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리뷰] <몬태나>


영화 <몬태나> 포스터. ⓒ판씨네마



1892년 미국 뉴멕시코주, 한적한 동네에 백인 가족이 살고 있다. 그들 앞에 갑자기 들이닥친 인디언 코만치족은 말을 얻기 위해 일가족을 몰살시켜 버리고 집을 불사른다. 그 와중에 퀘이드 부인(로자먼드 파이크 분)만 살아남는다. 


한편, 대 인디언 전쟁에서 혁혁한 공을 세운 블로커 대위(크리스찬 베일 분)는 제대를 앞두고 마지막 임무로 원수 같은 옐로우 호크 추장(웨스 스투디 분) 일가를 그들의 고향인 몬태나까지 무사히 돌려보내는 일을 맡게 되었다. 


인디언 유화 정책의 일환이었던 바, 미군에게 있어서 재앙이자 도살자와도 같은 옐로우 호크를 살려서 무사히 돌려보내는 임무는 인디언에게 있어서 재앙이자 도살자와도 같은 블로커 대위에겐 죽기보다 싫은 것이었지만 군인다운 마지막과 이후를 위해 어쩔 수 없었다. 그들 일행은 출발 후 얼마 안 가 퀘이드 부인을 만나 함께 한다. 


도무지 함께 할 수 없을 조합의 일행, 그들은 도중에 백인을 도살하는 코만치족을 만나고 인디언을 학살하는 백인도살자들도 만나며 대통령의 명령도 무시하는 무자비한 백인 땅주인도 만난다. 그들은 수많은 희생 위에 오래된 증오와 폭력을 초월하는 화해와 인간 존엄의 가치를 알아가는데...


미국, 정착민과 원주민의 증오와 화해


영화 <몬태나>의 한 장면. ⓒ판씨네마



<크레이지 하트> <아웃 오브 더 퍼니스> <블랙 매스> 등의 묵직한 영화를 내놓으며 고유의 영역을 구축해 나가고 있는 스콧 쿠퍼 감독의 최신작 <몬태나>, 이 영화 역시 묵직하다. 영화는 역사상 유례를 찾기 힘들 정도로 오랫동안 치열하게 치러진 '미국 인디언 전쟁' 종료 직후 미국 백인 정착민과 미국 원주민의 증오와 화해를 그린다. 


15세기 말경, 크리스토퍼 콜럼버스를 위시한 집단의 아메리카 대륙 '재발견' 이후 백인 정착민은 기하급수적으로 늘어난다. 정착민과 원주민은 때론 협조하며 때론 반목하며 공존해 살아가는 와중 전쟁도 벌인다. 17세기 초반 이들의 전쟁이 본격화되는데, 미국이라는 나라의 성립과 국력 확대와 더불어 원주민의 멸망으로 수렴된다. 


전쟁은 1890년 말에 일어난, 이전에는 '운디드니 전투'였던 '운디드니 학살 사건'으로 사실상 막을 내린다. <몬태나>의 배경은 그 직후인 1892년이니 만큼 여전히 폭력과 증오의 기억이 모든 이를 지배하고 있었던 때인 것이다. 더군다나 서로를 향한 적대감이 극에 달하는 이들의 여정, 역설적으로 극적인 화해로의 길은 만들어져 있다. '왜'는 정복자인 미국 대통령의 명령 한마디에 집어삼켜지고, '어떻게'가 남았을 뿐이다. 


난감하고 불편한 '화해'


영화 <몬태나>의 한 장면. ⓒ판씨네마



영화는 오래된 반목과 폭력과 증오의 역사를 캐릭터와 소집단으로 함축해 보여준다. 미국의 영웅 블로커 대위, 인디언의 영웅 옐로우 호크 일가, 인디언에 의한 학살의 피해자 퀘이드 부인, 인디언 가족 학살의 가해자 윌스 병장. 이 조합은 미국이라는 나라 또는 아메리카라는 대륙의 빛이자 그림자이다. 끝없는 반목의 관계이기도 하지만, 절대 이룩할 수 없을 것 같은 관계의 조화가 가능하다는 뜻이기도 하다. 


그리고 그들 일행과 조우하는 백인 학살자 인디언, 인디언 학살자 백인, 유아독존 땅주인 백인 등이 있는데, 이들은 사실 백인 정착민이고 원주민이고 상관없이 막무가내로 죽여버리는 무법자이다. 그런 만큼 반목과 폭력과 증오의 역사를 뒤로 하고 화해의 역사로 나아가는 데 필수불가결한 '희생'의 실행자들이다. 이들 덕분에(?) 그들은 한데 뭉칠 수 있게 되었다. 즉, 영화에서 이들은 공공의 적으로 그려지는 것이다. 


화해는 장엄하고 위대하고 감동적이다. 그 어떤 화해라고 해도 말이다. 그 얼마나 실행에 옮기기 힘든 일인가. 하지만 이 경우, 난감하고 불편하다. 솔직히 어떻게 받아들여야할지 모르겠다. 대학살로 막을 내린 기나긴 전쟁의 승리자가 대외적 이미지를 위한 유화정책으로 화해의 제스처를 취한다? 


물론 영화에선 그런 이미지적 화해가 아닌 인간 대 인간으로서 존엄성을 담보로 한 진정한 화해의 모습이 담겨 있다. 하지만 그조차 들여다보면, 전장에서 목숨을 걸고 서로를 지키면서 '전우'로서의 우애나 존경심이 밑바탕되어 있는 화해라고 무방할 정도이다. 전쟁의 영웅들인 블로커 대위나 옐로우 호크 추장의 입장에서 보면, 인종만 달라졌을 뿐 이제는 떠나간 전우들을 대체할 새로운 전우를 얻은 것일 뿐이다. 


'미국인'은 누구인가


영화 <몬태나>의 한 장면. ⓒ판씨네마



장엄한 대 여정의 서사시, 와중에 적절히 등장하는 액션과 드라마 그리고 역사적 개인적 심리, 확고한 개성과 신념과 경험을 가진 캐릭터들, 캐릭터들의 천지개벽과도 같은 변화, 반목에서 화해로 가는 길, 끝없는 희생으로 쌓아올려진 길 위에 남은 이들. 영화는 이런 것들을 복잡하지 않게 단편적이면서 수평적으로 내보이며 상당한 퀄리티를 선보인다. 


중심에는 단연 블로커 대위로 분한 크리스찬 베일과 옐로우 호크 추장으로 분한 웨스 스투디가 있다. 그들은 단편적이고 수평적인 여정이 중심이 되는 영화에 출중한 입체감을 부여한다. 서로를 향한 목숨을 건 인종적 적대감에서 서로를 향한 목숨을 건 인간적 호감으로 변화발전하는 과정을, 거의 이들의 열연에 힘입은 캐릭터에 투영하고 있는 것이다. 한편 이들을 통해 미국이란 무엇인가, 미국인이란 누구인가 하는 질문을 하고 그에 대한 답을 내놓으려 한다. 


영화가 시작되기 전, 영국의 문호 데이비드 허버트 로렌스가 말한 한 구절이 보여진다. 미국인에 대한 촌철살인의 그 말은 "미국인의 정신은 근본적으로 냉정하고, 고립적이며, 절제적이다. 게다가 그들은 살인자이다. 아직까지 한 번도 누그러진 적이 없다."로, 인간다움이 파괴되는 현실을 비판해왔던 작가의 생각이 반영되어 있는 이 구절은 이 영화가 말하고자 하는 바이기도 할 것이다. 


영화가 말하는 '미국인'은 누구일까. 블로커 대위와 퀘이드 부인으로 대변되는 미국 백인 정착민일까, 이들을 포함한 미국이라는 나라 혹은 아메리카 대륙에 어떤 식으로든 거주하게 된 모든 이들일까. 누구를 가리키느냐에 따라 크게 달라질 수 있겠는데, 필자가 보기엔 후자에 가깝지 않을까 싶다. 반목, 폭력, 증오, 화해 모두 절대 일방적일 수 없기 때문이다. 또한 미국이라는 나라는 과거에도 지금도 미래에도 조화와 통합의 기치 하에 있고 그런 개념의 반석 위에 있지 않는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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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서평] <제2차세계대전>


<제2차세계대전> 표지 ⓒ교유서가



'제2차 세계대전'을 뭐라고 표현할 수 있을까. 인류 역사상 최대 규모의 전쟁, 인류 역사상 가장 큰 인명·재산 피해를 낳은 전쟁, 전 세계 인구의 4/5를 끌어 들여 5대양 6대륙에서 벌어진 전쟁, 인류 문명의 지형·질서·사회·문화·경제·기술·정치 등 모든 면을 바꿔버린 전쟁. 정녕 이 전쟁에 붙일 수식어는 끝이 없고 그 수식어들의 어마무시한 면모 또한 끝이 없다. 


그런 만큼 '제2차 세계대전'에 대한 연구와 문헌 또한 끝이 없다. 그중에서 책으로 나와 있는 걸 보면, 세 대작을 뽑을 수 있겠다. 제2차 세계대전사의 바이블이라고 해도 손색 없는 이 책들은 하나 같이 어마어마한 두께를 자랑하는 일명 벽돌책들인데 존 키건의 <2차세계대전사>(청어람미디어), 게르하르트 L. 와인버그의 <2차세계대전사 1·2·3>(길찾기), 앤터니 비버의 <제2차 세계대전>(글항아리)이다. 


너무나도 중요한 전쟁사라면 응당 벽돌책이어야 하는 바, 하지만 여기 채 200쪽도 안 되는 분량에 제2차 세계대전의 전부가 응축되어 들어가 있는 책이 있다. 게르하르트 L. 와인버그의 <제2차세계대전>(교유서가)이 그것으로, 이보다 얇은 제2차 세계대전사 책을 찾기 힘들 것이다. '교유서가 첫단추 시리즈'의 일환인 만큼, 입문서용으로 큰 맥락을 훑은 데 적격일 수 있겠다. 


1차대전의 기억 속에 2차대전이 일어난 이유는?


책은 제2차 세계대전에 관한 오래된 질문이자 중요한 질문을 던진다. '제2차'라는 건 '제1차'도 존재했었다는 증거인데, 이미 제1차 세계대전이라는 끔찍한 전쟁의 기억이 그 전쟁에서 살아남은 이들에게 생생히 남아 있는 와중에 어떻게 또다른 전쟁이 벌어졌냐는 점이다. 2차대전의 경우, 과정이나 양상보다 원인이 중요할 수 있겠다. 


저자는 아돌프 히틀러가 이끈 국가사회주의당이 1차대전에서 패배할 거라고 예상하지 못해 혼란에 빠진 독일인들에게 '신화'를 주장했다고 말한다. 독일이 전선에서 진 것이 아니라 사회주의자나 공산주의자, 유대인을 비롯한 체제전복 세력들에 의해 등뒤에서 칼을 맞았다는 것이다. 


1차대전 후 처참한 경제 상황에서 나라의 비전을 제시한 히틀러가 급부상했다는 해석도 있는데, 아이러니하게도 등뒤에서 칼을 맞았다는 신화가 당시 독일인들에게 보다 훨씬 더 합리적으로 다가갔을지도 모르겠다. 일종의 자기합리화라고 할까. 


그리하여 히틀러의 아리안족 우수혈통 이론에 이은 독일의 세계 정복 비전이 그로 하여금 총통의 자리에 올라갈 수 있게끔 하였고, 다시 한 번 전쟁을 일으킴과 동시에 체제전복 세력들의 씨를 말리면 절대 질 수 없다는 시나리오까지 나아갈 수 있게 된 것일 게다. 


독일은 왜 패망의 길로 가게 되었는가?


두 번째 오래된 질문이자 중요한 질문은 그런 독일이 반드시 이길 것으로 예상하고 전쟁을 시작한 이후, 얼마 동안은 그런 목적을 달성할 가능성이 높아 보였음에도 어떻게 연합군이 승리를 거머쥐게 되었는가? 역으로 독일을 필두로 한 추축국은 왜 패망의 길로 가게 되었는가? 하는 것이다. 


전쟁 초기 독일은 정녕 파죽지세였다. 소련과 협상을 맺어 동유럽 쪽을 신경쓰지 않아도 된 독일은 북유럽을 전격적으로 침공해 광범위한 승리를 손에 쥐고는 서유럽으로 눈을 돌려 넓게 마지노선을 구축한 당시 전 세계 최고의 육군을 자랑하는 프랑스를 쑥대밭으로 만들어버린다. 하지만 천금 같은 영국군과 프랑스군의 덩케르크 철수 작전 성공으로 독일은 완벽한 승리 뒤에 패배의 불씨를 남겨두었다. 


저자는 독일의 결정적 패착은 소련과 미국이라는 잠자는 사자의 코털을 건드린 것이라고 말한다. 히틀러는 애초의 전쟁 계획에 기초해 소련을 침공하고 머지 않아 추축국 중 하나인 일본이 미국을 침공하는데, 그가 보기에 소련은 열등한 슬라브인의 나라이고 미국 또한 인종적으로 열등하긴 마찬가지인 나라였던 것이다. 


결론적으로, 독일의 소련 침공은 전쟁이 끝날 때까지 그들을 괴롭힌 재앙이었고, 히틀러가 존경해마지 않은 무솔리니가 이끈 또 다른 추축국인 이탈리아의 능력은 함량 미달의 재앙 수준이었으며, 일본이 건드린 세계 최고의 전투력 미국의 실력은 상상을 초월하여 결국 전쟁을 끝내는 데 결정적 역할을 하는 진정한 재앙이었다. 


위에서 소개한 제2차 세계대전에 관한 바이블 중 하나인 <제2차세계대전사>의 저자 존 키건은 이런 말을 했다고 한다. "제2차세계대전의 원인과 경과와 결과를 단 한 권 분량으로 논하려는 어떠한 시도도 완전히는 성공할 수 없다." 


그렇다. 이 책 또한 제2차 세계대전을 완전히 논하지 못했다. 애초에 그럴 의도가 없지 않았을까. 그야말로 입문용으로 적합하다고 느꼈기 때문이다. 제대로 접하기 위해서는 절대적으로 엄청난 양의 문헌이 필요한데, 그걸 독파할 시간도 이유도 없는 게 현실이지 않은가. 그렇지만 반드시라고 해도 좋을 만큼 알아두어야 할 중요한 역사인 것도 사실이다. 이 책은 그런 딜레마에서 우리를 구해줄 훌륭한 구세주와 다름 아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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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서평] <고기를 끊지 못하는 사람들>




나는 오랫동안, 그러니까 결혼을 하기 전까진 식단으로만 본다면 채식주의에 가까운 생활을 해왔다. 당연히 주식은 쌀밥, 주반찬은 국(김치찌개, 된장찌개, 미역국 등)과 김치류였다. 가끔, 특식으로 삼겹살이나 닭볶음탕, 소갈비를 먹었다. 아주 가끔, 몸보신 용으로 곰탕을 먹었던 것 같다. 


확실치는 않지만 한국인의 보편적 식습관일 것이다. 거기에는 분명 상당한 육식이 함께 하지만, 보다 훨씬 상당한 채식이 함께 한다. 결혼을 하고 몇 개월 정도 아내의 친정에 얹혀 살았다. 개인적인 생각이지만, 특이한 식습관을 가진 가족이었다. 아내는 본인 가족의 주식은 쌀밥이 아닌 고기 또는 면이고, 주반찬은 그때그때 다르다고 했다. 


서양식에 가까운 식단이었던 것이다. 그렇게 몇 개월간 평생 먹었던 고기에 버금가는 고기를 먹었던 것 같다. 거의 매일매일이 고기, 넓은 의미의 육식이었다. 대신 나만큼은 쌀밥을 아예 안 먹을 수 없으니 소량의 쌀밥을 함께 먹었다. 굉장히 특이하고 특별한 경험, 나의 식문화에 대한 관점은 상당히 바뀌었다. 


이제 독립해 둘만 살아가는 지금, 여전히 나의 아내는 쌀밥을 먹지 않는다. 아니, 쌀밥이 주식은 아니다. 반면, 나는 쌀밥을 주식으로 하는 예전 식습관으로 돌아왔다. 그렇지만, 고기는 육식은 나의 영원한 갈망 대상이다. 고기를 먹으면, '정말 잘 먹었다'라는 소리가 나도 모르게 나오고 심지어 내가 남부럽지 않게 사는 것 같기도 하다. 고기를 엄청 찾지는 않지만 고기를 끊는다는 건 상상할 수 없다. <고기를 끊지 못하는 사람들>(메디치)은 나를 포함해 모든 비(非)금식자를 위한 책이다. 


육식의 시작, 육식의 신화, 육식의 경향


책은 제목에서 유추할 수 있다시피, 육식을 주체로 놓고 육식에 긍정적이지만은 않은 오히려 부정적에 가까운 생각의 발현을 내보인다. 인류는 왜 육식을 끊을 수 없는지 사실상 육식을 할 수밖에 없다는 걸 기정사실화 해놓고, 인류의 육식에의 필연적 욕망을 수백 만 년 전의 과거부터 현재, 미래까지 들여다본다. 


저자는 우리 조상이 250만 년 전에 육식 식단으로 바꿀 준비가 되어 있다고 말한다. 먹잇감을 사냥할 도구가 있었고, 소화시킬 몸이 있었다는 것이다. 왜 그렇게 변했을까? 갑작스런 기후변화가 답이 될 수 있다고 한다. 강수량이 줄어 식물들은 줄어든 대신, 동물들은 증가했다. 한편, 지금도 초식동물이 가끔 육식을 하는 것처럼 그저 칼로리를 보충하기 위해 육식을 시작했다고도 한다. 


육식은 인류가 사회적 동물인 것과 깊은 연관이 있다고 한다. 식물을 얻는 것보다 고기를 얻는 게 훨씬 더 힘들다는 걸 알고난 후, 육식은 칼로리 보충용이 아닌 권력에의 표상과 힘의 상징이 된 것이다. 육식이 주는 칼로리의 열량이 채식보다 훨씬 더 크다는 단순한 이유도 물론 존재한다. 


이는 비단 구석기시대뿐만 아니라 지금 이 순간에도 일어나고 있는 현상이라고 한다. 아시아의 많은 개발도상국에서 고기의 섭취율이 폭발적으로 증가하고 있다고 하는데, 그들이 도달하고자 하는 '선진국=서양=육식'의 등식이 성립되어 있다는 것이다. 권력의 정점에 육식이 있다는 자못 웃기지만 마냥 웃을 수만은 없는 현실...


최근 들어, 건강을 이유로 채식을 하는 사람이 굉장히 많아진 듯한 느낌이다. 한편으론 인권에 버금가는 동물권리에의 이유를 들어 육식을 하지 않는 사람도 많은 것 같고. 고기로 만들어지는 과정이 너무 더럽고 잔인해 먹을 수 없다는 사람도 많다. 하지만 정작 주변에서는 찾기 힘들거니와, 나를 포함해 주변 사람들도 육식을 하지 않는 사람을 이상하게 보는 경향이 있다. 


내 안에, 인류의 안에 250만 년 전에 시작된 고기를 끊지 못하는 DNA가 있다는 것과 상관없이, 지금 인류가 비록 많은 부분에서 진보를 이루었음에도 여전히 채식주의를 보편적인 시각으로 보지 않는 이상 누구도 고기를 쉽게 끊을 수 없을 것 같다. 


우리가 고기를 끊을 수 없는 이유


미국에 해당하는 이야기일 수 있으나, 책은 우리가 고기를 끊을 수 없는 여러 이유가 더 있다고 말한다. 육류 관련 협회는 육류 생산자들의 권리를 보호하고 육류가 더 많이 소비될 수 있는 발판을 마련하는 일을 하며 수수료로 먹고 사는데, 정부 시책과 맞물려 시행되는 그들의 어마어마한 홍보는 사람들의 인식까지 지배할 정도라고 한다. 그들은 광고는 물론 과학자들을 동원, 학술적으로까지 접근하여 우리의 가슴과 마음 깊숙이까지 육식에의 어느 정도는 만들어진 심리를 자극한다는 것이다. 


그렇지만, 그런 '만들어진 신화'를 차치하고서라도 고기가 주는 직접적이고 '만들어지지 않은 맛'에의 욕망을 인간 누구도 저버릴 수 없다고 저자는 말한다. 그 감칠맛과 지방의 조합이 환상적이라고 말하지 않을 사람이 얼마나 많겠는가? 그건 우리 몸에 내재된, 우리가 고기를 끊을 수 없는 가장 어쩔 수 없는 이유일 것이다. 


문제는, 현재 우리의 건강과 미래 후손의 세상이다. 이런 식의 육식이라면 단적으로, 여전히 심장 질환과 암 질병 발생률에 지대한 도움을 줄 것이다. 또한, 지금도 지구에 엄청난 아픔을 초래하는 가축들이 앞으로 더 늘어날 것이기에 대기 및 수질에 돌이킬 수 없는 치명타를 안길 것이다. 


저자는 크게 위의 두 이유로 육식을 줄여야 한다고 주장한다. 인류가 육식을 포기하는 게 불가능한 건 아니지만 그 길이 너무나 길고 험하다는 걸 잘 알기에, 채식주의자가 되라는 게 아닌 육식을 줄여야 한다는 절충안을 내린 것이다. 매우 적절하고, 매우 마음에 드는 결론이다. 왠만한 사람이라면 '육식을 많이 하면 몸에 좋을 게 없지만 최소한은 섭취해야 한다'는 인식이 강하게 있는지라, 그 인식에 완벽히 부합한다. 


육식을 끊을 수도 없겠지만, 끊을 이유를 잘 모르겠다. 채식주의를 하는 건 자유지만, 채식주의를 강요하고 육식주의자를 혐오하고 배척하는 건 아니지 않나 싶다. 물론, 그 반대의 행위도 말이 되지 않는다. 저자의, '여러 방면에서 본질을 명확히 인식하고, 대립하는 양 면의 이야기를 객관적으로 취합하여, 실현 가능한 절충안을 내는 방법'에 박수를 보내며 지지하고 응원한다. 그리고 그 취지에 공감하며 따르고자 한다. 마지막으로 '인류의 육식 연대기'라는 이 책의 부제와 다른 또 다른 부제를 붙이고 싶다. '육식을 줄여야 하는 이유'라고 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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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리뷰] <아이, 토냐>


영화 <아이, 토냐> 포스터. ⓒ누리픽쳐스



아주 어렸을 때부터 피겨스케이팅에 관심을 갖고 두각을 나타내기 시작한 토냐 하딩(마고 로비 분), 극악한 엄마(앨리슨 제니 분)의 폭력적인 관심과 가르침으로 두각을 나타낸다. 반면, 그 때문인지 타의 추종을 불허하는 출중한 성적과 함께 성격과 행동의 돌출적이고 폭력적인 끼를 숨기지 못했다. 


토냐는 우연히 만난 제프 길롤리(세바스찬 스탠 분)와 격렬한 사랑에 빠져 결혼까지 한다. 하지만 그는 폭력적이기 짝이 없는 광인이었다. 지옥 같은 엄마와의 일상에서 빠져 나와서 정착한 곳이 또 다른 지옥이었다. 그럼에도 그녀는 그들한테서 사랑을 느꼈다. 문제는, 삶을 파괴할 게 분명한 그의 폭력이 끝없이 되풀이 된다는 것이다. 


세계선수권대회에서 미국 최초로 트리플 악셀을 성공시킬 정도의 출중한 실력은 대중의 사랑을 불러일으킨 반면, 클래식이 아닌 하드코어 음악을 틀고 점잖치 못한 의상을 입고서 무대에 오르는 이 선수를 심사위원들은 고깝게 보지 않았다. 그럼에도 그녀는 미국을 대표하는 선수였고, 1992년 알베르빌과 1994년 릴레함메르 동계올림픽에 출전했다. 


1994년 릴레함메르 동계올림픽 직전 일어난 '그 사건'은, 그녀로 하여금 더 이상 피겨스케이팅을 타지 못하게 하였고, 그녀에게 '은반 위의 악녀'라는 지울 수 없는 낙인을 부여했으며, 미국 피겨스케이팅계 추락의 빌미를 제공했다. 


미국이 원하는 여성상


영화 <아이, 토냐>의 한 장면. ⓒ누리픽쳐스



영화 <아이, 토냐>는 1990년대 미국을 발칵 뒤집은 사건 중 하나인 '낸시 캐리건 습격 사건'을 주요 키워드이지만 루즈한 톤으로 깐, '토냐 하딩'의 삶에 대한 이야기이다. 이 거대한 사건에 가려진 토냐의 진짜 삶의 면면들 말이다. 거기에서 우리는 토냐의 모습을 통해 '그대로의 여성'과, 또한 미국과 대중과 미디어의 민낯을 들여다볼 수 있다. 


1980, 90년대 미국은 절제와 통제의 시대로 진입해 있었다. 신자유주의와 보수주의의 집합체는 여러 곳에 손을 뻗었고, 스포츠 종목 중 유독 예술적이고 여성적인 피겨스케이팅은 실력만큼 중요한 아니, 그보다 중요한 외모와 이미지가 순위를 결정하고 대표를 선발했다. 가난해서 '제대로 된' 의상을 입을 수 없었고, 치명적인 환경에서 자라와 '고상할' 수 없었던 토냐 하딩은 부적격자였다. 


그녀의 실력은 미국을 대표하고도 남았지만, 그녀의 이미지는 미국(의 심사위원)이 원하는 게 아니었던 것이다. 이전보다 훨씬 다양성과 개성이 추구되는 지금이라면 그녀의 다듬어지지 않은 거친 원석의 느낌도 충분히 강점이 되고도 남았겠지만, 그때는 더할 나위 없는 특급의 약점이 되고 말았다. 그녀는 그녀, 그대로의 여성으로 남아 있기 힘들었다. 만들어진 여성, 미국이 원하는 여성상, 보수적인 여성상이어야만 했다. 


토냐 하딩의 삶의 면면


영화 <아이, 토냐>의 한 장면. ⓒ누리픽쳐스



영화는 실화를 기반으로 하며 다큐멘터리 형식을 취하면서도 블랙 코미디 요소를 섞는 기발함을 발휘했다. 그때 그 시절의 느낌과 캐릭터를 최대한 그대로 가져와 토시 하나 바꾸지 않는 대사를 차용했지만 진지하지 않은 편집과 음악과 여러 영화적 기법을 통해 더 깊은 감정이입을 차단하기도 했다. 그러하기에 시종일관 비극적일 수밖에 없었던 토냐 하딩의 삶의 면면에 환멸과 냉소를 던지기도 한다. 


반강제적인 통합과 편입에는 필히 반발이 따를 수밖에 없다. 세계 패권 국가로서의 미국이라면 당연히 자기 입맛에 맞는 선수를 국가대표로 내보내려고 했을 터, 출중한 실력과 외모를 자랑하는 문제아 토냐는 골칫덩어리이자 고민덩어리였을 것이다. 그래서 문제 삼는 게 바로 그녀 삶의 면면들이다. 


그녀의 삶은 비극의 연속이다. 비극은 그녀의 모든 것인 피겨스케이팅에 거대한 명과 암을 선사한다. 명암은 미국에 고민을 던지고 고민 끝에 내린 결정은 다시 그녀에게 돌아와 또 다른 비극을 낳는다. 아무런 '잘못'이 없는 그녀, 자신은 아무런 '잘못'이 없다고 말하는 그녀, 그에 대한 고민을 또는 반론을 우리는 이 영화를 통해 조심스럽게나마 들어볼 수 있게 되었다. 적나라하게 내보이면서도 빠르고 단편적으로 쓸고 지나가는 듯한 영화의 면면들은 그런 조심스러운 들여다보기의 흔적들이다. 


토냐 하딩이고 싶었던 토냐 하딩


영화 <아이, 토냐>의 한 장면. ⓒ누리픽쳐스



토냐 하딩이 더 이상 피겨스케이팅을 할 수 없게 만든, 그리고 그녀에게 '은반 위의 악녀'라는 낙인을 찍어버린, 그 사건은 엉망진창이다. 하필이면 그 사건의 주인공(피해자) 낸시 캐리건은 토냐의 강력한 라이벌이자 미국을 대표하는, 미국이 원하는 여성상에 거의 완벽히 부합하는, 그야말로 토냐와 정반대의 인물이었던 것이다. 


더불어 하필이면 그 사건의 또 다른 주인공(가해자)인 괴한이 토냐의 남편과 토냐의 보디가드(라고 주장하는)와 연류되어 있던 게 아닌가. 미디어와 대중이 그런 스캔들과 가십거리를 가만히 놔둘리가 없다. 미디어로서는 그만큼 대중의 이목을 끌만한 사건이 더이상 있을 수가 없고, 대중으로선 그만큼 신나게 열광할 사건이 더이상 있을 수가 없는 것이다. 


토냐 하딩과 낸시 캐리건은 당대 최고의 인기를 구사하던 미국 피겨스케이팅계에서 미국을 대표하는 최고의 라이벌이 아닌가. 어떤 식으로든 최고의 유명인의 속절없는 추락은 하릴없는 대중, 별 것 없는 일상을 살아가는 대중, 그런 대중에게 입맛 당기는 기삿거리를 찾는 미디어에게 가장 핫한 일이다. 


이 사건을 온전히 토냐 하딩의 불우한 비극의 삶의 연속적인 행태의 정점으로 치부해버릴 수도, 미국과 미디어와 대중이 한통속이 되어 토냐 하딩을 지옥으로 이끌어 버렸다고 할 수도, 토냐 하딩의 전 남편과 보디가드가 그녀 모르게 꾸민 범죄의 결과로만 생각할 수도 없다. 진실은, 중요한 것은, 이 모든 것들 어디에서도 정작 '토냐 하딩'은 보이지 않는다는 점이다. 


토냐 하딩은 그저 토냐 하딩이었을 뿐이고, 토냐 하딩이고 싶었을 것이다. 그녀는 그저 좋아하고 잘 할 수 있는 것, 피겨스케이팅을 타고 싶었을 것이다. 그저 남들처럼 평범한 가정에서 태어나 자라고, 평범한 가정을 이루며 살고 싶었을 것이다. 그런 그녀의 바람을 이해하고 동조하고 도와준 이는 이 세상에 단 한 명도 없었다. 자신조차도 말이다. 그녀는 '은반 위의 악녀'는커녕 세상으로부터 철저히 버림받고 이용당하고 조작당한 한 여자였다. 단순히 불쌍하다는 말로는 그녀를 설명할 수 없다. 차라리 악녀가 되는 게 나았을지도 모르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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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리뷰] <플로리다 프로젝트>


영화 <플로리다 프로젝트> 포스터 ⓒ오드



명랑하고 귀여운 젊은 포르노 배우와 냉소적이고 일면 괴팍한 늙은 할머니의 특별한 우정을 다룬 <스타렛>, 세계적인 대도시 LA의 다운타운에서 벌어지는 몸 파는 트렌스젠더들의 바람둥이 남자친구 찾기 소동을 다룬 <탠저린>으로 전 세계 평단을 들었다 놓은 션 베이커가 돌아왔다. <플로리다 프로젝트>다. 


마이너한 감성을 그대로 유지한 채, 아이폰 5s로만 촬영한 <탠저린>의 혁신적인 면모를 이어받아 아이폰 6s와 35mm 필름으로만 촬영했다고 한다. 더욱이 '소외', 그중에서도 특별한 소외의 아이콘답게 이번에도 쉽게 생각하기 힘든, 소외된 이들의 이야기를 스크린으로 옮겼다. 디즈니월드 건너편 모텔에 장기투숙해 사는 이들이다. 


또한 그의 영화에는 반드시 완전한 신인이 출현하는데, <플로리다 프로젝트>에서는 신인들이 대거 출현했다. 모든 주조연 아이들이 신인이고, 그 아이들의 엄마들 또한 신인이다. 그 때문일까. '윌렘 데포'라는 위대한 배우를 캐스팅하여 완벽한 중심을 잡게 하였다. 결과는 대 성공인듯. 


귀엽고 천진난만한 친구들


영화 <플로리다 프로젝트>의 한 장면. ⓒ오드



미국 플로리다 디즈니월드 건너편 모텔 '매직 캐슬', '퓨쳐 랜드'. 여섯 살 꼬마 소녀 무니는 친구들과 짓궂은 장난을 일삼으며 일대를 활보한다. 너무나도 귀엽고 천진난만한 그녀와 친구들, 매직 캐슬의 관리인 바비(윌렘 데포 분)와 대치 중이기도 하다. 그들은 하나같이 모텔에 장기투숙하는 이들의 자식들이다. 


무니의 절친 스쿠티와 젠시, 스쿠티의 엄마나 젠시의 엄마는 제 앞가림을 하며 아이를 기르고 살고 있는 것 같은데 무니의 엄마 핼리는 그 강퍅한 성격 때문인지 일하던 곳에서 해고당하고 앞날이 막막하다. 집세도 제때 못내는 형편, 무니를 앵벌이 보내고 무니와 함께 관광객에게 향수를 팔기도 한다. 그런 생활이 언제까지 가능할까?


무니와 친구들의 짓궂은 장난은 도를 넘겨 매직 캐슬에서 멀지 않은 곳에 있는 폐허를 불태워버리고 만다. 이 심각한 장난의 여파는 무니와 핼리의 삶에 크게 작용하기 시작한다. 그들을 그나마 근근히 살아갈 수 있게 해주는 방편들이 하나하나 줄어드는 것이다. 그들 앞에는 어떤 나날이 기다리고 있을까. 


소외된 이들의 집합소, 디즈니월드 건너편


영화 <플로리다 프로젝트>의 한 장면. ⓒ오드



영화 <플로리다 프로젝트>는 정녕 사랑스럽다. 전 세계에서 수많은 사람들이 찾아오는 천국 디즈니월드가 아이들에게 완벽하게 투영되어 보는 이로 하여금 끊임없이 미소짓게 한다. 그들이 무슨 짓궂은 장난을 저지르든 그들은 아이들이지 않나. 그들이 어디에서 무얼하든 그곳이 디즈니월드이다. 


하지만 현실은 디즈니월드가 아닌 디즈니월드 건너편 모텔, 그곳은 디즈니월드 관광객들이 묵어가는 천국의 또 다른 곳이 아닌 천국의 맞은편, 지옥이라 해도 크게 과언이 아닌 곳이다. 환상의 세계를 철저히 본딴, 겉으로는 너무나도 예쁜 천국 같은 곳이지만, 속으로는 그저 평범하기 짝이 없는, 아니 소외된 이들의 집합소이다. 


미국이 자랑하는 전 세계적인 관광명소 디즈니월드, 미국 그 자체라고 해도 과언이 아닌 그곳. 철저하게 소외된 그곳은 미국이 지우고 싶은 이면일 것이다. 갈 데 없는 이들이 왜 그곳에 정착하게 되었냐고 묻는다면, 최고의 관광도시에 '빌붙어' 사는 이들이 많기 때문일 테다. 최고를 지탱하는 이들의 대다수는 항상 최하층민들이지 않은가. 


비단 미국에만 존재하는 건 아닐 테다. 미국에만 해당하는 이야기도 아닐 것이다. 이런 행태는 자본주의 체제에서 반드시 보여질 수밖에 없다. 미국이야말로 오랫동안 자본주의 세계의 왕으로 군림했던 바, 차츰 그 균열이 보이는 동시에 그 적나라한 이면도 함께 보여지는 것일 테다. 


그곳에 사는 사람들


영화 <플로리다 프로젝트>의 한 장면. ⓒ오드



영화는 사실 윌렘 데포를 중심으로 다수의 신인 배우들이 펼치는 연기 앙상블이 큰 축을 차지한다. 웨스 앤더슨의 <그랜드 부다페스트 호텔>을 연상시키는 '매직 캐슬'의 정중동 미장센, 디즈니월드라는 미국 상징의 철저히 소외된 이면의 이야기도 <플로리다 프로젝트>의 큰 축이지만 가장 중요한 건 그곳에 사는 사람들이고 그 사람들을 연기한 배우들일 것이다. 


윌렘 데포가 분한 매직 캐슬 관리인 바비는 자기 본분에 철저하다. 그는 아무리 어렵게 어렵게 겨우 방세를 내고 사는 핼리와 무니 모녀에게도 철저히 제때 방세를 받으려 한다. 하지만 한편으론 아이들의 짓궂은 장난을 모두 받아주다시피 하고 아이들을 위험으로부터 지키려 한다. 그들에게 매직 캐슬 모텔과 그 일대가 디즈니월드의 완벽한 일부이길 바라는 것일 테다. 


세상 누구보다 서로가 필요한 무니와 핼리 모녀, 그리고 무니와 절친들. 그들 모두를 신인 배우들이 연기했는데, 단 한순간도 어색하지 않았고 어설프지 않았다. 그들 중 상당수가 션 베이커 감독의 트레이드 마크가 된 현장 캐스팅 수혜자들인 점을 감안할 때 가히 압권이라고 하지 않을 도리가 없다. 그의 이전 영화들 <스타렛>과 <탠저린>에서 보여준 신인들의 자연스럽고 통통 튀는 연기와 일맥상통한다. 


우리가 그들의 삶을 보살펴줄 수도 혁명적으로 변화시켜줄 수도 없다. 하지만 관심을 가지고 사회문제로 대두시킬 필요는 있다. 그들은 단순히 최하층민이 아닌, 세계 최고의 관광명소에 철저히 소외되고 가려진 최하층민이기 때문이다. '최하층민'이 아닌 '소외되고 가려진'에 주목할 필요가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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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나간 책 다시 읽기] 트루먼 카포티의 <인 콜드 블러드>


<인 콜드 블러드> 표지 ⓒ시공사



1959년 11월 15일, 미국 서부 캔자스 주의 작은 마을 홀컴에서 클러터 일가족 네 명이 근거리에서 엽총에 맞아 무참히 살해되는 사건이 발생한다. 그들은 모두 밧줄에 묶여 있었으며 각기 다른 곳에서 발견되었다. 하지만, 단서를 찾기 힘들었던 바 확실한 증거를 찾기 힘든 완전범죄에 가까웠다. 


캔자스 주에서 명성이 자자한 클러터의 집인 만큼 범인들이 훔쳐간 게 엄청날 거라는 예상과는 다르게, 집에서 없어진 건 고작 4~50달러의 현금과 라디오, 만원경 따위였다. 이 믿기지 않는 살해 동기는 불가능에 가까운 범인의 자백을 통해서만 들을 수 있을 터였다. 이에 범인들은 캔자스 주로 다시 돌아오는 모험을 저지르는데...


한편, 홀컴 마을은 이 사건 이후 범인이 잡힐 때까지 서로 못 믿고, 무서워서 죽을 만큼 서로 겁주는 흉흉한 동네가 되었다. 몇몇은 마을을 떠났고, 떠나지 않은 사람들은 전에 없이 철두철미하게 집을 지키려 했다. 캔자스 주 수사국에서 가든시티 책임자이자 서부 캔자스의 상당 부분을 담당하고 있던 앨빈 애덤스 듀이는 이 사건으로 골머리를 앓는다. 일찍이 본 적도 없는 극악한 사건, 하지만 길이 보이지 않는다. 


그 유명한 <티파니에서 아침을>의 저자 트루먼 카포티는 클러터 일가족 살인 사건이 일어난 1959년 11월 어느 날 '뉴욕 타임스'의 짤막한 기사를 읽고 흥미를 느껴 직접 조사하기 위해 친구 하퍼 리(<앵무새 죽이기> 저자)와 함께 홀컴으로 향한다. 이후 6년 만에 미국은 물론 전 세계를 뒤흔들 작품을 내놓았으니 <인 콜드 블러드>다. 


이상적인 희생자, 아웃사이더 가해자


저자는 마치 창조한 듯한 이상적이고 완벽한 가족인 희생자 클러터 일가를 다루는 데 작품 초중반을 할애한다. 그들은 그렇게 살해당해서는 안 되었고 그렇게 살해당할 이유가 전혀 없었다. 캔자스 주에서 보기 드물게 존경받고 올곧은 삶을 살아가는 클러터 일가, 그들은 왜 끔찍한 죽임을 당해야 했는가. 


그렇지만 카포티는 그들 희생자보다 가해자인 딕과 페리에게 천착한다. 평범하기 그지 없는 가정에서 태어나 훌륭한 학창 시절을 보냈음에도 평생 범죄를 저질러 왔던 딕, 그에 반해 불우하기 짝이 없는 어린 시절과 청년 시절을 보냈음에도 풍부한 감수성을 유지했지만 그 때문에 돌이킬 수 없는 짓을 저지른 페리. 


딕은 몰라도 페리야말로 특별한 케이스이다. 그의 살인에는 사회적 맥락이 맞닿아 있는 것이다. 불우한 가정환경, 체로키 인디언 엄마와 백인 아빠 사이에서 태어난 혼혈이라는 정체성, 작은 키에 유독 짧은 다리의 신체, 거기에 사고를 당해 한쪽 다리를 절기까지 하는 장애인. 그야말로 그는 철저한 아웃사이더였다. 


저자는 나름 중립을 지키며 죽은 사람들, 죽인 사람들, 죽인 사람들을 쫓는 사람들, 남겨진 사람들, 그밖의 주변 사람들의 이야기를 문학적 감수성과 철저하게 객관적인 자료와 인터뷰를 혼합해, 지극히 주관적인 논픽션을 내놓았지만, 그와 철저히 닮은 듯한 페리에게 끌릴 수밖에 없었던 듯하다. 그러다 보니 보는 이들도 페리에게 끌리고 일말 일순간 동정을 하게 되는 것이다. 


이 작품이 나온 지가 50년이 지나는 동안, 페리에게서 영감을 받은 범죄자를 등장시킨 콘텐츠들이 수없이 쏟아져 나왔다. 사회적으로 철저히 버림받은 이가 정신분열증을 일으켜 자신도 모르게 끔찍한 일을 저지른다는 내용. 이 괴물을 만든 이는 누구인가, 이들을 어떻게 대해야 하는가 라는 주제. 무작정 동조하기도, 그렇다고 무작정 방치하고 무시하기도 힘들다. 이 책의 위대한 점이 바로 그 부분을 굉장히 다양한 관점과 소견과 견해와 감정을 혼합해 쉽게 풀 수 없게 했다는 점일 테다. 생각할 거리를 던진다.


'논픽션 노블'로 들여다보는 1960년대 미국


<인 콜드 블러드>는 저자와 맞닿아 있는 페리를 들여다보며 객체로서의 개인이 아닌 집합체 사회 안에서의 개인을 끄집어내어 경종을 울리는 한편, 1950~60년대 미국 사회를 해부하며 사회 자체에 경종을 울린다. 일면 평화로운 시대, 제2차 세계대전과 한국전쟁을 지나 베트남전쟁 사이의 화려한 시대, 중산층이 비상하고 히피문화가 활황하는 와중 냉전 한복판에서의 세계 최강대국 미국. 


모든 것이 완벽해 보이는 이 시대, 이 사회를 저자는 홀컴이라는 작은 마을로 수렴시켜, 명망 높은 한 가족에 닥친 끔찍한 사태가 온 동네를 휩쓸어가는 모습을 포착한다. 일면 단단해 보였던 사회의 구조물은 실상 아주 부실한 구조로 쌓아올려졌던 것이다. 그들 모두 갈팡질팡 어쩌질 못한다. 


카포티는 이 책을 오로지 사실만으로, 또는 완전한 픽션만으로 만들 수 있었을 것이다. 하지만 정작 '논픽션 노블'이라는 전혀 새로운 장르를 창조하면서 거짓으로 진실을 들여다보기도 하는 모순이 공존하는 이와 같은 책을 쓴 이유는, 페리로 대표되는 개인과 홀컴으로 대표되는 사회를 복합적으로 효과있게 그러면서 임팩트있게 들여다보기 위해서가 아니었을까. 


이 작품을 통해 참으로 여러가지 생각을 할 수밖에 없다. 인간-개인-사회-시대라는 전체적이고 추상적인 개념부터, 삶-죽음이라는 핵심 가치의 개념을 지나, 살인-수사-사형이라는 범죄 특성상의 전문 개념까지 아우르다 보니, 살아가다 맞닦드리는 생각의 굉장히 많은 부분을 이 작품으로만 충당할 수 있는 것이다. 


<인 콜드 블러드>의 부제는 '일가족 살인사건과 수사과정을 다룬 진실한 기록'이다. 우선, 일가족 살인'사건'을 다뤘다. 범죄소설의 외형이다. 다음으로 '수사'과정을 다룬다. 개인과 사회를 들여다보는 개념의 일환이다. 마지막으로 '진실'한 기록이다. 아웃사이더 저자에 의한 아웃사이더 페리를 위한, 거짓같은 진실과 진실같은 거짓이 오가는 기록이다. 이 책과 함께 트루먼 카포티가 <인 콜드 블러드>를 완성하기까지의 과정을 그린 영화 <카포티>를 보면 더 많은, 더 깊은 이야기를 들을 수 있을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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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래된 리뷰] 벤 애플렉의 <아르고>


영화 <아르고> 포스터. ⓒ워너브라더스코리아



2500년 동안 이란 땅은 '샤'라는 이름의 왕들이 통치했다. 1950년 이란 국민들은 세속주의 민주주의자인 무함마드 모사테크를 수상으로 선출했다. 그는 영미(英美)의 석유 보유를 국영화하여 국민들에게 이란의 석유를 돌려주었다. 그러나 1953년 영미는 쿠데타를 꾀하여 모사테크를 퇴위시키고 레자 팔레비를 취임시켰다. 


팔레비는 부유와 방종으로 유명했다. 반면 국민들은 굶주렸다. 그는 무자비한 국가 치안 정보국 '사바크'를 통해 권력을 유지했다. 고문과 공포의 시대가 시작된 것이다. 그 후 그는 이란을 서구화시키기 위한 운동을 시작했고 국민들은 격분했다. 결국 1979년 이란 국민들은 팔레비를 타도했다. 


추방되었던 종교지도자 아야톨라 호메이니가 이란을 통치하기 위해 귀환했다. 이란은 보복과 암살, 혼란의 시대로 빠져 들어갔다. 한편, 팔레비는 미국으로의 망명을 허락받았다. 이에 이란 국민들은 미국 대사관으로 몰려가 팔레비가 귀환하여 재판을 받고 교수형에 처해지길 요구했다. 


미국인의 이란 탈출을 위한 가짜 영화 만들기


미국인의 이란 탈출을 위한 가짜 영화 만들기. ⓒ워너브라더스코리아



영화 <아르고>의 2분 여의 프롤로그에 불과한 내용이지만, 영화를 제대로 짚고 이해하기 위해선 반드시 알아야 할 역사이다. 이른바 '이란 혁명', 국민들의 손으로 왕조를 타도하고 공화정을 수립한 후 이어지는 일련의 행동이다. 팔레비를 향한 분노는 미국을 향한 분노로 바뀌었고, 곧 미국 대사관을 향한 분노로 바뀐다. 


미국 대사관은 점령 당하고 60명이 넘는 미국 시민들은 인질로 잡히고 만다. 한편 미국 대사관 직원 6명은 극적으로 탈출해 테헤란에 있는 캐나다 대사 집으로 피신한다. 하지만 머지 않아 혁명수비대는 6명이 탈출했다는 사실을 알게 되고 집집마다 '사냥'을 시작한다. 이에 미국 CIA는 차라리 안전한 인질들보다 캐나다 대사 집에 피신해 있는 직원들을 탈출시키기로 결정한다. 


하지만 그 어떤 작전도 최악을 벗어나지 못하는 가운데, 탈출 전문가 토니 멘데스(벤 애플렉 분)는 아들과 통화를 하며 영화 <혹성탈출>을 보다가 영감을 얻는다. 가짜로 영화를 찍는다 하고, 그 6명을 캐나다인 로케이션 스카우터로 위장시키고자 한 것이다. 곧 상부의 허락을 받고 본격적인 가짜 영화 만들기에 돌입하는데...


영화는 날카로운 연출력과 유머를 장착해 미국이라는 나라의 여러 모습과 이란 혁명수비대를 통해 보는 폭력적 민족주의의 모습, 그리고 할리우드 풍자와 드러나지 않는 개인의 위대함 등을 두루두루 살핀다. 이 모든 걸 지나치더라도 가짜 영화 제작과 극적 탈출의 실화를 감상하는 것만으로도 충분한 재미와 가치를 지닌다. 


미국을 향한, 이란을 향한 서슴없는 비판과 풍자


미국을 향한, 이란을 향한 서슴없는 비판과 풍자. ⓒ워너브라더스코리아



미국은 세계 경찰을 자임하며 전 세계를 '정리'하려 한다. 그것이 그 나라와 그 나라 국민들을 위함이고 전 세계를 위함이라고 말한다. 하지만 결국 모든 건 미국을 위한 일일 테다. '주 이란 미국 대사관 인질 사건'은 이란의 혁명수비대에 의한 치명적 위험에서 미국 시민을 탈출시키는 게 주요한 사정이지만, 실상 거슬러 올라가면 미국에 의한 치명적 개입과 오판에서 시작된 것이다.


영화는 그런 미국의 이면을 이란 여성의 기자회견 장면을 통해 상당히 직접적으로 비판한다. '미국은 인권을 옹호한다지만, 실상 인권을 옹호하지 않을 뿐만 아니라 모든 나라에서 인권을 침해합니다.' 그리고 미국 시민 사회는 이란이라는 나라뿐만 아니라 일반 이란인을 향한 분노를 서슴지 않고 표현한다. 이에는 이, 눈에는 눈이라는 것인가. 그 즉시 미국은 그들이 비난하는 이란과 다를 바 없어진다. 


한편, 이란의 폭력적 민족주의를 향한 비판은 영화 전반에 퍼져 있다. 그들이 인질로 잡고 있는 수십 명의 미국인들과 그들이 사냥하려 하는 6명의 미국인들 또한 미국의 입장을 조금도 반영하지 못한다. 사실상 그들은 잘못이 없는 것이다. 그런 그들에게 프레임을 씌워 미국을 협박하는 건 애초에 하지 말아야 할 잘못이다. 


잠깐이지만 등장하는 이란에서의 'KFC'는 할리우드와 함께 미국 그 자체라고도 할 수 있는 상징이다. 문화적 점령의 첨병이라고 할까. 이란은, 이란인들은 투철한 반미 감정을 지니며 미국을 소비한다. 영화는 그들의 무지에 의한 내부 모순을 신랄하게 비판하는 것이다. 


씁쓸함을 동반하는 위대한 개인의 탄생


씁쓸함을 동반하는 위대한 개인의 탄생.ⓒ워너브라더스코리아



할리우드와 합작해 가짜 영화를 만드는 프로젝트에 착수한 CIA, 저명한 제작자와 함께 해야 하는 건 물론이다. 가짜이지만 진짜 같아 보여야 하기 때문에, 그 어떤 영화를 제작하려 할 때보다 많은 신경을 써야 한다. 즉, 훨씬 더 많은 사람들을 속여먹여야 한다. 그렇지만, 그건 그들에게 그리 어려운 일이 아니다. 그들이 매일같이 하는 일이란 게 사람들 속여먹는 것이기 때문에. 


아는 사람은 안다. 수많은 영화들이 제작 직전에 엎어지고, 심지어 제작이 되었으면서도 개봉되지 못한다는 걸. 그럼에도 수많은 사람들이 모이고, 엄청난 돈이 몰려드는 곳이 영화판 할리우드이다. 그러므로 '가짜 영화'란 존재하지 않는다. 아니 '진짜 영화'라는 게 존재하지 않으므로 '가짜 영화'가 존재하지 않는다고 하는 게 맞다. 


결국 작전을 성공시키는 건 다름 아닌 '개인'들이다. 미국이라는 세계 경찰도 아니고 CIA라는 세계 최고의 공작기관도 아니며, 할리우드라는 세계 최고의 영화판의 힘도 아니다. 적어도 영화에서는 토니 멘데스라는 개인의 용단과 그와 함께 한 할리우드 제작자의 믿음과 인내이다. 때로 개인은 사회, 국가, 조직보다 힘이 쎄다. 


영화가 궁극적으로 말하고자 하는 건 이와 같을 것이다. 영화가 비판하는 것들인 미국이나 이란이나 할리우드의 실체는 개개인의 삶의 향상이나 긍정적 도움에 있는 게 아니라 그들 각자도생에 있다는 사실. 더 이상의 정의는 없고, 더 이상의 긍극적 인권은 존재하지 않는다. 위대한 개인의 탄생과 부각은 씁쓸함을 동반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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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리뷰] <우리의 20세기>


'아트버스터'라 부르기 충분한 영화 <우리의 20세기>. ⓒ그린나래미디어㈜



1979년 미국 서부 산타 바바라, 약관 15세 제이미(루카스 제이드 주만 분)는 40살 많은 엄마 도로시아(아네트 베닝 분)와 함께 산다. 하숙하는 사람이 둘 있는데, 20대 애비(그레타 거윅 분)와 40대 윌리엄(빌리 크루덥)이 그들이다. 그리고 매일 같이 제이미 방에 몰래 놀러와 자고 가는, 제이미의 친구 17세 줄리(엘르 패닝 분)가 있다. 


각자 소소한 일을 겪으며 살아가는 그들, 제이미 덕분에 또는 때문에 뭉친다. 제이미가 더 나은 사람이 되었으면 하는 바람에서, 도로시아가 혼자서는 자신이 없으므로 애비와 줄리에게 도움을 청한 것이다. 제이미를 보살펴 주고 가르쳐 주라고 말이다. 즉, 제이미를 함께 키우자는 뜻이었다. 


애비와 줄리는 지극히 열려 있는 여성으로서 남자가 알아야 할 것들을 제이미에게 알려준다. 하지만 그 나이대에 비해선 굉장히 열려 있는 여성인 도로시아가 보기에도 그건 굉장히 급진적이거니와 '잘못된' 방향인 것 같다. 이해하고 받아들이려고 해도, 머리로는 가능한대 가슴으로는 불가능한 세대 간의 간극처럼 말이다. 그녀가 보기엔 제이미가 전에 없이 빗나가고 있는 것 같다. 어쩌면 좋을까. 


그들이 보여주는 20세기


그들이 보여주는 20세기는 어떨까. 우리는 왜 그들의 20세기를 봐야 하는가. ⓒ그린나래미디어㈜



영화 <우리의 20세기>는 나이도, 세대도, 성도, 삶의 방향이나 지침도, 생각도 완전히 다른 다섯 남녀를 통해 지나간 지 한참이나 되어버린 20세기의 면면을 보여준다. 21세기도 어언 20년 가까이 지난 지금에 와선 한꺼번에 '옛날'로 치부해버리곤 하는, 치부해버릴 수밖에 없는 20세기를 들여다보는 건 쉽지 않은 일이다. 


감독의 자전적인 이야기라는 이 영화는 마지막을 장식하는 대사 한 줄이 그 목적을 말해준다. "난 아들에게 할머니가 어떤 사람이었는지 설명하려 할 것이다. 그러나 그건 불가능할 것이다." 제이미가 감독의 어린 시절을 비추는 거울이었을 게 분명한 만큼, 그의 어머니 즉, 도로시아가 어떤 사람이었는지를 그의 아들에게 보여주고자 하는 의도가 아닌가 싶다. 그러다 보면 자연스레 20세기가 보이는 것이다. 


영화는 그래서 개개인의 '소서사'를 당대를 구성하는 가장 중요한 구성요소들과 함께 배치해 보여주고 설명하는 구조를 택했다. 1920년대생 도로시아, 1940년대생으로 추측되는 윌리엄, 1950년대생 애비, 그리고 1960년대생들인 줄리와 제이미까지. 1979년 당시까지, 오롯이 20세기를 관통하는 세대들이다. 얼핏 다큐멘터리적인 장면들인데, 미장센이 상당히 감각적이라 지루할 새가 없다. 


1980년대 이전, 진정한 '자유'의 시대


그들이 보여주는 진정한 20세기는 1980년대 이전의 진정한 자유의 시대이다. ⓒ그린나래미디어㈜



영화에도 나오지만 1979년은 적어도 미국에 한해서 '소비와 환락의 시대'의 마지막이다. 당시 지미 카터 대통령이 대대적인 연설로 '절제와 통제의 시대'로 진입하게 된 것이다. 이듬해 출현한 로널드 레이건 대통령 때부터 공식적으로 시작된다. 영화가 말하는 '20세기'란 1979년까지를 말하는 것일 테다. 그 이후 다섯 사람의 행보를 간략히 들어보면, 모두 마치 한 사람인 양 획일화된 삶이다. 


그런 측면에서 1980년 이후의 삶을 들여다보며 '너희의 20세기'란 제목을 붙여도 되겠다 싶었다. 사회문화비평적으로 상당한 소구점이 있을 것 같다는 생각을 해본다. 물론 이 영화에도 그런 소구점들이 눈에 띈다. 가장 눈에 띄는 건 다름 아닌 '페미니즘'으로, 원제가 '20TH CENTURY WOMEN'인 만큼 세 여성의 생각이 얽히고 부딪히고 맺어지는 부분들이 자주 등장한다. 


그 사이 사이 세대와 문화와 환경에서 비롯된 여러 차이들이 산재한 모습을 볼 수 있다. 키움을 당하는 제이미뿐만 아니라 키움을 행하는 도로시아, 애비, 줄리도 모두 이 거스르기 힘든 차이들로 혼란스러워 하고 불편해 하고 힘들어 한다. 그럼에도 그들이 나아갈 수 있었던 건 1979년까지의 진정한 자유의 시대 20세기 덕분이었다. 그들은 서로를 이해할 순 없어도 인정할 준 알았다. 거기에 편견 따윈 존재하지 않았다. 


영화에 활기를 불어넣은 장치들


다양한 영화적 장치들이 영화를 수놓는데, 하나같이 영화의 품격을 높이는 데 혁혁한 전과를 올린다. ⓒ그린나래미디어㈜



자칫 지루할 수 있는 영화에 각종 장치들이 활기를 불어 넣어주었다. 위에서 언급한 개개인의 '소서사'를 당대를 상징하는 중요 요소들과 함께 다큐멘터리적으로, 그러나 감각적으로 보여준 게 가장 큰 장치라 하겠다. 오히려 시대가 아닌 개인이 보이고 기억에 남는 훌륭한 의도적 역효과를 일으켰다. 


여기에 자주 선보이며 항상 같은 느낌으로 보여주는 장치들에 빨리 감기, 홀로그램, 미래몽환적 음악 등이 있다. 이 장치들을 한 번에 선보일 때가 종종 있는데, 현실에서 벗어나 차를 타고 어디론가 가는 길을 묘사할 때다. 누가 보아도 인상적일 텐데, 누군가에겐 최고의 장면으로 남을 수도 있겠다. 평생 몇 번 느껴볼까 말까한 진정한 자유가 그런 모습을 하고 있지 않을까.


우린 지금 어떤 시대를 살고 있을까. 그저 '20세기'라고 통칭하는 20세기도 이토록 수많은 점점들로 나눌 수 있고 수많은 시대들로 나눌 수 있을진대, 21세기도 반드시라고 할 만큼 그러한 면면들이 있지 않겠나. 그렇지만 당대는 모른다. 아직 역사의 한 모퉁이로 진입하지 않았기에. 나는 바란다. '우리의 21세기'에 한순간이라도 진정한 무엇에서 살았던 적이 있었으면 하고 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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冊으로 策하다. 책으로 일을 꾸미거나 꾀하다. 책으로 세상을 바꿔 보겠습니다. singenv@naver.com Since 2013.4.16




[리뷰] <윈드 리버>


영원한 설원의 그곳 '윈드 리버'에서 벌어진 살인 사건. ⓒ유로픽쳐스



2015년 <시카리오: 암살자의 도시>, 2016년 <로스트 인 더스트>로 칸을 사로잡으며 전 세계에 이름을 알린 테일리 쉐리던. 그는 이 두 편의 웰메이드 영화 각본을 책임졌다. 아무래도 영화 스텝 중에선 연출자가 차지하는 비중이 가장 클 텐데, 각본이 각광받는 영화가 종종 있다. 이야기가 주는 힘이 어마어마한 경우가 그렇다. 


테일리 쉐리던이 다시 1년 만에 자신의 이름을 올린 영화로 찾아왔다. 이번엔 각본에 더해 연출까지 책임진 <윈드 리버>다. 미국 서부 와이오밍주에 위치한 '윈드 리버'라는 곳에서 벌어진 살인사건을 중심으로 꾸려지는데, 그곳은 인디언 보호구역이거니와 끝없는 설원이 펼쳐져 있다. 8월까지 눈이 내려 쌓인다. 


아무래도 사건이 단순히 사건으로 끝나지 않을 것임이 분명할듯, 상징과 비유가 보는 이의 머리와 가슴을 뒤흔들고 후벼팔 것이다. 대략의 분위기만 훑어보아도 전작 두 편의 향기가 나는 것 같다. 우린 이 영화에서 미국의 속살을 보게될 여지가 크다. 그리고 거기에서 거대한 두려움이나 불안, 희망의 작은 불씨를 느낄 것이다. 


아픔과 슬픔, 그리고 희망


설원에 파묻힌 아픔과 슬픔들, 그럼에도 희망의 불씨는 살아 있다. ⓒ유로픽쳐스



끝없이 펼쳐진 설원의 한밤중, 피투성이 얼굴의 한 여인이 맨발로 달린다. 무엇인가로부터, 누군가로부터 도망치는 듯하다. 그녀는 어디까지 갈 수 있을까. 그곳은 일개 사람이 할 수 있는 게 없는 윈드 리버 아닌가. 한편 야생동물 사냥꾼 코리(제레미 레너 분)는 옛 장인어른 농장에서 소가 피습당했다는 속보를 접하고 윈드 리버 인디언 보호구역으로 향한다. 그 원인을 찾아 근처를 수색하던 도중 여인의 시체를 발견한다. 


그 여인은 인디언 나탈리, 코리도 잘 안다. 다름 아닌 3년 전 잃은 딸의 절친이었다. 그런데 나탈리는 성폭행을 당한 뒤 설원의 한복판에서 죽어 있다. FBI의 허가가 필요한 일이다. 가장 근처에 있는 FBI 요원 제인(엘리자베스 올슨 분)이 달려온다. 하지만 그녀는 신참이거니와 윈드 리버에 대해서 아는 게 아무것도 없다. 


코리가 앞장서 그녀를 이끈다. 코리에게도 아픈 과거가 있는 만큼, 나탈리의 아빠와 약속한다. 반드시 그 놈을 잡겠다고, 잡아서 죽여버리겠다고, 아주 고통스럽게, '윈드 리버'만의 방법으로. 제인과 코리, 코리와 제인의 공조 수사가 시작된다. 그 끝에서 형용할 수 없는 아픔과 슬픔이 반길 준비를 마쳤다. 


그럼에도 희망을 언급할 수 있는 건, 아픔과 슬픔을 고스란히 간직한 채 그래도 살아가고자 하는 사람들 덕분이다. 또한 그런 그들의 아픔과 슬픔을 이해하고 함께 울어줄 수 있는 사람들 덕분이다. 영화는 사회에 만연한 '잔인'에 창끝을 겨누는 것에 초첨을 맞추면서도, 잔인하지 않은 사람들에게 조용한 응원의 메시지를 전달한다. 


설원과 미국


이 설원은 미국 그 자체다. 단적으로, 변화를 기대할 수 없지 않은가. ⓒ유로픽쳐스



설원은 자연이 줄 수 있는 최악의 조건 중 하나다. 바다에서 생존하는 것, 사막에서 생존하는 것 모두 어느 정도 가능하다. 하지만 설원은 이것들과는 또다른 차원이다. 설원에 오아시스 따위가 있겠는가. 맹렬한 추위의 설원에서 춥지 않을 방법을 찾을 수 있겠는가. 시시각각 변하는 사막과 바다와 달리, 변함없는 설원 아래 무엇이 있는지 알 방도가 있겠는가. 눈이 와서 더 쌓이면 쌓였지 긍정적인 변화를 기대할 수 없다. 


설원이 상징하는 건, 이제까지 테일리 쉐리던이 취한 스텐스를 볼 때 '미국'이다. 더이상 변화를, 발전적이고 건설적인 변화를 기대할 수 없는 미국의 축소판이다. 그렇다면 왜 와이오밍주 윈드 리버일까. 인디언 보호구역말이다. 영화는 미국에 남은 유일한 희망이 거기에 있다고 말하고 있는 것 같다. 


코리는 비록 인디언이 아닌 백인이지만 100년 전에 선조가 건너와 거의 인디언이나 다름 없는 생활을 영위하고 있고 그들의 생각을 완전히 이해하고 있다. 그럼에도 몇몇 인디언들은 그를 완전히 받아들이지 못한다. 한편 코리와 달리 그곳에 일을 하러 온 백인들이 있다. 그들은 인디언들을 이해하기는커녕 그곳의 자연도 이해하지 못한다. 


이런 불이해는 백인과 인디언만의 문제 따위가 아니다. 이는 일종의 상징이고, 미국에서 이런 모습은 전 세대와 전 인종과 전 계급 간에서 볼 수 있다. 그러하기에 영화에서 FBI 신참요원 제인의 행동이 중요하다. 그녀는 단순히 여러 영화에서 볼 수 있는 어리바리 신참의 클리셰가 아닌 것이다. 그녀야말로 '희망'이다. 그녀가 얼마나 이 자연을 이해하고 인디언들을 존중하고 그 모든 것에 공감을 할 수 있는지. 


이해와 공감의 부재


이 모든 것의 시작은 다름 아닌 '이해와 공감의 부재'다. 쉬우면서도 어려운... ⓒ유로픽쳐스



설원에서 사람 죽이는 일은 아주 간단하다. 직접적으로 위해를 가할 필요가 없다. 기절시키고는 제대로 된 장비 하나 없이 설원 한가운데에 버려두면 된다. 멀리 못가 죽고 말 것이다. 그런데 생각해보라. 그런 곳이 비단 설원뿐이겠는가. 어느 사회에서라도 가능한 일이다. 우린 그런 사회에서, 그런 나라에서 살고 있다. 미국만의 얘기가 아니다. 세계는 긍정적인 방향으로든 부정적인 방향으로든 서로를 따라간다. 


모든 건 이해와 공감의 부재에서 비롯된 것처럼 보인다. 수없이 오랫동안 그곳을 지키며 살아가는 사람들에 대한 이해와 공감의 부재는, 아무 준비와 생각 없이 현장에 온 제인의 모습만 봐도 충분히 알 수 있다. 또한 아무것도 없는 그곳에서 일하는 사람들에 대한 이해와 공감의 부재는, 영화의 내용과 메시지 특성상 나와 있지 않지만 조금이라도 알 수 있을 것 같다. 


과연 친히 나서서 악을 처단하려는 코리의 행동은 옳은 것일까. 물론 그가 행하는 처단 방법은 인간에게 절대적 최악의 조건인 '설원'이라는 자연에 맡기는 것일 테다. 그럼에도 그런 생각 자체가 괜찮은 걸까. 영화가 그를 희망에의 연결고리로 포지셔닝해도 좋은 것일까. 판단하기 힘들지만, 그만큼 세상이 절망적이라는 반증이기도 하다. 


이거 하나만 기억해도 충분하다. 그 설원에서 죽어간 그들, 얼마나 아팠을까. 얼마나 괴롭고 힘들었을까. 그 아픔에 공감하고 기억하고, 그 아픔에 슬퍼하는 사람들을 이해하는 것. 희망의 작은 불씨일지 모르지만, 결코 꺼지지 않을 불씨이기도 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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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리뷰] <워 머신>


브래드 피트의 플랜 B와 넷플릭스의 만남, 불과 10년도 채 되지 않은 과거의 이야기로 궁금증을 일으킬 만한 영화 <워 머신>. ⓒ넷플릭스



2001년 9월 11일 미국 뉴욕 한복판, 세계 중심의 상징 세계무역센터 쌍둥이 빌딩이 무너진다. 미국 정부는 이를 민간 항공기를 납치한 이슬람 테러단체에 의한 사건이라 규정, 부시 대통령은 이 테러의 배후에 오사마 빈 라덴을 지목, 그가 숨어 있는 아프가니스탄 탈레반 정권에 경고, 탈레반 정권이 이를 거부하자 침공·함락한다. 이어 반 탈레반 정권인 과도정부를 수립한다. 하지만 미국은 2003년엔 이라크를 침공해 역시 과도정부를 수립하는 등 '테러와의 전쟁'을 이어간다. 


전쟁이 8년 차로 접어든 2009년, 스탠리 맥크리스털 4성 장군이 아프가니스탄 주둔 미군 사령관으로 부임한다. 그는 아프가니스탄 민간인 피해 최소화를 강조하며, 병력 증원에 통해 전쟁을 종결시킬 것을 선언한다. 하지만 당시 미국 대통령이 버락 오바마와의 마찰과 각종 구설수로 1년여 만에 경질된다. 


다분히 문제적 인물인 이 사령관과 문제적 구도의 이야기를 《롤링스톤》지의 저널리스트 마이클 헤이스팅스가 논픽션 <디 오퍼레이터스>로 훌륭하게 풀어냈다. 다름아닌 그 책을 브래드 피트의 플랜 B가 영화 <워 머신>으로 제작했다. 거기에 봉준호 감독의 <옥자>처럼 넷플릭스로 공개했다. 주인공 글렌 맥마흔 장군은 브래드 피트가 직접 열연했다. <바스터즈: 거친 녀석들>과 <퓨리>를 잇는 전쟁, <머니볼>을 잇는 리더십, <빅쇼트>를 잇는 미국 풍자를 총집합시켰다. 과연 구슬을 잘 꿰매었을지.


'완벽한' 승리를 원하는 '완벽한' 사령관


맥마흔 장군은 완벽하다. 완벽한 만큼 완벽한 승리를 원한다. 하지만 그 자신 우스꽝스럽고 부하들은 일을 못하며 결정적으로 대통령에 반한다. ⓒ넷플릭스



대략의 스토리를 알고 있는 바, 결론적으로 말하자면 구슬을 그리 잘 꿰매진 못한 것 같다. 대신 각 구슬들이 평균 이상의 재미를 선사한 것만은 분명하다. 특히 이 영화가 기본 골자로 말하고자 하는 미국 풍자 블랙코미디 부분에서 나쁘지 않은 결과를 선사한다. 그건 다름 아닌 브래드 피트가 분한 글렌 막마흔 장군에서 시작해 끝난다. 


출중한 경력, 꾸준하고 철저한 자기관리, 부하를 살피는 세심함, 최고의 자리에 걸맞는 겸손함까지 갖춘 완벽한 사령관 맥마흔은, 우스꽝스러운 표정과 몸가짐과 행동거지를 가졌다. 모두가 정상적이고 일반적인 것과 다르게 그만 유독 튄다. 그건 아프가니스탄 전쟁을 바라보는 그의 시선에도 고스란히 나타난다. 


미국 정부는 오래토록 의미 없이 끌고 있는 아프가니스탄 전쟁을 아무 탈 없이 이대로 진행하다가 '흐지부지' 끝내고 싶다. 자신과 결을 완전히 달리 하다시피 하는 부시 전 정권에 의해 시작된 전쟁이기도 하기 때문인데, 어쨌든 맥마흔은 그런 미국 정부의 의중을 대신해야 하는 의무가 있는 것이다. 그저 생각 없이 지내다 오면 되는 것이다.


하지만 맥마흔은 아프가니스탄 현지 주민 피해의 최소화와 더불어 충분한 병력 증강을 통한 '완벽한' 승리를 원한다. 그는 주지했다시피 많은 걸 갖춘 '완벽한' 사령관이다. 그런 그는 우습고 아이러니하게도 우스꽝스러운 자신의 모습도, 일 못하는 부하들도, 완벽한 승리와 현지 주민의 최소화라는 모순도 보이지 않는다. 미국의 한 단면이다. 


맥마흔이라는 미국의 단면, 또 다른 단면


맥마흔이 미국의 한 단면이라지만, 그와 반하는 미국 정부도 당연히 한 단면이다. 그들 모두 터무니 없다. ⓒ넷플릭스



미국의 또 다른 단면이 여기에 있다. 세계를 이끈다는 자부심과 세계의 모든 분쟁을 해결한다는 비뚤어진 책임감, 그리고 세계 모두가 지켜보는 데도 불구하고 황당하게 비겁하고 무능한 짓을 꿋꿋하게 이어나가는 면모 말이다. 그건 실명이 거론되는 오바라 대통령을 위시한 미국 정부의 맥마흔 장군 조종과 그에 따른 대처에서 나타난다. 


맥마흔은 아프가니스탄 주둔 미군 사령관이지만 엄연히 유럽까지 총괄하는 엄청난 힘과 책임이 있는 자리에 있다. 하지만 그는 6개월 동안 대통령을 한 차례 화상으로 만났을 뿐이다. 대개 현지에 대통령 대리로 와 있는 안보위원과 대사와 협의할 뿐이다. 그가 마음에 들던 안 들던 그토록 중요한 자리에 있다면, 대통령이 수시로 직접 대면은 못할 망정 화상 대면은 해야 하는 게 아닌가?


지난해부터 한국을 대혼란에 빠뜨렸던 국정논란 때 알려진 사실들이 있다. 대통령과 사전 면담 신청을 통한 독대가 없었다는 정무수석과 세월호 참사 당시 대통령이 어디서 무엇을 하고 있는지 몰랐다는 비서실장. 물론 영화와 현실의 이 둘을 직접적이고 평면적으로 비교할 순 없겠지만, 고의로 인한 무능과 그 자체로의 무능이라는 점에서 똑같은 무능을 자랑하고 있는 것이다. 


결국 맥마흔 본인의 문제도 있겠지만, 그런 맥마흔을 뽑아 배치한 건 미국 정부다. 전 세계 민주주의의 가장 큰 축을 차지하며, 개인을 중시하는 만큼 집단적 의견의 출중함으로 후회없는 선택을 하고, 완벽한 대응과 잘 짜인 시스템을 갖추고 있을 것 같은 미국이 결국은 터무니 없는 일을 일삼고 있는 게 아닌가. 아프가니스탄 전쟁이라는 거대한 허상에 터무니 없는 진지함으로 임하는 맥마흔, 그런 자를 뽑아놓고 피하는 미국. 


미국이라는 거대 생물의 자기 모순과 붕괴를 직시하다


공교롭게 영화의 배경이 2009년이다. 2008년 미국발 세계 경제 위기로 미국의 붕괴가 시작되었는데, 2009년에 아프가니스탄에서도 이어가는 느낌이다. ⓒ넷플릭스



영화는 전쟁이라는 거대 시스템 속에서 미국 정부와 대립하는 우스꽝스러운 진지충 맥마흔의 터무니없는 리더십을 보여주며 미국의 역설을 말하고자 했던 것 같다. 그러면서 작지만 핵심적일 수 있는 모순들, 예를 들면 현지에 과도정부를 수립하며 반란군를 괴멸시키면서도 반란군과 긴밀하게 연결될 수 있는 현지인들을 끌어안아야 한다는 점. 또한 반란군을 괴멸시키면서도 현지인 희생이 없어야 하는데, 현지인이 공격을 해오면 어떻게 해야 하는지? '전쟁'을 한다는 게 일반인 피해를 기정사실화하고 있는 게 아닌지? 애초에 왜 전쟁을 하는 것인지? 왜 승리를 쟁취해야만 하는 것인지?


이는 미국의 역설이기도 하고, 맥마흔의 역설이기도 하다. 결국 미국으로 수렴되는 바, 미국이라는 거대 생물의 자기 모순과 붕괴를 미리 직시하고 있는 것 같다. 사실 2008년 미국발 세계 경제 위기로 이미 미국은 깊은 수렁에 빠졌으니, 영화의 배경이되는 2009년은 그 수렁이 바닥을 드러냈을 때다. 거기에 현대 미국이 행한 가장 큰 헛발질이라고 할 만한 아프가니스탄 전쟁이라니, 답이 없다. 


영화의 만듦새를 떠나 브래드 피트의 행보가 가히 신선하다. 넷플릭스를 택하면서까지 자신이 하고 싶은 말을 하고자 하며, 이후에 이어질 이야기들에 기대를 하지 않을 수 없게 만든다. 그가 제작에 뛰어든 봉준호 감독의 <옥자>도 그 연장선상에 있다 하겠다. 그런 면에서 <워 머신>은 한 번쯤 꼭 짚고 넘어가야 할 많은 이슈들 중에 하나였을지 모르겠다. 


이제 우리는 어디로 가고 있는 것일까. 세계 경찰을 자처하던 미국은 더 이상 세계 위에 군림하고 있지 않다. 지상으로 내려온 지 한참이고, 이제는 자기 살길 찾아 가기 바빠졌다. 많은 비난이 뒤따르고 있지만, 현실은 전면적 각자도생의 길에 도달했다. 사실 어디로 가고 싶은 것인지, 어디로 가야 하는지 모르겠다. 그저 혼란 속에 수렁으로 내려가고 있다는 불길하지만 현실적인 예감뿐이다. 많은 영화들이 몸소 보여주고 있듯이. 그렇지만 불행하게도 당연하게도 대부분의 영화들이 답을 던져주고 있진 않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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