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冊으로 策하다. 책으로 일을 꾸미거나 꾀하다. 책으로 세상을 바꿔 보겠습니다. singenv@naver.com Since 2013.4.16

'아름다움'에 해당되는 글 12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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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경계를 넘나들고, 경계가 무너지는 대단하고 충격적인 경험 <경계선> 2019.11.04
  • 얼치기 소년이 아닌 산전수전 다 겪은 현상금 사냥꾼의 성장, 영화 <슬로우 웨스트> 2018.06.22
  • 날 것의 액션과 아름다운 무협의 마지막 절정 <서극의 칼> 2017.12.06
  • 아름답게 보여주는 나의 이야기, 현 일본 애니메이션의 정점 <목소리의 형태> 2017.05.17
  • 아름다움을 쫓고 행복을 추구하는 삶, 파인만의 길 <파인만에게 길을 묻다> 2017.04.10
  • '철학은 치료제로 작용해야 한다' <철학은 어떻게 삶이 되는가> 2017.03.06
  • 미국이 가장 들추기 싫어할 모습, 하지만 너무도 아름다운 <문라이트> 2017.03.01
  • 사라져가는 인간성, 우리에겐 희망이 있는가? <너무 시끄러운 고독> 2017.02.06
  • 정교하지 못한 기교로 '아름다운 잔혹함'을 표현한다면? <네온 데몬> 2016.10.26
  • 기억조차 하기 싫은 그날을 기억하는 것, 이 소설이 아름다운 이유 <소년이 온다>(2) 2016.06.03

경계를 넘나들고, 경계가 무너지는 대단하고 충격적인 경험 <경계선>

모모 큐레이터'S PICK 2019. 11. 4. 08:00



[모모 큐레이터'S PICK] <경계선>


영화 <경계선> 포스터. ⓒ(주)제이앤씨미디어그룹



스웨덴 출입국 세관원으로 일하는 티나, 그녀는 냄새로 감정을 읽어내어 손쉽게 불법 입국자를 적발한다. 일 잘하고 신뢰 가는 사람인 것이다. 하지만 그녀는 괴물 같은 외형을 가져 스스로를 타인과 세상으로부터 격리시킨다. 차를 타고 한참을 들어간 숲 속에서, 자신을 사랑하지 않는 도박꾼과 함께 살아가는 게 그 일환이라 할 만하다. 


그녀는 다음 날에도 어김없이 출근해 불법 입국자 적발에 여념이 없다. SD카드에 아동 포르노를 잔뜩 넣은 멀쑥한 남자 한 명을 잡고는, 또 한 명의 남자를 잡고자 한다. 그런데, 그는 아무런 문제가 없었다. 다음 날 또 만난 그, 역시 잡아들였지만 문제가 없었다. 분명, 불법의 냄새가 났는데 말이다. 사실 그에게서 나는 냄새에는 알 수 없는 무엇이 있었다. 뭔가 본능적으로 끌리는... 그리고 그의 외모 또한 자신과 비슷했다. 


한편, 티나는 아동 포르노 사건의 뒤를 캐는 데 그녀만의 능력으로 도와준다. 그런가 하면, 알 수 없는 그 보레가 기거하는 호스텔로 찾아가선 얘기하다가 벌레를 먹게 된다. 이제까지 살아오며 아리송했던 자신의 정체에 한 발 가까이 다가간 것이다. 급기야 그를 자신의 집으로 초대해선 함께 살자고 제안하는 티나, 그들은 곧 사랑에 빠진다. 보레와의 사랑은 티나를 새로운 세계로 이끈다. 티나는 자기 자신을 있는 그대로 들여다볼 수 있게 된 것이다. 하지만 아동 포르노 사건 뒤에 보레가 있다는 걸 알고 고민에 빠진다. 그녀는 어떤 삶을 선택할 것인가. 


경계를 넘나들다


영화 <경계선>은 이란 출신의 스웨덴 감독 알리 아바시의 2018년작으로, 제71회 칸 영화제 주목할 만한 시선 대상의 쾌거를 이룩했다. 한국엔 2019년 10월 말에야 개봉되었으니, 최초 개봉 이후 1년 반만에 늦게 소개된 것이리라. 뛰어난 작품성과는 별개로, 쉬이 가시지 않는 충격이 작품을 휘감고 있기 때문에 수입하기까지 오랜 고심이 필요했으리라고 추측해본다. 


영화는 우리나라에도 잘 알려져 있거니와 할리우드에서 리메이크되기도 한 명작 스웨덴 영화 <렛 미 인>의 원작자 욘 아이비데 린드크비스트의 동명 단편 소설을 원작으로 한다. 북유럽 특유의 자연 경관 배경, 기기묘묘한 스토리, 아름답고 슬픈 서정적 로맨스가 자연스레 떠오른다. <경계선> 또한 여기에서 크게 벗어나진 않지만, 보다 심도 깊게 생각할 거리가 넘치고 넘치는 게 다른 점이라고 하겠다. 


괴물의 외형을 한 티나와 보레를 중심으로, 영화 내적으론 인간과 비인간, 남성과 여성, 아름다움과 추함, 옳은 것과 옳지 않은 것의 경계를 넘나들고 영화 외적으론 신화와 현실, 판타지와 스릴러를 넘나든다. 그런가 하면, 경계에 대해 정답이 있을 것 같지 않은 질문을 던지고는 나름대로의 해답을 내놓기도 한다. 


스웨덴 난민 문제로의 확장


티나로 말할 것 같으면, '못생겼다' 정도가 아닌 '괴물 같다' 정도의 외형을 가졌다. 냄새로 감정을 읽고, 사람의 음식이 입에 맞지 않으며, 숲속에서 평안을 찾고, 동물과 가까이 지낸다. 보레가 말하길 티나는 인간이 아닌 멸종 위기에 처한 종족 '트롤'이라는데, 사실이라면 티나의 모든 걸 합당하게 설명할 수 있다. 그런가 하면, '그녀' 티나는 여성으로서의 성관계를 할 수 없었던 게 남성의 생식기도 지니고 있었던 것이다. 


티나라는 존재 자체가 경계선을 말한다. 태생으로 저쪽에 속하지만 후천적으로 이쪽에서 지내왔기에, 뭐라고 한마디로 지칭할 수가 없다. 어떤 존재를 두고 반드시 한마디로 지칭해야만 하는 것인지 의문이 들게 만드는 게 이 영화의 목적일 텐데, 100%에 가깝게 달성했다 해도 무방하다. 티나는 그도 그녀도 되고 인간도 트롤도 된다. 티나와 보레는 추하지만 아름답다. 보레는 옮지 않은 일을 하지만, 인간의 시선에서일 뿐이다. 


영화 밖으로 확장시켜 보면, 이란 태생으로 스웨덴에서 활동하고 있는 알리 아바시 감독이 보이고 나아가 스웨덴의 난민 수용 갈등이 보인다. 알리 아바시 감독에 대해선 잘 모르니 뭐라 말할 순 없겠으나, 스웨덴의 경우 문제시되고 있는 게 사실이다. 북유럽하면 떠오르는 포용, 화합, 융합의 정책이 최근 몇 년간 유럽을 강타한 난민 문제로 크게 흔들리고 있다는 것이다. 여러 모로 흔들리는 사회와 경제의 원인을 이민자와 난민자들에게 전가시키는 모양새라고 한다. <경계선>을 스웨덴의 현실에 적용시켜 볼 수 있는 여지가 있다. 


미묘한 경계 도는 경계의 미묘함


문제작으로서의 작품 외향적 분석과 함께, 작품성으로서의 내면 분석도 이 영화의 흥미로운 지점이다. 영화는 뇌리에서 쉬이 지워질 것 같지 않은 굉장한 캐릭터성이 큰 몫을 차지한다. 그런데, 정작 활동성 있고 와일드한 액션을 취하지 않는 정적 연기를 펼친다. 와중에 카메라는 주인공의 표정과 움직임을 살피는 데 수시로 클로즈업을 사용하는데, 그 미묘함을 포착하고자 한 것 같다. 미묘함이야말로 이 영화의 '경계'를 표현하는 주된 소재가 아닐까 싶다. 알게 모르게 '미묘한 경계' 또는 '경계의 미묘함'을 받아들이게 되는 것이다. 


영화는 보는 이로 하여금 비록 한순간일지도 모르지만 한 발 떨어져 세상을 바라보게 한다. 오직 나의 시선에서 세상을 바라보는 게 아니라, 순식간에 차원과 시간과 공간을 넘어 통합적으로 세상을 바라보게 되는 것이다. 그곳에서 바라본 인간은 '한낱'이라고 표현해도 과분한 존재가 아닐까. 인간의 시선에서 바라본 수많은 경계들이 허물어지는 대단한 경험을 한다. 곧 극중 티나의 경험이다. 


영화의 중반, 가히 충격적이고 불쾌하기까지 하지만 일면 이해가 되는 순간 아름다운 광경으로 재탄생하는 장면을 목격할 것이다. 영화가 끝날 때쯤엔 괴물 같이 추했던 티나가 아름답게 보일 것이다. 영화의 모든 면면들이, 우리의 시선을 강탈하고 머릿속을 헤집어놓으려는 게 아니라 완전히 새롭게 열어주기 위한 것임을 깨닫길 바란다. 물론 어떻게 받아들일지는 각각의 몫이겠지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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경계선, 난민, 모모 큐레이터, 미묘, 스웨덴, 시선, 아름다움, 인간, 충격, 트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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얼치기 소년이 아닌 산전수전 다 겪은 현상금 사냥꾼의 성장, 영화 <슬로우 웨스트>

오래된 리뷰 2018. 6. 22. 08:00



[오래된 리뷰] <슬로우 웨스트>


영화 <슬로우 웨스트> 포스터. ⓒ더 픽쳐스



1870년 미국의 콜로라도 깊숙한 곳, 16살 짜리 소년 제이(코디 스밋 맥피 분)는 사랑하는 애인 로즈를 찾으러 멀고 먼 스코틀랜드에서 왔다. 로즈는 제이의 귀족 친척을 실수로 죽인 아버지와 함께 도망쳤다. 신대륙에서 제이가 처음 마주친 건 마을을 잃고 피신 중인 듯 보이는 원주민들, 그리고 얼마 못 가 마주친 건 인디언 사냥꾼이다. 


발사되지도 않는 총을 가지고 다니는 제이는 그야말로 무방비 상태, 그때 나타난 현상금 사냥꾼 사일러스(마이클 패스벤더 분)가 인디언 사냥꾼을 죽이고는 제이에게서 돈을 받고 '서쪽'으로의 여정을 함께 한다. 미국 서부는 제이에게 희망과 착한 마음이 가득한 곳이고, 사일러스에겐 돈에 눈 먼 악당이 튀어나와 칼을 꽂는 곳이었다. 


이 둘의 여정은 쉬운듯 쉽지 않다. 느긋하기 짝이 없는, 느릿느릿한 속도와 분위기이지만, 가는 곳마다 위협이 도사리고 있는 것이다. 이들은 참으로 다양한 종류의 사람들을 마주친다. 인디언, 인디언 학살자, 현상금 사냥꾼으로 보이는 백인, 굶어 죽기 직전의 스웨덴계 가족, 학자 같아 보이는 독일계 사기꾼, 그리고 한때 사일러스가 몸 담았던 현상금 사냥꾼 패거리까지. 어려움이란 어려움을 다 뚫고 제이는 로즈를 다시 만날 수 있을까? 그저 생존하는 게 목적인듯 보이는 사일러스는?


'아름다운' 웨스턴 영화


영화 <슬로우 웨스트>의 한 장면. ⓒ더 픽쳐스



영화 <슬로우 웨스트>는 독특한 웨스턴 영화이자, 버디 로드 영화이자, 성장 영화이다. 이 어울리지 않을 것 같은 장르를 한데 모은 것 자체가 충분히 독특하다 할 만하지만, 이 장르들 모두의 정통 문법에서 조금씩 빛나가거나 어긋나면서도 그것이 '파격의 부미(不美)'의 길을 가지 않는 묘미가 있다. 


즉, 이 영화는 영화 외적으로 파격의 길을 택했다는 측면에서도, 영화 내적으로 폭력과 고통이 기본 장착(?)되어 있는 곳이 배경이라는 점에서도, 결코 아름다울 수 없음에도 또 아름다움과는 하등 거리가 멀어보임에도 시종일관 아름다움을 간직하고 유지하며 흔적을 남기고 영향을 끼친다. 


그건 다분히 허무맹랑하고 대책 없는 제이 덕분일 것이다. 생존이 전부인 것 같은 곳에서 생존이 전부는 아니라고 하고, 총칼보다 책을 더 소중히 여기고, 남을 죽이지 못하면 자신이 죽는 와중에 남을 죽이고서 죄책감을 느끼고, 보편적인 죽음이 일상화된 곳에서 죽음과 사랑을 동일시하고... 


실제였다면 진작 죽음을 면치 못할 게 분명한 제이는, 아름다운 동화처럼 반짝반짝 빛나는 이 웨스턴 영화에서 그 누구보다 눈에 띈다. 그리고 여러 면에서 파격을 택한 영화 또한 제이를 중심에 두고 제이의 여정과 그로 인한 성장을 기본 축에 둔 것처럼 보인다. 마치 소행성 B612에서 지구로 찾아와 가히 그 순수한 영혼으로 여행 중 많은 이들에게 영향을 끼치는 어린왕자처럼 말이다. 하지만 이 영화의 진정한 주인공은, '성장'의 주인공은 제이가 아닌 사일러스이다. 


산전수전 다 겪은 사일러스의 성장


영화 <슬로우 웨스트>의 한 장면. ⓒ더 픽쳐스



성장에는 필연적으로 변화가 수반된다. 생각해보면, 맹목적인 사랑과 희망, 착한 마음에의 찬가를 고수하는 제이에게 성장이 필요한가? 물론 폭력과 고통과 고난이 지배하는 곳에서 가장 필요없는 것들일지 모른다. 여기서 우린 다른 곳으로 시선을 돌려 다른 생각을 할 필요가 있다. 


아메리카 대륙을 '발견'하고는 총칼로 '침공'해 무차별로 빼앗고 죽인 백인들, 미국 서부 개척은 곧 과거 수백 년 동안 자행된 학살의 반복이다. 그런 배경 하에서 오직 생존에의 길은 수정되고 변화되어야 하는 성질의 것이 아닌가. 즉 성장이 필요하지 않은가 말이다. 그 모습이 당연하다고 하지만, 당연한 게 되어서는 안 되지 않은가. 


사일러스는 제이와의 여정으로 당연하지만 당연해서는 안 되는 자신의 길을 수정한다. 생존이 전부가 아니라는 깨달음을 얻는다. 이곳에서 생존이 전부가 되어서는 안 된다는 깨달음인 것이다. '당연히' 어리고 어리숙하고 어울리지 않는 제이의 성장 스토리라고 생각했지만, 산전수전 다 겪은 사일러스의 성장 스토리라고 생각하니 많은 것들이 보인다. 많은 것들을 생각할 수 있게 된다. 


하지만, 여기서 한 발짝 더 들어가볼 필요도 있다. 총칼을 앞세운 무단 통치로 기반은 다질 수 있지만 강력한 저항이 따르는 법, 이후엔 필수적으로 문화 통치가 필요하다. 그렇다면, 총칼 대신 사랑과 희망과 책의 문화로 서부를 개척해야 하는 것인가. 영화는 제이를 통해 그래야 했었다고 말하고 있는 것인가. 역사적 배경까지 섭렵하여 성장의 주체 반전을 훌륭히 시도한 영화는, 그 때문에 새로운 논란을 불러일으킬 수도 있다는 점을 인지할 필요도 있었다고 본다. 


삶과 죽음의 얇팍함


영화 <슬로우 웨스트>의 한 장면. ⓒ더 픽쳐스



영화에서 삶과 죽음은 제이와 사일러스의 여정에 따로 또 같이 한다. 가장 중요하게 다뤄지는 주제이기도 하다. 삶은 짧고 죽음은 길다고 했던가. 하지만 이곳에선 삶은 길고 죽음은 짧은 것 같다. 그저 살아가는 것뿐인 생존이야말로 삶에서 가장 중요한 것이기 때문인데, 모든 죽음이 하나 같이 허망하거니와 순간이다. 


<슬로우 웨스트>의 죽음은 그래서 전혀 '슬로우'하지 않다. 빠르고 간결하며 피가 난무하는 파티가 벌어지지 않는다. 대신 두 주인공마저 웃음 짓게 하는 죽음도 있다. 그런 죽음은 이곳과 어울리지 않는데, 그런 죽음들은 이곳의 선입견을 바꿔버리기에 충분하다. 죽음을 불사하는 개척정신과 문명을 확대시키려는 탐험정신의 위대함이 사실은 별 게 아니라는 것. 


죽음의 얇팍함은 삶의 얇팍함으로 이어진다. 당연히 이곳에서의 삶을 규정하는 생존 또한 얇팍하기 그지없다는 걸 말한다. 얇팍한 생존을 그저 영위하기 때문에 삶이 길어보인다. 이곳만의 삶을, 생을 지어올려야 한다. 타인을 죽이고 타인에게 죽임을 당하는 와중에 생존에의 삶이 되어서는 안되는 것이다. 


이 영화의 대리인 제이가 곳곳에 흔적을 내고 영향을 끼치고 남은 이들에게 부여하려는 것이 다름 아닌 삶이다. 생존 그리고 생존과 대비되는 얇팍한 죽음이 판을 치는 곳의 삶이 아닌, 삶과 죽음 그리고 사랑의 보편적 진리 말이다. 그것들을 다시금 이곳에 뿌리내리는 건 굉장히 느릴 테지만, 반드시 성취될 것이다. 그 주체와 방법과 방향까지 영화가 제시하진 않는다. 혹은 못했다. 그렇다고 하더라도 충분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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날 것의 액션과 아름다운 무협의 마지막 절정 <서극의 칼>

오래된 리뷰 2017. 12. 6. 08:00



[오래된 리뷰] <서극의 칼>


서극표 무협의 정점이자, 서극표 무협의 마지막 <서극의 칼>. ⓒ워너브러더스 디지털배급



소싯적 무협이나 판타지 장르에 빠져 보지 않은 사람이 있을까. 현실에선 있을 수 없는 일들이 벌어지고, 할 수 없는 일들과 하고 싶은 일들을 할 수 있는 세계를 그리는 무협과 판타지. 무협은 동양 그중에서도 중국을, 판타지는 서양을 상징한다고 할 수 있겠는데, 무협은 소규모적이거니와 지극히 개인적인 관점이 주를 이루는데 반해 판타지는 대규모적이거니와 지극히 조직적인 게 특징이다. 


그렇다면 우리는 판타지보단 무협을 더 좋아할까. 결론부터 말하자면, '아니다'. 우리뿐만 아니라 전 세계가 다분히 판타지적인 장르에 푹 빠져 있다. 비록 수십 년 전부터 이미 미국을 점령해온 코믹스를 영화로 옮겨왔을 뿐이라고 해도 말이다. 여기, 2~30년 전 무협 장르의 새로운 흐름을 만들어낸 이가 있다. 그 이름도 유명한 '서극'이다. 


그는 <촉산>과 <황비홍> 시리즈로 8~90년대를 풍미한 감독으로 잘 알려져 있지만, <영웅본색> 시리즈를 비롯 <소오강호>와 <천녀유혼> <동방불패> 시리즈를 제작한 이로도 유명하다. 우리가 알고 있는 유명한 무협 영화가 모두 그의 손에서 태어났으니, 그야말로 8~90년대 홍콩 무협의 대부인 것이다. 95년작 <서극의 칼>은 서극표 무협의 정점이자, 사실상 서극표 무협의 마지막이다. 


전형적인 스토리와 캐릭터를 묻어버릴 액션


참 많이도 봐왔던 줄거리와 전개를 무참히 묻어버릴 정도의 액션을 선보인다. ⓒ워너브러더스 디지털배급



명검 제조소로 유명한 연봉호, 사부의 딸 소령은 고아 출신의 정안과 4년차 철두에게 두루 애정을 과시하며 저울질하는 중이다. 정안과 철두는 함께 일을 보러 나갔다가 좋은 일을 한 스님이 마적단에게 처참하게 살해당하는 걸 목격하고는 사이가 틀어진다. 와중에 사부는 정안을 후계자로 지목하고 철두 일행은 몰래 스님의 복수를 하려 한다.


한편, 정안은 소령과 소령의 유모가 하는 말을 우연히 듣고 사부의 만류에도 불구하고 죽음으로 향하는 복수의 길을 나선다. 정안은 아버지가 온몸에 문신을 한 비룡이라는 자객에서 처참하게 살해당하고 자신은 사부가 간신히 탈출시켜 키웠다는 사실을 알게 된 것이다. 하지만, 그를 따라나선 소령이 하필 마적단에게 잡히고 정안은 소령을 구하려다가 오른팔이 잘리는 부상을 당하고 만다. 


흑두라는 아이 덕분에 구사일생으로 살아난 정안, 정안을 가만히 놔두지 않는 마적단, 죽을 고비를 넘기고 우연히 발견한 무급 비서, 고수가 된 정안은 마적단을 물리치고 또다시 위험에 처한 소령도 구한다. 급기야 마적단은 비룡에게 외팔의 고수를 처단해줄 것을 의뢰한다. 드디어 복수의 길 그 끝에 다다른 정안, 과연 복수는 가능할까?


영화는 지금 보면 전형적이다 못해 시시하기까지 한 스토리와 예측에서 한 치도 빗나감 없는 정직한 전개와 캐릭터를 선보인다. 반면, 그 모든 걸 즉, 그 모든 단점을 일거에 잊어버리게 할 만한 액션을 선보인다. '리얼 액션'이라고 많이들 홍보하는데, 이 영화야말로 진정한 리얼 액션이 아닌가 싶다. 


<서극의 칼>의 액션, 날 것의 액션


이 영화가 자랑하는 액션은 다름 아닌 '날 것'의 액션, 현존 영화들이 따라하기 힘들다. ⓒ워너브러더스 디지털배급



액션 기술은 나날이 진보해 이젠 왠만한 리얼 액션으로는 성에 차지 않는다. 대역 없이 위험천만한 액션을 맨몸으로 구사하는 맨몸액션은 일찍이 성룡이 정점을 찍었고, 타격감이 훌륭한 와중에 서로간의 완벽한 합으로 감탄을 자아내는 기술액션 또한 일찍이 <본 시리즈>가 정점을 찍었다. 그렇다면 이 <서극의 칼>의 액션은 무엇인가. 


굳이 이름을 붙이자면, '날것의 액션'이라고 해야 할까. 무협 액션이 가지는, 가질 수밖에 없는 '판타지'적인 모습을 이 영화에선 찾아볼 수가 없다. 거기엔 장풍가 오가고, 허공을 걷고, 소리보다 빠른 칼의 움직임이 있을 텐데, 이 영화엔 오로지 칼과 칼의 부딪힘만이 있을 뿐이다. 


이 '날것'에는 비단 칼과 칼의 부딪힘만이 있는 것만은 아니다. 죽었다 살아나 외팔이 된 정안이, 아버지가 남긴 반쪽짜리 칼에, 타다만 반쪽짜리 비서로, 더 이상 복수의 의미가 아닌 살아남기 위한 싸움들을 헤쳐나가기 때문이다. 거기엔 날것의 액션 이전에 날것의 삶이 있다. 


그런 의미에서, 삶의 나락으로 추락했다가 우연히 얻은 비서로 절정고수가 되어 나타난 영웅 정안의 뜻밖의 전혀 영웅 같지 않은 모습은, 서극 감독의 의도가 다분히 깔려 있는 모습이라 할 수 있겠다. 처음부터 끝까지, 이 영화엔 삶을 오롯이 감당하는 있는 그대로의 육체와 그에 걸맞는 둔탁한 폭력과 판타지와 이상과는 거리가 먼 현실이 있는 것이다. 


<와호장룡>와 극점을 이루는 '아름다운' 무협


가장 아름다운 무협 영화라 할 수 있는 <와호장룡>, 그와 정반대의 극점에서 또다른 아름다움을 뽐내는 <서극의 칼>. ⓒ워너브러더스 디지털배급



개인적으로, 역대 최고의 무협 영화는 단연 이안 감독의 <와호장룡>이라 생각한다. 무협이 이리도 섬세하고 아름답고 감동적일 수 있는가. 어찌 그 어떤 영화보다 진한 여운을 남길 수 있는가. <와호장룡>은 완벽한 와이어 액션과 기술 액션을 자랑한다. 거기에 감각적이라느니 비주얼적이라느니 하는 말이 끼어들 여지가 없다. 


<서극의 칼>은 이와 정반대의 극점에서 또 하나의 '아름다운' 무협을 탄생시켰다. 거기에 온갖 수식어를 붙여도 여한이 남는다. 스타일리시하고 비주얼리시하고 화려하면서도 날것이고 거칠면서 역동적이고 현실적이면서도 현란하게 정신 없다. 한마디로 정해진 합이나 정교한 양식 없이 최대한 있는 그대로를 담아낸 것이다. 


오래전부터 소문이 자자했던 이 영화의 액션이 재조명되고 있는 것 같다. <와호장룡>이 그 자체로 완벽을 자랑하며 더 이상의 후계자 없이 고고히 하늘 위에 존재하는 느낌이라면, <서극의 칼>은 그 자신 또한 개척의 주자였던 만큼 많은 여지를 남기면서 수많은 후계자와 추종자를 만든 느낌이다. 


진보를 거듭하고 있는 액션의 끝에 무엇이 있을지 궁금하다. 모르긴 몰라도 이 영화가 보여준 액션의 한 단면이 그 끝에 있을 게 분명하다. 결국 영화가 추구하는 건, 진짜 영화다운 것과 진짜 현실같은 것 아니겠는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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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름답게 보여주는 나의 이야기, 현 일본 애니메이션의 정점 <목소리의 형태>

신작 열전/신작 영화 2017. 5. 17. 08:00



[리뷰] <목소리의 형태>


<목소리의 형태>는 현재 일본 애니메이션 주류의 한 정점임에 분명하다. ⓒ디스테이션



일본 애니메이션이 굉장히 철학적이라는 건 널리 알려진 사실이다. 방대하고 집요하다. 선악의 경계를 무너뜨린 대우주 서사시 <건담> 시리즈나 일관되게 자연과 인간의 대결과 화해의 주제를 내놓는 미야자키 하야오 애니메이션들, 거기에 <공각기동대>를 필두로 하는 사이버 펑크 애니메이션의 철학으로의 집요한 접근이 대표적이다. 


그렇지만 일본 애니메는 미국 그래픽 노블이 선보이는 '작화보다 텍스트'를 추구하진 않는다. 대단히 철학적인 주제로 나아가는 만큼 일본이 자랑하는 극도의 비현실적 '예쁜' 작화와 대중적인 소재를 채택한다. 자칫 조화롭지 않을 수도 있겠지만, 오래 전부터 그토록 상반된 모습을 보이려 노력했기에 정립이 되어 있다고 하겠다. 


우린 올해 초에 그 한 정점을 보았다. 신카이 마코토의 <너의 이름은.>이다. 예쁘기 그지 없는 작화와 여기저기에서 많이 봐온 대중적이고 자극적인 소재 안에 범상치 않는 주제를 담았다. 그리고 4개월 만에 찾아온 또 다른 정점 <목소리의 형태>. 홍보는 두 애니메가 비슷한 것처럼 했는데, 이 둘은 완전히 다른 결을 두고 있다. 개인적으로 <목소리의 형태>가 더 좋았던 것 같다. 훨씬 더 나의 일상과 맞닿아 있어 공감이 갔다. 


치기어렸던 학창 시절의 이야기?


따돌림과 괴롭힘은 학창 시절에 으레 겪는 그렇고 그런 이야기가 '아니다' ⓒ디스테이션



쇼야는 고등학생에 불과한 어린 나이이지만 무슨 이유인지 삶의 끈을 놓으려 한다. 하지만 실행에 옮기지 못한다. 대신 그는 수화학교를 찾아간다. 그리곤 거기서 쇼코를 만난다. 엉겹결에 너와 친구가 되고 싶다고 말한다. 시점은 과거로 가 초등학교 6학년 쇼야의 반으로 쇼코가 전학오는 때다. 쇼코는 귀가 들리지 않는다고 한다. 쇼야는 그런 쇼코를 놀린다. 처음에는 그저 장난으로, 나중에는 집단 따돌림으로 발전한다. 그럼에도 쇼코는 그저 미안하다면서 싱글벙글 웃을 뿐이다. 


그런 쇼코의 유일한 친구였던 사하라, 하지만 그녀는 어느 날 사라진다. 그러곤 쇼코도 버티지 못하고 전학을 간다. 곧 쇼야는 이지메 주범으로, 함께 쇼코를 따돌리는 데 앞장섰던 친구들에게 역으로 집단 따돌림을 당한다. 이후 중학교와 고등학교로 가는 와중에도 이지메 주범이 꼬리표로 달려와 항상 '왕따'로 있는 그다. 그런 와중에 다시 만나게 된 쇼코다. 


쇼야는 쇼코와 친구가 되고자 수화를 배우는 등의 노력을 한다. 하지만 쇼코 곁에 항상 붙어 있는 유즈루라는 친구 때문에 다가가기 쉽지 않다. 아무래도 절친 같다. 그러며 감히 '친구'라는 걸 만들고 싶어 하는데, 그런 그에게 나가츠카가 마음을 연다. 이후 예전에 쇼코를 따돌림하는 데 일조했던 우에노를 만나고, 쇼코의 유일한 친구였던 사하라도 만나며, 이쪽도 저쪽도 아니었던 카와이도 만난다. 과연 쇼야는 친구를 만날 수 있을까? 쇼야와 쇼코는 친구가 될 수 있을까?


<목소리의 형태>는 얼핏 치기어렸던 학창 시절의 이야기를 담은 듯하다. 머리가 크고 돌이켜보니 '내가 그때 왜 그랬을까?'하고 생각하게 되는 것이다. 누구라도 지나왔을 그때 그 시절의 안타깝지만 웃으면서 얼버무리며 지나갈 수 있는 이야기라고 치부할 수 있을지도 모르겠다. 그렇지만 그저 그렇게만 흘러가면 이 애니메를 볼 이유가 없겠다. 


원죄와 구원의 측면에서 바라보기


가해자라는 원죄, 그리고 속죄로 이어질 구원의 이야기이기도 하다. ⓒ디스테이션



우린 이 애니메를 원죄와 구원, 존재라는 거창하기까지 한 측면에서 바라볼 필요가 있다. 학창 시절의 치기 어린, '누구나 그땐 그럴 수 있어'라고 넘길 수만은 없다는 것이다. 제대로 돌아봐 직시하고 풀 수 있는 건 풀어야 한다. 쇼야가 자살까지 생각하게 된 이지메는 자신이 저지른 이지메에서 그 기원을 찾을 수 있다. 나쁜 짓을 했으니 똑같이 나쁜 짓을 당해야 한다는 당위성을 말하고자 하는 건 아니다. 


그는 자신의 원죄를 직시하고 당사자에게 용서를 구한다. 그러며 '친구의 자격'이라는 씁쓸한 단어로 구원받으려 한다. 이에 당사자인 쇼코는? 그녀보다 그 주위 사람들이 더 반대한다. 특히 그녀의 어머니는 그가 한때나마 그녀에게 한 짓을 아주 잘 알기에 절대 받아들일 수 없다. 나라면 어떻게 할까?


난 약한 아이였다. 초등학교 6학년 때와 중학교 3학년 때 따돌림이 아닌 괴롭힘을 당했다. 20여 년이 지났어도 생생한 기억들은, 나로 하여금 그를 다시 만나면 무슨 짓을 할지 모르는 상태에 있게 만든다. 솔직히 모르겠다. 지금 만나면 어떤 복수를 해줄지. 그런 한편 고등학교 2학년 때인가는 오히려 내가 누군가를 괴롭힘이 아닌 따돌린 기억이 어렴풋이 있다. 어떤 식이었는지는 기억이 나지 않지만 뭔가를 했던 건 확실하다. 


아마 이 피해자와 가해자로서의 경험들이 뒤죽박죽되어 이후 오랫동안 새로운 사람들을 잘 사귀지 못했었던 것 같다. 극 중 쇼야는 고등학생이 되고 사람들 얼굴을 잘 쳐다보지 못하거니와 얼굴에 'X'표가 달려져 있게 되었는데, 그게 다 그가 저지른 가해자로서의 경험과 그가 당한 피해자로서의 경험이 합쳐져서일 것이다. 애니메이션으로서의 장점을 극대화시키며 애니메이션으로만 구현이 가능한 이 표현은, 쇼야의 복잡한 극도의 심정을 잘 표현해냈다. 


원죄와 존재의 측면에서 바라보기


스스로 생각하기에 태어나지 않았어야 한다고 생각하는 원죄와 그럼에도 세상에 꼭 존재해야 한다는 부정과 합의 이야기다. ⓒ 디스테이션



결국은 쇼코가 쇼야를 용서해줄 줄 안다. 어떤 식으로? 거기엔 원죄와 구원이라는 키워드 외에 '존재'의 키워드가 중요하게 작용한다. 이번엔 쇼야가 아닌 쇼코다. 누가 봐도 쇼코는 잘못한 게 없지만, 그녀는 항상 미안하다고 한다. 그건 청각장애인이라는 쇼코의 존재 자체에 대한 부정에 기인한다고 하겠다. 그녀는 자신을 사랑하지 못하며 자신만 사라지면 모든 것들이 원만할 거라 생각한다. 


이 세상은 피해자가 도망가야 하는 상황이 두루 존재한다. 결은 다르지만, 영화 <한공주>를 보면 한공주는 피해자일 뿐더러 잘못이 없는데 가해자로부터 도망다녀야 한다. 그러며 언제든 존재의 사라짐을 준비한다. 결코 삶의 끈을 놓을 생각은 없지만 언젠가는 그렇게 될 것만 같기 때문이다. 그래서 쇼코는 자신을 괴롭힌 당사자였던 쇼야가 수화를 배워와 자신과 친구가 되고 싶다고 말했을 때 말 못할 감동을 느꼈던 것이다. 다른 사람이 아닌 쇼야였기 때문이다. 


그렇게 쇼야와 쇼코는 단순히 가해자와 피해자로서의 도식이 아닌, 원죄와 존재 그리고 구원으로서 서로가 반드시 필요하다는 도식으로 바라볼 수 있다. 아무리 쇼야의 첫 번째 절친 나가츠카, 쇼코의 수호천사 유즈루가 있다 해도 그들은 서로가 있어야 한다. <목소리의 형태>는 초중반부의 일반적 차원에서 후반부의 철학적 차원으로 넘어가며 이 도식을 직접적으로 내보인다. 생각지도 못한 깨달음을 얻는다. 


한편 우린 이 작품을 통해 아픈 사람들을 만날 수 있다. 죽을 만큼 아픈 사람들을 말이다. 그런데 아직 세상을 제대로 접하지 못하고 알지 못한 아이들이다. 쇼야의 경우, 어른들이 생각하기에 터무니 없는 이유로 세상을 등지려하는 것처럼 보일지 모른다. 바로 그 점이다. 누구나 겪었을 만한 아픈 이야기를 어른이 되면 잘 거들떠 보려 하지 않는다. 그저 '그땐 그럴 수 있어' 하며 넘어가려 할 뿐이다. 그 어느 것 하나 그냥 넘어가면 안 되는 것이다. 들여다보자. 그들이 말하려는 목소리의 형태를. 


세상의 아름다움, 그리고 나의 이야기


<목소리의 형태>는 아름답다, 그것으로도 충분하다. 그리고 누구나의 이야기다. 그것으로도 충분한 것 같다. ⓒ디스테이션


<그의 이름은.>의 신카이 마코토가 '빛의 작가'라는 수식어를 얻을 만큼 빛의 섬세함을 일상과 접목시켜 치밀하게 보여주는 데 천재적인 능력을 발휘하는 반면, <목소리의 형태>는 세상을 등질 만큼 심각한 상황에 맞지 않는 것 같은 자연의 신비를 통해 세상의 아름다움을 선보이려 하는 것 같다. 


우린 이 작품에서 아름다운 벚꽃, 귀여운 잉어, 예쁜 다리 밑 개울가 풍경을 수시로 볼 수 있다. 현실은 시궁창인데 보이는 풍경은 이리도 아름다우니 만큼 시궁창 현실을 미화하려는 수작인가 생각하기 쉽지만, 그 일원인 자신의 존재 가치를 다시금 생각하게 해주는 데 크게 일조한다고 생각하는 게 좋을 것 같다. 그들은 아직 어리다. 


의외로 많은 생각을 하게 만드는 작품이었는데, 어느 정도 내 이야기 같다고 느낀 측면도 클 것 같다. 그렇지만 학창 시절의 이런저런 일들, 상당히 심각한 게 분명하지만 '그땐 그럴 수 있지'라며 넘기기 일쑤인 일들은 그야말로 누구나 한 번쯤 겪을 것이기에 나말고도 나처럼 느낀 이들이 많을 줄 안다. 


그 모든 일들이 절대 그저 그렇지만은 않다는 걸 말해주고 싶다. 그렇지만 그 어떤 일도 용서하고 구원받지 못할 건 없다는 것도 말해주고 싶다. 물론 여기엔 단서가 따른다. 다른 누가 끼어들 수 없는 당사자들끼리의 원죄의 대한 속죄와 용서에 따른 구원이어야 한다는 것. 그리고 절대 허투루 행해져서는 안 된다는 것도. 이는 비단 학창 시절의 상대적으로 강도가 덜한 일들만이 아니다. 나아가 국가, 인류의 절대적 강도의 일들에도 해당된다. 쇼야가 쇼쿄에게 하는 진심어린 속죄와 사과를 듣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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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름다움을 쫓고 행복을 추구하는 삶, 파인만의 길 <파인만에게 길을 묻다>

신작 열전/신작 도서 2017. 4. 10. 08:00



[서평] <파인만에게 길을 묻다>


<파인만에게 길을 묻다> 표지 ⓒ더숲



리처드 파인만, 아인슈타인의 뒤를 이은 20세기 최고의 스타 물리학자이자 가장 위대한 물리학자 중 한 사람. 1986년 우주왕복선위원회 위원으로 일할 때 그 유명한 미국 우주왕복선 첼린저 호의 폭발 사고 원인을 풀어내며 전 세계적으로 이름을 알린 바로 그 파인만이다. 일찍이 제2차 세계대전 중 미국의 원자 폭탄 개발 계획인 '맨해튼 프로젝트'에 참여하기도 했고, 1965년엔 노벨물리학상을 타기도 했다.  


서른도 되기 전에 코넬대학교에서 교수 생활을 시작한 파인만은 1950년부터 캘리포니아 공과대학, 일명 '칼텍'에서 계속 재직한다. 1981년 가을, 한 젊은 과학도가 연구원으로 부임해 파인만 연구실 근처로 온다. <파인만에게 길을 묻다>(더숲)를 비롯해 많은 베스트셀러 과학 교양서를 낸 칼텍 교수 레너드 믈로디노프였다. 다시 젊디 젊었을 그가 명성이 자자한 박사 논문으로 칼텍에 스카웃된 것이었다. 


우린 믈로디노프의 젊은 시절 회상을 기반으로 한 <파인만에게 길을 묻다>를 통해 리처드 파인만의 특별한 말년을 엿볼 수 있다. 더불어 1969년 노벨물리학상 수상자인 머레이 겔만과 리처드 파인만의 은근한 경쟁과 서로를 향한 존경의 모습, '모든 것의 이론' 후보 중 하나이자 현재 가장 중요한 이론인 끈 이론의 초기 모습을 엿볼 수도 있다. 그렇지만 무엇보다 길 잃은 젊은 물리학도의 모습을 통해 보편적 삶과 길을 함께 고민해볼 수 있겠다. 저자는 파인만에게 길을 묻고 부단한 고민 끝에 그 길을 간다. 


'과연 내가 이곳에 맞는 사람일까' 하는 고민은 모든 이들이 한다. 누군가는 '이런 누추한 곳'은 나와 맞지 않는다고 생각할 테고, 누군가는 '이런 대단한 곳'은 나와 맞지 않는다고 생각할 테다. 나는 지극히 후자의 입장인데, 가끔은 전자처럼 생각할 때도 있다. 정답은 끊임없이 양자를 옮겨가며 균형을 유지하는 게 아닐까 싶다. 


저자는 박사논문이 몇몇 유명한 물리학자들의 눈길을 끈 '덕분에' 칼텍이라는 위대한 곳에 특별연구원 자리를 얻었다고 생각했던 입장이다. '내가 이런 대단한 곳에 맞는 사람일까' 하는 생각을 끊임없이 되풀이 했고, 그때마다 파인만을 찾아가 많은 대화를 나누었다고. '나의 아이디어가 연구할 만한 가치가 있는 것인가? 과학자는 어떻게 생각할까? 창조성의 본질은 무엇일까?' 그는 파인만으로부터 과학과 과학자의 본질에 대한 답을 얻을 수 있었다고 한다. 


하지만 그보다 중요한 건 따로 있었고, 그 중요한 것도 얻을 수 있었다고 한다. 파인만 덕분에 새로운 각도로 삶에 접근하게 되었다는 것이다. 그만의 길을 찾았다는 뜻일 테다. 우리가 이 책을 보며 얻게 될 것도, 얻어야 하는 것도 과학과 과학자의 본질보다는 그것이겠다.


대단하지 않은 말들, 거기서 얻는 대단한 깨달음


전설적인 인물인 파인만의 전설과 부합하지 못하는 첫인상처럼, 저자 못지 않게 우리 또한 파인만의 말들에서 어떤 크나큰 깨달음을 얻으려 해선 안 되겠다. 배울 게 많을 것 같다는 저자의 말에 '나는 나 자신 말고는 다른 사람들한테 뭐가 좋은지 잘 모른다'라고 대답하는 파인만이다. 더불어 그는 지극히 당연하고 누구나 인지할 만한 이야기만을 건네준다. 물론 그 속에는 진심에서 우러나오는 깨달음들이 떠다닌다. 


상대방의 진심을 얻기 위해선 자신부터 진심으로 다가가야 한다. 저자는 파인만에게 그 어떤 사심이 아닌 오직 길만을 찾기 위해 다가간다. 전설적인 존재와 어떻게든 친해져 그 유명세로 사익을 추구하려는 꼼수를 가졌다면 오래지 않아 더 이상 파인만을 볼 수 없었을 것이다. 


파인만은 저자를 가장 괴롭혔던 문제인 과학자의 자질에 대해 답한다. '보통 사람이 하는 일과 과학자가 하는 일 사이에 큰 차이가 있다고 보지 않는다'고 말이다. 그로부터 시작된 파인만의 일련의 생각들은 길잃은 젊은 시절의 저자뿐만 아니라 그의 생각을 보고 있는 모든 이에게 깊숙히 전달될 게 분명하다. 


파인만은 문제 해결에 대한 생각도 전해준다. '문제 푸는 건 간단한 거야. 모두 상상력과 끈기에 의해 이루어진 것이지.' 라고 말이다. 저자는 이 생각을 받아 자신의 생각을 전한다. '가정에 가정을 되풀이하고 어림에 어림을 되풀이해야 한다. 여기에 앞으로 나가는 능력, 직관을 따르는 능력, 자신이 하는 일을 스스로 완전히 이해하지 못한다는 것을 인정하는 능력이 필요하다. 그리고 무엇보다도 자신을 믿어야 한다.' 


당연한 말들이 아닌가 생각하다가도, 이런 당연한 말을 스스로를 돌아봐도 부끄럼 없이 하기까지 어떠한 역경을 뚫었을까 생각하면, 마냥 당연하게만 들리지 않는다. '재미 있는 일'과 '가슴이 뛰는 일'을 하라는 다분히 자기계발적이고 그래서 오글거리기까지 한 파인만의 조언도 연장선상에서 생각해보면 다르게 다가온다. 데카르트의 수학적 분석에 영감을 준 무지개의 가장 큰 특징이 무엇인지 물어보는 파인만에게 당연하게도 과학적으로 대답하는 저자, 거기에 다시 답하는 파인만 대답이 압권이다. 이는 저자가 가려하는 '파인만의 길'이고 파인만의 과학이다. 


"자네는 이 현상의 핵심적인 특징을 놓치고 있군. 그의 영감의 원천은 무지개가 아름답다는 생각일세."(본문 159쪽)


아름다움을 놓치지 않고 행복을 추구하는 삶


저자는 어떤 삶을 살기로 결심했을까. 그가 걸어가기로 한 파인만의 길은 어떤 것일까. 인류 역사에 길이 남을 전설적인 인물인 리처드 파인만의 길은, 누가 보아도 성공한 길이었을 테니 일반적으로 유추하긴 쉽다. 성취를 하고, 남에게 감명을 주고, 중요한 사람이 되고, 리더가 되는 것 말이다. 하지만 저자는 그 길은 파인만의 길이 아니라 겔만의 길이라고 말한다. 


파인만의 길은 다른 사람들이 어떻게 생각하느냐에 관계없이 나를 감동시킨 목표를 추구하며 내 인생의 한정된 시간을 쓰고, 삶에서 '아름다움'을 절대 놓치지 않는 삶이라는 것이다. 파인만의 길을 저자의 길로 치환하니, '하나의 연구 분야에만 매달리지 않고, 한 가지 직업에만 매달리지도 않는, 내부에 초첨을 맞춰 관습적인 또는 물질적인 맥락에서의 성공을 거두지 못할 수도 있는 삶'이 되었다. 


저자가 묻는 것 같다. 너는 어떤 길을 가고 싶으냐고. 갈피를 잡지 못했다면 나를 따라 파인만의 길을 가보는 게 어떻겠냐고. 수많은 사람들의 비난과 무시, 경멸감 어린 시선을 받을지 모르지만, 행복은 나 자신이 통제할 수 있다고 믿기 때문에. 내가 통제할 수 있는 행복이 있다는 것만으로도 충분히 가치가 있는 것 아니겠냐고 말이다. 


무엇보다 이 책은 '스승' 리처드 파인만에 관한 책이기도 하다. 리처드 파인만이라는 위대한 위인보다 '스승'에 힘을 실어도 충분히 가치가 있다는 거다. 그만큼 우리는 스승에 목 말라 있다. 시대의 진정한 스승은 점점 사라지고 스승을 자처하는 '짝퉁 스승'이 판친다. 


평생 애제자 한 명 남기지 않은, 일반적인 시선에서 봤을 때 스승과는 가장 거리가 먼 파인만이야말로 진정한 스승이라고 생각하는 저자의 생각을 엿볼 때, 스승은 제자가 만드는 것이구나 하고 생각하는 한편 진정한 스승은 진심어린 마음만을 전할 뿐 진심따윈 없는 기술을 전하는 게 아니구나 하고 생각해본다. 이 책을 읽으며, 파인만이라는 새로운 스승을 발견해보는 시간을 갖는 것도 좋겠다. 


시대의 스승들은 많이 세상을 떠났다. 마음 둘 곳이 점점 없어지는 기분이다. 그런가 하면, 언젠가는 내가 또는 내 또래의 누군가가 시대의 스승 역할을 해야 할 때가 올 것이라 생각해본다. 한 없이 부끄럽고 저어되지만, 누군가는 시대를 이끌며 다음 세대를 끌어올려야 하는 게 인간 사는 세상의 이치가 아닌가 싶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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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철학은 치료제로 작용해야 한다' <철학은 어떻게 삶이 되는가>

신작 열전/신작 도서 2017. 3. 6. 08:00



[서평] <철학은 어떻게 삶이 되는가>


<철학은 어떻게 삶이 되는가> 표지 ⓒ책세상



'철학'은 어렵고 멀게 느껴진다. 어려운 건 어쩔 수 없을지 몰라도, 굳이 멀어야 할 필요는 없겠지마느 그 어떤 학문보다 우리와 먼 게 사실이다. 문사철(문학, 역사, 철학)을 아우르는 인문학이 맹위를 떨치고 있는 와중에도 철학은 그 고고함을 꺾지 않는다. 가까이 오라 손짓해도 선뜻 가까이 가지 못한다. 


철학이 생겨난 고대, 철학은 삶에 밀접한 관련이 있다고 한다. '어떻게 해야 잘 살 수 있을까'하는 문제가 곧 철학이었다는 것이다. 지혜 추구가 주요 목표였다. 하지만 17~18세기 자본주의 형성과 시민사회 성립으로 근대가 시작되며 함께 등장한 근대 학문 하에서 철학은 삶에서 멀어졌다. 근대 철학자들은 학문과 기술과 경제로 삶의 문제를 해결하려 했다. 철학은 지금 우리가 인지하고 있는 지극한 '학문'이 된 것이다. 


이에 반기를 든 위대한 철학자 칸트는 '철학이 치료제로 작용해야 한다'고 했다. 20~21세기의 '아픈 시대'에 이보다 더 정확하게 철학이 가야할 길을 제시한 말이 있을까. 이 말은 전언과 다름 없었다. 많은 철학자들이 이에 동의하고 활발한 논의를 전개했다. 철학은 학문에서 다시금 삶으로 돌아와야 한다는 것. 직접적으로 삶의 문제를 해결할 수 있어야 한다는 것. 


'삶의 기술'로서의 철학, 철학의 전통으로의 회기


삶의 문제를 해결하려는 걸 삶을 다스리는 기술이라 한다면, 이는 '삶의 기술'로 요약할 수 있겠다. 혹자에게는 이 움직임이 철학을 삶의 기술의 하나로, 즉 '삶'이라는 하찮은 것을 위한 수단으로 축소하려는 걸로 보일 수 있겠다. 사실이다. 하지만 철학이 살기 위해선 필요하지 않을까. 그리고 이는 철학의 전통으로의 회기이다. 


삶의 기술 철학 권위자 빌헬름 슈미트는 오랫동안 이를 천착해왔다. 그의 주요 저서 또한 <삶의 기술 철학>이라는 책인데, 우리는 그 요약판인 <철학은 어떻게 삶이 되는가>(책세상)으로 손쉽게 그 정수를 접할 수 있다. 앞의 책에선 18개 장을 통해 15개의 기술을 선보였던 바, 이 책에선 3개의 기술을 추가했다. 


"철학적 숙고는 삶의 기술에서의 기술에 대해, '숙련된 삶'에 대해 그리고 의식적인 삶의 운영을 위해 한몫을 할 수 있다. 근거와 논증을 탐구하고, 개념들을 해명하고, 구조와 그것에 근본적으로 연관되는 사항들을 발견하고, 조건들을 숙고하고, 가능성들을 분석하는 것은 철학적인 행위이다. 이런 의미에서 철학은 삶이 처한 상황을 해명하는 데 보조 역할을 할 수 있다."(11쪽)


저자가 주장하는 삶의 기술들, 그중 공감되는 것


저자가 주장하는 삶의 기술들은 일관성 있게 나열되어 있지만, 격렬히 공감되는 것들이 있기도 하고 받아들이기 힘들기도 하다. '습관'을 삶의 기술을 지속적으로 수련하고 의식적으로 실행하는 기법 중 하나로 본 것도 그 중 하나이다. 그동안 습관에 자기계발 요소를 듬뿍 담아 참으로 많은 저서들이 나왔는데, 철학적으로 접근할 수 있다는 게 신기할 따름이다. 애초에 저자가 주장하는 바가 철학의 자기계발화일지도 모른다는 생각을 해본다. 


삶의 기술의 주체는 수련과 테크닉이 필요하고, 그 가장 기초적인 기법으로 습관을 들며, 타율적 습관이 아닌 자율적 습관이 진정 의미 있는 형식의 습관이라 말한다. 탁월한 능력을 양산하는 습관, 모든 게 완벽하지만 주의할 점이 있다면 칸트가 모든 습관의 위험한 적대자로 삼은 '관성의 법칙'이다. 정착된 습관은 아무런 수고 없이 탁월한 효과를 발휘할 수 있기 때문이다. 


'멜랑콜리'를 바라보는 시선이 독특한대, 가장 공감이 가는 부분이다. '우울증'으로 불리며 '치료'해야 하는 '질병'으로 인식된 멜랑콜리를 삶의 기술 철학 중 하나로 본 것이다. 재독 철학자 한병철이 주장하는 '피로사회'와 닿아 있는 면이 있다. 심하게 낙관적인 보편적 정보와 소통의 문화에서 의미가 생긴 세계에 대한 무상함의 의식으로서의 멜랑콜리, 활동의 과잉이 낳은 활동사회 또는 성과사회에서 느끼는 피로감과 정반대에 위치한 무력감 충분한 멜랑콜리. 


한때 멜랑콜리가 트렌드처럼 젊은 층을 휩쓴 적이 있었는데, 다분히 반(反)세계적인 생각에서 기인했다고 본다. 세계가 한없이 오르막일 때에도, 한없이 내리막일 때에도, 다를바 없는 무한 활동과 긍정이 모두를 압박할 때였다. 아마 이전까지 찾을 수 없는 막강한 압박이었을 테다. 그 반대급부로 생겨난 질병인 멜랑콜리. 이제는 당당히 '어떻게 삶을 살아야' 하는지 고민할 때 반드시 필요한 기술 중 하나로 자리매김 해야 한다. 


저자가 주장하는 삶의 기술들, 그중 받아들이기 힘든 것


끝간데 없는 긍정이 아무리 철폐되어야 한다고 해도, 일부러라도 부정적으로 사고해야 한다는 저자의 주장을 완전히 받아들이긴 힘들다. 현대적 인간이 행복에 대한 강박관념으로 힘들어 한다는 건 알고 있다. 그렇지만, 항상 가장 좋지 않은 경우를 생각하고 있어야 한다는 저자의 주장은 조금 유치한 감이 없지 않아 있다. 같은 주장을 하는 한병철의 접근과 성찰과는 차이가 있다. 


주도권을 쥐려고 하는 주체가 통제할 수 없는 일 앞에서 좌절하며 얻는 병리현상을 말하기 위해, 한병철은 긍정의 폐해을 주장했지 그저 부정을 말하진 않았다. 반면, 저자가 주장하는 부정은 부정을 위한 부정으로밖에 보이지 않는다. 멜랑콜리는 다른 시선으로 바라보자는 주장은 하나의 시각으로 바라볼 요지가 있지만, 부정적으로 사고하라는 건 인생 자체를 바꾸라는 말과 다름 없다. 함부로 해야 하는 말이 아닌 것이다. 거기에 어떤 깊은 접근이 있다고 해도 말이다. 


죽음을 동반하는 삶을 살라는 주장은 머리로는 받아들이지만 가슴으로는 받아들이기 힘들다. 삶이 있으면 반드시 죽음이 있다는 사실을 모르는 이 누가 있겠으며, 죽음을 상정함으로서 삶이 더욱 풍부해질 수 있다는 사실을 모르는 이 누가 있겠는가. 누구나 다 알고 있지만, 아직 삶 속에 온전히 죽음을 받아들이기 힘든 게 사실이다. 


죽음의 재발견이 꾸준히 이루어지고 있다. 가슴으로도 받아들여지게 지속적으로 활동을 하고 있다. 간접적으로라도 죽음을 체험한다. 궁극적으로 죽음에의 집착을 없애고, 죽음에 대한 두려움을 없애고자 한다. 


"삶의 기술은 죽음의 기술과 결부되어 있다. 또한 삶의 지식 역시 죽음의 지식과 결부되어 있다. 죽음은 삶을 그늘지게 하지 않는다. 죽음은 삶의 한 구성요소이다." (106쪽)


'아름다운 삶'과 '나의 삶'


열거된 관점들로 저자가 추구하는 삶의 기술의 목적은 무엇일까. '아름다운 삶'이라고 한다. 아름다운 삶은 무엇일까. 명명백백히 밝히지는 못하고 있지만, '긍정할 만한 가치가 있는 것으로 나타나는 것'이 아름답다고 한다. 얼핏 저자가 앞서 주장한 바와 상반되는 것 같은데, 이에 저자는 쾌적한 것과 즐거운 것 등의 '긍정적인 것'과는 다른, 불쾌한 것, 고통스러운 것, 추악한 것, 부정적인 것 등을 포함한 '긍정적인 것'을 뜻하다고 밝혔다. 


저자가 주장하는 바가 삶의 기술의 자기계발화일지 모른다고 했는데, 정정해야 할 것 같다. 그는 삶의 기술을 미셸 푸코의 '실존의 미학'과 맞닿아 있는 개념으로 상정하고, 이를 위해 아름다움의 개념을 새롭게 규정했기 때문이다. 여기에 이르면 '삶의 기술의 자기계발화'가 아닌 '성찰적 삶의 기술'이 형성 된다. '인간'과 '삶'을 위한 철학적 접근, 그 일환인 '삶의 기술'.


오히려 지극히 철학적인 접근이 주를 이루기에, 명백한 기술이 명명되고 방법이 상세히 설명되고 있음에도 편하고 쉽게 읽어내려갈 수 없다. 철학을 '지식'적으로 접근할 수 있는 방법과 '지혜'적으로 성찰할 수 있는 해석이 조화를 이루고 있는 것이다. 방법론을 액면 그대로 받아들이되, 그 안을 깊이 들여다보는 해석을 손수 살펴야 한다. 그 끝에 다름 아닌 '나의 삶'이 있다는 것만 잊지 않으면 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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멜랑콜리, 부정적 사고, 삶의 기술, 습관, 아름다움, 죽음, 철학, 철학은 어떻게 삶이 되는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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미국이 가장 들추기 싫어할 모습, 하지만 너무도 아름다운 <문라이트>

신작 열전/신작 영화 2017. 3. 1. 08:00



[리뷰] 제89회 아카데미 작품상 <문라이트>


제89회 아카데미 시상식에서 '작품상'의 쾌거를 올렸다. 더욱이 사상 최초로 남여조연상을 흑인이 휩쓸었는데, 그 중 한 명이 <문라이트>의 메허샬레하쉬바즈 엘리다. ⓒ오드(AUD)



지상 최대 영화 '축제'인 '제89회 아카데미 시상식'이 지난 2월 26일 미국 LA에서 열렸다. 언제나처럼 쟁쟁한 후보들을 앞세운 사전 마케팅이 활개를 쳤는데, 이번엔 싱겁게 끝나버린 경향이 없지 않아 있다. 다름 아닌 <라라랜드> 때문인데, 일찍이 골든글러브 6관왕으로 역대 최다 수상을 하였고 아카데미에도 14개 노미네이트로 역대 최다를 기록한 바 싹쓸이가 예상되었었다. 제목 'la la land'도 아카데미의 성지 LA를 그대로 차용하지 않았는가. 그야말로 아카데미를 위한 영화였으니. 하지만 고작(?) 6관왕에 그치고 말았다. 그것도 메인 상 중 감독상과 여우주연상만 탔다. 


한편 8개 노미네이트 <문라이트>와 <컨택트>가 뒤를 따랐는데, 둘 중에는 <문라이트>가 압승을 거두었다. 수상 개수를 떠나, <문라이트>가 작품상을 탔기 때문이다. 일찍이 전 세계 영화제에서 <라라랜드>를 저멀리 따돌리는 수의 상을 탔는데, 한때 158관왕으로 많은 언론에 오르락내리락 했다. 급기야 아카데미 3관왕으로 175관왕을 넘어섰다고 한다. 사실상 <라라랜드>와 <문라이트>의 각축전이었던 거다. 


여기엔 '흑과 백'이라는, 결코 그냥 지나칠 수 없는 요소가 도사리고 있다. <라라랜드>가 백인의 꿈을 티끌없이 아름답게 그려냈다면, <문라이트>는 흑인 소수자의 성장을 어둡고 아픈 아름다움으로 그려냈다. 둘 다 치명적이게 아름답다. 다만 그 방식이 완연히 다른 바, 머리는 <라라랜드>를 보고 싶어 하지만 가슴은 <문라이트>를 보고 싶어 한다. 나는 가슴이 시키는 말을 듣고 <문라이트>를 보았다.


짧은 시간에 한 인간의 성장을 담다


평균 이하의 짧은 러닝타임에 한 인간의 성장을 오롯이 담았다. 한 시기의 순간순간을 담았을 뿐인데 오롯이 담았다고 느껴진 이유는, 그 순간에 담긴 모습이 완벽히 그 시기를 담아냈다는 것일 테다. ⓒ오드(AUD)



배경은 미국 마이애미 흑인 지구의 마약 소굴, 미국이 결코 좋아할 만한 내용은 아니다. 영화는 '리틀', '샤이론', '블랙'의 3부로 구성되어 있다. 샤이론의 유년, 소년, 청년 시절을 상징하는 별명들이다. '호모새끼'라고 놀림을 받는 한 작고 힘 없는 흑인 아이, 리틀. 여전히 놀림 받는 힘 없는 소년이지만 자신의 정체성이 무엇인지 알게 되는 샤이론. 과거를 청산하고 빈민가 출신 흑인이 할 수 있는 일을 하며 살아가는 블랙. 


우리는 짧은 시간에 한 인간의 성장을 지켜볼 수 있다. 물론 모든 면을 볼 순 없다. 그건 영화 사상 성장의 시간을 가장 완벽히 담아 냈던 <보이 후드>도 해낼 수 없었다. 무수한 시간의 흐름 속에서 자신을 만들고, 깨닫고, 변화하는 장면들만 볼 뿐이다. 그거면 충분하지 않을까 싶다. 아니, 이 영화라서 충분하지 않았을까. 


마약쟁이 엄마와 함께 살아가는 '리틀', 오직 케빈이라는 친구만 있을 뿐이다. 한없이 작고 힘 없는 아이는 호모라고 놀림 받는다. 도망가다가 마약 소굴로 들어가게 되었는데, 우연히 후안이 발견한다. 그는 일대를 주름잡는 마약상. 기댈 곳 없는 리틀은 엄마 대신 후안과 후안의 여자친구 테레사와 급격히 가까워진다. 이후 리틀에게 절대적인 영향을 끼치는 후안. 빈민가 흑인이 지녀야 할 생각과 마음가짐, 행동을 일깨운다. 


'언젠가는 뭐가 될지 스스로 결정해야 해' '넌 지금 세상 한 가운데 있어' '달빛 속에선 흑인 아이들도 파랗게 보이지' '나도 엄마가 싫었지. 하지만 지금은 미칠듯이 그리워' 등 주옥같은 명대사를 리틀에게 전하는 후안. 상당히 도식적인 전개와 장면이지만, 꾸밈없이 다가오니 그저 받아들이지 않을 수 없다. 어두워야 빛이 존재하는 게 아니다. 그러면 그들은 한 몸이 아니지 않은가. 어둠을 뚫고 빛이 나오는 게 아닐까. 어둠과 빛은 한 몸인 것이다. 후안도, 리틀도 어둠이자 빛이다.


가장 들추기 싫은 모습, 하지만 너무나도 아름답다


희망도, 슬픔도 없는 공허로운 눈의 샤이론. 꿈과 희망의 나라 미국이 가장 덮고 싶어 하는 모습임에 분명하다. 하지만... 감독은 이를 너무나도 아름답게 그려냈다. 이를 어찌하나. ⓒ오드(AUD)



리틀에게 희망이라는 게 있는 걸까. 그에겐 단순히 '소외된 사람'이라는 타이틀을 붙여주기가 민망하다. 소외라는 단어에 함축된 엄청난 무게를 감안하고라도 말이다. 사회로부터의 단절과 고립과 격리, 스스로에 대한 포기 등이 소외를 뜻하는 거라 한다면, 그는 소외의 모든 걸 지니고 있다 하겠다. 집안은 가난과 폭력이 난무하고, 무력감과 공허함과 혼란과 무의미가 몸을 휘감으며, 모두가 나를 업신여기고 놀리고 못살게 구는 것 같아 어디에도 눈을 둘 수 없다. 허공을 바라볼 뿐이다. 거기엔 슬픔도 없다. 


'희망'과 '꿈'의 나라 미국에서 가장 들추기 싫은 모습일 것이다. 하지만 아이러니하게도 정작 영화는 너무나도 아름답다. 누구에게나 아름다운 순간이 다가오고, 순간이 영원같을 때가 있다. 리틀이 비로소 샤이론이 되는 순간, 샤이론은 인생의 지침이 된 후안의 '달빛 아래선 흑인도 파랗게 보이는' 체험을 한다. 그저 순간에 자신을 맡기는, 그때만큼은 난 껍데기의 내가 아닌 본질적 내가 된다. 


그러나 인생이 순탄치만은 않다. 샤이론은 본질이 파괴되는 수모를 겪고 또 다른 껍데기를 입을 수밖에 없는 선택을 한다. 이제 '샤이론'이라는 샤이론의 본모습은 아주 단단한 껍데기에 몇 겹이고 둘러싸여 절대 밖으로 내보일 수 없게 되었다. 그는 '블랙'으로 살아간다. 그가 아는 가장 단단한 껍데기 후안의 모습을 하고서. 


그렇지만 머지 않아 그의 본질이 다시금 도전을 받을 위기에 직면한다. 그의 본질을 일깨워준 순간과의 조우, 그의 얼굴엔 '블랙'이 아닌 '샤이론'이 비추고 자신감 없고 움츠러든 표정과 말 본새가 드러나며 슬픔조차 찾기 힘든 공허하기 짝이 없는 두 눈이 영화를 지배한다. 그는, 다시금 달빛 아래서 파랗게 보이는 체험을 할 수 있을까. 


이보다 더 아름다운 영화는 없다


이 '아름다운' 위대한 영화, 또는 아름다운 '위대한' 영화. 나는 이보다 더 아름다운 영화를 본 적이 없다. 앞으로도 이런 류의 아름다움을 이렇게 표현해낼 영화가 있을까? ⓒ오드(AUD)



영화는 상당 부분 헤르만 헤세의 세기의 베스트셀러이자 현대 성장 소설의 시초와도 같은 작품 <데미안>을 생각나게 한다. 그렇지만 단언컨대 그보다 더 위대한 성장을 다뤘다고 말할 수 있는 건, 한 아이의 성장이 뚫고 가야 할 것들이 너무나도 지독했기 때문이다. 그야말로 첩첩산중, 다 말하기도 힘들거니와 늘어놓는다해도 완전히 드러낼 수 없을 거다. 그럼에도 '아름답다'고 말할 수 있는 것도 그 위대함을 말해준다. 


절대 잊히지 않을 한 가지가 있다. 리틀과 샤이론과 블랙의 그 '두 눈'. 얼마나 캐스팅에 공을 들였을지 느껴질 만한 세 사람의 놀라운 싱크로율은 뒤로 하고서라도, 세 사람의 시기에 따른 두 눈의 공허함은 가히 치명적이다. 아무런 감정을 찾을 수 없는 두 눈은 모든 걸 말해준다. 이건 '경지'라고밖에 말할 수 없다. 이런 연기는 처음 본다. 


순간을 이끄는 색감과 OST는 영화의 품격을 한껏 높이는 데 일조했다. 특히 색감은 이 영화가 아름답다고 느끼는 데에 절대적 공헌을 했다. 블랙톤에 가까운 파스텔 톤의 색들이 영화의 중요한 순간 순간을 수놓는다. 블랙을 돋보이게도, 그렇다고 블랙을 묻히게도 하지 않고 조화를 이룬다. 우린 이 영화의 포스터부터 눈길을 떼지 못한다. 일정한 톤의 OST도 역시 중요한 순간을 일깨우는데, 안정감보단 긴장감을 느끼게 한다. 일종의 영화적 장치, 단조로울 수 있는 영화에 색깔을 입혔다. 


<와호장룡>은 '무협영화'에게 갖는 선입관에 철퇴를 내렸었다. 이토록 아름답고 철학적인 무협이 있다니. 무협에는 인간이 존재하지 않는 줄 알았는데 말이다. 부끄럽지만 <문라이트>는 '흑인영화'에게 갖는 선입관에 징벌을 내린 것 같은 충격을 내게 주었다. 누구나 편견 어린 시선을 가질 수밖에 없는 데 말이다. 이보다 아름다운 영화는 이전에도 이후에도 찾기 힘들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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라라랜드, 문라이트, 성장, 소외, 아름다움, 아카데미, 위대함, 흑인, 희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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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라져가는 인간성, 우리에겐 희망이 있는가? <너무 시끄러운 고독>

신작 열전/신작 도서 2017. 2. 6. 08:00



[서평] <너무 시끄러운 고독>


소설 <너무 시끄러운 고독> 표지 ⓒ문학동네



삼십오 년째 폐지 속에서 살아가는 한탸. 폐지압축공인 그는 지하실에서 수많은 폐지에 둘러싸여 압축기 한 대와 씨름하며 고독하게 일한다. 엄청난 양의 교양을 뜻하지 않게 쌓아가고, 엄청난 양의 맥주를 힘을 얻기 위해 의도적으로 마신다. 덕분에 그는 매일매일 머릿속으로 그 어떤 것도 할 수 있고 그 어느 곳으로도 갈 수 있으며 그 어느 누구하고도 만날 수 있는 행운을 얻었다. 그건 곧 행복이다. 


그는 5년 후 압축기 한 대와 함께 은퇴해 집으로 가져와 하루에 한 꾸러미씩만 꾸릴 생각을 하고 있다. 그 한 꾸러미가 한 점의 예술작품이 되기를, 그 안에 그의 젊은 시절 품었던 모든 환상과 지식, 삼십오 년간 배운 것들을 모조리 담을 생각이다. 참으로 멋진 계획! 그 때문에 온갖 수모와 비정상적인 일의 연속을 버틸 수 있다. 


<너무 시끄러운 고독>은 고독 속에서 일하는 한 남자 한탸를 그린 짧은 소설이다. 그곳엔 오직 그와 압축기가 있을 뿐이다. 그리고 끊임없이 쏟아지는 폐지들. 하지만 역설적으로 그곳은 너무 시끄럽다. 폐지들, 그 중에 있는 '진정한 책'이 선사하는 이야기들이 한탸를 가만히 놔두지 않는다. 한탸는 매일 그 이야기 속으로 들어간다. 


'위대한 일'을 하는 '하찮아 보이는' 사람


한탸가 매일 같이 행하는 건 '파괴 행위', 그것도 자신이 가장 사랑하고 숭배하기 마지않는 것들을 파괴하는 행위. 그는 그 행위에 깃든 아름다움을 이해한다. 그 아름다움은 한탸의 앎이 전제되어 있다. 진정한 책들의 위대함을 알면서도 파괴할 수밖에 없는 처지. 한탸에겐 인생을 건 싸움이다. 


책의 위대함을 안 이상 파괴만 할 순 없다. 그는 2톤이나 되는 양의 책들을 집으로 가져 왔고, 매일 같이 몰래 책을 빼돌려 가치를 알아주는 이에게 팔아넘긴다. 그렇게 그는 책들을 최대한 구출하려 한다. 책으로 구현되어 있는 인간의 정신과 문화를 지키려는 행위와 다름 없다. 누구도 거들떠보지 않고 누구도 기대하지 않는 곳에서. 


한탸가 대변하는 이들은 사실 우리가 알지 못하는 사회 곳곳에서 활동하고 있다. 그것이 꼭 책과 같은 인간의 정신과 문화의 상징과 같은 것이 아니더라도 말이다. 우리가 우리일 수 있게, 우리가 지극히 평범한 일상을 영위할 수 있게 꼭 필요한 일을 어딘가에서 하고 있는 분들. TV에서 꾸준히 알려지고 있지만, 그들을 '희귀한 일'을 하는 사람으로만 인식되고 있는 게 사실이다. 


책이 떠나는 여정의 마지막은 독자의 손이어야 할 테지만, 사실 폐지가 되어 종이로 다시 태어나는 경우가 대부분일 것이다. 소설은 그와 같은 또 다른 책의 종착점을 보여주면서, 그곳에서 '위대한' 일을 하는 '하찮아 보이는' 사람을 조명한다. 


인간을 위해, 인간의 정신과 문화를 뒤로 하는 아이러니


어느 날, 한탸는 부브니에 엄청난 크기의 수압 압축기가 들어섰다는 소식을 듣고는 직접 찾아가본다. 그는 일전에 느껴본 적 없는 충격을 받는다. 그에겐 폐지 더미 속에서 희귀한 서적을 발견하는 그 순간이 축제나 다름 없었는데, 이곳에서는 그런 기쁨에, 폐지가 지닌 매력에 마음을 두는 사람이 아무도 없는 게 아닌가. 책들은 컨베이어 벨트를 타고 가다가 으스러진 후 커다란 용기 속으로 밀려들어가 파괴되었다. 


아무도 책의 가치를 발견하지 못한다는 것, 아무도 책의 가치를 발견하고 싶어하지 않는다는 것은 인간의 정신과 문화를 최후의 순간에 지킬 사람이 더 이상 없다는 걸 의미한다. 반면 전에 없이 월등한 능력의 압축기는 현대 사회가 갖는 더할 나위 없는 효율적 일처리를 의미한다. 인간을 위해, 인간의 정신과 문화를 뒤로 하는 아이러니. 


더불어 한탸를 비롯해 뜻하지 않게 교양을 쌓게 된 그처럼 늙은 압축공들이 누렸던 '좋은' 시절도 끝나버리고 만 것이다. 사고 방식이 달라졌고, 일 방식이 달라졌다. 새 인간, 새 방식, 새 시대! 한탸가 할 수 있는 게 무엇일까. 새 시대에 맞게 그도 오로지 일 효율을 극대화시키기 위해 책은 거들떠도 안 보고 파괴 행위에 몰입할 것인가? 아니면 도태되어 밀려나 '쓸모 없는' 인간이 될 것인가?


그가 하는 일은 생각에 따라 방식에 따라 인간에 따라 정녕 위대할 수 있다. 하지만 이렇게 된 이상 그가 하는 일은 '파괴 행위' 그 이상도 이하도 아닌 것이다. 문제는, 그 일을 하는 사람들이 한탸와 같은 일종의 의무를 반드시 지녀야 하는가? 이다. 아무도 강요할 수 없다. 안타깝지만 세상은 그 쪽으로 흘러가고 있다. '위대한' 한탸가 할 수 있는 건 아무것도 없는 것이다. 


사라져가는 인간성, 우리에겐 희망이 있는가? 


도처에 '사라져가는 것' '사라진 것'들이 많다. 거기엔 어김 없이 우리를 우리이게 한 기억들이 있다. 골목길, 구멍가게, 동네서점, 손편지, LP와 CD 등. 그것들이 사라지고 난 후 대체한 것들은 하나 같이 비인간적인 것들이다. 물론, 이는 지극히 구시대적이고 시대에 뒤떨어지는 생각일 수 있다. 결국 인간을 위해 만들어진 것들인데 말이다. 


좋다, 한 발 양보해 적어도 한탸의 위대한 생각을 발현하는 폐지압축공이 사라지는 건 비인간적으로 가는 길이 아니겠는가 생각한다. 인간성 상실로의 길. 한탸가 아니고서 다른 누군가가 그와 같은 생각으로 그와 같은 일을 한다는 걸 바랄 수는 없다. 그 지점이 한탸와 함께 사라질 인간성에 대한 안타까운 부분이다. 


인간을 위한다는 건 '진보'를 의미할 것이다. 더 나은 미래를 위한 변화, 이보다 더 좋은 말도 찾기 힘들다. 나 또한 일면 진보를 옹호하고 외치는 사람이다. 하지만, 하지만 말이다. 퇴보적 진보도 존재하지 않을까. 소설에서 한탸도 끊임없이 고민하는 부분인데, 일면을 위해 진보적 길을 택하지만 그 길이 일면 퇴보적으로 다가올지 모르는 것이다. 어떤 것들은 시대적 사명을 뒤로한 채 진보적 보수를 택해야 하지 않을까. 적어도 한탸의 생각이 발현된 폐지압축공이 사라져선 안 된다. 


우리에겐 희망이 있는가. 인간성 상실로의 필연적 길을 목도함에도 아무것도 할 수 없는 우리를 직시하고서도 희망이 있다고 말할 수 있는가. 소설은 말한다. 한탸가 있었다는 것만으로도, 그가 끝까지 지니고 있던 인간성 그 자체만으로도 희망이 있다고 말이다. 우린 그에게서 발견할 수 있다, 아니 발견해야 한다. 그가 지녔던 인간성을, 그 아름다움을, 그 강인한 믿음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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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교하지 못한 기교로 '아름다운 잔혹함'을 표현한다면? <네온 데몬>

신작 열전/신작 영화 2016. 10. 26. 08:00



[리뷰] <네온 데몬>


콘텐츠에 있어서 '기교'가 전부여서는 안 될 것이다. 더구나 영화같은 긴 호흡의 콘텐츠는 더욱 그렇다. <네온 데몬>은 기교에 대부분의 힘을 실은 듯한데, 그조차 정교하지 못했다. ⓒ(주)쇼미미디어앤트레이딩



예술성이 가미된 콘텐츠를 평할 때 전문가들이 '기교가 전부'라는 말을 하며 혹평을 주곤 한다. 엔간히 출중한 능력을 믿고 기본을 제대로 연마하지 않은 채 기교를 부리는 데에 따른 것이다. 일반인이 보기엔 괜찮다고 할지 모른다. 현란하고 화려하고 멋있어 보이니까 말이다. 그러나 머지 않아 밑천이 드러나고 말 것이다. 


영화는 은근히 긴 호흡으로 진행되기에 기교가 어쩌고 저쩌고 하기가 쉽지 않다. 노래처럼 한 번에 판단하기가 힘들다. 그런 만큼 영화에 대고 기교를 말하는 건, 대상이 되는 그 영화가 얼마나 기교에 힘을 썼는지 알 수 있다. 시종 일관 기교를 보여주려 애썼다고 볼 수밖에 없다. 


'다코타 패닝'의 동생 '엘르 패닝' 주연의 <네온 데몬>이 그런 경우다. 강렬하게 시작한 영화는 시종 일관 현란한 기교로 눈을 범하려 한다. 아무래도 모델에 대한 이야기니 만큼 으레 그럴지 모르겠지만 이건 정도가 좀 심하다. 그 기교가 졸음을 선사하고, 눈살을 찌푸리게 하고, 한숨을 토해내게 하니 말이다. 종종 그런 게 아니다. 거의 모든 기교가 그러하고, 가끔 탄성을 자아낼 뿐이다. 


정교하지 못한 '아름다운 잔혹함'


영화는 아름다움에 대한 집착, 아름다운 잔혹함, 오직 하나뿐인 아름다움을 말하고자 한다. <블랙 스완>이 생각나게 하는데, 과연 잘 표현해냈을까. ⓒ(주)쇼미미디어앤트레이딩



영화는 얼핏 나탈리 포트만 주연의 2010년작 <블랙 스완>을 생각나게 한다. 단순한 욕망을 넘어선 광적 집착이 가져오는 아름다운 파멸을 그렸다고 생각했기 때문인데, 그건 비슷한 극초반의 분위기에서 온 '눈속임'에 불과했다. <블랙 스완>은 그 특유의 분위기를 심리 스릴러 라는 장르에 훌륭히 장착해 끝까지 끌고가는 반면, <네온 데몬>은 그 분위기가 오히려 영화를 해치는 결과를 낳고 만다. 결정적인 차이는 아마 주연 배우들의 연기 내공이 아닐까 싶다. 그렇지만 치명적이긴 하다. 얼마나 아름다울지 보고 싶어지는 것이다. 


감독 니콜라스 윈딩 레픈은 2011년작 <드라이브>로 칸 영화제에서 감독상을 수상한 바 있다. 이른바 '아름다운 잔혹함'을 극대화시켜 보여주었는데, 잔혹함을 표현하는 데 얼마나 정교한 기교를 사용했으면 아름답다고까지 했을까 싶다. <네온 데몬>도 이와 비슷한 느낌이 나지만, 그 기교가 정교했는지는 모르겠다. 그렇다고 투박하지도 않았지만, 너무 친절하지 못했다. 자신만의 세계에 갇힌 느낌이랄까. 


이쯤에서 줄거리를 간단히 말하자면, 모델지망생 제시(엘르 패닝 분)는 혈혈단신으로 LA에 온다. 급하게 만난 사진가 지망생(듯한) 남자친구에게 사진을 부탁해 자신의 미모만 믿고 모델에이전시로 간다. 역시나, 그녀의 꾸미지 않은 순수한 아름다움에 누구든 탄복을 하지 않을 수 없다. 코디네이터, 모델, 실장, 수석 디자이너 할 것 없이. 


제시도 자신이 누구보다 아름답다는 걸 잘 안다. 그 아름다움이 어느 누구라도 탄복해마지 않는다는 것도 잘 안다. 그녀는 단번에 탑모델로 올라선다. 하지만 그런 만큼 그녀를 향한 시기와 질투, 무엇보다 집착이 심해진다. 혈혈단신 그녀 주위에 알 수 없는 일이 벌어지는데... 그녀는 믿고 의지할 만하다고 판단한 코디네이터 집으로 피신을 간다. 그렇지만 그 코디네이터는 그녀를 집착하는 다른 탑모델들과 친하다. 제시는 어떻게 될까?


이야기는 엉망, 스타일이라도 좋다면 괜찮았을 텐데...


이야기가 참으로 듬성듬성이다. 그 방면으로는 봐주기가 힘들다. 그렇다면, 감독이 승부를 본 스타일만 남는데... 그마저 괜찮지가 못한 느낌이 든다. 이 영화, 어쩌지. ⓒ(주)쇼미미디어앤트레이딩



'순수함'은 선도 악도 될 수 있다. 모델이 되기 전 제시는 순수했다. 순수한 아름다움을 지니고 있었다. 모델이 되고선 그 순수한 아름다움이 좋은 방향으로 발전하진 못했다. 겸손함이나 자신 없는 모습은 온데 간데 없고 자신의 아름다움에 대한 맹신이 불러온 순수한 악마만 있을 뿐이다. 그런 그녀도 화장을 지우고 모델의 옷을 벗으면 소녀로 돌아온다. 모델이라는 타이틀이 순수함의 방향타를 쥐고 흔드는 것이다. 


그런데 영화에선 그런 심리가 잘 드러나지 않았다. 패션 업계의 뒷 얘기와 심리 스릴러는 아주 잘 어울리는 한 쌍임에도 불구하고 말이다. <블랙 스완>이나 <버드맨>처럼, 겉으로는 화려하기 그지 없지만 그 뒤에서는 엄청난 암투가 벌어지고 있다는 걸 스타일에 맞게 잘 전달해주었으면 좋았겠다 싶다. 


물론 이 감독은 다른 누구보다도 그만의 스타일을 가지고 보여주고자 한다. 문제는 그 스타일만을 과도하게 밀고 나가는 데 있다. 영화의 메시지를 스타일로 조화롭게 말하고자 하는 게 아니라, 따로 따로 놀고 있는 것이다. 그래서 중간중간 뚝뚝 끊기는 느낌이 들곤 한다. 이야기와 스타일이 아니라 이야기는 이야기고 스타일은 스타일이다 라고 말하고 있는 것 같다. 


더욱 큰 문제는 따로 있다. 영화가 보여주는 스타일이 엄청나다면 다른 게 엉망이더라도 크게 상관 없을 것이다. 그런데 이건 아니다. 도무지 이해할 수 없는, 이해하고 싶지도 않은 것들의 향연을 잠자코 지켜봐야 하는데, 결국 아무 것도 남지 않는다. 더욱이 그 절대적 양이 왜 그리 많은지, 지친다. 그런데 영화가 끝나면, 말하고자 하는 바를 바로 거기에서 찾을 수밖에 없다. 난감하지 그지 없지 않은가.


기대만큼 실망이 크다


영화를 보기 전, 많은 부분에서 기대를 하게 했다. 제목, 포스터, 감독, 주연, 주제나 소재 등. 낚이지(?) 않을 수 없게 해놓고는, 결과적으로 낚인 듯. ⓒ(주)쇼미미디어앤트레이딩



영화는 2016 칸영화제에 상영되어 관객으로부터는 기립박수를, 평단으로부터는 혹평세례를 받았다고 한다. 나는? 평단도 관객도 아닌 애매한 위치에 있다고 스스로 평하는 나는, 혹평세례를 퍼붓지 않을 수 없다. 감독의 의도를 이해하지 못했나? 영화가 던지는 폭발적인 에너지를 받아내지 못했나? 너무 아름다운 가운데 너무 역겨운 상극의 이미지가 던지는, 영화의 진정한 의미를 잡아내지 못했나?


고백하자면, 제목을 보고 영화 포스터를 보고 감독을 보고 주연 배우를 보고 나서 영화를 보지 않을 수 없었다. 그야말로 치명적인 유혹에 넘어간 거다. 그만큼 치명적인 영화를 볼 기대를 한 것이고, 그 기대가 보란듯이 물거품이 된 것뿐이다. 그뿐이다. 이만큼의 기대를 하지 않고 봤으면, 그만큼의 실망도 하지 않았을 거다. 


하나같이 아름답다고 하는 제시가 내 눈엔 촌스럽기만 하다고 느껴졌을 때, 그 실망이 배가된 것 같다. 영화 안에서 그들이 보는 제시는 '꾸미지' 않은 아름다움의 전형이다. 그들 자신은 절대 갖지 못할 그것. 그런데 영화 밖에서 보는 일반인의 입장은 다르지 않은가. 그녀도 꾸미지 않을 때보다 꾸몄을 때 비교도 되지 않을 정도로 이쁜 것 같은데 말이다. 그들은 제시를 보고 꾸미지 않았을 때의 모습을 보는 게 아니라 꾸몄을 때를 상상하는 게 아닐까, 싶다. 이해하기 어려운 이야기다. 


물론 영화는 그런 심리조차 드러내 보이지 않는다. 감독은 주구장창 스타일만 고수하며 알 수 없는 '짓거리'만 철퍽철퍽 뿌려댈 뿐이다. 난 심리 스릴러를 보고 싶었지, 비주얼 스릴러를 보고 싶지 않았다. 그래도 덕분에 스스로 생각하고 유추하는 시간을 마련할 수 있었다. 다신 이와 같은 영화를 보고 싶진 않지만, '아름다움'에 대한 영화라면 그냥 지나가진 않을 것 같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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기대, 네온 데몬, 모델, 블랙 스완, 스타일, 실망, 심리, 아름다움, 이야기, 잔혹, 집착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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기억조차 하기 싫은 그날을 기억하는 것, 이 소설이 아름다운 이유 <소년이 온다>

지나간 책 다시읽기 2016. 6. 3. 08:00



[지나간 책 다시 읽기] <소년이 온다>


<소년이 온다> 표지 ⓒ창비



5.18은 내게 결코 가깝지 않았다. 어릴 때부터 이승복 기념관을 해마다 찾았고, 그 '투철한 반공정신' 때문에 희생된 이승복 어린이의 정신을 길이 새기며 치를 떨었다. 5.18은 저 멀리 있어 보이지도 않았다. 그래도 다행인 건, 이승복 어린이와 일가족이 처참하게 죽어간 그 모습만 떠오를 뿐 그 이면의 정신과 사상이 떠오르진 않는다는 것이다. 그 폭력과 상처만 깊이 남아 있을 뿐이다. 그렇게 5.18이 다가올 수 있었다. 


5.18을 온전히 폭력과 상처의 입장으로 보아야


5.18은 상당 기간 논란거리였다. 지금도 그렇다. 수많은 추측이 난무하는 와중에 정치적으로 다양하게 이용해먹었다. 지금도 그렇다. 그렇지만 부정할 수 없는 게 있다면, 그곳엔 폭력과 상처가 있었다는 것이다. 이젠 거기에 도달할 때가 되었다. 거기서부터 시작해야 한다. 그래야 5.18을 제대로 본다고 할 수 있지 않을까. 한강 작가의 <소년이 온다>(창비)는 그 시작점이자 정점이다. 5.18을 온전히 폭력과 상처의 입장에서 보는 것. 


잘 알려져 있다시피 5.18이 한강 작가에게 끼친 영향은 엄청나다. 광주에서 태어나 서울로 이사한 후 아버지(한승원 소설가)가 구해온 5.18 사진집을 몰래 펼쳐보고 '내 안의 연한 부분이 소리 없이 깨졌고'(199쪽) '인간에 대한 근원적인 질문을 하게 된 비밀스러운 계기가 됐다'고 한다. 그에게 <소년이 온다>는 소설가로서 인간으로서 반드시 넘어야 할 산이었던 것이다. 5.18을 온전히 폭력과 상처로 보는 시작점이자 정점이 <소년이 온다>라면, 한강 작가 개인에게도 소설가로서 인간으로서 넘어야 할 산의 시작점이자 정점이 <소년이 온다>라고 할 수 있겠다. 


당연하겠지만, 그동안 5.18에 대한 소설은 상당히 많이 나왔다. 임철우의 <직선과 독가스> <봄날>, 홍희담의 <깃발>, 박혜강의 <꽃잎처럼> 등이 있다. 소설은 물론 영화로도 웹툰으로도 나온 바 있다. 장선우 감독의 <꽃잎>, 김지훈 감독의 <화려한 휴가> 그리고 강풀 작가의 <26년>이 그것들이다. 어쩌다 보니 5.18에 대한 거의 모든 콘텐츠를 접했는데, 하나같이 치명적으로 다가왔던 기억이 있다. <소년이 온다>는 여기서도 정점을 이룬다. 


작가가 들려주는 6개의 광주 이야기


중학교 3학년생 동호는 가족과 주위 사람들의 만류에도 도청에 남으려 한다. 그건 곧 죽음을 의미하지만, 그는 자신을 용서할 수 없다. 친구 정대를 버리고 도망친 자신을 말이다. 정대는 죽었다. 그의 혼은 아직 그의 육신에서 완전히 떠날 수 없다. 결국 자유로워진 그의 혼은, 그렇지만 갈 곳도 없다. 어디든 갈 수 있지만 갈 수 없다. 


은숙은 5.18에서 살아남았다. 처음부터 살아남으려고 했던 건 아니지만, 결국 살아남았고 그녀의 영혼은 부서졌다. 그렇게 살아남아 출판사 직원이 되었고, 그녀가 할 수 있는 건 그들을 기억하는 것이다. 진수는 도청에 끝까지 남아 항전한 이들을 이끌었다. 결국 붙잡혀서 모진 고문을 받은 후 수감되었다. 풀려나고서도 그는 제대로 된 삶을 살 수 없었다. 유리 조각 같이 산산히 부서진 영혼을 되살릴 방도가 없었다. 


작가가 들려주는 6개의 이야기는 서로 얽히고설켜 있다. 모두 5.18 당시의 폭력과 상처로 얼룩진 열흘에 대한 이야기다. 너무 아픈 그 이야기들은, 처음엔 살며시 다가와 조곤조곤 가벼울 수 있는 폭력의 기억을 전하다가 갑자기 그날의 칼날 같은 기억을 전하며 돌이킬 수 없는 상처를 남긴다. 그날의 기억이 영혼을 도려내고 부숴버린다면, 그날이 아닌 그날에서 파생된 폭력의 기억은 가볍기까지 한 것이다. 


아이러니한 건, 그가 들려주는 폭력과 상처의 서사가 왜 그렇게 아름다워 보이냐는 것이다. 단순히 문장이 가진 아름다움이나 인간의 역사가 아이러니하게도 폭력과 아름다움을 추구해왔다는 당위론적인 얘기가 아니다. 분명 이 소설은 고통스럽기 짝이 없다. 만약 그 잔혹한 참상만을 드러내는 데 천착했다면 이토록 고통스럽지는 않았을 것이다. 그는 그 참상과 폭력에 더해 기억과 상처를 드러냈다. 우린 그 기억과 상처에서 예상치 못한 충격과 더 심한 고통을 느끼는 것이다. 


아름다움의 원천, '기억의 복원'


그렇다면, 바로 그 예상치 못한 충격과 더 심한 고통에서 일종의 가학적인 아름다움을 느끼게 되는 것일까? 아니면 한강 작가가 특기를 살려 그려낸 금식한 충격과 고통에 대응하는 극도의 아름다움을 곳곳에 심어놓은 것일까? 내 생각은 이렇다. 이 소설은 다분히 한강 작가의 시선에서 바라보아야 한다는 것이다. 


한강 작가가 그동안 추구했던 '인간에 대한 근원적인 질문'. 그는 그 답으로 폭력과 그로 인한 고통을 짊어지고 사는 게 삶이라고 말해왔다. 거기서 더 나아갈 수 없다고도 말해왔다. 이 소설 또한 그 연장선상에 있다고 보면 되는데, 한 단계 더 나아간 듯하다. 태초의 폭력과 고통으로 돌아가서 그 안에 상처받은 존재들을 보듬는, '기억의 복원'까지 진전된 것이다. 바로 그 기억의 복원이 아름다움의 원천이 아닐까. 단지 기억하는 것조차 어려운 그날을, 기어코 기억하려는 것 자체가 아름다운 게 아니고 무엇이겠는가. 그날 광주에는 울려 퍼졌다. 


"여러분, 지금 나와주십시오. 계엄군이 들어오고 있습니다... 시민 여러분, 우리는 광주를 사수할 것입니다. 우리를 잊지 말아주십시오. 그리고 기억해 주십시오."


그날은 많은 사람들에게 잊고 싶은 기억일 것이다. 수많은 사람들이 희생당했지만, 대다수 사람들이 아무것도 할 수 없었다. 이 소설은 그날 희생당한 사람들을, 그리고 아무것도 할 수 없던 사람들을 되살린다. 특히 절대적 피해자였지만 살아서도 가해자로 자신을 인지하고 불우하게 살았던 이들의 기억을 복원하는 게 크게 다가온다. 아프고 고통스럽고 또다시 상처받겠지만, 잊지 말고 그날을 기억해야 한다. 그날은 당사자들만의 기억도, 광주만의 기억도 아니다. 우리나라의 기억인 것이다. 


언제쯤 우린 매일 같이 소년이 찾아 와도 웃으며 맞이 하고 그 아픈 기억을 보듬을 수 있을까. 아마 불가능할 것이다. 아니, 그래선 안 될 것이다. 그 아픔은 평생 함께 짊어지고 가야 한다. 그리고 계속해서 인지하고 기억해야 한다. 다시는 그와 같은 아픔과 상처를 되물림하지 않기 위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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Posted by singenv
5.18, 광주, 기억, 상처, 소년이 온다, 아름다움, 폭력, 한강
  • BlogIcon 둘리토비
    2016.06.04 22:38 신고

    인상적인 서평, 잘 보았습니다.
    사실 오늘 서점에서 한강의 이 소설과 채식주의자를 살까말까 하다가 구입하지는 않았습니다.
    좀 더 호흡을 길게 가지고 보려고 합니다~

    감사합니다. 좋은 밤, 일요일 맞아하시길~

    • BlogIcon singenv
      2016.06.05 13:13 신고

      감사합니다^^
      한번쯤 읽어보면 괜찮을 것 같습니다~
      채식주의자는 저도 보지 않았습니다, 보지 않을 예정이에요ㅋ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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