문화대혁명 종결 이후 중국 영화의 급격한 성장(1978년~1996년)
1) 개혁시기의 영화
10년의 암흑기를 보내고 새로운 시기의 중국은 덩샤오핑의 개혁개방의 정책을 바탕으로 ‘현대화’를 추구하면서 사회의 혼란과 위기를 극복하려 하였다. 이로 인해 늘 정치적인 영향력에서 벗어날 수 없었던 영화계가 새로운 시기를 맞이하게 되었다.
어느 장르보다도 빠르게 구조적 재건이 이루어졌고 경제부문과도 연결되었다. 또한 탈정치화를 통해 동시대 삶에 대한 보다 사실적인 접근 시도하였고 다양한 주제와 논점을 취급하고 캐릭터의 전형을 탈피. 지식인, 과학자, 도시 젊은이, 해외동포, 청 왕조 귀족 등 다양한 인물을 등장시켰다. 또한 영화인들이 정치적 급진주의로 야기된 상처를 다양한 관점에서 탐구하려는 시도를 시작하였고 당시의 영화는 당의 문화정책을 비판하고 문화대혁명을 보다 큰 역사적 시각 하에서 조명하였다.
이렇게 국가정책에 방향을 맞춘 영화들이 많이 만들어졌다. 이 시기에 4세대, 5세대 감독들이 등장하였다. 그들이 거의 동시에 활동을 하였다고 하지만, 각 세대마다 처한 환경과 성장해온 시대적 배경 등이 달랐으므로 작품을 통해 각자가 추구하는 바는 달리 하면서 작품 활동을 하였다.
1979년 덩샤오핑은 미국을 방문하여 지미 카터 미국 대통령을 만난다. 개혁개방의 신호탄이다.
2) 예술과 상업
마오쩌둥 사후 새로운 지도자인 덩샤오핑은 경제부문에서만 개혁을 시도했을 뿐 정치, 문화에서는 그렇지 않았다. 과거와 마찬가지로 여전히 비판이나 독립적인 견해에 대해서는 강경하게 대응하였다.
당시의 반대파 예술가들과 지식인들은 권력기구에 속해있지 않아서 당을 위해 어떠한 선전 영화도 제작하지 않았다. 당은 이를 통제하기 위해 이중정책을 실시하였는데 당의 노선의 충실한 예술가들에게는 전폭적인 지지를 하는 반면 비판적인 예술가들에 대해서는 무자비한 탄압을 가하였다. 급변하는 사회를 무시하고 체제 유지에만 급급하였던 것이다.
그러던 중 1985년 덩샤오핑이 제창한 새로운 기준(예술은 국가나 이데올로기보다 사회에 먼저 기여해야한다는 기준)이 영화제작에 적용됨에 따라 영화의 경제적 성과가 강조되었다. 하지만 근본적으로 예술은 늘 정치노선의 요구를 충족시켜야만 했다.
1980년대 초 오락영화가 다시 선을 보이면서 1987년 이후에 빠르게 확산되었다. 아울러 시장개방과 상업성을 고려하기 시작하면서 상업영화가 높은 시장점유율을 확보하게 되었다. 탈이데올로기화와 철저한 수익성을 고려하였는데 겉보기에는 비정치적인 오락영화였지만 교묘히 중요한 정치적 요소를 담고 있었다. 당시에는 단순하고 영화적 가치가 없는 오락영화만을 주로 만들었는데 이는 엄청난 성공을 거두었다. 하지만 점점 확산되는 오락문화에 의해 젊은층이 빠져나가면서 이러한 종류의 오락영화는 점점 쇠퇴하게 된다.
우텐밍의 <변검>
이시기에는 4, 5세대가 등장하는데 여기에서는 4세대에 대해 알아보고 5세대는 6세대와 함께 뒤에서 자세히 알아보도록 한다. 대표적인 감독과 작품으로는 황젠중의 <뜻대로>, <양가부녀> 우이궁의 <파샨야우>, <성남의 옛일> 우텐밍의 <오래된 우물>, <변검> 셰페이의 <우리들의 들판>, <본명년> 등이 있다. 이들 중 특히 우텐밍은 4세대를 대표하는 감독으로 현실주의 전통 미학의 전통을 받은 작품을 만들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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