상세히 기술되어 있다. 이 책은 제바스티안 하프너라는, 독일에서는 많은 사랑을 받는 역사 교양서 작가이지만 한국에는 최초로 소개되는 이가 35년 여 전에 지었다. 독일이 통일되려면 아직 한참이나 남은 시점이며, 히틀러가 죽은 지 33년 밖에 되지 않았다. 많은 연구가 진행되지 않았을 거라 생각되지만, 지금 읽어도 전혀 기시감이나 이질감이 느껴지지 않는 수작이다. 


히틀러에 관한 최고의 책 몇 권 중에 하나라고 전해지는 만큼 히틀러에 대한 모든 것을 담고 있지만, 굉장히 얇다. 히틀러에 관한 최고의 정전이라 평가 받는 요하임 페스트의 <히틀러 평전>(푸른숲)이 1400쪽이 넘는 양을 자랑하는 반면, 이 책은 230여 쪽이다. 그렇지만 그 안에 히틀러의 전체가 들어 있다. 저자의 탁월한 능력이라고 밖에 설명할 길이 없다. 


책은 히틀러의 생애, 성과, 성공, 오류, 실수, 범죄, 배신의 파트로 나뉘어져 있다. 히틀러의 삶에서 '성과와 성공'을 볼 수 있다니 놀라울 따름이다. 이 부분만 체득해도 충분한 가치가 있을 듯하다. 평소에 절대로 볼 수 없는, 그리고 생각할 수도 없는 부분들이니 말이다. 저자에 따라 간략히 서술하자면, 히틀러는 경제 기적과 군비 확장이라는 성과를 이룩하였다. 그리고 그는 오스트리아 합병, 주데텐 지역 합병, 보헤미아와 모라비아 지역에 대한 보호령, 메멜 점령, 그리고 폴란드 점령 이후 전 유럽 대륙 지배 등의 현기증 나는 성공 행진을 이어 나갔다. 앞뒤 볼 것 없이 이 부분 만을 놓고 보면, 히틀러의 '성과와 성공'은 지극히 당연할 것이다. 


하지만 이어지는 그의 부정들은 치가 떨린다. 히틀러가 평생 희망했던 두 가지 목표가 있다. '독일의 세계 지배'와 '유대인의 근절'. 그는 민족에 기반을 둔 '큰 독일'이 홀로 종족 개선과 반유대주의를 동원하여 세계 패권을 성취할 수 있다고 믿었다. 그러기 위해서 정복 전쟁을 벌여 유럽을 독일의 패권 하에 두고, 궁극적으로 '생존공간'인 러시아를 지배하려는 목적이었다. 


그는 다음과 같이 "생명체의 자기 보존 충동과 지속적 보존의 욕구는 무한한데, 그에 비해 이 전체 생명의 과정이 이루어지는 공간은 유한하다. 생존공간의 이런 한계가 바로 생존전쟁을 강요한다."라고 말하며 파괴적 전쟁을 진행했다. 한편 그는 유대인이 '민족의 지식인'을 멸종시킬 뿐만 아니라 인류 전체를 멸종시키려 한다며, 전 인류가 그들을 멸종시키기 위해 힘을 합쳐야 한다고 보았다. 이는 곧 인류 역사상 가장 끔찍한 재앙을 불러 온다. 


히틀러가 일으킨 제2차 세계대전. 초반의 압도적인 모습. 러시아를 공격하는 패착. 그리고 이어진 연합군 측의 반격과 무너지는 히틀러. 이후 히틀러는 이해할 수 없는 일들을 수행한다. 더 이상 점령을 위한 그리고 지배를 위한 전쟁을 수행하지 않게 된 것이다. 다만 방어를 위한 파괴 전쟁이 시작되며 2막이 올랐다. 그 이유는 다른 데에 있었다. 


이렇게 시간을 계속 끄는 이유는 바로 유대인의 근절에 있었다. 수많은 사람들을 전쟁의 소용돌이에 밀어 넣어버리며 능력 이상의 군사적 재능을 발휘한 히틀러의 모습 이면에는, 그 시간을 벌어 유대인을 전멸 시키려는 의도가 있었던 것이다. 홀로코스트는 그렇게 시행되었다. 


또한 전쟁 막바지에 이르러 히틀러가 이해할 수 없는 서부전선 총공격을 시행한 이유도 히틀러 다웠다고 할 수 있을까. 그의 결심에는 독일 국민들에 대한 분노가 있었다. 러시아가 쐐기 공격을 해올 것을 알았음에도 동부전선의 모든 병력을 다 끄집어 내어 서부전선을 공격한 것에는, 독일 국민들이 러시아보다 서방 연합군을 원했던 이유가 있었다. 히틀러는 독일 국민들을 러시아의 분노에 찬 무자비한 공격에 고스란히 노출되게 하였던 것이다. 그러며 독일을 초토화 되게 하려는 의도도 있었다. 독일 국민들은 독일군을 더 무서워했다고 한다. 그야말로 철저하면서도 처절한 노림이다. 


단편적으로만 알고 있었던 히틀러의 악마의 행동들, 그리고 생각조차 할 수 없었던 히틀러의 성과와 성공들, 책을 보면 알 수 있을 히틀러의 이해가 되면서도 절대 이해할 수 없는 복잡한 생각들을 상세히 그리고 깊게 무엇보다도 객관적으로 보여준 책이었다. 


적을 이기려면 먼저 적을 알아야 한다고 하였다. 히틀러를 단순히 적이라고 규정하기엔 뭔가 아귀가 맞지 않을 테지만, 적어도 미래에 절대 그런 사람이 나와서는 안 되는 것이다. 그렇다면 그에 대해서 먼저 정확히 알고 있어야 하지 않겠는가? 


많은 친일파들이 극일(克日)을 위해서 지일(知日)을 해야 한다고 말하곤 했다. 즉, 일본을 극복하기 위해서 일본을 알아야 한다는 말이다. 말이 좋아 극일이고 지일이지, 실상은 일본을 잘 알아 일본과 친해지고 결국 자신에게 이득이 되기 위한 행동으로 나타났을 테다. 하지만 그 말 자체는 절대 틀린 말이 아니다. 아주 정확한 말이다. 문제는 얼만큼 아는 것에 있지 않다. 문제는 아는 만큼 보일 때, 그 보이는 것을 대하는 태도에 있는 것이다. 


이 책 <히틀러에 붙이는 주석>은 히틀러에 대해 많은 것을 보여줄 것이다. 그리고 보이는 것들을 올바르게 대하는 태도도 어느 정도 정해준다. 그렇지만 주관적이지 않고 객관적이다. 이렇게 마성적인 인물에 대해 객관적으로 보게 해주면서 어떻게 한 쪽으로 치우치지 않게 해주는 지 신기할 따름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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singenv

冊으로 策하다. 책으로 일을 꾸미거나 꾀하다. 책으로 세상을 바꿔 보겠습니다. singenv@naver.com Since 2013.4.16