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리뷰] <우리의 20세기>


'아트버스터'라 부르기 충분한 영화 <우리의 20세기>. ⓒ그린나래미디어㈜



1979년 미국 서부 산타 바바라, 약관 15세 제이미(루카스 제이드 주만 분)는 40살 많은 엄마 도로시아(아네트 베닝 분)와 함께 산다. 하숙하는 사람이 둘 있는데, 20대 애비(그레타 거윅 분)와 40대 윌리엄(빌리 크루덥)이 그들이다. 그리고 매일 같이 제이미 방에 몰래 놀러와 자고 가는, 제이미의 친구 17세 줄리(엘르 패닝 분)가 있다. 


각자 소소한 일을 겪으며 살아가는 그들, 제이미 덕분에 또는 때문에 뭉친다. 제이미가 더 나은 사람이 되었으면 하는 바람에서, 도로시아가 혼자서는 자신이 없으므로 애비와 줄리에게 도움을 청한 것이다. 제이미를 보살펴 주고 가르쳐 주라고 말이다. 즉, 제이미를 함께 키우자는 뜻이었다. 


애비와 줄리는 지극히 열려 있는 여성으로서 남자가 알아야 할 것들을 제이미에게 알려준다. 하지만 그 나이대에 비해선 굉장히 열려 있는 여성인 도로시아가 보기에도 그건 굉장히 급진적이거니와 '잘못된' 방향인 것 같다. 이해하고 받아들이려고 해도, 머리로는 가능한대 가슴으로는 불가능한 세대 간의 간극처럼 말이다. 그녀가 보기엔 제이미가 전에 없이 빗나가고 있는 것 같다. 어쩌면 좋을까. 


그들이 보여주는 20세기


그들이 보여주는 20세기는 어떨까. 우리는 왜 그들의 20세기를 봐야 하는가. ⓒ그린나래미디어㈜



영화 <우리의 20세기>는 나이도, 세대도, 성도, 삶의 방향이나 지침도, 생각도 완전히 다른 다섯 남녀를 통해 지나간 지 한참이나 되어버린 20세기의 면면을 보여준다. 21세기도 어언 20년 가까이 지난 지금에 와선 한꺼번에 '옛날'로 치부해버리곤 하는, 치부해버릴 수밖에 없는 20세기를 들여다보는 건 쉽지 않은 일이다. 


감독의 자전적인 이야기라는 이 영화는 마지막을 장식하는 대사 한 줄이 그 목적을 말해준다. "난 아들에게 할머니가 어떤 사람이었는지 설명하려 할 것이다. 그러나 그건 불가능할 것이다." 제이미가 감독의 어린 시절을 비추는 거울이었을 게 분명한 만큼, 그의 어머니 즉, 도로시아가 어떤 사람이었는지를 그의 아들에게 보여주고자 하는 의도가 아닌가 싶다. 그러다 보면 자연스레 20세기가 보이는 것이다. 


영화는 그래서 개개인의 '소서사'를 당대를 구성하는 가장 중요한 구성요소들과 함께 배치해 보여주고 설명하는 구조를 택했다. 1920년대생 도로시아, 1940년대생으로 추측되는 윌리엄, 1950년대생 애비, 그리고 1960년대생들인 줄리와 제이미까지. 1979년 당시까지, 오롯이 20세기를 관통하는 세대들이다. 얼핏 다큐멘터리적인 장면들인데, 미장센이 상당히 감각적이라 지루할 새가 없다. 


1980년대 이전, 진정한 '자유'의 시대


그들이 보여주는 진정한 20세기는 1980년대 이전의 진정한 자유의 시대이다. ⓒ그린나래미디어㈜



영화에도 나오지만 1979년은 적어도 미국에 한해서 '소비와 환락의 시대'의 마지막이다. 당시 지미 카터 대통령이 대대적인 연설로 '절제와 통제의 시대'로 진입하게 된 것이다. 이듬해 출현한 로널드 레이건 대통령 때부터 공식적으로 시작된다. 영화가 말하는 '20세기'란 1979년까지를 말하는 것일 테다. 그 이후 다섯 사람의 행보를 간략히 들어보면, 모두 마치 한 사람인 양 획일화된 삶이다. 


그런 측면에서 1980년 이후의 삶을 들여다보며 '너희의 20세기'란 제목을 붙여도 되겠다 싶었다. 사회문화비평적으로 상당한 소구점이 있을 것 같다는 생각을 해본다. 물론 이 영화에도 그런 소구점들이 눈에 띈다. 가장 눈에 띄는 건 다름 아닌 '페미니즘'으로, 원제가 '20TH CENTURY WOMEN'인 만큼 세 여성의 생각이 얽히고 부딪히고 맺어지는 부분들이 자주 등장한다. 


그 사이 사이 세대와 문화와 환경에서 비롯된 여러 차이들이 산재한 모습을 볼 수 있다. 키움을 당하는 제이미뿐만 아니라 키움을 행하는 도로시아, 애비, 줄리도 모두 이 거스르기 힘든 차이들로 혼란스러워 하고 불편해 하고 힘들어 한다. 그럼에도 그들이 나아갈 수 있었던 건 1979년까지의 진정한 자유의 시대 20세기 덕분이었다. 그들은 서로를 이해할 순 없어도 인정할 준 알았다. 거기에 편견 따윈 존재하지 않았다. 


영화에 활기를 불어넣은 장치들


다양한 영화적 장치들이 영화를 수놓는데, 하나같이 영화의 품격을 높이는 데 혁혁한 전과를 올린다. ⓒ그린나래미디어㈜



자칫 지루할 수 있는 영화에 각종 장치들이 활기를 불어 넣어주었다. 위에서 언급한 개개인의 '소서사'를 당대를 상징하는 중요 요소들과 함께 다큐멘터리적으로, 그러나 감각적으로 보여준 게 가장 큰 장치라 하겠다. 오히려 시대가 아닌 개인이 보이고 기억에 남는 훌륭한 의도적 역효과를 일으켰다. 


여기에 자주 선보이며 항상 같은 느낌으로 보여주는 장치들에 빨리 감기, 홀로그램, 미래몽환적 음악 등이 있다. 이 장치들을 한 번에 선보일 때가 종종 있는데, 현실에서 벗어나 차를 타고 어디론가 가는 길을 묘사할 때다. 누가 보아도 인상적일 텐데, 누군가에겐 최고의 장면으로 남을 수도 있겠다. 평생 몇 번 느껴볼까 말까한 진정한 자유가 그런 모습을 하고 있지 않을까.


우린 지금 어떤 시대를 살고 있을까. 그저 '20세기'라고 통칭하는 20세기도 이토록 수많은 점점들로 나눌 수 있고 수많은 시대들로 나눌 수 있을진대, 21세기도 반드시라고 할 만큼 그러한 면면들이 있지 않겠나. 그렇지만 당대는 모른다. 아직 역사의 한 모퉁이로 진입하지 않았기에. 나는 바란다. '우리의 21세기'에 한순간이라도 진정한 무엇에서 살았던 적이 있었으면 하고 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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冊으로 策하다. 책으로 일을 꾸미거나 꾀하다. 책으로 세상을 바꿔 보겠습니다. singenv@naver.com Since 2013.4.16




[리뷰] <윈드 리버>


영원한 설원의 그곳 '윈드 리버'에서 벌어진 살인 사건. ⓒ유로픽쳐스



2015년 <시카리오: 암살자의 도시>, 2016년 <로스트 인 더스트>로 칸을 사로잡으며 전 세계에 이름을 알린 테일리 쉐리던. 그는 이 두 편의 웰메이드 영화 각본을 책임졌다. 아무래도 영화 스텝 중에선 연출자가 차지하는 비중이 가장 클 텐데, 각본이 각광받는 영화가 종종 있다. 이야기가 주는 힘이 어마어마한 경우가 그렇다. 


테일리 쉐리던이 다시 1년 만에 자신의 이름을 올린 영화로 찾아왔다. 이번엔 각본에 더해 연출까지 책임진 <윈드 리버>다. 미국 서부 와이오밍주에 위치한 '윈드 리버'라는 곳에서 벌어진 살인사건을 중심으로 꾸려지는데, 그곳은 인디언 보호구역이거니와 끝없는 설원이 펼쳐져 있다. 8월까지 눈이 내려 쌓인다. 


아무래도 사건이 단순히 사건으로 끝나지 않을 것임이 분명할듯, 상징과 비유가 보는 이의 머리와 가슴을 뒤흔들고 후벼팔 것이다. 대략의 분위기만 훑어보아도 전작 두 편의 향기가 나는 것 같다. 우린 이 영화에서 미국의 속살을 보게될 여지가 크다. 그리고 거기에서 거대한 두려움이나 불안, 희망의 작은 불씨를 느낄 것이다. 


아픔과 슬픔, 그리고 희망


설원에 파묻힌 아픔과 슬픔들, 그럼에도 희망의 불씨는 살아 있다. ⓒ유로픽쳐스



끝없이 펼쳐진 설원의 한밤중, 피투성이 얼굴의 한 여인이 맨발로 달린다. 무엇인가로부터, 누군가로부터 도망치는 듯하다. 그녀는 어디까지 갈 수 있을까. 그곳은 일개 사람이 할 수 있는 게 없는 윈드 리버 아닌가. 한편 야생동물 사냥꾼 코리(제레미 레너 분)는 옛 장인어른 농장에서 소가 피습당했다는 속보를 접하고 윈드 리버 인디언 보호구역으로 향한다. 그 원인을 찾아 근처를 수색하던 도중 여인의 시체를 발견한다. 


그 여인은 인디언 나탈리, 코리도 잘 안다. 다름 아닌 3년 전 잃은 딸의 절친이었다. 그런데 나탈리는 성폭행을 당한 뒤 설원의 한복판에서 죽어 있다. FBI의 허가가 필요한 일이다. 가장 근처에 있는 FBI 요원 제인(엘리자베스 올슨 분)이 달려온다. 하지만 그녀는 신참이거니와 윈드 리버에 대해서 아는 게 아무것도 없다. 


코리가 앞장서 그녀를 이끈다. 코리에게도 아픈 과거가 있는 만큼, 나탈리의 아빠와 약속한다. 반드시 그 놈을 잡겠다고, 잡아서 죽여버리겠다고, 아주 고통스럽게, '윈드 리버'만의 방법으로. 제인과 코리, 코리와 제인의 공조 수사가 시작된다. 그 끝에서 형용할 수 없는 아픔과 슬픔이 반길 준비를 마쳤다. 


그럼에도 희망을 언급할 수 있는 건, 아픔과 슬픔을 고스란히 간직한 채 그래도 살아가고자 하는 사람들 덕분이다. 또한 그런 그들의 아픔과 슬픔을 이해하고 함께 울어줄 수 있는 사람들 덕분이다. 영화는 사회에 만연한 '잔인'에 창끝을 겨누는 것에 초첨을 맞추면서도, 잔인하지 않은 사람들에게 조용한 응원의 메시지를 전달한다. 


설원과 미국


이 설원은 미국 그 자체다. 단적으로, 변화를 기대할 수 없지 않은가. ⓒ유로픽쳐스



설원은 자연이 줄 수 있는 최악의 조건 중 하나다. 바다에서 생존하는 것, 사막에서 생존하는 것 모두 어느 정도 가능하다. 하지만 설원은 이것들과는 또다른 차원이다. 설원에 오아시스 따위가 있겠는가. 맹렬한 추위의 설원에서 춥지 않을 방법을 찾을 수 있겠는가. 시시각각 변하는 사막과 바다와 달리, 변함없는 설원 아래 무엇이 있는지 알 방도가 있겠는가. 눈이 와서 더 쌓이면 쌓였지 긍정적인 변화를 기대할 수 없다. 


설원이 상징하는 건, 이제까지 테일리 쉐리던이 취한 스텐스를 볼 때 '미국'이다. 더이상 변화를, 발전적이고 건설적인 변화를 기대할 수 없는 미국의 축소판이다. 그렇다면 왜 와이오밍주 윈드 리버일까. 인디언 보호구역말이다. 영화는 미국에 남은 유일한 희망이 거기에 있다고 말하고 있는 것 같다. 


코리는 비록 인디언이 아닌 백인이지만 100년 전에 선조가 건너와 거의 인디언이나 다름 없는 생활을 영위하고 있고 그들의 생각을 완전히 이해하고 있다. 그럼에도 몇몇 인디언들은 그를 완전히 받아들이지 못한다. 한편 코리와 달리 그곳에 일을 하러 온 백인들이 있다. 그들은 인디언들을 이해하기는커녕 그곳의 자연도 이해하지 못한다. 


이런 불이해는 백인과 인디언만의 문제 따위가 아니다. 이는 일종의 상징이고, 미국에서 이런 모습은 전 세대와 전 인종과 전 계급 간에서 볼 수 있다. 그러하기에 영화에서 FBI 신참요원 제인의 행동이 중요하다. 그녀는 단순히 여러 영화에서 볼 수 있는 어리바리 신참의 클리셰가 아닌 것이다. 그녀야말로 '희망'이다. 그녀가 얼마나 이 자연을 이해하고 인디언들을 존중하고 그 모든 것에 공감을 할 수 있는지. 


이해와 공감의 부재


이 모든 것의 시작은 다름 아닌 '이해와 공감의 부재'다. 쉬우면서도 어려운... ⓒ유로픽쳐스



설원에서 사람 죽이는 일은 아주 간단하다. 직접적으로 위해를 가할 필요가 없다. 기절시키고는 제대로 된 장비 하나 없이 설원 한가운데에 버려두면 된다. 멀리 못가 죽고 말 것이다. 그런데 생각해보라. 그런 곳이 비단 설원뿐이겠는가. 어느 사회에서라도 가능한 일이다. 우린 그런 사회에서, 그런 나라에서 살고 있다. 미국만의 얘기가 아니다. 세계는 긍정적인 방향으로든 부정적인 방향으로든 서로를 따라간다. 


모든 건 이해와 공감의 부재에서 비롯된 것처럼 보인다. 수없이 오랫동안 그곳을 지키며 살아가는 사람들에 대한 이해와 공감의 부재는, 아무 준비와 생각 없이 현장에 온 제인의 모습만 봐도 충분히 알 수 있다. 또한 아무것도 없는 그곳에서 일하는 사람들에 대한 이해와 공감의 부재는, 영화의 내용과 메시지 특성상 나와 있지 않지만 조금이라도 알 수 있을 것 같다. 


과연 친히 나서서 악을 처단하려는 코리의 행동은 옳은 것일까. 물론 그가 행하는 처단 방법은 인간에게 절대적 최악의 조건인 '설원'이라는 자연에 맡기는 것일 테다. 그럼에도 그런 생각 자체가 괜찮은 걸까. 영화가 그를 희망에의 연결고리로 포지셔닝해도 좋은 것일까. 판단하기 힘들지만, 그만큼 세상이 절망적이라는 반증이기도 하다. 


이거 하나만 기억해도 충분하다. 그 설원에서 죽어간 그들, 얼마나 아팠을까. 얼마나 괴롭고 힘들었을까. 그 아픔에 공감하고 기억하고, 그 아픔에 슬퍼하는 사람들을 이해하는 것. 희망의 작은 불씨일지 모르지만, 결코 꺼지지 않을 불씨이기도 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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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리뷰] <워 머신>


브래드 피트의 플랜 B와 넷플릭스의 만남, 불과 10년도 채 되지 않은 과거의 이야기로 궁금증을 일으킬 만한 영화 <워 머신>. ⓒ넷플릭스



2001년 9월 11일 미국 뉴욕 한복판, 세계 중심의 상징 세계무역센터 쌍둥이 빌딩이 무너진다. 미국 정부는 이를 민간 항공기를 납치한 이슬람 테러단체에 의한 사건이라 규정, 부시 대통령은 이 테러의 배후에 오사마 빈 라덴을 지목, 그가 숨어 있는 아프가니스탄 탈레반 정권에 경고, 탈레반 정권이 이를 거부하자 침공·함락한다. 이어 반 탈레반 정권인 과도정부를 수립한다. 하지만 미국은 2003년엔 이라크를 침공해 역시 과도정부를 수립하는 등 '테러와의 전쟁'을 이어간다. 


전쟁이 8년 차로 접어든 2009년, 스탠리 맥크리스털 4성 장군이 아프가니스탄 주둔 미군 사령관으로 부임한다. 그는 아프가니스탄 민간인 피해 최소화를 강조하며, 병력 증원에 통해 전쟁을 종결시킬 것을 선언한다. 하지만 당시 미국 대통령이 버락 오바마와의 마찰과 각종 구설수로 1년여 만에 경질된다. 


다분히 문제적 인물인 이 사령관과 문제적 구도의 이야기를 《롤링스톤》지의 저널리스트 마이클 헤이스팅스가 논픽션 <디 오퍼레이터스>로 훌륭하게 풀어냈다. 다름아닌 그 책을 브래드 피트의 플랜 B가 영화 <워 머신>으로 제작했다. 거기에 봉준호 감독의 <옥자>처럼 넷플릭스로 공개했다. 주인공 글렌 맥마흔 장군은 브래드 피트가 직접 열연했다. <바스터즈: 거친 녀석들>과 <퓨리>를 잇는 전쟁, <머니볼>을 잇는 리더십, <빅쇼트>를 잇는 미국 풍자를 총집합시켰다. 과연 구슬을 잘 꿰매었을지.


'완벽한' 승리를 원하는 '완벽한' 사령관


맥마흔 장군은 완벽하다. 완벽한 만큼 완벽한 승리를 원한다. 하지만 그 자신 우스꽝스럽고 부하들은 일을 못하며 결정적으로 대통령에 반한다. ⓒ넷플릭스



대략의 스토리를 알고 있는 바, 결론적으로 말하자면 구슬을 그리 잘 꿰매진 못한 것 같다. 대신 각 구슬들이 평균 이상의 재미를 선사한 것만은 분명하다. 특히 이 영화가 기본 골자로 말하고자 하는 미국 풍자 블랙코미디 부분에서 나쁘지 않은 결과를 선사한다. 그건 다름 아닌 브래드 피트가 분한 글렌 막마흔 장군에서 시작해 끝난다. 


출중한 경력, 꾸준하고 철저한 자기관리, 부하를 살피는 세심함, 최고의 자리에 걸맞는 겸손함까지 갖춘 완벽한 사령관 맥마흔은, 우스꽝스러운 표정과 몸가짐과 행동거지를 가졌다. 모두가 정상적이고 일반적인 것과 다르게 그만 유독 튄다. 그건 아프가니스탄 전쟁을 바라보는 그의 시선에도 고스란히 나타난다. 


미국 정부는 오래토록 의미 없이 끌고 있는 아프가니스탄 전쟁을 아무 탈 없이 이대로 진행하다가 '흐지부지' 끝내고 싶다. 자신과 결을 완전히 달리 하다시피 하는 부시 전 정권에 의해 시작된 전쟁이기도 하기 때문인데, 어쨌든 맥마흔은 그런 미국 정부의 의중을 대신해야 하는 의무가 있는 것이다. 그저 생각 없이 지내다 오면 되는 것이다.


하지만 맥마흔은 아프가니스탄 현지 주민 피해의 최소화와 더불어 충분한 병력 증강을 통한 '완벽한' 승리를 원한다. 그는 주지했다시피 많은 걸 갖춘 '완벽한' 사령관이다. 그런 그는 우습고 아이러니하게도 우스꽝스러운 자신의 모습도, 일 못하는 부하들도, 완벽한 승리와 현지 주민의 최소화라는 모순도 보이지 않는다. 미국의 한 단면이다. 


맥마흔이라는 미국의 단면, 또 다른 단면


맥마흔이 미국의 한 단면이라지만, 그와 반하는 미국 정부도 당연히 한 단면이다. 그들 모두 터무니 없다. ⓒ넷플릭스



미국의 또 다른 단면이 여기에 있다. 세계를 이끈다는 자부심과 세계의 모든 분쟁을 해결한다는 비뚤어진 책임감, 그리고 세계 모두가 지켜보는 데도 불구하고 황당하게 비겁하고 무능한 짓을 꿋꿋하게 이어나가는 면모 말이다. 그건 실명이 거론되는 오바라 대통령을 위시한 미국 정부의 맥마흔 장군 조종과 그에 따른 대처에서 나타난다. 


맥마흔은 아프가니스탄 주둔 미군 사령관이지만 엄연히 유럽까지 총괄하는 엄청난 힘과 책임이 있는 자리에 있다. 하지만 그는 6개월 동안 대통령을 한 차례 화상으로 만났을 뿐이다. 대개 현지에 대통령 대리로 와 있는 안보위원과 대사와 협의할 뿐이다. 그가 마음에 들던 안 들던 그토록 중요한 자리에 있다면, 대통령이 수시로 직접 대면은 못할 망정 화상 대면은 해야 하는 게 아닌가?


지난해부터 한국을 대혼란에 빠뜨렸던 국정논란 때 알려진 사실들이 있다. 대통령과 사전 면담 신청을 통한 독대가 없었다는 정무수석과 세월호 참사 당시 대통령이 어디서 무엇을 하고 있는지 몰랐다는 비서실장. 물론 영화와 현실의 이 둘을 직접적이고 평면적으로 비교할 순 없겠지만, 고의로 인한 무능과 그 자체로의 무능이라는 점에서 똑같은 무능을 자랑하고 있는 것이다. 


결국 맥마흔 본인의 문제도 있겠지만, 그런 맥마흔을 뽑아 배치한 건 미국 정부다. 전 세계 민주주의의 가장 큰 축을 차지하며, 개인을 중시하는 만큼 집단적 의견의 출중함으로 후회없는 선택을 하고, 완벽한 대응과 잘 짜인 시스템을 갖추고 있을 것 같은 미국이 결국은 터무니 없는 일을 일삼고 있는 게 아닌가. 아프가니스탄 전쟁이라는 거대한 허상에 터무니 없는 진지함으로 임하는 맥마흔, 그런 자를 뽑아놓고 피하는 미국. 


미국이라는 거대 생물의 자기 모순과 붕괴를 직시하다


공교롭게 영화의 배경이 2009년이다. 2008년 미국발 세계 경제 위기로 미국의 붕괴가 시작되었는데, 2009년에 아프가니스탄에서도 이어가는 느낌이다. ⓒ넷플릭스



영화는 전쟁이라는 거대 시스템 속에서 미국 정부와 대립하는 우스꽝스러운 진지충 맥마흔의 터무니없는 리더십을 보여주며 미국의 역설을 말하고자 했던 것 같다. 그러면서 작지만 핵심적일 수 있는 모순들, 예를 들면 현지에 과도정부를 수립하며 반란군를 괴멸시키면서도 반란군과 긴밀하게 연결될 수 있는 현지인들을 끌어안아야 한다는 점. 또한 반란군을 괴멸시키면서도 현지인 희생이 없어야 하는데, 현지인이 공격을 해오면 어떻게 해야 하는지? '전쟁'을 한다는 게 일반인 피해를 기정사실화하고 있는 게 아닌지? 애초에 왜 전쟁을 하는 것인지? 왜 승리를 쟁취해야만 하는 것인지?


이는 미국의 역설이기도 하고, 맥마흔의 역설이기도 하다. 결국 미국으로 수렴되는 바, 미국이라는 거대 생물의 자기 모순과 붕괴를 미리 직시하고 있는 것 같다. 사실 2008년 미국발 세계 경제 위기로 이미 미국은 깊은 수렁에 빠졌으니, 영화의 배경이되는 2009년은 그 수렁이 바닥을 드러냈을 때다. 거기에 현대 미국이 행한 가장 큰 헛발질이라고 할 만한 아프가니스탄 전쟁이라니, 답이 없다. 


영화의 만듦새를 떠나 브래드 피트의 행보가 가히 신선하다. 넷플릭스를 택하면서까지 자신이 하고 싶은 말을 하고자 하며, 이후에 이어질 이야기들에 기대를 하지 않을 수 없게 만든다. 그가 제작에 뛰어든 봉준호 감독의 <옥자>도 그 연장선상에 있다 하겠다. 그런 면에서 <워 머신>은 한 번쯤 꼭 짚고 넘어가야 할 많은 이슈들 중에 하나였을지 모르겠다. 


이제 우리는 어디로 가고 있는 것일까. 세계 경찰을 자처하던 미국은 더 이상 세계 위에 군림하고 있지 않다. 지상으로 내려온 지 한참이고, 이제는 자기 살길 찾아 가기 바빠졌다. 많은 비난이 뒤따르고 있지만, 현실은 전면적 각자도생의 길에 도달했다. 사실 어디로 가고 싶은 것인지, 어디로 가야 하는지 모르겠다. 그저 혼란 속에 수렁으로 내려가고 있다는 불길하지만 현실적인 예감뿐이다. 많은 영화들이 몸소 보여주고 있듯이. 그렇지만 불행하게도 당연하게도 대부분의 영화들이 답을 던져주고 있진 않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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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리뷰] <파운더>


전세계 최고이자 가장 유명한 프랜차이즈 브랜드 '맥도날드'의 설립 비하인드 이야기를 다룬 <파운더>. ⓒ크리픽쳐스



고백하건대, 프랜차이즈 중에 '맥도날드'와 '스타벅스'를 가장 선호한다. 이들은 그야말로 욕하면서도 가는 곳이다. 가장 상업적이기 때문일 텐데, 또 가장 대중적이기에 찾을 수밖에 없다. 일단 다른 어느 곳에 비해서도 결코 떨어지지 않는 '맛'을 자랑한다. 적정 수준의 '가격'도 한몫 한다. 어딜 가든 접할 수 있다. 예를 들어, '맥도날드'보다 '버거킹'이 더 맛있다고 생각하지만, '버거킹'은 엄청 비싸고 눈에 잘 띄지 않는다. 


이 두 회사의 공통점은 또 있다. 조금 다른 얘기인데, 맥도날드 역사에서 절대적 영향력을 끼친 '레이 크룩'과 스타벅스 역사에서 절대적 영향력을 끼친  '하워드 슐츠' 말이다. 이들은 엄밀히 말해 맥도날드와 스타벅스를 '시작'한 이들이 아니다. 본래 운영되고 있던 맥도날드와 스타벅스를 사들여 지금의 위상을 갖게 한 것이다. 


널리 알려진 사실이지만 한편으론 비하인드 스토리라고 할 수도 있는 바, 아마 일반인들에겐 비하인드 스토리가 될 것이고 경영인들에겐 중요한 메시지가 담겨 있는 '경영의 산 보고'일 것이다. 자본과 경쟁의 양대축으로 지탱되는 이 세계에서, 그들이 맥도날드와 스타벅스를 사들여 지금의 위치까지 올라선 과정은 그야말로 신화이기 때문이다. 추진력과 끈기를 비롯, 뻔뻔함과 음흉함의 미학까지 배울 수 있다. 


누가 진짜 설립자인가. 맥도날드 형제? 레이 크룩?


영화는 '맥도날드의 진짜 설립자는 누구인가?'라는 질문 또는 의문을 중심으로 펼쳐진다. ⓒ크리픽쳐스



영화 <파운더>는 맥도날드의 시작이 아니라 레이 크룩(마이클 키튼 분)의 맥도날드가 시작되는 때를 이야기한다. 맥 맥도날드(존 캐럴 린치 분)와 딕 맥도날드(닉 오퍼맨 분)가 1948년 미국 캘리포니아의 샌 버너디노에서 시작한 '맥도날드'. 1954년, 밀크쉐이크 기계를 팔러 다니는 레이 크룩이 그 가게에 한 눈에 반해 프랜차이즈 사업을 제안한다. 맥도날드 형제에게 모든 권리가 있으면서 꼬박꼬박 로얄티를 지불하겠다는 것이었다. 물론 레이 크룩에도 로얄티가 지불된다. 


당시 유행했던 '드라이브 스루' 시스템의 한계를 극복하고자 수많은 시도 끝에 혁명적인 '스피디 시스템'을 안정화 시킨 맥도날드 형제, 그 위에 맥도날드라는 브랜드를 '미국의 교회'처럼 상징화 시키겠다는 야망의 레이 크룩. 이들은 이후 사사건건 부딪힌다. 원칙주의자로서 돈보다 안정화, 그리고 가족을 우선시 한 맥도날드 형제, 반면 레이 크룩은 위험이 따르지만 공격적으로 사업을 넓혀가고자 한다. 


새롭게 투자한 점주들이 자기 마음대로 운영을 하고, (레이 크룩 입장에서) 터무니 없이 낮은 로얄티를 받는 계약 때문에 겉만 번지르르한 빈털털이가 될 위기에 처하는 등 레이 크룩은 가정을 등한시 하면서까지 위기를 타개하고 앞으로 나아간다. 그럴수록 맥도날드 형제와의 충돌은 더욱 심화될 수밖에 없다. 그 끝은 누구나 다 아는 이야기, 레이 크룩은 엄청난 금액을 맥도날드 형제에게 주고 '맥도날드'를 사들인다. 


영화는 제목에서부터 노골적으로 질문을 던진다. '누가 진짜 설립자인가?' 레스토랑을 시작하며 하나부터 열까지 모든 것에 관여해 혁명적인 시스템을 만들어 지역에서 확고한 명성을 쌓은 맥도날드 형제인가. 레스토랑을 만들지도 시스템을 만들지도 않았지만, 지역을 넘어 미국을 넘어 전 세계 최고의 프랜차이즈를 만들어 '맥도날드'라는 브랜드를 만방에 떨치게 한 레이 크룩인가. 


레이 크룩의 성공, 그만의 것인가?


결국 맥도날드는 레이 크룩의 손으로 넘어가고 또한 그의 손에 의해 이만큼 컸지만, 과연 온전히 그만의 것인지 의문이 든다. ⓒ크리픽쳐스



<파운더>는 전후(戰後) 미국의 엄청난 경제호황 하에서의 아메리카 드림을 현실로 옮긴 레이 크룩의 성공기를 뼈대로 한다. 52세의 한물 간 세일즈맨, 접이식 탁자를 비롯해 휴지, 밀크쉐이크 기계까지 온갖 것들을 팔아 입에 풀칠하며 살아가는 레이 크룩. 그럼에도 그는 눈 하나 깜짝하지 않고 '공급이 있어야 수요가 있다'를 골자로 하는 이론을 앞세워 진지한 태도로 끈기 있게 설득한다. 잘 팔리진 않지만. 


그는 '준비된 인재'였던 거다. 단지 기회가 그를 찾아오지 않았을 뿐. 맥도날드는 그와 운명의 단짝이지 않았을까, 싶다. 그렇지만 영화는 그의 기막힌 성공 만을 비추지 않는다. 그가 성공으로 다가갈수록 빈털털이가 되어 가는 모습을 보여주고, 그가 맥도날드 형제가 구축한 세계를 파괴시켜 나가는 모습을 보여준다. 또 가정 파괴가 머지 않았음을 암시하는데, 그는 가정을 등한시 하며 앞으로도 계속 등한시 할 것이라 한다. 


맥도날드 형제와 레이 크룩을 통해 우리는 '미국'이라는 나라를 엿볼 수 있다. 엄청난 노력으로 이루어낸 혁신과 그 즉시 시행되는 보수화, 한편 끝없는 야망과 체계적인 듯 임기응변식인 듯 어떻게든 무마하는 철면피와 돌파하는 불도저. 이 두 큰 축이 맞물려 돌아가는 나라가 미국이다. 이 영화는 주인공들을 통해 미국을 돌려서 말하고 있는 게 아닌가 싶다. 


할리우드 영화들이 조국이라 할 수 있는 미국을 말하고자 할 때 잘하는 수법이다. 그런 영화들에서는 대체로 '국뽕'이라 할 만한 요소를 많이 볼 수 있는데, 이 영화에선 그런 면까지 보이진 않는다. 대신 '아메리카 드림'이라는 지극한 성공의 모습과 그 이면을 비판적으로 바라보는 모습을 공존시키며, 균형을 맞추고 관객들에게 질문을 던지는 것이다. 판단을 유보하고 관객들에게 미루는 걸지도 모르겠다. '레이 크룩의 성공은 온전히 그만의 것인가?'


마이클 키튼 제2의 전성시대


영화 배우 마이클 키튼 제2의 전성시대가 열린 것 같다. <파운더> 또한 큰 자리를 차지할듯. ⓒ크리픽쳐스



1970년대 후반 드라마로 데뷔한 후 1980년대 초반 영화로 데뷔한 '마이클 키튼'. 1988년에 <유령 수업>으로 팀 버튼과 함께 하고는 이듬해 팀 버튼의 <배트맨>으로 모든 이들에게 충격을 선사한다. 그의 이미지와는 너무나도 거리가 멀다는 중론, 하지만 영화는 대대적으로 흥행하여 80년대를 대표할 정도가 된다. 키튼은 역대 최고의 '배트맨'이 된 것이다. 1992년에도 팀 버튼과 <배트맨 2>를 찍어 성공을 이어 나간다.


이후 그럭저럭 좋은 영화, 나쁜 영화에 출현해 배우 생활을 이어나가는 키튼, 어느새 잊혀진 히어로가 된 듯하다. 그러던 2014년 키튼 본인의 이야기인 듯한 <버드맨>으로 완전히 부활한다. 아니, 비로소 그는 완연한 배우가 된 듯하다. 다음해에는 <스포트라이트>에 주연으로 활약한다. 그야말로 2014, 2015년 당해 최고의 작품들을 섭렵한 것이다. 그리고 2016년 <파운더>다. 이 영화의 레이 크룩도 어느 정도 키튼 본인이 투영된 게 아닐까 생각한다. 그래서 그토록 편안한 연기를 펼칠 수 있었던 걸까?


사실상 원톱으로 영화를 이끌었는데, 하등 빈 곳이 없어 보였다. 이전 두 작품에서는 기라성 같은 배우들과 함께 했지만, 이번엔 그에 비해 그에게 쏠린 무게가 엄청나 보였다. 왕년의 초특급 스타가 경험과 연륜이 완연하면 이 정도 무게감을 줄 수 있구나 하는 생각까지 하게끔 하는 키튼의 연기 스펙트럼. 


키튼은 2017년에만 기대작 두 편에 출현한다. <스파이더맨: 홈커밍> <아메리칸 어쌔신>. 두 작품 다 핫한 신세대 스타 톰 홀랜드와 딜런 오브라이언을 사실상 원톱 주연으로 내세운 바, 키튼은 다시 조력자로 돌아간 듯하다. 하지만 역할은 그렇지 않은 듯, 스파이더맨의 가장 강력한 적으로 나오며 미치 랩과 함께 활동하며 미치 랩만큼 중요한 스탠 헐리로 분할 예정이다. 


60대 중반이 지나는, 적지 않은 나이의 키튼이지만 그 어느 때보다 왕성하게 활동하고 있는 것 같다. 많은 배우들이 나이가 들어 부활은커녕 사람들 기억 속에서 완전히 지워지기 일쑤인데, 키튼은 어떻게 보면 행운아일지 모르겠다. 부디 지금 이대로 경험과 연륜으로 좋은 작품에 출현해 끝내 유종의 미를 거두었으면 좋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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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리뷰] <히든 피겨스>


1960년대 초, NASA에서 오직 실력으로 '흑인 여성'으로 받는 차별을 이겨내려는 세 천재의 이야기, <히든 피겨스>. ⓒ이십세기폭스코리아



천재에 관한 영화를 많이 봐왔다. 차별을 이겨내고 자신의 자리를 찾는 영화도 참 많이 봐왔다. 이 두 이야기를 합쳐, 차별을 이겨내고 실력으로 인류 발전에 이바지한 천재 영화도 봤다. 모두 진중하고 장엄하고 비장하기까지 했다. 끝이 좋지 않아 비극으로 끝나는 경우가 많았다. 유쾌하면 좋겠다 하고 생각했는데, 딱 그런 영화가 모습을 드러냈다. <히든 피겨스>다. 


1961년, 전 세계를 반반으로 가르는 미국과 소련의 승부가 한창이다. 이른바 냉전시대. 거의 모든 분야에서 물러설 수 없는 경쟁을 계속하는데, '우주전쟁'도 그중 하나다. 소련의 선방에 가만히 있을 수 없는 미국, 우주 비행 프로젝트를 가동한다. 1958년에 개편창설된 미국항공우주국(NASA)이 그 중심이다. 하지만 말처럼 쉽지 않다. 역사상 그 누구도 실행에 옮긴 적이 없는 전대미문의 일이 아닌가. 그럼에도 해내야만 한다.


그 와중에 세 명의 흑인 여성이 결정적 역할을 한다. 관리자로, 엔지니어로, 그리고 로켓 발사 담당자로. 출중한 실력으로 NASA에 들어왔지만, '흑인 여성'이기 때문에 능력에 걸맞게 할 수 있는 건 거의 없다시피하다. 그럼에도 해내야만 한다. '적국' 소련에 맞서 우주전쟁을 승리로 이끌기 위해서도, 차별이라는 '적'에 맞서 평등한 세상을 만들기 위해서도 말이다.


위대한 우주 비행 프로젝트의 숨겨진 '흑인 여성'들


위대한 우주 비행 프로젝트의 숨겨진 진짜 주인공이라는 이면, 그들이 차별의 한가운데에 위치한 흑인 여성이라는 이면. ⓒ이십세기폭스코리아



'숨겨진 사람들'이라는 뜻의 제목, 미국이 이룩한 위대한 우주 비행 프로젝트의 숨겨진 진짜 주인공들이 겉으로 드러난다. 모든 찬사는 당대 대통령 케네디와 NASA 국장, 로켓에 탑승해 우주로 날아간 당사자에게로 쏟아졌지만, 그 뒤엔 이름 없는 이들의 노력이 있었다는 것. 우린 그들의 이름 또한 기억해야 한다. 아니 그들의 이름이야말로 기억되어야 한다. 


하지만, 그 이면에 영화가 진정 말하고자 하는 바가 있다. 그들이 다름 아닌 '흑인 여성'이었다는 사실 말이다. 1961년 당시는 비록 마틴 루터 킹의 활약이 극에 치닫고 있는 와중이었지만, 흑인 여성의 인권은 없다시피 했다. 영화는 주인공들이 당하는 어이 없는 차별을 통해 단적으로 보여준다. 


흑인이라는 이유로 공용 커피 포트를 쓸 수 없어 커피를 마실 수 없고 공용 화장실을 쓸 수 없어 800미터 떨어진 흑인 전용 화장실을 써야 한다. 자신의 자리에서 절대적인영향력을 뽐내며 비어 있는 관리자의 일까지 더할 나위 없이 해내지만, 절대 관리자로 승진할 수 없는 처지다. 그 누구보다 대단한 학위를 자랑하지만 남자들만 하는 엔지니어가 될 수 없다. 물론 그 어떤 남자 엔지니어보다 출중한 실력을 자랑한다. 


더 이상 할 수 있는 게 무얼까. 누구나 알고 있다, 그들이 '백인 남성'보다 월등한 실력을 지니고 있다는 것을. 그럼에도 그들에게 돌아가는 건 존경은커녕 일말의 믿음도 아니다. 더욱 철저한 멸시뿐. 


속시원한 차별 첼폐, 하지만 '누군가에 의해서'


1단계의 이면과 2단계의 이면, 그런데 3단계의 이면이 있다? '누군가에 의한' 차별 철폐라는 함정이다. ⓒ이십세기폭스코리아



그들은 반정부·반사회적 폭력 투쟁으로 자신의 인권을 찾으려 하지 않는다. 철저히 체제에 순응하며 그 안에서 절대적인 실력을 앞세워 자신의 자리를 찾고자 한다. 그렇지만, 그럴 때 필요한 건 누군가의 도움 내지 깨달음이다. 누군가는 아마도 백인 남성이지 않을까. 백인 남성이어야만 이 체계를 무너뜨릴 수 있을 것이다. 


영화는 슬프게도, 그 사실을 보여준다. NASA의 고위층 백인 남성이, 오로지 우주 비행 프로젝트를 이뤄내야만 한다는 일념 하에 엄청난 실력을 자랑하는 흑인 여성을 우대하는 모습을 보인다. 그러기 위해선 흑인 여성이 포함된 집단 자체를 부정해야 한다. 차별 받고 있는 그 집단의 존재를 없애 평등하게 만들어야 한다. 그러지 못하면 그 흑인 여성은 출중한 실력을 조국을 위해 뽐낼 수 없는 것이다. 


헷갈린다. 양파를 까도 까도 계속 나오는 느낌이다. 이 고위층이 보여준 행동은 분명 인류가 달에 첫발을 디딘 위대한 한걸음 못지 않은 위대한 한걸음이다. 그가 보여준 파워풀한 차별 철폐는 소름 돋게 하는 데 충분했다. 하지만 그는 차별을 당하는 당사자가 아니다. 과정 또한 철저히 실력으로 쟁취했다고도 볼 수 없다. 그런 한편 드는 생각은, 과연 그녀가 출중한 실력이 없었더라도 백인 남성이 그처럼 차별 철폐를 시행했을까 하는 것이다. 마냥 통쾌하고 감동적이지만은 않다. 


우리나라가 일제로부터 독립을 했지만, 우리 손으로 쟁취했다고 볼 수 없는 것과 같다고 하면 될까. '누군가에 의해서'. 그렇게 되면, 그 누군가에게 종속될 수밖에 없지 않은가. 그 누군가의 마음이 바뀌거나, 그 누군가의 자리를 다른 누군가가 취할 때 다른 누군가의 마음이 다르다면 어찌하겠는가. 


전형적인 할리우드식 웰메이드 영화


그럼에도 영화 자체는 나무랄 데 없는 웰메이드 영화다. 그저 즐겨도 아무 이상 없다. ⓒ이십세기폭스코리아



영화는 비록 '숨겨진 사람들'을 내세워 유쾌하게 차별을 이겨내는 이야기를 풀어내 색다른 재미를 선사하지만, 그 이면에 '숨겨진 생각들'은 제대로 풀어내지 못한 것 같다. 물론 일부러 풀어내지 않은 것일 수도 있다. 어쨋든 여러모로 위대한 이들의 이야기이니까 말이다. 뭘 더 바라냐, 이 정도면 됐지 하고 생각할 수도 있겠다. 그것도 틀린 말은 아니다. 뿌리 깊은 차별을 이기는 건 정말로 힘드니까. 


정녕 차별이 무엇인지 모르는 내가 함부로 차별과 차별 이면에 숨겨진 생각들을 지꺼리는 게 아닌지 모르겠다. 지꺼릴 순 있어도 힘이 있진 않을 것이다. 그렇지만 차별에도 등급이 있듯이 차별 철폐의 방법에도 등급이 있다. 엄밀히 말해 <히든 피겨스>의 주인공 세 명은, '백인 사회에서의 흑인으로서 최초'가 되었을 뿐이었다. 


인정할 건 인정해야겠다. 영화는 이런 이면 속의 이면을 생각하기 민망할 정도로 유려했다. 할리우드식으로 보기 좋게 만들어진 웰메이드 영화이다. '발단-전개-위기-절정-결말'의 전통적 구성이 완벽하리만치 재현되어, 보는 이로 하여금 지루할 틈도 없이 생각할 틈도 없이 이어지는 것이다. 남는 건 영화가 말하고자 한 확고부동한 메시지와 영화가 보여주고자 한 인상적인 장면들이다. 매력적인 주인공들은 기본.


요즘 상업영화의 추세를 가장 단적으로 보여준 영화였다는 말도 하고 싶다. 높아진 관객의 눈을 의식한 결과인지 모르겠지만, 민감한 부분이나 논란의 여지가 있는 요소들을 가지고 와 상업적으로 이용해먹는 것이다. 거기에 당대가 아닌 조금이라도 지난 시대라면 수위는 높일 수 있고 범위는 넓일 수 있다. 여차하면 '영화니 너무 진지하게 받아들이지 말자' '재미를 위해 각색을 했으니 곧이곧대로 받아들이지 말자' 하면 된다.


<히든 피겨스>는 분명 열광할 만한 소재와 주제와 만듦새를 자랑하지만, 한 번쯤 그 이면을 생각해 볼 일이다. 우주 비행 프로젝트의 숨겨진 조력자라는 1단계를 지나, 흑인 여성으로서 받았던 차별을 실력으로 돌파했다는 2단계를 지나, 차별 철폐의 과정을 다시 한 번 들여다보는 3단계에 이르길 바란다. 물론 영화는 2단계 정도까지만 생각하며 재밌게 보시고, 3단계는 영화가 끝난 후 도달하면 될 일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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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리뷰] 멜 깁슨의 <핵소 고지>


10년만에 감독으로 돌아온 멜 깁슨. <핵소 고지>는 상타려고 만든 영화이자, 그의 영화관이 집약되어 있는 영화다. ⓒ판씨네마



멜 깁슨이 10년 만에 감독으로 돌아왔다. 손꼽으며 기다리는 정도는 아니나 일정 정도 이상의 기대는 하는 감독이다. 특히 이번 작품 <핵소 고지>는 그의 전작들이 가졌던 장점들만 모아놨다는 평을 듣는 전쟁영화인 바, 기대가 더 높아졌다는 걸 인정한다. 더불어 주연을 맡은 앤드류 가필드가 스파이더맨 이미지가 굳혀질 것 같을 때 선택한 두 영화(<사일런스> <핵소 고지>) 중 하나이기에 더 관심이 갔다. 


멜 깁슨의 행보는 특이하고 영리하다. 1980~90년대 <매드 맥스> <리썰 웨폰> 시리즈 등으로 명성을 떨치고 많은 돈을 모으더니 돌연 연출을 시도하면서 자신만의 세계를 공고히 했다. 1993년에 데뷔해 25년 가까이 5편을 연출한 된 베테랑 감독이기도 한데, 그동안 많은 논란을 뿌리면서도 탁월한 리얼리즘 액션과 고민하는 개인 심리 그리고 성서를 기반으로 하는 메시지 전달은 변치 않았다. 


어렸을 때 멜 깁슨이 주연한 <브레이브 하트>(당시에는 멜 깁슨이 연출과 감독 모두를 맡은 사실을 알 수 없었다)를 보고 상당히 감명을 받은 기억이 있다. 특히 장활한 연설 끝에 '프리덤!'을 외치며 엄청난 포스와 아직도 뇌리에 남아 있는 한 점 흐트러짐 없는 얼굴로 달려가는 모습 말이다. 이번에도 이성을 잠식시키는 감성적인 명장면을 마음을 흐트러놓을까?


신념과 종교와 리얼리즘 영화관의 종지부


멜 깁슨이 그동안 만든 영화들에는 공통적으로 신념, 종교, 리얼리즘이 깔려 있었다. 이번 영화에 모조리 때려부었다. ⓒ판씨네마



어린 시절 있었던 일련의 일들 때문이기도 하거니와 종교적인 이유로(제칠일안식일예수재림교) 데스몬드 토마스 도스(앤드류 가필드 분)는 비폭력주의자가 된다. 그렇게 시간이 흘러 제2차 세계대전 막바지, 도스는 또래들도 다 입대하고 할 것도 없다는 이유를 들어 자원입대 한다. 누구보다 체력이 좋은 그, 하지만 군인이라면 절대적인 '집총'을 '거부'한다. 개인의 절대적인 신념에 의한 것. 종교가 전부는 아닌 듯하다. 


미군은 이 초유의 명령볼복종인 집총거부를 인정할까? 징병제이니까 군에서 쫓아내면 될 일이다. 하지만 군대에 남아서 사람을 살리는 의무병이 되어야겠다는 또 다른 신념을 절대 굽히지 않는 도스다. 그렇게 전쟁에 출전하게 된 도스. 제2차 세계대전 당시 가장 치열했던 일본 오키나와 핵소 고지가 주전장이다. 


그는 절대 굽히지 않았던 집총거부와 함께, 가장 치열한 전장에서 비폭력과 활인(活人)을 견지할 수 있을까? 영화는 러닝타임의 절반 이상을 도스 개인의 신념 형성과 고민과 견지를 다룬다. 남은 절반에는 신념의 실천을 다루니, 이 영화는 전쟁영화라기보다 지극히 개인적인 심리영화이자 종교영화라고 보는 게 맞겠다. 


비단 도스의 신념뿐 아니라, 도스가 속한 중대의 중대장 클로버(샘 워싱턴 분)의 신념과 간악하기 짝이 없는 모습으로 나오는 '악마' 일제의 대장의 신념도 살짝이지만 강렬하게 비춰준다. 멜 깁슨은 아무래도 이 영화로 자신이 만들어낸 신념과 종교와 리얼리즘을 버무린 영화관에 종지부를 찍을 모양인 것 같다. 


보통 수준의 전쟁신, 전쟁영화들이 생각난다


전쟁이 주된 테마 중 하나인만큼, 전쟁 얘기를 안 할 수 없다. 여러 전쟁영화가 생각나는 보통 수준. ⓒ판씨네마



영화는 잔인하다는 평이 은근 많은 것 같다. 폭력의 수위가 다소 높다는 의견과 필요 이상으로 잔인하다는 의견이다. 아무래도 전쟁영화라서 그럴 수밖에 없을 텐데, 사실 이 정도면 양호한 수준 또는 보통의 수준이라는 걸 말하고 싶다. 족히 20년은 된 <라이언 일병 구하기>만 해도 이보다 더하면 더했지 못하지 않은 수준의 수위를 보여주고 있지 않은가. 


또한 감독의 의도이기도 하다. 전쟁이라는 특수한 상황, 수많은 이들이 죽어나가는 인간성 상실의 상황에, 오로지 살리고자 하는 신념 하나로 뛰어든 한 인간을 그리고자 했기 때문이다. 그 대비가 극명하면 할수록 말하고자 하는 바가 더 확실하게 드러날 수 있겠다. 모두가 살인을 할 때 홀로 활인을 외치고 실제에 옮기니 말이다. 


그런 의미에서 그동안 나왔던 전쟁영화들에서 각종 장면을 차용한 것 같다. 초중반을 할애하는 전쟁 이전의 이야기는 <라이언 일병 구하기>를, 전쟁에 출전하기 전의 훈련병 내무반 생활 장면은 <풀 메탈 자켓>을, 고지를 탈환하기 위한 벙커 탈환의 소소한 작전은 <신 레드 라인>을, 심지어 포탄이 난무하는 와중에도 홀로 적진으로 향하는 모습은 <포레스트 검프>가 생각나게끔도 했다. 


그러니 전쟁영화를 섬렵하다시피 한 이들에게 이 영화는 다소 밋밋하게 보일 수 있을 뿐 아니라 어디서 많이 본 듯한 느낌을 지울 수 없었을 것이다. 감독이 이를 모를리 없으니, 길지 않은 전투 장면은 이 영화에서 큰 비중을 차지하지 않는다고 볼 수 있다. 오히려 하이라이트는 마지막 30분, 도스가 신념을 실현하는 모습에 있겠다. 


무리 없는 수작, 정이 가진 않는다


여러 논란거리가 있지만, 영화 자체로는 딱히 욕할 게 없는 수준이다. 하지만 멜 깁슨이 다음에 또 이런 영화를 만든다면 보지 않을 것이다. ⓒ판씨네마



실화를 바탕으로 한 만큼 전체적인 내용을 일별하는 건 의미가 없다. 대신 짚고 넘어가야 할 게 있다. 도스라는 '전쟁 영웅'에 관한 이야기 말이다. 그의 신념은 뒤로 하고 전쟁영화에서 비춰지는 영웅은 굉장한 위험이 뒤따른다. 전쟁을 미화하고, 전쟁에서 이긴 것 뿐인 역사의 승리자를 미화하며, 무엇보다 폭력을 미화하기 때문이다. 


이 영화는 성격이 다르다. 전쟁 영웅을 다루지만 폭력을 미화하지 않는다. 오히려 폭력의 한 가운데에서도 절대적인 비폭력을 실행하니, 다분히 의도적이지만 엄연히 실화이니 도식적이니 가식적이니 말을 할 수도 없다. 그러니 뒤로 한 신념으로 다시 돌아올 수밖에 없다. 


하지만 미국을 미화한다는 논란을 빚겨갈 순 없겠다. 우여곡절이 있었지만, 결국 미국은 한 개인의 신념을 지켜주었고 또 그 신념의 처절한 실천에 합당한 대우를 주었다. 그건 사실이지만, 영화는 그 부분들에 지극한 드라마를 가미했다. 각종 논란거리를 일삼는 트럼프 정부를 향한 '미국은 이래야 한다!'는 일격으로 받아들일 수도 있겠지만, 과거 수차례 인종 차별 발언으로 물의를 일으켰던 멜 깁슨이니만큼 그런 식으로 받아들이는 건 조금 무리가 있겠다. 


전체적으로 무리 없는 수작으로 볼 수 있는 <핵소 고지>, 하지만 정이 가지 않는다. 멜 깁슨이 또다시 이런 류의 영화를 내놓는다면 보지 않을 가능성이 다분하다. 개인적으로는 그가 가진 리얼리즘에 대한 관심과 능력을 최대한 살린 영화라면 좋을 것 같다. 다만, 거기에 어떤 논란거리를 얹혀놓지 않았으면 한다. 이번이 마지막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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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리뷰] <엘비스와 대통령>


'미국국립기록관리처'의 문건 중 최다 열람을 자랑하는 엘비스와 닉슨의 비밀 극비 회동을 소재로 만든 영화, <엘비스와 대통령> ⓒ(주)우성엔터테인먼트



1950년대 혜성같이 등장해 'The King'이라 불리웠던 사나이, 엘비스 프레슬리. 사후 40년이 지난 지금까지도 전 세계를 통틀어 가장 유명한 연예인이다. 넘쳐나는 게 돈이었고, 세계 어딜 가나 당연히 주목을 끌었다. 그야말로 모든 걸 얻은 아쉬울 게 없어 보인다. 그런 그가 강력히 원하는 게 있었단다. 그는 비밀리에 1970년 말 당시 제37대 미국 대통령인 리처드 닉슨을 찾아간다. 


미국과 소련, 자유세계와 공산세계로 양분되어 첨예하게 대립하던 가운데, 자유세계를 이끄는 지도자인 리처드 닉슨 미국 대통령. 그야말로 세계를 호령하는 권력의 정점인 'The King'이나 다름 없었다. '닉슨 독트린'으로 역사에 이름을 깊이 아로새기고, 한창 골머리를 썩이고 있을 1970년대 말 엘비스 프레슬리를 맞이한다. 


'미국국립기록관리처'의 문건 중 최다 열람을 자랑한다는 '사건'인 엘비스 프레슬리와 리처드 닉슨 미국 대통령의 비밀 회동. 그들은 도대체 어떤 목적으로 회동을 갖게 된 것일까? 세기가 낳은 특이한, 어느 면에서는 위대한, 그렇지만 서로 전혀 맞지 않을 것 같은 그들이 말이다. 궁금증을 자아내는 그들의 만남이 영화로 제작되어 선보인다. <엘비스와 대통령>. 왠지 재밌을 것 같다.


엘비스 프레슬리와 리처드 닉슨, 'The King'들의 극비 회동


전 세계 젊은이들의 황제 '엘비스 프레슬리', 전 세계 자유주의의 지도자 미국 대통령 '리처드 닉슨'. 그들의 만남 자체가 흥미를 자아낸다. ⓒ(주)우성엔터테인먼트



원제는 'Elvis & Nixon'으로 대통령이 아닌 닉슨이다. 우리나라에서 엘비스는 알아도 닉슨은 상대적으로 잘 모를듯. 그리고 대통령이 이슈가 되다 보니, 제목을 살짝 비튼 것 같다. 아무래도 영화도 닉슨보다는 엘비스를 중심으로 흘러가지 않을까. 아무리 서방세계의 지도자라고 해도 'The King'이라 불리운 엘비스 프레슬리의 위상에는 모자랐을 것이다. 그런 두 사람이 만난다고 하니, 그 장면을 어떻게 그려냈을지 보고 싶어 몸이 근질근질 거린다. 


엘비스(마이클 섀넌 분)는 멤피스에서 워싱턴 D. C.로 날아간다. 목표는 단 하나다. '비밀 연방 요원'이 되기 위해서. 즉, FBI 요원이 되고 싶은 거다. 그는 파라마운트에서 일하고 있던 오래된 친구 제리 실링을 꼬신다. 


엘비스는 자신이 가진 엄청난 인기를 무기로 구구절절한 편지를 닉슨(케빈 스페이시 분)에게 전달되게끔 한다. 보좌진까지 금세 도달한 편지, 젊은층과 남부에 인기가 없는 닉슨에게 좋은 기회가 될 것임을 간파한 보좌진은 비서실장마저 설득시킨다. 결국 닉슨의 책상 앞에 놓인다. 


하지만 닉슨은 '딴따라'일 뿐인 엘비스를 거들떠도 보려 하지 않는다. 비서실장을 설득시킨 카드마저 아무 소용이 없다. 그렇지만 그에겐 금지옥엽 딸이 있었으니, 딸은 당연히 엘비스의 사인과 사진을 받고 싶다. 엘비스의 '보좌진(친구)'과 닉슨의 보좌진은 이를 이용해 엘비스와 닉슨의 만남을 성사시키고자 한다. 자, 그들 앞엔 무슨 일이 벌어질까? 젊은이의 상징과 꼰대와 아재의 상징이 만나니 볼 만하겠다. 


세계를 움직이는 거인들의 무섭고 졸렬하고 단순한 생각


엘비스와 닉슨의 만남은, 엘비스가 비밀 요원이 되고 싶어하는 일념 하에 추진된다. 닉슨은 그의 유명세를 이용해 먹으려 하는 것이고. 그런데 그 이면에는 생각보다 무시무시한 게 숨겨져 있다. ⓒ(주)우성엔터테인먼트



영화는 두 주인공에 집중한다. 특히 전반부는 엘비스 프레슬리에 할애하다시피 한다. 그가 왜 비밀 요원이 되고 싶어 하는지, 어떻게 닉슨과 비밀회동까지 하게 되는지, 그의 고뇌가 무엇인지. 그러며 1970년 당시를 훑는다. 엘비스의 인기도 그렇지만 영화의 주가 되는 비밀 요원 되기도 시대의 산물인 것이다. 


1970년 당시는 전 세계적은 격렬했던 68 운동의 여파가 아직 가시지 않은 가운데 베트남전쟁 반대와 흑인인권 운동까지 절정에 치달았을 때다. 엘비스는 이런 모습에서 미국이라는 국가의 위기를 느낀다. 그 중에서도 마약을 하는 이들이 가장 위협이 된다고 생각하고는 비밀 요원이 되어 그들을 쓸어버리고자 한다. 이런 생각은 닉슨도 하고 있었을 게 분명한 바, 우습지만 그들은 세계를 움직이는 거인들이 아닌가. 


우습고 어이없고 황당한 엘비스의 바람은 당시로선 사회를 지탱하는 큰 줄기였다. 극한의 대립과 혁명의 불꽃이 전 세계를 휘몰아치는 가운데, 국가의 존립을 걱정하며 마약사범을 소탕하려는 '정의로운' 생각과 행동이지 않은가. 지극히 무섭고 졸렬하고 단순하고 확실한 생각이다. 그런 생각을 'The King'이라고 불릴 정도의 사람이 하고 있다는 게 치가 떨린다. 


닉슨도 크게 다르지 않았을 거다. '닉슨 독트린'을 발표하며 동맹국에서 한 발 뒤로 빼며 자국에 힘을 실은 것도 비슷한 맥락인 것이다. 미국이라는 국가의 위기. 물론 그의 이름 앞에는 임기 4년의 미국 대통령 말고도 서방세계의 지도자라는 수식어가 붙는 만큼, 쉽지 않은 선택이다. 해야 할 생각도 많고 해야 할 것도 많다. 그 앞에 비밀 요원이 되고 싶다며 미국을 걱정하는 전 세계 최고의 스타가 나타났으니, 크나큰 힘을 얻을 게 분명하다.


소소한 추억팔이 정도로만 괜찮은 영화


영화는 단도직입적으로 말해서 볼 만하지 않다. 그나마 주연을 맡은 케빈 스페이시와 마이클 섀넌의 역사 인물 따라하기가 소소한 웃음을 줄 뿐이다. 그래도 소소한 추억팔이 정도는 될 것 같다. ⓒ(주)우성엔터테인먼트



실화를 바탕으로, 상당 부분은 상상력에 의해 만들어진 <엘비스와 대통령>은 코미디를 지향한다. 대놓고 웃기려는 부분은 아마 한 군데도 없을 텐데, 엘비스와 닉슨이라는 실존 인물을 생각하면 웃지 않을 수 없다. 그들의 얼굴, 표정, 말투, 행동, 생각까지 완벽에 가깝게 따라하는 두 배우의 연기(라기보다 모방?)를 보고 있노라면 말이다. 굉장히 진지한대, 굉장히 웃기다. 그들이 진지하지 않을 이유가 없지 않은가. 


드디어 영화 중반 이후 극적으로 만나게 되는 두 사람, 사실 영화의 재미는 그때부터 시작된다. 영화는 그 장면을 세계를 호령하는 '왕들의 만남'이라고 포장하는데 전혀 틀리지 않다. 두 명의 '왕'을 모시는 보좌진들 간의 유의사항 전달 회의를 보면 빵 터지지 않을 수 없다. 또 둘이 만나서 신경전 아닌 신경전을 벌이는 장면도 웃지 않을 수 없다. 집을 개축해서 1500평인 대통령 집무실보다 조금 더 넓어졌다고 자랑하는 엘비스, 닉슨 대통령 전용 간식인 M&M 초콜릿을 와구와구 먹어대는 엘비스...


시대를 이끄는 두 사람의 지극히 개인적인 이야기도 종종 비춰지니, 그것이 재미와 코미디의 한 요소이다. 둘의 공통점이라면 굉장히 천한 출신이라는 건데, 엘비스는 그게 한(恨)이 되었고 닉슨은 콤플렉스가 되었다. 엘비스는 특히 '남자'로서 '남자'만이 할 수 있는 일을 하고 싶어 했는데, 육군에 들어간 걸 자랑스럽게 여기며 명예 보안관을 넘어 요원까지 되고 싶어 했던 것이다. 닉슨은 사방에 '적'들이 있다고 생각하며 완벽주의자로서 엄청나게 일을 했고 누군가를 만날 때면 상대방을 완벽히 조사해 책 잡힐 일이 없게끔 했다고 한다. 영화에서 그런 모습을 살짝 엿볼 수 있다. 


이런저런 점들을 미루어 보아 많은 이들에게 어필이 될 만한 영화는 아니다. 굉장히 엄중한 시국이었던 당시에, 굉장히 엄숙한 만남이었을 거라 생각되는 이들의 회동이, 이런 식의 코미디 아닌 코미디, 정극 아닌 정극으로 비춰지는 게 결코 잘 와닿을 것 같진 않다. 소소한 추억팔이 정도는 괜찮을 것 같다. 


엘비스 프레슬리와 리처드 닉슨이라는, 당대를 넘어 역사적으로 유명한 인물들을 만나는 재미. 그것도 그들이 한 자리에서 만남을 가졌다는 실화를 바탕으로 했다는 놀라움. 무엇보다 그들이 서로 지극히 맞지 않을 게 분명하거니와, 'The King'이라고 불릴 만한 유이무삼한 존재들이라는 데에서 오는 대치의 격렬함. 아마 격렬한 기대만 하지 않고 본다면 적어도 격렬한 실망을 하진 않을 듯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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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래된 리뷰] <아메리칸 히스토리 X>


미국의 경우 오랫동안 보다 나은 삶의 기회를 찾아 미국으로 오는 모든 이에게 자유와 풍요를 약속하는 '아메리칸 드림'이 존재했다. 그 이면에는 잘 보이지 않는, 잘 드러내지 않은 큰 문제가 도사리고 있었다. 영화 <아메리칸 히스토리 X> 포스터 ⓒ뉴라인시네마



남 캘리포니아의 스킨헤드 데릭(에드워드 노튼 분)은 자동차를 훔치러 온 흑인들을 향해 무차별 총격을 가한다. 그러곤 신음하는 그들을 무참히 살해한다. 그와 함께 있던 여자친구와 남동생 대니는 놀라움을 금치 못한다. 충격적으로 시작된 영화 <아메리칸 히스토리 X>는 과거와 현재를 오가며 이야기를 전개한다. 


유럽 난민 사태가 전 세계적인 이슈로 떠오른지 한참이다. 인도적인 차원에서 그들을 수용할 것인지 자국의 이익을 위해 받아들이지 않을 것인지, 논란도 엄청 나고 결정도 쉽지 않다. 안 그래도 전 세계적인 경제 위기가 완전히 사그라들지 않은 시점에, 불황에 허덕이는 자국민들은 그 분노를 이주민에게 돌리기 쉽다. 그 어느 나라도 예외일 수 없다. 


미국의 경우 오랫동안 보다 나은 삶의 기회를 찾아 미국으로 오는 모든 이에게 자유와 풍요를 약속하는 '아메리칸 드림'이 존재했다. 미국의 상징인 '자유의 여신상'이 다름 아닌 아메리칸 드림의 상징과도 같으니 그곳은 정녕 꿈에서나 나올 법한 곳이 아닌가. 수많은 이들이 향했고, 때론 실패했고 때론 성공했다. 그리고 그 이면에는 잘 보이지 않는, 잘 드러내지 않은 큰 문제가 도사리고 있었다. 아메리칸 악몽(나이트메어)이다. 


아메리칸 드림이 아닌, 아메리칸 나이트메어


이 영화를 관통하는 큰 주제가 아메리칸 나이트메어다. 그 중심에는 스킨헤드 데릭이 있다. 영화 <아메리칸 히스토리 X>의 한 장면 ⓒ뉴라인시네마



이 진지한 영화를 관통하는 큰 주제가 바로 그 아메리칸 나이트메어다. 그 중심에는 스킨헤드 데릭이 있다. 그는 3년 전 소방수 아버지를 잃었는데, 다름 아닌 흑인 거주지에서 일을 수행하다가 강도의 손에 죽음을 맞았던 것이다. 그 일을 계기로 백인 우월주의자로의 길을 걷는다. 남동생 대니는 그를 영웅처럼 떠받든다. 


그런데 3년 간의 복역을 끝내고 나온 데릭의 행동이 뭔가 이상한 게 아닌가. 더 이상 스킨헤드의 길을 가지 않겠다고 천명하고는 대니를 설득하고 나선 것이다. 큰 깨달음이 없이는 그 길에서 헤어나오기 쉽지 않다. 대니 역시 그렇다. 결국 데릭은 결심을 하고는 자신이 감옥에서 겪었던 끔찍하지만 감동적인 이야기를 들려준다. 


그는 감옥에 가서도 여전히 스킨헤드로 행동한다. 역시나 그곳의 스킨헤드 그룹에 들어가 중추적인 역할을 한다. 한편 흑인 한 명과 같이 일을 할 수밖에 없는 상황에도 처한다. 그러던 중 스킨헤드 그룹의 대장이 유색인종과 거래를 하는 사실을 알게 된다. 참을 수 없는 데릭은 항의하다가 참혹한 일을 당한다. 그가 갈 곳은 없고, 유색인종 그룹한테 더욱 더 참혹한 일을 당할 것이 분명했다. 그런 그를 지켜준 이가 다름 아닌 그와 함께 일하는 흑인이었다. 그는 큰 깨달음을 얻는다. 


과연 그 깨달음은 다시 뭉쳐 비로소 온전히 잘 살아보려는 그의 가족을 지켜낼 수 있을까? 너무 늦은 게 아닐까? 그는 이미 돌이킬 수 없는 죄를 저질렀다. 흑인 두 명을 살해해 흑인들에게 언제 보복을 당할지 알 수 없다. 또한 복역이 끝나고 돌아와서는 백인 우월주의자들에게도 등을 돌렸다. 백인들한테도 언제 보복을 당할지 알 수 없는 일이다. 특히 대니는 그의 전철을 아주 차근차근 따라가고 있기 때문에 무슨 일을 당해도 할 말이 없는 것이다. 


본노 자체가 아니라, 대상이 잘못 되었다


분노가 생길 수밖에 상황이고, 분노는 반드시 풀어주어야 한다. 그런데 그 대상이 왜 시대와 나라와 위정자가 아니라 약자여야 하는가. 영화 <아메리칸 히스토리 X>의 한 장면 ⓒ뉴라인시네마



활발한 이주민 정책으로 아메리칸 드림이 절정이었을 시기에, 스킨헤드의 활동 역시 절정으로 치닫을 수밖에 없었다. 유색인종의 유입이 급격히 늘어나면서 자연스레 백인의 실업률이 높아질 수밖에 없었고 그에 맞춰 정권은 자유 경쟁을 활성화시키는 보수적 정책을 시행하고 유지했다. 이주민 정책이 활성화될 때에 일자리를 잃게 된 백인 청년들은 그 화살을 이주민들에게 돌렸고, 그 사상의 기반을 백인 우월주의에서 찾았다. 권력에서 소외되고 자본주의 경쟁에서 패배한 그 분노는 대단한 것이었다. 피해자의 입장에서 가해자의 입장으로 변하는, 그 우월한 느낌 또한 무시할 수 없다. 


혐한(嫌韓)으로 유명한 일본의 '재특회(재일 특권을 용납하지 않는 시민 모임)'도 그런 부류다. 장기 불황으로 실업률이 높아지고 많은 청년들이 절망에 빠져 있는 상황에서, 누군가 나서 '적'을 만들고는 그 적은 능력도 없거니와 선천적으로 후지다고 선전하는 것이다. 그러면 그들은 사상으로 똘똘 뭉치게 된다. 자신들은 우월한데, 다수의 적들이 침범해 어쩔 수 없이 자리를 보전하지 못하게 되었다는 기조다.


그런데 생각해보라. 피해자에서 가해자가 된 그들이지만, 자신들이야말로 피해자라고 약자라고 외친다. 여러모로 피해자였던 건 맞지만, 결코 약자는 아닌 것이다. 문제는 잘 살지 못하는 나라에서 왔을 대부분의 이주민이야말로 약자가 아닌가. 고로 피해를 당해도 그들이 더 많은 피해를 당할 게 아닌가. 


문제는 증오의 대상이 잘못 되었다는 점이다. 그들의 분노 자체가 잘못되었다고 생각하진 않는다. 분노가 생길 수밖에 상황이고, 분노는 반드시 풀어주어야 한다. 그런데 그 대상이 왜 시대와 나라와 위정자가 아니라 약자여야 하는가. 그건 명백한 오류다. 


이 영화가 괜찮은 이유


미시적으로 접근했기에 조금의 답을 찾을 수 있었다. 이런 류의 뿌리 깊은 대립은 개인 개인으로 접근해야 한다. 영화 <아메리칸 히스토리 X>의 한 장면 ⓒ뉴라인시네마



이 영화가 괜찮은 이유는 따로 있다. 그런 심각하고 첨예한 논란을 주제로 삼았다는 것도 점수를 듬뿍 줄 수 있겠지만, 그 문제를 굉장히 미시적으로 접근했다는 점이다. 통사적으로 접근했다면 오히려 받아들이기가 힘들었을지 모른다. 또한 조금의 답도 찾을 수 없었을 것이다. 더욱이 영화적으로 의미가 없었을 것이다. 그리하면 다큐멘터리 그 이상도 이하도 아니게 된다. 


미시적으로 접근했기에 조금의 답을 찾을 수 있었다. 이런 류의 뿌리 깊은 대립은 개인 개인으로 접근해야 한다. 영화의 한 명대사가 함축적으로 보여준다. "네가 한 행동들이 너의 삶을 좋게 만들었니?" 누구보다 투철한 스킨헤드인 데릭도 그 한 마디에 아무런 대답을 할 수 없었다. 그들이 원하는 건 여하튼 더 좋은 삶일 텐데 말이다. 유색인종을 모두 몰아내고 백인들의 세상을 만드는, 그들의 입장에서는 이보다 더 좋을 수 없는 그런 삶을 만드는 게 목표일 텐데 말이다. 


결국 황폐해질 수밖에 없는 행동을 했다는 것. 아무리 거창한 사상과 목표로 무장하고 있더라도 결코 삶을 더 좋게 만들 수 없다는 깨달음. 조직적인 거창함에서 사적인 삶의 세계로 내려올 때 알게 되는 깨달음이다. 거기엔 사소하지만 위대한 사랑과 우정이 있다. 이 영화가 말하고자 하는 게 바로 거기에 있다. 그걸 깨닫지 못하고는 이 대립은 영원히 끝나지 않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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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리뷰] <브루클린>


영화 <브루클린> 포스터 ⓒ이십세기폭스코리아


1950년대 아일랜드에서 미국으로 이민을 간 여성의 삶에서 무엇을 느끼고 무엇을 얻을 수 있을까. 무료한 일상을 뒤로 한 채 막연하게 더 나은 삶을 찾아 떠났거니와 집과 가족과 일과 사랑 사이에서 방황하는 모습은 흔히 볼 수 있겠지만, 거기에 인생을 건 절박함과 필사적인 모습이 비춰지지 않을 것이기에 쉽게 공감하기 힘들지 않을까. 


영화 <브루클린>은 대략 그런 정도의 단펵적인 정보를 얻은 후에 본다면, 훨씬 큰 재미와 감동을 받을 수 있을 것이다. 눈물을 짜내는 절박함 대신 공감 어린 성장 스토리가 있고, 지극히 개인적인 사랑놀음과 고민 대신 가족과 집 그리고 사랑 사이에서 고민하는 진정한 휴먼 스토리가 존재한다. 큰 갈등 없이 잔잔하지만, 그렇다고 전혀 우울하지 않은, 하지만 눈물샘을 자극하며 미소까지 짓게 만드는 그런 영화다. 


아일랜드 시골 소녀의 미국 상경 성공기


한 마디로 아일랜드 시골 소녀의 미국 상경 성공기라고 표현할 수 있겠는데, 요즘 영화 스타일에서는 좀처럼 나올 수 없는 비쥬얼과 스토리인 것 같다. 평범한 아일랜드 소녀 에일리스가 언니의 주선으로 미국에 가게 된다. 도착도 하기 전에 엄청난 고생을 하는데, 그건 도착해서 생활하고 일을 할 때도 마찬가지다. 특히 향수병은 어찌해볼 도리가 없는 불치병과 같은 것이다. 


10여 년 전, 나도 먼 타국 땅에서 1여 년간 살아본 적이 있다. 호주 브리즈번. 미국 브루클린과 이름뿐만 아니라 여러가지로 비슷한 느낌이랄까. 나도 에일리스처럼 초반에 고생을 많이 했고 향수병으로 극심한 우울을 겪었다. 아무리 그곳에 동향 사람들이 많아 '고향' 같은 느낌이 들었지만, 결코 '집'은 될 수 없었다. 참 많이 울었고 나를 달래기 위해 술도 참 많이 마셨다. 


영화 <브루클린>의 한 장면. ⓒ이십세기폭스코리아



에일리스는 향수병을 사랑으로 치유해 나간다. 아일리쉬 파티에서 우연히 이탈리아계 청년 토니를 만나 금세 사랑에 빠지게 된 것이다. 더할 나위 없이 순수하고 착하고 잘생기고 성실한 토니에게 에일리스는 조금씩 마음을 연다. 하지만 외로운 타국 땅에서는 사랑과 외로움을 착각하기 쉽다. 에릴리스는 고민 끝에 진심을 전한다. 사랑한다고. 


사랑을 하면 그곳이 곧 '집'


사람은 어디서든 사랑을 한다. 사랑을 하면 그곳이 '집'처럼 느껴진다. 가족들과 함께 하는 집이 집 같지 느껴지지 않는다면, 가족들끼리 사랑의 감정을 주고받지 못하고 느끼지 못하며 오히려 불편하다고 느끼기 때문이다. 타국 땅에서는 또는 외롭고 힘든 사람들끼리 있을 때는, 불편한 감정보다 서로 의지하고 아끼는 감정을 주고받곤 한다. 나 또한 그러했고 많은 사람들도 그렇게 제2의 고향, 제2의 집을 만들어 간다. 


에일리스 또한 점점 아일랜드를 잊고 브루클린을 집으로 생각하기 시작한다. 그렇게 사랑과 일과 인간관계에서 절정의 행복을 맛보게 되는 그 때 청천벽력과도 같은 소식을 듣는다. 언니의 갑작스런 죽음. 에일리스는 고민에 휩싸인다. 이제는 집이 되어 버린 이곳을 두고 다시 그곳으로 돌아갈 것인가. 비록 금방 다시 돌아올 거라고 약속을 하겠지만. 아무리 생각해도 다시 돌아갈 수밖에 없다. 다른 도리가 없다. 


영화 <브루클린>의 한 장면. ⓒ이십세기폭스코리아



다른 이유가 없으니 어쩔 수 없이 갔다가 금방 다시 돌아온다는 건, 말은 쉽지만 실행은 일생을 두고 고민해야 할 문제다. 인생이란 정녕 어떻게 될지 아무도 모르는 것이기에, 심사숙고하는 것도 모자라 하늘에 맡겨야 한다는 생각까지 하게 만든다. 더구나 1950년대라면 무게가 지금보다 훨씬 더 나갈 것이리라. 


사랑스럽고 아름답다


<브루클린>은 이 봄날에 연인과 함께 보기 더할 나위 없는 영화다. 사랑스럽고 아름답다는 진부하지만 가슴치는 표현이 적절할 듯하다. 여자주인공의 표정과 몸가짐의 변화에서 오는 확연한 성장을 바라보고 있노라면 뿌듯함을 금치 못할 것이다. 누구나의 한때를 보는 것 같다 가슴 먹먹하고 흐뭇해진다. 


남자주인공이야말로 이 영화가 갖는 사랑스럽고 아름다운 분위기에 방점을 찍는다. 그처럼 순수하고 착하고 성실한 청년이라면 누구나 좋아할 것이다. 또한 한 여자만을 바라보며 사랑하고 기다리는 남자는 참으로 멋있다. 그로 인해 에일리스는 힘을 내 웃음을 되찾고 비로소 살아갈 수 있게 되었다. 다름 아닌 그곳에서. 그렇게 영화에 빛이 살아난다. 


영화 <브루클린>의 한 장면. ⓒ이십세기폭스코리아



대부분의 삶이 단조롭고 소소하다. 바로 그 단조롭고 소소한 것에 진짜 삶이 있을지 모른다. <브루클린>은 심지어 사소하기까지 하다. 성장과 사랑과 죽음과 헤어짐과 만남, 그 얼마나 사소한 조각들인가. 삶에 있어 누구나 한 번쯤은 해보고 겪어봤을 것들이 아닌가. 그래서 그것들로만 이루어진 영화는 더 이상 찾아보기 힘든 것이 아닌가. 그럼에도 이 영화가 가슴을 울리는 건, 우리가 여전히 그것들을 찾고 갈망하고 곁에 두고 싶어한다는 증거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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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서평] <중국을 움직이는 거인들과의 대화>



<중국을 움직이는 거인들과의 대화> 표지 ⓒ카멜북스


어릴 때, 그러니까 20년 전에는 전자 제품을 살 때 삼성이니 LG니 한국 브랜드를 애용했다. 내가 아닌 부모님이 애용한 것이나, 나라도 그렇게 했을 게 뻔하다. 아는 게 그것 뿐이고 보이는 게 그것 뿐이었으니 말이다. 그러다가 10여 년 전부터 바뀌었다. 적어도 난 애플을 애용하게 되었다. 비록 상당한 고가이고 폐쇄적이고 이용하기도 불편하지만 괜찮았다. 스마트폰이니 MP3니 소형 가전제품을 애플로 도배했다. 


그렇게 다시 10년이 지난 지금은? 중국 브랜드로 조금씩 이양 중이다. 샤오미 미밴드와 보조배터리를 사용하고, 알리바바의 타오바오로 중국 제품을 직구한다. 동영상 사이트 소후 또는 요우투도우를 이용해 영화, 드라마, 예능을 시청한다. 텐센트의 QQ나 시나의 웨이보, 바이두 검색을 최소 한 번씩은 이용해봤다. 나도 모르게 나는 중국 브랜드를 섬렵하고 애용하고 있는 것이다. 이럴 줄은 몰랐다. 


요즘 나와 거의 혼연일체를 이루고 있는 샤오미의 미밴드는 샤오미의 3대 상품 중 하나다. 다른 두 개는 스마트폰과 보조배터리다. 타의 추종을 불허하는 저렴한 가격으로, 만만치 않은 아니 오히려 더 좋은 성능을 뽐내는 샤오미의 제품들은 오랜 애플 팬인 나조차 굴복시켰다. 초창기엔 '대륙의 실수'로 불리며 애플을 완벽히 모방하는 것에 그쳤지만, 이제는 '대륙의 실력'으로 불리고 있다. 누가 뭐라고 하든 세계적인 브랜드로 급부상하고 있는 것이다. 


4대 천왕과 함께 중국을 대표하는 12개 기업들


그런 샤오미와 더불어 중국 4대 천왕이라고 불리는 기업이 있는데, 알리바바, 텐센트, 바이두 그리고 샤오미이다. 물론 나는 이들 브랜드를 모두 접해보았다. 모르긴 몰라도 대부분의 사람들도 마찬가지일 것이다. 알리바바의 타오바오, 텐센트의 QQ와 위쳇, 바이두의 바이두, 샤오미의 제품들은 수많은 사람들이 사용하고 있다. <중국을 움직이는 거인들과의 대화>(카멜북스)에서 이들 4대 천왕과 함께 12개의 중국을 대표하는 기업들을 간략하게나마 접할 수 있었다. 


미국을 대표하는 기업, 그중에서도 전 세계적으로 유명한 IT 기업들 이야기는 그들 기업들을 세운 이들과 함께 널리 알려져 있다. 마이크로소프트의 빌 게이츠와 스티브 발머, 애플의 스티브 잡스와 스티브 워즈니악, 구글의 에릭 슈미트 등. 이들은 공교롭게도 거의 같은 시기에 태어나 거의 같은 시기에 사업에 뛰어들었다. 1950년대 초중반에 태어나 1970~80년에 사업을 시작했다. 이런 사례는 우리나라에도 있다. 지금 한국을 호령하는 IT 기업들인 넥슨, 다음, 엔씨소프트, 네이버는 1990년대 중반에서 후반 사이에 생겼다. 이들 기업을 창업한 이들이 공교롭게도 86학번으로 동일하다. 


그렇다면 중국은? 비슷하다. 1960년대 중반에서 1970년대 초반 사이에 태어난 이들이 2000년대를 거치며 성장해 2010년대에 이르러 중국을 등에 업고 전 세계를 호령하고 있다. 한국과 미국을 넘어 중국으로 흘러가는 분위기이다. 양(量)으로는 이미 세계 최고 반열에 올라 있는 중국이 질(質)까지 넘보고 있으니, 질로만 승부를 거는 다른 나라 기업들이 어찌해볼 도리가 없어 보인다. 


개인적으로도 이런 현상은 지극히 환영한다. 그동안 질적으로만 승부를 걸어 왔던 기업들의 행태는 참으로 볼 만했다. 혁명과도 같은 변화 속에서 선구자격인 그들의 제품을 고객들은 사용하지 않을 수 없었고, 가격 면에서 고객은 호구로 전락했다. 고객이 주인이 아니고 기업이 주인이었던 것이다. 따져보면 애플의 폐쇄적 디바이스 체제도 비슷한 맥락에서 이해할 수 있다. 기업이 고객에게 맞추는 게 아니라 고객이 기업에게 맞추는 게 아닌가. 


그런 와중에 중국 기업들이 그들이 가지지 못한 것들을 무기로 들고 나왔다. 제일 큰 게 가성비라고 할 수 있겠는데, 초창기에는 질로는 승부를 볼 수 없다고 판단해 그런 전략을 들고 나왔을 것이다. 다른 하나는 다름 아닌 '중국' 그 자체다. 세계의 1/5에 달하는 인구를 대상으로 축척한 자본과 역량 말이다. 이건 중국 기업의 힘이 아닌 중국의 힘이다. 


비로소 전 세계를 대상으로 승부를 보는 '중국' 기업


그렇다면 여기서 생각해봐야 할 것은 다름아닌 '중국'이다. 한국, 일본, 미국의 기업과 기업인들의 신화와 큰 차이점을 보이는 점이 바로 '중국'인 것이다. 아직까지도 그들을 '중국'의 기업이 아닌 중국의 '기업'이라고 생각할 수가 없다. 그들이 과연 중국을 등에 업지 않고 그 정도의 힘을 발휘할 수 있을까 하는 의문이 있다. 그래서 그들이 생각보다 훨씬 오랜 시간 동안 활동을 해왔음에도 우리가 알지 못하고, 또 이런 류의 책을 통해 알려지지 않은 건 그 때문일 것이다. 


이제야 막 소개되고 알려지는 건, 그들이 비로소 전 세계를 대상으로 승부를 보고 있다는 뜻이다. 그건 즉 오래지 않아 그동안 승승장구해온 그들 중 몇몇은 사라질 거라는 것, 반면 몇몇은 비로소 전 세계적으로 인정을 받는 기업으로 우뚝 솟을 거라는 말이 된다. 지금이 그 분기점이라고 해도 무방하다. 기존의 기업들과 '중국' 기업들의 대전이 발발하고 있는 한중간에 말이다. 


소위 춘추전국시대의 영웅들 이야기는 재밌다. 한치 앞도 알 수 없는 그 시대를 조망하는 건 불가능하지만, 나날이 변하는 것들을 체험하는 건 재밌고 흥미롭다. 그런 면에서 난 행운아이지 않을까. 혁명과도 같은 변화를 체험하고, 그 체험을 인지하고, 미래를 예측하고 기대하고. 계속 같이 하고 싶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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singenv

冊으로 策하다. 책으로 일을 꾸미거나 꾀하다. 책으로 세상을 바꿔 보겠습니다. singenv@naver.com Since 2013.4.16