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冊으로 策하다. 책으로 일을 꾸미거나 꾀하다. 책으로 세상을 바꿔 보겠습니다. singenv@naver.com Since 2013.4.16

'본능'에 해당되는 글 5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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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라이언 고슬링이 내보이는, 잔혹한 본능의 폭발과 액션 <드라이브> 2019.10.09
  • 절체절명의 순간, 나라면 어떻게 할 것인가? 영화 <포스 마쥬어> 2018.12.07
  • 그곳엔 공포의 광활한 대지가 있을 뿐...<달콤한 노래> 2017.12.18
  • F1을 상징하는, 라이벌을 상징하는, 두 사나이의 질주 <러시: 더 라이벌> 2017.01.11
  • 북유럽판 잔혹하고 몽환적인 뱀파이어의 사랑과 성장 이야기<렛 미 인> 2016.12.30

라이언 고슬링이 내보이는, 잔혹한 본능의 폭발과 액션 <드라이브>

오래된 리뷰 2019. 10. 9. 08:00



[오래된 리뷰] <드라이브>


영화 <드라이브> 포스터. ⓒ판시네마



오프닝으로 반 이상 먹고 들어가는(?) 영화들이 있다. 생각나는 것만 나열해봐도 비교적 예전 것들엔 <007> 시리즈, <저수지의 개들>, <스크림>, <업> 등이 있고 비교적 최신 것들엔 <라라랜드>, <베이비 드라이버> 등이 있다. 모아 놓으니 하나같이 전체적 작품성도 빼어난 축에 속하는 작품들이라는 게 신기하다. 더불어 개성이 뚜렷해 꼿꼿한 듯하면서도 해당 장르를 선도하며 회자가 되는 작품들인 것도 눈에 띈다. 


여기에 빼놓을 수 없는 영화가 한 편 더 있으니, 덴마크 출신의 니콜라스 윈딩 레픈 감독의 <드라이브>이다. 라이언 고슬링이 분한 드라이버가 범죄자들의 도주를 도와주며 LA의 색채감 있는 한밤중을 강렬하고 한편으론 차갑게 질주하는 장장 12분간의 오프닝이 인상적이다 못해 환상적이다. 당장이라도 도시의 밤거리를 달리고 싶은 마음이 들게 하는 멋진 시퀀스이다. 


니콜라스 윈딩 레픈은 20년도 더 된 데뷔작 <푸셔>를 통해서도 감각적인 오프닝을 선보였는데, 영화 전체의 분위기와 색감을 압축적으로 보여주면서도 그 자체로 완성된 시퀀스가 인상적이다. 영화 세계에 전적으로 몰입하게 만드는 그만의 절대적 분위기와 색감 스타일은 최신작(2016년작) <네온 데몬>까지 이어진다. 2010년대 들어서 그의 영화들은 모두 칸 영화제에 초청되었고, <드라이브>로 감독상을 받았다. 명백히 할리우드 액션 영화임에도 칸 영화제의 선택을 받은 것이다. 


드라이버의 잔혹한 본능이 향하는 곳


미국 LA, 밤에는 범죄자들의 도주를 도와주며 낮에는 카센터에서 성실하게 일하는 한편 스턴트맨으로도 활약하는 이름 없는 드라이버(라이언 고슬링 분). 그에게 선과 악은 무의미하고 오직 차를 운전하는 '드라이버'로서의 삶만이 의미 있을 뿐이다. 어느 날 우연히 눈에 띈 여인 아이린, 그녀에겐 아이도 있지만 드라이버에게 새로운 삶의 의미로 다가온다. 


아이린도 그에게 끌린 듯, 그들은 행복한 시간을 보낸다. 하지만 감옥에 가 있던 아이린의 남편 스탠다드가 돌아오자 행복한 시간은 끝나고 만다. 쉽게 아이린 곁을 떠나지 못하는 드라이버, 우연히 스탠다드의 일에 휘말린다. 그가 감옥에 있을 때의 악연으로 협박 받고 있었던 것, 그걸 해결하지 못하면 스탠다드뿐만 아니라 아이린과 아이한테도 가닿을 것이었다. 드라이버는 밤에 하던 일을 스탠다드와 함께 하기로 한다. 


별 것 아닐 줄 알았던 작업이 잘 풀리지 않아 스탠다드가 죽고 만다. 드라이버는 위협을 받고 아이린과 아이도 위협을 받을 걸 깨닫자 잔혹한 본능을 폭발시킨다. 그 배후에 자신을 경주 드라이버로 만들어주겠다고 한 버니와 니노 일당이 있다는 걸 알게 된다. 거기엔 드라이버의 실력을 알아준 카센터 주인 섀넌도 껴 있었으니 그도 위험할 것이었다. 버니와 니노 일당은 드라이버와 그 주위 사람들을 노리고, 드라이버의 잔혹한 본능은 그들로 향한다. 그 끝은 어떤 식으로든 무자비할 것이다. 


라이언 고슬링의 감정 한점 폭발과 충격 액션


<드라이브>는 할리우드 액션의 새로운 장을 열었다고 해도 과언이 아닌 영화이다. 할리우드 자본으로 할리우드 스타들과 함께 한 명백한 할리우드 액션 영화이지만, 여타 동 장르의 영화들과 완연히 결을 달리한다. 기본적 스토리 뼈대는 별다를 게 없다. 폭력 범죄에 깊숙이 발을 담궜을 게 분명한 한 남자가 새로운 의미가 된 사랑하는 여자를 향해 앞뒤 볼 것 없이 직진하는 이야기이다. 


주인공도 앞뒤가 없지만 그걸 표현하는 영화도 앞뒤가 없다. 범죄영화인 만큼 주를 이룰 수밖에 없을 액션은 실로 '쌈박하다'. 주인공이 이름도 없이 살아가며 오직 드라이브만 생각하다가 새로운 의미로 다가온 여인만 생각하듯, 불필요하거나 거추장스러운 것 따윈 거들떠 보지도 않고 핵심만 노린다. 주인공-영화-액션이 한 몸으로 움직인다. 감정이 썩이지 않은 채 계속되는 투박한 타격감이 두렵게 다가온다. 그 감정 없는 폭력의 강도와 수위는 충분히 충격적일 만하다. 


'라이언 고슬링'이라는 복잡하면서도 다층적인 감정이 담긴 배우가 내보이는 '감정 없음'만이 표현할 수 있는 캐릭터의 액션일 테다. 그에겐 또래 할리우드 스타들에겐 없는 감정의 방이 있는 것 같다. 당연히 그가 맡은 배역은 그중 한 가지 내지 몇 가지를 내보인다. 하지만 <드라이버>의 드라이버는 그 어떤 감정도 내보이지 않기에 외려 그 안에 수많은 감정이 소용돌이 치고 있는 것처럼 보이는 것이다. 와중에 한 여인에게로 생긴 감정의 폭발이 본능의 폭발로 이어져 누구도 말릴 수 없고 누구도 형용할 수 없는 색채를 띄게 된다. 영화 외적의 '감정의 방'을 영화 내적의 '감정 없음'으로 응축시키곤 다시 '감정의 한점 폭발'로 내보이는 것이다. 


스타일리시, 그리고 '개구리와 전갈'


영화의 스타일리시함을 설명하는 데 색감과 함께 OST를 빼놓을 수 없다. 사실 둘 다 오프닝에서 완벽에 가깝게 내보였는데, 영화가 끝날 때까지 시종일관 종횡무진한다. 영화의 격을 높이고 결을 달리하게 하고 다른 세계 또는 차원으로 끌고가게 하는 데 절대적 역할을 하는 것이다. 하여, 영화를 보다 보면 '무슨 말이 더 필요하랴'는 생각이 절로 들게 된다. 


전체적으로 미래지향적 세련됨이 아닌 고전복고풍 신선함이 스타일리시의 핵심이라는 게 신기한 한편 의아하다면 의아할 지점이다. 햇빛을 한껏 받은 한낮의 포근함과 네온불빛이 반사되는 한밤의 몽환적임이 대비를 이루는 스타일은 고전적이라 할 수 있지 않겠는가. 물론 이는 영화에서 주인공 드라이버의 삶과 성향을 반추하는 중요한 요소이기도 하지만 말이다. 


한편, 영화 중후반 드라이버의 폭발이 끝을 향해 갈 때 대사가 영화의 전체를 관통하는 메시지와 일맥상통한다. '개구리와 전갈' 이야기로, 개구리가 전갈을 등에 태우고 강을 건널 수 있게 도와주는데 건너는 중에 전갈이 개구리에게 독침을 쏴서 함께 가라앉는다. 전갈은 '그것이 내 본성'이라고 이유를 댄다. 드라이버가 즐겨 입는 재킷 뒤에 전갈이 그려진 것도 그렇고 본성이 폭발해 무차별 폭력의 화신이 된 것도 그렇고 그가 전갈인 듯한대, 그는 한편 범죄자들을 태우고 도망치는 일도 하는 만큼 개구리라고도 할 수 있지 않나 싶다. 


드라이버가 전갈이든 개구리이든, 개구리와 전갈 이야기에 따르면 그와 함께 있는 이가 파멸을 면치 못하는 건 매한가지다. 그렇다면, 새로운 삶의 의미로 다가온 아이린과 그녀의 아이 곁에 계속 있어야 하는가 떠나야 하는가. 이 아이러니까지 영화가 추구하는 주요 지점은 아닐 테지만, 보는 이로써는 그 이면과 이후까지 생각하게 된다. <드라이브>는 그런 영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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감정, 개구리와 전갈, 드라이브, 라이언 고슬링, 본능, 액션, 잔혹, 충격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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절체절명의 순간, 나라면 어떻게 할 것인가? 영화 <포스 마쥬어>

오래된 리뷰 2018. 12. 7. 12:30



[오래된 리뷰] <포스 마쥬어: 화이트 베케이션>


영화 <포스 마쥬어: 화이트 베케이션> 포스터. ⓒ블룸즈베리리소시스



살아가면서 자주 입에 담는 말이 있다. '어쩔 수 없었다', 사람의 힘에 의해선 도무지 어찌 해볼 수 없는 불가항력을 말한다. 서양에서는 'Force Majeure'라고도 하고 'Act of God'이라고도 한다. 신의 영역에 있는 걸 당연히 사람이 할 순 없을 테다. 그래서 '어쩔 수 없었다'는 참으로 무책임한 변명이지만 무책임이 전제가 되는 말이다. 


영화 <더 스퀘어>로 제70회 칸 영화제 황금종려상을 수상하며 한국에도 개봉되는 등 큰 화제를 낳은 스웨덴 감독 루벤 외스틀룬드의 2014년도 작품 <포스 마쥬어: 화이트 베케이션>은 제목에서도 유추해볼 수 있듯이 불가항력에 대한 이야기를 다루었다. 불가항력에 대한 궤변 또는 변명을 진지하게 들을 수 있다.

 

더불어 영화에서 불가항력의 주인공이 한 가정의 가장이자 남편이자 아빠인 성인 어른 남자이기에, '본능'에 대한 성찰뿐만 아니라 '남성'과 '가장'에 대한 진지한 생각 또한 엿볼 수 있다. 이 영화를 보면 반드시 이런 생각을 하게 될 것이다. '과연 내가 그 상황이었다면 어떻게 했을까?' 


가족들을 내팽겨 치고 혼자 도망친 가장


영화 <포스 마쥬어: 화이트 베케이션>의 한 장면. ⓒ블룸즈베리리소시스



아빠, 엄마, 큰딸, 작은아들의 너무나 전형적이고 이상적인 가족이 있다. 바쁜 가장 아빠 토마스가 오랜만에 시간을 내 스키장으로 가족휴가를 왔다. 참으로 단란하고 사이좋아 보인다. 서로 챙기는 모습이 보기 좋다. 부디 아무 탈 없이 무사히 휴가를 마치고 갔으면 하는 바람이 들 정도이다. 


휴가 첫째 날 점심시간, 눈 쌓인 산등성이 경치를 구경하는 곳에서 식사를 하고 있다. 갑자기 산등성이에서 큰소리가 난다. 그러곤 눈덩이들이 덮칠 듯 내려온다. 산사태가 난 듯하지만, 토마스는 스키장에서 일부러 만든 거라고 하며 아무렇지 않다. 근데 그렇지가 않아 보인다. 무지막지한 눈 폭풍이 그들의 식사 자리를 덮치려 한다. 


엄마 에바와 아이들은 어쩌지 못하고 있는 반면 토마스는 덮치기 직전까지 괜찮다고만 한다. 급기야 눈 폭풍이 그들을 덮칠 때, 토마스는 가족들을 내팽겨 치고 혼자 도망친다. 에바는 아이들을 끌어 앉은 채 그 자리에 있었다. 다행히 다친 사람 없이 다시 자리에 앉아 식사를 잘 끝마친 가족. 하지만 그 '사건'이 있은 후 '당연하게도' 가족 간의 뭔지 모를 균열이 생긴다.

 

아이들은 부모를 피하고, 에바는 화가 난 듯하다. 당일 저녁 시간, 에바 친구를 만난 자리에서 점심시간 때 있었던 일을 말할 때 에바와 토마스는 다른 의견을 말한다. 에바는 토마스가 너무 겁먹어서 가족들을 두고 혼자 도망갔다고 말하고 토마스는 그런 적이 없다고 말한다. 둘째 날 토마스의 친구와의 저녁 시간 때도 마찬가지다. 토마스는 어째서 그랬을까. 에바는 토마스를 용서할 수 없을까. 


남성과 가장 아닌 이성과 본능


영화 <포스 마쥬어: 화이트 베케이션>의 한 장면. ⓒ블룸즈베리리소시스



<포스 마쥬어: 화이트 베케이션> 하나만으로도 루벤 외스틀룬드 감독은 충분히 블랙 코미디의 대가로 불릴 만하다. 한편, 이 영화를 앞뒤로 그가 내놓은 작품들을 일별하면 현대인의 위선을 엿볼 수 있다. 바쁘게 일하며 가족을 책임지던 한 남자와 단란했던 한 가족이 사건 하나로 무너져내려버리는 비극을 겪는데, 그 과정의 면면들에서 터져 나오는 웃음이 ‘코미디’적이면서 현대인이라면 누구나 겪을 만한 점이라는 데에서 ‘블랙’적이다. 


조남주 작가의 <가출>이라는 단편소설은 가장인 아버지가 가출하면서 시작된다. 소설은 그 이후의 내용을 그린다. 가부장 신화가 무너진 이후 가장 부재 가족의 단상을 비유적이지만 직설적으로 보여준다. 왜 그랬는지는 모르지만 아버지는 가족에서 가장으로서의 역할을 내팽겨 치고 도망친 것이다. 초점은 도망의 이유와 과정이 아닌 도망 이후이다. 


이 영화는 불가항력이라는 본능을 맨 앞에 두기 때문이기도 하지만 가족과 가장을 들여다보는 데 의의를 가지려 하기에 도망친 가장, 다름 아닌 그 가장의 도망 이유와 과정에 초점을 둔다. 그는 왜 도망쳤는가, 어떻게 도망을 칠 수가 있는가. 


가족 구성원들 간에는 통념상의 역할이 있다. 언젠가 어머니께서 말씀하셨듯이 ‘부모와 자식은 천륜 관계이다. 고로 부모와 자식은 뗄 수 없고 부모는 자식을 지키고 기를 의무가 있다.’고 말이다. 절체절명의(또는 이라고 판단된) 순간, 에바는 자식들을 지켰고 토마스는 도망쳐버렸다. 토마스는 이 가족 내에서 부모 중 아버지이자 남편이라는 역할에 충실하지 못했다. 


영화는 토마스, 에바 부부와 이틀 동안의 저녁시간을 갖는 매츠, 패니 부부 중 매츠의 주장에 꽤 힘을 실어주는 듯하며 시선을 ‘아버지’ ‘남편’ 아닌 ‘가장’과 이 또한 통념상으로 가장의 역할을 부여받은 ‘남성’으로 옮기곤 한다. 그건 두 전혀 다른 질문으로 지금 이 시대를 관통하고자 하는 것일 수 있다. 


‘가장은 꼭 남성이어야만 하는가?’ 이 질문은 자못 진지하지만 이 상황에서는 그 자체로 역할론에서 차별론으로 논점을 흐리고자 하는 물타기용 궤변에 다름 아니다. ‘어떻게 가장이 그럴 수 있는가?’ 엄마와 아내로서 자신의 역할을 다한 에바와 다르게 아무것도 하지 못한 토마스에게 알맞은 질문이다. 


가족이라는 환상과 본능이라는 이름의 위선


영화 <포스 마쥬어: 화이트 베케이션>의 한 장면. ⓒ블룸즈베리리소시스



질문에서 ‘어떻게’에 보다 초점을 맞춰보자. 어떻게 가족을 내팽겨 치고 도망을 칠 수 있는가. 영화는 ‘충분히 그럴 수 있다’고 말하는 것 같다. 자연재해라는 불가항력 상황에서 생존 본능에 충실해 앞뒤 가릴 것 없이 도망치는 것 또한 불가항력이라고 말이다. 가장이라는 사회 가정적 역할이 주는 ‘이성’보다 나약한 인간의 몸을 장악한 ‘본능’이 우선할 수 있다는 것이다. 


그런 한편 영화는 또 다른 ‘본능’을 보여주기도 한다. 아이를 지키고자 자신을 내던진 엄마 에바의 모성 본능 말이다. 하지만 모성 본능이란, 모성애란, 본능 아닌 ‘이성’에 가깝다. 모성애 어린 엄마야말로 사회 가정적으로 부여된 역할의 하나가 아닌가. 이성보다 본능이 우선할 수 있지만 그것이 전제 사항은 될 수 없으며 면책 사항도 될 수 없는 것이다. 


현대사회 가족, 하자가 없어 보이는 가족은 사실 사상누각이다. 속절없이 무너져 내릴 수 있는 요소들이 도처에 있다. 사람과 다름없이, 거기엔 이성이라는 이름의 모습과 본능이라는 이름의 모습이 두루두루 있다. 절대적으로 이성, 본능 모두 장악할 필요가 있다. 


영화는 주어진 가정 사회적 역할을 한 명이라도 제대로 수행하지 못했을 때 오는 파국의 씁쓸한 뒷맛을 적나라하게 보여준다. 그중에서도 본능의 단면을 자연재해라는 변명 충만한 불가항력 요소로 치장해 보여줌으로써, ‘가족’이라는 환상을 부숴버리고 ‘본능’이라는 이름의 위선을 까발리는 것이다. 


우리는 이 영화를 보며 경악하고 분노하고 어이없어하고 씁쓸해하며 한편 이해하고 헛웃음 내지 박장대소를 내보일 것이다. 하지만 종내 그, 그녀, 그들에 나를 대입하면 절대 웃을 수 없는 건 물론이거니와 끔찍해질 것이다. 거기엔 당연한 이성도, 당연한 본능도 없다. 그건 환상에 지나지 않을 수 있다. 무엇보다 나만 생각하게 되는 당연한 위선이 자리를 대신할 수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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가장, 남성, 본능, 불가항력, 상황, 포스 마쥬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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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곳엔 공포의 광활한 대지가 있을 뿐...<달콤한 노래>

신작 열전/신작 도서 2017. 12. 18. 08:00



[서평] 2016년 공쿠르상 <달콤한 노래>


소설 <달콤한 노래> 표지 ⓒ아르테



프랑스 파리 10구 오트빌 가의 근사한 아파트에서 끔찍한 살인사건이 일어난다. 한 보모가 자신이 기르던 아이 둘을 살해하고 자신 또한 죽으려 했다. 남자 아기는 즉사했고 여자 아이는 병원으로 가던 도중 사망했다. 이 충격의 시작점은 어디인가. 보모는 왜 그런 짓을 저질렀을까. 아이들은 왜 죽었어야 했을까. 시간은 아이들의 부모가 버티다 못해 보모를 들이려는 때로 거슬러 올라간다. 


폴과 미리암은 둘째를 낳고 더 이상 버틸 수 없음을 알았다. 무리해서라도 보모를 들여야 했다. 루이즈는 완벽한 보모다. 처음 본 순간부터 아이들을 완벽히 다루었다. 하지만 그녀의 실생활은 너무도 불안하다. 집에서 그녀가 할 수 있는 건 아무것도 없다. 그저 일터로 가서 아이들을 케어하고 일터를 완벽히 꾸며놓는 순간을 기다리는 것뿐. 


덕분에 폴과 미리암은 자신의 일터에 완벽히 최선을 다할 수 있었다. 그들에게 루이즈는 요정이었다. 그래서 루이즈를 가족처럼 생각하게 되었다. 더할 나위 없이 완벽한 순간들이 지나간다. 하지만 영원할 순 없다. 그들은 루이즈가 얼마나 필요한지 알고 있으면서도 그녀를 견디기 힘들다. 너무 완벽하고 예민해서 가끔 혐오감 같은 게 드는 것이다. 


폴과 미리암이 자신들의 편함을 위해 아이들을 루이즈에게 맡긴다. 루이즈는 보모 역할을 완벽히 수행할 뿐만 아니라, 집안일도 완벽히 수행한다. 폴과 미리암, 아이들 그리고 루이즈 모두 행복하다. 그런데 어느새 이 집과 아이들은 루이즈의 것이 되었다. 미리암은 아이들을 뺏긴 것 같다. 그런 미리암의 생각이 루이즈는 마음에 들지 않는다. 그렇게 루이즈는 결국 거절당하고 마는 것인가. 


참혹한 서늘함, 그 중심엔 알 수 없는 루이즈...


2016년 세계 3대 문학상 중 하나인 공쿠르상 수상작 <달콤한 노래>(아르테)는, 레일라 슬라마니의 불과 두 번째 소설이다. 그녀는 이 소설로 완벽하리만치 참혹한 서늘함을 선사한다. 동시에 한없이 안으로 안으로 천착해 들어가는 소용돌이의 궤적을 느낄 수 있다. 결국엔 흔적도 찾아볼 수 없는...


우리는 이 소설에 나오는 누구보다 루이즈에게 시선이 갈 수밖에 없다. 루이즈에 대해 많이 듣게 될 수밖에 없다. 그녀가 어떤 삶을 살아왔고 어떤 현재를 살아가며 어떤 마음이고 어떤 상황에 처해있는지 자세히 알게 된다. 하지만 우린 그녀를 잘 모른다. 그녀가 왜 아이들을 죽였는지부터 시작해 그녀가 어떤 사람인지 규정짓지 못한다. 


이렇게 생각해볼 수 있다. 일터에서 비로소 자신의 가치를 찾아 발현할 수 있는 사람, 그는 일터를 떠나는 순간 존재하지 않는 사람이 된다. 불행한 삶을 살수록, 삶의 본연 외의 것에서 자신을 찾고 가치를 찾으려고 할 것이다. 다른 건 잘 몰라도 루이즈는 그런 사람이 아닐까 싶다. 


또 이런 생각도 가능하다. 아이들을 완벽히 보살피고 집안을 완벽히 케어하고 폴과 미리암의 행복을 지켜보는 것에 희열을 느끼는 루이즈는, 일평생 자신의 의도와 상관없이 실패에 실패를 거듭했던 것들을 이 집에서 성공시키려는 게 아닐까 하는. 그럴 때 이 집은 그녀에게 일터가 아닌 또 다른 삶의 공간이다. 


씨줄과 날줄로 엮어져 있는 감정선들


소설은 온갖 감정선들이 씨줄과 날줄로 치밀하게 엮어져 있다. 그중 가장 치열하게 부딪히는 선들은 엄마와 보모와 아이들의 것들이다. 엄마 미리암, 또 다른 엄마인 보모 루이즈, 그리고 아이들. 아이들은 이성보다 감정 아니 본능에 가깝다. 그들은 엄마보다 보모를 따른다. 엄마 이상의 애착을 느낀다. 


엄마는, 적어도 이 소설에서 엄마 미리암은 이성에 가깝다. 남편 폴이 음악을 공부하면서 이성과는 조금 거리가 있는 캐릭터라면, 반면 그녀는 법을 공부했기에 이성에 가까운 캐릭터로 그려진다. 어찌 되었든 그녀는 아이들보다 자신의 삶을 선택했다. 아이들과 멀어지는 건 당연한 게 아닌가. 


루이즈는 아이들 너무나도 잘 다룬다. 아이들이 원하는 게 뭔지 잘 안다. 감정에 가까운 그녀다. 그러면서 존재감을 드러내지 않고 부부가 원하는 게 무엇인지까지도 정확히 캐치한다. 감정적이지만 이성적이기까지 한 것이다. 이런 상태는 깨지기 쉽다. 어느 한 쪽으로 치우치지 않으면 괜찮지만, 그녀의 삶이라는 게 극단과 극단을 오가지 않는가. 그녀가 분해되면서 날아간 파편들은 관계된 모든 이들에게 향한다. 


이토록 특징 없고 존재감 없고 어떤 사람인지조차 잘 알지 못하는 캐릭터가, 이토록 큰 임팩트와 여운을 남기는 경우는 일찍이 보지 못했다. 그리고 소설은 시종일관 단 한순간도 여지없이 온갖 부정적인 느낌을 이어간다. 긍정적인 느낌을 한순간이라도 느낀다면 그건 더 큰 부정을 위한 도움닫기일 뿐이다. 공포, 공포의 궁극이 아닌 공포의 보편, 소용돌이쳐 안으로 안으로 말려 들어간 그 끝에 있는 건 공포의 심연이 아닌 공포에 휩싸인 광활한 대지가 있을 것이다. 


달콤한 노래 - 10점
레일라 슬리마니 지음, 방미경 옮김/arte(아르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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F1을 상징하는, 라이벌을 상징하는, 두 사나이의 질주 <러시: 더 라이벌>

오래된 리뷰 2017. 1. 11. 08:00



[오래된 리뷰] <러시: 더 라이벌>


<러시: 더 라이벌>이 나온 2013년만 해도 아직 F1이 완연한 하락세는 아니었다. 하지만 이제 F1은 퇴물 취급 받으며 세계 3대 스포츠 이벤트로 명맥을 이어나갈지 알 수 없는 상황. 새삼 이 영화가, 이 영화가 그린 그때가 보고 싶었다. ⓒ롯데엔터테인먼트



'올림픽' '월드컵'과 더불어 세계 3대 스포츠 이벤트 중 하나로 불리는 'F1(포뮬러1 월드 챔피언십)', 전 세계 수억 명이 시청하며 조 단위의 후원을 자랑하는 자타공인 꿈의 무대다. F1이 인기가 있던 가장 큰 이유는, '가장 현대적인 스포츠'라고 불리는 것과는 다르게 굉장히 인간적이었기 때문이다. 기계의 성능보다 드라이버의 실력이 우선되었기에, 그들이 펼치는 승부에 묘미가 있었다. 지금은 말그대로 '가장 현대적인 스포츠'가 되어 인간이 아닌 기계에 따라 승부가 갈리게 되었다. 


2010년대 들어 세바스찬 페텔이 4년 연속 월드 챔피언에 오르며 '황제' 미하엘 슈마허에 버금가는 업적을 달성했다. 새로운 황제의 출현에 전 세계는 열광했다. 그때는 페텔이라는 인간의 능력이 월등했다. 2014년부터 엔진과 연료량이 다운사이징된 새로운 시스템 규정이 생겼다. 이에 '메르세데스'가 발빠르게 차량을 만들어냈다. 곧바로 성적이 났다. 2014년부터 3년 동안 메르세데스의 드라이버(루이스 해밀턴, 니코 로즈버그)가 우승을 독식했다. 앞도적으로. 드라이버보다 팀의 이름이 앞세워진 것이다. 과거에도 10년 가까이 우승을 독식한 팀이 있었지만, 항상 드라이버와 함께였다. 


자연스레 관객이 줄고 후원이 줄고 대회 유치하는 도시가 줄었다. 기계의 위상은 어느 때보다 올라간 대신, F1 위상이 추락하고 드라이버의 시대는 저물었다. 옛날이 생각난다. 스타플레이어의 독식과 또는 라이벌. 오히려 최근이라 할 만한 2000년대 중반 이후가 가장 재밌었다. 춘추전국시대, 알론소, 해밀튼, 버튼, 페텔 등으로 이어지는 챔피언의 계보. 이제 이 계보가 끊어질 것 같다. 


F1을 상징하는 두 캐릭터, 두 라이벌


F1을 상징하는 세기의 라이벌, 어찌 보면 '라이벌'을 상징하는 둘일지도 모른다. 니키 라우다와 제임스 헌트. 길지 않은 만남이었지만, 그 여파와 영향력은 시대를 초월할 정도였다. ⓒ롯데엔터테인먼트


상황이 이러 해서 그런가, 차량이 아닌 인간이 서킷을 지배했던 예전이 생각난다. 내 나이로 70~90년대의 F1 전성기를 고스란히 함께 했을리는 없지만, 전설로 내려오는 그때를 마음속 깊이 연모해 마지 않을 수 없는 것이다. 90년대와 2000년대 미하엘 슈마허로부터 거슬러 올라가, 80년대의 세나와 프로스트, 그리고 70년대의 니키 라우다와 제임스 헌트까지. 


이 중 F1 역사상 최고의 천재 드라이버 세나의 이야기와 F1 역사상 최대의 라이벌 니키 라우다와 제임스 헌트의 이야기가 영화로 만들어졌다. 론 하워드 감독의 <러시: 더 라이벌>은 바로 니키 라우다와 제임스 헌트의 이야기다. 모르긴 몰라도 이 둘은 F1을 떠올리면 생각나는 두 캐릭터를 상징할 테다. 니키 라우다는 모범생 스타일의 기계 천재이자 불굴의 의지를 지닌 사나이이고, 제임스 헌트는 바람둥이 스타일의 불세출의 천재로 바람 같이 나타나 한 시즌을 재패하고 떠나버린 사나이다. 공통점은 이 둘은 서로를 미워하지만 서로를 부러워하고 서로 덕분에 더 빨리 달릴 수 있었다는 것. 


영화는 F1에 관심이 있는 사람이라면 누구나 알 만한 이들의 이야기를 고스란히 옮겨 놓았다. 그리하여 내용에 신경을 쓰는 대신, 1970년대 당시를 재현해내고 니키 라우다와 제임스 헌트를 다시 살려내며 F1이 갖는 긴박함과 스릴을 최대치로 불러내려 했다. 정녕 완벽하게 재현해내고 살려내고 불러냈는 바, 현재 F1에서 풍겨나오는 진한 실망감을 충분히 상쇄시키고도 남음이다. 그 중심에는 두 라이벌이 있다. 


본능에 충실한, 순수함의 결정체들의 질주



F1 드라이버들의 목숨을 건 사투를 무엇이라 해야 하겠는가. 돈과 명예와 스포트라이트? 화려한 삶? 그것도 맞지만, 그것만으로는 절대 불가능할 것이다. 본능에 충실한 순수함이 그들을 지배했다. ⓒ롯데엔터테인먼트



두 라이벌은 F3에서 처음 만난다. 터줏대감 제임스 헌트 눈에 예리한 신예 니키 라우다가 들어온다. 위험한 상황을 연출하는 이들, 사고가 나려는 찰나 니키가 양보하지만 레이스 불능 상태가 되고 제임스가 우승을 차지한다. 악연으로 시작된 이들의 인연, 이번엔 니키가 앞서간다. 거액의 돈을 대출받는 수완을 발휘해 단번에 F1 팀에 들어간 것이다. 그곳에서도 차량을 개조해 시간을 엄청나게 단축하는 기적을 선보이며 단번에 팀의 중심이 된다. 제임스 헌트와는 차원이 다른 F1 드라이버 니키 라우다. 


이에 제임스 헌트는 팀에 들어가는 대신 오랫동안 함께 해온 이들과 형의 도움으로 직접 F1에 뛰어든다. 다시 만난 이들, 이제부터 진정한 라이벌의 시작이다. 그야말로 매 레이스에서 엎치락 뒤치락, 다른 이의 접근을 불가하는 그들만의 대접전이다. 그 와중에 병행되는 그들의 삶과 사랑, 모든 면에서 다른 그들은 점차 선의의 경쟁자가 되어 간다. 하지만 영원한 건 없다. 


니키 라우다와 제임스 헌트 모두에게 시련이 찾아온다. 누구나 다 알 만한 대사건을 겪는 니키 라우다. 레이스 도중 일어난 사고로 화상을 입는다. 재기 불능은 고사하고 사는 것조차 알 수 없는 상황, 그는 다시 일어나 라이벌 제임스 헌트와 함께 서킷을 달릴 수 있을까? 한편, 제임스 헌트는 팀도 잃고 사랑도 잃는다. 생각보다 성적이 잘 나오지도 않는다. 드라이버로서 뿐만 아니라 인생에서도 절체절명의 위기에 빠진 제임스, 그는 특유의 대범함과 낙천성으로 난관을 뚫고 다시 일어나 라이벌 니키 라우다와 함께 서킷을 달릴 수 있을까? 


개인적으로 운전면허를 딴 지는 몇 년 되지만 운전을 본격적으로 시작한 지는 몇 개월도 채 되지 않는다. 얼마 전에 처음으로 고속도로를 탔는데, 숨겨져 있던 본능이 나오지 않았나 싶다. 시속 120km까지 달리며 한순간도 긴장이 되지 않았다. 아니, 황홀했다. 계속 생각이 났다. 이들이 왜 매 경기마다 20%에 달하는 죽음의 확률을 알면서도 계속 달리는지 조금은 알겠다는 말이다. 이들이야말로 본능에 충실한, 순수함의 결정체가 아닐까. 죽음에 가장 가까이 갈수록 삶의 절정을 겪을 수 있으니 말이다. 


다분히 남성적인 영화, 그럼에도 즐길 수 있는 영화


영화는 남성 중심적이다. 소재의 특성 상 어쩔 수 없겠지만, 굳이 여성을 등장시켜 남성 F1 드라이버의 삶을 설명하는 수단으로 쓸 필요가 있었을까? 그 점을 집고 넘어가며, 즐길 만한 준비가 되어 있다면 이 영화는 최고 중에 최고다. ⓒ롯데엔터테인먼트



F1이라는 스포츠는 자동차 그중에서도 어마어마한 속도를 자랑하는 차량의 '속도'로 순위를 가리는 종목이니만큼, 여성에겐 매우 힘들기도 하고 자연스레 여성에게서 멀 수밖에 없다. 여담으로, 자그마치 중력의 5배에 달하는 힘을 견뎌야 한다. 남녀 평등에 대해서 논하려는 건 아니다. 영화에서 여성을 남성에 대비되는 요소가 아닌 남성을 설명하는 수단으로 쓰려했다는 점이 걸리는 것이다. 


영화는 다분히 남성적이다. 영화에서 여성은 두 주인공이자 라이벌인 남성 드라이버의 전유물일 뿐이다. 인생관에 따라 다를 텐데, 니키에게는 평생 함께 할 단 한 명의 동반자이자 소유물로서 제임스에게는 때와 장소에 따라 바뀌는 일회용품으로서 존재한다. 물론 그건 남성뿐만 아니라 여성의 입장에서도 마찬가지일 것이다. 다만 이 영화에서는 남성의 입장에서, 그것도 그 남성의 인생관을 대변하는 여러 요인들 중 하나로서 비춰진다. 니키와 제임스의 라이벌 관계를 보여주는 요소말이다. 


이 점을 집고 넘어가며 영화를 즐길 만한 준비가 되어 있다면, 이 영화는 그에 완벽하게 부합할 것이다. 그야말로 인간의 한계를 넘는 기계 일색의 스포츠에서 박진감과 스릴감은 당연하고 인간미까지 넘치는 레이스를 펼칠 수 있는, 또 그걸 볼 수 있는 경우가 얼마나 많겠는가. 그 모습을 완벽하게 구현해낸 1976년 당시를 영화로 완벽하게 구현해낸 게 이 영화 <러시: 더 라이벌>이다. 


기적이 아닌가 싶다. 40년 전 기종은 찾을래야 찾을 수도 없을 텐데, 한두 대도 아닌 수십 대를 눈앞으로 대령해내다니. 고마운 일이 아닌가 싶다. 현장관람은커녕 TV중계로도 보기 어려운 실정에, 현장관람 정도의 현장감을 엿볼 수 있다니. 놀라운 일이 아닌가 싶다. 이토록 영화 같은 이야기가 다큐멘터리 같은 실제 이야기를 담고 있다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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F1, 기적, 남성, 니키 라우다, 라이벌, 러시: 더 라이벌, 본능, 순수, 제임스 헌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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북유럽판 잔혹하고 몽환적인 뱀파이어의 사랑과 성장 이야기<렛 미 인>

오래된 리뷰 2016. 12. 30. 08:00



[오래된 리뷰] <렛 미 인>


하찮게 소모되던 뱀파이어, 와중에 뱀파이어 영화의 신세계를 연 작품이 <렛 미 인>이다. 토마스 알프레드슨 감독의 최고 데뷔작. ⓒ씨네그루 다우기술



1994년 <뱀파이어와의 인터뷰>의 대성공 이후 다양하게 재생산된 뱀파이어. <블레이드> <언더월드> <트와일라잇> 시리즈로 대변되는 액션 판타지의 주인공이 되어 참 많이도 고생했다. 그 중심에는 항상 영원한 삶과 가공할 만한 힘이 있었다. 찬란하게 시작된 현대판 뱀파이어물은 그렇게 하찮게 소모되고 있었던 것이다. 


그 와중에 뱀파이어 영화의 신세계를 연 작품이 있다. 북유럽에서 건너 온 잔혹하고 몽환적인 사랑과 성장 이야기. <팅커 테일러 솔저 스파이>로 격조 높은 스파이 이야기를 선보였던 토마스 알프레드슨 감독의 2008년 작 <렛 미 인>이다. 이 영화는 자그마치 그의 장편 영화 데뷔작이다. 데뷔와 동시에 최고의 감독으로 칭송받는다. 


스웨덴 출신의 감독이, 스웨덴을 배경으로, 정녕 스웨덴스럽게 연출해 낸 <렛 미 인>. 우리가 생각하는 북유럽 스웨덴 그 자체에, 그동안의 액션 판타지 마사지 때문에 우리가 생각하기 어려운 풍의 뱀파이어 이야기를 완벽히 입혔다. 하얀 설국과 빨간 피의 대비는 잊지 못할 최고의 조화다. 그 자체로 하나의 완벽한 미장셴. 영화를 그 미장셴으로만 보아도, 그 미장셴으로만 기억해도 충분할 정도이다. 


그 미장셴은 장면으로만 남지 않는 바, 영화를 관통하는 상징과 메시지 중 하나를 말하는 매개체이다. 하얀색은 무엇이고, 빨간색은 무엇일까. 아무래도 영화의 두 주인공인 인간 오스칼과 뱀파이어 이엘리를 상징할 텐데, 감독은 그들에게서 어떤 이야기를 끄집어냈을까. 우린 그 이야기에서 세상의 어떤 모습을 반추할 수 있을까. 


괴롭힘을 당하는 아이, 그에게 접근하는 뱀파이어


'돼지'라 불리며 괴롭힘을 당하는 12살 오스칼, 그에게 접근하는 12살 모습의 뱀파이어 이엘리. 그들은 어떤 모습을 보여줄까. ⓒ씨네그루 다우기술



12살 오스칼은 학교에서 '돼지'라고 불리며 괴롭힘을 당한다. 그는 집에 와서는 칼로 집 앞 나무에 해코지하며 자신을 괴롭히는 일당을 죽이는 꿈을 꾼다. 오스칼은 엄마와 단 둘이 사는데, 동성애자 아빠를 더 좋아한다. 그는 참으로 힘도 없고 의욕도 없는 무기력한 아이다. 그의 금발과 새하얀 피부가 잘 어울린다.


한편 12살 이엘리는 아버지처럼 보이는 이의 보살핌으로 살아간다. 그 보살핌이란 다름 아닌 어린 아이를 죽여 뽑아낸 피를 먹이는 것. 그녀가 뱀파이어이기 때문이다. 자신이 직접 사냥에 나서면 위험하기 때문에 누군가 대신해줄 필요가 있는 것 같은데, 그렇다면 아버지처럼 보이는 이는 뱀파이어가 아니라는 얘기. 그는 인간인 듯 보인다. 아버지는 아닌 것 같다. 그들은 어떤 관계일까? 


우연히 만난 오스칼과 이엘리, 하필이면 오스칼이 칼을 들고 나무를 해코지할 때다. 그 모습을 보고 이에리가 한 생각은, '이제부터 이 아이가 나를 먹여 살릴 것이다'. 반면 오스칼은 이엘리를 좋아하게 된다. 아버지처럼 보이는 이는 이엘리를 12세 때 만나 수십 년 동안 사랑하며 함께 해왔던 것. 오스칼이 그를 대신할 재목이다. 


이보다 아름답고 숭고한 사랑이 어디 있을까


영화는 두 주인공인 오스칼도 이엘리도 아닌 이엘리를 수십 년 동안 사랑해왔던 한 남자의 이야기이기도 하다. '렛 미 인(Let me in)', 들어가게 해줘. 이엘리의 사랑 방식이자, 이엘리를 사랑하는 방식이다. 살기 위해 어쩔 수 없이 사람을 죽여야 하는 그녀의 입장이 되어, 대신 사람을 죽여 피를 가져오는 극단적 사랑. 


이 기괴하고 잔혹한 사랑은 언젠가 반드시 파멸로 끝맺음을 낼 것이다. 이엘리의 전 사람도 그럴 것이고, 오스칼도 그러지 않을까. 그렇지만 '아름답다'고 하지 않을 도리가 없다. 이보다 더 '숭고'한 사랑이 어디 있을까. 자신의 모든 것을 바쳐 사랑한다는 건 이런 게 아닐까. 


그는 단순히 그 자신으로서 사람을 죽여 피를 가져오는 게 아니다. 그가 아닌 다른 이가 되어, 즉 이엘리가 되어 살기 위해 어쩔 수 없이 사람을 죽여 피를 가져오는 것이다. 모든 것에 앞서 자신을 버린 '희생'으로서의 사랑이다. 사랑이라는 이름이 붙여진 것 중 가장 높은 경지의, 가장 하기 힘든, 비인간적이기까지 한 사랑의 방식이 희생 아닌가. 아마 그의 마지막은 이엘리에게 자신을 바치는 것이리라. 


약한 이의 본능을 깨우는, 다른 사랑 방식


숭고하고 아름다운 희생으로의 사랑과는 다르게, 오스칼과 이엘리의 사랑은 뭔가 다르다. 오스칼의 본능을 이용한 '계약' 같다고 할까. ⓒ씨네그루 다우기술



오스칼과 이엘리, 이엘리와 오스칼. 그들은 곧 사귄다. 하지만 오스칼이 이엘리의 정체를 알아차린다. 이엘리를 멀리 하는 오스칼, 상처 받는 이엘리. 뱀파이어다운 극단적 행동으로 오스칼의 본능을 자극해 더욱 가까워지는 그들. 이엘리는 이때다 싶어, 예의 그 '렛 미 인'을 시도한다. 교감을 마친 그들, 그들은 곧 하나다. 


이엘리와 이엘리의 전 남자의 렛 미 인 교감이 오랜 시간의 '사랑'이라면, 이엘리와 오스칼의 교감은 사랑 이전에 오스칼의 본능을 깨우는 것으로 시작된다. 무기력하기 짝이 없지만 반대급부로 살인의 욕망이 엄청난 오스칼의 본능을 이엘리가 교감을 통해 이끌어 낸 것이다. 난 살기 위해 어쩔 수 없이 사람을 죽여, 너에겐 그들을 죽이고 싶은 마음이 있지, 나를 대신해 그들을 죽이면 되겠네. 


여기서 하얀색과 빨간색의 극명하고 아름다운 대비가 떠오른다. 아무것도 없는 흰색의 오스칼에게 욕망으로 가득 찬 빨간색의 이엘리가 들어온 것이다. 어느 날 그를 괴롭히는 패거리의 수장을 다짜고짜 막대기로 때려 고막을 파열시키는 오스칼, 그러고 나서 히죽히죽 웃는 그의 모습에서 미래가 보인다. 이엘리를 위해서인지 자신의 본능에 의해서인지 둘 다인지 알 수 없는 걸로 사람을 죽여 피를 뽑아 이엘리를 먹여 살리는 그의 모습을. 


'사랑'이라 할 수 있을까. 아니, 일종의 '계약'처럼 보인다. 내 안에 있는 거대한 욕망 덩어리를 끄집어내게 해주면서 양심의 가책도 줄여주는 대신, 너를 내 평생 책임지고 먹여 살리겠다. 누군가는 '결혼'을 그런 식으로 생각할지 모르겠다. 그 또한 사랑의 또 다른 모습일까. 무조건 아니라고 할 수 없는, 한 번쯤 생각하게 한다. 그건 내가 이상한 걸까, 이 세상이 그렇게 만든 걸까, 자연스러운 걸까. 


'성장'하는 오스칼과 '소수·소외'의 상징 이엘리 


영화에서 오스칼은 '성장'한다. 본능을 깨우고 세상을 알아간다. 이엘리는 성장과 거리가 멀다. 그녀는 겉모습과는 달리 이미 늙을 대로 늙은듯. 다만, 그녀는 세상과 절대 어울릴 수 없는 '소수 소외'의 상징이다. ⓒ씨네그루 다우기술


이엘리는 겉모습은 12살이지만 이미 엄청나게 오래 살았다. 그녀에게 '성장'이란 단어는 어울리지 않는다. 반면, 오스칼에게 '성장'은 당면한 현실이자 반드시라고 할 만큼 치러야 할 대상이다. 그는 이엘리를 만나 단번에 너무도 큰 성장을 한 것 같다. '힘'이자 '권력'의 달콤함, 양육강식의 세계를 알아버린 것. 


남에게 괴롭힘을 당하며 아래에서 굽신굽신대다가 한순간에 남 위에 군림하는 그 희열을 안 것이다. 누구는 평생 가도 하지 못하는 걸 그는 어릴 때 한순간에 알아버렸다. 그가 한없이 가여워지는 순간이다. 


한편, 영화를 보는 내내 이엘리가 가엽고 불쌍했다. 어불성설처럼 보일지 모르지만, 그녀는 정녕 이 시대 '소수·소외 계층'의 상징과도 같지 않은가. 이 세상에 자신을 알아줄 이 하나 없고, 자신에게 관심을 가져주는 이 하나 없다. 또한 다른 누구의 도움 없이는 먹고 살아가기 힘든 '취약 계층'의 상징과도 같다. 자신이 직접 먹고 살아가기엔 이 세상이 너무 위험(?)하다. 


그 이유는 그녀가 다르기 때문. 그녀는 단지(?) '사람의 피'를 원하는 것 뿐이다. 다른 무엇도 바라지 않는다. 그녀는 피를 마시지 않으면 죽지도 못한 채 영원히 고통 속에서 살아갈 것이다. 하지만 과연 세상이 용인할까? 물론 그 '다름'의 성질이 너무도 괴이쩍긴 하지만, 용인하지 '못하는' 게 아니라 '안하는' 것만은 확실하다. 


만약 신인류가 나타났다고 치자. 그것이 세상을 파멸로 이끌 수도 있는 능력을 가졌다고 치자. 물론 그건 능력의 유무이고 반드시 한다는 게 아니다. 뱀파이어가 사람을 죽일 능력을 가진 것과, 살기 위해 사람을 죽여 피를 마시는 것과는 별개인 것처럼 말이다. 우린 어떻게 할까? 세상은? 아마 무슨 짓을 써서라도 없애버리고자 할 것이다. 그것이 우리와 다른 이질적인 존재이기 때문에. 


서로가 서로를 인정하고 그렇게 조화로운 세상으로 나아가는 건 꿈에서나 가능한 말일까. 너무도 당연하고, 식상하지만 이렇게 또다시 말하지 않을 수 없다. 계속 말해도 세상은 바뀌지 않으니까. 세상이 바뀔 때까지 말하고 또 말할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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렛 미 인, 뱀파이어, 본능, 빨간색, 사랑, 성장, 스웨덴, 하얀색, 희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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