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리뷰] <히든 피겨스>


1960년대 초, NASA에서 오직 실력으로 '흑인 여성'으로 받는 차별을 이겨내려는 세 천재의 이야기, <히든 피겨스>. ⓒ이십세기폭스코리아



천재에 관한 영화를 많이 봐왔다. 차별을 이겨내고 자신의 자리를 찾는 영화도 참 많이 봐왔다. 이 두 이야기를 합쳐, 차별을 이겨내고 실력으로 인류 발전에 이바지한 천재 영화도 봤다. 모두 진중하고 장엄하고 비장하기까지 했다. 끝이 좋지 않아 비극으로 끝나는 경우가 많았다. 유쾌하면 좋겠다 하고 생각했는데, 딱 그런 영화가 모습을 드러냈다. <히든 피겨스>다. 


1961년, 전 세계를 반반으로 가르는 미국과 소련의 승부가 한창이다. 이른바 냉전시대. 거의 모든 분야에서 물러설 수 없는 경쟁을 계속하는데, '우주전쟁'도 그중 하나다. 소련의 선방에 가만히 있을 수 없는 미국, 우주 비행 프로젝트를 가동한다. 1958년에 개편창설된 미국항공우주국(NASA)이 그 중심이다. 하지만 말처럼 쉽지 않다. 역사상 그 누구도 실행에 옮긴 적이 없는 전대미문의 일이 아닌가. 그럼에도 해내야만 한다.


그 와중에 세 명의 흑인 여성이 결정적 역할을 한다. 관리자로, 엔지니어로, 그리고 로켓 발사 담당자로. 출중한 실력으로 NASA에 들어왔지만, '흑인 여성'이기 때문에 능력에 걸맞게 할 수 있는 건 거의 없다시피하다. 그럼에도 해내야만 한다. '적국' 소련에 맞서 우주전쟁을 승리로 이끌기 위해서도, 차별이라는 '적'에 맞서 평등한 세상을 만들기 위해서도 말이다.


위대한 우주 비행 프로젝트의 숨겨진 '흑인 여성'들


위대한 우주 비행 프로젝트의 숨겨진 진짜 주인공이라는 이면, 그들이 차별의 한가운데에 위치한 흑인 여성이라는 이면. ⓒ이십세기폭스코리아



'숨겨진 사람들'이라는 뜻의 제목, 미국이 이룩한 위대한 우주 비행 프로젝트의 숨겨진 진짜 주인공들이 겉으로 드러난다. 모든 찬사는 당대 대통령 케네디와 NASA 국장, 로켓에 탑승해 우주로 날아간 당사자에게로 쏟아졌지만, 그 뒤엔 이름 없는 이들의 노력이 있었다는 것. 우린 그들의 이름 또한 기억해야 한다. 아니 그들의 이름이야말로 기억되어야 한다. 


하지만, 그 이면에 영화가 진정 말하고자 하는 바가 있다. 그들이 다름 아닌 '흑인 여성'이었다는 사실 말이다. 1961년 당시는 비록 마틴 루터 킹의 활약이 극에 치닫고 있는 와중이었지만, 흑인 여성의 인권은 없다시피 했다. 영화는 주인공들이 당하는 어이 없는 차별을 통해 단적으로 보여준다. 


흑인이라는 이유로 공용 커피 포트를 쓸 수 없어 커피를 마실 수 없고 공용 화장실을 쓸 수 없어 800미터 떨어진 흑인 전용 화장실을 써야 한다. 자신의 자리에서 절대적인영향력을 뽐내며 비어 있는 관리자의 일까지 더할 나위 없이 해내지만, 절대 관리자로 승진할 수 없는 처지다. 그 누구보다 대단한 학위를 자랑하지만 남자들만 하는 엔지니어가 될 수 없다. 물론 그 어떤 남자 엔지니어보다 출중한 실력을 자랑한다. 


더 이상 할 수 있는 게 무얼까. 누구나 알고 있다, 그들이 '백인 남성'보다 월등한 실력을 지니고 있다는 것을. 그럼에도 그들에게 돌아가는 건 존경은커녕 일말의 믿음도 아니다. 더욱 철저한 멸시뿐. 


속시원한 차별 첼폐, 하지만 '누군가에 의해서'


1단계의 이면과 2단계의 이면, 그런데 3단계의 이면이 있다? '누군가에 의한' 차별 철폐라는 함정이다. ⓒ이십세기폭스코리아



그들은 반정부·반사회적 폭력 투쟁으로 자신의 인권을 찾으려 하지 않는다. 철저히 체제에 순응하며 그 안에서 절대적인 실력을 앞세워 자신의 자리를 찾고자 한다. 그렇지만, 그럴 때 필요한 건 누군가의 도움 내지 깨달음이다. 누군가는 아마도 백인 남성이지 않을까. 백인 남성이어야만 이 체계를 무너뜨릴 수 있을 것이다. 


영화는 슬프게도, 그 사실을 보여준다. NASA의 고위층 백인 남성이, 오로지 우주 비행 프로젝트를 이뤄내야만 한다는 일념 하에 엄청난 실력을 자랑하는 흑인 여성을 우대하는 모습을 보인다. 그러기 위해선 흑인 여성이 포함된 집단 자체를 부정해야 한다. 차별 받고 있는 그 집단의 존재를 없애 평등하게 만들어야 한다. 그러지 못하면 그 흑인 여성은 출중한 실력을 조국을 위해 뽐낼 수 없는 것이다. 


헷갈린다. 양파를 까도 까도 계속 나오는 느낌이다. 이 고위층이 보여준 행동은 분명 인류가 달에 첫발을 디딘 위대한 한걸음 못지 않은 위대한 한걸음이다. 그가 보여준 파워풀한 차별 철폐는 소름 돋게 하는 데 충분했다. 하지만 그는 차별을 당하는 당사자가 아니다. 과정 또한 철저히 실력으로 쟁취했다고도 볼 수 없다. 그런 한편 드는 생각은, 과연 그녀가 출중한 실력이 없었더라도 백인 남성이 그처럼 차별 철폐를 시행했을까 하는 것이다. 마냥 통쾌하고 감동적이지만은 않다. 


우리나라가 일제로부터 독립을 했지만, 우리 손으로 쟁취했다고 볼 수 없는 것과 같다고 하면 될까. '누군가에 의해서'. 그렇게 되면, 그 누군가에게 종속될 수밖에 없지 않은가. 그 누군가의 마음이 바뀌거나, 그 누군가의 자리를 다른 누군가가 취할 때 다른 누군가의 마음이 다르다면 어찌하겠는가. 


전형적인 할리우드식 웰메이드 영화


그럼에도 영화 자체는 나무랄 데 없는 웰메이드 영화다. 그저 즐겨도 아무 이상 없다. ⓒ이십세기폭스코리아



영화는 비록 '숨겨진 사람들'을 내세워 유쾌하게 차별을 이겨내는 이야기를 풀어내 색다른 재미를 선사하지만, 그 이면에 '숨겨진 생각들'은 제대로 풀어내지 못한 것 같다. 물론 일부러 풀어내지 않은 것일 수도 있다. 어쨋든 여러모로 위대한 이들의 이야기이니까 말이다. 뭘 더 바라냐, 이 정도면 됐지 하고 생각할 수도 있겠다. 그것도 틀린 말은 아니다. 뿌리 깊은 차별을 이기는 건 정말로 힘드니까. 


정녕 차별이 무엇인지 모르는 내가 함부로 차별과 차별 이면에 숨겨진 생각들을 지꺼리는 게 아닌지 모르겠다. 지꺼릴 순 있어도 힘이 있진 않을 것이다. 그렇지만 차별에도 등급이 있듯이 차별 철폐의 방법에도 등급이 있다. 엄밀히 말해 <히든 피겨스>의 주인공 세 명은, '백인 사회에서의 흑인으로서 최초'가 되었을 뿐이었다. 


인정할 건 인정해야겠다. 영화는 이런 이면 속의 이면을 생각하기 민망할 정도로 유려했다. 할리우드식으로 보기 좋게 만들어진 웰메이드 영화이다. '발단-전개-위기-절정-결말'의 전통적 구성이 완벽하리만치 재현되어, 보는 이로 하여금 지루할 틈도 없이 생각할 틈도 없이 이어지는 것이다. 남는 건 영화가 말하고자 한 확고부동한 메시지와 영화가 보여주고자 한 인상적인 장면들이다. 매력적인 주인공들은 기본.


요즘 상업영화의 추세를 가장 단적으로 보여준 영화였다는 말도 하고 싶다. 높아진 관객의 눈을 의식한 결과인지 모르겠지만, 민감한 부분이나 논란의 여지가 있는 요소들을 가지고 와 상업적으로 이용해먹는 것이다. 거기에 당대가 아닌 조금이라도 지난 시대라면 수위는 높일 수 있고 범위는 넓일 수 있다. 여차하면 '영화니 너무 진지하게 받아들이지 말자' '재미를 위해 각색을 했으니 곧이곧대로 받아들이지 말자' 하면 된다.


<히든 피겨스>는 분명 열광할 만한 소재와 주제와 만듦새를 자랑하지만, 한 번쯤 그 이면을 생각해 볼 일이다. 우주 비행 프로젝트의 숨겨진 조력자라는 1단계를 지나, 흑인 여성으로서 받았던 차별을 실력으로 돌파했다는 2단계를 지나, 차별 철폐의 과정을 다시 한 번 들여다보는 3단계에 이르길 바란다. 물론 영화는 2단계 정도까지만 생각하며 재밌게 보시고, 3단계는 영화가 끝난 후 도달하면 될 일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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冊으로 策하다. 책으로 일을 꾸미거나 꾀하다. 책으로 세상을 바꿔 보겠습니다. singenv@naver.com Since 2013.4.16




[리뷰] 멜 깁슨의 <핵소 고지>


10년만에 감독으로 돌아온 멜 깁슨. <핵소 고지>는 상타려고 만든 영화이자, 그의 영화관이 집약되어 있는 영화다. ⓒ판씨네마



멜 깁슨이 10년 만에 감독으로 돌아왔다. 손꼽으며 기다리는 정도는 아니나 일정 정도 이상의 기대는 하는 감독이다. 특히 이번 작품 <핵소 고지>는 그의 전작들이 가졌던 장점들만 모아놨다는 평을 듣는 전쟁영화인 바, 기대가 더 높아졌다는 걸 인정한다. 더불어 주연을 맡은 앤드류 가필드가 스파이더맨 이미지가 굳혀질 것 같을 때 선택한 두 영화(<사일런스> <핵소 고지>) 중 하나이기에 더 관심이 갔다. 


멜 깁슨의 행보는 특이하고 영리하다. 1980~90년대 <매드 맥스> <리썰 웨폰> 시리즈 등으로 명성을 떨치고 많은 돈을 모으더니 돌연 연출을 시도하면서 자신만의 세계를 공고히 했다. 1993년에 데뷔해 25년 가까이 5편을 연출한 된 베테랑 감독이기도 한데, 그동안 많은 논란을 뿌리면서도 탁월한 리얼리즘 액션과 고민하는 개인 심리 그리고 성서를 기반으로 하는 메시지 전달은 변치 않았다. 


어렸을 때 멜 깁슨이 주연한 <브레이브 하트>(당시에는 멜 깁슨이 연출과 감독 모두를 맡은 사실을 알 수 없었다)를 보고 상당히 감명을 받은 기억이 있다. 특히 장활한 연설 끝에 '프리덤!'을 외치며 엄청난 포스와 아직도 뇌리에 남아 있는 한 점 흐트러짐 없는 얼굴로 달려가는 모습 말이다. 이번에도 이성을 잠식시키는 감성적인 명장면을 마음을 흐트러놓을까?


신념과 종교와 리얼리즘 영화관의 종지부


멜 깁슨이 그동안 만든 영화들에는 공통적으로 신념, 종교, 리얼리즘이 깔려 있었다. 이번 영화에 모조리 때려부었다. ⓒ판씨네마



어린 시절 있었던 일련의 일들 때문이기도 하거니와 종교적인 이유로(제칠일안식일예수재림교) 데스몬드 토마스 도스(앤드류 가필드 분)는 비폭력주의자가 된다. 그렇게 시간이 흘러 제2차 세계대전 막바지, 도스는 또래들도 다 입대하고 할 것도 없다는 이유를 들어 자원입대 한다. 누구보다 체력이 좋은 그, 하지만 군인이라면 절대적인 '집총'을 '거부'한다. 개인의 절대적인 신념에 의한 것. 종교가 전부는 아닌 듯하다. 


미군은 이 초유의 명령볼복종인 집총거부를 인정할까? 징병제이니까 군에서 쫓아내면 될 일이다. 하지만 군대에 남아서 사람을 살리는 의무병이 되어야겠다는 또 다른 신념을 절대 굽히지 않는 도스다. 그렇게 전쟁에 출전하게 된 도스. 제2차 세계대전 당시 가장 치열했던 일본 오키나와 핵소 고지가 주전장이다. 


그는 절대 굽히지 않았던 집총거부와 함께, 가장 치열한 전장에서 비폭력과 활인(活人)을 견지할 수 있을까? 영화는 러닝타임의 절반 이상을 도스 개인의 신념 형성과 고민과 견지를 다룬다. 남은 절반에는 신념의 실천을 다루니, 이 영화는 전쟁영화라기보다 지극히 개인적인 심리영화이자 종교영화라고 보는 게 맞겠다. 


비단 도스의 신념뿐 아니라, 도스가 속한 중대의 중대장 클로버(샘 워싱턴 분)의 신념과 간악하기 짝이 없는 모습으로 나오는 '악마' 일제의 대장의 신념도 살짝이지만 강렬하게 비춰준다. 멜 깁슨은 아무래도 이 영화로 자신이 만들어낸 신념과 종교와 리얼리즘을 버무린 영화관에 종지부를 찍을 모양인 것 같다. 


보통 수준의 전쟁신, 전쟁영화들이 생각난다


전쟁이 주된 테마 중 하나인만큼, 전쟁 얘기를 안 할 수 없다. 여러 전쟁영화가 생각나는 보통 수준. ⓒ판씨네마



영화는 잔인하다는 평이 은근 많은 것 같다. 폭력의 수위가 다소 높다는 의견과 필요 이상으로 잔인하다는 의견이다. 아무래도 전쟁영화라서 그럴 수밖에 없을 텐데, 사실 이 정도면 양호한 수준 또는 보통의 수준이라는 걸 말하고 싶다. 족히 20년은 된 <라이언 일병 구하기>만 해도 이보다 더하면 더했지 못하지 않은 수준의 수위를 보여주고 있지 않은가. 


또한 감독의 의도이기도 하다. 전쟁이라는 특수한 상황, 수많은 이들이 죽어나가는 인간성 상실의 상황에, 오로지 살리고자 하는 신념 하나로 뛰어든 한 인간을 그리고자 했기 때문이다. 그 대비가 극명하면 할수록 말하고자 하는 바가 더 확실하게 드러날 수 있겠다. 모두가 살인을 할 때 홀로 활인을 외치고 실제에 옮기니 말이다. 


그런 의미에서 그동안 나왔던 전쟁영화들에서 각종 장면을 차용한 것 같다. 초중반을 할애하는 전쟁 이전의 이야기는 <라이언 일병 구하기>를, 전쟁에 출전하기 전의 훈련병 내무반 생활 장면은 <풀 메탈 자켓>을, 고지를 탈환하기 위한 벙커 탈환의 소소한 작전은 <신 레드 라인>을, 심지어 포탄이 난무하는 와중에도 홀로 적진으로 향하는 모습은 <포레스트 검프>가 생각나게끔도 했다. 


그러니 전쟁영화를 섬렵하다시피 한 이들에게 이 영화는 다소 밋밋하게 보일 수 있을 뿐 아니라 어디서 많이 본 듯한 느낌을 지울 수 없었을 것이다. 감독이 이를 모를리 없으니, 길지 않은 전투 장면은 이 영화에서 큰 비중을 차지하지 않는다고 볼 수 있다. 오히려 하이라이트는 마지막 30분, 도스가 신념을 실현하는 모습에 있겠다. 


무리 없는 수작, 정이 가진 않는다


여러 논란거리가 있지만, 영화 자체로는 딱히 욕할 게 없는 수준이다. 하지만 멜 깁슨이 다음에 또 이런 영화를 만든다면 보지 않을 것이다. ⓒ판씨네마



실화를 바탕으로 한 만큼 전체적인 내용을 일별하는 건 의미가 없다. 대신 짚고 넘어가야 할 게 있다. 도스라는 '전쟁 영웅'에 관한 이야기 말이다. 그의 신념은 뒤로 하고 전쟁영화에서 비춰지는 영웅은 굉장한 위험이 뒤따른다. 전쟁을 미화하고, 전쟁에서 이긴 것 뿐인 역사의 승리자를 미화하며, 무엇보다 폭력을 미화하기 때문이다. 


이 영화는 성격이 다르다. 전쟁 영웅을 다루지만 폭력을 미화하지 않는다. 오히려 폭력의 한 가운데에서도 절대적인 비폭력을 실행하니, 다분히 의도적이지만 엄연히 실화이니 도식적이니 가식적이니 말을 할 수도 없다. 그러니 뒤로 한 신념으로 다시 돌아올 수밖에 없다. 


하지만 미국을 미화한다는 논란을 빚겨갈 순 없겠다. 우여곡절이 있었지만, 결국 미국은 한 개인의 신념을 지켜주었고 또 그 신념의 처절한 실천에 합당한 대우를 주었다. 그건 사실이지만, 영화는 그 부분들에 지극한 드라마를 가미했다. 각종 논란거리를 일삼는 트럼프 정부를 향한 '미국은 이래야 한다!'는 일격으로 받아들일 수도 있겠지만, 과거 수차례 인종 차별 발언으로 물의를 일으켰던 멜 깁슨이니만큼 그런 식으로 받아들이는 건 조금 무리가 있겠다. 


전체적으로 무리 없는 수작으로 볼 수 있는 <핵소 고지>, 하지만 정이 가지 않는다. 멜 깁슨이 또다시 이런 류의 영화를 내놓는다면 보지 않을 가능성이 다분하다. 개인적으로는 그가 가진 리얼리즘에 대한 관심과 능력을 최대한 살린 영화라면 좋을 것 같다. 다만, 거기에 어떤 논란거리를 얹혀놓지 않았으면 한다. 이번이 마지막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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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리뷰] <엘비스와 대통령>


'미국국립기록관리처'의 문건 중 최다 열람을 자랑하는 엘비스와 닉슨의 비밀 극비 회동을 소재로 만든 영화, <엘비스와 대통령> ⓒ(주)우성엔터테인먼트



1950년대 혜성같이 등장해 'The King'이라 불리웠던 사나이, 엘비스 프레슬리. 사후 40년이 지난 지금까지도 전 세계를 통틀어 가장 유명한 연예인이다. 넘쳐나는 게 돈이었고, 세계 어딜 가나 당연히 주목을 끌었다. 그야말로 모든 걸 얻은 아쉬울 게 없어 보인다. 그런 그가 강력히 원하는 게 있었단다. 그는 비밀리에 1970년 말 당시 제37대 미국 대통령인 리처드 닉슨을 찾아간다. 


미국과 소련, 자유세계와 공산세계로 양분되어 첨예하게 대립하던 가운데, 자유세계를 이끄는 지도자인 리처드 닉슨 미국 대통령. 그야말로 세계를 호령하는 권력의 정점인 'The King'이나 다름 없었다. '닉슨 독트린'으로 역사에 이름을 깊이 아로새기고, 한창 골머리를 썩이고 있을 1970년대 말 엘비스 프레슬리를 맞이한다. 


'미국국립기록관리처'의 문건 중 최다 열람을 자랑한다는 '사건'인 엘비스 프레슬리와 리처드 닉슨 미국 대통령의 비밀 회동. 그들은 도대체 어떤 목적으로 회동을 갖게 된 것일까? 세기가 낳은 특이한, 어느 면에서는 위대한, 그렇지만 서로 전혀 맞지 않을 것 같은 그들이 말이다. 궁금증을 자아내는 그들의 만남이 영화로 제작되어 선보인다. <엘비스와 대통령>. 왠지 재밌을 것 같다.


엘비스 프레슬리와 리처드 닉슨, 'The King'들의 극비 회동


전 세계 젊은이들의 황제 '엘비스 프레슬리', 전 세계 자유주의의 지도자 미국 대통령 '리처드 닉슨'. 그들의 만남 자체가 흥미를 자아낸다. ⓒ(주)우성엔터테인먼트



원제는 'Elvis & Nixon'으로 대통령이 아닌 닉슨이다. 우리나라에서 엘비스는 알아도 닉슨은 상대적으로 잘 모를듯. 그리고 대통령이 이슈가 되다 보니, 제목을 살짝 비튼 것 같다. 아무래도 영화도 닉슨보다는 엘비스를 중심으로 흘러가지 않을까. 아무리 서방세계의 지도자라고 해도 'The King'이라 불리운 엘비스 프레슬리의 위상에는 모자랐을 것이다. 그런 두 사람이 만난다고 하니, 그 장면을 어떻게 그려냈을지 보고 싶어 몸이 근질근질 거린다. 


엘비스(마이클 섀넌 분)는 멤피스에서 워싱턴 D. C.로 날아간다. 목표는 단 하나다. '비밀 연방 요원'이 되기 위해서. 즉, FBI 요원이 되고 싶은 거다. 그는 파라마운트에서 일하고 있던 오래된 친구 제리 실링을 꼬신다. 


엘비스는 자신이 가진 엄청난 인기를 무기로 구구절절한 편지를 닉슨(케빈 스페이시 분)에게 전달되게끔 한다. 보좌진까지 금세 도달한 편지, 젊은층과 남부에 인기가 없는 닉슨에게 좋은 기회가 될 것임을 간파한 보좌진은 비서실장마저 설득시킨다. 결국 닉슨의 책상 앞에 놓인다. 


하지만 닉슨은 '딴따라'일 뿐인 엘비스를 거들떠도 보려 하지 않는다. 비서실장을 설득시킨 카드마저 아무 소용이 없다. 그렇지만 그에겐 금지옥엽 딸이 있었으니, 딸은 당연히 엘비스의 사인과 사진을 받고 싶다. 엘비스의 '보좌진(친구)'과 닉슨의 보좌진은 이를 이용해 엘비스와 닉슨의 만남을 성사시키고자 한다. 자, 그들 앞엔 무슨 일이 벌어질까? 젊은이의 상징과 꼰대와 아재의 상징이 만나니 볼 만하겠다. 


세계를 움직이는 거인들의 무섭고 졸렬하고 단순한 생각


엘비스와 닉슨의 만남은, 엘비스가 비밀 요원이 되고 싶어하는 일념 하에 추진된다. 닉슨은 그의 유명세를 이용해 먹으려 하는 것이고. 그런데 그 이면에는 생각보다 무시무시한 게 숨겨져 있다. ⓒ(주)우성엔터테인먼트



영화는 두 주인공에 집중한다. 특히 전반부는 엘비스 프레슬리에 할애하다시피 한다. 그가 왜 비밀 요원이 되고 싶어 하는지, 어떻게 닉슨과 비밀회동까지 하게 되는지, 그의 고뇌가 무엇인지. 그러며 1970년 당시를 훑는다. 엘비스의 인기도 그렇지만 영화의 주가 되는 비밀 요원 되기도 시대의 산물인 것이다. 


1970년 당시는 전 세계적은 격렬했던 68 운동의 여파가 아직 가시지 않은 가운데 베트남전쟁 반대와 흑인인권 운동까지 절정에 치달았을 때다. 엘비스는 이런 모습에서 미국이라는 국가의 위기를 느낀다. 그 중에서도 마약을 하는 이들이 가장 위협이 된다고 생각하고는 비밀 요원이 되어 그들을 쓸어버리고자 한다. 이런 생각은 닉슨도 하고 있었을 게 분명한 바, 우습지만 그들은 세계를 움직이는 거인들이 아닌가. 


우습고 어이없고 황당한 엘비스의 바람은 당시로선 사회를 지탱하는 큰 줄기였다. 극한의 대립과 혁명의 불꽃이 전 세계를 휘몰아치는 가운데, 국가의 존립을 걱정하며 마약사범을 소탕하려는 '정의로운' 생각과 행동이지 않은가. 지극히 무섭고 졸렬하고 단순하고 확실한 생각이다. 그런 생각을 'The King'이라고 불릴 정도의 사람이 하고 있다는 게 치가 떨린다. 


닉슨도 크게 다르지 않았을 거다. '닉슨 독트린'을 발표하며 동맹국에서 한 발 뒤로 빼며 자국에 힘을 실은 것도 비슷한 맥락인 것이다. 미국이라는 국가의 위기. 물론 그의 이름 앞에는 임기 4년의 미국 대통령 말고도 서방세계의 지도자라는 수식어가 붙는 만큼, 쉽지 않은 선택이다. 해야 할 생각도 많고 해야 할 것도 많다. 그 앞에 비밀 요원이 되고 싶다며 미국을 걱정하는 전 세계 최고의 스타가 나타났으니, 크나큰 힘을 얻을 게 분명하다.


소소한 추억팔이 정도로만 괜찮은 영화


영화는 단도직입적으로 말해서 볼 만하지 않다. 그나마 주연을 맡은 케빈 스페이시와 마이클 섀넌의 역사 인물 따라하기가 소소한 웃음을 줄 뿐이다. 그래도 소소한 추억팔이 정도는 될 것 같다. ⓒ(주)우성엔터테인먼트



실화를 바탕으로, 상당 부분은 상상력에 의해 만들어진 <엘비스와 대통령>은 코미디를 지향한다. 대놓고 웃기려는 부분은 아마 한 군데도 없을 텐데, 엘비스와 닉슨이라는 실존 인물을 생각하면 웃지 않을 수 없다. 그들의 얼굴, 표정, 말투, 행동, 생각까지 완벽에 가깝게 따라하는 두 배우의 연기(라기보다 모방?)를 보고 있노라면 말이다. 굉장히 진지한대, 굉장히 웃기다. 그들이 진지하지 않을 이유가 없지 않은가. 


드디어 영화 중반 이후 극적으로 만나게 되는 두 사람, 사실 영화의 재미는 그때부터 시작된다. 영화는 그 장면을 세계를 호령하는 '왕들의 만남'이라고 포장하는데 전혀 틀리지 않다. 두 명의 '왕'을 모시는 보좌진들 간의 유의사항 전달 회의를 보면 빵 터지지 않을 수 없다. 또 둘이 만나서 신경전 아닌 신경전을 벌이는 장면도 웃지 않을 수 없다. 집을 개축해서 1500평인 대통령 집무실보다 조금 더 넓어졌다고 자랑하는 엘비스, 닉슨 대통령 전용 간식인 M&M 초콜릿을 와구와구 먹어대는 엘비스...


시대를 이끄는 두 사람의 지극히 개인적인 이야기도 종종 비춰지니, 그것이 재미와 코미디의 한 요소이다. 둘의 공통점이라면 굉장히 천한 출신이라는 건데, 엘비스는 그게 한(恨)이 되었고 닉슨은 콤플렉스가 되었다. 엘비스는 특히 '남자'로서 '남자'만이 할 수 있는 일을 하고 싶어 했는데, 육군에 들어간 걸 자랑스럽게 여기며 명예 보안관을 넘어 요원까지 되고 싶어 했던 것이다. 닉슨은 사방에 '적'들이 있다고 생각하며 완벽주의자로서 엄청나게 일을 했고 누군가를 만날 때면 상대방을 완벽히 조사해 책 잡힐 일이 없게끔 했다고 한다. 영화에서 그런 모습을 살짝 엿볼 수 있다. 


이런저런 점들을 미루어 보아 많은 이들에게 어필이 될 만한 영화는 아니다. 굉장히 엄중한 시국이었던 당시에, 굉장히 엄숙한 만남이었을 거라 생각되는 이들의 회동이, 이런 식의 코미디 아닌 코미디, 정극 아닌 정극으로 비춰지는 게 결코 잘 와닿을 것 같진 않다. 소소한 추억팔이 정도는 괜찮을 것 같다. 


엘비스 프레슬리와 리처드 닉슨이라는, 당대를 넘어 역사적으로 유명한 인물들을 만나는 재미. 그것도 그들이 한 자리에서 만남을 가졌다는 실화를 바탕으로 했다는 놀라움. 무엇보다 그들이 서로 지극히 맞지 않을 게 분명하거니와, 'The King'이라고 불릴 만한 유이무삼한 존재들이라는 데에서 오는 대치의 격렬함. 아마 격렬한 기대만 하지 않고 본다면 적어도 격렬한 실망을 하진 않을 듯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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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래된 리뷰] <아메리칸 히스토리 X>


미국의 경우 오랫동안 보다 나은 삶의 기회를 찾아 미국으로 오는 모든 이에게 자유와 풍요를 약속하는 '아메리칸 드림'이 존재했다. 그 이면에는 잘 보이지 않는, 잘 드러내지 않은 큰 문제가 도사리고 있었다. 영화 <아메리칸 히스토리 X> 포스터 ⓒ뉴라인시네마



남 캘리포니아의 스킨헤드 데릭(에드워드 노튼 분)은 자동차를 훔치러 온 흑인들을 향해 무차별 총격을 가한다. 그러곤 신음하는 그들을 무참히 살해한다. 그와 함께 있던 여자친구와 남동생 대니는 놀라움을 금치 못한다. 충격적으로 시작된 영화 <아메리칸 히스토리 X>는 과거와 현재를 오가며 이야기를 전개한다. 


유럽 난민 사태가 전 세계적인 이슈로 떠오른지 한참이다. 인도적인 차원에서 그들을 수용할 것인지 자국의 이익을 위해 받아들이지 않을 것인지, 논란도 엄청 나고 결정도 쉽지 않다. 안 그래도 전 세계적인 경제 위기가 완전히 사그라들지 않은 시점에, 불황에 허덕이는 자국민들은 그 분노를 이주민에게 돌리기 쉽다. 그 어느 나라도 예외일 수 없다. 


미국의 경우 오랫동안 보다 나은 삶의 기회를 찾아 미국으로 오는 모든 이에게 자유와 풍요를 약속하는 '아메리칸 드림'이 존재했다. 미국의 상징인 '자유의 여신상'이 다름 아닌 아메리칸 드림의 상징과도 같으니 그곳은 정녕 꿈에서나 나올 법한 곳이 아닌가. 수많은 이들이 향했고, 때론 실패했고 때론 성공했다. 그리고 그 이면에는 잘 보이지 않는, 잘 드러내지 않은 큰 문제가 도사리고 있었다. 아메리칸 악몽(나이트메어)이다. 


아메리칸 드림이 아닌, 아메리칸 나이트메어


이 영화를 관통하는 큰 주제가 아메리칸 나이트메어다. 그 중심에는 스킨헤드 데릭이 있다. 영화 <아메리칸 히스토리 X>의 한 장면 ⓒ뉴라인시네마



이 진지한 영화를 관통하는 큰 주제가 바로 그 아메리칸 나이트메어다. 그 중심에는 스킨헤드 데릭이 있다. 그는 3년 전 소방수 아버지를 잃었는데, 다름 아닌 흑인 거주지에서 일을 수행하다가 강도의 손에 죽음을 맞았던 것이다. 그 일을 계기로 백인 우월주의자로의 길을 걷는다. 남동생 대니는 그를 영웅처럼 떠받든다. 


그런데 3년 간의 복역을 끝내고 나온 데릭의 행동이 뭔가 이상한 게 아닌가. 더 이상 스킨헤드의 길을 가지 않겠다고 천명하고는 대니를 설득하고 나선 것이다. 큰 깨달음이 없이는 그 길에서 헤어나오기 쉽지 않다. 대니 역시 그렇다. 결국 데릭은 결심을 하고는 자신이 감옥에서 겪었던 끔찍하지만 감동적인 이야기를 들려준다. 


그는 감옥에 가서도 여전히 스킨헤드로 행동한다. 역시나 그곳의 스킨헤드 그룹에 들어가 중추적인 역할을 한다. 한편 흑인 한 명과 같이 일을 할 수밖에 없는 상황에도 처한다. 그러던 중 스킨헤드 그룹의 대장이 유색인종과 거래를 하는 사실을 알게 된다. 참을 수 없는 데릭은 항의하다가 참혹한 일을 당한다. 그가 갈 곳은 없고, 유색인종 그룹한테 더욱 더 참혹한 일을 당할 것이 분명했다. 그런 그를 지켜준 이가 다름 아닌 그와 함께 일하는 흑인이었다. 그는 큰 깨달음을 얻는다. 


과연 그 깨달음은 다시 뭉쳐 비로소 온전히 잘 살아보려는 그의 가족을 지켜낼 수 있을까? 너무 늦은 게 아닐까? 그는 이미 돌이킬 수 없는 죄를 저질렀다. 흑인 두 명을 살해해 흑인들에게 언제 보복을 당할지 알 수 없다. 또한 복역이 끝나고 돌아와서는 백인 우월주의자들에게도 등을 돌렸다. 백인들한테도 언제 보복을 당할지 알 수 없는 일이다. 특히 대니는 그의 전철을 아주 차근차근 따라가고 있기 때문에 무슨 일을 당해도 할 말이 없는 것이다. 


본노 자체가 아니라, 대상이 잘못 되었다


분노가 생길 수밖에 상황이고, 분노는 반드시 풀어주어야 한다. 그런데 그 대상이 왜 시대와 나라와 위정자가 아니라 약자여야 하는가. 영화 <아메리칸 히스토리 X>의 한 장면 ⓒ뉴라인시네마



활발한 이주민 정책으로 아메리칸 드림이 절정이었을 시기에, 스킨헤드의 활동 역시 절정으로 치닫을 수밖에 없었다. 유색인종의 유입이 급격히 늘어나면서 자연스레 백인의 실업률이 높아질 수밖에 없었고 그에 맞춰 정권은 자유 경쟁을 활성화시키는 보수적 정책을 시행하고 유지했다. 이주민 정책이 활성화될 때에 일자리를 잃게 된 백인 청년들은 그 화살을 이주민들에게 돌렸고, 그 사상의 기반을 백인 우월주의에서 찾았다. 권력에서 소외되고 자본주의 경쟁에서 패배한 그 분노는 대단한 것이었다. 피해자의 입장에서 가해자의 입장으로 변하는, 그 우월한 느낌 또한 무시할 수 없다. 


혐한(嫌韓)으로 유명한 일본의 '재특회(재일 특권을 용납하지 않는 시민 모임)'도 그런 부류다. 장기 불황으로 실업률이 높아지고 많은 청년들이 절망에 빠져 있는 상황에서, 누군가 나서 '적'을 만들고는 그 적은 능력도 없거니와 선천적으로 후지다고 선전하는 것이다. 그러면 그들은 사상으로 똘똘 뭉치게 된다. 자신들은 우월한데, 다수의 적들이 침범해 어쩔 수 없이 자리를 보전하지 못하게 되었다는 기조다.


그런데 생각해보라. 피해자에서 가해자가 된 그들이지만, 자신들이야말로 피해자라고 약자라고 외친다. 여러모로 피해자였던 건 맞지만, 결코 약자는 아닌 것이다. 문제는 잘 살지 못하는 나라에서 왔을 대부분의 이주민이야말로 약자가 아닌가. 고로 피해를 당해도 그들이 더 많은 피해를 당할 게 아닌가. 


문제는 증오의 대상이 잘못 되었다는 점이다. 그들의 분노 자체가 잘못되었다고 생각하진 않는다. 분노가 생길 수밖에 상황이고, 분노는 반드시 풀어주어야 한다. 그런데 그 대상이 왜 시대와 나라와 위정자가 아니라 약자여야 하는가. 그건 명백한 오류다. 


이 영화가 괜찮은 이유


미시적으로 접근했기에 조금의 답을 찾을 수 있었다. 이런 류의 뿌리 깊은 대립은 개인 개인으로 접근해야 한다. 영화 <아메리칸 히스토리 X>의 한 장면 ⓒ뉴라인시네마



이 영화가 괜찮은 이유는 따로 있다. 그런 심각하고 첨예한 논란을 주제로 삼았다는 것도 점수를 듬뿍 줄 수 있겠지만, 그 문제를 굉장히 미시적으로 접근했다는 점이다. 통사적으로 접근했다면 오히려 받아들이기가 힘들었을지 모른다. 또한 조금의 답도 찾을 수 없었을 것이다. 더욱이 영화적으로 의미가 없었을 것이다. 그리하면 다큐멘터리 그 이상도 이하도 아니게 된다. 


미시적으로 접근했기에 조금의 답을 찾을 수 있었다. 이런 류의 뿌리 깊은 대립은 개인 개인으로 접근해야 한다. 영화의 한 명대사가 함축적으로 보여준다. "네가 한 행동들이 너의 삶을 좋게 만들었니?" 누구보다 투철한 스킨헤드인 데릭도 그 한 마디에 아무런 대답을 할 수 없었다. 그들이 원하는 건 여하튼 더 좋은 삶일 텐데 말이다. 유색인종을 모두 몰아내고 백인들의 세상을 만드는, 그들의 입장에서는 이보다 더 좋을 수 없는 그런 삶을 만드는 게 목표일 텐데 말이다. 


결국 황폐해질 수밖에 없는 행동을 했다는 것. 아무리 거창한 사상과 목표로 무장하고 있더라도 결코 삶을 더 좋게 만들 수 없다는 깨달음. 조직적인 거창함에서 사적인 삶의 세계로 내려올 때 알게 되는 깨달음이다. 거기엔 사소하지만 위대한 사랑과 우정이 있다. 이 영화가 말하고자 하는 게 바로 거기에 있다. 그걸 깨닫지 못하고는 이 대립은 영원히 끝나지 않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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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리뷰] <브루클린>


영화 <브루클린> 포스터 ⓒ이십세기폭스코리아


1950년대 아일랜드에서 미국으로 이민을 간 여성의 삶에서 무엇을 느끼고 무엇을 얻을 수 있을까. 무료한 일상을 뒤로 한 채 막연하게 더 나은 삶을 찾아 떠났거니와 집과 가족과 일과 사랑 사이에서 방황하는 모습은 흔히 볼 수 있겠지만, 거기에 인생을 건 절박함과 필사적인 모습이 비춰지지 않을 것이기에 쉽게 공감하기 힘들지 않을까. 


영화 <브루클린>은 대략 그런 정도의 단펵적인 정보를 얻은 후에 본다면, 훨씬 큰 재미와 감동을 받을 수 있을 것이다. 눈물을 짜내는 절박함 대신 공감 어린 성장 스토리가 있고, 지극히 개인적인 사랑놀음과 고민 대신 가족과 집 그리고 사랑 사이에서 고민하는 진정한 휴먼 스토리가 존재한다. 큰 갈등 없이 잔잔하지만, 그렇다고 전혀 우울하지 않은, 하지만 눈물샘을 자극하며 미소까지 짓게 만드는 그런 영화다. 


아일랜드 시골 소녀의 미국 상경 성공기


한 마디로 아일랜드 시골 소녀의 미국 상경 성공기라고 표현할 수 있겠는데, 요즘 영화 스타일에서는 좀처럼 나올 수 없는 비쥬얼과 스토리인 것 같다. 평범한 아일랜드 소녀 에일리스가 언니의 주선으로 미국에 가게 된다. 도착도 하기 전에 엄청난 고생을 하는데, 그건 도착해서 생활하고 일을 할 때도 마찬가지다. 특히 향수병은 어찌해볼 도리가 없는 불치병과 같은 것이다. 


10여 년 전, 나도 먼 타국 땅에서 1여 년간 살아본 적이 있다. 호주 브리즈번. 미국 브루클린과 이름뿐만 아니라 여러가지로 비슷한 느낌이랄까. 나도 에일리스처럼 초반에 고생을 많이 했고 향수병으로 극심한 우울을 겪었다. 아무리 그곳에 동향 사람들이 많아 '고향' 같은 느낌이 들었지만, 결코 '집'은 될 수 없었다. 참 많이 울었고 나를 달래기 위해 술도 참 많이 마셨다. 


영화 <브루클린>의 한 장면. ⓒ이십세기폭스코리아



에일리스는 향수병을 사랑으로 치유해 나간다. 아일리쉬 파티에서 우연히 이탈리아계 청년 토니를 만나 금세 사랑에 빠지게 된 것이다. 더할 나위 없이 순수하고 착하고 잘생기고 성실한 토니에게 에일리스는 조금씩 마음을 연다. 하지만 외로운 타국 땅에서는 사랑과 외로움을 착각하기 쉽다. 에릴리스는 고민 끝에 진심을 전한다. 사랑한다고. 


사랑을 하면 그곳이 곧 '집'


사람은 어디서든 사랑을 한다. 사랑을 하면 그곳이 '집'처럼 느껴진다. 가족들과 함께 하는 집이 집 같지 느껴지지 않는다면, 가족들끼리 사랑의 감정을 주고받지 못하고 느끼지 못하며 오히려 불편하다고 느끼기 때문이다. 타국 땅에서는 또는 외롭고 힘든 사람들끼리 있을 때는, 불편한 감정보다 서로 의지하고 아끼는 감정을 주고받곤 한다. 나 또한 그러했고 많은 사람들도 그렇게 제2의 고향, 제2의 집을 만들어 간다. 


에일리스 또한 점점 아일랜드를 잊고 브루클린을 집으로 생각하기 시작한다. 그렇게 사랑과 일과 인간관계에서 절정의 행복을 맛보게 되는 그 때 청천벽력과도 같은 소식을 듣는다. 언니의 갑작스런 죽음. 에일리스는 고민에 휩싸인다. 이제는 집이 되어 버린 이곳을 두고 다시 그곳으로 돌아갈 것인가. 비록 금방 다시 돌아올 거라고 약속을 하겠지만. 아무리 생각해도 다시 돌아갈 수밖에 없다. 다른 도리가 없다. 


영화 <브루클린>의 한 장면. ⓒ이십세기폭스코리아



다른 이유가 없으니 어쩔 수 없이 갔다가 금방 다시 돌아온다는 건, 말은 쉽지만 실행은 일생을 두고 고민해야 할 문제다. 인생이란 정녕 어떻게 될지 아무도 모르는 것이기에, 심사숙고하는 것도 모자라 하늘에 맡겨야 한다는 생각까지 하게 만든다. 더구나 1950년대라면 무게가 지금보다 훨씬 더 나갈 것이리라. 


사랑스럽고 아름답다


<브루클린>은 이 봄날에 연인과 함께 보기 더할 나위 없는 영화다. 사랑스럽고 아름답다는 진부하지만 가슴치는 표현이 적절할 듯하다. 여자주인공의 표정과 몸가짐의 변화에서 오는 확연한 성장을 바라보고 있노라면 뿌듯함을 금치 못할 것이다. 누구나의 한때를 보는 것 같다 가슴 먹먹하고 흐뭇해진다. 


남자주인공이야말로 이 영화가 갖는 사랑스럽고 아름다운 분위기에 방점을 찍는다. 그처럼 순수하고 착하고 성실한 청년이라면 누구나 좋아할 것이다. 또한 한 여자만을 바라보며 사랑하고 기다리는 남자는 참으로 멋있다. 그로 인해 에일리스는 힘을 내 웃음을 되찾고 비로소 살아갈 수 있게 되었다. 다름 아닌 그곳에서. 그렇게 영화에 빛이 살아난다. 


영화 <브루클린>의 한 장면. ⓒ이십세기폭스코리아



대부분의 삶이 단조롭고 소소하다. 바로 그 단조롭고 소소한 것에 진짜 삶이 있을지 모른다. <브루클린>은 심지어 사소하기까지 하다. 성장과 사랑과 죽음과 헤어짐과 만남, 그 얼마나 사소한 조각들인가. 삶에 있어 누구나 한 번쯤은 해보고 겪어봤을 것들이 아닌가. 그래서 그것들로만 이루어진 영화는 더 이상 찾아보기 힘든 것이 아닌가. 그럼에도 이 영화가 가슴을 울리는 건, 우리가 여전히 그것들을 찾고 갈망하고 곁에 두고 싶어한다는 증거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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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서평] <중국을 움직이는 거인들과의 대화>



<중국을 움직이는 거인들과의 대화> 표지 ⓒ카멜북스


어릴 때, 그러니까 20년 전에는 전자 제품을 살 때 삼성이니 LG니 한국 브랜드를 애용했다. 내가 아닌 부모님이 애용한 것이나, 나라도 그렇게 했을 게 뻔하다. 아는 게 그것 뿐이고 보이는 게 그것 뿐이었으니 말이다. 그러다가 10여 년 전부터 바뀌었다. 적어도 난 애플을 애용하게 되었다. 비록 상당한 고가이고 폐쇄적이고 이용하기도 불편하지만 괜찮았다. 스마트폰이니 MP3니 소형 가전제품을 애플로 도배했다. 


그렇게 다시 10년이 지난 지금은? 중국 브랜드로 조금씩 이양 중이다. 샤오미 미밴드와 보조배터리를 사용하고, 알리바바의 타오바오로 중국 제품을 직구한다. 동영상 사이트 소후 또는 요우투도우를 이용해 영화, 드라마, 예능을 시청한다. 텐센트의 QQ나 시나의 웨이보, 바이두 검색을 최소 한 번씩은 이용해봤다. 나도 모르게 나는 중국 브랜드를 섬렵하고 애용하고 있는 것이다. 이럴 줄은 몰랐다. 


요즘 나와 거의 혼연일체를 이루고 있는 샤오미의 미밴드는 샤오미의 3대 상품 중 하나다. 다른 두 개는 스마트폰과 보조배터리다. 타의 추종을 불허하는 저렴한 가격으로, 만만치 않은 아니 오히려 더 좋은 성능을 뽐내는 샤오미의 제품들은 오랜 애플 팬인 나조차 굴복시켰다. 초창기엔 '대륙의 실수'로 불리며 애플을 완벽히 모방하는 것에 그쳤지만, 이제는 '대륙의 실력'으로 불리고 있다. 누가 뭐라고 하든 세계적인 브랜드로 급부상하고 있는 것이다. 


4대 천왕과 함께 중국을 대표하는 12개 기업들


그런 샤오미와 더불어 중국 4대 천왕이라고 불리는 기업이 있는데, 알리바바, 텐센트, 바이두 그리고 샤오미이다. 물론 나는 이들 브랜드를 모두 접해보았다. 모르긴 몰라도 대부분의 사람들도 마찬가지일 것이다. 알리바바의 타오바오, 텐센트의 QQ와 위쳇, 바이두의 바이두, 샤오미의 제품들은 수많은 사람들이 사용하고 있다. <중국을 움직이는 거인들과의 대화>(카멜북스)에서 이들 4대 천왕과 함께 12개의 중국을 대표하는 기업들을 간략하게나마 접할 수 있었다. 


미국을 대표하는 기업, 그중에서도 전 세계적으로 유명한 IT 기업들 이야기는 그들 기업들을 세운 이들과 함께 널리 알려져 있다. 마이크로소프트의 빌 게이츠와 스티브 발머, 애플의 스티브 잡스와 스티브 워즈니악, 구글의 에릭 슈미트 등. 이들은 공교롭게도 거의 같은 시기에 태어나 거의 같은 시기에 사업에 뛰어들었다. 1950년대 초중반에 태어나 1970~80년에 사업을 시작했다. 이런 사례는 우리나라에도 있다. 지금 한국을 호령하는 IT 기업들인 넥슨, 다음, 엔씨소프트, 네이버는 1990년대 중반에서 후반 사이에 생겼다. 이들 기업을 창업한 이들이 공교롭게도 86학번으로 동일하다. 


그렇다면 중국은? 비슷하다. 1960년대 중반에서 1970년대 초반 사이에 태어난 이들이 2000년대를 거치며 성장해 2010년대에 이르러 중국을 등에 업고 전 세계를 호령하고 있다. 한국과 미국을 넘어 중국으로 흘러가는 분위기이다. 양(量)으로는 이미 세계 최고 반열에 올라 있는 중국이 질(質)까지 넘보고 있으니, 질로만 승부를 거는 다른 나라 기업들이 어찌해볼 도리가 없어 보인다. 


개인적으로도 이런 현상은 지극히 환영한다. 그동안 질적으로만 승부를 걸어 왔던 기업들의 행태는 참으로 볼 만했다. 혁명과도 같은 변화 속에서 선구자격인 그들의 제품을 고객들은 사용하지 않을 수 없었고, 가격 면에서 고객은 호구로 전락했다. 고객이 주인이 아니고 기업이 주인이었던 것이다. 따져보면 애플의 폐쇄적 디바이스 체제도 비슷한 맥락에서 이해할 수 있다. 기업이 고객에게 맞추는 게 아니라 고객이 기업에게 맞추는 게 아닌가. 


그런 와중에 중국 기업들이 그들이 가지지 못한 것들을 무기로 들고 나왔다. 제일 큰 게 가성비라고 할 수 있겠는데, 초창기에는 질로는 승부를 볼 수 없다고 판단해 그런 전략을 들고 나왔을 것이다. 다른 하나는 다름 아닌 '중국' 그 자체다. 세계의 1/5에 달하는 인구를 대상으로 축척한 자본과 역량 말이다. 이건 중국 기업의 힘이 아닌 중국의 힘이다. 


비로소 전 세계를 대상으로 승부를 보는 '중국' 기업


그렇다면 여기서 생각해봐야 할 것은 다름아닌 '중국'이다. 한국, 일본, 미국의 기업과 기업인들의 신화와 큰 차이점을 보이는 점이 바로 '중국'인 것이다. 아직까지도 그들을 '중국'의 기업이 아닌 중국의 '기업'이라고 생각할 수가 없다. 그들이 과연 중국을 등에 업지 않고 그 정도의 힘을 발휘할 수 있을까 하는 의문이 있다. 그래서 그들이 생각보다 훨씬 오랜 시간 동안 활동을 해왔음에도 우리가 알지 못하고, 또 이런 류의 책을 통해 알려지지 않은 건 그 때문일 것이다. 


이제야 막 소개되고 알려지는 건, 그들이 비로소 전 세계를 대상으로 승부를 보고 있다는 뜻이다. 그건 즉 오래지 않아 그동안 승승장구해온 그들 중 몇몇은 사라질 거라는 것, 반면 몇몇은 비로소 전 세계적으로 인정을 받는 기업으로 우뚝 솟을 거라는 말이 된다. 지금이 그 분기점이라고 해도 무방하다. 기존의 기업들과 '중국' 기업들의 대전이 발발하고 있는 한중간에 말이다. 


소위 춘추전국시대의 영웅들 이야기는 재밌다. 한치 앞도 알 수 없는 그 시대를 조망하는 건 불가능하지만, 나날이 변하는 것들을 체험하는 건 재밌고 흥미롭다. 그런 면에서 난 행운아이지 않을까. 혁명과도 같은 변화를 체험하고, 그 체험을 인지하고, 미래를 예측하고 기대하고. 계속 같이 하고 싶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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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래된 리뷰] <아메리칸 사이코>



영화 <아메리칸 사이코> 포스터 ⓒ21세기 엔터테인먼트


하얀 바탕으로 진한 빨간 색의 피가 흐른다. 하얀 바탕은 곧 접시가 되고 피는 곧 먹음직스러운 스테이크의 핏물이 된다. 그곳은 상류층이 즐비한 레스토랑이다. 종업원인지 셰프인지 손님들에게 요리를 내주며 코스를 설명한다. 상류층으로 보이는 손님들은 경청한다. 나만 그렇게 보이는가? 그들의 행세가 매우 지질해 보인다. 그들의 학력은 매우 높을 테고 매우 잘 살고 있으며 또 사회적 지위와 명망도 높을 테지만. 


세상에서 가장 지질한 상류층 인간


영화 <아메리칸 사이코>는 이처럼 메시지를 던지며 시작된다. 피와 핏물의 동질성, 상류층의 지질함. 그리고 그걸 보는 제3자의 시선까지. 주인공 패트릭 베이트만(크리스찬 베일 분) 또한 이 상류층의 일원이다. 그는 아버지가 사장으로 있는 월스트리트 중심가 금융사 P&P의 부사장이다. 27세의 젊은이로, 학력도 높고 잘 생기고 돈도 많으며 무엇보다 자신을 잘 가꿀 줄 안다. 


패트릭은 여지 없이 초고층의 거의 꼭대기에서 근무하며, 순백색의 잘 가꿔진 집에서 산다. 그는 자신을 매우 사랑하고, 그런 자신을 내세우기 좋아하며, 그 이상으로 남에게 지는 걸 싫어한다. 영화가 시작되면 패트릭의 그런 일련의 특징들을 죽 보여준다. 


규칙적인 운동 후에 웬만한 여성보다 더 많은 스킨 케어 화장품으로 자신을 가꾼다. 그는 그런 자신을 누구보다 사랑한다. 그러곤 자신과 같은 부류의 사람들, 즉 아버지를 잘 둔 젊은 부사장들 모임에 참여해 그야말로 쓸 데 없는 이야기로 시간을 축 낸다. 하지만 그들 자신에게는 그런 것들이 중요하다. 하나라도 더 아는 채 하려는 것. 


남에게 지는 걸 싫어하는 특징을 가장 잘 드러내는 장면이 나오는데, 다름 아닌 명함 자랑이다. 형압으로 팠다느니, 계란 껍질을 이용했다느니, 그 어느 것보다도 예쁜 색깔이라느니. 명함을 건네는 것도 아니고 단순히 이번에 명함을 새로 장만했다고 자랑하고 있는 것이다. 완전한 허세다. 그런데 패트릭 만이 각각의 명함 등급을 알아보고 혼자 손을 떨고 식은땀을 흘린다. 자신의 것보다 더 좋은 명함들을 보고서. 



영화 <아메리칸 사이코>의 한 장면. ⓒ21세기 엔터테인먼트



우월함의 증명, 세상에 대한 증오, 결국 살인까지


현대인이라면 누구나 이런 증세(?)들을 겪고 있을 것이다. 자신을 가꿔서 내놓아 자랑하고 싶고 또 그 중에 제일이 되고 싶어하는 마음. 그러면서 절대 지지 않고 싶고, 졌다는 걸 알고 내색하지 않으려는 의지. 일반적으로 같은 증세라도 해도 상류층이면 상류층다운 증세를 가지고 있을 거라 생각하지만, 영화는 정반대라고 말하고 있는 것이다. 상류층답게 지질의 급도 높다고 해야 할까. 참 한심하다. 실제로도 그럴까.


패트릭은 같은 일원이지만 제3자적 시선을 드러낸다. 그들은 상류층이면서도 급 높은 지질함을 자랑하지만, 자신은 그렇지 않다는 것이다. 80년대를 배경으로 하고 있는 만큼 80년대의 유수 노래들이 많이 나오는데, 모두 패트릭이 신봉해 마지 않는 노래들이다. 패트릭은 수많은 노래들을 듣고 비평한다. 이것은 그가 다른 이들보다 우월하다고 믿는 증거 중 하나이다. 


이 격렬한 증세들과 더불어 우월주의는 결국 살인으로까지 이어진다. 노숙자를 살인하면서 시작된 살인 행각은 여성들로 이어진다. 그러는 와중에 돈으로 산 여자들과 섹스 비디오를 찍기도 하는데, 여지 없이 나르시시즘의 모습을 보이고 자기 과욕이 극에 달한 모습을 보인다. 자신이 우월하다는 걸 증명해 보이려는 수작이 아닌가 싶다. 



영화 <아메리칸 사이코>의 한 장면. ⓒ21세기 엔터테인먼트



영화는 중반 이후가 되면서 패트릭의 엽기적인 살인 행각에 초점을 맞춘다. 자신도 자신을 컨트롤할 수 없는 지경에 이르게 되고, 그걸 자각하지만 더 이상 손 쓸 도리가 없다. 같은 상류층에 위치한 이들에 대한 증오와 함께 자신보다 아래에 위치한 이들에 대한 증오, 즉 세상에 대한 증오가 뿌리 깊어진 것이다. 그는 어쩌다가 그렇게 된 것일까. 감독이 의도한 바는 무엇일까, 영화가 던지는 메시지는 무엇일까. 


피해자도 많아졌고, 괴물도 많아졌다


제목에서 어느 정도 유추해볼 수 있겠다. 아메리칸 사이코, 즉 미국인 정신병자. 때는 80년대 냉정 막바지. 미국은 세계 패권을 거의 손에 넣었다고 볼 수 있겠다. 승리자가 된 것이다. 그런 곳에서도 상류층인 이들이 누리는 호사는 상상을 초월한다. 돈, 명예, 명성, 특권 등. 거기에 영화는 약물과 여자를 추가한다. 문제는 이들이 제대로 된 교육을 받았느냐는 점이다. 여기서 교육이라 함은 '인성' 교육을 말한다. 돈이면 모든 것이 해결되는 곳에서 인성 따위가 무슨 소용이 있겠냐는 생각이 든다. 받지 않았을 거라 추측된다. 


그런 상태로 최고의 위치에 오른다면 당연히 어떤 문제고 생기지 않을 수 없다. 그의 살인 행각은, 그것도 아주 엽기적인 살인 행각은 그렇게 생겨난 문제의 최악의 표출이라 할 수 있겠다. 인성이 제대로 갖추어지지 않은 상태에서 자신에 대한 사랑만이 드높고 드러내는 것만 익숙하다. 그러면서 같은 부류의 이들과 행하는 지질하지만 진지한 경쟁, 그 경쟁에서 이기지 못한 채 아래 부류의 이들과 행하는 자기 우월 표출 의식. 결국 경쟁과 우월 표출이 살인으로 이어지게 되는 것이다. 


그렇다면 패트릭도 피해자일까. 이 시대가, 이 사회가 만들어낸 괴물일까. 그의 행각 자체를 두둔할 생각은 추호도 없지만, 그렇다고 볼 수 있겠다. 자본주의가 무너지고 있는 이 시점에서, 이 영화가 던지는 중요하지만 협소한 메시지는 더욱 중요해지고 더 확대되었다. 피해자도 많아졌고, 괴물도 많아졌으며, 피해자이자 괴물인 이들도 많아졌다. 개인적으로 피해자이자 괴물인 이들은, 그것도 하류층이 아닌 상류층이 이들은 피해자임에도 가차 없이 처벌을 받아야 한다고 생각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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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서평] <스페이스 크로니클>



<스페이스 크로니클> 표지 ⓒ동아시아


"무한한 공간 저 너머로!"


애니메이션 영화 <토이 스토리>의 주인공 중 하나 '버즈 라이트이어'의 명대사다. 그는 자신이 장난감이 아닌 외계에서 지구로 불시착한 우주전사라고 믿는데, 그 상징성이 묻어 있다. 저 한 마디 대사가 남긴 파장, 나도 무한한 공간 저 너머로 가보고 싶었다. 그곳은 '우주'로 통칭 되는 그 어딘가 였다. 


우주를 생각하면 마냥 설렌다. 가본 적이 없고, 상상으로만 그려볼 수 있다. 아무리 '수금지화목토천해명'을 외우고 다녀도 내 두 눈으로 볼 수 없는 건 마찬가지다. 한편으론 그런 마음도 있다. 이 좁은 서울, 한국, 나아가 지구에서 지지고 볶고 싸우는 게 너무 힘들다는 마음. 지구가 화성, 금성, 수성보다는 크다 지만, 이 광활한 우주에 비추어 보았을 때는 그리 자랑할 거리는 못 되지 않은가. 


내 우주 지식으론, 최근 우주에 관한 주요 이슈는 화성, 달 여행이다. 거기에 외계인의 존재 유무나 소행성의 지구 충돌 등은 오래된 이슈다. 그러고 보면 우주는 우리 실생활에 밀접하게 다가와 있는 것 같다. 위의 이슈들은 누구나 한 번 들어보고 생각해보고 상상해봤을 것이기 때문이다. 


우주에 대한 거의 모든 것


<스페이스 크로니클>(부키)은 위의 이슈들을 비롯한 우주에 관한 거의 모든 것들을 다분히 저자의 입장에서 이야기하고 있다. 왜 우주로 가려고 하는가, 어떻게 우주로 가려고 하는가. 저자는 우주로 가려는 이유를 간단명료하게 말한다. 인간은 계획을 세워서 무언가를 발견하고 싶어하는 강한 욕구를 갖고 있다. 또한 새로운 탐사와 그로부터 얻어지는 새로운 전망이 얼마나 값진지 잘 알고 있다. 이것이 없으면 문화는 정체 되고 인간은 소멸해가다가 결국에는 멸망할 거라는 논리다. 즉, 인간의 본성이 인간으로 하여금 우주로 가게끔 한다는 것이다. 


그렇다면 어떻게 가는가? 비행체를 지구 밖으로 내보내는 방법 중 하나는 뾰족한 앞부분을 위로, 분사구를 아래쪽으로 향하고 비행체 질량의 일부를 어떻게든 분사구를 통해 아래로 뱉어내게 하는 것이다. 바로 '추진'의 원리이다. 여기에서 연료를 어떻게 하느냐에 따라 모든 게 달라진다. 우주 전문가들이 추구하는 궁극의 목표가 천문학적 양의 에너지(연료)를 가능한 한 작은 용기에 담는 것이란다. 저자는 이에 반물질 로켓을 추천한다. 물질과 반물질이 만나면서 생성되는 에너지를 추진력으로 사용하는 로켓인데, 부산물도 없고 효율도 높아서 최상의 엔진으로 불리지만 반물질을 다루는 기술이 아직 개발되지 않았다고 한다.


그런데 이 두꺼운 책에 나와 있는 비교적 객관적인 지식들은 이 정도다. 나머지는 위에서도 말했듯이 다분히 저자의 입장이 들어가 있는 주장들이다. 그 상당수는 지금 나와 전혀 상관없는 듯한 것이다. 저자는 미국 자연사 박물관 부설 헤이든 천문관의 천체물리학자인 닐 디그래스 타이슨인데, 책의 거의 모든 우주 이야기에서 미국 입장에서 바라보고 생각하는 것을 고수하고 있는 것이다. 


이대로 가면 미국은 우주 개발 2류 국가로 주저앉을 거다


미국은 1969년에 아폴로 프로젝트의 일환으로 사람을 달에 보내는 데 성공해 우주 개발 사업의 정점을 찍으며 소련을 압도했다. 여기에서, 미국이 아폴로 프로젝트를 시작한 이유는? 다름 아닌 소련의 성공 때문이었다. 1957년 소련은 세계 최초의 인공위성 스푸트니크 1호를 궤도에 진입 시키는 데 성공했다. 이후 생명체를 태운 최초의 인공위성 스푸트니크 2호 발사에 성공했고, 이어 수많은 '최초'를 달성했다. 


반 백 년이 훌쩍 지난 지금 우리는 아폴로 11호의 닐 암스트롱이 달 위를 거니는 장면만 기억하지만, 그래서 '우주=미국'이라는 공식이 성립되어 있지만, 저자는 우주 시대의 처음 30년 역사를 훑어보면 생각이 달라질 거라 말한다. 우주 시대의 선두 주자는 명백히 소련이었고, 미국은 그런 소련 덕분에 그 정도의 우주 개발을 할 수 있었던 것이다. 


하지만 1972년 아폴로 17호를 끝으로 아폴로 프로젝트는 막을 내리고 그 후로는 사람을 지구 저궤도 바깥으로 보낸 적이 없다. 그러는 사이에 신흥 우주 세력이 미국의 기술을 거의 따라잡았다. 저자는 이대로 가면 미국은 우주 개발에 관한 한 2류 국가로 주저앉을 거라 내다보고 있다. 명왕성을 퇴출 시키는 데 크나큰 공(?)을 세운 저자의 말이니 신빙성이 가는 게 사실이다. 


미국에는 'NASA(미국항공우주국)'이라는 세계에서 제일 유명한 우주 기관을 갖고 있다. 그 유명함에 비례할 정도의 기술력 또한 갖추고 있다. 그런데 문제는 기술력이 아니라 이유의 불투명이다. 정부에서 우주에 투자해야 할 이유가 불투명한 것이다. 저자는 그것을 '생존'의 문제로 접근하고 있다. 과거 미국이 우주 개발의 전성기를 보냈을 때는 '냉전'이라는 국가의 생존과 사활이 걸린 중요한 시기였는데, 지금은 그때에 비해선 한 없이 평화로운 시기가 아닌가. 


누구든 우주 개발을 선도해줬으면 한다


저자는 바란다. 과거 우주 개발을 선도했던 당시의 미국의 개척 정신과 모험 정신을. 그리고 그 정신을 민간 기업이 이어받아 다시금 우주 개발을 선도하기를. 그런 바람은 NASA가 추진하고 있는 우주 사업의 민간 이양 계획 때문일 것이다. 지금의 시기는 우주 개발이라는 거대한 돈 잔치에 정부가 모두의 공감을 얻어 참여하기에 힘들다. 


책을 읽는 내내 '저자의 바람이 나와는 무슨 상관이 있을까?' 하는 의문을 떨치기 힘들었다. 그 의문은 이 책이 갖는 여러 장점에도 불구하고 나를 힘들게 했다. 나는 미국인이 아닌 한국인이고, 저자는 오로지 미국인, 미국을 대상으로 책을 집필한 것 같은데. 그렇다면 내가 억지로 라도 나에게 맞게, 나아가 우리나라에 맞게 이야기를 돌릴 수밖에 없다. 그런데 왠지 '우주'를 생각하면 미국으로 돌아와 있을 것 같다. 


우리나라는 1992년에 최초의 인공위성 우리별 1호를 발사했다. 24년이 지난 지금, 우리나라의 우주 개발은 어떤 실정일까? 단도직입적으로 말해, 여전히 다른 나라의 힘을 빌리고 있다. 우리나라는 한국 최초의 발사체인 나로호를 2009년과 2010년 발사에 실패한 후 2013년에 성공했다. 하지만 100% 우리의 기술은 아닌 것이, 1단 추진 시스템은 러시아가 2단 비행 종단 시스템은 우리나라가 맡았다. 


우리나라의 경우는 기술력이 문제일까, 미국처럼 투자 이유의 불투명 때문일까. 개인적으로 생각해봤을 때 둘 다가 아닐까 싶다. 그리고 국민의 공감대가 형성되지 않은 것인데, 나부터도 한국의 우주 개발보다 미국의 우주 개발에 더 관심이 가는 게 사실이다. 나라 간에는 경쟁이겠지만, 한 개인에게 우주는 '경이로움' 그 자체이기 때문이다. 그 외에 무엇도 아니다. 어느 나라든, 어느 기업이든 우주 개발을 선도해주었으면 하는 마음이다. 결국 미국일 수밖에 없는 것인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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문학으로 인류에 공헌하다, 노벨 문학상 수상자들 



Copyright © Nobel Media AB 2013



1. 1901년~1920년





 수상 연도

 수상자 이름 

 수상자 국가 

 1901년 

 르네 프랑수아 아르망 프뤼돔

 프랑스

 1902년

 크리스티안 마티아스 테오도어 몸젠

 독일 제국(독일) 

 1903년

 비에른스티에르네 마르티니우스 비에른손

 노르웨이

 1904년

 프레데리크 미스트랄/

 호세 에체가라이 이 에이사기레

 프랑스/스페인

 1905년

 헨리크 시엔키에비치 

 폴란드

 1906년

 조수에 카르두치 

 이탈리아 

 1907년

 조지프 러디어드 키플링

 영국

 1908년

 루돌프 크리스토프 오이켄 

 독일 제국(독일) 

 1909년

 셀마 오틸리아나 로비사 라겔뢰프

 스웨덴 

 1910년

 파울 요한 루트비히 폰 하이제

 독일 제국(독일)

 1911년 

 모리스 폴리도르 마리 베르나르 마테를링크

 벨기에 

 1912년

 게르하르트 하웁트만

 독일 제국(독일) 

 1913년

 라빈드라나트 타고르

 인도

 1914년

 수상자 없음

 없음 

 1915년 

 로맹 롤랑

 프랑스 

 1916년 

 칼 구스타브 베르네르 폰 헤이덴스탐

 스웨덴 

 1917년 

 카를 아돌프 기엘레루프/헨리크 폰토피단

 덴마크/덴마크

 1918년 

 수상자 없음

 없음 

 1919년 

 카를 프리드리히 게오르크 슈피텔러

 스위스 

 1920년

 크누트 함순

 노르웨이 

 


노벨 문학상이 시작된 1901년부터 1920년까지를 분석해 보면 다음과 같다. 


1. 총 20명의 수상자 중 남성 19명, 여성 1명

2. 1914년과 1918년은 수상자가 없음(각각 제1차 세계대전이 시작된 해와 끝난 해)

3. 1904년과 1917년은 공동 수상

4. 독일 제국(독일) 4, 프랑스 3, 스웨덴 2, 노르웨이 2, 덴마크 2, 스위스 1, 인도 1, 벨기에 1, 영국 1, 스페인 1, 폴란드 1, 이탈리아 1 => 유럽 19, 아시아 1



2. 1921년~1940년

 




 수상 연도

 수상자 이름

 수상자 국가 

 1921년

 아나톨 프랑스

 프랑스

 1922년

 하신토 베나벤테

 스페인

 1923년

 윌리엄 버틀러 예이츠

 아일랜드 

 1924년

 브와디스와프 스타니스와프 레이몬트

 폴란드

 1925

 조지 버나드 쇼

 아일랜드 

 1926

 그라치아 델레다

 이탈리아 

 1927

 앙리-루이 베그르송

 프랑스 

 1928

 시그리드 운세트

 노르웨이

 1929

 토마스 만

 독일 

 1930

 헤리 싱클레어 루이스

 미국 

 1931

 에리크 악셀 카를펠트

 스웨덴 

 1932

 존 골드워디

 영국 

 1933

 이반 알렉세예비치 부닌

 소련(러시아) 

 1934

 루이지 피란델로

 이탈리아 

 1935

 수상자 없음

 없음

 1936

 유진 오닐 

 미국 

 1937

 로제 마르탱뒤가르

 프랑스 

 1938

 펄 사이든스트리커 벅

 미국 

 1939

 프란스 에밀 실란페

 핀란드 

 1940

 수상자 없음

 없음



노벨 문학상 1921년부터 1940년까지를 분석해 보면 다음과 같다. 


1. 총 18명의 수상자 중 남성 15명, 여성 3명

2. 1935년과 1940년은 수상자가 없음

3. 프랑스 3, 미국 3, 아일랜드 2, 이탈리아 2, 스페인 1, 폴란드 1, 노르웨이 1, 독일 1, 스웨덴 1, 영국 1, 러시아 1, 핀란드 1 => 유럽 15, 북미 3



3. 1941년~1960년

 




 수상 연도

 수상자 이름

 수상자 국가

 1941년

 수상자 없음

 없음

 1942년 

 수상자 없음

 없음 

 1943년 

 수상자 없음 

 없음 

 1944년

 요하네스 빌헬름 옌센

 덴마크

 1945년 

 가브리엘라 미스트랄

 칠레

 1946년 

 헤르만 헤세

 스위스

 1947년 

 앙드레 지드

 프랑스 

 1948년 

 토머스 스턴스 엘리엇 

 영국 

 1949년 

 윌리엄 커스버트 포크너

 미국 

 1950년 

 버트런드 러셀

 영국 

 1951년 

 페르 라게르크비스트

 스웨덴 

 1952년

 프랑수아 모리아크 

 프랑스 

 1953년 

 윈스턴 레오너드 스펜서 처칠

 영국

 1954년 

 어니스트 밀러 헤밍웨이

 미국 

 1955년 

 할도르 킬랸 락스네스

 아이슬란드 

 1956년 

 후안 라몬 히메네스

 스페인 

 1957년

 알베르 카뮈 

 프랑스

 1958년 

 보리스 레오니도비치 파스테르나크

 소련(러시아) 

 1959년 

 살바토레 콰시모드

 이탈리아 

 1960년 

 생존 페르스

 프랑스 



노벨 문학상 1941년부터 1960년까지를 분석해 보면 다음과 같다. 


1. 총 17명의 수상자 중 남성 16명, 여성 1명

2. 1941년과 1942년과 1943년은 수상자가 없음(제2차 세계대전 중)

3. 프랑스 4, 영국 3, 미국 2, 덴마크 1, 칠레 1, 스위스 1, 스웨덴 1, 아이슬란드 1, 스페인 1, 러시아 1, 이탈리아 1 => 유럽 14, 북미 2, 남미 1



4. 1961년~1980년





 수상 연도

 수상자 이름

 수상자 국가

 1961년 

 이보 안드리치

 유고슬라비아(크로아티아) 

 1962년

 존 언스트 스타인벡

 미국 

 1963년

 요르고스 세페리스

 그리스 

 1964년 

 장 폴 샤를 에이마르 사르트르(수상 거부) 

 프랑스

 1965년

 마하일 알렉산드로비치 숄로호프

 소련(러시아) 

 1966년 

 슈무엘 요세프 아그논/넬리 작스

 이스라엘/스웨덴

 1967년 

 미겔 앙헬 아스투리아스 로살레스

 과테말라 

 1968년 

 가와바타 야스나리

 일본

 1969년 

 사뮈엘 베케트

 아일랜드

 1970년 

 알렉산드르 이사예비치 솔제니친

 소련(러시아) 

 1971년 

 파블로 네루다

 칠레 

 1972년 

 하인리히 뵐

 서독(독일)

 1973년 

 패트릭 화이트

 오스트레일리아 

 1974년

 에위빈드 욘손/하뤼 마르틴손

 스웨덴/스웨덴 

 1975년 

 에우제니오 몬탈레

 이탈리아 

 1976년 

 솔 벨로

 미국 

 1977년 

 비센테 알레익산드레

 스페인 

 1978년 

 아이작 바셰비스 싱어

 폴란드

 1979년 

 오디세아스 엘리티스

 그리스 

 1980년 

 체스와프 미워시

 폴란드



노벨 문학상 1961년부터 1980년까지를 분석해 보면 다음과 같다. 


1. 총 22명 중 남성 21명, 여성 1명

2. 1966년과 1973년은 공동 수상

3. 사상 최초로 1964년 장 폴 샤를 에이마르 사르트르(프랑스) 수상 거부

4. 미국 4, 스웨덴 3, 그리스 2, 러시아 2, 크로아티아 1, 프랑스 1, 이스라엘 1, 과테말라 1, 일본 1, 아일랜드 1, 칠레 1, 독일 1, 오스트레일리아 1, 이탈리아 1, 스페인 1 => 유럽 13, 북미 4, 남미 2, 아시아 2, 오세아니아 1



5. 1981년~2000년





 수상 연도

 수상자 이름

 수상자 국가

 1981년

 엘리아스 카네티

 영국

 1982년 

 가브리엘 호세 데 라 콘코르디아 

 가르시아 마르케스

 콜롬비아 

 1983년

 윌리엄 골딩

 영국 

 1984년 

 야로슬라프 사이페르트

 체코슬로바키아(체코)

 1985년 

 클로드 시몽

 프랑스 

 1986년 

 아킨완데 올루월레 월레 소잉카

 나이지리아 

 1987년

 조지프 브로드스키 

 미국

 1988년 

 나기브 마푸즈

 이집트 

 1989년 

 카밀로 호세 셀라

 스페인 

 1990년 

 옥타비오 파스 로사노

 멕시코 

 1991년 

 네이딘 고디머

 남아프리카 공화국 

 1992년 

 데릭 월컷

 세인트루시아

 1993년

 토니 모리슨

 미국 

 1994년 

 오에 겐자부로

 일본 

 1995년 

 셰이머스 히니

 아일랜드

 1996년 

 비스와바 심보르스카

 폴란드

 1997년 

 다리오 포

 이탈리아 

 1998년 

 주제 드 소자 사라마구

 포르투갈 

 1999년 

 귄터 그라스

 독일 

 2000년 

 가오싱젠 

 프랑스 



노벨 문학상 1981년부터 2000년까지를 분석해 보면 다음과 같다. 


1. 총 20명의 수상자 중 남성 17명, 여성 3명

2. 미국 2, 프랑스 2, 불가리아 1, 콜롬비아 1, 영국 1, 체코 1, 나이지리아 1, 이집트 1, 스페인 1, 멕시코 1, 남아프리카 공화국 1, 세인트루시아 1, 일본 1, 아일랜드 1, 폴란드 1, 이탈리아 1, 포르투갈 1, 독일 1 => 유럽 11, 북미 4, 아프리카 3, 남미 1, 아시아 1 



6. 2000년~2014년





 수상 연도

 수상자 이름

 수상자 국가

 2001년

 비디아다르 수라지프라사드 나이폴

 영국

 2002년 

 케르테스 임레

 헝가리 

 2003년 

 좀 낵스웰 쿳시

 남아프리카 공화국 

 2004년 

 엘프리데 옐리네크

 오스트리아 

 2005년 

 해럴드 핀터 

 영국 

 2006년 

 페리트 오르한 파묵

 터키 

 2007년 

 도리스 레싱

 영국

 2008년 

 장 마리 귀스타브 르 클레지오

 프랑스 

 2009년 

 헤르타 뮐러

 독일

 2010년 

 호르헤 마리오 페드로 바르가스 요사

 페루

 2011년 

 토마스 트란스트뢰메르

 스웨덴 

 2012년 

 모옌

 중국 

 2013년

 앨리스 먼로

 캐나다 

 2014년 

 파트릭 모디아노

 프랑스

 2015년

 ?

 ?

 

 

 

 

 

 

 

 

 

 

 

 

 

 

 


노벨문학상 2001년부터 2014년까지를 분석해 보면 다음과 같다. 


1. 총 14명의 수상자 중 남성 10명, 여성 4명

2. 영국 3, 프랑스 2, 헝가리 1, 남아프리카 공화국 1, 오스트리아 1, 터키 1, 독일 1, 캐나다 1, 페루 1, 스웨덴 1, 중국 1 => 유럽 9, 아시아 2, 북미 1, 남미 1, 아프리카 1




Copyright © Nobel Media AB 2013


지금까지 노벨문학상 1901년~2014년 수상자를 살펴보았다. 114년 동안 총 111명이 수상하였고, 그 중에 남성이 98명 여성이 13명이었다. (남성 약 89%, 여성이 약11%)

대륙별 분포도를 보면 유럽에서 81명(70%), 북미 14명(15%), 아시아 6명(5%), 남미 5명(4%), 아프리카 4명(3%), 오세아니아 1(1%) 순이었다. 

나라 별로 보면 프랑스 15(13%), 미국 11(9%), 영국 9(8%), 독일 9(8%), 스웨덴 8(7%) 순으로 거의 유럽 일변도였다. 시기 별로 보면 유럽의 독주에서 점차 전 세계적으로 퍼져가는 걸 알 수 있다.

유럽: (1901-1920: 95%-> 1921-1940: 83%-> 1941-1960: 82%-> 1961-1980: 59%-> 1981-2000: 55%)


이번 2015년 노벨문학상은 동유럽 벨라루스 출신의 여성작가 스베틀라나 알렉시예비치에게 돌아갔습니다. 그녀는 기자 출신의 다큐멘터리 산문작가인데요. 스웨덴 스톡홀름 노벨위원회는 "다성음악과도 같은 그의 저술들은 우리 시대의 고통과 용기를 기록한 기념비들"이라며 선정 이유를 밝혔습니다. 10년 넘는 취재 끝에 출간한 대표작 <체르노빌의 목소리>가 그 대표적 기념비라고 할 수 있겠네요. 원전 사고 피해자들이 겪은 아픔과 참상을 생생하게 전달한 역작으로, 2006년 미국 비평가협회상을 받기도 했습니다. 이밖에도 <전쟁은 여자의 얼굴이다> <아연 소년들> <세컨드 핸드타임> 등의 작품이 있습니다. 


매년 어김없이 노벨문학상 후보에 오르는 일본의 무라카미 하루키, 한국의 고은, 미국의 조이스 캐롤 오츠와 필립 로스, 체코의 밀란 쿤데라, 케냐의 응구기 와 시옹오 등 중에서 과연 수상하는 이가 나오기는 할까요? 이들이 안타까운 이유는, 상을 타면 당연한 것처럼 생각되어 버렸기 때문일 것입니다. 하지만 이 만년 후보들이 다 타려면 족히 10년은 있어야 할 텐대요... 하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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冊으로 策하다. 책으로 일을 꾸미거나 꾀하다. 책으로 세상을 바꿔 보겠습니다. singenv@naver.com Since 2013.4.16





[오래된 리뷰] <프라이드 그린 토마토>



영화 <프라이드 그린 토마토> 포스터 ⓒ유니버셜 픽쳐스



오랫동안 풀지 않았던 숙제를 푼 기분이다. 오랜 숙원을 푼 기분이다. 영화 <프라이드 그린 토마토>를 본 후 느낀 기분이다. 영화를 즐겨 보는 만큼, 추천도 받고 추천도 많이 해준다. 더할 나위 없이 좋은 영화를 추천 받아 볼 때는 마치 새로운 세상을 맛 본 것 같다. 추천해준 이가 대단하게 느껴지기도 한다. 좋은 영화 한 편에는 뭔가 있는 게 분명하다. 


나이 차이가 많이 나는 분께 영화 추천을 받는 경우가 드문데, 두 분께 받은 두 편의 영화가 생각 난다. 중학교 2학년 때 큰이모부께서 추천해주셨던 영화, <포레스트 검프>. 이 영화 덕분에 톰 행크스를 좋아하게 되었고, 이후 그의 영화를 챙겨봤었다. 그리고 <포레스트 검프>는 그야말로 내 인생 최고의 영화로 남아 있고, 앞으로도 그럴 것 같다. 


그리고 15년 이후 첫 회사의 사장님께서 추천해주셨던 영화, <프라이드 그린 토마토>. 몇 번에 걸쳐 꼭 보라고 하셨다. 하지만 나름 영화에 대한 지식이 많이 쌓였다고 자부하고 있던 터에 뜬금없이 추천을 받았던 탓인지, 아니면 회사 사장님에 대한 반발 때문이었는지, 애써 무시하고 오랫동안 보지 않았다. 그거 아니고도 봐야 할 영화가 산더미처럼 쌓여 있지 않던가? 


과연 명불허전, 또 하나의 내 인생 영화


애써 무시하고 외면했지만 너무 오랫동안 묵혀 두는 건 예의가 아니라고 생각하던 차에 무심코 보게 되었다. 가벼운 마음으로. 다 보고 나서 드는 생각은 '어른이 추천해준 영화는 반드시 봐야겠구나.' 그 오랜 경험과 연륜의 관문을 통과한 영화란, 과연 명불허전이었다. 이 영화 또한 내 인생의 영화가 될 게 분명하다.


에블린(케시 베이츠 분)은 남편한테 사랑 받지 못해 괴롭다. 더구나 양로원에 있는 숙모를 주기적으로 찾아가는데, 갈 때마다 그녀만 쫓겨나곤 한다. 여성 강좌에 나가기도 하는데 잘 되지 않는다. 이런저런 스트레스 때문에 식성은 늘어나고 여자로서 나아가 인간으로서 자괴감까지 드는 것이다. 그때 80대의 노파 닌니가 다가와 집안의 옛 이야기를 꺼낸다. 


때는 1900년대 초중반 미국의 남부. 10대 초반의 잇지는 말광량이다. 그녀는 오빠 버드를 세상에서 가장 사랑한다. 그런 버드가 사랑하는 이가 루스였는데 셋이 어울리곤 했다. 그러던 어느 날, 루스의 모자가 바람에 휘날려 기찻길로 날아간다. 버드는 모자를 낚아 채지만 발이 기찻길에 껴 기차를 피하지 못하고 죽고 만다. 이후부터 잇지는 당시 정상적인 여자의 모습을 벗어난 생활을 한다. 



영화 <프라이드 그린 토마토>의 한 장면 ⓒ유니버셜 픽쳐스



어느 날 다시 나타난 루스. 루스는 잇지를 바른 길(?)로 인도하라는 명을 받은 상태였다. 잇지에게 천천히 다가가는 그녀. 그런데 루스는 잇지를 인도하지는 못할 망정 그녀에게 빠지고 만다. 그녀의 행동은 여성스럽지만 않을 뿐이었지 굉장히 멋있었고 또 나쁘지만 의로운 행동이었다. 


하지만 루스는 부모님이 정해준 상대인 결혼을 해야 했다. 그 결혼 생활은 어땠을까? 루스를 찾아간 잇지는 루스의 얼굴에 있는 상처를 발견하고 얼마 안 있어 임신한 그녀를 데려온다. 그러곤 '휫슬 스탑'이라는 카페를 만들어 함께 운영한다. 


여성의 참정권 요구 운동과 흑인 폭력 문제


1900년대 초기, 여성은 태어나기를 여성으로 태어나 죽기까지 여성으로 존재해야 했다. 100년이 지난 지금 천지개벽할 변화가 있지만, 적어도 의식의 변화는 크지 않다. 17~18세기 유럽의 시민혁명으로 민주주의가 대두 되면서 모든 사람들에게 '참정권'이 주어졌다. 하지만 여성은 여성으로서의 역할만 강요 당할 뿐, 민주주의 세계에서 제일 중요한 권리인 참정권은 주어지지 않았다. 


이에 여성의 참정권 요구 운동이 시작된다. 각 영역에서 여성의 해방을 목표로 하는 페미니즘 운동의 일환이기도 했다. 영화의 배경이 되는 미국의 경우 1920년에 비로소 남녀에게 동등하게 투표권이 주어졌다. 남녀평등의 시발점이다. 이 영화는 그런 면에서 한 여성 또는 두 여성의 삶을, 그것도 여성 참정권이 주어진 즈음의 시대를 서사로 풀면서 그 자체로 페미니즘을 외치고 있는 듯 보인다. 


문제는 이들이 흑인들을 고용하는 것도 모자라 흑인들에게 음식을 대접하고 있다는 사실이었다. 여성이라는 한계를 뛰어 넘는 행동을 보여 왔던 잇지 였지만, 흑인들과 관련된 건 문제의 소지가 있었다. 위험했던 거였다. 결국 일이 터지고 만다. 루스의 남편이 KKK단과 함께 흑인을 문제 삼으며 테러를 가한 것이다.  


남북 전쟁 이후 남부의 백인우월주의자들에 의한 흑인 폭력이 1960년대까지 계속되었는데, 그 한 가운데 1866년 조직된 '쿠 쿠룩스 클랜(KKK)'가 있었다. 그럼에도 잇지는 흑인 친구들을 버리지 않았다. 여전히 사내 대장부 같은 포스를 뿜으며 카페를 꾸려 나갔고 모두를 지켰다. 



영화 <프라이드 그린 토마토>의 한 장면 ⓒ유니버셜 픽쳐스



평등과 자유에의 투쟁은 사랑으로 귀결된다


이 영화가 페미니즘 만을 외치는 영화가 아니라는 점이 바로 여기에 있다. 평등이라는 큰 틀 안에서 페미니즘 뿐만 아니라 흑인과 백인의 평등을 말하고 있는 것이다. 그것도 흑인 평등에 관한 법이라면 가볍게 무시하는 남부를 배경으로 말이다. 남부에서의 흑인의 삶이란 링컨의 역사적인 노예 해방 때로부터 100년이 지나가도록 나아진 게 없었다. 오히려 백인들의 위협으로 나빠지면 나빠진 상황이었다. 


단적인 예로, 백인과 흑인은 같은 학교에 다닐 수 없었고 화장실도 같이 쓸 수 없었다. 어딜 가서 무엇을 하든 웬만한 것들을 같이 이용할 수 없었다. 그런 남부에서 흑인 평등에 관한 법률이 강화되기 전인 1900년대 초중반을 배경으로, 그것도 남자가 아닌 여자가 그런 일을 한다는 것은 목숨이 몇 개라도 모자랄 지경이었다. 영화는 그런 모습을 감동적으로 그려낸다. 



영화 <프라이드 그린 토마토>의 한 장면 ⓒ유니버셜 픽쳐스



닌니로부터 일련의 이야기를 들으면서 에블린은 변화해 나간다. 처음엔 여자로서 보일 수 있는 최대한의 진취성을, 그리고 나서는 그 이상의 자유롭고 깨어 있는 발상을, 궁극적으로는 인간이 인간에게 보일 수 있는 최대한의 사랑을. 


결국 잇지가 보여준 평등과 자유에의 투쟁은 사랑으로 귀결된다고 생각한다. 그녀가 그렇게 살아가게 된 이유 중 제일 큰 게 바로 가장 사랑하는 이의 죽음이었기 때문이리라. 그 사랑을 누군가에게 후회 없이 쏟아붓고 싶었던 게 아닐까. 그 대상이 누구든지 간에. 여자와 남자, 흑인과 백인, 정상인과 장애인, 부자와 거지를 차별하지 않고 동등하게 인간으로 사랑하는 걸 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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