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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금까지 4회에 걸쳐 살펴보니, 중국 영화는 그 본격적인 시작이 불과 몇 십년이 되지 않는 것 같다. 그 전에는 나라의 정치적 강압 아래서 그 기능을 발휘하지 못하고 움츠려서 활짝 꽃피지 못하였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세계적인 영화 시장을 급부상하고 있는 중국 영화계를 보고 있노라니 놀라움을 금치 못하겠다. 앞으로 얼마나 더 높이 비상할지 기대해보며 대륙 영화는 아니지만 중국의 문화권에 속해있는 홍콩과 대만의 영화에 대해 알아보겠다.


홍콩영화


1896년 뤼미에르 촬영 팀이 홍콩에도 오면서 주로 영화 상영을 하였다. 이렇게 시작된 홍콩의 영화는 1909년 아시아 영화사의 단편인 <옹기의 하소연>, <베이징 오리구이 도난사건>이 상영되면서 본격적으로 시작된다. 1920년대에 탄압을 피해 도망 오게 된 상하이의 좌익 예술가와 활동가들에 의해 발전되었으며 그렇게 상하이의 영향 하에 종속된다. 1930년대 일본의 침략과 내전으로 상하이의 영향으로부터 독립되면서 국제적으로 눈을 돌린다.


하지만 홍콩의 주인이 된 일본에 의해 주로 오락영화만 제작되어진다. 그러던 1945년 일본이 패망하고 원래의 위치를 찾게 된 홍콩 영화. 그것도 잠시. 국공내전으로 인해 또 다시 좌익들의 피난처가 되고 만다. 1949년 중국대륙에 인민공화국이 세워지고 그들의 영향에서 벗어나기 위해 영화를 이용한다.



리 샤오룽(이소룡)



전통과 서구를 동시에 지향하였으며 상업적 성공이 최우선이었다. 1970년대 리 샤오룽(이소룡)의 출현으로 무협영화가 대성공을 거둔다. 비록 단순한 줄거리에 빈약한 내용이었지만 화려한 볼거리로 서구 관객을 매료시킨다. 1980년대 중반 이후로는 도시 영화로 또 다시 대성공을 거두며 홍콩 영화는 세계적으로 유명해진다.


이후 미국 영화학교 출신 영화감독들은 홍콩의 정체성을 찾기 위한 영화를 제작한다. 그 당시의 홍콩 아방가르드 작품들은 전통과 현대, 홍콩 고유의 정체성, 중국 반환 후의 홍콩에 대해 깊이 있게 연구하고 고민하며 영화를 만든다. 과연 홍콩 영화가 과거 7,80년대 같은 성공과 명성을 얻을 수 있을지 그 귀추를 지켜볼 일이다. 대표적인 감독들로는 쉬안화, 팡위핑, 쉬커(서극), 왕자웨이(왕가위)가 있고, 이들 중 왕자웨이(왕가위)는 <중경삼림>, <화양연화>, <동사서독>, <일대종사> 등의 영화로 세계적인 대성공을 거둔다.



왕자웨이(왕가위) 감독



대만영화


대만영화의 경우는 1985년 일본에 할양되면서 외부로부터 완전히 차단되어 사실상 1901년부터 시작된다. 1901년 11월 17일 타이베이에서 일본인 사진작가 타카마쓰 도요지로가 돌린 영사기가 대만영화의 효시이다. 하지만 1940년대까지 일본의 전쟁 선전 영화만이 만들어졌기 때문에 그 사이의 영화에 대해서는 논할 가치가 없다. 


1945년 일본이 항복 하면서 대만영화는 새롭게 시작된다. 대륙에서의 국공내전에서 패해 대만으로 온 장제스에 의해 반공 영화가 제작되었고 1960년대에는 경제 발전으로 인해 상업 오락 영화가 만들어졌다. 1970년에는 그런 상업 오락 영화가 인기가 많았음에도 불구하고 지나친 상업화와 예술, 주제 설명의 제약으로 인해 점차 할리우드 영화가 부상하게 되었다. 1975년에 장제스가 사망하고 자유화 운동이 일어나면서 1982년을 기점으로 예술영화가 붐을 일으킨다. 1988년에는 장제스의 아들인 장징궈도 사망을 하고 대만영화는 그들의 고유문화와 현실로 눈을 돌리게 된다. 



리안 감독



과연 대만영화의 미래가 어찌될지 궁금하다. 그들만의 독자적인 작품 세계를 구현할 것인지 이대로 서구적 스타일에 순응할 것인지 아니면 중국 영향 하에 들러리로 전락할 것인지. 중국과의 관계가 그들 미래의 제일 중요한 문제가 아닐까 생각해 본다. 대표적인 감독으로는 리안, 허유샤오젠, 양더창 등이 있으며, 이들 중 리안 감독은 세계적인 감독으로써 할리우드까지 진출하여 지금도 활발히 활동하고 있다. <음식남녀>, <와호장룡>, <색계>, <헐크>, <라이프 오브 파이> 등의 대표작이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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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80년대와 1990년대의 아방가르드 영화


1) 5세대


중국 영화가 세계에서 급부상하고 있던 1980년대 중반에 5세대 감독들이 등장한다. 4세대와 마찬가지로 문화대혁명을 겪어야 했던 5세대는, 문화대혁명이 종결된 이후 1978년 중국에서 정식 대입고사가 부활되었을 때 베이징 영화 학교에 입학해 82년에 졸업한 학생들의 집단을 일컫는다. 이들은 엄격한 검열 때문에 사회비판적인 시작은 은유와 상징으로 표현하며 그들만의 독특한 영화를 선보였는데, 이는 그들 창작의 특징이 되고 만다. 


한편 중국 전통의 한 부분인 ‘민족의식’을 5세대 감독들이 새롭게 창조하였고 이 요소를 아름답고 신비롭게 포장하여 다른 문화권의 사람들로 하여금 이국적인 정서를 풍부하게 느낄 수 있게 해주었다. 대표적으로 <패왕별희>의 ‘경극’과 <인생>의 ‘그림자극’이 있다. 


동시에 5세대들만의 독특한 영상은 관객들을 매료시키면서 호기심을 자극하기에 충분했다. 또한 과감한 실험적인 작업을 통해 지금까지 존재해 왔던 모든 것들과 단절함으로써 새로운 지평을 열었다. 표현주의적이지만 사실적이고 자연주의에 근접한 영상기법을 도입하였다. 이런 점이 중국 영화가 세계적으로 뻗어나갈 수 있게 한 비결이었다고 할 수 있다. 그들 덕분에 중국 영화는 중국에서 시작 1세기만에 예술의 반열에 올랐고 세계 영화사의 중요한 한페이지를 장식한다. 


대표적으로 장이모우의 <인생>, <홍등>, <귀주이야기>, <책상 서랍 속의 동화> 첸카이거의 <황토지>, <현 위의 인생>, <패왕별희> 우쯔뉴의 <후보대원> 톈좡좡의 <사냥의 법칙>, <말도둑> 등이 있다. 이 중에서 장이모우와 첸카이거는 중국뿐만 아니라 세계를 대표하는 감독이기도 하다. 이들 5세대를 기점으로 중국 영화는 세계로 뻗어나간다.



5세대 대표 감독 첸 카이거의 <패왕별희>(1993), 장이머우의 <인생>(1994)



2) 6세대


5세대들과는 완전히 다른 인생을 경험한 이들 6세대는 주로 60년대 태어나 90년대에 활동했던 감독들이다. 하지만 6세대에 대한 개념은 아직 그 토대가 부족한 것이 사실이다. 이들의 반감이 너무 커서 검열이 심하고, 계획경제에서 시장경제로 변화하면서 영화에 대한 국가의 보조금이 많이 삭감되어 이들 중 어느 누구도 자신만의 확고한 체계를 세운 이가 없기 때문이다. 또한 영화가 아닌 다른 여가 활동 기회가 많아지면서 관객수가 많이 줄어든 가운데 이들이 활동을 시작하여 많은 어려움이 있는 것이 사실이다.


6세대는 크게 상반되는 두 가지 경향이 있는데 순응과 거부이다. 먼저 심한 억압에 못이긴 순응파는 1989년 천안문 사태 이후 대게 국영 촬영소에서 일하게 된다. 그들만의 예술적 자유나 독창성은 아예 포기하게 되었다. 이들은 관객 몰이 장르를 택했으며 당국의 눈치를 보며 작품을 만들었다. 순응파 감독들이 창작의 자유가 없기 때문에 보다 과감하고 혁신적인 영화를 제작하기 위해서는 많은 시간이 필요할 것 같다. 


반면에 독창성과 정치적 이념으로 무장한 거부파는 영화 제작에 필요한 자금 및 장비가 전무한 상태에서 검열을 피해 비합법적으로 활동을 하고 있다. 그래서 그들은 높은 평가를 받음으로써 영화제에서 입상을 하거나 외국에서 주목을 받는 길 밖에 없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그들은 높은 수준의 영화로 많은 주목을 받았다. 또한 6세대가 선배들과는 근본적으로 다르다고 해도 5세대들과는 예술적으로 맞닿아 있다. 


이들은 예전 5세대가 중국 영화를 세계적인 반열에 올려놓았듯이 다시금 중국 영화의 국제적 명성을 되찾기 위한 준비를 해야 할 의무가 있다. 서구의 영화 이론과 중국 예술전통의 토대위에서 만들어져야 할 것이다. 6세대에는 장위엔의 <어머니>, <북경 녀석들> 왕샤오솨이의 <북경 자전거>, <겨울날, 봄날>, <대유희> 지아장커의 <소무>, <플랫폼>, <임소요>, <스틸 라이프> 등이 있다.



6세대 대표 감독인 왕샤오솨이의 <북경 자전거>(2001), 지아장커의 <스틸 라이프>(200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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중화인민공화국과 문화대혁명 시기(1949년~1978년)


1) 중화인민공화국 시기의 사회주의 리얼리즘 영화


세계 2차 대전의 종결과 국민당의 패배로 1949년 중화인민공화국 수립된다. 그리고 중국은 사회주의 체제로 전환된다. 이는 역시나 중국문화계에 많은 변화를 일으킨다. 기존의 영화스튜디오를 인수하여 영화를 국민당보다 더욱 철저하게 도구화하려는 노력으로 이어지고 서방영화 대신 소련영화를 도입한다. 오락영화는 완전히 배제되고 오직 선전영화만이 만들어졌다. 소련의 영향에 의해 스탈린이 주창한 사회주의적 사실주의가 도입되면서 예술가들은 자신의 예술관과 당(공산당)의 예술관을 합치시켜야 했다.


억압적인 정책의 실패로 인해 1956년 '백화시대'(마오쩌둥의 연설-학문과 예술의 자유)가 열리면서 새로운 시도로 잠시나마 당의 노선에서 벗어난 영화를 제작할 수 있게 된다. 혁명과 전쟁이 차지했던 자리에 사랑이란 주제가 나타나기 시작한 것이다. 하지만 1957년 6월 공산주의와 경제 성장 추진을 목표로 대약진 운동이 시작되어 영화가 부각된다. 선전영화로써의 기능이 또 다시 주어진 것이다.



대약진운동의 전경.



2) 문화대혁명 시기의 중국 영화의 암흑기


대약진운동의 실패로 인해 자본주의의 정책을 일부 채용하여 실효를 거둔 새로운 권력 세력이 떠오른다. 이에 위기를 느낀 마오쩌둥은 부르주아 세력의 타파와 자본주의 타도를 외치면서 1966년 ‘문화대혁명‘을 실행한다. 이 시기에는 대부분의 영화제작사들이 폐쇄되었으며 감독, 배우 등을 포함한 수많은 영화 관련인 들이 시골로 보내져 노동 및 정치적인 정치적 재교육을 받았다. 또한 마오쩌둥의 부인인 장칭은 영화를 자신을 위한 정치적인 수단과 도구로 사용하였다.



문화대혁명 당시 복단대학교 대자보.



 이로 인해 중국 역사상 최악의 졸작들이 많이 만들어졌다. 마오쩌둥의 죽음으로 막을 내리기까지의 10년 동안 중국의 영화제작은 거의 정지 상태였고, 그나마 만들어진 몇몇 영화는 극좌 세력의 권력과시와 관객들의 의식화를 위한 선전 교육에 사용되었다. 이처럼 극단적인 정치 상황 속에서 영화는 본연의 가치가 완전히 무시당한 채로 왜곡된 침묵을 지켜야 했다. 결국 1976년 마오쩌둥의 죽음과 자유를 요구하는 대중들의 시위로 그 막을 내렸다. 


하지만 그의 후계자인 화궈펑은 마오쩌둥의 정책을 고수하며 별다른 변화를 모색하지 못하였고 개혁 요구도 계속하여 거부하였다. 그동안 상영이 금지되었던 영화들이 상당수 상영하여 성공을 거두고 제한적이지만 다른 나라의 영화도 수입되었지만, 그 당시에 만들어진 영화들은 여전히 정치적인 색깔이 짙었기 때문에 완전한 개혁은 이루어지지 않았다.


이 시기는 3세대에 속하는데 50, 60년대에 주로 활동하였고 80년대까지도 활동하였다. 대표적인 감독과 작품으로는 수이화의 <백모녀>, <임씨네 가게>. 링즈펑의 <중국의 아이들>. 셰진의 <홍색낭자군>, <무대 위의 두 자매>, <천운산전기>, <목마인>, <부용진> 등이 있다. 이들 중 특히 셰진은 비교적 최근까지 계속 활동하했던 3세대 대표 감독이다. 시대 반영에 뛰어났고 대중성을 고려하여 관객들의 호응을 유도 할 줄 알았다. 중국 영화의 거장으로 불린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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문화대혁명 종결 이후 중국 영화의 급격한 성장(1978년~1996년)


1) 개혁시기의 영화


10년의 암흑기를 보내고 새로운 시기의 중국은 덩샤오핑의 개혁개방의 정책을 바탕으로 ‘현대화’를 추구하면서 사회의 혼란과 위기를 극복하려 하였다. 이로 인해 늘 정치적인 영향력에서 벗어날 수 없었던 영화계가 새로운 시기를 맞이하게 되었다. 


어느 장르보다도 빠르게 구조적 재건이 이루어졌고 경제부문과도 연결되었다. 또한 탈정치화를 통해 동시대 삶에 대한 보다 사실적인 접근 시도하였고 다양한 주제와 논점을 취급하고 캐릭터의 전형을 탈피. 지식인, 과학자, 도시 젊은이, 해외동포, 청 왕조 귀족 등 다양한 인물을 등장시켰다. 또한 영화인들이 정치적 급진주의로 야기된 상처를 다양한 관점에서 탐구하려는 시도를 시작하였고 당시의 영화는 당의 문화정책을 비판하고 문화대혁명을 보다 큰 역사적 시각 하에서 조명하였다. 


이렇게 국가정책에 방향을 맞춘 영화들이 많이 만들어졌다. 이 시기에 4세대, 5세대 감독들이 등장하였다. 그들이 거의 동시에 활동을 하였다고 하지만, 각 세대마다 처한 환경과 성장해온 시대적 배경 등이 달랐으므로 작품을 통해 각자가 추구하는 바는 달리 하면서 작품 활동을 하였다.



1979년 덩샤오핑은 미국을 방문하여 지미 카터 미국 대통령을 만난다. 개혁개방의 신호탄이다.



2) 예술과 상업


마오쩌둥 사후 새로운 지도자인 덩샤오핑은 경제부문에서만 개혁을 시도했을 뿐 정치, 문화에서는 그렇지 않았다. 과거와 마찬가지로 여전히 비판이나 독립적인 견해에 대해서는 강경하게 대응하였다. 


당시의 반대파 예술가들과 지식인들은 권력기구에 속해있지 않아서 당을 위해 어떠한 선전 영화도 제작하지 않았다. 당은 이를 통제하기 위해 이중정책을 실시하였는데 당의 노선의 충실한 예술가들에게는 전폭적인 지지를 하는 반면 비판적인 예술가들에 대해서는 무자비한 탄압을 가하였다. 급변하는 사회를 무시하고 체제 유지에만 급급하였던 것이다. 


그러던 중 1985년 덩샤오핑이 제창한 새로운 기준(예술은 국가나 이데올로기보다 사회에 먼저 기여해야한다는 기준)이 영화제작에 적용됨에 따라 영화의 경제적 성과가 강조되었다. 하지만 근본적으로 예술은 늘 정치노선의 요구를 충족시켜야만 했다.


1980년대 초 오락영화가 다시 선을 보이면서 1987년 이후에 빠르게 확산되었다. 아울러 시장개방과 상업성을 고려하기 시작하면서 상업영화가 높은 시장점유율을 확보하게 되었다. 탈이데올로기화와 철저한 수익성을 고려하였는데 겉보기에는 비정치적인 오락영화였지만 교묘히 중요한 정치적 요소를 담고 있었다. 당시에는 단순하고 영화적 가치가 없는 오락영화만을 주로 만들었는데 이는 엄청난 성공을 거두었다. 하지만 점점 확산되는 오락문화에 의해 젊은층이 빠져나가면서 이러한 종류의 오락영화는 점점 쇠퇴하게 된다.



우텐밍의 <변검>



이시기에는 4, 5세대가 등장하는데 여기에서는 4세대에 대해 알아보고 5세대는 6세대와 함께 뒤에서 자세히 알아보도록 한다. 대표적인 감독과 작품으로는 황젠중의 <뜻대로>, <양가부녀> 우이궁의 <파샨야우>, <성남의 옛일> 우텐밍의 <오래된 우물>, <변검> 셰페이의 <우리들의 들판>, <본명년> 등이 있다. 이들 중 특히 우텐밍은 4세대를 대표하는 감독으로 현실주의 전통 미학의 전통을 받은 작품을 만들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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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치, 경제, 문화, 역사 등은 모두 유기적으로 작용하여 아주 긴밀한 관계에 있습니다. 어느 나라에서건 마찬가지일 것입니다. 하지만 중국에 경우, 서로 간의 영향력이 상대적으로 높습니다. 이제는 7대 예술에 당당히 뽑히는 영화의 경우도 마찬가지이죠


중국에서 영화가 등장한지 100년 남짓 되었는데 그 사이 중국에서는 사상 유래 없는 정치, 경제, 문화적 혼란이 있었습니다. 그 상황에서 영화도 마찬가지로 정부의 영향 아래에 놓여 이리저리 휘둘려졌죠. 그래서인지 중국의 근현대 역사에 대한 지식 없이는 영화에 대한 논의를 할 수 없는 것입니다. 


제가 이렇게 중국 영화사를 허접하게나마 개괄하는 이유는, 아마도 저의 순수한 이기심 때문일 것입니다. 제가 중국학을 전공했기 때문이기도 할 테고, 애초에 제가 중국에 대한 관심이 많았기 때문일 수도 있습니다. 더구나 제가 역사를 좋아하고 영화를 좋아하는데, 중국 영화는 역사와 밀접한 관련이 있죠. 여하튼 중국 영화의 역사에 대해 언급할 때 세대별로 구분하는 것이 일반적이지만 이 글에서는 역사적 순서에 따른 영화의 역사를 알아보기로 하겠습니다. 일주일에 한 번씩, 3주에 나눠서 이어집니다. 


*수정하고 싶은 사실이 있거나, 보충하고 싶은 사실이 있을 경우 가차없이 지적해주세요. 


중국 영화의 시작(1896년~1920년대)



뤼미에르 형제 ⓒ위키피디아



1896년 프랑스의 영화 개척자인 뤼미에르 형제가 중국을 방문한다. 중국에 영화가 처음으로 소개된 것이다. 상하이에 처음 상영되었을 때 중국인들은 이를 ‘서양 그림자 극’이라고 부르며 관심을 가졌고, 자연스레 인기를 얻어간다. 당시 중국은 반식민지, 반봉건 사회였고 이런 배경으로 인해 다양한 경험을 할 수 있는 기회를 얻었고 영화가 많은 환영을 받을 수 있게 되었다. 반면에 인종차별적인 졸작들이 많이 만들어져서 그 당시의 영화에 대해 논할 거리가 없다는 점이 유감스럽다. 


10년이 지난 1905년 베이징의 펑타이 사진관에서 던징펑이 제작한 <정군산>이라는 중국 최초의 영화가 등장한다. 이른바 '경극 영화'이다. 제대로 된 극영화가 아닌 경극의 몇 가지 연기 장면을 필름에 기록한 것뿐이라서 저평가를 받을 수밖에 없었지만, 중국 고유의 전통예술 형식에 영화를 접목시켜 민족의 독특함을 담아냈다는 점에서 의미가 크다. 그러나 경극 영화는 전통과 기술 사이에서 갈피를 잡지 못해 1909년에 결국 자멸하고 만다. 상업적이자 기술적인 외국영화와 전통적인 중국영화 사이의 괴리가 이런 결과를 불러일으키고 만 것이다.


1913년에는 중국 영화 개척자들인 장석천과 정정추가 만든 최초 극영화인 <난부난처>가 만들어졌다. '대본과 전문 감독'에 의해 만들어진 최초의 중국 영화이다. 이후 1919년 5.4 운동으로 인해 문화 전반에 걸쳐 대대적인 개혁이 이루어진다. 진독수와 호적으로부터 시작된 문학혁명이 점차 문화 전반으로 퍼져나간 것이다. 그 결과 1920년대에 이르러 식민지, 전통문화에서 벗어나 정신적 해방을 맛보면서 점차 새로운 장르와 표현 양식을 탐닉하게 되었다. 당시 영화에서는 무대극이 성황 중이었는데 진보적 좌익 성향이 강했다. 이들은 현대적이고 발전적인 방향을 제시하여 좋은 작품이 많이 만들어지기도 하였다. 



정정추 ⓒ커뮤니케이션 북스



1923년에는 밍싱 영화사에서 제작한 장스촨의 <고아구조기>가 상업적인 성공을 거두어 밍싱 영화사의 파산 위기를 막음으로써 영화가 '예술임과 동시에 사업'임을 깨닫게 되었다. 이렇게 중국 영화 시장은 점차 성숙해지기 시작하였으며 무수히 많은 영화사가 생겨나면서 ‘문화산업’에 대한 기대감을 증폭시켰다. 1920년 중반부터 중국 영화사에서 처음으로 경쟁시대가 시작된 것이다.


1926년에는 장제스가 정권을 이양하고 2년 뒤에 무차별 탄압이 시작되면서 좌익 계열의 영화가 쇠퇴하였고 그 자리를 서구 할리우드 영화가 대체하게 되었다. 사회성 짙은 영화가 오락영화에게 밀리고 만 것이다. 


이 시기의 대표적인 감독은 정청추와 장스촨이 있는데 이들이 중국 영화사의 제 1세대에 속한다. 중국 영화의 시작을 알린 감독들이다. 대표적인 영화로 위에서 언급한 <난부난처>, <고아구조기>, <가녀 홍무단> 등이 있다.


유성영화 등장과 중국 영화의 제 1의 황금기(1930년대~1949년)


무성영화가 사양길에 접어들고 유성영화가 등장하게 된 1930년대. 유성영화는 목소리가 나오기 때문에 표준어 확산에 기여할 수 있었다. 한편 1931년에 일본에 의해 만주사변이 발발하고 다음해에는 만주국이 세워지지만 장제스는 아무런 저항을 하지 못한다. 이러한 시국에서 영화매체를 새로운 중국건설의 도구로 간주하고 공산당의 개입이 본격화 되면서 ‘좌익영화’가 등장한다. 반일, 반봉건 투쟁을 위해 소련 혁명 영화의 전형성을 그대로 채용한다. 이는 ‘혁명 사실주의’로 구현되어 이때부터 질 좋은 영화들이 여러 편 만들어졌다. 


하지만 장제스의 계속 되는 탄압과 1937년에 일본의 상하이 진격, 난징 대학살 등의 사건이 벌어지자 홍콩 등의 해외로 도망치거나 공산당 점령지에서 주로 영화를 제작하게 되었다. 또한 일본의 침략으로 인해 계속되어온 항일운동은 ‘현실주의’로 구현되어 문화에 영향을 끼치면서 민족정신을 고양시키고 자각해야하는 필요성이 대두된다. 그 당시의 상황을 사실적으로 묘사한 작품들이 많이 나왔다. 이처럼 이 시기에는 항일구국의 주제로 한 작품이나 항일 전쟁영화가 주를 이루었다.


1941년 태평장 전쟁의 발발로 항일선전영화는 거의 만들어 질 수 없는 상황에 직면한다. 그렇게 4년이 흘러 1945년 일본의 무조건 항복으로 해방을 맞이하고 이어 국공내전 끝에 공산당의 승리로 인해 새로운 시대가 열린다. 이는 그리 좋지만은 않은 결과였으니, 그 이유는 1942년 마오쩌둥의 ‘옌안 문예좌담회에서 있었던 강화’의 내용을 보면 알 수 있다. 그 연설은 예술을 적대시하고 모든 예술의 이데올로기적 정치화를 강행한다는 내용이었다. 이미 1938년에 옌안 영화단을 결성하고 둥베이 영화 촬영소를 건설하여 행동에 옮기고 있었다.



연설하는 마오쩌둥 ⓒredian



"문화예술은 혁명의 도구의 구성요소가 되어야 하며, 인민을 단결시키고 교육하며, 반동을 타도하고 소멸시키는 유력한 무기이어야 하고, 인민을 반동세력과 투쟁하게 하는데 도와야한다."


이 시기의 감독은 2세대에 속하는데 차이추성의 <어부의 노래>, <봄날의 강은 동으로 흐르고> . 페이무의 <소도시의 밤>, <생사한>. 우융강의 <신녀>. 정쥔리의 <까마귀와 참새> 등이 있다. 이들은 당시에 지배적이었던 현실주의 영화의 거장들이다.


다음 주에 이어집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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