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생각하다/중국 영화사 개괄

중국 영화사 개괄: 암흑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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중화인민공화국과 문화대혁명 시기(1949년~1978년)


1) 중화인민공화국 시기의 사회주의 리얼리즘 영화


세계 2차 대전의 종결과 국민당의 패배로 1949년 중화인민공화국 수립된다. 그리고 중국은 사회주의 체제로 전환된다. 이는 역시나 중국문화계에 많은 변화를 일으킨다. 기존의 영화스튜디오를 인수하여 영화를 국민당보다 더욱 철저하게 도구화하려는 노력으로 이어지고 서방영화 대신 소련영화를 도입한다. 오락영화는 완전히 배제되고 오직 선전영화만이 만들어졌다. 소련의 영향에 의해 스탈린이 주창한 사회주의적 사실주의가 도입되면서 예술가들은 자신의 예술관과 당(공산당)의 예술관을 합치시켜야 했다.


억압적인 정책의 실패로 인해 1956년 '백화시대'(마오쩌둥의 연설-학문과 예술의 자유)가 열리면서 새로운 시도로 잠시나마 당의 노선에서 벗어난 영화를 제작할 수 있게 된다. 혁명과 전쟁이 차지했던 자리에 사랑이란 주제가 나타나기 시작한 것이다. 하지만 1957년 6월 공산주의와 경제 성장 추진을 목표로 대약진 운동이 시작되어 영화가 부각된다. 선전영화로써의 기능이 또 다시 주어진 것이다.



대약진운동의 전경.



2) 문화대혁명 시기의 중국 영화의 암흑기


대약진운동의 실패로 인해 자본주의의 정책을 일부 채용하여 실효를 거둔 새로운 권력 세력이 떠오른다. 이에 위기를 느낀 마오쩌둥은 부르주아 세력의 타파와 자본주의 타도를 외치면서 1966년 ‘문화대혁명‘을 실행한다. 이 시기에는 대부분의 영화제작사들이 폐쇄되었으며 감독, 배우 등을 포함한 수많은 영화 관련인 들이 시골로 보내져 노동 및 정치적인 정치적 재교육을 받았다. 또한 마오쩌둥의 부인인 장칭은 영화를 자신을 위한 정치적인 수단과 도구로 사용하였다.



문화대혁명 당시 복단대학교 대자보.



 이로 인해 중국 역사상 최악의 졸작들이 많이 만들어졌다. 마오쩌둥의 죽음으로 막을 내리기까지의 10년 동안 중국의 영화제작은 거의 정지 상태였고, 그나마 만들어진 몇몇 영화는 극좌 세력의 권력과시와 관객들의 의식화를 위한 선전 교육에 사용되었다. 이처럼 극단적인 정치 상황 속에서 영화는 본연의 가치가 완전히 무시당한 채로 왜곡된 침묵을 지켜야 했다. 결국 1976년 마오쩌둥의 죽음과 자유를 요구하는 대중들의 시위로 그 막을 내렸다. 


하지만 그의 후계자인 화궈펑은 마오쩌둥의 정책을 고수하며 별다른 변화를 모색하지 못하였고 개혁 요구도 계속하여 거부하였다. 그동안 상영이 금지되었던 영화들이 상당수 상영하여 성공을 거두고 제한적이지만 다른 나라의 영화도 수입되었지만, 그 당시에 만들어진 영화들은 여전히 정치적인 색깔이 짙었기 때문에 완전한 개혁은 이루어지지 않았다.


이 시기는 3세대에 속하는데 50, 60년대에 주로 활동하였고 80년대까지도 활동하였다. 대표적인 감독과 작품으로는 수이화의 <백모녀>, <임씨네 가게>. 링즈펑의 <중국의 아이들>. 셰진의 <홍색낭자군>, <무대 위의 두 자매>, <천운산전기>, <목마인>, <부용진> 등이 있다. 이들 중 특히 셰진은 비교적 최근까지 계속 활동하했던 3세대 대표 감독이다. 시대 반영에 뛰어났고 대중성을 고려하여 관객들의 호응을 유도 할 줄 알았다. 중국 영화의 거장으로 불린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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