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기획] 언론인의 모습과 자세를 들여다보는 영화들


언론은 힘이 셉니다. 그 자체로 이 세상 모든 것 위에 군림할 수 있는 권력을 가지고 있죠. 그래서 언론에게는 특별히 반드시라고 해도 좋을 만한 통제가 수반되죠. 모든 게 그 가공할 파급력에서 기인하는데, 가장 먼저 절대 거짓말을 해서는 안 됩니다. 사실은 물론 진실을 추구해야 하고, 공적으로 행동해야 합니다. 그런 것들이 선행된 후에 누구도 그들이 보도할 권리를 통제할 수 없는 자유의 권리를 얻는 것입니다. 


역사상 수많은 사건사고들이 언론을 통해서 알려졌습니다. 사실 대부분의 사건사고들이 그러했었겠죠. 언론의 권리와 의무를 다한 권리라 하겠습니다. 물론 쉽지 않았을 거라 생각합니다. 실제로도 많은 어려움이 있었죠. 다 완벽하지 않은 사람에 의해 행해지는 것인지라, 실수도 있었겠거니와 유혹도 있었을 것입니다. 


그런 와중에 수많은 어려움을 극복하고 언론의 소임을 다한 이들이 있습니다. 영화가 그런 '위대한' 이들의 이야기를 그냥 지나칠리 없죠. 기억해야 하고 되새겨야 하고 현재를 반추해야 합니다. 여기 위대한 언론인을 다룬 영화 몇 편을 불러내어 보겠습니다. 그들이 다룬 사건사고의 위중함과 심각성보다, 그런 사건사고를 다룬 언론인의 모습과 자세를 들여다보는 시간이 되었으면 합니다. 




<더 포스트>


영화 <더 포스트> 포스터. ⓒ이십세기폭스코리아



미국을 넘어 전 세계를 뒤흔든 1971년 <워싱턴 포스트>의 '펜타곤 문서' 폭로를 다루었다. 본래 최초 보도는 <뉴욕 타임스>였던 바, <워싱턴 포스트>는 정부에 의해 보도가 금지된 '펜타곤 문서' 폭로를 오랜 고심 끝에 결정한다. 거기엔 톰 행크스가 분한 편집장 벤의 언론인으로서의 자세와 메릴 스트립이 분한 발행인 캐서린의 여성으로서의 성장이 겹친다. 스티븐 스필버그 감독은 이를 훌륭히 조합해냈다. 


너무나도 유명한 사건이기에, 그 사건 앞에 충분히 영화의 모든 것이 휩쓸려 버릴 수 있었으나 '언론'과 '여성'이라는 투 트랙을 처음부터 끝까지 고집스럽게 잡아 밀고 나간 모습에 아낌없는 갈채를 보내고 싶다. "우리가 보도하지 않으면, 우리가 지고 국민이 지는 겁니다"라는 벤의 캐서린에게 보내는 절규어린 대사가 기억에 남는다. 



<모두가 대통령의 사람들>


영화 <모두가 대통령의 사람들> 포스터. ⓒ워너브라더스



<더 포스트>의 주인공 <워싱턴 포스트>가 다시 한 번 큰 일을 해냈다. 영화의 말미에도 잠깐 모습을 드러내는데, 1972년 6월 닉슨 대통령의 재임을 위해 공작반이 워싱턴에 위치한 워터게이트 빌딩에 잡입해 도청장치를 설치하려다가 발각되어 잡힌 이른바 '워터게이트' 사건을 다루었다. 


자그마치 더스틴 호프만이 분한 칼 번스타인 기자와 로버트 레드포드가 분한 밥 우드워드 기자는 그야말로 발로 뛰고 눈으로 보고 손과 귀와 입으로 전화한다. 영화는 이 아날로그적이기 짝이 없어 루즈하기 쉬운 모습을 지극히 다큐멘터리적으로 보여줌에도 불구하고 긴장감을 유지했다. 


단순히 언론인으로서의 기자만 보여준 게 아닌, 정치적 역학관계도 여과없이 보여줬기 때문이 아닐까. 엄청난 사건에 뛰어든 두 기자의 치열한 언론현장과 더불어 영화적인 흥미의 맥락까지 살려낸 수작 중 수작이라 하겠다. 



<굿나잇 앤 굿럭>


영화 <굿나잇 앤 굿럭> 포스터. ⓒ유레카픽쳐스



1950년대 미국을 광풍으로 몰아넣은 매카시즘. 위스콘신 주 상원의원 조지프 매카시가 '반공'을 기치로 각계 각층에서 활동하는 공산주의자 색출에 뛰어들어 공산주의자들에 대한 고발 열풍까지 이어진 것이다. 극에 달한 열풍은 급기야 공산주의와는 관련 없는 무고한 사람들까지 몰아가지만 그와 맞서려는 이는 감히 없었다. 


당시 메이저 방송사 중 하나인 CBS의 명성 있는 앵커 에드워드 R. 머로와 프로듀서 프레드 프렌들리는 'SEE IT NOW'라는 정치 시사 다큐멘터리로 뜨거운 이슈를 던져 논란을 일으켰다. 여지없이 매카시에게도 정면으로 도전한 그들, 그야말로 공산주의자로 몰려 인생의 말로로 치달을 수도 있을 위협을 무릅쓴 것이다. 


언론인이라 해도, 언론인의 자세가 진실을 추구하고 알리고 관철시키는 것이라 해도, 모두가 그것을 안다고 해도, 이런 직접적이고 광할한 위협 앞에선 그것이 당연하다고, 무조건 해야 한다고 말하기 힘들다. 그럼에도 '언론'은 힘이 쎄다는 것, '진실'은 더욱 힘이 쎄다는 걸 실제로 보여준 단적인 예다. 


"TV는 가르치고, 계몽하고, 영감을 줄 수 있습니다. 허나, 그렇게 되려면 인간이 그런 목적으로 사용하려고 해야 합니다. 그런 노력이 없는 한 TV는 바보 상자로 전락하겠죠. 좋은 밤 되시고, 행복하십시오."



<스포트라이트>

 

영화 <스포트라이트> 포스터. ⓒ팝엔터테인먼트



가톨릭 성직자 아동 성추행 사건 중 대표(?)로 뽑히는 '보스턴 가톨릭 성직자 아동 성추행 스캔들'의 <보스턴 글로브> 스포트라이트 팀의 폭로 실화를 다루었다. 사건도 사건이거니와 폭로도 폭로였다. 깊은 곳에 숨겨져 있는 사건의 폭로는 참으로 힘든 것이다. 만류 당하고 저지 당하고 협박 당하고 난항을 겪는다. 


영화는 그런 와중에 사건 자체와 폭로에 집중하기보다 언론인의 자세에 집중한다. 이미 피해자 중 한 명은 오래전부터 계속 알리고 제보해왔지만, 언론에서는 다루지 않았고 다루더라도 지극히 관행적으로 다뤘을 뿐이었다. 그럴 수밖에 없었을까. 그야말로 '이런 사건을 알리지 않으면 언론이라 할 수 있을까?' '이런 사건을 언론이 알리지 않으면 누가 알릴까?'라는 생각이 들게 만든다. 


엔딩 크레딧 전 '버나드 로 추기경은 사임한지 얼마 되지 않아 가톨릭의 최상단 교구로 부임되어 성직자 생활을 계속했다'라는 말이 나온다. 이 영화는 언론의 화끈한 승리를 보여주지 못한다. 그럼에도 언론은 진실을 향해 끊임없이 나아가야 한다. 



<트루스>


영화 <트루스> 포스터. ⓒ라이크 콘텐츠



2004년 11월경, CBS 시사 고발 프로그램 '60분'은 큰 결정을 한다. 훗날 '래더 게이트'라 불리는, 부시 대통령 병역비리 보도인데 큰 사건인 만큼 철저하고 끈질기게 조사하고 추적했고 내부 조사단에 맞서 결국 TV 보도에 성공한다. 하지만 곧 오보 의혹을 받으며 남은 건 피나는 가시밭길이었다. 


영화는 승리한 언론인의 거창한 이야기가 아니다. 언론인에게 있어 승리, 즉 진실을 보도하는 데 실패한 것처럼 보이기 때문이기도 하지만, 그 진실을 추구하는 과정이 너무나도 힘들고 처참하기 때문이기도 하다. 또한 '진실'이라는 게 때론 얼마나 주관적인지 아니, 주관적일 수밖에 없는지에 대한 성찰도 가히 어렵고 힘들다. 


이 어마어마한 사건은 여전히 미궁 속에 있다. 반면 그 사건을 맡은 60분 팀은 와해된다. 과정에서 명백한 실수가 있었기 때문이다. 문제는 실수를 실수로 받아들이지 않고 실수를 의도로 읽어, 언론인으로서 올바른 자세를 견지했던 기자를 다른 층위로 공격했다는 데 있다. 진실 추구는 언제나 환영하고 응원한다. 다만, 그 과정과 결과가 추구를 뒷받침하지 못한다면 모든 게 허사가 되지 않는가. 모든 것에 힘을 실어야 하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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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명절에 몰아보기 딱 좋은 드라마] <하얀거탑>


명작 드라마 <하얀거탑>. ⓒmbc



2000년대 들어서 한국 드라마는 '전형적인 캐릭터', '개연성이 무시된 이야기', '남녀 주인공의 천편일률적인 짝짓기 놀음' 등으로 점철되어 시청자들의 외면을 받아왔다. '시간 때우기'로 전락해버린 것이다. 그걸 타파하기 위해선 '리얼한 직업 세계의 생생한 현장감'과 '살아있는 인간 이야기' 조합에 따른 드라마 패러다임 재판이 필요하다. 


드라마 <하얀거탑>은 2007년 새해 벽두에 드라마 패러다임을 바꾸고자 하는 거창하면서도 명백한 기획의도를 가지고 시작했다. '인간이란 무엇인가?'의 주제로 수렴될 이 명작의 기획의도와 방향은 돌이켜보면 참으로 대단한 도전이고 자기확신에 찬 포부였다. 한국 드라마계의 새로운 기준이자 하나의 혁명과 다름아니었다고 본다. 


물론, 10년이 훌쩍 지난 지금도 방송 3사의 드라마는 <하얀거탑>이 확언한, 시청자들이 외면하는 '시간 때우기'용이 대부분이다. 거기에 옳고 그름의 잣대를 댈 수는 없지만, '드라마'라는 생명체의 시선에서 보면 그른 게 확실하다. 10년 사이에 방송 3사가 아닌 종편과 케이블 채널들이 수없이 생기며 드라마 또한 다양화가 실시되어 <하얀거탑>이 바꾼 드라마의 패러다임을 수용하고 있는 것 같아 한편 다행인 마음도 든다. 


이 드라마는 빈틈과 군더더기 따위는 찾아볼 수 없는 스피디한 전개, 치밀한 복선과 파격적 임기응변이 함께 하는 다양한 장르의 향연, 현실적이고 인간적이며 입체적이기까지 한 캐릭터와 자못 드라마틱하고 한편 비인간적이라고까지 할 수 있는 캐릭터들의 조화 등이 시작부터 끝까지 유기적으로 맞물려 눈을 뗄 수 없게 만들 것이다. 그야말로 한번에 몰아볼 수 있는, 몰아보기에 용의한 드라마라 아니할 수 없다. 


편, MBC 사장이 교체됨과 동시에 드라마의 혁신을 위하여 시간이 필요하던 차에 한국 드라마계 혁신의 대명사 <하얀거탑>을 UHD로 다시 만날 기회를 얻었다. 지난 1월 22일부터 주중 미니시리즈가 시작될 3월초까지 매주 월~목 10시에 만나볼 수 있다. 여러모로 이번 설 연휴가 <하얀거탑> 몰아보기에 적합한 때가 아닐까 싶다. 


인간군상의 집합체 


인간군상의 집합체. <하얀거탑>의 한 장면. ⓒmbc



<하얀거탑>은 온갖 인간군상들의 집합체이다. 이 드라마를 '야망에 불타는 한 천재 외과의의 질주와 파멸'이라 정리해도 될 만큼, 김명민이 분한 장준혁은 지극히 핵심적 인물이다. 그는 흙수저 출신으로 오로지 실력 하나로 국내 굴지의 대학병원 외과 부교수 자리에 올랐거니와 간담췌 분야의 세계적 실력자로 군림하고 있다. 하지만 그에겐 더 큰 야망이 있으니, 일단 외과 과장이 되는 것이다. 그는 끝없는 질주를 시작한다. 


장준혁과는 학생일 때 과에서 1, 2등을 다툴 정도로 수재이지만 정반대의 삶의 기조를 지니고 있는 소화기내과의 최도영(이선균 분) 부교수가 있다. 그는 형제 모두가 줄줄이 의사로 있는 의사 집안 출신으로 오로지 환자를 생각할 뿐 자리에 운운하거나 권력에의 의지 또는 야망 따위는 없다. 장준혁에 비해 덜 인간적이고 덜 입체적인 인물이지만, 장준혁의 인물상을 부각시키는 데 탁월한 역할을 한다. 


한편, 가장 현실적이고 가장 입체적이며 동시에 가장 드라마틱한 인물이 있다. 일명 '고매한 성품의 소유자'이자 4대째 의사로 있는 이주완(이정길 분) 외과 과장. 정년퇴임을 앞두고 '휴머니즘이 없는' 장준혁이를 10년 동안 자신을 모셨음에도 후계자로 두지 않으려 한다. 하지만 그야말로 누구보다 위선적이고 비열하기 짝이 없는 인물이기도 하다. 이 세상의 중심이 자신이어야 하는 것이다. 


이밖에도 외과 과장 이주완의 딸이지만 자신의 위치 같은 건 생각 않고 어려운 사람을 도와주고 하는 마음과 정신의 소유자 이윤진, 돈이라면 모든 걸 좌지우지할 수 있다고 생각하는 장준혁의 장인어른 민충식 원장, 겉으로는 명분을 내세우고 속으로는 철저하게 이해득실을 따지는 진료 부원장이자 소화기 내과 과장 우용길, 절대 타협 불가의 대쪽 같은 성격의 소유자 병리학과 석좌교수 오경환, 장준혁 말이라면 불에라도 뛰어들 외과 의국장 박건하, 장준혁과 비슷한 환경에서 자라났지만 절대 장준혁처럼 될 수 없는 전임의 염동일 등이 드라마를 탄탄하게 채운다. 


이 드라마에 몰입하게 되는 이유


이 드라마에 몰입하게 되는 이유. <하얀거탑>의 한 장면. ⓒmbc



이 드라마는 몇 번을 봐도 혼란을 불러 일으킨다. 나는 이중에 누구인가, 또는 누구와 맞대응 되겠는가. 말하기 부끄럽지만 그나마 겉과 속이 다른 이주완 과장 또는 비슷한 맥락에서 겉으로는 명분을 내세우지만 속으로는 이해득실을 따지는 우용길 부원장에 가장 가깝지 않겠는가 하는 생각과 함께, 다른 누군가에게 감정을 이입하고 있는 나를 발견한다. 그 인물은 볼 때마다 바뀌고, 상황이 바뀜에 따라 역시 바뀐다. 


그게 이 드라마에 가장 큰 장점이라 할 수 있겠는데, 아무래도 장준혁에게 감정을 이입할 수밖에 없을 것이다. 그가 외과 과장이 되는 험난한 길을 거쳐, 치명적이면서 필연적인 실수로 기나긴 법정 공방을 치르고, 와중에 많은 신호가 오지만서도 무시해버린 결과 돌이킬 수 없는 병 때문에 죽음으로 치닫게 되는... 그의 너무도 치열한 삶 앞에서 고개가 숙여지면서도 한숨이 나오는 건 '인생무상'이라는 말 때문이겠다. 


피도 눈물도 없이 모든 걸 뒤로 하고 오로지 앞과 위만 보고 질주하는 것 같은 장준혁이지만, 그에겐 이 세상 누구보다 중요한 어머니가 계시고 속 깊은 모든 얘기를 건네고 위로 받을 수 있는 애인이 있으며 때론 옆도 뒤도 돌아볼 수 있게 만드는 친구 최도영이 있다. 하지만 그게 다 무슨 소용인가... 싶게 만드는 비극적 종말이다. 


그래서 얼핏 보면 선(최도영 등)과 악(장준혁 등)의 대립과 그에 따른 권선징악의 수순이 그려지고 있는 것 같지만, 애초에 선과 악이 명확하게 구분되어 있는지조차 의문스럽게 만드는 대목과 인물들이 매순간 우리를 찾아온다. 더군다나 장준혁이 법정 공방을 치르게 될 때 보란듯이 합심해 정의 편이 아닌 장준혁 편을 드는 대학병원 의사들의 꼬락서니는 더더욱 그런 생각을 들게 만든다. 


인간이란 무엇인가


인간이란 무엇인가. <하얀거탑>의 한 장면. ⓒmbc



인생무상, 선과 악의 모호함과 그에 따른 혼란 등은 '인간이란 무엇인가'로의 주제로 수렴되는 데 결정적 역할을 한다. 이는 자연스럽게 '어떤 삶을 살아야 하는가'로 넘어간다. 한두 번 정도 보는 걸로는 절대 답을 낼 수 없는 만큼, 몇 번이고 그것도 한번에 몰아봐야 약간의 답길이 보이기 시작할 것이다. 


이런 생각들, '인간'이라는 한 단어로 이 드라마의 궁극적 물음을 요약할 수 있게 되었을 때 비로소 <하얀거탑>의 진정학 명작화가 시행되었다고 할 수 있다. 그 전까지 <하얀거탑>은 그저 굉장히 흥미진진하고 잘 만든 드라마일 뿐이다. 그 이후 <하얀거탑>은 드라마 따위를 뛰어넘는 시대불문 '명작' 콘텐츠가 된다. 


아직 한 번도 접하지 못한 분들께 드리는 경고(?)는, 이 드라마가 결코 의학 드라마가 아니라는 점이다. 여기서 의학은 정치, 법정 공방의 수단이라고 해도 과언이 아니다. 물론 거의 모든 등장 인물이 의사인 이상 의사 세계의 단면을 기가 막히게 그려내고 있는 건 사실이다. 


하지만 <하얀거탑>은 의사 세계도 역시 사람 사는 세계라고 말하며 의사들을 하야디 하얀 순백의 탑에서 지상으로 끌어내린다. 적어도 이 드라마에서는 더 이상 그들만의 세상이 아닌 것이다. <하얀거탑>의 또 다른 위대한 점이 바로 여기에 있고, 우리가 시대를 뛰어넘는 공감을 하는 이유가 여기에 있으며, 드라마로서 보여줄 수 있는 최대치를 뛰어넘거나 본연의 임무를 다한 모습이 여기에 있다 하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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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기획] 올해가 가기 전에 꼭 챙겨보자


올해에도 역시 참으로 많은 영화가 제작되어 우리의 눈과 귀와 머리를 즐겁게 해주었다. 매년 느끼는 것이지만 영화를 이루는 기술, 스토리, 메시지 등에서 이제까지 축적해온 게 너무도 많아 더 이상 새로울 게 없을 것 같다고 생각하는데, 영화들은 여지없이 그 생각을 무너뜨린다. 


영화가 '종합예술'이라는 걸 절실하게 느낀다. 영화를 영상으로만 만들어진 예술이라고 생각하기 쉽지만, 실상 영상은 수단으로 사용되는 경우가 많다. 바야흐로 이야기의 시대, 영화도 이야기가 최소한의 기본이 되어 가고 있다. 물론, 영화에서 영상이 차지하는 비중은 단적으로 절대적이다. 그 사실을 간과하거나 무시한 게 아닌, 그 사실을 당연히 받아들이고 난 후 보이는 것들이다. 


올해 영화 이슈를 간략히 훑어보자. 역시 '송강호', 유일하게 천만 관객을 돌파한 <택시 운전사>가 눈에 띈다. 개인적으로 중간에서 포기한 몇 안 되는 영화 중 하나인데, 그럼에도 단연 으뜸의 흥행력을 보여주었기에 박수를 보낸다. <범죄도시> <청년경찰>은 상대적으로 적은 제작비로 소위 대박을 친 경우다. 큰 기대를 하지 않았음에도 큰 즐거움과 큰 돈을 안겨준 신드롬의 주인공들이다. 


반면, 역대급 망작과 최고 기대작의 실패도 올해 영화계를 풍성(?)하게 했다. 김수현 주연의 <리얼>은 수많은 우여곡절 끝에 개봉했지만 엄청난 논란에 휩싸여 역대급 '망작'으로 최악의 흥행과 함께 마감했다. 류승완 감독의 <군함도>는 초호화 캐스팅과 엄청난 제작비로 2017년 최대 기대작 중 하나였지만, 스크린 독과점과 역사 왜곡 등의 논란에 휩싸여 흥행 실패를 맛보았다. 역시 신드롬의 주인공들이다. 


올해가 가기 직전, 시간을 어떻게든 내서 봤으면 하는 작품들이 여기에 있다. 지극히 개인적인 식견 하에 추려진, 지극히 개인적인 바람이다. 개중에는 누구나 알 만한 흥행 작품도 있고, 많은 인기를 끌지 못한 '듣보잡' 작품도 있다. 하지만 공통적으로 어디에 내놔도 제 몫을 충분히 할 좋은 작품들인 건 분명하다. 


* 5편에 속하지 못했지만, 2017년이 지나가도 한 번쯤 봤으면 하는 2017년 작품들 10편을 추려 제목만 나열해본다. 이 작품들 또한 왠만하면 후회하지 않을 것이다. 

<너의 이름은> <컨택트> <히든 피겨스> <겟 아웃> <지랄발광 17세> 

<프란츠> <몬스터 콜> <베이비 드라이버> <남한산성> <폭력의 씨앗>






영화 <문라이트> 포스터 ⓒ오드(AUD)


① 문라이트(Moonlight)


명실공히 2016년 최고의 작품이다. <라라랜드>를 제치고 제89회 아카데미 작품상을 타고야 말았는데, 그야말로 영화의 모든 이들이 흑인으로 구성되어 있는 바 영화 외적으로도 '쾌거'라고 할 수 있겠다. 우리는 2시간이 채 되지 않는 짧은 시간 안에 한 인간의 성장을 오롯이 대면할 수 있다. 


영화는 미국이 아마도 가장 덮고 싶어 하는 부분을 들춰내고자 한다. 배경이 되는 곳은 마이애미 흑인 지구의 마약 소굴, 그곳의 작고 한 없이 힘 없는 아이 리틀. 희망도 슬픔도 없이 공허하게 어른이 되어 간다. 그런 그에게 후안은 많은 힘이 되는데, 그가 말한 '달빛 아래에선 흑인 아이들도 파랗게 빛나지'는 일종의 지침이 된다. 


성장해야 하는 필연적인 이유가 있는 그에게 성장에의 길은 어둠 그 자체다. 그것도 겹겹이 쌓인. 그래도 어둠 속에서 빛나는 달빛 같은 존재가 있기 마련이다, 아니 다른 누구도 아닌 내가 그런 존재가 되는 것이다. 이 역사상 가장 아름다운 영화에 달빛이 스며들 때 전율하지 않는 이 없고 눈물 흘리지 않는 이 없다. 성장을 함부로 논하지 말라. 성장은 파괴되고 파괴하는 어둠 속 빛의 미학이다. 



영화 <덩케르크> 포스터 ⓒ워너브라더스코리아


② 덩케르크(Dunkirk)


명명백백 '거장' 크리스토퍼 놀란 감독의 최신작이다. 뜬금없이 전쟁영화를 들고 나온 그에게 의문을 품은 이들이 많았었는데, 재난영화라고 봐도 무방할 다른 차원의 전쟁영화를 선보여 '역시' 크리스토퍼 놀란이라는 말만 되풀이하게 만들었다. 영화는 제2차 세계대전 초기의 저 유명한 덩케르크 철수 작전을 배경으로 한다. 


놀란은 전쟁영화를 재난영화로 둔갑시킴으로써 오히려 전쟁의 비인간적이고 무차별적인 면모를 부각시킨다. 재난이란 예측불허하고 무차별적이며 인간 따위는 생각하지 않는다. 더욱이 영화는 재난 상황은 매우 미시적으로 재난에 처한 인간은 매우 거시적으로 그려내며, '재난'의 전형적이며 실제적인 무서움을 역설한다. 


이쯤에서 놀란이 택한 마무리는 '인간'이다. 무자비하고 폭력적인 재난전쟁을 버틸 수 있는 건, 그 앞에서 무너지지 않는 인간의 숭고함이라는 것이다. 새삼 곳곳에 뿌리박혀 있는 인간성들이 고맙게 느껴진다. 우리가 사는 세계는 그런 세계이다. 폭력적일수록 더더욱 숭고해지는 인간성이 우리를 지켜주는 세계. 



영화 <윈드 리버> 포스터 ⓒ유로픽쳐스


③ 윈드 리버(Wind River)


<시카리오: 암살자의 도시> <로스트 인 더스트>의 각본을 맡아 자타공인 할리우드 최고의 작가 중 한 명으로 급부상한 테일러 쉐리던이 연출자로 데뷔했다. 그는 전작에서 여지없이 '속살'을 비추는 데 천착했는데, <윈드 리버>에서도 그럴 가능성이 크다. 인디언 보호 구역이자 끝없이 펼쳐진 설원 와이오밍주 '윈드 리버'로 가보자. 


야생동물 사냥꾼 코리는 설원 한복판에서 여인의 시체를 발견한다. 곧 FBI 요원 제인이 달려오고 공조 수사가 시작된다. 이 설원은 변화를 기대할 수 없는 미국의 축소판이다. 영화는 윈드 리버에 마지막 희망이 있다고 보고, 미국 그 자체인 제인이 그 희망의 키를 쥐고 있다고 보았다. 그녀가 얼마나 이 설원(자연)을 이해하고 윈드 리버(인디언)을 존중하고 그 모든 것에 공감할 수 있는지. 


너무나도 쉬워 보이고 하찮아 보이는 단어들, 공감과 이해. 사실 그것들이 전부다. 그것들만 이행해도 세상은 한층 더 살기 좋아질 것이다. 우리는 윈드 리버가 상징하는 막연하면서도 실질적인 '벽'을 허물 준비가 되어 있는가? 아니, 다가갈 준비나 되어 있는가? 



영화 <우리의 20세기> 포스터 ⓒ그랜나래미디어


우리의 20세기(20th Century Women)


영화는 나이도, 세대도, 성도, 삶의 방향이나 지침도, 생각도 완전히 다른 다섯 남녀를 통해 20세기의 면면을 보여준다. 상당한 미장셴을 앞세워 다큐멘터리적 요소가 강한 스토리와 구성을 감각적으로 탈바꿈시킨다. 그들의 소소한 서사와 20세기를 우리는 왜 보아야 하는가. 


그들의 20세기는 문자 그대로 1999년까지가 아닌 1979년까지의 시대다. 1980년대부턴 지미 카터 대통령의 연설대로 절제의 통제의 시대, 획일화된 시대로 진입한다. 영화가 보여주고자 했던 20세기는 문화와 세대와 환경에서 비롯된 차이들이 서로 편견을 갖지 않고 인정하는 시대인 것이다. 


영화는 그런 모습들을 다양한 장치들로 보여주려 한다. 빨리 감기, 홀로그램, 미래지향적이고 몽환적인 음악들 말이다. 영화에 활기를 불어줌과 동시에 품격까지 최소 한 단계 높이는 결과를 도출한다. 지나간 한 시대를 기억하기에 알맞은, 여운이 길고 짙게 나는 장치들이다. 올해가 가기 전에 봤으면 하는 가장 좋은 영화이다. 



영화 <빛나는> 포스터 ⓒ그린나래미디어


⑤ 빛나는(光, Radiance)


일본 최고의 감독 '가와세 나오미'의 작품이다. 그녀의 작품들은 하나같이 행간과 자간을 꼼꼼히 살피고 읽어내어 해석해야 할 필요가 있기에 호불호가 갈린다. 그런데 이 작품 <빛나는>은 그런 단점(?)들을 해소한 느낌이다. 그저 아무 생각 없이 보아도 감동이 스며든다고 할까. 


영화는 시각장애인을 위한 영화 음성 해설을 쓰는 작가와 점차 시력을 잃어가는 사진작가의 만남을 다룬다. 그러면서 관계와 성장과 상실의 하모니를 내보이는데, 그 추상적이기 짝이 없는 개념들을 정교하게 잘 풀어낸다. 우린 그 와중에 '빛나는 순간들'을, 우리 인생에도 있을 빛나는 순간들을 생각하게 된다. 


이제 다시 빛을 볼 수 없는 주인공의 마음이 고스란히 전해지는 바, 옛날 어느 때 어느 순간을 그리게 되고 현재의 이 순간을 붙잡고 싶어지며 미래의 그때 그 순간을 기다리게 한다. 올해의 마지막을 수놓은, 수놓을 아름다운 영화 <빛나는>. 2017년의 마지막 빛나는 순간에 이 영화가 함께 하길 바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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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책으로 책하다] 지금 이곳은 스크린셀러 천국


영화 '스크린'과 책 '베스트셀러'의 합성어로, 영화화된 소설 원작이 다시금 주목을 받아 베스트셀러가 되는 현상을 '스크린셀러'라 한다. 2000~2010년대 <해리포터> <반지의 제왕> <헝거게임> 등의 소설을 원작으로 한 시리즈가 대대적인 인기몰이를 하면서 확실히 자리를 잡았는데, 사실 그 기원은 족히 수십 년 전으로 올라간다. 


1990년대에도 '스크린서 새옷 입는 베스트셀러'(경향신문)와 같은 제목의 기사를 찾아볼 수 있고, 일찍이 1960년대에도 '영화화된 헤밍웨이 작품'(동아일보)라는 제목의 기사가 나왔다. 심지어는 1930년대에 굉장히 의미있는 기사가 있는데, '문학과 영화'(동아일보)라는 기사이다. 


첫단락부터 80년 후의 2017년 모습과 기묘하게 겹친다. "베스트셀러가 영화화되던 시대에서 지금은 영화화된 문예작품이 베스트셀러가 되는 시대로 전위되고 있다." 그야말로 '스크린셀러'의 정확한 해석이다. 그러며 기사는 문학과 영화의 장단점, 한계 등을 고찰하고, 각자 나아가야 할 길과 함께 나아가야 할 길을 모색한다. 참으로 오래된 스크린셀러의 역사다. 


스크린셀러의 현재




스크린셀러의 역사 브리핑은 이쯤에서 간략히 접고, 스크린셀러의 현재와 근과거를 들여다보는 시간을 갖도록 한다. 지난 9월 6일에 개봉해 여전히 위력을 발휘하며 4년 전에 나온 원작의 초베스트셀러 복귀에 크나큰 영향을 미친 <살인자의 기억법>과 북미에서는 R등급 역사의 새로운 역사를 쓰고 있지만 국내에서는 신통치 않은 스티븐 킹 원작의 <그것>을 필두로 10월 3일 개봉을 앞두고 이 역시 원작이 다시금 베스트셀러의 위치에 오를 게 확실한 <남한산성>까지, 지금은 스크린셀러 천국이다. 


<살인자의 기억법>는 알츠하이머에 걸린 전직 연쇄살인마가 딸을 구하기 위해 마지막 살인을 계획하는 게 주요 내용을 이룬다. 굉장히 흥미로운 시나리오임에 분명하지만, 소설은 뚜렷한 서사나 캐릭터 대신 철학적 고민과 삶과 시대에의 통찰이 주를 이룬다. 영화는 캐릭터성을 극대화시키고 사건을 명료화했다. 비슷한듯 다른 이 두 소설과 영화, 영화가 행한 선택과 집중이 외려 영화뿐만 아니라 소설로의 관심도 증폭시켰다. 실로 오랜만에 돌아온 완벽한 스크린셀러다. 하지만 개인적으로 두 작품 모두 봐도 그만 안 봐도 그만인 정도가 아닌가 한다.  


<그것>은 이야기의 제왕 스티븐 킹의 최고의 소설이자 가장 무서운 소설 <그것>을 원작으로 한 영화이다. 어린 시절과 어른이 된 현재를 아우르며 방대하기 그지 없는 이야기로 당대 미국의 모든 것을 말하고자 하는 소설과 달리, 영화는 일단 1편에서 어린 시절만 따로 떼어내 공포에 천착한다. 물론 '그것'이라는 매개체를 통해 공포의 진정한 근원을 은유적으로 표현해내고 있긴 하다. 하지만 이 두 소설과 영화가 서로에게 큰 영향을 줄 만할 정도는 아니다. 둘 다 그 자체가 가지고 있는 작품성과 메시지, 장단점이 명료하다 못해 치명적이다. 스크린셀러와는 거리가 있지만, 둘 다 반드시 읽고 봐야 하는 작품들임에 분명하다. 


<남한산성>은 지난 2009년 <도가니>로 원작을 상회하는 신드롬을 일으킨 바 있는 황동혁 감독이 다시 한 번 소설 원작을 스크린으로 불러온 결과물이다. 소설은, 역사적으로도 유명한 바 조선의 운명이 백척간두에 매달린 채 결정을 내리지 못하는 인조와 전쟁 김상헌, 화친 최명길의 절대적 신념 하의 대립을 김훈 소설가 특유의 무미건조한듯한 단문으로 써내려갔다. <도가니>의 전적을 볼 때 영화 또한 그 느낌, 그 대사, 그 고민을 거의 그대로 가져왔을 터 <살인자의 기억법>과는 다른 방법론이라 하겠다. 초베스트셀러 원작에 기댄 면이 큰데, 그러하기에 원작을 향한 관심이 다분히 영화의 작품성과 흥행 결과에 따라 달라질 것으로 보인다. 전형적인 스크린셀러는 아니다. 


스크린셀러의 그늘, 그리고 <위대한 개츠비>의 경우




이밖에도 극히 최근에 개봉한 스크린셀러 영화는 많다. 그저 나열만 해도 족히 몇 줄은 가능하다. <몬스터 콜> <잃어버린 도시 Z> <발레리안: 천 개 행성의 도시> <다크타워: 희망의 탑> <예감은 틀리지 않는다> <레이디 맥베스>, 그리고 곧 찾아올 <너의 췌장을 먹고 싶어> <스노우맨> <7년의 밤> <오리엔트 특급 살인> <신과 함께>까지. 


새삼 이채롭거나 신기할 것도 없는 소설을 비롯한 텍스트 콘텐츠와 영화의 콜라보. 아니, 다분히 원작에 힘입은 영화, 영화 덕분에 다시 살아나는 원작. 하지만 사실 이중에 제대로된 '스크린셀러'라고 할 만한 작품은 잘 눈에 띄지 않는다. 그저 원작이 있는 영화일뿐 그로 인해 원작에 관심이 쏠리지 않는 경우가 많은 것이다. 


이는 영화와 원작이 상호 시너지가 발생할 거라는 계산과 기대 하에 실시된 마케팅에 좌우되는 경우가 많을 텐데, 최근 몇 년간 국내 스크린셀러 성공 사례에 어느 작품들이 있는지 찾아보는 것도 흥미로울 것이다. 지난 2013년 레오나르도 디카프리오 주연의 <위대한 개츠비> 개봉에 맞춰 이례적으로 많은 출판사에서 동시에 번역출간한 사례가 또한 재밌다. 


당시 5월 개봉에 맞춰 4~6월까지 <위대한 개츠비>는 자그마치 20여 종이나 선보였다. 개중에는 문학동네, 열린책들, 열림원, 홍익출판사 등 굴지의 출판사도 있었는데, F. 스콧 피츠제럴드가 사후 70년이 넘었기에 저작권 무료인 점이 가장 크게 작용했었다. 그야말로 사상 최대 스크린셀러 전쟁이었다고 생각하는데, 정작 독점적인 승자는 없었던 걸로 안다. 


성공한 스크린셀러, 그리고 스크린셀러의 미래




최근 몇 년간 가장 큰 성공을 거둔 스크린셀러 몇 편을 들자면, <우리들의 행복한 시간> <도가니> <완득이> <은교> <위대한 개츠비> <마션> <덕혜옹주> 정도가 아닌가 생각한다. 영화가 나오기 전에도 이미 국민적인 베스트셀러라 할 수 있을 정도의 인기를 누린 원작임에도, 영화 개봉과 함께 다시 한 번 엄청난 인기를 누린 사례들이다. 


개중에서도 앞의 4권 정도는 가히 신드롬이라 할 만한 인기를 얻었는데, <은교>의 경우 좀 특이한 경우다. 영화가 쏟아진 관심에 비해 흥행에서 좋은 점수를 받지 못했음에도, 원작이 엄청난 인기를 얻었기 때문이다. 원작에 못미치는 작품이라는 평가 덕분일지 모르겠다. 


80년 전에도 활발히 이뤄졌던 원작의 영화화, 비록 더욱 방대해지는 영화 산업에 기대 인기를 얻으려는 수작이라고 비판을 받을지언정 앞으로도 소설과 영화가 없어지지 않는 이상 영원히 계속될 것이 분명하다. 이제는 영화를 바탕으로 한 소설도 만들어지고 있지 않은가. 


개인적인 바람이 있다면, 결국 좋은 소설이 좋은 결과를 낳고 좋은 영화로 이어진다는 믿음을 저버리지 않으면 좋겠다는 것이다. 독자와 관객을 모독하지 않는 작품은 물론이고, 독자와 관객이 스스로를 모독하지 않는 움직임을 가져가야 하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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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여름휴가 후기] 잊지 못할 2017년 여름휴가, '소야도'


스무 살까지 나에게 여름 휴가는 똑같았다. 추석에 차례를 지내러 찾아뵙기 전에 묘지 관리 및 벌초도 할 겸 강원도로 간다. 아버지 형제분들 가족과 함께, 음력으로 추석인 8월 15일을 전후한 1박 2일 내지 2박 3일의 짧은 기간으로 말이다. 벌초를 하고 근처에 유명한 막국수를 먹고는 동쪽으로 동쪽으로 주문진에 가서 회를 먹는다. 끝. 


그래도 어릴 땐 너무 좋아 일 년을 기다리곤 했다. 또래 친척들을 만나는 것도 재밌고, 북적거리며 먼 곳으로 함께 차를 타고 가는 것도 재밌었다. 더군다나 그때는 방학을 이용해 4박 5일씩 있으면서 물놀이도 하고 산도 타고 여러 곳을 두루두루 다니는 등 제대로 된 휴가를 보냈었다. 기억에 생생히 남아 있는 좋은 추억들이다. 


어쩔 수 없는 부분이지만, 그때 그 어린 아이들이 이제는 다 어른이 되어 서먹서먹해진 건 둘째 치고 예전처럼 마음 놓고 재밌게 놀 수 없게 되었다. 각자의 스케줄 때문에 완전체로 모이지 못하는 부분도 한 몫 하겠다. 한 번 참여하지 못하게 되면 다음에도 왠지 참여하지 못하게 되는 게 모임 아니겠는가. 


나는 군대를 다녀와서도 참여를 했는데 더 나이가 먹고부터는 함께 하지 못했다. 여러 이유들이 있을 것이다. 당연히 이후엔 휴가다운 휴가가 잘 기억나지 않는다. 결혼하기 전, 지금의 아내인 여자친구와도 제대로 된 휴가를 함께 보내지 못했다. 그 역시 여러 이유가 있을 것인데, 결혼 이후에 보상이라도 받으려는 듯 좋은 시간들을 보냈고 보내고 있으니 전화위복이라고 생각하련다. 


설렘과 기대, 걱정과 부담의 여름휴가


소야도로 2017년 여름휴가를 떠나는 길. ⓒ이유정



결혼을 하고 나선 여름 휴가를 처가댁과 함께 하게 되었다. 치밀하고 꼼꼼하신 장인 어른(이하 '아버님')의 주도 하에 모든 걸 다 챙겨주시는 헌신적인 장모님(이하 '어머님')께서 아내와 나를 케어해 주신다. 작년에는 스케줄이 맞지 않아 당일 코스로 새만금간척지 근처를 다녀왔었다. 끝없이 펼쳐진 방조제를 달리며 정신의 피로를 풀었던 기억이 새록새록하다. 


대망의 2017년 올해는 휴가가 오기 한참 전에 스케줄을 맞추고 어디로 가서 어떤 곳에 짐을 풀고 어떤 일로 하루하루를 보낼지 미리 대략이라도 생각을 해두었다. 물론 장인 어른의 주도 하에 말이다. 나에게 있어, 머리가 다 크고 나서 이런 제대로 된 휴가는 아마도 처음일듯. 설렘과 기대가 한껏 부풀었었다. 


반면 아버님, 어머님과의 휴가도 당연히 처음이니, 걱정과 부담도 한껏 부풀 수밖에 없었다. 비록 그래도 자주 만나는 편이어서 일반적으로 생각하는 아버님과 어머님이 아니라 그렇게 큰 걱정은 없었지만 말이다. 그래도 아내와 나만의, 또는 나만의 휴가는 없는 것이나 마찬가지니, 다른 불만 또한 없었다고 할 순 없을 것이다. 


그러니, 설렘과 기대가 7이라면 걱정과 부담, 그리고 다른 불만이 3 정도였을 게다. 한편, 아내는 너무너무 좋아했다. 마음이 편한 것 같았다. 우리끼리 휴가를 가게 된다면 우리가 아닌 아내만 챙겨야할 게 너무 많은데, 처가댁과 함께 가니까 생각해야 할 것도 챙겨야 할 것도 터무니 없이 적게 되는 게 아닌가. 그녀는 진정한 휴가를 보내게 될 거라고, 무진장 편하고 재미있을 거라고 호언장담했다. 아내의 말을 믿어 보기로!


'소야도', 그곳은 완벽한 휴가처


완벽한 휴가처 '소야도' ⓒ이유정



우리가 갈 곳은 인천 바다에 떠 있는 '소야도'로 정해졌다. 대부도에서 배 타고 2시간 안팎의 거리에 있는 조그마한 섬. 이른 아침 적당한 시간에 출발해, 적당한 기다림으로 기대와 설렘을 극대화 하고, 그를 실현해줄 배도 타고는 소야도로 향했다. 너무나도 맑은 날씨와 어울리는 천연의 자연 환경이 우리를 반겼다. 


아내와 난 챙겨야 할 게 너무 없었다. 그저 우리 둘의 옷가지와 몇몇 놀이품들만 챙기면 되었다. 반면, 아버님께서는 모든 경비는 물론 휴가 장소, 숙박 장소, 매일매일의 스케줄, 차 운전까지 도맡아주셨다. 어머님께서는 매일매일 삼시 세끼를 완벽하게 책임져 주셨다. 집에서도 잘 챙겨먹지 않는 삼시 세끼를 그곳에선 4일 동안 꼬박꼬박 챙겨먹었고 모르긴 몰라도 살이 많이 찌지 않았을까 싶다. 


막상 가본 소야도, 그리고 우리가 묵게 된(묵을 수밖에 없는) 곳엔 '아무 것도' 없었다. 아주 작은 섬인 소야도에는 무수한 자연 환경이 있을 뿐 카페나 슈퍼마켓, 식당 같은 이른바 문명인의 필수처가 없었다. 처음엔 '당황&황당', 그리곤 '적응'을 거쳐, 지금에는 사무칠 정도로 그리워지는 '만족'이 이어졌다. 그렇다. 그곳은 완벽한 휴가처였다. 더할 나위 없는 최고의 한 때를 선물하기에 충분한 곳이었다. 


우린 매일 똑같은 스케줄을 함께 가졌다. 느즈막히 일어나 아침을 먹고는 다시 잠들거나 놀면서 오전 내내 방을 떠나지 않는다. 이윽고 점심까지 챙겨 먹고는 걸어서 5분 거리에 있는 해변(해수욕장)으로 향한다. 몇 시간 동안 물놀이를 하고는 물이 슬슬 빠지는 때부턴 본격적 조개잡이에 진입한다. 타의 추종을 불허할 정도의 조개를 잡고 복귀해 자다가 저녁을 먹고 고스톱을 친다. 적당히 치다가 일찍 잠을 청한다. 아니, 하루 종일 너무 놀았기에 일찍 잠들 수밖에 없다. 


정녕 '아무것도' 하지 않았다


아무것도 하지 않고 그저 놀았던 해변. ⓒ이유정



개인적으로 난 원래 낮잠도 잘 안 자고 일찍 잠자리에 들지도 않으며 하루 종일 무언가를 생각하거나 무언가를 해야 하는 사람이다. 현대인이라면 누구나 가지고 있을 '불안'을 난 그런 식으로 해소하려 하는 것일 테다. 한시라도 생각하지 않고 무언가라도 하지 않으면 도태될 것 같은 그런 기분의 연속. 당연히 이번 휴가 때도 노트북과 책과 핸드폰을 가져가 무엇이라도 하고자 했다. 


과정과 결과는 내 예상과 정반대. 난 그곳에서 '아무것도' 하지 않았다. 일상 생활을 영위할 때 하곤 했던 또는 해야만 했던 것들 말이다. 아무도 시키지 않았는데 스스로의 불안 때문에 해야 했던 것들과 누군가의 부탁 또는 명령에 의해 반드시 해야만 했던 것들. 모르긴 몰라도, 대부분의 사람들이 휴가를 가서도 휴가 이전에 미처 하지 못했던 것들과 휴가 이후에 밀려들 많은 것들을 생각하고 있을 것이다. 


나를 아주 잘 아는 아내가 그랬다. 어쩐 일로 이렇게 낮잠을 자느냐고. 왜 아무 일도 하지 않느냐고. 표정이 참 편해보인다고. 아버님과 어머님은 그곳이 너무 너무 좋다고 하셨다. 아무런 생각도 들지 않게 해주는 진정한 평화가 우리를 둘러싸고 있는 것 같다고. 그저 먹고 마시고 놀고 자고. 가만히 있어도 그 누구도 뭐라 하지 않고. 


기본적으로 돈을 쓰러 휴가를 간다. 그래서 휴가갈 만한 곳에는 역설적으로 문명의 이기들이 그 어느 곳보다 많이 들어차 있다. 많이 생각할 것도 없이 제주도만 보아도 단 번에 알 수 있지 않은가. 반면 이곳은, 소야도는, 오로지 펜션들만 눈에 간간히 띌 뿐이었다. 그 주인들조차도 생필품은 옆의 큰 섬 덕적도나 멀리 인천에서 가져온다고 했다. 이런 곳이 어디있을까 싶다. 정말 다시 없을 휴가를 만든 장본인이다. 


내년이 기다려진다, 진정 휴가다운 휴가


다시 오고 싶은 그곳, 진정한 휴가가 무엇인지 알려준 그곳. ⓒ이유정



내년 여름 휴가가 벌써 기다려진다. 다들 이 곳을 더할 나위 없이 마음에 들어해서, 다음에도 이곳 소야도가 아니더라도 비슷한 느낌을 주는 곳으로 여름 휴가를 떠날 것 같다. 그때는 노트북 따윈 들고 오지 않을 것 같다. 일상에서, 회사에서 했던 수많은 생각들도 들고 오지 않을 것이다. 


휴가가 아니더라도 아버님, 어머님, 아내와 함께 떠나는 그 어떤 여행이라도 기다려진다. 어딜 가서 무엇을 하든 함께 하는 사람만큼 중요한 게 없는데, 한가족이라는 걸 떠나서라도 그들은 나에게 가장 재밌고 가장 편하고 가장 좋은 사람들이다. 한가족인 게 너무나 좋다. 언제든 함께 할 수 있으니. 


진정 휴가다운 휴가. 일을 위한 재충전도 중요하지만 그 따위 건 잠시 접어두고, 진정 함께 하고픈 이들과 편안하게 아무 생각 없이 쉴 수 있는 곳에서 보내는 것. 난 이번 기회로 일을 하는 와중에 휴가를 다녀오는 게 아니라, 휴가를 위해 일을 한다는 생각으로 삶의 방향을 바꾸고자 한다. 


혹시 기존의 나처럼 불쌍한 생각을 가지고 있는 분들이 있다면, 아무것도 없는 곳에 가서 아무 생각도 아무 일도 하지 말라. 그래도 무엇보다 중요한 건 함께 하는 사람들이다. 따로 또 같이 즐길 수 있는 이들과 함께 내려놓는 시간을 가지고 와라. 그리고 그런 시간을 더 많이 가질 수 있는 기회를 가지려고 노력하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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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배우열전] 하정우


개인적으로 '하정우'라는 배우를 처음 알게 된 작품 <용서받지 못한 자>의 한 장면. ⓒ청어람



2005년, 일병 정기휴가 때였다. TV를 틀어 우연히 보게 된 게 하필 윤종빈 감독의 <용서받지 못한 자>. 현역 군인이 제대로 된 한국 군대 영화를 보니 감회가 새롭다 못해 빨려들어 갈 것 같았다. 저 상병과 병장은 미래의 내 모습일 것 같고, 저 일병은 현재 내 모습인 것 같고, 저 이등병은 얼마 전 내 모습인 것 같고...


그때 배우 하정우를 처음으로 보았다. 하정우가 분한 유태정 병장의 군대 생활과 제대 이후를 교차 편집해 보여주며, 그의 중학교 적 친구 이승영이 군대에 적응하지 못하는 것과 맛물려 누가 진짜 '용서받지 못한 자'인가를 신랄하고 가슴 아프게 전한다. 하정우의 실생활적 면모에 기반한 연극적·영화적 연기를 두루 감상할 수 있는데, 윤종빈 감독이 중요한 역으로 나와 함께 전설적 캐미를 자랑하기도 했다. 


이 작품이 하정우의 스크린 데뷔작은 아니다. 그는 2002년에 드라마와 영화로 데뷔해 이듬해와 그 이듬해에도 역시 드라마와 영화를 오갔다. 그리고 <용서받지 못한 자>가 개봉하기 전에 이미 <잠복근무>라는 당시 메이저급 영화에 조연으로 얼굴을 알리기도 했고 드라마 <프라하의 연인>에 비중있는 조연으로 나와 이름을 알렸다. 하지만 이 작품들은 얼굴과 이름을 알리기 위한 방편처럼 느껴진다. 


열일 하정우


'열일' 하정우의 한창 때 작품이자, '대세' 하정우로의 다리가 되어준 작품 <추격자>의 한 장면. ⓒ쇼박스



그는 1998년부터 데뷔를 하고 나서인 2003년까지 거의 매년 한두 작품씩 연극무대에 섰는데, 그 나이 때 배우들이 많이들 듣는 '발연기' 논란 한 번 없는 이유가 여기에 있다 하겠다. '김용건'이라는 전국민이 누구나 알 만한 배우의 아들이라는 타이틀을 완전히 버리고 오로지 자기만의 클래스를 만들고자 한, 멀고 험하지만 알차고 지능적인 경력생활이다. 


하정우를 말할 때 절대 빼놓을 수 없는 사람이 윤종빈이다. 이들은 자그마치 4편을 함께 하는데, 하정우는 단연코 어느 한 감독과 그만큼의 영화를 함께 하지 않았다. '페르소나'라고 할까. 이들은 다름 아닌 대학 선후배 관계다. 둘 다 중앙대학교 출신으로 하정우는 1978년생 연극학과, 윤종빈은 1979년생 영화학과. <용서받지 못한 자>는 윤종빈 감독의 졸업작품인데, 하정우를 비롯 학교 선후배를 총동원해서 찍었다고 한다. 결과는 대성공. 이들은 훗날 일명 '윤종빈 사단'이 되어 많은 영화를 함께 했다. 


2006년부터 2007년까지 하정우는 말그대로 '열일' 한다. 하정우 하면 빠지지 않는 수식어가 먹방과 열일인데, 열일 수식어는 아마 이때부터 그 싹이 보이지 않았나 싶다. 2년 동안 그는 자그마치 단역, 조주연 가릴 것 없이 6개 영화에 출연한다. 대부분 비대중적이지만, 모든 면에서 그의 연기생활에 도움이 될 만한 영화들이었다. 그리고 대망의 2008년이다. '대세' 하정우의 시작이다. 


2005년 <용서받지 못한 자> 이후 2008년 <추격자>야말로 하정우의 이름값을 수직상승시킨 영화다. 희대의 사이코패스 지영민은 2000년대는 물론 한국영화사에 남을 만한 캐릭터로, 하정우는 '능청스럽게' 연기해버린다. <공공의 적>의 사이코패스 조규환이 준 충격을 완전히 안드로메다로 보내버렸다. 10년이 지났어도 생각만 하면 소름이 끼칠 수밖에 없는 그 눈빛과 행동, 그의 나이 불과 31이었다. 그리고 그는 이 해, 단역 한 편과 주연 세 편을 합쳐 네 편의 영화에 출현했다. 윤종빈 감독과 함께 한 <비스티 보이즈>처럼 조금 아까운 영화도 있고, <멋진 하루>처럼 멋진 영화도 있다. 


대세 하정우


그야말로 '대세' 하정우의 한 가운데에서 흥행과 비평, 이슈 모두 훌륭했던 작품 <터널>의 한 장면. ⓒ쇼박스



이때쯤이었던 것 같다. 하정우라는 배우의 캐릭터가 완벽하게 굳어진 시점이. 사이코패스조차 능청스럽게 연기해버리는, 그만의 특유한 연기 방식이 말이다. 그는 우리가 주위에서 흔히 볼 수 있는 일반사람의 모습을 띤다. 거기에 어떤 '연기적' 요소를 찾기 힘들다. 여타 연기자들에게서 흔히 찾아볼 수 있는 톤 앤 매너가 그에겐 없다. 


반면, 지극히 '연극적' 요소는 항상 찾아볼 수 있다. 그런 사람 있지 않은가. 내 주위에도 있는데, 연극적인 일반인 말이다. 하정우는 그 연극적 요소들을 깨알같이 잘게 부수어 연기 전반에 촘촘히 박는다. 부자연스러움은 옅어지고 신선함과 재미짐이 떠오르는 광경을 우린 목격할 수 있다. 


2008년 이후, 아니 2005년 이후 2016년까지 2014년을 제외하고 하정우는 일 년에 두 편 이상 영화에 출현하지 않은 때가 없다. 그리고 최소 한 편 이상 흥행, 비평, 이슈 등으로 한 해 영화계를 흔들 만한 메이저급 영화에 출현한다. 나열해 보자면 2009년 <국가대표>, 2010년 <황해>, 2011년 <의뢰인>, 2012년 <범죄와의 전쟁>, 2013년 <베를린> <더 테러 라이브>, 2014년 <군도>, 2015년 <암살>, 2016년 <터널> <아가씨>... 누군가는 한 편 출현하기에도 힘들 영화들이다. 그리고 올해에는 엄청난 제작비와 함께 그 만듦새 때문에 엄청난 걱정거리(?)를 안기고 있는 <신과 함께>가 대기 중이다. 


하정우 하면 다가오는 이미지가 '믿음'과 '탄탄' 등일 것이다. 탄탄한 연기에 기반한 믿음가는 영화 또는 캐릭터랄까. 그건 하정우라는 사람한테까지도 충분히 적용될 만하다. 그는 이에 부응하듯 배우라는 타이틀에만 국한되지 않고 다양한 방면으로 진출하고 도전하기를 마다하지 않는다. 


종합예술인 하정우


'아티스트' 하정우로서의 작품들이다. 하정우는 그야말로 종합예술인이 아닌가. ⓒ하정우



영화 감독 타이틀이 그중 하나일 것이다. 2013년 <롤러코스터>와 2015년 <허삼관>을 직접 시나리오를 쓰고 연출까지 했다. <허삼관>에는 주연까지 도맡아 했다. 비록 두 작품 모두 흥행 면에서 참패를 면치 못했고 비평 면에서도 그리 좋은 평가를 받지 못했지만, 그 도전 자체로 충분히 박수 받을 만하다고 생각한다. 배우 열일로도 충분히 바쁠 텐데, 언제 글을 쓰고 연출까지 했을까? 싶은 것이다. 하지만 그게 다가 아니다. 그는 엄연히 수많은 아트페어와 개인전까지 연 '아티스트'다. 


하정우 열일의 절정기이자 대세 하정우의 시작점인 2008년, 그는 이미 아티스트로의 길을 암중모색했을 것이다. <국가대표>로 국가대표급 배우로 자리매김한 그때 2009년, 자원순환 정크아트 공모전에 작품을 기증한다. 그는 영화를 찍을 때마다 그림을 그린다고 하는데, 캐릭터의 이미지와 심리를 연상시키는 그림들이다. 그리고 자신을 향한 독백과 세상을 향한 방백을 그림으로 승화시키며, 인간, 배우, 남자로서 스크린에서 하지 못했던 또는 할 수 없었던 이야기를 풀어낸다. 영화로 그림을 그리고, 그림으로 영화를 찍는 것이리라. 


그야말로 하정우를 '종합예술인'이라고 칭해야 하지 않을까. 단순히 배우라는 타이틀에 한정짓기에는 하정우라는 사람의 면면이 너무 방대하고 이채롭다. 연극, TV드라마, 영화, 시나리오 작가, 감독. 그리고 에세이 작가, 그림 작가까지. 그 자체로 현대 '종합예술'의 결정판으로 여겨지는 영화의 한 가운데에서 중심을 잃지 않고 그에 버금가는 또 하나의 하지만 같은 길을 가는 방면을 개척해 역시 중심으로 다가가고 있는 그.


이제 좀 쉴 때도 되지 않았나 싶지만, 그의 이름 석 자가 아로새긴 예정작들이 즐비하다. 우린 그저 즐거울 뿐이다. 열일하는 그가 부러우면서 믿음직하고, 한없이 대세인 그가 계속 대세였으면 좋겠으며, 종합예술의 경지에 오른 그가 더 멀리 오래 비상하기 위해 조금은 몸을 추스렸으면 한다. 오래된 팬으로서 갖는 아이러니이지만, 여하튼 그를 여기저기에서 꾸준히 보고 싶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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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감독 열전] '고레에다 히로카즈' 


'망해 가는' 일본 영화의 버팀목, 고레에다 히로카즈 감독.



긴 역사, 엄청난 제작 편수와 관객수, 질 높은 작품성까지 겸비한 '일본 영화', 하지만 급격한 쇠락의 길로 접어든 지 꽤 되었다고 한다. 작품의 질보다 흥행에 더 초점을 맞춘 결과라 하겠다. 그래도 일본인들의 일본 영화 사랑은 높다. 단, 여기서 말하는 일본 영화는 여전히 일본의 세계적인 자랑거리인 만화 원작 위주다. 일례로, 그나마 일본이 자랑하는 현대 일본 영화 거장 고레에다 히로카즈의 특급작 <바닷마을 다이어리>가 일본에서 개봉했을 때 <러브라이브> 극장판에 밀려 박스오피스 1위를 차지하지 못하는 충격적인 결과를 낳기도 했다. 


그렇다. 고레에다 히로카즈는 현대 일본 실사 영화의 마지막 보루 같은 느낌을 준다. 모든 일본 영화인들이 그만 바라보고 있다는 걸 바다 건너서도 느낄 수 있다. 그는 지난 20년 넘게 그 기대를 충족시켜 왔다. 물론 부침이 없지 않았다. 스타일에 큰 변화가 없다는 점에서 은근히 욕을 먹기도 했을 테다. 여하튼 그는 일본 영화의 버팀목이다. 


충격적 데뷔


고레에다 히로카즈 감독의 충격적 데뷔작 <환상의 빛>. ⓒ씨네룩스



우린 영화 감독들의 충격적인 데뷔를 많이 접했다. 스티븐 소더버그의 <섹스, 거짓말 그리고 비디오 테이프>, 가이 리치의 <록 스탁 앤 투 스모킹 배럴즈>, 스파이크 존즈의 <존 말코비치 되기>, 홍상수의 <돼지가 우물에 빠진 날>, 이창동의 <초록 물고기>, 조지 밀러의 <매드 맥스>, 장이머우의 <붉은 수수밭> 등. 1970~90년대인데, 선입견일지 모르겠지만 2000년대 이후엔 많이 접하지 못한 것 같다. 


그리고 고레에다 히로카즈의 <환상의 빛>이 있다. 1995년작으로, 자그마치 20년이 넘었다. 그는 명문 와세대학 문학부를 나온 문학수재인데, TV 다큐멘터리 연출을 하다가 이 작품으로 장편영화 데뷔를 한다. 그래서인지 문학 작품을 원작으로 하였고 다큐멘터리적 작풍이 다분하다. 


하지만 이때까지는 그보다 정적인 구도에 따른 미장셴에 집착했던 것 같다. 구로사와 아키라의 <카케무샤>가 보여주었던 구도가 일면 엿보인다. 거기에 상실과 기억의 소재가 주를 이룬다. 주인공 유미코는 계속되는 상실을 겪지만 그럼에도 살아간다. 하지만 문득문득 찾아오는 상실 전의 기억들이 그녀를 괴롭게 하는 것이다. 


그의 국제영화제상 수집은 이미 데뷔 때부터 시작되었는데, <환상의 빛>은 세계 3대 영화제 중 하나인 베니스영화제 제52회 촬영상을 수상한다. 이후 불과 수 개의 영화에서 족히 수백 개는 될 듯한 상들을 수집한다. 세계 3대 영화제 진출만 보아도, 제54회 칸영화제 황금종려상 후보 <디스턴스>, 제57회 칸영화제 황금종려상 후보 <아무도 모른다>, 제62회 칸영화제 주목할 만한 시선 진출 <공기인형>, 제66회 칸영화제 심사위원상과 경쟁부문 진출 <그렇게 아버지가 된다>, 제68회 칸영화제 경쟁부문 진출 <바닷마을 다이어리>, 제69회 칸영화제 주목할 만한 시선 진출 <태풍이 지나가고>. 즉, 그의 필모그래피 절반 이상이다. 


'가족'에 천착하다


고레에다 히로카즈 감독이 최근까지 계속 이어가고 있는 '가족' 천착의 진정한 시작 <걸어도 걸어도>. ⓒ영화사 진진



그의 영화가 조금 바뀌게 되는 건, 아이러니하지만 일면 이해가 가는 <하나>부터이다. 이 영화는 그의 영화 이력 중 가장 범작에 속한다고 볼 수 있는데, 사무라이의 복수극을 통해 '가족'을 말하고자 한다. 물론 소소하고 잔잔하게 행복을 이야기한 무난한 이 작품을 고레에다 히로카즈가 아닌 이가 만들었다면 충분한 호평을 받았을 것이다. 


여하튼 그는 이후 10여 년 동안 가족에 천착한다. <하나> 이후에 나와 고레에다 히로카즈를 대표하는 확실한 가족 영화로 자리매김한 <걸어도 걸어도>를 필두로, <진짜로 일어날지도 몰라 기적> <그렇게 아버지가 된다> <바닷마을 다이어리> <태풍이 지나가고>까지 쭉 이어졌다. 그 사이에 <공기인형> 정도가 튀는데, 아마 가족이 아닌 소재를 새롭게 시작하려다가 실패한 케이스라 하겠다. 


그의 필모 상 가장 눈에 띄는 성과를 올렸음에도 불구하고 아쉬운 부분이 이 부분이다. 계속되는 천착은 그만의 세계를 확고히 하며 그에 걸맞는 거장의 칭호를 그에게 안겨주는 등 좋은 결과을 낳았지만, 이제는 바뀌어야 하지 않겠나 싶은 마음을 스멀스멀 올라오는 걸 모두가 아는 시기가 왔다. 개인적으로 작년에 나온 <태풍이 지나가고>가 그 분기점이어야 하고, 분기점이 되지 않을까 하는 불안감과 기대감이 든다. 


밝은 소소함에 날카롭고 서늘한 게 깃들다


고레에다 히로카즈 감독 스타일을 규정하는 '밝은 소소함과 날카롭고 서늘함의 조화와 공존', 그걸 잘 볼 수 있는 영화 <바닷마을 다이어리>. ⓒ티캐스트



고레에다 히로카즈가 20년 넘게 천착하고 있는 게 하나 더 있다. 이건 아마 누구도 쉽게 따라 할 수 없을 그만의 것인데, 밝은듯 쓸쓸한듯 유쾌한듯 서늘한듯 한 분위기이다. 대체로 그의 영화 분위기는 밝고 유쾌한 것에 가깝다. 소소하고 잔잔하기까지 하다. 그렇지만 내재되어 있는 혹은 드러내지 않는 사건사고는 가히 인생을 흔들 만하다. 상대적으로 괜찮은 영화일수록 이 구도가 극에 달하는 것 같다. 


굳이 열거할 필요도 없을 정도로 그의 필모 전반에 걸쳐 있다. 기억에 남는 건 <걸어도 걸어도> <그렇게 아버지가 된다> <바닷마을 다이어리>다. <공기인형>은 말할 것도 없겠다. 그 밝은 소소함엔 특별하고 날카롭고 서늘한 것이 있다. 그게 인생이라는 걸까? 그게 인간이 가진 면모들이라는 걸까? 이 기조는 그가 지난 10여 년간 천착하는 '가족'이라는 키워드와는 달리 앞으로도 계속 이어나가도 무방할 것 같다. 아니 그러길 바란다. 보편성이 담보되지 않는 특별함이니까. 


고레에다 히로카즈의 신작이 나오면 주저 없이 보고 악착 같이 평할 준비가 되어 있다. 1~2년에 한 편씩 꾸준히 신작을 내고 있는 걸 보면, 내년 안에는 차기작이 나올 것 같다. 반드시라고 할 만큼 세계 유수 영화제에서 상영되고 수상 후보에 오르고 무수한 호평이 쏟아질 것이다. 모르긴 몰라도 나도 그 중 하나이지 않을까 싶다. 


그렇지만, 그럼에도, 나는 바란다. 그의 변화를. 비록 그동안 실패에 가까운 모습을 보였지만, 결국 덕분에 더 나은 길을 걸어올 수 있지 않았나 반추해본다. 자기 혁신적 모습의 일환이라면, 무엇이라도 괜찮다. 기대와 설렘과 불안의 삼중주로 그의 다음 작품을 기다린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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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난 10월 29일 '<이 세상의 모든 크고 작은 생물들> 출간 연재-3'에 이어집니다.

숨가쁘게 달려온 '출간 연재'가 끝났습니다^^ 혹시! 더 원하시는 분이 많다면 더 이어나가보도록 하겠지만, 책을 구입해서 보시는 게 좋지 않을까 싶습니다ㅋ 그리고 시리즈가 계속 이어나간다고 하니~ 소장해보심이? 저는 다 구입할 예정입니다! 


그동안 '출간 연재'를 카카오 채널에서 연재해 왔는데, 이번엔 처음으로 블로그와 카카오 채널에 동시 연재 해보았어요. 어땠을지 모르겠지만, 계속 해보고 싶네요^^



나는 상자로 돌아가서 무서운 기구를 꺼내고, 개구기도 함께 꺼내서 앞니에 끼우고 말의 입이 크게 벌어질 때까지 톱니바퀴로 개구기를 열었다. 그러자 모든 것을 쉽게 볼 수 있었다. 물론 문제의 원인은 거기에 있었다. 입의 반대쪽에도 첫 번째 것과 똑같은 거대한 가지가 튀어나와 있었던 것이다. 맙소사. 이제 나는 그것을 두 개나 잘라내야 했다.

늙은 수말은 다 알아차린 것처럼 눈을 감다시피 하고 참을성 있게 서 있었다. 무슨 일이 일어나도 걱정하거나 신경 쓰지 않을 것 같았다. 나는 발가락을 꼬부린 채 작업을 계속했고, 날카로운 소리를 내며 이빨이 부러지자 하얀 테를 두른 눈이 크게 뜨였지만, 그 눈에는 가볍게 놀란 표정이 떠올랐을 뿐이다. 말은 움직이지도 않았다. 반대쪽 뼈를 잘라내는 동안에도 말은 아랑곳하지 않았다. 사실 개구기가 턱을 억지로 벌려놓고 있었기 때문에 말은 따분해서 하품을 하고 있는 것처럼 보였다.

내가 기구를 치우는 동안 존 노인은 풀밭에서 뼛조각을 집어 들고 흥미롭게 살펴보았다.

“가엾은 녀석. 잘했소, 젊은 선생. 이젠 녀석들도 기분이 훨씬 좋아지겠지.”

돌아오는 길에 건초꾸러미에서 해방된 존 노인은 아까보다 두 배나 빨리 걸을 수 있었고, 쇠스랑을 지팡이처럼 사용하여 맹렬한 속도로 언덕을 성큼성큼 걸어 올라갔다. 나는 기구 상자를 몇 분마다 이 손에서 저 손으로 옮기면서 숨을 헐떡거리며 그 뒤를 따라갔다.

절반쯤 올라갔을 때 기구 상자가 내 손에서 미끄러져 떨어졌다. 그 기회에 나는 잠깐 걸음을 멈추고 한숨 돌렸다. 존 노인이 초조하게 중얼거리는 동안 나는 뒤에 남겨두고 온 말 두 마리를 돌아보았다. 말들은 여울로 돌아가 놀고 있었다. 활기차게 서로 쫓아다니고 발로 물을 튀겼다. 벼랑은 그 장면에 어두운 배경막을 이루었다. 반짝이는 강물, 청동색과 황금색으로 은은하게 빛나는 나무들, 향기로운 초록색 풀밭.

농가 마당으로 돌아오자 존 노인이 걸음을 멈추었다. 그는 한두 번 고개를 끄덕이고 나서 말했다.

“고맙소, 젊은 선생.” 그러고는 홱 돌아서서 가버렸다.

내가 일을 무사히 끝낸 데 감사하는 마음으로 기구 상자를 자동차 트렁크에 집어넣고 있을 때, 아까 언덕을 내려가는 도중에 우리에게 말을 걸었던 남자가 눈에 띄었다. 그는 양지바른 구석에 여느 때처럼 쾌활하게 앉아, 수북이 쌓인 자루에 등을 기대고 낡은 군용 배낭에서 도시락을 꺼냈다.

“그 늙은 짐승들을 보러 내려갔었군요?”

“영감님은 규칙적으로 그 말들을 찾아갑니까?”

“규칙적이라고요? 날마다 가죠. 날마다 영감님이 거기로 터벅터벅 내려가는 걸 볼 수 있답니다. 비가 오나 눈이 오나 바람이 부나, 하루도 거르는 법이 없어요. 그리고 갈 때마다 항상 무언가를 가져가지요. 곡식자루나 잠자리에 깔아줄 짚이나.”

“그런 일을 12년 동안이나 했군요?”

남자는 보온병 마개를 열고 홍차 한 잔을 따랐다.

“그동안 말들은 아무 일도 하지 않았어요. 그런 녀석들을 말고기 장수한테 팔았다면 목돈을 받을 수도 있었을 텐데…… 이상하지 않나요?”

“맞아요. 이상한 일이네요.”

얼마나 이상한 일인가 하는 생각은 병원으로 돌아오는 동안 줄곧 내 마음을 사로잡았다. 나는 그날 아침에 파넌과 나눈 대화를 돌이켜보았다. 그때 우리는 가축을 많이 키우는 사람이 개개의 동물에게 애정을 느끼기를 기대할 수는 없다고 결론지었다. 하지만 방금 다녀온 목장에는 축사마다 가축들로 가득 차 있었다. 존 노인은 가축을 수백 마리나 키우고 있는 것 같았다.

하지만 그가 날씨와 상관없이 날마다 그 언덕을 내려가게 만든 것은 무엇일까? 왜 그는 그 늙은 말들의 말년을 평화와 아름다움으로 채웠을까? 왜 그는 자신에게도 허락하지 않았던 마지막 안락과 평안을 그 말들에게 주었을까?

그것은 정녕 사랑일 수밖에 없었다.


이 세상의 모든 크고 작은 생물들 - 10점
제임스 헤리엇 지음, 김석희 옮김/도서출판 아시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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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난 10월 27일 '<이 세상의 모든 크고 작은 생물들> 출간 연재-2'에 이어집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말들은 까불면서 장난을 치려고 존 노인의 주위를 껑충껑충 뛰어다니고, 발을 구르고, 머리를 흔들고, 그의 모자를 주둥이로 눌러서 눈을 덮어버리기도 했다.

“그만 해!” 그가 외쳤다. 하지만 그는 암말의 갈기를 잡아당기고 수말의 목을 쓰다듬었다.

“이 말들이 마지막으로 일을 한 게 언젭니까?” 나는 물었다.

“한 12년쯤 됐을 거요.”

나는 존 노인을 빤히 바라보았다.

“12년 동안 말들은 줄곧 여기 있었나요?”

“여기서 그냥 이리저리 돌아다니면서 놀고…… 은퇴한 거나 마찬가지요. 그때까지 열심히 일했으니까 이만한 보상은 받을 만하지.” 그는 잠시 어깨를 웅크리고 두 손을 코트 주머니에 찔러 넣은 채 말없이 서 있다가 마치 혼잣말처럼 조용히 말했다. “내가 노예처럼 일하던 무렵엔 이 녀석들도 노예나 같았지.”

그는 고개를 돌려 나를 바라보았다. 나는 그 연푸른 눈 속에서 그가 동물들과 함께 나눈 고통과 고난을 어느 정도는 읽을 수 있었다. 감추어졌던 비밀이 드러나는 순간이었다.

“하지만 12년이라니! 도대체 이 말들은 몇 살이나 됐습니까?”

존 노인의 입이 한쪽 구석만 말려 올라갔다.

“당신이 수의사니까 나한테 알려줘 보시오.”

나는 이빨의 마모도와 경사도 같은, 말의 나이를 판정하는 여러 단서들을 머릿속으로 생각하면서 앞으로 한 걸음 나아갔다. 그리고 얌전히 서 있는 암말의 윗입술을 뒤집고 이빨을 살펴보았다.

“맙소사!” 나는 놀라서 숨을 헐떡거렸다. “이런 건 처음 봅니다.”

앞니는 엄청나게 길었고, 앞으로 튀어나와 약 45도 각도로 위·아랫니가 서로 만나고 있었다. 어금니에 홈은 전혀 없었다. 그것은 닳아서 사라진 지 오래였다.

나는 웃으면서 존 노인을 돌아보았다.

“나이가 몇 살인지는 추측할 수밖에 없을 겁니다. 영감님이 말씀해주셔야겠는데요.”

“암말은 서른 살쯤 됐고, 수놈은 한두 살 어려요. 암말은 새끼를 열다섯 마리 낳았고, 이빨에 약간 문제가 있는 것 말고는 병을 앓은 적이 없다오. 이빨을 몇 번 갈아주었는데, 이제 또 갈아주어야 할 때가 된 것 같아. 둘 다 쇠약해지고 있어서, 건초를 씹다가 입에서 조금씩 흘리고 있지. 수놈이 더 심해서 먹이를 씹는 것도 이 녀석한테는 아주 힘든 일이오.”

나는 암말의 입 안으로 손을 집어넣어 혀를 잡고 한쪽으로 끌어냈다. 그리고 다른 손으로 어금니를 재빨리 조사해보니 내가 의심한 대로 윗니의 바깥쪽 가장자리가 너무 많이 자라서 톱니처럼 깔쭉깔쭉해 볼을 자극했다. 아래쪽 어금니의 안쪽 가장자리도 비슷한 상태였고, 그 때문에 혀의 피부가 약간 벗겨져 있었다.

“제가 곧 암말을 편안하게 해주겠습니다. 저 날카로운 이빨 가장자리를 줄로 갈아내면 신품과 마찬가지로 좋아질 겁니다.”

나는 기구 상자에서 줄을 꺼낸 다음, 한 손으로는 말의 혀를 잡고 뾰족한 부분이 충분히 줄어들 때까지 이따금 손가락으로 확인하면서 이빨의 거친 표면을 갈아냈다.

“이 정도면 되겠어요.” 잠시 후에 나는 말했다. “너무 매끄럽게 갈고 싶지는 않네요. 그러면 말이 먹이를 으깨지 못할 테니까요.”

존 노인은 약간 투덜거리는 목소리로 말했다.

“알았소. 이젠 다른 녀석을 좀 봐주시오. 뭐가 문제인지는 모르지만, 저 녀석이 훨씬 더 잘못되어 있다오.”

나는 수말의 이빨을 만져보았다.

“암말과 똑같은데요. 이 녀석도 금방 고쳐놓겠습니다.”

하지만 줄을 밀 때 나는 무언가가 잘못되었다는 불쾌한 느낌을 받았다. 줄이 입 뒤쪽까지 완전히 들어가려 하지 않았다. 무언가가 줄을 막고 있었다. 나는 줄질을 멈추고 다시 한 번 손가락을 최대한 밀어 넣어 탐색해보았다. 그리고 이상한 무언가에 부딪혔다. 거기에 있어서는 안 될 장애물이었다. 그것은 입천장에서 아래쪽으로 튀어나온 커다란 뼈 같았다.

이제는 제대로 봐야 할 때였다. 나는 회중전등을 꺼내 혀 뒤쪽을 비추었다. 이제 문제를 쉽게 볼 수 있었다. 위쪽의 마지막 어금니가 아랫니 위에 겹쳐져서 뒤쪽 가장자리가 이상할 만큼 비대해지는 결과를 낳았다. 그래서 8센티미터쯤 되는 칼 모양의 미늘이 잇몸의 부드러운 조직 속으로 뚫고 들어가게 된 것이다.

그것은 뽑아버려야 할 것이다. 그것도 당장. 나는 두려움에 몸이 떨리는 것을 겨우 억눌렀다. 그것은 무시무시한 가위를 사용해야 한다는 것을 의미했다. 긴 손잡이가 달린 그 가위에는 가로대로 작동하는 나사가 있었는데, 그것은 보기만 해도 오싹했다. 나는 누군가가 풍선을 부는 것도 무서워서 못 보는 사람인데, 이것은 그것과 같은 종류의 것이지만 그보다 훨씬 더 무서웠다. 우선 가위의 날카로운 날을 이빨에 고정시키고 가로대를 천천히, 아주 천천히 돌린다. 곧 이빨이 거대한 지레장치 밑에서 신음 소리를 내며 삐걱거리기 시작한다. 그러면 언제라도 이빨이 부러지리라는 것을 알 수 있다. 이빨이 부러질 때는 누군가가 귀에 대고 소총을 발사한 듯한 느낌이 들었다. 대개 큰 혼란이 일어나는 것은 이때였다. 하지만 다행히 이 말은 얌전한 늙은 말이니까, 뒷다리로 일어나서 춤을 추며 돌아다니지는 않을 것이다. 지나치게 자란 부분에는 신경이 공급되지 않으니까, 말은 아무런 통증도 느끼지 못한다. 문제를 일으키는 것은 소음이었다.


이 세상의 모든 크고 작은 생물들 - 10점
제임스 헤리엇 지음, 김석희 옮김/도서출판 아시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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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난 10월 25일 '<이 세상의 모든 크고 작은 생물들> 출간 연재-1'에 이어집니다. 



데너비 농장은 그냥 규모가 큰 농장이 아니라 한 남자의 인내와 기술이 낳은 기념비적 농장이었다. 오래되었지만 아름다운 집, 넓은 축사들, 낮은 산비탈을 따라 넓게 펼쳐져 있는 목초지는 모두 존 스킵턴 노인이 온갖 고난을 극복하고 이룩한 성취의 증거였다. 그는 교육도 전혀 받지 못한 농장 일꾼으로 출발하여 이제 부유한 농장주가 되어 있었다.

그 기적은 쉽게 일어나지 않았다. 존 노인은 보통 사람이라면 견디지 못했을 만큼 힘든 일을 평생 계속해왔다. 그 생애에는 아내나 가족이 들어갈 여지도 전혀 없었고 육체적 쾌락을 누릴 여유도 없었지만, 그보다 더 중요한 게 있었다. 그에게는 농사 문제에 대한 뛰어난 통찰력이 있었고, 그것이 존 노인을 이 지역의 전설로 만들어주었다. “세상 사람들이 모두 한 길로 갈 때 나는 다른 길로 간다”는 그가 즐겨 인용하는 격언이었고, 다른 농장들이 파산으로 내몰리고 있던 어려운 시기에도 그의 농장들이 돈을 번 것은 사실이다. 데너비는 존 노인의 여러 농장들 가운데 하나일 뿐이었다. 그는 데일 저지대에 각각 150헥타르쯤 되는 넓은 경작지를 두 개나 갖고 있었다.

그는 승리를 얻었지만, 어떤 사람에게는 그가 그 과정에서 오히려 정복당한 것처럼 보였다. 그는 오랫동안 승산 없는 싸움을 했고, 너무 격렬하게 자신을 몰아대서 이제는 멈추고 싶어도 멈출 수가 없었다. 그는 이제 온갖 사치를 누릴 수 있었지만 그럴 시간이 없었다. 사람들은 그의 밑에서 일하는 일꾼들 가운데 가장 가난한 사람조차도 존 영감보다는 나은 생활을 한다고 말했다.

나는 차에서 내리자 잠시 멈춰 서서 마치 처음 보는 것처럼 그 집을 바라보았다. 혹독한 기후를 300년 넘게 견뎌온 그 저택의 우아함에 나는 새삼 감탄했다. 사람들은 데너비 저택을 보려고 먼 길도 마다하지 않고 찾아와서, 납으로 씌운 높은 창문이 달려 있고 이끼가 자란 낡은 기와 위로 거대한 굴뚝들이 우뚝 솟아 있는 우아한 장원 저택의 사진을 찍었다. 방치된 정원을 지나고 넓은 계단을 올라가 거대한 문 위에 돌로 만든 넓은 아치가 씌워져 있는 입구까지 가보는 사람도 있었다. 옛날에는 중간 문설주가 있는 그 여닫이 창문에서는 끝이 뾰족한 모자를 쓴 아름다운 여인이 밖을 내다보고 있었을 것이고, 주름장식이 달린 저고리와 반바지를 입은 기사가 끝이 뾰족한 갓돌을 얹은 높은 담장 아래를 걷고 있었을 것이다. 하지만 지금은 존 노인이 초조하게 내 쪽으로 다가오고 있을 뿐이었다. 단추도 다 떨어지고 누더기가 된 그의 코트를 지탱해주고 있는 것은 허리에 두른 기다란 삼실 한 가닥뿐이었다.

“잠깐 들어오시오, 젊은 선생.” 그가 외쳤다. “갚아야 할 외상값이 조금 있다오.”

그는 앞장서서 집 뒤쪽으로 돌아갔고, 나는 요크셔에서는 청구서가 항상 ‘약간의 외상값’이었다는 사실을 생각하면서 그를 따라갔다. 우리는 판석이 깔린 부엌을 지나 우아하고 널찍하지만 가구라고는 탁자 하나와 나무의자 몇 개와 부서진 소파 하나밖에 없는 방으로 들어갔다.

존 노인은 벽난로로 다가가서 시계 뒤에서 종이 다발을 꺼냈다. 그리고 종이 다발을 뒤져서 봉투 하나를 꺼내 탁자 위에 놓은 다음, 수표책을 꺼내 내 앞에 탁 내려놓았다. 나는 여느 때처럼 청구서를 꺼내 거기에 적힌 금액을 수표에 옮겨 쓴 다음 서명해달라고 그에게 내밀었다. 그는 신중하게 정신을 집중하여 글씨를 썼다. 이목구비가 작고 세파에 찌든 얼굴을 낮게 숙여서, 낡은 헝겊 모자의 앞챙이 펜에 닿을 지경이었다. 바지가 다리 위쪽으로 치켜 올라가서, 의자에 앉으면 앙상한 장딴지와 복사뼈가 드러났다. 그는 양말도 신지 않고 맨발로 무거운 장화를 신고 있었다.

내가 수표를 주머니에 넣자 존 노인은 벌떡 일어났다.

“강까지 걸어가야 할 거요. 말들이 거기에 있으니까.”

그는 거의 뛰다시피 종종걸음으로 집을 나갔다.

나는 기구 상자를 자동차 트렁크에서 꺼냈다. 이상한 일이지만 내가 무거운 장비를 들고 다닐 때마다 내 환자는 언제나 멀리 떨어져 있었다. 이 상자는 납으로 가득 찬 것처럼 무거웠고, 담장으로 둘러싸인 목초지를 지나가는 동안 조금이라도 더 가벼워지지는 않을 터였다.

존 노인은 쇠스랑으로 건초꾸러미를 푹 찔러서 자루를 어깨 위에 가볍게 올려놓았다. 그리고 다시 아까처럼 경쾌한 속도로 걷기 시작했다. 우리는 통용문을 차례로 지나갔고, 목초지를 대각선으로 가로지를 때가 많았다. 존 노인은 속도를 늦추지 않았고, 나는 숨을 조금 헐떡거리면서 비틀거리는 걸음으로 그 뒤를 따라갔다. 그가 나보다 적어도 쉰 살은 더 많다는 생각을 머리에서 떨쳐버리려고 애썼다.

절반쯤 왔을 때 우리는 오랜 전통의 ‘담쌓기’ 작업을 하고 있는 남자들과 마주쳤다. 데일스의 푸른 언덕 비탈 곳곳에 무늬를 그리고 있는 돌담에 뚫린 구멍을 보수하는 작업이었다. 남자들 가운데 하나가 고개를 들었다.

“안녕하세요, 영감님.” 그는 쾌활하게 외쳤다.

“안녕이고 뭐고 어서 일이나 해.” 존 노인은 투덜거리며 대꾸했고, 사내는 칭찬이라도 받은 것처럼 흐뭇한 미소를 지었다.

이윽고 비탈을 다 내려가 평지에 도착하자 나는 기뻤다. 내 팔은 몇 센티나 늘어난 것 같았고, 이마에 땀이 줄줄 흐르는 것을 느낄 수 있었다. 존 노인은 아무렇지도 않은 듯이 보였다. 그가 어깨에 걸쳤던 쇠스랑을 흔들자, 갈퀴에 꽂혀 있던 건초꾸러미가 풀밭에 쿵 떨어졌다.

말 두 마리가 그 소리를 듣고 우리 쪽으로 고개를 돌렸다. 좁은 강변은 초록빛 카펫을 깔아놓은 듯한 잔디밭으로 차츰 변했다. 그 강변 바로 너머에 자갈이 깔린 여울이 있었다. 말들은 그 여울에 발목까지 물에 잠긴 채 서 있었다. 말들은 우리가 접근하는 것을 의식하지 못한 채 서로 코와 꼬리를 맞대고 턱을 상대의 등에 부드럽게 문질렀다. 건너편 강둑 위로 튀어나온 높은 벼랑이 바람을 막아주었고, 우리 양쪽에는 참나무와 너도밤나무가 우거진 숲이 가을 햇살에 빛나고 있었다.

“말들이 아주 멋진 곳에 있군요.” 나는 말했다.

“그래요. 더운 날씨에도 여기서는 시원하게 지낼 수 있고, 겨울이 오면 헛간으로 가지요.” 존 노인은 문이 하나뿐인 건물을 가리켰다. 벽이 두껍고 지붕이 낮은 건물이었다. “말들은 제 마음대로 오갈 수 있지.”

그의 목소리에 말들이 뻣뻣하게 굳은 다리로 종종걸음을 쳐서 강물에서 나와 우리 쪽으로 다가왔다. 가까이에서 보니 말들이 정말로 늙었다는 것을 알 수 있었다. 암말은 밤색이었고 수놈은 적갈색이었지만, 회색 털이 너무 많이 섞여서 둘 다 회색이나 흰색 얼룩이 있는 말처럼 보였다. 특히 얼굴에 이런 현상이 두드러졌다. 하얀 털이 얼굴 전체에 흩뿌려져 있고 눈은 움푹 들어가고 눈 위에 깊은 구멍이 있어서, 정말로 고귀해 보였다.


이 세상의 모든 크고 작은 생물들 - 10점
제임스 헤리엇 지음, 김석희 옮김/도서출판 아시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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singenv

冊으로 策하다. 책으로 일을 꾸미거나 꾀하다. 책으로 세상을 바꿔 보겠습니다. singenv@naver.com Since 2013.4.16