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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래된 리뷰

절체절명의 순간, 나라면 어떻게 할 것인가? 영화 <포스 마쥬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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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래된 리뷰] <포스 마쥬어: 화이트 베케이션>


영화 <포스 마쥬어: 화이트 베케이션> 포스터. ⓒ블룸즈베리리소시스



살아가면서 자주 입에 담는 말이 있다. '어쩔 수 없었다', 사람의 힘에 의해선 도무지 어찌 해볼 수 없는 불가항력을 말한다. 서양에서는 'Force Majeure'라고도 하고 'Act of God'이라고도 한다. 신의 영역에 있는 걸 당연히 사람이 할 순 없을 테다. 그래서 '어쩔 수 없었다'는 참으로 무책임한 변명이지만 무책임이 전제가 되는 말이다. 


영화 <더 스퀘어>로 제70회 칸 영화제 황금종려상을 수상하며 한국에도 개봉되는 등 큰 화제를 낳은 스웨덴 감독 루벤 외스틀룬드의 2014년도 작품 <포스 마쥬어: 화이트 베케이션>은 제목에서도 유추해볼 수 있듯이 불가항력에 대한 이야기를 다루었다. 불가항력에 대한 궤변 또는 변명을 진지하게 들을 수 있다.

 

더불어 영화에서 불가항력의 주인공이 한 가정의 가장이자 남편이자 아빠인 성인 어른 남자이기에, '본능'에 대한 성찰뿐만 아니라 '남성'과 '가장'에 대한 진지한 생각 또한 엿볼 수 있다. 이 영화를 보면 반드시 이런 생각을 하게 될 것이다. '과연 내가 그 상황이었다면 어떻게 했을까?' 


가족들을 내팽겨 치고 혼자 도망친 가장


영화 <포스 마쥬어: 화이트 베케이션>의 한 장면. ⓒ블룸즈베리리소시스



아빠, 엄마, 큰딸, 작은아들의 너무나 전형적이고 이상적인 가족이 있다. 바쁜 가장 아빠 토마스가 오랜만에 시간을 내 스키장으로 가족휴가를 왔다. 참으로 단란하고 사이좋아 보인다. 서로 챙기는 모습이 보기 좋다. 부디 아무 탈 없이 무사히 휴가를 마치고 갔으면 하는 바람이 들 정도이다. 


휴가 첫째 날 점심시간, 눈 쌓인 산등성이 경치를 구경하는 곳에서 식사를 하고 있다. 갑자기 산등성이에서 큰소리가 난다. 그러곤 눈덩이들이 덮칠 듯 내려온다. 산사태가 난 듯하지만, 토마스는 스키장에서 일부러 만든 거라고 하며 아무렇지 않다. 근데 그렇지가 않아 보인다. 무지막지한 눈 폭풍이 그들의 식사 자리를 덮치려 한다. 


엄마 에바와 아이들은 어쩌지 못하고 있는 반면 토마스는 덮치기 직전까지 괜찮다고만 한다. 급기야 눈 폭풍이 그들을 덮칠 때, 토마스는 가족들을 내팽겨 치고 혼자 도망친다. 에바는 아이들을 끌어 앉은 채 그 자리에 있었다. 다행히 다친 사람 없이 다시 자리에 앉아 식사를 잘 끝마친 가족. 하지만 그 '사건'이 있은 후 '당연하게도' 가족 간의 뭔지 모를 균열이 생긴다.

 

아이들은 부모를 피하고, 에바는 화가 난 듯하다. 당일 저녁 시간, 에바 친구를 만난 자리에서 점심시간 때 있었던 일을 말할 때 에바와 토마스는 다른 의견을 말한다. 에바는 토마스가 너무 겁먹어서 가족들을 두고 혼자 도망갔다고 말하고 토마스는 그런 적이 없다고 말한다. 둘째 날 토마스의 친구와의 저녁 시간 때도 마찬가지다. 토마스는 어째서 그랬을까. 에바는 토마스를 용서할 수 없을까. 


남성과 가장 아닌 이성과 본능


영화 <포스 마쥬어: 화이트 베케이션>의 한 장면. ⓒ블룸즈베리리소시스



<포스 마쥬어: 화이트 베케이션> 하나만으로도 루벤 외스틀룬드 감독은 충분히 블랙 코미디의 대가로 불릴 만하다. 한편, 이 영화를 앞뒤로 그가 내놓은 작품들을 일별하면 현대인의 위선을 엿볼 수 있다. 바쁘게 일하며 가족을 책임지던 한 남자와 단란했던 한 가족이 사건 하나로 무너져내려버리는 비극을 겪는데, 그 과정의 면면들에서 터져 나오는 웃음이 ‘코미디’적이면서 현대인이라면 누구나 겪을 만한 점이라는 데에서 ‘블랙’적이다. 


조남주 작가의 <가출>이라는 단편소설은 가장인 아버지가 가출하면서 시작된다. 소설은 그 이후의 내용을 그린다. 가부장 신화가 무너진 이후 가장 부재 가족의 단상을 비유적이지만 직설적으로 보여준다. 왜 그랬는지는 모르지만 아버지는 가족에서 가장으로서의 역할을 내팽겨 치고 도망친 것이다. 초점은 도망의 이유와 과정이 아닌 도망 이후이다. 


이 영화는 불가항력이라는 본능을 맨 앞에 두기 때문이기도 하지만 가족과 가장을 들여다보는 데 의의를 가지려 하기에 도망친 가장, 다름 아닌 그 가장의 도망 이유와 과정에 초점을 둔다. 그는 왜 도망쳤는가, 어떻게 도망을 칠 수가 있는가. 


가족 구성원들 간에는 통념상의 역할이 있다. 언젠가 어머니께서 말씀하셨듯이 ‘부모와 자식은 천륜 관계이다. 고로 부모와 자식은 뗄 수 없고 부모는 자식을 지키고 기를 의무가 있다.’고 말이다. 절체절명의(또는 이라고 판단된) 순간, 에바는 자식들을 지켰고 토마스는 도망쳐버렸다. 토마스는 이 가족 내에서 부모 중 아버지이자 남편이라는 역할에 충실하지 못했다. 


영화는 토마스, 에바 부부와 이틀 동안의 저녁시간을 갖는 매츠, 패니 부부 중 매츠의 주장에 꽤 힘을 실어주는 듯하며 시선을 ‘아버지’ ‘남편’ 아닌 ‘가장’과 이 또한 통념상으로 가장의 역할을 부여받은 ‘남성’으로 옮기곤 한다. 그건 두 전혀 다른 질문으로 지금 이 시대를 관통하고자 하는 것일 수 있다. 


‘가장은 꼭 남성이어야만 하는가?’ 이 질문은 자못 진지하지만 이 상황에서는 그 자체로 역할론에서 차별론으로 논점을 흐리고자 하는 물타기용 궤변에 다름 아니다. ‘어떻게 가장이 그럴 수 있는가?’ 엄마와 아내로서 자신의 역할을 다한 에바와 다르게 아무것도 하지 못한 토마스에게 알맞은 질문이다. 


가족이라는 환상과 본능이라는 이름의 위선


영화 <포스 마쥬어: 화이트 베케이션>의 한 장면. ⓒ블룸즈베리리소시스



질문에서 ‘어떻게’에 보다 초점을 맞춰보자. 어떻게 가족을 내팽겨 치고 도망을 칠 수 있는가. 영화는 ‘충분히 그럴 수 있다’고 말하는 것 같다. 자연재해라는 불가항력 상황에서 생존 본능에 충실해 앞뒤 가릴 것 없이 도망치는 것 또한 불가항력이라고 말이다. 가장이라는 사회 가정적 역할이 주는 ‘이성’보다 나약한 인간의 몸을 장악한 ‘본능’이 우선할 수 있다는 것이다. 


그런 한편 영화는 또 다른 ‘본능’을 보여주기도 한다. 아이를 지키고자 자신을 내던진 엄마 에바의 모성 본능 말이다. 하지만 모성 본능이란, 모성애란, 본능 아닌 ‘이성’에 가깝다. 모성애 어린 엄마야말로 사회 가정적으로 부여된 역할의 하나가 아닌가. 이성보다 본능이 우선할 수 있지만 그것이 전제 사항은 될 수 없으며 면책 사항도 될 수 없는 것이다. 


현대사회 가족, 하자가 없어 보이는 가족은 사실 사상누각이다. 속절없이 무너져 내릴 수 있는 요소들이 도처에 있다. 사람과 다름없이, 거기엔 이성이라는 이름의 모습과 본능이라는 이름의 모습이 두루두루 있다. 절대적으로 이성, 본능 모두 장악할 필요가 있다. 


영화는 주어진 가정 사회적 역할을 한 명이라도 제대로 수행하지 못했을 때 오는 파국의 씁쓸한 뒷맛을 적나라하게 보여준다. 그중에서도 본능의 단면을 자연재해라는 변명 충만한 불가항력 요소로 치장해 보여줌으로써, ‘가족’이라는 환상을 부숴버리고 ‘본능’이라는 이름의 위선을 까발리는 것이다. 


우리는 이 영화를 보며 경악하고 분노하고 어이없어하고 씁쓸해하며 한편 이해하고 헛웃음 내지 박장대소를 내보일 것이다. 하지만 종내 그, 그녀, 그들에 나를 대입하면 절대 웃을 수 없는 건 물론이거니와 끔찍해질 것이다. 거기엔 당연한 이성도, 당연한 본능도 없다. 그건 환상에 지나지 않을 수 있다. 무엇보다 나만 생각하게 되는 당연한 위선이 자리를 대신할 수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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