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기획] 출판사 편집자의 눈으로 본 대형서점의 도서관화


도서관보다 서점을 더 좋아했다. 읽다가 마음에 드는 게 있으면 살 수 있었으니까. 서점에서 책을 다 읽을 생각은 없었다. 그런데 많은 사람들이 도서관에서처럼 서점에서 책을 읽었다. 도서관보다 서점에 책이 많고, 서점에서는 도서관처럼 반드시 조용해야 할 필요도 없으니까.  


온라인 서점이 생긴 후로는 오프라인 서점으로의 발걸음이 뚝 끊겼다. 가더라도 구입까진 가지 않고 미리보기용으로 취급되기 일쑤였다. 온라인 서점의 파격적인 할인과 적립금, 굿즈 증정 이벤트 등으로 오프라인 서점은 설 자리를 잃었다. 나부터가 그랬다. 책은 '당연히' 온라인에서 구입해야 하는 것이었다. 


2014년 도서정가제 개정으로 온라인이나 오프라인이나 동일하게 10% 이상의 할인이 금지되었다. 이제 다시 오프라인 서점으로 발걸음을 옮겼을까? 아니, 책을 사는 구입률 자체가 폭락했다. 반값에 사던 책이 할인이 되지 않으니 터무니 없이 비싸게 느껴졌다. 싼 맛에 책을 사던 독자들이 떨어져 나갔다. 


온라인 서점은 굿즈와 리커버 등으로 활로를 모색했다. 사정이 더 안 좋은 오프라인 서점은 중고서점 오픈, 독서공간 마련, 서점의 멀티플렉스화 등으로 시장 확대 쪽에 주안점을 두었다. 거의 모든 면에서 논란이 일었다. 리커버는 예전부터 해왔던 '구간 표지 갈이'의 다른 말에 불과했고, 중고서점은 소형 헌책방의 반발을 불러일으켰다. 2015년 교보문고 광화문점에서 시작된 독서공간은 출판사의 반발이 있었다. 


교보문고 대형 테이블 소식


나는 크지 않은, 아니 작디 작은 출판사에서 편집장으로 일한다. 마케터나 영업자, 혹은 홍보 담당자를 따로 두지 못하는 형편이기에 오프라인 서점을 관리하지 못한다. 아주 가끔 가장 큰 지점 위주로 방문할 뿐이다. 담당 MD 1인이면 모든 업무가 가능한 온라인 서점과 주로 거래하는 편이다. 비단 우리 출판사뿐만 아닐 것이다. 


오프라인 서점에는 우리 출판사 책이 많이 깔려 있지 않다. 신간 출간으로 지점별로 0~10부 정도를 깔아도 베스트셀러를 만들지 못하면 2주 정도 후에 1부 정도는 벽면에 넣어지고 나머지는 모조리 반품으로 들어온다. 그러다 보니 반품에 매우 민감하다. 한번 출판사 손을 떠난 책들이 다시 돌아왔을 때 제대로 된 것들을 찾기 힘들다. 어찌저찌해 주문을 줄 때 그 책으로 다시 보낸다고 해도 또다시 돌아올 확률도 높거니와 그렇게까지 만드는 데 드는 품이 너무 많다. 


그 와중에 교보문고 광화문점을 위시한 '대형서점 테이블' 소식이 들려왔다. 이른바 '대형서점의 도서관화'. 대형서점에 걸맞는 대형 테이블을 서점 내에 들여놓고 방문객들로 하여금 자유롭게 책을 읽을 수 있게 한 것이다. 근처에 있을 카페에서 마실 것을 들고와서는 읽고 싶은 책을 가져와 착석, 누구의 눈치도 보지 않고 책을 읽는다. 


서점 입장에서는 오프라인 서점으로 사람들의 발길을 돌리려는 훌륭한 전략이겠다. 서점에 와서 책을 구입하기는커녕 서점에 오지도 않으니 일단 서점으로 사람들을 불러모아야 하지 않겠는가. 더욱이 이제는 대형서점에 가면, 서점보다 더 클 것 같은 팬시문구쇼핑몰과 카페가 함께 있다. 예전에도 이와 같은 모습이었지만 이제는 전과 비교할 수 없다. 더군다나 이제는 그곳에 공간이 생긴 것이다. 


출판사의 입장


출판계에는 서점뿐만 아니라 출판사도 있다. 물론 저자도 있지만 이 문제에서는 조금 떨어져 있다 하겠다. 출판사 입장에서는 '대형서점의 도서관화'가 심히 못마땅하다. 비록 오프라인 서점을 온라인 서점보다 훨씬 덜 중요하게 취급하고 있는 출판사들이 많다고 할지라도 말이다. 다름 아닌 반품 때문이다. 


오프라인 서점과의 계약은 주로 위탁이다. 책을 보내서 진열시켜 놓긴 하되 팔리는 대로 수금되는 형식이다. 한편 그렇게 보내진 책들 중 팔리지 않은 책은 반품으로 돌아온다. 물론 상품가치가 현저히 떨어진 채로. 와중에 테이블에서 자유롭게 책을 보는 정책이 시행되고 나서는 상품가치가 이전보다 더 떨어진 책의 반품 확률이 이전보다 더 높아지는 게 당연하지 않겠는가. 


오프라인 서점에서의 책 구입 확률이 더 떨어지는 문제도 있다. 도서관에서 책을 빌려와 집에서 읽는 사람보다 도서관에서 책을 읽는 사람이 많은 것처럼, 대형서점 안에 도서관을 차려놓으면 당연히 이전보다 서점에서 책을 구입하는 사람이 줄어들 것이다. 즉, 오프라인 서점으로 사람들을 끌어오되 사람들로 하여금 책을 구입하게 하는 건 오히려 꺼려하게 만든 결과를 초래했다. 


지금이 과도기일지 모른다. 인터넷, 스마트폰 혁명 이후 책을 읽는 사람은커녕 책을 집어드는 사람도 점점 없어지는 상황에서, 그래도 책이 있는 서점으로 사람들의 발길을 돌리려는 고육지책. (출판사의) 희생 없이는 (출판계의) 발전이 없다고 말하고 있는 것과 다름 아니다. 


대형서점의 도서관화, 그 본질적 문제


'서캉스'라는 게 있단다. '서점+바캉스'의 줄임말인데, 더위가 유독 맹위를 떨친 올 여름 무수히 많은 '-캉스'들이 사람들을 매혹했다. 홈캉스, 몰캉스, 호캉스, 백캉스, 숲캉스... 서점도 여기에 껴 있다니, 책을 좋아하고 출판계에 종사하는 사람으로 신기하거니와 대견(?)하기도 하다. 


소소하다면 소소한 문제들이 생기는가 보다. 자유로운 공간이 생기니, 우리나라 특유의 '자리' 개념이 생겨, 마치 도서관에서 자리를 골라 맡듯이 하는가 보다. 더욱이 이건 오래 점유하지 말라는 권유만 있을 뿐 시간 규제가 없기에 사실상 무제한으로 자리를 점유할 수 있는 것이다. 사람이 어느 때보다 많이 몰라다 보니 그런 점들에서 오는 불편함들이 보이는 것 같다. 


진짜 문제는, 본질적 문제는 우리나라 사람들이 책을 안 읽는다는 점에 있을 것이다. 이 사회가 그렇게 만들었다는 걸 부인할 수 없다. 책 읽을 시간 없는, 즉 저녁과 여가가 없는 사회. 지구에서 가장 빠른 사회. 지구에서 인터넷과 스마트폰 보급율이 가장 높은 사회. 책을 읽는 게 여러 모로 손해일 수 있는 사회...


출판계에 종사하는 사람으로 일말의 책임감을 느끼지 않을 수 없다. 사회는 빠른 속도로 변해가는데, 그저 '책 좀 읽으세요!' '도대체 사람들은 왜 책을 안 읽지'라고 권유하고 질문하는 데 그치고 마는 것이다. 더군다나 출판사의 절대적 파트너인 서점도 저리 빨리 변해가고 있다. '갑'(서점)이 변하면 '을'(출판사)도 변해야 하는 게 생존법칙이겠다. 출판사도 누군가는 이미 변하고 있고 누군가는 빨리 변해야 한다. 


출판계 전체를 위한 대안


그럼에도, 지금 당장, 저런 추상적인 관념이 아닌 구체적인 현실을 논할 때, 작디 작은 출판계가 더욱 작아지고 있는 와중에, 대형서점의 독단적이라고 할 수 있는 변화행태는 출판사 입장에서 납득하기 힘든 게 사실이다. 누가 봐도 '출판계 살리기'가 아닌 '서점 살리기'의 행태로 비춰질 수밖에 없지 않은가. 실상은 그렇지 않다고 해도 말이다. 


대형 오프라인 서점은 단기적이고 구체적으로, 출판사는 장기적이고 추상적으로 접근하는 게 대안일 듯하다. 현 출판계에서 대형서점이 변화를 이끌고 실행에 옮겼으니, 출판사와 협력할 수 있는 방안을 마련해야 한다. 변화로 인해 더욱 많아질 반품, 더 낮아질 가능성이 높은 구매율, 살려야 한다고 몇 년째 울부짖고 있는 도서관의 무용지물화... 출판계 내에서만 논의되고 논란되고 있는 사안들을 수면 위로 끌어올려야 한다. 


출판사는 양질 콘텐츠 제작, 콘텐츠 다각화, 자체 채널 확보, 단순 모임 형식의 협회 아닌 실질적 협동 협약의 조합 시작 등의 추상적이고 장기적 접근이 필요하다. 이런 접근이 선행되지 않는 단기간의 베스트셀러에 목 메는 데 급급하다면 머지 않아 낭떠러지를 만날 것이다. 


서점과 출판사 간의 긴밀한 '이인삼각'이 필요하다. 서로 가감없이 단기와 장기, 구체적인 사안과 추상적인 비전을 주고 받으며 눈앞의 현실을 수정하고 보이지 않는 미래를 설계해야 한다. 그 중심엔 단연 '책 읽는 사회 만들기'여야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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冊으로 策하다. 책으로 일을 꾸미거나 꾀하다. 책으로 세상을 바꿔 보겠습니다. singenv@naver.com Since 2013.4.16




나의 책장. 절반가량이 '읽지 않은 책'이다. ⓒ김형욱


난 초등학생이 된 8살 때까지 한글을 떼지 못했다. 지금은 물론 당시로서도 상상하기 힘든 나이인데, 그런 내가 지금은 일주일에 적어도 2권의 책을 읽고 서평을 쓰며 출판사에서 편집자로도 일하고 있다. 언젠가부터 당연한듯 이렇게 살고 있지만, 돌아보면 상상하기 힘든 생활 모습이고 직업 형태이다. 


초등학교 고학년이었던 것 같다. 내가 졸랐나 동생이 졸랐나, 아니면 아빠가 당신의 의지로 사주셨나 기억 못하지만 처음으로 '책'이라는 걸 샀다. 한국 및 세계 위인전 세트. 정말 맹렬히 읽었다. 뭔가 읽는다는 것의 재미를 그때 처음 느낀 듯. 지금 보면 표지에 스티커가 붙여 있는데, 다 읽은 책에 표시를 해둔 거다. 그것도 '먼저' 읽은 책에. 


그렇다. 나와 동생은 경쟁적으로 위인전을 읽었다. 좋아하는 위인을 점찍어 두고는 먼저 읽고 스티커를 붙여 표시를 했다. 스티커가 붙여져 있는 건 스티커 주인이 아닌 이는 볼 수 없었다. 피튀기는(?) 질주 끝에 남은 건 내가 어떤 위인을 좋아하는지에 대한 자가성찰이었다. 대신 내용은 기억나지 않았다. 책은 그렇게 나에겐 내용이나 콘텐츠보다 겉모양이나 물성으로 처음 다가왔다. 


그래서 지금도, 책을 좋아하는 사람으로서 말하기 부끄럽지만, 책을 볼 때 내실보다 외양을 훨씬 더 보는 편이다. 책을 '상품'으로 '판매'해야 하는 입장인 출판사 직원의 입장도 입장이지만, 10여 년 전에 교보문고 인수처에서 일하며 하루에도 수백 수천 권의 책을 다뤄본 경험도 이런 나의 특이점에 많은 영향을 끼친 것 같다. 


누군가는 책에서 텍스트가 차지하는 비중이 절대적이기에 외양은 필요 없고 내실이 중요하다고 한다. 책이라는 건 읽는 게 우선이고 그럼으로써 무언가를 얻어야 한다는 것이다. 하지만 나에게 책은 책 자체로 전부였고 전부이며 전부일 것이다. 


쓴도쿠


'읽지 않은 책'의 대표 1 ⓒ김형욱



고등학교 2학년 때부터 내 돈으로 직접 책을 샀다. 내 돈이 아닌 부모님 돈이긴 하지만, 여하튼 서점에 가서 한 권 한 권 보고 싶은 책을 내 돈 주고 사는 맛은 지금도 기억날 정도이다. 짜릿했다. 그때는 호흡이 긴 책만 샀다. 위인전으로 첫경험을 해서 그런지 역사소설이 다수를 이루었다. 


동시에 그때가 시작이었다. 호기롭게 사고는 보지 않게 된 책이 속출한 건. 처음엔 그저 책이 좋아서, 다 읽을 수 있을 것만 같아서, 재미있어 보이는 책만 구입했다. 다가가면 갈수록 무지막지해지는 게 책 세상이었다. 끊임없이 방대해졌지만 알지 못하는 게 너무 많았기에, 계속 살 수밖에 없었다. 


베스트셀러에 올라 있거나, 반드시 읽어야 할 리스트에 올랐거나, 좋아하게 된 작가가 생겼거나 하면 책을 모았다. '책 사는 데 돈 아깝지 않다'는 생각을 가지셨던 부모님의 전폭적 지원으로. 그러다가 욕심도 생기도, 조바심도 났다. 어디가서 '책 좀 읽는다'고 하려면 누가 지은 무슨 책인지 정도는 알아야 하지 않겠가. 본격적 책 읽기를 늦게 시작했다고 느낀 만큼 남보다 더 빨리 많은 정보를 습득하고 싶었다. 


지금도 비단 책뿐만 아니라, 나는 접하는 대다수 콘텐츠를 단순 정보로 접하고 습득하고 외우려 하는 경향이 강하다. 책은, 그 시작이 위인전 빨리 읽기였으니 오죽하겠나. 단순 정보로는 모자라니 약간의 추가 지식을 습득하기 위해서는 눈앞에 항상 보이는 게 가장 좋다. 책은 그렇게 내 눈앞에 쌓여 갔다. 


사실, 이런 모습은 심하게 이상할 건 없다고 생각한다. 누구는 컵을 모아 전시하고 누구는 신발을 모아 전시하고 누구는 인형이나 프라모델을 모아 전시한다. 다. 컵은 물을 담는 목적이 있고, 신발은 발을 보호하는 목적이 있으며, 인형이나 프라모델은 갖고 놀아야 하는 목적이 있다. 책에도 읽어야 하는 목적이 있다지만 전시하는 것도 충분히 가능하지 않나 싶다. 


일본어로 '쓴도쿠(つんどく)'라고, '책을 사서 읽지 않고 쌓아두는 일'의 속어를 지칭하는 말이 있다고 한다. 딱 봐도 나를 지칭하는 것 같은데, 그리 좋지만은 않은 의미로 쓰이는 것 같아 속이 좀 상한다. 그런 한편 나말고 그런 사람이 많다는 얘기이기도 해 안심이 된다. 여하튼, 난 자신있게 말할 수 있다. 안 읽는 책을 사고 있다고. 


난 읽지 않는 책을 산다


'읽지 않은 책'의 대표 2 ⓒ김형욱



결혼해서 사는 곳을 옮기기 전, 내 방은 책의 무덤 같았다. 보기 안쓰럽게 쌓여있었는데, 보다 못한 부모님이 꽤나 큰 책장을 사주셨다. 책들은 얼추 제자리를 찾았는데 그 책장마저도 금방 차버렸다. 나는 책들을 팔기 시작했다. 버리기엔 아까우니까. 추리고 추리고 추려서 팔고는 가차없이 다른 책들을 사서 그 빈자리를 채웠다. 수백 권을 팔았지만 그보다 많은 수백 권이 아직 그 자리에 있다. 


결혼해 이사를 하면서 문학 책들 위주로 들어왔다. 작디 작은 집의 거실 태반을 책장이 차지했고 이제 그 책장도 모든 자리를 책들이 채워가고 있다. 이곳에서도 역시 수백 권을 팔았지만 그보다 많은 수백 권이 아직 그 자리에 있다. 요즘은 책을 사는 걸 이전보다 많이 줄이는 편이다. 나중에 더 큰 집으로 이사를 가면 살 책들을 장바구니에 수십 수백 권씩 모셔 놓고서. 


여전히 사는 책의 절반 가까이는 읽지 않는 책이다. '앞으로 영원히 절대 읽지 않을 것 같은 책'도 있고 '언젠가 한 번은 읽을 것 같은 책'도 있다. 이 책들은 안타깝게도 책의 목적인 '읽기'가 아닌 '관상'용으로 내 서재에 들어앉아있다. 그렇지만 나에게서 그 어떤 책들보다 극진한 대접을 받고 있다. 이상하게도 난 다 읽은 책보다 읽지 않은 책에 더 시선이 가고 손이 간다. 심지어 어떤 기대와 설렘까지 느낀다. 


앞으로도 난 '읽지 않는 책'을 살 것이다. 고등학교 3학년 때 어떤 '소설 쓰기' 책에서 읽은 것 같은데, 어떤 교수가 이런 말을 했다고 한다. "산 책의 70%만 읽고 30%는 거들떠보지도 않는다."고 말이다. 그 반대일지도 모른다. 난 그때도 지금도 앞으로도 그 문구를 생각했고 생각하고 생각할 거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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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형욱



지난 7월 4일부터 7일까지 제주도로 여름휴가를 다녀왔습니다. 장인어른, 장모님, 처남, 아내, 그리고 저 5명. 개인적으로 제주도를 많이 가보지 않았기에 그냥저냥 가는 휴가보다 더 설레고 들떴죠. 하지만 한편으론 두렵기도 했습니다. 다름 아닌 3일째에 잡혀 있는 한라산 등반 때문이었죠. 


산을 타는 데 두려움은 전혀 없습니다. 어렸을 때부터 높지 않으나마 산을 자주 다녔습니다. 한 번도 중간에서 퍼진 적은 없었죠. 그런데 결혼하고 수원의 처가 근처에 내려와 살게 된 후 언젠가 한번 장인어른, 장모님과 함께 광교산이라는 산에 함께 다녀온 후 산에 대한 두려움이 생겼고 이후 2년 정도는 산에 가본 적이 없습니다. 


알고 보니 산을 어마어마하게 잘 타는 체력 좋은 장인어른과 장모님을 따라가겠다고 멋모르게 덤빈 탓이었죠. 채 해발 600m도 되지 않는 산을 정상도 밟아보지 못했습니다. 정상 근처까지 가서 그야말로 벌렁 누워버렸죠. 퍼진 것입니다. 퍼져 누운 채로 장인어른, 장모님, 아내가 정상을 다녀오는 걸 보고 있었습니다. 


폭우 속 출발


ⓒ김형욱



이틀째인 7월 5일부터 제주도에 비가 내리기 시작했습니다. 한라산으로 출발하는 다음날에도 비가 내렸고요. 새벽 5시부터 등반이 가능한데, 우린 5시 20분 경에 도착했습니다. 그러기 위해 3시 30분에 기상해 준비하고 4시 조금 넘어 출발했는데, 1미터 앞도 보이지 않을 만큼 안개가 심한 도로를 뚫고 도착했더랬죠. 


솔직히, 중간에서 포기해도 상관없다고 생각했습니다. 가족들한테도 그렇게 말했죠. 설상가상으로 비도 오는데 무리도 이런 무리가 없다고 생각했습니다. 그래왔던 것처럼 아버님과 어머님이 먼저 출발해 조금 뒤엔 찾아볼 수 없을 정도가 되더군요. 처남도 바짝 뒤를 따랐습니다. 비록 군대를 제대한 지 얼마 되지 않았다 하더라도 그 속도면 퍼질 게 분명하다고 생각했습니다. 


아내와 저는 조금 티격태격했습니다. 저도 모르게 아내에게 빨리 따라잡자고 윽박을 지르고 만 것이죠. 아내는 그러다가 퍼질 게 분명하다고 했고 저는 바로 수긍하고는 우리의 페이스대로, 즉 아내의 페이스대로 길을 나섰습니다. 천천히, 부담 갖지 말고, 그렇지만 포기 하지 말고. 


초반, 별 거 없는 길인데도 상당히 힘들었습니다. 아직 숨이 터지지 않았기로서니 이렇게 답답할리가 없었죠. 알고 보니 우비 때문이었습니다. 비는 점점 더 강도를 더해갔지만 우비를 벗지 않을 수 없었습니다. 우린 우비를 벗고 조금 더 가뿐한 육체와 정신으로 중간 지점으로의 길을 재촉했습니다. 


관음사 탐방로


ⓒ김형욱



한라산 탐방로는 7개가 존재한다고 합니다. 그중 어승생악과 석굴암 탐방로는 1km 남짓한 길이로 산책로 정도이고, 어리목과 영실과 돈내코 탐방로는 백록담을 가는 코스가 아니죠. 남은 게 성판악과 관음사 탐방로인데, 성판악은 가장 길지만 비교적 무난하고 관음사는 최악의 난이도를 자랑한다고 합니다. 하필 성판악 탐방로가 단기적으로 폐쇄되었기 때문에 우린 관음사 탐방로를 이용했습니다. 


왕복 19.4km에 정상까지 가는 데만 평균 5시간이 소요된다고 알려진 관음사 탐방로. 아버님과 어머님은 왕복 6시간을 목표로, 우리는 왕복만을 목표로 잡았습니다. 하산해서 점심을 먹는 코스라고 할까요. 얼핏 불가능에 가까워 보입니다. 더군다나 아내의 페이스는 그리 빠르지 않은 것 같았거든요. 아니, 느려보였습니다. 


결론부터 말하자면, 산을 타는 게 두려워진 제가 일명 '헥헥'거리는 걸 단 한 번도 하지 않았을 정도였습니다. 남한 최고의 높이 한라산의 최악의 난이도를 자랑하는 관음사 탐방로를 폭우 속에서 등반하면서 오직 코로만 숨을 쉬었습니다. 자기만의 페이스를 유지하는 게 이렇게 중요한 것입니다. 


'페이스 메이커'를 아시는지? 장거리 육상 경기에서 일정한 거리까지 선두를 이끌어 주는 역할을 맡은 선수를 말하죠. 이번 한라산 등반에서 제 아내가 그런 역할을 한 게 아닌가 싶어요. 페이스 유지와 더불어 '함께' 하는 사람의 존재가 이렇게 중요한 것입니다. 못 탈 산이 없죠. 


백록담 정상 


ⓒ김형욱



한라산 관음사 탐방로 중간에는 삼각봉 대피소라 하여 쉼터 비슷한 곳이 있습니다. 그곳에서 한 번 쉬면서 이것 저것 챙겨 먹고 체력을 보충했는데요. 급격히 추워지더군요. 우비를 다시 챙겨 입지 않을 수 없었습니다. 비록 등반에 방해만 할 뿐이라고 하더라도 말이에요. 이후부턴 몸도 마음도 엉망진창이 되어 갔지만, 이미 반이나 왔다는 생각 하나로 버텼습니다. 


한라산은 정녕 천해의 자연 그대로를 유지하고 있었습니다. 해발이 높아질수록 더욱 그러했죠. 동식물에 관심이 많고 일가견이 있는 아내의 말에 따르면, 평소에 종종 봐왔던 식물들의 제대로 된 모습을 볼 수 있었다고 합니다. 정상 근처에서는 어린 노루도 볼 수 있었습니다. 폭우에 안개까지 짙은 날씨의 한라산 정상에서 평화롭게 풀을 뜯어먹고 있는 노루라니, 비현실적이었습니다. 


결국 백록담 정상에 도착했지만 너무나도 심한 안개로 백록담은 보이지 않았습니다. 심지어 원래 백록담 위치도 잘 찾지 못했죠. 여하튼 시간은 9시 반이었습니다. 4시간 만에 올라온 것이죠. 아버님과 어머님은 한참 전에 내려가셨고, 정상에는 부부로 보이는 두 남녀가 있었습니다. 중간에서 내려오는 한 명을 추가로 보았으니, 아마도 우리가 7월 6일 1950m의 한라산 등반 6, 7번째 사람들이었을 겁니다. 


내려오는 건 수월하리라 생각했습니다. 그냥 내려오면 되는 것이니까요. 그런데, 생각하지 못한 게 있었습니다. 폭우. 폭우 때문에 발을 디디는 모든 게 미끄러웠고 길마다 물이 고여 있었습니다. 올라갈 때보다 온몸에 훨씬 더 많은 힘을 실어야 했죠. 그리고 나름 뛰어서 빨리 내려온다고 생각했는데 생각보다 훨씬 느렸습니다. 10km 육박하는 길이 얼마나 지루하던지요. 정말 힘든 한라산 하산길이었습니다. 


시작부터 끝까지 정말 어려운 길이었습니다. 한라산이라는 이름이 주는 압박과 폭우가 주는 물리적 압박만 해도 쉬이 헤쳐나가지 못할 만큼 엄청난 것이었죠. 그 모든 걸 뚫고 올라갔다 내려오는 데 7시간 정도가 걸렸습니다. 왕복하는 데 평균 10시간인 탐방로를 말이죠. 이제 가지 못할 산이 없을 것 같습니다. 이 모든 건 한라산등정인증서가 증명해줄 것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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冊으로 策하다. 책으로 일을 꾸미거나 꾀하다. 책으로 세상을 바꿔 보겠습니다. singenv@naver.com Since 2013.4.16




올해는 7월 4일에서 7일까지 제주도로 3박 4일의 여행을 떠납니다. 여름휴가로요. 결혼하고 나서 그래왔듯 처가 식구들과 함께입니다. 장인어른, 장모님, 처남, 아내, 그리고 나. 이번에는 처남도 함께 합니다. 지난 2년간은 군인 신분으로 함께 하지 못했지요. 저에게 있어서만큼은 새로운 멤버가 추가되어 또 다른 설렘과 기대가 있습니다. 


이번 휴가여행에 있어 아내가 특별한 걸 준비했습니다. 여행 안내서, 알림장, 개인일기장이 혼합된 얇은 책. 이번 여행 총책임자로서 몇 개월에 걸쳐 계획을 짜고 정녕 '한 땀 한 땀' 장인의 손길로 책을 엮어냈습니다. 책의 기획, 원고, 디자인까지 모조리 혼자 한 것입니다. 인쇄와 제책만 외주를 주었고요. 


출판사에서 책을 만드는 저도 혼자서 기획하고 원고를 만들고 디자인까지 해낼 수는 없습니다. 그 수준이 높고 낮음을 떠나서 말이죠. 능력은 고사하고 생각 자체를 할 수 없을 것 같아요. 아내는 생각한 그대로를 실천에 옮겨서 실물을 내놓았습니다. 이제는 대단하다고밖에 할 말이 없습니다. 왜 '이제'냐고요? 사실 아내에게는 이런 책이 몇 권 더 있습니다. 제 아내만의 여행법이라고 할까요. 


여행 준비의 자연스러운 결과물


아내의 여행 책들 ⓒ김형욱



소개를 한번 해보겠습니다. 책 형태로 만들어져 있는 건 2013년 일본 도쿄 6박 7일 여행이더군요. 그전까진 주요 정보만 출력해서 가져갔다고 합니다. 혼자만의 여행이 아니었던지라 하나하나 자세한 일별은 불필요했던 거더군요. 그런데 2013년 도쿄 여행은 난생 처음 혼자 가는 해외 여행이었습니다. 무섭고 두려웠죠. 


현지에 가서 길지 않은 시간 동안 어떻게 하면 재밌고 편하게 구경하고 이동하고 먹을지 고심하기 시작합니다. 기존에 나와 있던 가이드 책은 만인을 위한 것이지 자신만을 위한 것은 아닙니다. 인터넷도 마찬가지고요. 아내는 그중에 오직 자신만을 위한 정보를 뽑아내어 정리하고 공부합니다. 책은 그 자연스러운 결과물입니다. 


해당 도시의 관광청 홈페이지에서 가장 많은 정보를 얻는다고 합니다. 우선 지도를 일별하며 숙소를 중심으로 묵을 곳과 구경할 곳과 먹을 곳의 후보지를 선정한다. 그러곤 가장 빠르면서도 즐길 만한, 예를 들면 이왕 가는 김에 잠깐 들릴 만한 곳들을 곁들여 루트를 짭니다. 혹시 모를 돌발상황에 대응할 수 있는 방안도 철저해야 하구요. 


책을 만들 정도로 준비를 하다 보니 여행할 도시를 어떤 면에서는 현지 사람보다 더 잘 알게 됩니다. 가령, 서울 사람도 서울의 숨은 명소를 알지 못하는 경우가 다반사인데 외국인 관광객이 오히려 그런 곳을 잘 찾아가는 식이죠. 그래서 현지에 가면 이 책을 굳이 보지 않아도 되는 수준에 이릅니다. 


단기 여행과 장기 여행


아내의 여행 책들(이전) ⓒ김형욱



아내의 2015년 한 달여의 대만 타이베이 여행 책은 의외로 얇습니다. 여행이라기보다 사는 것에 가깝기 때문에 완벽에 가까운 계획과 물색과 루트까지는 필요가 없었던 것이죠. 대신 가봤으면 할 곳들의 리스트와 함께 그 결과물을 남겨 왔습니다. 도장이 굉장히 많이 찍여 있는 걸 보니 도장 인증을 한 것 같네요. 소소한 일기도 눈에 띕니다. 


단기 여행과 장기 여행을 준비하는 방법에 차이를 두어야 하는 이유가 여기 있을 것입니다. 장기 여행을 단기 여행처럼 하면 일찍이 지쳐버려 돌아올 때쯤이면 아무것도 하지 못할지도 모르겠지요. 그런 일이 없도록 조절을 잘 해주세요. 아내의 대만 여행 책이 시사하는 바입니다. 


이와는 정반대로 2016년 호주 브리즈번으로의 우리 신혼여행 책은 굉장히 두툼한 편입니다. 그 어느 책보다 정보가 많고 철저하며 현지에서 기록했으면 하는 페이지들이 많지요. 비할 바 없는 정성이 느껴집니다. 당시의 기억도 새록새록 나고요. 아내한테 미안한 시간이었습니다. 


우리는, 아니 아내는 신혼여행을 자유여행으로 기획했습니다. 어느 누구의 손도 타지 않고 직접 말입니다. 누구라도 이 책 하나면 혼자서도 지금 당장 브리즈번이 자랑하는 모든 것을 체험하며 지내다 올 수 있을 것입니다. 그런 한편 단순 관광 여행이 아닌 '살아보기' 콘셉트였습니다. 아침에 동네를 조깅하고 마트에서 장도 보고 주말에만 서는 마켓도 구경하고요. 이 콘셉트는 아내가 추구하는 여행 스타일이기도 합니다. 여행의 개념을 달리하는 특별함이 엿보입니다. 


여행, 그 전과 중과 후


아내의 여행 책들(최근) ⓒ김형욱



이제까지와는 달리 2017년부터는 전과 비교불가의 책을 만들어 냅니다. 일본 교토와 오사카로의 여행이었습니다. 이 역시 완벽하진 않지만서도, 책을 만드는 사람의 입장에서 봤을 때도 굉장한 편입니다. 나름대로의 차례와 판권도 존재하고 전체적인 짜임새가 수준 높네요. 


여행지를 거시적으로, 미시적으로 조망하고는 해당 여행 또한 거시적으로, 미시적으로 짚어봅니다. 그러곤 여행 관련 정보를 한데 모아 보여주고 여행자의 정보를 한데 모아 보여주며 마칩니다. 전체적으로 거시와 미시를 줄세워 체계가 확실합니다. 일본이라는 나라 정보를 한눈에 훑게 하는 거시와 숙소 가는 길 또는 유심 교체하는 법의 아주 자세한 미시의 조화가 인상 깊습니다. 


그리고 이번 2018 여름휴가 제주도 여행 책입니다. 우리나라이거니와 많이 가봤었고 길지 않은 3박 4일의 여정이기에 얇게 나왔지만, '책'이라는 이름에 가장 걸맞은 작품을 만들어 냈습니다. 특히 천편일률적인 디자인에서 완전하다고 할 만큼 벗어나, 오밀조밀한 포인트와 함께 핵심을 짚었습니다. 아내가 추구하는 여행법에 점점 가까이 가 완성으로 가고 있다는 게 느껴지네요. 


여행은 물론 여행지에서의 여정이 가장 중요하겠지요. 하지만, 아내의 여행법을 살펴보면 진정한 여행의 완성은 여행의 전과 후에 있는 게 아닐까 하고 생각하게 됩니다. 책으로 엮어낼 정도로 여행을 준비하고, 그에 따른 효율적이고 여유로운 여정을 만끽하며, 여행의 결과물과 기록을 영원에 가깝게 되새기는 것. 그런 여행을 함께 할 수 있는 저는 행운아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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冊으로 策하다. 책으로 일을 꾸미거나 꾀하다. 책으로 세상을 바꿔 보겠습니다. singenv@naver.com Since 2013.4.16




[기획] 언론인의 모습과 자세를 들여다보는 영화들


언론은 힘이 셉니다. 그 자체로 이 세상 모든 것 위에 군림할 수 있는 권력을 가지고 있죠. 그래서 언론에게는 특별히 반드시라고 해도 좋을 만한 통제가 수반되죠. 모든 게 그 가공할 파급력에서 기인하는데, 가장 먼저 절대 거짓말을 해서는 안 됩니다. 사실은 물론 진실을 추구해야 하고, 공적으로 행동해야 합니다. 그런 것들이 선행된 후에 누구도 그들이 보도할 권리를 통제할 수 없는 자유의 권리를 얻는 것입니다. 


역사상 수많은 사건사고들이 언론을 통해서 알려졌습니다. 사실 대부분의 사건사고들이 그러했었겠죠. 언론의 권리와 의무를 다한 권리라 하겠습니다. 물론 쉽지 않았을 거라 생각합니다. 실제로도 많은 어려움이 있었죠. 다 완벽하지 않은 사람에 의해 행해지는 것인지라, 실수도 있었겠거니와 유혹도 있었을 것입니다. 


그런 와중에 수많은 어려움을 극복하고 언론의 소임을 다한 이들이 있습니다. 영화가 그런 '위대한' 이들의 이야기를 그냥 지나칠리 없죠. 기억해야 하고 되새겨야 하고 현재를 반추해야 합니다. 여기 위대한 언론인을 다룬 영화 몇 편을 불러내어 보겠습니다. 그들이 다룬 사건사고의 위중함과 심각성보다, 그런 사건사고를 다룬 언론인의 모습과 자세를 들여다보는 시간이 되었으면 합니다. 




<더 포스트>


영화 <더 포스트> 포스터. ⓒ이십세기폭스코리아



미국을 넘어 전 세계를 뒤흔든 1971년 <워싱턴 포스트>의 '펜타곤 문서' 폭로를 다루었다. 본래 최초 보도는 <뉴욕 타임스>였던 바, <워싱턴 포스트>는 정부에 의해 보도가 금지된 '펜타곤 문서' 폭로를 오랜 고심 끝에 결정한다. 거기엔 톰 행크스가 분한 편집장 벤의 언론인으로서의 자세와 메릴 스트립이 분한 발행인 캐서린의 여성으로서의 성장이 겹친다. 스티븐 스필버그 감독은 이를 훌륭히 조합해냈다. 


너무나도 유명한 사건이기에, 그 사건 앞에 충분히 영화의 모든 것이 휩쓸려 버릴 수 있었으나 '언론'과 '여성'이라는 투 트랙을 처음부터 끝까지 고집스럽게 잡아 밀고 나간 모습에 아낌없는 갈채를 보내고 싶다. "우리가 보도하지 않으면, 우리가 지고 국민이 지는 겁니다"라는 벤의 캐서린에게 보내는 절규어린 대사가 기억에 남는다. 



<모두가 대통령의 사람들>


영화 <모두가 대통령의 사람들> 포스터. ⓒ워너브라더스



<더 포스트>의 주인공 <워싱턴 포스트>가 다시 한 번 큰 일을 해냈다. 영화의 말미에도 잠깐 모습을 드러내는데, 1972년 6월 닉슨 대통령의 재임을 위해 공작반이 워싱턴에 위치한 워터게이트 빌딩에 잡입해 도청장치를 설치하려다가 발각되어 잡힌 이른바 '워터게이트' 사건을 다루었다. 


자그마치 더스틴 호프만이 분한 칼 번스타인 기자와 로버트 레드포드가 분한 밥 우드워드 기자는 그야말로 발로 뛰고 눈으로 보고 손과 귀와 입으로 전화한다. 영화는 이 아날로그적이기 짝이 없어 루즈하기 쉬운 모습을 지극히 다큐멘터리적으로 보여줌에도 불구하고 긴장감을 유지했다. 


단순히 언론인으로서의 기자만 보여준 게 아닌, 정치적 역학관계도 여과없이 보여줬기 때문이 아닐까. 엄청난 사건에 뛰어든 두 기자의 치열한 언론현장과 더불어 영화적인 흥미의 맥락까지 살려낸 수작 중 수작이라 하겠다. 



<굿나잇 앤 굿럭>


영화 <굿나잇 앤 굿럭> 포스터. ⓒ유레카픽쳐스



1950년대 미국을 광풍으로 몰아넣은 매카시즘. 위스콘신 주 상원의원 조지프 매카시가 '반공'을 기치로 각계 각층에서 활동하는 공산주의자 색출에 뛰어들어 공산주의자들에 대한 고발 열풍까지 이어진 것이다. 극에 달한 열풍은 급기야 공산주의와는 관련 없는 무고한 사람들까지 몰아가지만 그와 맞서려는 이는 감히 없었다. 


당시 메이저 방송사 중 하나인 CBS의 명성 있는 앵커 에드워드 R. 머로와 프로듀서 프레드 프렌들리는 'SEE IT NOW'라는 정치 시사 다큐멘터리로 뜨거운 이슈를 던져 논란을 일으켰다. 여지없이 매카시에게도 정면으로 도전한 그들, 그야말로 공산주의자로 몰려 인생의 말로로 치달을 수도 있을 위협을 무릅쓴 것이다. 


언론인이라 해도, 언론인의 자세가 진실을 추구하고 알리고 관철시키는 것이라 해도, 모두가 그것을 안다고 해도, 이런 직접적이고 광할한 위협 앞에선 그것이 당연하다고, 무조건 해야 한다고 말하기 힘들다. 그럼에도 '언론'은 힘이 쎄다는 것, '진실'은 더욱 힘이 쎄다는 걸 실제로 보여준 단적인 예다. 


"TV는 가르치고, 계몽하고, 영감을 줄 수 있습니다. 허나, 그렇게 되려면 인간이 그런 목적으로 사용하려고 해야 합니다. 그런 노력이 없는 한 TV는 바보 상자로 전락하겠죠. 좋은 밤 되시고, 행복하십시오."



<스포트라이트>

 

영화 <스포트라이트> 포스터. ⓒ팝엔터테인먼트



가톨릭 성직자 아동 성추행 사건 중 대표(?)로 뽑히는 '보스턴 가톨릭 성직자 아동 성추행 스캔들'의 <보스턴 글로브> 스포트라이트 팀의 폭로 실화를 다루었다. 사건도 사건이거니와 폭로도 폭로였다. 깊은 곳에 숨겨져 있는 사건의 폭로는 참으로 힘든 것이다. 만류 당하고 저지 당하고 협박 당하고 난항을 겪는다. 


영화는 그런 와중에 사건 자체와 폭로에 집중하기보다 언론인의 자세에 집중한다. 이미 피해자 중 한 명은 오래전부터 계속 알리고 제보해왔지만, 언론에서는 다루지 않았고 다루더라도 지극히 관행적으로 다뤘을 뿐이었다. 그럴 수밖에 없었을까. 그야말로 '이런 사건을 알리지 않으면 언론이라 할 수 있을까?' '이런 사건을 언론이 알리지 않으면 누가 알릴까?'라는 생각이 들게 만든다. 


엔딩 크레딧 전 '버나드 로 추기경은 사임한지 얼마 되지 않아 가톨릭의 최상단 교구로 부임되어 성직자 생활을 계속했다'라는 말이 나온다. 이 영화는 언론의 화끈한 승리를 보여주지 못한다. 그럼에도 언론은 진실을 향해 끊임없이 나아가야 한다. 



<트루스>


영화 <트루스> 포스터. ⓒ라이크 콘텐츠



2004년 11월경, CBS 시사 고발 프로그램 '60분'은 큰 결정을 한다. 훗날 '래더 게이트'라 불리는, 부시 대통령 병역비리 보도인데 큰 사건인 만큼 철저하고 끈질기게 조사하고 추적했고 내부 조사단에 맞서 결국 TV 보도에 성공한다. 하지만 곧 오보 의혹을 받으며 남은 건 피나는 가시밭길이었다. 


영화는 승리한 언론인의 거창한 이야기가 아니다. 언론인에게 있어 승리, 즉 진실을 보도하는 데 실패한 것처럼 보이기 때문이기도 하지만, 그 진실을 추구하는 과정이 너무나도 힘들고 처참하기 때문이기도 하다. 또한 '진실'이라는 게 때론 얼마나 주관적인지 아니, 주관적일 수밖에 없는지에 대한 성찰도 가히 어렵고 힘들다. 


이 어마어마한 사건은 여전히 미궁 속에 있다. 반면 그 사건을 맡은 60분 팀은 와해된다. 과정에서 명백한 실수가 있었기 때문이다. 문제는 실수를 실수로 받아들이지 않고 실수를 의도로 읽어, 언론인으로서 올바른 자세를 견지했던 기자를 다른 층위로 공격했다는 데 있다. 진실 추구는 언제나 환영하고 응원한다. 다만, 그 과정과 결과가 추구를 뒷받침하지 못한다면 모든 게 허사가 되지 않는가. 모든 것에 힘을 실어야 하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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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명절에 몰아보기 딱 좋은 드라마] <하얀거탑>


명작 드라마 <하얀거탑>. ⓒmbc



2000년대 들어서 한국 드라마는 '전형적인 캐릭터', '개연성이 무시된 이야기', '남녀 주인공의 천편일률적인 짝짓기 놀음' 등으로 점철되어 시청자들의 외면을 받아왔다. '시간 때우기'로 전락해버린 것이다. 그걸 타파하기 위해선 '리얼한 직업 세계의 생생한 현장감'과 '살아있는 인간 이야기' 조합에 따른 드라마 패러다임 재판이 필요하다. 


드라마 <하얀거탑>은 2007년 새해 벽두에 드라마 패러다임을 바꾸고자 하는 거창하면서도 명백한 기획의도를 가지고 시작했다. '인간이란 무엇인가?'의 주제로 수렴될 이 명작의 기획의도와 방향은 돌이켜보면 참으로 대단한 도전이고 자기확신에 찬 포부였다. 한국 드라마계의 새로운 기준이자 하나의 혁명과 다름아니었다고 본다. 


물론, 10년이 훌쩍 지난 지금도 방송 3사의 드라마는 <하얀거탑>이 확언한, 시청자들이 외면하는 '시간 때우기'용이 대부분이다. 거기에 옳고 그름의 잣대를 댈 수는 없지만, '드라마'라는 생명체의 시선에서 보면 그른 게 확실하다. 10년 사이에 방송 3사가 아닌 종편과 케이블 채널들이 수없이 생기며 드라마 또한 다양화가 실시되어 <하얀거탑>이 바꾼 드라마의 패러다임을 수용하고 있는 것 같아 한편 다행인 마음도 든다. 


이 드라마는 빈틈과 군더더기 따위는 찾아볼 수 없는 스피디한 전개, 치밀한 복선과 파격적 임기응변이 함께 하는 다양한 장르의 향연, 현실적이고 인간적이며 입체적이기까지 한 캐릭터와 자못 드라마틱하고 한편 비인간적이라고까지 할 수 있는 캐릭터들의 조화 등이 시작부터 끝까지 유기적으로 맞물려 눈을 뗄 수 없게 만들 것이다. 그야말로 한번에 몰아볼 수 있는, 몰아보기에 용의한 드라마라 아니할 수 없다. 


편, MBC 사장이 교체됨과 동시에 드라마의 혁신을 위하여 시간이 필요하던 차에 한국 드라마계 혁신의 대명사 <하얀거탑>을 UHD로 다시 만날 기회를 얻었다. 지난 1월 22일부터 주중 미니시리즈가 시작될 3월초까지 매주 월~목 10시에 만나볼 수 있다. 여러모로 이번 설 연휴가 <하얀거탑> 몰아보기에 적합한 때가 아닐까 싶다. 


인간군상의 집합체 


인간군상의 집합체. <하얀거탑>의 한 장면. ⓒmbc



<하얀거탑>은 온갖 인간군상들의 집합체이다. 이 드라마를 '야망에 불타는 한 천재 외과의의 질주와 파멸'이라 정리해도 될 만큼, 김명민이 분한 장준혁은 지극히 핵심적 인물이다. 그는 흙수저 출신으로 오로지 실력 하나로 국내 굴지의 대학병원 외과 부교수 자리에 올랐거니와 간담췌 분야의 세계적 실력자로 군림하고 있다. 하지만 그에겐 더 큰 야망이 있으니, 일단 외과 과장이 되는 것이다. 그는 끝없는 질주를 시작한다. 


장준혁과는 학생일 때 과에서 1, 2등을 다툴 정도로 수재이지만 정반대의 삶의 기조를 지니고 있는 소화기내과의 최도영(이선균 분) 부교수가 있다. 그는 형제 모두가 줄줄이 의사로 있는 의사 집안 출신으로 오로지 환자를 생각할 뿐 자리에 운운하거나 권력에의 의지 또는 야망 따위는 없다. 장준혁에 비해 덜 인간적이고 덜 입체적인 인물이지만, 장준혁의 인물상을 부각시키는 데 탁월한 역할을 한다. 


한편, 가장 현실적이고 가장 입체적이며 동시에 가장 드라마틱한 인물이 있다. 일명 '고매한 성품의 소유자'이자 4대째 의사로 있는 이주완(이정길 분) 외과 과장. 정년퇴임을 앞두고 '휴머니즘이 없는' 장준혁이를 10년 동안 자신을 모셨음에도 후계자로 두지 않으려 한다. 하지만 그야말로 누구보다 위선적이고 비열하기 짝이 없는 인물이기도 하다. 이 세상의 중심이 자신이어야 하는 것이다. 


이밖에도 외과 과장 이주완의 딸이지만 자신의 위치 같은 건 생각 않고 어려운 사람을 도와주고 하는 마음과 정신의 소유자 이윤진, 돈이라면 모든 걸 좌지우지할 수 있다고 생각하는 장준혁의 장인어른 민충식 원장, 겉으로는 명분을 내세우고 속으로는 철저하게 이해득실을 따지는 진료 부원장이자 소화기 내과 과장 우용길, 절대 타협 불가의 대쪽 같은 성격의 소유자 병리학과 석좌교수 오경환, 장준혁 말이라면 불에라도 뛰어들 외과 의국장 박건하, 장준혁과 비슷한 환경에서 자라났지만 절대 장준혁처럼 될 수 없는 전임의 염동일 등이 드라마를 탄탄하게 채운다. 


이 드라마에 몰입하게 되는 이유


이 드라마에 몰입하게 되는 이유. <하얀거탑>의 한 장면. ⓒmbc



이 드라마는 몇 번을 봐도 혼란을 불러 일으킨다. 나는 이중에 누구인가, 또는 누구와 맞대응 되겠는가. 말하기 부끄럽지만 그나마 겉과 속이 다른 이주완 과장 또는 비슷한 맥락에서 겉으로는 명분을 내세우지만 속으로는 이해득실을 따지는 우용길 부원장에 가장 가깝지 않겠는가 하는 생각과 함께, 다른 누군가에게 감정을 이입하고 있는 나를 발견한다. 그 인물은 볼 때마다 바뀌고, 상황이 바뀜에 따라 역시 바뀐다. 


그게 이 드라마에 가장 큰 장점이라 할 수 있겠는데, 아무래도 장준혁에게 감정을 이입할 수밖에 없을 것이다. 그가 외과 과장이 되는 험난한 길을 거쳐, 치명적이면서 필연적인 실수로 기나긴 법정 공방을 치르고, 와중에 많은 신호가 오지만서도 무시해버린 결과 돌이킬 수 없는 병 때문에 죽음으로 치닫게 되는... 그의 너무도 치열한 삶 앞에서 고개가 숙여지면서도 한숨이 나오는 건 '인생무상'이라는 말 때문이겠다. 


피도 눈물도 없이 모든 걸 뒤로 하고 오로지 앞과 위만 보고 질주하는 것 같은 장준혁이지만, 그에겐 이 세상 누구보다 중요한 어머니가 계시고 속 깊은 모든 얘기를 건네고 위로 받을 수 있는 애인이 있으며 때론 옆도 뒤도 돌아볼 수 있게 만드는 친구 최도영이 있다. 하지만 그게 다 무슨 소용인가... 싶게 만드는 비극적 종말이다. 


그래서 얼핏 보면 선(최도영 등)과 악(장준혁 등)의 대립과 그에 따른 권선징악의 수순이 그려지고 있는 것 같지만, 애초에 선과 악이 명확하게 구분되어 있는지조차 의문스럽게 만드는 대목과 인물들이 매순간 우리를 찾아온다. 더군다나 장준혁이 법정 공방을 치르게 될 때 보란듯이 합심해 정의 편이 아닌 장준혁 편을 드는 대학병원 의사들의 꼬락서니는 더더욱 그런 생각을 들게 만든다. 


인간이란 무엇인가


인간이란 무엇인가. <하얀거탑>의 한 장면. ⓒmbc



인생무상, 선과 악의 모호함과 그에 따른 혼란 등은 '인간이란 무엇인가'로의 주제로 수렴되는 데 결정적 역할을 한다. 이는 자연스럽게 '어떤 삶을 살아야 하는가'로 넘어간다. 한두 번 정도 보는 걸로는 절대 답을 낼 수 없는 만큼, 몇 번이고 그것도 한번에 몰아봐야 약간의 답길이 보이기 시작할 것이다. 


이런 생각들, '인간'이라는 한 단어로 이 드라마의 궁극적 물음을 요약할 수 있게 되었을 때 비로소 <하얀거탑>의 진정학 명작화가 시행되었다고 할 수 있다. 그 전까지 <하얀거탑>은 그저 굉장히 흥미진진하고 잘 만든 드라마일 뿐이다. 그 이후 <하얀거탑>은 드라마 따위를 뛰어넘는 시대불문 '명작' 콘텐츠가 된다. 


아직 한 번도 접하지 못한 분들께 드리는 경고(?)는, 이 드라마가 결코 의학 드라마가 아니라는 점이다. 여기서 의학은 정치, 법정 공방의 수단이라고 해도 과언이 아니다. 물론 거의 모든 등장 인물이 의사인 이상 의사 세계의 단면을 기가 막히게 그려내고 있는 건 사실이다. 


하지만 <하얀거탑>은 의사 세계도 역시 사람 사는 세계라고 말하며 의사들을 하야디 하얀 순백의 탑에서 지상으로 끌어내린다. 적어도 이 드라마에서는 더 이상 그들만의 세상이 아닌 것이다. <하얀거탑>의 또 다른 위대한 점이 바로 여기에 있고, 우리가 시대를 뛰어넘는 공감을 하는 이유가 여기에 있으며, 드라마로서 보여줄 수 있는 최대치를 뛰어넘거나 본연의 임무를 다한 모습이 여기에 있다 하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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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기획] 올해가 가기 전에 꼭 챙겨보자


올해에도 역시 참으로 많은 영화가 제작되어 우리의 눈과 귀와 머리를 즐겁게 해주었다. 매년 느끼는 것이지만 영화를 이루는 기술, 스토리, 메시지 등에서 이제까지 축적해온 게 너무도 많아 더 이상 새로울 게 없을 것 같다고 생각하는데, 영화들은 여지없이 그 생각을 무너뜨린다. 


영화가 '종합예술'이라는 걸 절실하게 느낀다. 영화를 영상으로만 만들어진 예술이라고 생각하기 쉽지만, 실상 영상은 수단으로 사용되는 경우가 많다. 바야흐로 이야기의 시대, 영화도 이야기가 최소한의 기본이 되어 가고 있다. 물론, 영화에서 영상이 차지하는 비중은 단적으로 절대적이다. 그 사실을 간과하거나 무시한 게 아닌, 그 사실을 당연히 받아들이고 난 후 보이는 것들이다. 


올해 영화 이슈를 간략히 훑어보자. 역시 '송강호', 유일하게 천만 관객을 돌파한 <택시 운전사>가 눈에 띈다. 개인적으로 중간에서 포기한 몇 안 되는 영화 중 하나인데, 그럼에도 단연 으뜸의 흥행력을 보여주었기에 박수를 보낸다. <범죄도시> <청년경찰>은 상대적으로 적은 제작비로 소위 대박을 친 경우다. 큰 기대를 하지 않았음에도 큰 즐거움과 큰 돈을 안겨준 신드롬의 주인공들이다. 


반면, 역대급 망작과 최고 기대작의 실패도 올해 영화계를 풍성(?)하게 했다. 김수현 주연의 <리얼>은 수많은 우여곡절 끝에 개봉했지만 엄청난 논란에 휩싸여 역대급 '망작'으로 최악의 흥행과 함께 마감했다. 류승완 감독의 <군함도>는 초호화 캐스팅과 엄청난 제작비로 2017년 최대 기대작 중 하나였지만, 스크린 독과점과 역사 왜곡 등의 논란에 휩싸여 흥행 실패를 맛보았다. 역시 신드롬의 주인공들이다. 


올해가 가기 직전, 시간을 어떻게든 내서 봤으면 하는 작품들이 여기에 있다. 지극히 개인적인 식견 하에 추려진, 지극히 개인적인 바람이다. 개중에는 누구나 알 만한 흥행 작품도 있고, 많은 인기를 끌지 못한 '듣보잡' 작품도 있다. 하지만 공통적으로 어디에 내놔도 제 몫을 충분히 할 좋은 작품들인 건 분명하다. 


* 5편에 속하지 못했지만, 2017년이 지나가도 한 번쯤 봤으면 하는 2017년 작품들 10편을 추려 제목만 나열해본다. 이 작품들 또한 왠만하면 후회하지 않을 것이다. 

<너의 이름은> <컨택트> <히든 피겨스> <겟 아웃> <지랄발광 17세> 

<프란츠> <몬스터 콜> <베이비 드라이버> <남한산성> <폭력의 씨앗>






영화 <문라이트> 포스터 ⓒ오드(AUD)


① 문라이트(Moonlight)


명실공히 2016년 최고의 작품이다. <라라랜드>를 제치고 제89회 아카데미 작품상을 타고야 말았는데, 그야말로 영화의 모든 이들이 흑인으로 구성되어 있는 바 영화 외적으로도 '쾌거'라고 할 수 있겠다. 우리는 2시간이 채 되지 않는 짧은 시간 안에 한 인간의 성장을 오롯이 대면할 수 있다. 


영화는 미국이 아마도 가장 덮고 싶어 하는 부분을 들춰내고자 한다. 배경이 되는 곳은 마이애미 흑인 지구의 마약 소굴, 그곳의 작고 한 없이 힘 없는 아이 리틀. 희망도 슬픔도 없이 공허하게 어른이 되어 간다. 그런 그에게 후안은 많은 힘이 되는데, 그가 말한 '달빛 아래에선 흑인 아이들도 파랗게 빛나지'는 일종의 지침이 된다. 


성장해야 하는 필연적인 이유가 있는 그에게 성장에의 길은 어둠 그 자체다. 그것도 겹겹이 쌓인. 그래도 어둠 속에서 빛나는 달빛 같은 존재가 있기 마련이다, 아니 다른 누구도 아닌 내가 그런 존재가 되는 것이다. 이 역사상 가장 아름다운 영화에 달빛이 스며들 때 전율하지 않는 이 없고 눈물 흘리지 않는 이 없다. 성장을 함부로 논하지 말라. 성장은 파괴되고 파괴하는 어둠 속 빛의 미학이다. 



영화 <덩케르크> 포스터 ⓒ워너브라더스코리아


② 덩케르크(Dunkirk)


명명백백 '거장' 크리스토퍼 놀란 감독의 최신작이다. 뜬금없이 전쟁영화를 들고 나온 그에게 의문을 품은 이들이 많았었는데, 재난영화라고 봐도 무방할 다른 차원의 전쟁영화를 선보여 '역시' 크리스토퍼 놀란이라는 말만 되풀이하게 만들었다. 영화는 제2차 세계대전 초기의 저 유명한 덩케르크 철수 작전을 배경으로 한다. 


놀란은 전쟁영화를 재난영화로 둔갑시킴으로써 오히려 전쟁의 비인간적이고 무차별적인 면모를 부각시킨다. 재난이란 예측불허하고 무차별적이며 인간 따위는 생각하지 않는다. 더욱이 영화는 재난 상황은 매우 미시적으로 재난에 처한 인간은 매우 거시적으로 그려내며, '재난'의 전형적이며 실제적인 무서움을 역설한다. 


이쯤에서 놀란이 택한 마무리는 '인간'이다. 무자비하고 폭력적인 재난전쟁을 버틸 수 있는 건, 그 앞에서 무너지지 않는 인간의 숭고함이라는 것이다. 새삼 곳곳에 뿌리박혀 있는 인간성들이 고맙게 느껴진다. 우리가 사는 세계는 그런 세계이다. 폭력적일수록 더더욱 숭고해지는 인간성이 우리를 지켜주는 세계. 



영화 <윈드 리버> 포스터 ⓒ유로픽쳐스


③ 윈드 리버(Wind River)


<시카리오: 암살자의 도시> <로스트 인 더스트>의 각본을 맡아 자타공인 할리우드 최고의 작가 중 한 명으로 급부상한 테일러 쉐리던이 연출자로 데뷔했다. 그는 전작에서 여지없이 '속살'을 비추는 데 천착했는데, <윈드 리버>에서도 그럴 가능성이 크다. 인디언 보호 구역이자 끝없이 펼쳐진 설원 와이오밍주 '윈드 리버'로 가보자. 


야생동물 사냥꾼 코리는 설원 한복판에서 여인의 시체를 발견한다. 곧 FBI 요원 제인이 달려오고 공조 수사가 시작된다. 이 설원은 변화를 기대할 수 없는 미국의 축소판이다. 영화는 윈드 리버에 마지막 희망이 있다고 보고, 미국 그 자체인 제인이 그 희망의 키를 쥐고 있다고 보았다. 그녀가 얼마나 이 설원(자연)을 이해하고 윈드 리버(인디언)을 존중하고 그 모든 것에 공감할 수 있는지. 


너무나도 쉬워 보이고 하찮아 보이는 단어들, 공감과 이해. 사실 그것들이 전부다. 그것들만 이행해도 세상은 한층 더 살기 좋아질 것이다. 우리는 윈드 리버가 상징하는 막연하면서도 실질적인 '벽'을 허물 준비가 되어 있는가? 아니, 다가갈 준비나 되어 있는가? 



영화 <우리의 20세기> 포스터 ⓒ그랜나래미디어


우리의 20세기(20th Century Women)


영화는 나이도, 세대도, 성도, 삶의 방향이나 지침도, 생각도 완전히 다른 다섯 남녀를 통해 20세기의 면면을 보여준다. 상당한 미장셴을 앞세워 다큐멘터리적 요소가 강한 스토리와 구성을 감각적으로 탈바꿈시킨다. 그들의 소소한 서사와 20세기를 우리는 왜 보아야 하는가. 


그들의 20세기는 문자 그대로 1999년까지가 아닌 1979년까지의 시대다. 1980년대부턴 지미 카터 대통령의 연설대로 절제의 통제의 시대, 획일화된 시대로 진입한다. 영화가 보여주고자 했던 20세기는 문화와 세대와 환경에서 비롯된 차이들이 서로 편견을 갖지 않고 인정하는 시대인 것이다. 


영화는 그런 모습들을 다양한 장치들로 보여주려 한다. 빨리 감기, 홀로그램, 미래지향적이고 몽환적인 음악들 말이다. 영화에 활기를 불어줌과 동시에 품격까지 최소 한 단계 높이는 결과를 도출한다. 지나간 한 시대를 기억하기에 알맞은, 여운이 길고 짙게 나는 장치들이다. 올해가 가기 전에 봤으면 하는 가장 좋은 영화이다. 



영화 <빛나는> 포스터 ⓒ그린나래미디어


⑤ 빛나는(光, Radiance)


일본 최고의 감독 '가와세 나오미'의 작품이다. 그녀의 작품들은 하나같이 행간과 자간을 꼼꼼히 살피고 읽어내어 해석해야 할 필요가 있기에 호불호가 갈린다. 그런데 이 작품 <빛나는>은 그런 단점(?)들을 해소한 느낌이다. 그저 아무 생각 없이 보아도 감동이 스며든다고 할까. 


영화는 시각장애인을 위한 영화 음성 해설을 쓰는 작가와 점차 시력을 잃어가는 사진작가의 만남을 다룬다. 그러면서 관계와 성장과 상실의 하모니를 내보이는데, 그 추상적이기 짝이 없는 개념들을 정교하게 잘 풀어낸다. 우린 그 와중에 '빛나는 순간들'을, 우리 인생에도 있을 빛나는 순간들을 생각하게 된다. 


이제 다시 빛을 볼 수 없는 주인공의 마음이 고스란히 전해지는 바, 옛날 어느 때 어느 순간을 그리게 되고 현재의 이 순간을 붙잡고 싶어지며 미래의 그때 그 순간을 기다리게 한다. 올해의 마지막을 수놓은, 수놓을 아름다운 영화 <빛나는>. 2017년의 마지막 빛나는 순간에 이 영화가 함께 하길 바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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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책으로 책하다] 지금 이곳은 스크린셀러 천국


영화 '스크린'과 책 '베스트셀러'의 합성어로, 영화화된 소설 원작이 다시금 주목을 받아 베스트셀러가 되는 현상을 '스크린셀러'라 한다. 2000~2010년대 <해리포터> <반지의 제왕> <헝거게임> 등의 소설을 원작으로 한 시리즈가 대대적인 인기몰이를 하면서 확실히 자리를 잡았는데, 사실 그 기원은 족히 수십 년 전으로 올라간다. 


1990년대에도 '스크린서 새옷 입는 베스트셀러'(경향신문)와 같은 제목의 기사를 찾아볼 수 있고, 일찍이 1960년대에도 '영화화된 헤밍웨이 작품'(동아일보)라는 제목의 기사가 나왔다. 심지어는 1930년대에 굉장히 의미있는 기사가 있는데, '문학과 영화'(동아일보)라는 기사이다. 


첫단락부터 80년 후의 2017년 모습과 기묘하게 겹친다. "베스트셀러가 영화화되던 시대에서 지금은 영화화된 문예작품이 베스트셀러가 되는 시대로 전위되고 있다." 그야말로 '스크린셀러'의 정확한 해석이다. 그러며 기사는 문학과 영화의 장단점, 한계 등을 고찰하고, 각자 나아가야 할 길과 함께 나아가야 할 길을 모색한다. 참으로 오래된 스크린셀러의 역사다. 


스크린셀러의 현재




스크린셀러의 역사 브리핑은 이쯤에서 간략히 접고, 스크린셀러의 현재와 근과거를 들여다보는 시간을 갖도록 한다. 지난 9월 6일에 개봉해 여전히 위력을 발휘하며 4년 전에 나온 원작의 초베스트셀러 복귀에 크나큰 영향을 미친 <살인자의 기억법>과 북미에서는 R등급 역사의 새로운 역사를 쓰고 있지만 국내에서는 신통치 않은 스티븐 킹 원작의 <그것>을 필두로 10월 3일 개봉을 앞두고 이 역시 원작이 다시금 베스트셀러의 위치에 오를 게 확실한 <남한산성>까지, 지금은 스크린셀러 천국이다. 


<살인자의 기억법>는 알츠하이머에 걸린 전직 연쇄살인마가 딸을 구하기 위해 마지막 살인을 계획하는 게 주요 내용을 이룬다. 굉장히 흥미로운 시나리오임에 분명하지만, 소설은 뚜렷한 서사나 캐릭터 대신 철학적 고민과 삶과 시대에의 통찰이 주를 이룬다. 영화는 캐릭터성을 극대화시키고 사건을 명료화했다. 비슷한듯 다른 이 두 소설과 영화, 영화가 행한 선택과 집중이 외려 영화뿐만 아니라 소설로의 관심도 증폭시켰다. 실로 오랜만에 돌아온 완벽한 스크린셀러다. 하지만 개인적으로 두 작품 모두 봐도 그만 안 봐도 그만인 정도가 아닌가 한다.  


<그것>은 이야기의 제왕 스티븐 킹의 최고의 소설이자 가장 무서운 소설 <그것>을 원작으로 한 영화이다. 어린 시절과 어른이 된 현재를 아우르며 방대하기 그지 없는 이야기로 당대 미국의 모든 것을 말하고자 하는 소설과 달리, 영화는 일단 1편에서 어린 시절만 따로 떼어내 공포에 천착한다. 물론 '그것'이라는 매개체를 통해 공포의 진정한 근원을 은유적으로 표현해내고 있긴 하다. 하지만 이 두 소설과 영화가 서로에게 큰 영향을 줄 만할 정도는 아니다. 둘 다 그 자체가 가지고 있는 작품성과 메시지, 장단점이 명료하다 못해 치명적이다. 스크린셀러와는 거리가 있지만, 둘 다 반드시 읽고 봐야 하는 작품들임에 분명하다. 


<남한산성>은 지난 2009년 <도가니>로 원작을 상회하는 신드롬을 일으킨 바 있는 황동혁 감독이 다시 한 번 소설 원작을 스크린으로 불러온 결과물이다. 소설은, 역사적으로도 유명한 바 조선의 운명이 백척간두에 매달린 채 결정을 내리지 못하는 인조와 전쟁 김상헌, 화친 최명길의 절대적 신념 하의 대립을 김훈 소설가 특유의 무미건조한듯한 단문으로 써내려갔다. <도가니>의 전적을 볼 때 영화 또한 그 느낌, 그 대사, 그 고민을 거의 그대로 가져왔을 터 <살인자의 기억법>과는 다른 방법론이라 하겠다. 초베스트셀러 원작에 기댄 면이 큰데, 그러하기에 원작을 향한 관심이 다분히 영화의 작품성과 흥행 결과에 따라 달라질 것으로 보인다. 전형적인 스크린셀러는 아니다. 


스크린셀러의 그늘, 그리고 <위대한 개츠비>의 경우




이밖에도 극히 최근에 개봉한 스크린셀러 영화는 많다. 그저 나열만 해도 족히 몇 줄은 가능하다. <몬스터 콜> <잃어버린 도시 Z> <발레리안: 천 개 행성의 도시> <다크타워: 희망의 탑> <예감은 틀리지 않는다> <레이디 맥베스>, 그리고 곧 찾아올 <너의 췌장을 먹고 싶어> <스노우맨> <7년의 밤> <오리엔트 특급 살인> <신과 함께>까지. 


새삼 이채롭거나 신기할 것도 없는 소설을 비롯한 텍스트 콘텐츠와 영화의 콜라보. 아니, 다분히 원작에 힘입은 영화, 영화 덕분에 다시 살아나는 원작. 하지만 사실 이중에 제대로된 '스크린셀러'라고 할 만한 작품은 잘 눈에 띄지 않는다. 그저 원작이 있는 영화일뿐 그로 인해 원작에 관심이 쏠리지 않는 경우가 많은 것이다. 


이는 영화와 원작이 상호 시너지가 발생할 거라는 계산과 기대 하에 실시된 마케팅에 좌우되는 경우가 많을 텐데, 최근 몇 년간 국내 스크린셀러 성공 사례에 어느 작품들이 있는지 찾아보는 것도 흥미로울 것이다. 지난 2013년 레오나르도 디카프리오 주연의 <위대한 개츠비> 개봉에 맞춰 이례적으로 많은 출판사에서 동시에 번역출간한 사례가 또한 재밌다. 


당시 5월 개봉에 맞춰 4~6월까지 <위대한 개츠비>는 자그마치 20여 종이나 선보였다. 개중에는 문학동네, 열린책들, 열림원, 홍익출판사 등 굴지의 출판사도 있었는데, F. 스콧 피츠제럴드가 사후 70년이 넘었기에 저작권 무료인 점이 가장 크게 작용했었다. 그야말로 사상 최대 스크린셀러 전쟁이었다고 생각하는데, 정작 독점적인 승자는 없었던 걸로 안다. 


성공한 스크린셀러, 그리고 스크린셀러의 미래




최근 몇 년간 가장 큰 성공을 거둔 스크린셀러 몇 편을 들자면, <우리들의 행복한 시간> <도가니> <완득이> <은교> <위대한 개츠비> <마션> <덕혜옹주> 정도가 아닌가 생각한다. 영화가 나오기 전에도 이미 국민적인 베스트셀러라 할 수 있을 정도의 인기를 누린 원작임에도, 영화 개봉과 함께 다시 한 번 엄청난 인기를 누린 사례들이다. 


개중에서도 앞의 4권 정도는 가히 신드롬이라 할 만한 인기를 얻었는데, <은교>의 경우 좀 특이한 경우다. 영화가 쏟아진 관심에 비해 흥행에서 좋은 점수를 받지 못했음에도, 원작이 엄청난 인기를 얻었기 때문이다. 원작에 못미치는 작품이라는 평가 덕분일지 모르겠다. 


80년 전에도 활발히 이뤄졌던 원작의 영화화, 비록 더욱 방대해지는 영화 산업에 기대 인기를 얻으려는 수작이라고 비판을 받을지언정 앞으로도 소설과 영화가 없어지지 않는 이상 영원히 계속될 것이 분명하다. 이제는 영화를 바탕으로 한 소설도 만들어지고 있지 않은가. 


개인적인 바람이 있다면, 결국 좋은 소설이 좋은 결과를 낳고 좋은 영화로 이어진다는 믿음을 저버리지 않으면 좋겠다는 것이다. 독자와 관객을 모독하지 않는 작품은 물론이고, 독자와 관객이 스스로를 모독하지 않는 움직임을 가져가야 하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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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여름휴가 후기] 잊지 못할 2017년 여름휴가, '소야도'


스무 살까지 나에게 여름 휴가는 똑같았다. 추석에 차례를 지내러 찾아뵙기 전에 묘지 관리 및 벌초도 할 겸 강원도로 간다. 아버지 형제분들 가족과 함께, 음력으로 추석인 8월 15일을 전후한 1박 2일 내지 2박 3일의 짧은 기간으로 말이다. 벌초를 하고 근처에 유명한 막국수를 먹고는 동쪽으로 동쪽으로 주문진에 가서 회를 먹는다. 끝. 


그래도 어릴 땐 너무 좋아 일 년을 기다리곤 했다. 또래 친척들을 만나는 것도 재밌고, 북적거리며 먼 곳으로 함께 차를 타고 가는 것도 재밌었다. 더군다나 그때는 방학을 이용해 4박 5일씩 있으면서 물놀이도 하고 산도 타고 여러 곳을 두루두루 다니는 등 제대로 된 휴가를 보냈었다. 기억에 생생히 남아 있는 좋은 추억들이다. 


어쩔 수 없는 부분이지만, 그때 그 어린 아이들이 이제는 다 어른이 되어 서먹서먹해진 건 둘째 치고 예전처럼 마음 놓고 재밌게 놀 수 없게 되었다. 각자의 스케줄 때문에 완전체로 모이지 못하는 부분도 한 몫 하겠다. 한 번 참여하지 못하게 되면 다음에도 왠지 참여하지 못하게 되는 게 모임 아니겠는가. 


나는 군대를 다녀와서도 참여를 했는데 더 나이가 먹고부터는 함께 하지 못했다. 여러 이유들이 있을 것이다. 당연히 이후엔 휴가다운 휴가가 잘 기억나지 않는다. 결혼하기 전, 지금의 아내인 여자친구와도 제대로 된 휴가를 함께 보내지 못했다. 그 역시 여러 이유가 있을 것인데, 결혼 이후에 보상이라도 받으려는 듯 좋은 시간들을 보냈고 보내고 있으니 전화위복이라고 생각하련다. 


설렘과 기대, 걱정과 부담의 여름휴가


소야도로 2017년 여름휴가를 떠나는 길. ⓒ이유정



결혼을 하고 나선 여름 휴가를 처가댁과 함께 하게 되었다. 치밀하고 꼼꼼하신 장인 어른(이하 '아버님')의 주도 하에 모든 걸 다 챙겨주시는 헌신적인 장모님(이하 '어머님')께서 아내와 나를 케어해 주신다. 작년에는 스케줄이 맞지 않아 당일 코스로 새만금간척지 근처를 다녀왔었다. 끝없이 펼쳐진 방조제를 달리며 정신의 피로를 풀었던 기억이 새록새록하다. 


대망의 2017년 올해는 휴가가 오기 한참 전에 스케줄을 맞추고 어디로 가서 어떤 곳에 짐을 풀고 어떤 일로 하루하루를 보낼지 미리 대략이라도 생각을 해두었다. 물론 장인 어른의 주도 하에 말이다. 나에게 있어, 머리가 다 크고 나서 이런 제대로 된 휴가는 아마도 처음일듯. 설렘과 기대가 한껏 부풀었었다. 


반면 아버님, 어머님과의 휴가도 당연히 처음이니, 걱정과 부담도 한껏 부풀 수밖에 없었다. 비록 그래도 자주 만나는 편이어서 일반적으로 생각하는 아버님과 어머님이 아니라 그렇게 큰 걱정은 없었지만 말이다. 그래도 아내와 나만의, 또는 나만의 휴가는 없는 것이나 마찬가지니, 다른 불만 또한 없었다고 할 순 없을 것이다. 


그러니, 설렘과 기대가 7이라면 걱정과 부담, 그리고 다른 불만이 3 정도였을 게다. 한편, 아내는 너무너무 좋아했다. 마음이 편한 것 같았다. 우리끼리 휴가를 가게 된다면 우리가 아닌 아내만 챙겨야할 게 너무 많은데, 처가댁과 함께 가니까 생각해야 할 것도 챙겨야 할 것도 터무니 없이 적게 되는 게 아닌가. 그녀는 진정한 휴가를 보내게 될 거라고, 무진장 편하고 재미있을 거라고 호언장담했다. 아내의 말을 믿어 보기로!


'소야도', 그곳은 완벽한 휴가처


완벽한 휴가처 '소야도' ⓒ이유정



우리가 갈 곳은 인천 바다에 떠 있는 '소야도'로 정해졌다. 대부도에서 배 타고 2시간 안팎의 거리에 있는 조그마한 섬. 이른 아침 적당한 시간에 출발해, 적당한 기다림으로 기대와 설렘을 극대화 하고, 그를 실현해줄 배도 타고는 소야도로 향했다. 너무나도 맑은 날씨와 어울리는 천연의 자연 환경이 우리를 반겼다. 


아내와 난 챙겨야 할 게 너무 없었다. 그저 우리 둘의 옷가지와 몇몇 놀이품들만 챙기면 되었다. 반면, 아버님께서는 모든 경비는 물론 휴가 장소, 숙박 장소, 매일매일의 스케줄, 차 운전까지 도맡아주셨다. 어머님께서는 매일매일 삼시 세끼를 완벽하게 책임져 주셨다. 집에서도 잘 챙겨먹지 않는 삼시 세끼를 그곳에선 4일 동안 꼬박꼬박 챙겨먹었고 모르긴 몰라도 살이 많이 찌지 않았을까 싶다. 


막상 가본 소야도, 그리고 우리가 묵게 된(묵을 수밖에 없는) 곳엔 '아무 것도' 없었다. 아주 작은 섬인 소야도에는 무수한 자연 환경이 있을 뿐 카페나 슈퍼마켓, 식당 같은 이른바 문명인의 필수처가 없었다. 처음엔 '당황&황당', 그리곤 '적응'을 거쳐, 지금에는 사무칠 정도로 그리워지는 '만족'이 이어졌다. 그렇다. 그곳은 완벽한 휴가처였다. 더할 나위 없는 최고의 한 때를 선물하기에 충분한 곳이었다. 


우린 매일 똑같은 스케줄을 함께 가졌다. 느즈막히 일어나 아침을 먹고는 다시 잠들거나 놀면서 오전 내내 방을 떠나지 않는다. 이윽고 점심까지 챙겨 먹고는 걸어서 5분 거리에 있는 해변(해수욕장)으로 향한다. 몇 시간 동안 물놀이를 하고는 물이 슬슬 빠지는 때부턴 본격적 조개잡이에 진입한다. 타의 추종을 불허할 정도의 조개를 잡고 복귀해 자다가 저녁을 먹고 고스톱을 친다. 적당히 치다가 일찍 잠을 청한다. 아니, 하루 종일 너무 놀았기에 일찍 잠들 수밖에 없다. 


정녕 '아무것도' 하지 않았다


아무것도 하지 않고 그저 놀았던 해변. ⓒ이유정



개인적으로 난 원래 낮잠도 잘 안 자고 일찍 잠자리에 들지도 않으며 하루 종일 무언가를 생각하거나 무언가를 해야 하는 사람이다. 현대인이라면 누구나 가지고 있을 '불안'을 난 그런 식으로 해소하려 하는 것일 테다. 한시라도 생각하지 않고 무언가라도 하지 않으면 도태될 것 같은 그런 기분의 연속. 당연히 이번 휴가 때도 노트북과 책과 핸드폰을 가져가 무엇이라도 하고자 했다. 


과정과 결과는 내 예상과 정반대. 난 그곳에서 '아무것도' 하지 않았다. 일상 생활을 영위할 때 하곤 했던 또는 해야만 했던 것들 말이다. 아무도 시키지 않았는데 스스로의 불안 때문에 해야 했던 것들과 누군가의 부탁 또는 명령에 의해 반드시 해야만 했던 것들. 모르긴 몰라도, 대부분의 사람들이 휴가를 가서도 휴가 이전에 미처 하지 못했던 것들과 휴가 이후에 밀려들 많은 것들을 생각하고 있을 것이다. 


나를 아주 잘 아는 아내가 그랬다. 어쩐 일로 이렇게 낮잠을 자느냐고. 왜 아무 일도 하지 않느냐고. 표정이 참 편해보인다고. 아버님과 어머님은 그곳이 너무 너무 좋다고 하셨다. 아무런 생각도 들지 않게 해주는 진정한 평화가 우리를 둘러싸고 있는 것 같다고. 그저 먹고 마시고 놀고 자고. 가만히 있어도 그 누구도 뭐라 하지 않고. 


기본적으로 돈을 쓰러 휴가를 간다. 그래서 휴가갈 만한 곳에는 역설적으로 문명의 이기들이 그 어느 곳보다 많이 들어차 있다. 많이 생각할 것도 없이 제주도만 보아도 단 번에 알 수 있지 않은가. 반면 이곳은, 소야도는, 오로지 펜션들만 눈에 간간히 띌 뿐이었다. 그 주인들조차도 생필품은 옆의 큰 섬 덕적도나 멀리 인천에서 가져온다고 했다. 이런 곳이 어디있을까 싶다. 정말 다시 없을 휴가를 만든 장본인이다. 


내년이 기다려진다, 진정 휴가다운 휴가


다시 오고 싶은 그곳, 진정한 휴가가 무엇인지 알려준 그곳. ⓒ이유정



내년 여름 휴가가 벌써 기다려진다. 다들 이 곳을 더할 나위 없이 마음에 들어해서, 다음에도 이곳 소야도가 아니더라도 비슷한 느낌을 주는 곳으로 여름 휴가를 떠날 것 같다. 그때는 노트북 따윈 들고 오지 않을 것 같다. 일상에서, 회사에서 했던 수많은 생각들도 들고 오지 않을 것이다. 


휴가가 아니더라도 아버님, 어머님, 아내와 함께 떠나는 그 어떤 여행이라도 기다려진다. 어딜 가서 무엇을 하든 함께 하는 사람만큼 중요한 게 없는데, 한가족이라는 걸 떠나서라도 그들은 나에게 가장 재밌고 가장 편하고 가장 좋은 사람들이다. 한가족인 게 너무나 좋다. 언제든 함께 할 수 있으니. 


진정 휴가다운 휴가. 일을 위한 재충전도 중요하지만 그 따위 건 잠시 접어두고, 진정 함께 하고픈 이들과 편안하게 아무 생각 없이 쉴 수 있는 곳에서 보내는 것. 난 이번 기회로 일을 하는 와중에 휴가를 다녀오는 게 아니라, 휴가를 위해 일을 한다는 생각으로 삶의 방향을 바꾸고자 한다. 


혹시 기존의 나처럼 불쌍한 생각을 가지고 있는 분들이 있다면, 아무것도 없는 곳에 가서 아무 생각도 아무 일도 하지 말라. 그래도 무엇보다 중요한 건 함께 하는 사람들이다. 따로 또 같이 즐길 수 있는 이들과 함께 내려놓는 시간을 가지고 와라. 그리고 그런 시간을 더 많이 가질 수 있는 기회를 가지려고 노력하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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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배우열전] 하정우


개인적으로 '하정우'라는 배우를 처음 알게 된 작품 <용서받지 못한 자>의 한 장면. ⓒ청어람



2005년, 일병 정기휴가 때였다. TV를 틀어 우연히 보게 된 게 하필 윤종빈 감독의 <용서받지 못한 자>. 현역 군인이 제대로 된 한국 군대 영화를 보니 감회가 새롭다 못해 빨려들어 갈 것 같았다. 저 상병과 병장은 미래의 내 모습일 것 같고, 저 일병은 현재 내 모습인 것 같고, 저 이등병은 얼마 전 내 모습인 것 같고...


그때 배우 하정우를 처음으로 보았다. 하정우가 분한 유태정 병장의 군대 생활과 제대 이후를 교차 편집해 보여주며, 그의 중학교 적 친구 이승영이 군대에 적응하지 못하는 것과 맛물려 누가 진짜 '용서받지 못한 자'인가를 신랄하고 가슴 아프게 전한다. 하정우의 실생활적 면모에 기반한 연극적·영화적 연기를 두루 감상할 수 있는데, 윤종빈 감독이 중요한 역으로 나와 함께 전설적 캐미를 자랑하기도 했다. 


이 작품이 하정우의 스크린 데뷔작은 아니다. 그는 2002년에 드라마와 영화로 데뷔해 이듬해와 그 이듬해에도 역시 드라마와 영화를 오갔다. 그리고 <용서받지 못한 자>가 개봉하기 전에 이미 <잠복근무>라는 당시 메이저급 영화에 조연으로 얼굴을 알리기도 했고 드라마 <프라하의 연인>에 비중있는 조연으로 나와 이름을 알렸다. 하지만 이 작품들은 얼굴과 이름을 알리기 위한 방편처럼 느껴진다. 


열일 하정우


'열일' 하정우의 한창 때 작품이자, '대세' 하정우로의 다리가 되어준 작품 <추격자>의 한 장면. ⓒ쇼박스



그는 1998년부터 데뷔를 하고 나서인 2003년까지 거의 매년 한두 작품씩 연극무대에 섰는데, 그 나이 때 배우들이 많이들 듣는 '발연기' 논란 한 번 없는 이유가 여기에 있다 하겠다. '김용건'이라는 전국민이 누구나 알 만한 배우의 아들이라는 타이틀을 완전히 버리고 오로지 자기만의 클래스를 만들고자 한, 멀고 험하지만 알차고 지능적인 경력생활이다. 


하정우를 말할 때 절대 빼놓을 수 없는 사람이 윤종빈이다. 이들은 자그마치 4편을 함께 하는데, 하정우는 단연코 어느 한 감독과 그만큼의 영화를 함께 하지 않았다. '페르소나'라고 할까. 이들은 다름 아닌 대학 선후배 관계다. 둘 다 중앙대학교 출신으로 하정우는 1978년생 연극학과, 윤종빈은 1979년생 영화학과. <용서받지 못한 자>는 윤종빈 감독의 졸업작품인데, 하정우를 비롯 학교 선후배를 총동원해서 찍었다고 한다. 결과는 대성공. 이들은 훗날 일명 '윤종빈 사단'이 되어 많은 영화를 함께 했다. 


2006년부터 2007년까지 하정우는 말그대로 '열일' 한다. 하정우 하면 빠지지 않는 수식어가 먹방과 열일인데, 열일 수식어는 아마 이때부터 그 싹이 보이지 않았나 싶다. 2년 동안 그는 자그마치 단역, 조주연 가릴 것 없이 6개 영화에 출연한다. 대부분 비대중적이지만, 모든 면에서 그의 연기생활에 도움이 될 만한 영화들이었다. 그리고 대망의 2008년이다. '대세' 하정우의 시작이다. 


2005년 <용서받지 못한 자> 이후 2008년 <추격자>야말로 하정우의 이름값을 수직상승시킨 영화다. 희대의 사이코패스 지영민은 2000년대는 물론 한국영화사에 남을 만한 캐릭터로, 하정우는 '능청스럽게' 연기해버린다. <공공의 적>의 사이코패스 조규환이 준 충격을 완전히 안드로메다로 보내버렸다. 10년이 지났어도 생각만 하면 소름이 끼칠 수밖에 없는 그 눈빛과 행동, 그의 나이 불과 31이었다. 그리고 그는 이 해, 단역 한 편과 주연 세 편을 합쳐 네 편의 영화에 출현했다. 윤종빈 감독과 함께 한 <비스티 보이즈>처럼 조금 아까운 영화도 있고, <멋진 하루>처럼 멋진 영화도 있다. 


대세 하정우


그야말로 '대세' 하정우의 한 가운데에서 흥행과 비평, 이슈 모두 훌륭했던 작품 <터널>의 한 장면. ⓒ쇼박스



이때쯤이었던 것 같다. 하정우라는 배우의 캐릭터가 완벽하게 굳어진 시점이. 사이코패스조차 능청스럽게 연기해버리는, 그만의 특유한 연기 방식이 말이다. 그는 우리가 주위에서 흔히 볼 수 있는 일반사람의 모습을 띤다. 거기에 어떤 '연기적' 요소를 찾기 힘들다. 여타 연기자들에게서 흔히 찾아볼 수 있는 톤 앤 매너가 그에겐 없다. 


반면, 지극히 '연극적' 요소는 항상 찾아볼 수 있다. 그런 사람 있지 않은가. 내 주위에도 있는데, 연극적인 일반인 말이다. 하정우는 그 연극적 요소들을 깨알같이 잘게 부수어 연기 전반에 촘촘히 박는다. 부자연스러움은 옅어지고 신선함과 재미짐이 떠오르는 광경을 우린 목격할 수 있다. 


2008년 이후, 아니 2005년 이후 2016년까지 2014년을 제외하고 하정우는 일 년에 두 편 이상 영화에 출현하지 않은 때가 없다. 그리고 최소 한 편 이상 흥행, 비평, 이슈 등으로 한 해 영화계를 흔들 만한 메이저급 영화에 출현한다. 나열해 보자면 2009년 <국가대표>, 2010년 <황해>, 2011년 <의뢰인>, 2012년 <범죄와의 전쟁>, 2013년 <베를린> <더 테러 라이브>, 2014년 <군도>, 2015년 <암살>, 2016년 <터널> <아가씨>... 누군가는 한 편 출현하기에도 힘들 영화들이다. 그리고 올해에는 엄청난 제작비와 함께 그 만듦새 때문에 엄청난 걱정거리(?)를 안기고 있는 <신과 함께>가 대기 중이다. 


하정우 하면 다가오는 이미지가 '믿음'과 '탄탄' 등일 것이다. 탄탄한 연기에 기반한 믿음가는 영화 또는 캐릭터랄까. 그건 하정우라는 사람한테까지도 충분히 적용될 만하다. 그는 이에 부응하듯 배우라는 타이틀에만 국한되지 않고 다양한 방면으로 진출하고 도전하기를 마다하지 않는다. 


종합예술인 하정우


'아티스트' 하정우로서의 작품들이다. 하정우는 그야말로 종합예술인이 아닌가. ⓒ하정우



영화 감독 타이틀이 그중 하나일 것이다. 2013년 <롤러코스터>와 2015년 <허삼관>을 직접 시나리오를 쓰고 연출까지 했다. <허삼관>에는 주연까지 도맡아 했다. 비록 두 작품 모두 흥행 면에서 참패를 면치 못했고 비평 면에서도 그리 좋은 평가를 받지 못했지만, 그 도전 자체로 충분히 박수 받을 만하다고 생각한다. 배우 열일로도 충분히 바쁠 텐데, 언제 글을 쓰고 연출까지 했을까? 싶은 것이다. 하지만 그게 다가 아니다. 그는 엄연히 수많은 아트페어와 개인전까지 연 '아티스트'다. 


하정우 열일의 절정기이자 대세 하정우의 시작점인 2008년, 그는 이미 아티스트로의 길을 암중모색했을 것이다. <국가대표>로 국가대표급 배우로 자리매김한 그때 2009년, 자원순환 정크아트 공모전에 작품을 기증한다. 그는 영화를 찍을 때마다 그림을 그린다고 하는데, 캐릭터의 이미지와 심리를 연상시키는 그림들이다. 그리고 자신을 향한 독백과 세상을 향한 방백을 그림으로 승화시키며, 인간, 배우, 남자로서 스크린에서 하지 못했던 또는 할 수 없었던 이야기를 풀어낸다. 영화로 그림을 그리고, 그림으로 영화를 찍는 것이리라. 


그야말로 하정우를 '종합예술인'이라고 칭해야 하지 않을까. 단순히 배우라는 타이틀에 한정짓기에는 하정우라는 사람의 면면이 너무 방대하고 이채롭다. 연극, TV드라마, 영화, 시나리오 작가, 감독. 그리고 에세이 작가, 그림 작가까지. 그 자체로 현대 '종합예술'의 결정판으로 여겨지는 영화의 한 가운데에서 중심을 잃지 않고 그에 버금가는 또 하나의 하지만 같은 길을 가는 방면을 개척해 역시 중심으로 다가가고 있는 그.


이제 좀 쉴 때도 되지 않았나 싶지만, 그의 이름 석 자가 아로새긴 예정작들이 즐비하다. 우린 그저 즐거울 뿐이다. 열일하는 그가 부러우면서 믿음직하고, 한없이 대세인 그가 계속 대세였으면 좋겠으며, 종합예술의 경지에 오른 그가 더 멀리 오래 비상하기 위해 조금은 몸을 추스렸으면 한다. 오래된 팬으로서 갖는 아이러니이지만, 여하튼 그를 여기저기에서 꾸준히 보고 싶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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singenv

冊으로 策하다. 책으로 일을 꾸미거나 꾀하다. 책으로 세상을 바꿔 보겠습니다. singenv@naver.com Since 2013.4.16