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생각하다/중국 영화사 개괄

중국 영화사 개괄: 홍콩, 대만 영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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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금까지 4회에 걸쳐 살펴보니, 중국 영화는 그 본격적인 시작이 불과 몇 십년이 되지 않는 것 같다. 그 전에는 나라의 정치적 강압 아래서 그 기능을 발휘하지 못하고 움츠려서 활짝 꽃피지 못하였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세계적인 영화 시장을 급부상하고 있는 중국 영화계를 보고 있노라니 놀라움을 금치 못하겠다. 앞으로 얼마나 더 높이 비상할지 기대해보며 대륙 영화는 아니지만 중국의 문화권에 속해있는 홍콩과 대만의 영화에 대해 알아보겠다.


홍콩영화


1896년 뤼미에르 촬영 팀이 홍콩에도 오면서 주로 영화 상영을 하였다. 이렇게 시작된 홍콩의 영화는 1909년 아시아 영화사의 단편인 <옹기의 하소연>, <베이징 오리구이 도난사건>이 상영되면서 본격적으로 시작된다. 1920년대에 탄압을 피해 도망 오게 된 상하이의 좌익 예술가와 활동가들에 의해 발전되었으며 그렇게 상하이의 영향 하에 종속된다. 1930년대 일본의 침략과 내전으로 상하이의 영향으로부터 독립되면서 국제적으로 눈을 돌린다.


하지만 홍콩의 주인이 된 일본에 의해 주로 오락영화만 제작되어진다. 그러던 1945년 일본이 패망하고 원래의 위치를 찾게 된 홍콩 영화. 그것도 잠시. 국공내전으로 인해 또 다시 좌익들의 피난처가 되고 만다. 1949년 중국대륙에 인민공화국이 세워지고 그들의 영향에서 벗어나기 위해 영화를 이용한다.



리 샤오룽(이소룡)



전통과 서구를 동시에 지향하였으며 상업적 성공이 최우선이었다. 1970년대 리 샤오룽(이소룡)의 출현으로 무협영화가 대성공을 거둔다. 비록 단순한 줄거리에 빈약한 내용이었지만 화려한 볼거리로 서구 관객을 매료시킨다. 1980년대 중반 이후로는 도시 영화로 또 다시 대성공을 거두며 홍콩 영화는 세계적으로 유명해진다.


이후 미국 영화학교 출신 영화감독들은 홍콩의 정체성을 찾기 위한 영화를 제작한다. 그 당시의 홍콩 아방가르드 작품들은 전통과 현대, 홍콩 고유의 정체성, 중국 반환 후의 홍콩에 대해 깊이 있게 연구하고 고민하며 영화를 만든다. 과연 홍콩 영화가 과거 7,80년대 같은 성공과 명성을 얻을 수 있을지 그 귀추를 지켜볼 일이다. 대표적인 감독들로는 쉬안화, 팡위핑, 쉬커(서극), 왕자웨이(왕가위)가 있고, 이들 중 왕자웨이(왕가위)는 <중경삼림>, <화양연화>, <동사서독>, <일대종사> 등의 영화로 세계적인 대성공을 거둔다.



왕자웨이(왕가위) 감독



대만영화


대만영화의 경우는 1985년 일본에 할양되면서 외부로부터 완전히 차단되어 사실상 1901년부터 시작된다. 1901년 11월 17일 타이베이에서 일본인 사진작가 타카마쓰 도요지로가 돌린 영사기가 대만영화의 효시이다. 하지만 1940년대까지 일본의 전쟁 선전 영화만이 만들어졌기 때문에 그 사이의 영화에 대해서는 논할 가치가 없다. 


1945년 일본이 항복 하면서 대만영화는 새롭게 시작된다. 대륙에서의 국공내전에서 패해 대만으로 온 장제스에 의해 반공 영화가 제작되었고 1960년대에는 경제 발전으로 인해 상업 오락 영화가 만들어졌다. 1970년에는 그런 상업 오락 영화가 인기가 많았음에도 불구하고 지나친 상업화와 예술, 주제 설명의 제약으로 인해 점차 할리우드 영화가 부상하게 되었다. 1975년에 장제스가 사망하고 자유화 운동이 일어나면서 1982년을 기점으로 예술영화가 붐을 일으킨다. 1988년에는 장제스의 아들인 장징궈도 사망을 하고 대만영화는 그들의 고유문화와 현실로 눈을 돌리게 된다. 



리안 감독



과연 대만영화의 미래가 어찌될지 궁금하다. 그들만의 독자적인 작품 세계를 구현할 것인지 이대로 서구적 스타일에 순응할 것인지 아니면 중국 영향 하에 들러리로 전락할 것인지. 중국과의 관계가 그들 미래의 제일 중요한 문제가 아닐까 생각해 본다. 대표적인 감독으로는 리안, 허유샤오젠, 양더창 등이 있으며, 이들 중 리안 감독은 세계적인 감독으로써 할리우드까지 진출하여 지금도 활발히 활동하고 있다. <음식남녀>, <와호장룡>, <색계>, <헐크>, <라이프 오브 파이> 등의 대표작이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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