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冊으로 策하다. 책으로 일을 꾸미거나 꾀하다. 책으로 세상을 바꿔 보겠습니다. singenv@naver.com Since 2013.4.16 https://linktr.ee/singenv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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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희대의 살인범 커플 보니와 클라이드를 잡는 '인간사냥꾼' <하이웨이맨> 2019.04.24
  • 한국현대사에서 철저히 배제된 주변부 이야기 <민주주의 잔혹사> 2017.05.2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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희대의 살인범 커플 보니와 클라이드를 잡는 '인간사냥꾼' <하이웨이맨>

넷플릭스 오리지널 2019. 4. 24. 08:0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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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넷플릭스 오리지널 리뷰] <하이웨이맨>


영화 <하이웨이맨> 포스터. ⓒ넷플릭스



보니와 클라이드, 대공황과 금주법의 시대인 1930년대 초 미국에서 '활약'한 연쇄강도 및 살인범 커플이다. 1932년 초부터 1934년 중반까지 12명을 죽였다고 하는데, 이 희대의 살인범 커플이 유명한 건 희망도 미래도 없는 당대에 맞섰다고 알려졌기 때문이다. 암울했던 당대를 향한 적대심이 하늘을 찌를 듯한 상황에서 그들의 파란만장한 삶이 대리만족의 개념으로 다가왔을 수도 있겠다. 


이들의 짧지만 굵은 이야기는 훗날 수없이 많은 콘텐츠에서 소재로 사용되었다. 영화, 드라마, 음악 심지어 비디오게임까지, 그중에 이들의 실화를 바탕으로 한 1967년 영화 <우리에게 내일은 없다>가 가장 유명할 것이다. 일명 '아메리칸 뉴시네마'의 선구자적 존재로, 이후 영화에서 섹스와 폭력의 노출이 전에 없이 용인되기에 이르렀다. 할리우드의 새로운 장을 연 영화이다. 


보니와 클라이드에 관한 또 다른 영화가 우리를 찾아왔다. 넷플릭스 오리지널 <하이웨이맨>으로, <블라인드 사이드> <세이빙 MR. 뱅크스> <파운더> 등으로 나름의 탄탄한 이야기를 선보여왔던 존 리 행콕 감독의 신작인 이 영화는 보니와 클라이드를 쫓았던 텍사스 레인저 출신의 프랭크 해머와 매니 골트의 이야기를 다룬다. 주체가 범죄자 아닌 범죄자를 쫓는 사람들인 것이다. 


보니와 클라이드, 해머와 골트


보니와 클라이드 아닌, 텍사스 레인저 출신 해머와 골트. 영화 <하이웨이맨>의 한 장면. ⓒ넷플릭스



1934년 미국 텍사스 이스텀 교도소 농장, 보니와 클라이드는 수감자 몇 명의 탈옥을 돕는다. 여론은 교도소에 부정적이게 되었고, 텍사스주 당국은 곧바로 반응한다. 지난 2년 동안 잡을 수 없었던 악랄한 살인자들을 잡기 위해, 해체된 '인간사냥꾼' 텍사스 레인저 역대 최고라 일컫는 프랭크 해머(케빈 코스트너 분)를 불러들이는 것이었다. 공식 직책 '고속도로 순찰대원' 즉 하이웨이맨으로 수락한다. 그는 곧 역시 전 텍사스 레인저 매니 골트(우디 해럴슨 분)와 접촉해 함께 행동한다. 


이젠 과거의 명성에 비할 수 없는 실력을 가진 해머와 골트, 정식 파견된 젊은 FBI에게 무시당하고 보니와 클라이드를 눈앞에서 높치는 등 안팎으로 설 자리가 없는 듯하다. 와중에 보니와 클라이드는 경관을 살해하는 만행을 저지른다. 이후 여전히 그들을 신성시하는 이들은 많았으나 여론은 상당히 그들에게 등을 돌리게 된다. 이 하이웨이맨들에게 힘이 실린 것이다. 


해머는 그들의 여정을 연구하여 함정을 파고는 추적대를 결성해 기다린다. 아니나 다를까 오래지 않아 함정으로 오게된 보니와 클라이드, 추적대는 그들을 향해 백 수십 발의 총을 난사한다. 보니와 클라이드는 그 자리에서 죽어, 2년에 걸친 범죄 행각은 처참하게 막을 내린다. 수많은 사람들에 둘러싸인 보니와 클라이드의 시체, 아무도 알지 못하는 해머와 골트가 대조를 이룬다. 


시대 조류를 막기 위해 소환된 구시대 유물


정부는 보니와 클라이드를 잡기 위해 구시대 유물 소환을 결정한다. 영화 <하이웨이맨>의 한 장면. ⓒ넷플릭스



영화는 보니와 클라이드 실화를 그대로 가져왔다. 다만, 주지했듯 주체가 보니와 클라이드 아닌 해머와 골트인 게 특이점이다. 그들에 대해 수없이 많은 콘텐츠가 선보여 왔지만, 일찍이 그들을 죽인 추적대를 다룬 적은 없었다. 사람들이 열광했던 건 보니와 클라이드였지, 그들을 죽인 해머와 골트는 아니었다. 


19세기 말까지 텍사스를 위시한 미국 서부는 일명 '서부 개척 시대'로 '무법 시대'와 다름 아니었다. 이 시기 무법자들을 추적해 사살하는 '인간사냥꾼'이 바로 텍사스 레인저였다. 해머와 골트는 그 시대를 대표하는 이들로 최강의 살상력을 자랑했다. 하지만 서부 개척이 끝나고 미국은 서부에도 이성과 법을 들인다. 텍사스 레인저는 자연스레 해체 수순을 밟아야 했던 것이다. 


보니와 클라이드가 최고의 인기를 구사하며 당대 누구보다 막강한 명성을 떨친 1934년 현재에서, '인간사냥꾼' 카우보이 텍사스 레인저는 지나간 구시대의 유물과 다름 아니었던 것이다. 이에 반해 보니와 클라이드는 금주법과 대공황으로 불안하고 불만 있고 대다수를 대변하는 현시대의 상징과도 같았다. 비록 그 방법은 살인이었지만 '서민을 털고 죽이는' 은행만 턴다는 로빈 후드적 신화를 밑바탕으로, 시대의 조류였다. 


당국은 통제하지 못할 시대의 조류를 막기 위해 구시대의 유물을 소환한 격이다. 구시대의 유물, 즉 '보수'는 제 몫을 해내고 '진보'는 그 자리에서 멈추고 만다. 보니와 클라이드를 진보로 해머와 골트를 보수로 보는 건 매우 단편적이고 거친 비유이지만, 그렇다고 틀렸다고 생각하진 않는다. 당국은 해체된 텍사스 레인저를 소환해선 안 되었었다. 


철학적 질문을 던지지 못한 아쉬움


<하이웨이맨>의 미덕은 보니와 클라이드 실화에서 보니와 클라이드 아닌 해머와 골트를 주인공으로 내세웠다는 정도에서 그칠 공산이 크다. 사실 해머와 골트라는 특수한 캐릭터를 가지고 특수한 의미를 도출해내지 못했다. 한국 영화 <살인의 추억>처럼 신구 캐릭터의 대립과 조화에도 불구하고 당대 공권력의 구멍을 신랄하게 까발리지도 못했고, 미국 영화 <노인을 위한 나라는 없다>처럼 항상 한 발 늦는 노인 보안관 벨과 영화 곳곳에 나오는 노인들을 통해 운명에 대한 철학적 질문을 복잡다단하게 숨기면서 드러내지도 못했다. 


해머와 골트처럼, 실제로도 최고의 자리(아카데미 수상)와 최악의 자리(골든 라즈베리 수상)를 오간 적이 있는 케빈 코스트너와 우디 해럴슨의 연기를 보는 것만으로도 감개가 무량하긴 하다. 60대 중반과 50대 말에 위치한 그들의 나이를 감안할 때, 현재로서는 한창이지만 연기한 85년 전 1934년 당시로선 완전히 '가버린' 세대였을 것이다. 


그런 면에서 영화는 그들의 가버린 신체 능력에도 불구하고 경험에 의한 뛰어난 감과 신념을 부각시키고자 한 듯하다. 종종 터져 나오는 자신들에 대한 실망과 함께. 하지만 그조차 두드러지게 부각되지 못한 채, 전체적으로 이도저도 아닌 느낌을 받을 수밖에 없게 구성되었다. <노인을 위한 나라는 없다>가 운명론적으로 철학적 질문을 던진 것처럼, 이 영화는 충분히 존재론적으로 철학적 질문을 던질 수 있었을 텐데 하는 아쉬움을 남는다. 훨씬 훌륭한 영화가 될 수 있었을 것이다. 


지금 우린 어떤 시대를 살고 있을까. 1934년 미국이 대공황으로 크게 휘청일 때 금주법으로 역행하고 살인을 살인으로 막는 인간사냥꾼을 고용하며 역행했듯, 이해하지도 수긍할 수도 함께 할 수도 없는 방법으로 시대를 역행하려는 이들이 많은 것 같다. 그들은 비단 오래전부터 살아왔던 신체적으로 '노(老)'한 이들만은 아니다. 그렇다고 비주류한 이들만도 아니다. 하찮은 과거의 영광을 되살려 자신만의 영위를 이어나가려는 이들일 것이다. 그로 인해 다른 누군가가 피해를 보는 건 안중에도 없을 것이다. 지금은 어떤 시대가 아니고 그런 시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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구시대, 넷플릭스, 노인, 보니와 글라이드, 살인, 철학, 텍사스 레인저, 하이웨이맨, 해머와 골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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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국현대사에서 철저히 배제된 주변부 이야기 <민주주의 잔혹사>

신작 열전/신작 도서 2017. 5. 22. 08:0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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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서평] <민주주의 잔혹사>


<민주주의 잔혹사> 표지 ⓒ창비



대학 시절, 1학년 때는 영문과였다. 당시 교육정책으로 1학년 때는 과를 고를 수 없었기에 임의로 그렇게 된 거였다. 2학년 때 비로소 과를 고를 수 있었다. 나는 중문과를 지원했다. 지원동기는 지금 생각하면 매우 황당하기 그지 없다. 중국의 황제가 그 이유였다. 황제라는 궁극의 존재가 멋져보였던 거다. 


사실 중학교 때부터 역사를 좋아했다. 역사상 수많은 나라의 흥망성쇠와 수많은 위인들의 분골쇄신이 내 마음을 사로 잡았다. 지금에야 깨닫고 있지만, 그건 완전히 '잘못된' 시선이다. 그저 알려진, 승리한, 주류의 이야기들만으로 역사를 좋아하고 잘 안다고 설치는 꼴인 것이다. 지금에라도 알았으니 다행이라고 해야 할까. 


그런 면에서 대학교 2학년 때 들었던 교양 수업이 큰 충격으로 남아 있다. 교수님은 우리에게 한국근현대사 비주류의 역사를 알려주셨다. 김산의 <아리랑>를 숙제로 내주셨는데, 그 책이 남긴 여운은 아마 평생 갈 것 같다. 그리고 이제 또 다른 곳을 보려 한다. 역사에서 배제된 주변부의 이야기라고 할 수 있겠다. 홍석률 교수의 <민주주의 잔혹사>(창비)라는 책을 통해서다. 


이 책으로 한국현대사의 그늘에 가려지고 서술에서 가려진 8개의 이야기를 들여다볼 수 있다. 저자는 평범한 사람들도 역사를 형성해가는 데 참여하고 기여하고 있다는 것을 확인하고, 자신과 주변을 돌아보는 데 도움이 되기를 희망한다고 했다. 이 책 하나로 완전한 인식의 전환을 이룰 순 없었지만, 또 한 번의 큰 충격으로 남아 있을 것 같다. 주류와 비주류 도식을 넘어선, 배제와 그늘의 차원. 차별 말고 그곳을 주목하자. 


완벽히 가려진, 삼청교육대 박영두 사건


이 책에서 다루는 사건들은 워낙 잘 알려졌는지라 큰 의식 없이 지나치기 일쑤였다. 5.16쿠데타나 푸에블로호 나포 사건은 그저 박정희가 일으킨 군사 정변과 북한이 저지른 미국 군함 나포로 알려져 있다. 그러나 저자는 이 사건에서 각각 5.16쿠데타를 일으킨 군인들이 주류가 아닌 주변부 군인이었으며, 푸에블로호 나포 사건 때 국제관계 면에서 한국이 주변부였다는 점을 부각시킨다. 흥미롭지만 이쯤에서 지나가자. 


저자의 보다 흥미로운 시선이 엿보이는 사건이 있다. 이는 보다 더 가려진 사건이라는 것이다. 삼청교육대다. 전두환이 정권을 잡은 후 사회정화 운동을 추진하며 불량배 소탕계획을 실시해 6만 여명의 사람들을 마구잡이로 잡아갔다. 그 와중에 잡혀온 이 중에 박영두라는 이가 있었는데, 장기화된 구금과 황당하기 그지 없는 보호감호 처분, 그리고 비인간적인 처우에 분노가 임계점을 넘었다. 


그는 저항했고 진압되었으며 교도소에 갇혔다. 어느 날 그는 몸이 아픈데도 의무과에 데려다 주지 않자 항의했지만 받아들여지지 않고 외려 끌려나와 가혹행위를 당한다. 그러곤 얼마 가지 않아 죽었다. 2000년대 들어 삼청교육대 피해보상이 실시되고, 박영두는 민주화운동 공로를 인정받았다. 


이에 저자는 삼청교육대에 끌려간 절대다수 빈민들과 민주화운동의 절대다수 엘리트 학생들을 비교하며, 민주화운동의 두 중요 축이었던 학생과 빈민 사이에 존재하는 격차를 도출한다. 바로 앞 장에서 다뤘던 '박종철고문치사사건'이 가져온 거대한 영향력에 비추어볼 때, 아무도 관심을 가지지 않고 아무런 영향력도 발휘하지 못한 빈민들의 항쟁을 끄집어냈다 하겠다. 


가장 생각하기 힘든 부분이었기에 신선하게 다가왔고, 가장 가려진 부분이었기에 충격적으로 다가왔다. 내가 신봉해 마지 않았던 '국가' '황제' '위인' 등의 흥망성쇠는 역사에서 분명 이보다 훨씬 큰 물줄기이겠지만, 정녕 나와 우리와는 아무런 상관이 없겠구나 당시에 살았어도 마찬가지였겠구나 하는 생각을 하게 만든다. 역사를 대하는 완전히 새로운 시각을 선사한다. <모래시계> 따위의 소재로 쓰일 삼청교육대가 말이다. 


여성과 노인의 배제와 그늘, 동일방직 사건과 4월혁명


여성과 노인은 상대적으로 생각하기 쉬운 부분들이다. 배제와 그늘의 한가운데에 자리하고 있기 때문이다. 그런 면에선, 앞에 소개한 삼청교육대의 박영두보다는 많은 스포트라이트를 받는 '주류'에 가깝다고 할 수 있겠지만 이런 생각이야말로 넌센스가 아니고 무엇이겠는가. 저자는 이에 동일방직 사건과 4월혁명을 들여다보았다. 


저자는 한국의 여성노동자들이야말로 1970년대 수출주도형 경제성장 과정에서 가장 중요한 역할을 한 이들이지만 가장 형편없는 대접과 보상을 받았고 또 역사 서술에서 소홀하게 취급받았고 여전히 취급받고 있는 존재들이라고 말한다. 동일방직 사건은 그 상징과도 같다. 그곳에서 여성 지부장이 탄생하는데, 다음 대의원대회에서 반대파들이 일방적으로 남성 지부장을 뽑아버린다. 이에 여성노동자들이 농성을 전개한다. 


나체시위까지 갔는데, 어찌 합의를 보고 몇 년이 흐른다. 다음 대의원대회에서 반대파들은 험악해진다. 급기야 노조활동에 열성적인 여성노동자들에게 똥물 테러를 가한다. 그들의 상급기관인 한국노총 섬유노조는 여성 지부장 반대파였다. 저자는 이 테러를 단순히 국가권력에 의한 노조 탄압이라고 보지 않고 세상의 중심에 진입해가는 여성노동자들에게 느낀 남성노동자들의 두려움과 열등감의 표출로 보았다.


그런가 하면, 4월혁명의 '할아버지 시위'와 '할머니 시위'도 있다. 할머니들이 들고 있는 플래카드에는 "죽은 학생 책임지고 리대통령 물러가라"라는 과감한 구호가 적혀 있었다니, 60여 년이 흐른 지금으로선 상상하기 힘든 모습이다. 누가 역사는 진보한다고 했던가? 더군다나 그들이 행한 시위의 날짜는 이승만 퇴진 하루 이틀 전이다. 젊은 세대가 일으켰다고 알고 있는 4월혁명의 완전히 새로운 모습이다. 


물론 대내외적으로는 4월 25일 대학교수들의 시국선언문 발표와 시위가 이승만 퇴진의 직접적인 발화선이 되었다. 그럼에도 저자가 할아버지·할머니 시위를 특별하게 보는 이유는 그들이 한참 전인 4월 11일 2차 마산항쟁 때부터 이미 이승만 퇴진 구호를 외쳤다는 사실 때문이다. 그때부터 여론을 자생적으로 형성했다고 본다. 야당도 엘리트 계층도 아닌 밑바닥 주변부의 사람들이 분위기를 저변에서 형성했던 것이다. 


그렇지만 주변부 사람들은 그 역량에 비해 제대로 평가받기는커녕 관심조차 끌지 못하고 기록·기억되지 못하며 가려지고 지워지기 일쑤이다. 그건 참으로 '바보' 같은 짓이다. 그 역량의 가능성을 차단하고 소진시켜 버리기 때문이다. 곧 역사 발전의 가능성까지도 차단하고 제약하는 것이겠다. 


주변부 사람들은 '대다수'이다. 즉, 우리들 말이다. 우린 알지 않은가. 혁명이 우리들 손으로 이루어졌다는 걸, 이루어지고 있다는 걸 말이다. 그렇지만 역사가 과연 우리를 알아줄 것인가? 다룰 것인가? 거기에서도 주변부는 배제되고 지워질 뿐이다. 우리가 가려진 이름들을 되새기고 계속 끌어올려야 하는 이유가 여기에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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4월혁명, 노인, 동일방직 사건, 민주주의 잔혹사, 삼청교육대, 여성, 주변부, 한국현대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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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랑, 인간, 문학이라는 가깝지만 먼 개체들의 소용돌이 <은교>

지나간 책 다시읽기 2016. 10. 19. 08:0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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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나간 책 다시 읽기] 박범신<은교>


소설 <은교> 표지 ⓒ문학동네



소녀는 데크의 의자에 앉은 채 잠들어 있었다. 이적요 시인은 소녀에게 낯선 감정을 느낀다. 그건 저돌적이기 그지 없는 '욕망'. 그는 우주의 비밀을 본 것 같다고 말한다. 소녀의 이름은 '은교', 머지 않은 곳에 사는 17살 아이다. 그 아이는 이적요의 서재를 청소하게 되었다. 소설 <은교>(문학동네)의 모든 건 은교의 출현에서 비롯된다. 


소설은 이적요 시인이 남긴 노트와 그의 제자 서지우 작가가 남긴 일기, 그리고 시인의 후견인이라 할 수 있는 Q변호사의 현재 시점이 번갈아 가면서 진행된다. 진정한 주인공이라 할 만한 은교의 시점은 끝내 비춰지지 않는다. 


시작은 '시인이 마지막 남긴 노트'인데, 이곳에 소설 전체를 관통하는 사건 전체가 담겨 있다. 소설은 시작하며 그 모든 걸 풀어 놓는다. 스스로 스포일러를 푼 것이다. 이적요 시인은 은교를 사랑했고 서지우를 죽였으며 자신 또한 죽음으로 내몰았다. 남들은 변태적인 애욕이라 부르는 '사랑'과 '욕망' 그리고 누구도 막지 못할 '운명'의 결과물이다.


사건 자체에 반전은 없다. 그대로이다. 다만, 사건의 진행 과정에서 수많은 반전들이 있다. 이적요 시인과 은교, 은교와 서지우 작가, 이적요 시인과 서지우 작가. 얽히고 설킨 삼각 관계, 전쟁을 방불케 하는 심리 스릴러, 관능적인 섹스 판타지까지. 


처참한 영화, 수불석권 소설


소설보다 영화로 먼저 접했다. 영화 <은교>는 개봉도 하기 전에 역시 '노출'로 엄청난 센세이션을 일으켰다. 배우 김고은이 이 영화로 데뷔했는데, 헤어 노출을 감행한다. 더불어 박해일은 대역이었다고 하지만 성기 노출을 감행한다. 영화를 안 볼 수 없게 하는 치졸한 언론 플레이였는데, 135만 명 정도의 성적을 거두었을 뿐이다. 영화 자체가 소설에 비해 별 거 없었단 뜻이다. 


조금이라도 박범신 작가의 원작에 그 화살이 돌아갈 순 없지만, 공교롭게도 그의 최신작의 영화 성적이 상당히 별로인 것 같다. <은교>도 은교지만, 최근에 개봉한 <고산자>는 100만 명도 안 되는 처참한 성적을 거두었다. 박범신 작가의 야심작 '욕망 3부작'의 멀티 유즈가 사실상 모조리 실패한 것이다. <촐라체>는 연극으로, <고산자>와 <은교>는 영화로 나왔는데, 큰 반향도 큰 감동도 큰 흥행도 일으키지 못했다. 


영화를 보고선 소설을 보고 싶은 마음이 싹 달아났는데, 우연히 잡아들게 된 소설은 가히 '수불석권'하게 되는 마력이 있었다. 결코 얇지 않은, 아니 상당히 두꺼운 소설이었는데 욕망의 점점들을 그 끝에 파국이 있을 줄 알면서도 따라갈 수밖에 없다. 마치 불에 뛰어드는 부나방 같다고 할까. 


가끔씩 이런 장르적 글쓰기가 가미된 소설을 읽곤 하는데, 잘못 선택하면 소설에 초점이 맞춰지는 게 아니라 내 자신에게 초점이 맞춰진다. 이런 소설을 보고 있는 나의 파국이 눈앞에 선하기 때문이다. '오래지 않아 책을 덮고 다신 거들떠도 안 보겠구나.' <은교>는 '오래지 않아 소설이 끝나겠구나. 한동안 헤어나오지 못하겠구나. 어서 다른 소설을 꺼내들어야지.' 하는 생각이 들게끔 했다. 결코 흔치 않은 경우다. 


노인의 사랑은 특별한가, 당연한가


소설에서 가장 눈살을 찌뿌리게 하면서도 가장 가슴을 친 이는 다름 아닌 초로의 노린 이적요이다. 그의 나이가 되려면 족히 40년은 필요한데 어찌 나는 그에게 매료되었는가. 그의 욕망이, 은교를 향한 변태적인 애욕이자 '사랑'이, 역시 제자 서지우를 향한 삐뚫어진 '사랑'이, 누구나 느낄 수 있는 아니 누구나 느낄 만하기 때문이다. 작가는 '누구나'에서 가장 수요가 적은 노인을 택해 극적 요소를 극대화했을 뿐이다. 


이적요의 사랑은 특별했는가. 먼저 생각해봐야 할 건 그가 노인이라는 점이다. 노인은 사랑을 하지 '못한다' 라는 생각보다 하면 '안된다' 라는 생각이 앞선다. 거기에 어떤 이유가 필요하겠는가. 노인이 사랑을 하면 추태인 거다. 그런 와중에 10대 여자 아이를 '사랑'한다고? 절대로 용인할 수 없을 거다. 


그럼 노인의 10대 여자 아이를 향한 사랑은 어떠한가. 노인이 아니더라도 10대 여자 아이를 향한 사랑은 쉽게 용인하기 힘들다. 여자 '아이'이기 때문인데, 100% 변태로 찍힐 것이다. 이 또한 사랑이라는 단어를 꺼내들 수 없다. 이적요는 사랑이라는 단어를 꺼내들기 어려운 두 개의 요소를 가지고 사랑이라 말한다.


여기에 제자 서지우가 있다. 이적요와 서지우는 단순한 사제 지간은 아니다. 서지우는 이적요를 스승 이상으로, 아버지처럼 모신다. 시중이나 비서 같은 모습을 보이기도 한다. 문학적 신과 다름 없지 않을까? 그렇지만 인간으로서의 이적요도 꿰뚫어보고 있기 때문에 그 이상으로 마음을 주지 못한다. 이적요는 그런 서지우를 탐탁지 않게 생각한다. 그에게서 문학적 심성을 찾아볼 수 없기 때문이다. 그래도 아들보다 더 아들처럼 자신을 대해주는 그에게 인간적으로 호감을 갖지 않을 수 없다. '문학'과 '인간'이라는, 가깝지만 먼 두 개체의 소용돌이가 이들 사이에서 요동친다. 


연애소설? 예술소설!


<은교>는 어느 모로 봐도 연애소설이다. 사랑이(라고 주장하는) 소설의 주요 골격을 이루고, 사랑이라는 뿌리에서 모든 이야기의 줄기가 뻗어 나오기 때문이다. 하지만 거기엔 사랑이라는 욕망과 다른 것들이 있다. 노인의 '사랑'도 있지만 '노인'의 사랑도 있기 때문이다. 노인에 초점을 맞추면, 삶과 죽음이 도사리고 있는 것이다. 


죽으면 끝인데 내 마음대로 사랑이라 외치고 사랑을 실컷 해봐야 하지 않겠나 싶다가도, 죽고 나서 영원히 남는 이름인데 살아생전 쌓아올린 명성을 무너뜨릴 순 없겠다 싶은 거다. 죽음에 대한 생각이 확연히 갈리는 부분이다. 거기엔 삶도 있다. 


또한 이적요는 소설에서 한국을 대표하는 시인이기에, 문학이란 무엇인지 시란 무엇인지를 말하기도 한다. 공대생 출신인 서지우로선 절대로 제대로 된 시를 쓰지 못할 거란 강한 믿음과 그에 대한 자부심이 대단하다. 그러며 이적요가 쓴 소설로 엄청난 인기를 끌게 된 서지우를 보면서 이적요가 갖는 복잡한 심리를 통해 '문학 동네'의 생태를 적나라하게 보여주기도 한다. 문학이 별개 아니게 느껴지기도 한다. 


더이상 연애소설로만 볼 순 없지 않을까. 이정도면 예술소설이라 불러도 무방하지 않을까. 다만 한 가지 걸리는 부분은 '이 소설은 단순히 연애소설이 아닙니다. 예술소설을 표방하고 있죠.'라고 대놓고 말하는 듯한 뉘앙스가 소설 전체에 깔려 있어 불편하다는 점이다. 에돌아 은은하게 깔려 자연스럽게 알면 훨씬 좋았으리라. 작가의 실력이 모자랐을까? 그렇진 않은 듯하다. '노인도 사랑을 할 수 있다'고 외치듯이 '이 소설은 예술소설이다'라고 당당히 외치는 노작가의 기백이 느껴진다. 이 소설은 다름 아닌 박범신의 소설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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삶이 삶을 지탱하고, 사람이 사람을 지켜주는 게 아닐까 <하와이언 레시피>

오래된 리뷰 2016. 8. 10. 08:0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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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래된 리뷰] <하와이언 레시피>


하와이의 작은 마을 호노카아, 태평하기 그지 없는 그곳에 젊은 청년 레오가 찾아온다. 무작정 쉬러 온 곳, 잘 적응할 수 있을까. 영화 <하와이언 레시피> 포스터 ⓒ㈜영화사 진진



하와이 섬 북쪽 끝의 작은 마을 호노카아, 나이 지긋한 미국계 일본인들이 모여 산다. 세상 어디에도 그런 곳은 없을 듯하다. 느리고 말 없고 태평하다. 딱히 뭘 하고 있는 사람이 없다. 그곳에 젋디 젊은 청년 레오가 찾아온다. 그 또한 느리고 태평한 듯하기에 큰 무리 없이 스며든다. 


마을에 하나밖에 없는 영화관에서 일하게 된 레오, 곧 동네사람들과 친해진다. 그들은 하나같이 천하태평하고 무미건조한 삶을 사는 것 같지만, 사실 누구나 부러워할 만한 여유롭고 안정된 삶이다. 여자를 밝히지만 파킨슨병에 걸린 아내만을 바라보며 사는 코이치, 팝콘 기계 옆에 앉아 기계가 돌아가기만 하면 잠을 자는 제임스, 먹는 걸 너무너무 좋아하는 영화관 주인 에델리, 과묵한 레오의 상사 버즈, 딱딱 맞는 말만 하는 미용사 미즈에, 그리고 천상 소녀같은 비이. 


명장면, 명대사, 명분위기의 향연


영화 <하와이언 레시피>는 명장면, 명대사, 명분위기의 향연이 펼쳐진다. 가본 적도 없는 하와이의 눈부신 하늘과 바다를 비롯한 거의 모든 장면들이 명장면이다. 그 장면들만으로도 '힐링'이 되는 듯하다. 느릿느릿하고 여유로운 삶의 모습들이 장면장면 짙게 배어 있다. '급할 수록 돌아가라'라는 말이 무색하게, '급할 게 뭐가 있나'를 보여준다. 처음엔 어떻게 받아들여야 할지 모르겠고 답답하고 짜증까지 났지만, 그게 곧 극도의 부러움이 표출된 거라는 사실을 받아들이게 된다. 나중엔 조금이나마 여유롭게 받아들일 수 있다. 


그곳에 의외로 '사랑' 있다. 아마 레오와 누군가의 사랑일 텐데, 나이가 지긋하신 분들밖에 없는 곳에서 어떻게? 영화 <하와이언 레시피>의 한 장면 ⓒ㈜영화사 진진



영화를 관통하는 스토리 라인에는 예상 외로 '사랑'이 있다. 누구와 누구의 사랑일까? 아마 레오와 누군가의 사랑일 것이다. 그런데 그곳에는 나이가 지긋하신 분들밖에 없다. 이 잔잔한 영화에서 그런 분위기를 연출하긴 쉽지 않을 듯한데, 어김없이 레오 또래의 여인 머라이어가 등장한다. 그들은 급속도로 친해지는데, 그들을 보고 비이가 심상치 않은 모습을 보인다. 비이는 50여 년 전 젊은 시절에 남편과 사별했다고 한다. 


딱히 이야기 선을 찾기 힘든 이 영화에서 레오와 머라이어와 비이의 삼각 관계는, 단순히 중심이 되는 이야기일 뿐만 아니라 중요한 상징으로 자리매김한다. 사실 머라이어는 중요하지 않다. 레오와 비이의 관계 때문이다. 비이의 입장에서 보면 이야기가 달라 보인다. 


사랑을 하는 사람의 욕망, 그리고 쉼의 위대함


노인은 '사랑'을 하지 않는다고 생각한다. 할 수 없다고도 생각할 것이다. 하면 안 된다고 생각하는 경우도 있다. 여하튼 노인과 사랑은 한 통속으로 묶기 힘들다. 영화는 바로 그 지점을 건드린다. 그것도 노인들이 주를 이루는 작은 마을을 배경으로. 노인도 사랑의 감정을 느낄 수 있고 느끼고 싶고 느끼며 산다. 비이는 젊은 레오에게 '여자'이고 싶은 것이다. 그래서 그와 함께 있을 땐 목소리며 몸짓이며 분위기가 완전히 달라진다. 천상 여자, 아니 소녀의 그것이라고 할까. 레오는 알 길이 없지만. 


그런 면에서 상당히 파격적인 설정일 테다. 분위기는 천지 차이지만, 영화 <은교>가 생각나기도 한다. 노인의 욕망을 그렸다는 점에서 말이다. 다만 <은교>에서 이적요가 '사랑'이 아닌 '욕망'의 화신이었다는 점에서는 다르다. 그는 은교의 '젊음'에 심취했던 것이다. 반면 비이는 자신을 변화시킨다. 그러며 레오에게 자신이 할 수 있는 최선의 요리를 선사한다. '노인'의 욕망이 아닌 '사랑을 하는 사람'의 욕망인 것이다. 


쉼이야말로 살아 있는 것의 위대함을 가장 잘 느낄 수 있는 모습일 거다. 영화 <하와이언 레시피>의 한 장면 ⓒ㈜영화사 진진



한편 비이를 비롯한 마을 사람들 모습에서 또 다른 깨달음을 얻을 수 있다. 대단한 일은커녕 아무런 일도 하지 않는, 얼핏 무지렁이 같은 이들의 집합소 같은 그곳에도 삶다운 삶이 생동하고 있다는 사실 말이다. 잘 보면 그들 모두 항상 무언가를 하고 있다. 음식을 만들고, 먹고, 졸고, 일하고, 멍 때리고, 앉아 있고. 


우린 삶을 오해한다. 무엇이든 열심히 해야 하고 쉬는 건 용납되지 않는다. 열심히 한 만큼 그에 비례해 쉴 수 있다. 그렇지만 쉼이 함께 하지 않는 삶은 지옥 같은 것이 분명하다. 그러지 않다고 반박하는 사람들이 있다면, 본능을 억제한 채 너무 오래 살아왔기 때문이라고 확신한다. 그런 사람들에게는 쉼이 함께 할 때 비로소 일의 능률이 오를 거라고 조언하고 싶다. 쉼이야말로 살아 있는 것의 위대함을 가장 잘 느낄 수 있는 모습일 것이다. 


삶이 삶을 지탱하고, 사람이 사람을 지켜준다


"육체는 말과 생각의 이유에 지나지 않아"


극 중 코이치 할아버지의 말이다. 생각나는 여러 명대사 중 하나인데, 깊이 생각하게 만든다. 영화 중반부가 넘어가면서 코이치를 비롯해 동네 사람들이 하나둘 레오 곁을 떠난다. '레오 곁을 떠난다'고 말한 이유는, 그곳에선 당연한 '떠남'이 레오에겐 익숙하지 않기 때문이다. 그곳은 그런 곳이고, 우리 인생도 다를 바가 없다. 애써 외면하고 있을 뿐이다. 당연한 걸 당연하게 받아 들이지 못하고 있다. 


변한 건 없다. 그대로이다. 다만 그때 그 사람들만 없을뿐. 그게 인생 아닐까. 영화 <하와이언 레시피>의 한 장면 ⓒ㈜영화사 진진



결국엔 레오도 1년 동안 정든 그곳을 떠난다. 그러곤 1년 후에 다시 찾는다. 변한 건 없다. 그곳은 그곳에 그대로 있다. 다만 사람들만 없을 뿐. 그게 인생 아닐까. 너무도 당연한 진리. 만나고 설레고 사랑하고 헤어지고 아파하고 추억하고 성장하는, 그런 당연한 진리를 영화는 찬찬히 보여준다. 


영화가 끝나면 주마등처럼 스쳐 지나간다. 호노카아 마을의 전경과 사람들이. 10여 년 전, 호주 브리즈번에서 지냈던 1년과 많은 것들이 겹친다. 그 분위기와 전경들, 나름 치열했던 궤적도 떠오른다. 그 모든 것이 삶이다. 다름 아닌 삶이 삶을 지탱하고, 사람이 사람을 지켜주는 게 아닐까. 레오의 앞으로의 삶에는 호노카아 마을 사람들이 함께 할 것이다. 모든 이들의 삶에 모든 이들이 함께 하길 바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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노인, 사람, 사랑, 삶, 쉼, 여유, 태평, 하와이언 레시피, 호노카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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다시 오지 않을, '클린트 이스트우드 식' 인간과 영화 <나의 클린트 이스트우드>

지나간 책 다시읽기 2015. 11. 30. 08:0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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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나간 책 다시 읽기] <나의 클린트 이스트우드>



<나의 클린트 이스트우드> 표지 ⓒ아시아


작가 지망생인 나는 숙부를 대신해서 팬션과 낚시터를 관리하고 있다. 어느 날 클린트 이스트우드가 팬션에 찾아온다. 알고 보니 제작자와 다툼 끝에 도망친 거였다. 언론들은 쿠바와 멕시코를 유력한 은신처로 뽑았는데, 정작 그는 한국으로 도주한 것이다. 그는 더 이상 서부의 영웅이 아니었다. 아무런 명분도 없이 폭력을 행사하고 푼 돈을 빼돌린 추잡한 도망자이자 고집 센 늙은이에 불과했다.


오한기의 소설 <나의 클린트 이스트우드>(아시아)는 시나리오 작가 지망생인 나에게 클린트 이스트우드가 찾아오며 시작된다. 도망 다니는 주제에 거장이라 불리는 감독들과 주옥 같은 작품을 폄하하면서, 자신의 아주 오래된 영화 만을 대단하다고 치켜세우곤 한다. 그러며 자신이 여전히 누구나 한 번만 뵙길 청하는 정도의 거물로 인식하고는, 자신을 찾는 이가 없는지 묻곤 하는 것이었다. 하지만 현실은 팬션 관리실에 몰래 들어와 숙박비나 훔치는 비참한 노인네일 뿐이다. 


영웅이자 살아 있는 전설 클린트 이스트우드, 지금은?


왜 하필 '클린트 이스트우드'일까? '살아 있는 전설'이라는 칭호가 어울리는 사람이 많지 않을 것이다. 영화 배우이자 감독 '클린트 이스트우드'는 그에 딱 맞는 사람이라 할 수 있을 것인데, 1955년 단역으로 시작해 올해로 데뷔 60년이 되었다. 


그 유명한 서부극 <황야의 무법자> <석양의 무법자>의 주인공이자, 70년대부터 감독을 시작해 1992년에 정점을 찍었다. <용서받지 못한 자>로 아카데미 감독상과 남우주연상을 휩쓴 것이다. 그는 이 영화에서 감독과 주연을 맡았다. 


그는 영화에서 주로 약자를 위해 타락한 공권력과 싸우고 악당을 처단하는 영웅으로 분했다. 그러며 실제로도 위대한 감독이자 모범적인 '진짜' 보수 공화당원으로 활동하고 있다. 그야말로 영화라는 허상과 삶이라는 실제가 멋들어지게 들어맞는 진귀한 사람이 그다. 그런 그조차 냉혹한 자본주의 할리우드 시스템에서 살아남기 힘든 처지로 전락해버렸다. 


소설은 그런 클린트 이스트우드에 대해 복잡한(상반된) 시선을 던진다. 그의 성향을 존경하면서도 그를 존경하는 자신을 부끄러워하고 있는 듯하다. 소설 속 그의 영웅은 영웅답게 타락한 게 아니라 비참하게 추락했다. 또한 직선적이고 화끈한 그의 고전적인 영화 스타일, 그의 성향은 많은 영화인들에게 비판을 받아왔다. 바로 그 직선적이고 화끈한 성향 때문에. 그가 보수적인 공화당원인 것도 마찬가지다. '보수'를 벌레 보듯이 하는 사람들이 많아서 그럴 텐데 그는 억울하다. 


'클린트 이스트우드 식'이 그립다


소설은 클린트 이스트우드를 빌어 현대 영화를 이루고 있는 사조를 비판한다. 영화에 대단한 철학이라도 불어넣은 것처럼 별 거 아닌 것을 부풀어 놓는 것이다. 소설 속 나는 그걸 '클린트 이스트우드가 총알 하나로 그들의 수다보다 많은 것을 말하고 있다'라는 식으로 비꼰다. 클린트 이스트우드는 '나'의 영웅이다. 영화로서나 인간으로서나. 그러며 그리워한다. '클린트 이스트우드'식 영화를, 다시 오지 않을 그런 영화를.


그렇지만 그가 겸손했으면 좋겠다는 마음이다. 그러면 더 많은 사람들에게 더 좋은 평가를 받고 더 많은 인기를 누릴 수 있을 텐데. 지금은 단지 '그 시절 그때 클린트 이스트우드는 나에게 최고의 우상이었지'로 남아 있는 것이다. 그건 죽고 없는 사람한테 어울리는 칭호가 아닌가. 하지만 그는 여전히 살아서 왕성한 활동을 하고 있다. 참으로 복잡한 심경이다. 


클린트 이스트우드의 꽉 막힌 신념을 그리 좋아하진 않는다. 그의 영화에선 도무지 유연함을 찾을 수 없다. 이 시대가 바라는 최고의 성향인 유연함 말이다. 그렇기 때문에 그의 영화가, 그의 스타일이 벌써부터 그립다. 그가 사라지면 더 이상 그런 영화를 볼 수 없으니 말이다. 그는 뾰족하고 날카로운 창이 아니라, 굳건하고 단단한 방패다. 지금은 그런 방패조차도 유연함이라는 무기로 충분히 위협이 가능하다. 그러면 어쩔 수 없이 그 방패 뒤에 숨긴 창으로 대항해야 하고, 그는 바로 방패가 아닌 위험한 창을 가진 이가 된다. 참으로 교묘하고 복잡한 세상에 살고 있다. 


"인종 갈등과 베트남전처럼 더 이상 명확한 적의 실체가 보이지 않는 이 교묘한 현실에서 작가라는 건맨은 어디에다 멋지게 한바탕 총을 쏘아댈 수 있단 말인가. 오한기의 이 슬픈 농담은 정의를 찾아 헤매는 현실의 투사들에게, 그리고 멋진 이야기를 찾아 방황하는 작가들에게 오래 공명하리라." (해설 중에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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Posted by singenv
나의 클린트 이스트우드, 노인, 영웅, 영화, 우상, 클린트 이스트우드
  • BlogIcon 空空(공공)
    2015.11.30 10:12 신고

    클린트에 대해선 항상 두가지 생각이 공존합니다^^

    • BlogIcon singenv
      2016.01.03 19:22 신고

      자도 그렇습니다. 이 책이 그걸 괜찮게 그려낸 것 같아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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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노인을 위한 나라는 없다> 당신에게 '좋은 작품'은 무엇인가요?

오래된 리뷰 2014. 10. 1. 07:0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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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래된 리뷰] <노인을 위한 나라는 없다>



영화 <노인을 위한 나라는 없다> ⓒ CJ 엔터테인먼트



문학이든 영화든 어떤 작품의 질에 대해 생각할 때 내 나름대로 명확한 기준이 존재한다. 콘텐츠 내적으로는 '재미와 감동'이 있어야 하고, 콘텐츠 외적으로는 '해석의 무한함' 즉, 시간과 장소, 보는 사람마다 다른 해석이 가능해야 한다. 


먼저 재미와 감동이 있어야 한다. 보는 재미, 듣는 재미, 생각하는 재미에 가슴을 울리는 감동이 있어야 한다. 재미와 감동, 이 둘 중에 어느 하나에 치중되면 밋밋해지기 쉽다. 물론 극단을 추구해 일종의 예술로 승화시킨다면 달라지겠지만, 여전히 나의 판단 기준에는 미치지 못한다. 해석의 무한함은 재미와 감동과는 사뭇 다르다. 서로가 서로의 선결과제는 아닌 것이다. 이 둘 중에서는 하나만 추구해도 충분하다. 해석이 무한한 콘텐츠는 두고두고 보고 생각할 수 있다. 유행을 타지 않아 시일이 지나도 그때그때 다른 빛을 낸다. 재해석되고 리메이크돼 불명의 명작이 될 공산이 크다. 


사무엘 베케트의 희곡 <고도를 기다리며>는 극적인 장면도 특별한 줄거리도 없지만, '고도'의 무한한 해석으로 고전의 반열에 올랐고 출간된 지 60년이 지났건만 여전히 재해석되고 있다. 장예모 감독의 <영웅>은 단순히 외양만 보자면 화려한 색감이 더해진 무협영화에 불과하지만, 영화의 배경과 캐릭터들의 행동을 조합해 생각하면 상당히 복잡하고 큰 덩어리의 해석이 가능하다. 나의 기준으로 보자면, 좋은 콘텐츠라고 할 수 있겠다. 


<노인을 위한 나라는 없다>의 한 장면. 살인마 안톤 시거는 사람을 살리는 산소통을 사람을 죽이는 데 쓴다. ⓒ CJ 엔터테인먼트

영화 <노인을 위한 나라는 없다>는 개봉 당시부터 수많은 해석들이 쏟아져 나왔고, 6년 여가 지난 지금도 활발히 해석되고 있다. 


스토리는 단순하다. 우연히 200만 달러라는 엄청난 돈을 얻게 된 모스. 이를 쫓는 살인마 시거. 이 둘을 쫓게 된 보안관 벨. 그리고 모스의 부인과 사적으로 시거를 쫓는 해결사. 결국 모스와 모스의 부인, 해결사는 시거에게 살해당하고, 시거는 큰 사고에도 유유히 살아남았다. 벨은 항상 한 발 늦게 현장에 도착해, 할 수 있는 게 아무것도 없었다.


이처럼 너무나 단순한 스토리임에도 수많은 해석들이 난무하는 건, 캐릭터들의 말과 행동의 난해함 때문이다. 그 중에서도 특히 살인마 안톤 시거. 영화는 그가 감옥에 끌려갔다가 부보안관을 목 졸라 죽이면서 시작된다. 이후 그는 사람을 살리는 산소통을 사람을 죽이는 살인 무기로 

둔갑 시켜 가지고 다닌다. 그러며 아무런 이유 없이 사람들을 죽인다.


그러던 중에 어느 주유소에 들어가 늙은 주인과 대화를 나눈다. 주인이 시거에게 어디서 왔느냐고 묻는다. 시거는 이 말을 참을 수 없었다. 동전을 던질 테니 고르라고 말한다. 늙은 주인은 왜 그래야 하는지 모른 채 골랐고 맞췄다. 그는 살아남을 수 있었다. 삶은 우연의 연속이고, 운명은 자신의 손에 있지 않다는 것인가. 


모스는 사냥을 나왔다가 우연히 참혹한 현장을 목격한다. 그리고 200만 달러도 목격한다. 모스는 이 돈을 가지고 도망간다. 그런데! 현장에 살아있었던 한 사람이 목말라 하던 걸 잊지 못하고 물을 가지고 다시 돌아온다. 그때 돌아오지 않았더라면 그에겐 아무런 일도 일어나지 않았을지 모른다. 그는 시거에게 쫓기게 되고 본격적으로 도망을 가기 시작한다. 모스는 이를 어떻게 받아들일까? 그는 당황하지 않고 일은 일어나기 마련이니 후회할 필요는 없다고 말하며 부인을 피신시킨다. 운명을 자신의 손으로 움켜지려 하는 것인가? 그를 안톤 시거라는 참혹한 운명의 그림자가 쫓고 있다.



<노인을 위한 나라는 없다>의 한 장면. 모스는 우연히 200만 달러를 거머쥐었고, 덕분에 살만자에 쫓겨서 죽고 만다. ⓒ CJ 엔터테인먼트



보안관 벨은 늙었다. 대신 그는 경험과 학식이 풍부하다. 한 발 늦어 현장에 도착하지만, 정황을 정확히 판단해 시거의 존재를 제대로 파악하기에 이른다. 하지만 어쩌랴. 파악만 할 뿐 해결할 수는 없다. 너무나 강적을 만났다고 생각한 벨은 은퇴를 결심하고, 이미 은퇴한 엘리스를 찾아간다. 그가 하는 말 또한 운명에 관해서이다. 


"세월은 막을 수 없는 거야. 너를 기다려주지 않을 거고. 그게 바로 '허무'야."


정해진 운명에 따라 살인을 사는 시거, 정해진 운명을 인정하지만 그래도 발악해보는 모스, 운명을 막을 수 없다는 걸 알게 된 벨. 그들은 무력한 인간들일 뿐이다. 


시거는 모스의 부인을 죽이면서, 운명론의 결정타를 먹인다. 내가 너를 죽여야 하는 정해진 운명에 거역할 길은 없다는 것이다. 


"인생은 매순간이 갈림길이고 선택이지, 그림은 그려졌고 당신은 거기에서 선 하나도 지울 수 없어. 당신 뜻대로 동전을 움직일 수는 없지. 인생의 길은 쉽게 바뀌지 않아 급격하게 바뀌는 일은 더더욱 없지. 당신이 가야한 길은 처음부터 정해졌어."


그리고 시거는 큰 교통사고를 당한다. 우연에 기인했다고도 할 수 있고, 이미 정해진 운명이라고 할 수도 있을 것이다. 그는 이 사건에 어떠한 억울함도 보이지 않고, 당황하지도 않는다. 단지 그 자리에 그가 있었을 뿐이다. 그는 유유히 갈 길을 간다. 운명이 정해준 길을 따라서. 



<노인을 위한 나라는 없다>의 한 장면. 뛰어난 학식과 풍부한 경험의 소유자이지만, 항상 한 발 늦는 보안관 벨. ⓒ CJ 엔터테인먼트



여전히 이 영화의 제목이 왜 '노인을 위한 나라는 없다'인지 정확한 이유는 알 수 없다. 굳이 나만의 해석을 하면 이렇다. 이 영화에 강력히 흐르고 있는 '운명론'적 기조가 말하고 있는 것이다. 영화에서는 유독 노인들이 많이 나온다. 벨과 앨리스, 모스의 장모, 시거에게 죽임을 당하는 노인들까지. 이들은 운명론에 깊이 천착하지 않는다. 시거처럼 철저히 운명에 따라 행동하지도 않고, 모스처럼 이에 반하지도 않는다. 그들은 그냥 방관할 뿐이다. 즉 이 제목은 '운명을 방관하는 자를 위한 삶은 없다'라고 바꿔도 무방하지 않을까 싶다. 너무나 많은 해석이 뒤따르고 있는 영화이기에 가능한 나만의 해석이다.


이 영화는 나에게 커다란 물음표와 느낌표를 안겨줬다. 우연이나 운명론을 믿지 않았지만, 이 영화를 보고 난 후 타이밍 좋게 우연에 대해 다시 생각하는 사건·사고들이 있어서 어느 정도 믿게 됐다. '해석의 무한함 = 좋은 작품'이라고 생각했던 기존의 고정관념이 상당히 깨지게 됐다. 과연 '난해함'으로 무장한 작품의 무한한 해석의 가능성이 좋은 작품으로 가는 확실한 길인가? 이 작품은 그런 면에서 결코 좋은 작품이라고만 평할 수는 없을 것 같다. '해석'을 해야만 한다는 강박으로 영화를 제대로 즐길 수 없었다는 뜻이다.


당신이 생각하는 '좋은 작품'은 무엇인가? 남들이 다 좋다고 하는 베스트셀러? 오랜 세월 살아남아 사랑받는 스테디셀러? 평론가가 만장일치로 손을 들어준, 상 많이 받은 작품? 그 기준이 어쩌면 삶을 결정하는 중요한 무엇이 될 수도 있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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Posted by singenv
노인, 노인을 위한 나라는 없다, 살인, 우연, 운명론, 재해석, 좋은 작품
  • BlogIcon 토종감자
    2015.01.29 20:20 신고

    이거 나왔을 때 기대가 컸는데, 저는 그냥 그랬던 기억이 나네요.
    말씀하신대로 다양한 해석이 가능하다보니, 너무 다양한 생각이 들어서 결국은 주제가 없는 듯한 느낌이 들더라고요.
    제목은 인상적이었는데, 정작 영화는 딱히 인상적이지 못했네요.

    • BlogIcon singenv
      2015.02.01 18:41 신고

      그러셨군요! 이런 류의 영화는 호불호가 극명하게 갈리곤 하죠!

  • BlogIcon 달달(daldal)
    2015.02.25 23:53 신고

    살인이라는 자극적인 요소가 자주 등장함에도 불구하고 어찌보면 너무나도 잔잔한 영화가 끝나고나니 먹먹하면서도 한 편으론 참 담담한 기분이 들면서 며칠을 영화의 여운에서 벗어나질 못했었거든요. 그때보다 조금 더 성숙해진 지금 다시 한번 영화를 봐야겠네요!
    좋은 리뷰 감사합니다! 그리고 '노인을 위한 나라는 없다'라는 제목에 대한 해석도 되게 잘하신것 같아요!!

    • BlogIcon singenv
      2015.03.01 16:37 신고

      감사합니다^^
      이 영화는 해석하는 재미가 상당해요 ㅎㅎ

  • samasarine
    2015.06.01 13:37

    죽음을 의인화한 인물 안톤 시거를 통해 죽음의 본질을 보여주고 있다고 봅니다.
    한마디로 " 죽음을 피해 늙을 수 있는 곳은 없다."입니다. 이상은 제 생각이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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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파이 이야기'가 '노인과 바다'를 넘을 수 없는 이유

지나간 책 다시읽기 2014. 4. 23. 07:0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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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나간 책 다시읽기] <노인과 바다>


<노인과 바다> ⓒ 문예출판사

20세기가 낳은 최고의 작가라 칭하는 어니스트 헤밍웨이의 후기작 <노인과 바다>는 자연에 맞서는 한 인간의 사투를 그렸다. 그리고 거기에서 불굴의 정신, 포기하지 않는 희망 따위를 얘기한다. 아니, 그렇게 알려져 있고 정설로 굳혀졌다. 굳이 부인하고 싶지는 않다. 맞는 말이다. 단지 조금은 다른 시선으로 볼 필요도 있다는 걸 말해주고 싶다. 조금 더 시선을 확장해보면, 이 소설에서 더 많은 걸 얻을 수 있을 것이다. 인간 vs 자연이 아닌 인간 and 인간, 인간 and 자연, 자연 and 자연으로서의 시선.  


인간 and 인간


노인 산티아고는 왕년에 잘나갔던 어부였다. 힘이 장사였고, 무지막지하게 큰 물고기를 잡는 것은 식은죽 먹기였다. 당대 최고의 야구 선수 조 디마지오도 그런 물고기를 잡을 수는 없을 정도였다. 하지만 나이가 먹으니 힘이 빠지고 물고기 잡기도 수월치 않았다. 그래도 그는 어부였기에 물고기를 잡아야 했다. 그것도 큰 물고기로. 84일째 잡히지 않는 이놈의 물고기. 그는 85일째 되던 날에도 어김없이 출전한다. 전쟁이나 다를 바 없다.


노인에겐 마놀린이라는 꼬마 친구가 있다. 그와 함께 같이 배를 타고 고기를 잡으러 가곤 했다. 일종의 수제자인 것이다. 그의 부모님은 마놀린이 제대로 된 어부에게 제대로 된 수업을 받아서 그야말로 제대로 된 어부가 되었으면 하는 바람이 있다. 100일이 다 되도록 제대로 된 물고기 하나 못 잡아오는 늙은 어부한테서가 아니고 말이다.


그렇지만 마놀린은 산티아고에 대한 무한한 애정과 배려, 존경의 마음을 품고 있다. 그리고 무엇보다 산티아고가 언젠가는 꼭 큰 물고기를 잡아올 것이라는 믿음이 있었다. 노인으로서의 한계가 너무나 명확히 보이는 그가 과연 성공할 수 있을까? 마놀린을 위해서라도 산티아고는 꼭 잡아와야 했다. 이 부분이 소설의 핵심이라고 해도 과언이 아니다. 마놀린을 위해서. 그의 믿음을 져버리지 않기 위해서.


인간 and 자연


부모님의 성화에 못 이겨 결국 다른 배를 타게 되고 마는 마놀린. 어쩔 수 없이 혼자서 고독한 싸움을 하게 된 산티아고. 바야흐로 인간과 자연의 싸움이 시작되려 하고 있었다. 노인은 성공할 수 있을까.


다행인지 불행인지 노인은 출항 첫날부터 엄청난 크기의 물고기를 잡게 된다. 상상을 초월하는 크기와 그에 비례하는 힘. 노인은 그 힘을 이기지 못하고 물고기에게 끌려 가기에 이른다. 그는 버티고 버텨서 물고기가 지치길 바라야 하는 처지가 되었다. 물고기가 지쳐서 조류에 몸을 실어야만 하는 것이었다.


노인은 두 가지의 어려운 목표를 달성해야 했다. 한 가지라면 쉬웠지만 두 가지라 어려웠다. 물고기를 죽여서 돌아가야 했지만, 꼭 자신의 손으로 죽여야만 했다. 다른 무엇에 의한 죽음은 용납되지 않았던 것이다. 지칠 때까지 죽으면 안 되었다. 그건 노인도 마찬가지였다. 노인은 그 물고기를 형제라 칭하며 그 순간 누구보다 사랑한다고 말한다. 이는 빈말이 아닐 것이다. 이들은 그 순간 '함께'였다. 노인으로 대변되는 인간의 청새치로 대변되는 자연에 대한 '사투'라기 보다는, 인간과 자연이 함께 하는 '여정'이라고 볼 수도 있지 않을까. 일종의 스톡홀름 증후군이라고 할까?


"이 녀석아, 나는 마지막까지 견딜 수 있단다. 그러니까, 너도 끝까지 견뎌야만 해. 하긴 그건 말할 필요도 없는 일이지." (본문 속에서)


작년 영화로도 만들어져 다시 한번 큰 이슈가 되었던 <파이 이야기>(작가정신)가 <노인과 바다>를 넘을 수 없는 점이 있다면 바로 이 점이다. 인간과 자연의 공존을 노골적으로 보여주고 있는 <파이 이야기>와는 달리, <노인과 바다>에는 인간 내면의 알 수 없는 오묘한 감정을 보여준다. 삶과 죽음이 교차하는 곳에서의 모순의 합. 그것을 솔직하고 실질적으로 그려내고 있는 것이다.


자연 and 자연 


노인은 3일 밤낮을 청새치와 싸우고, 달래고, 이야기하고, 화내며 보낸다. 마침내 지친 청새치를 작살로 죽이게 된 노인. 이제 조류와 순풍을 타고 집으로 돌아갈 일만 남았다.


하지만 피 냄새를 귀신같이 맡고 찾아오는 불청객 상어. 노인은 오랜 경험으로 이미 알고 있었지만, 알기 싫었다. 자신이 이길 가능성은 거의 없었기에. 두세 마리씩 끊임없이 오는 상어 떼에 맞서, 노인은 온갖 종류의 무기를 동원한다. 그렇지만 청새치가 눈 앞에서 점점 사라지는 것을 막을 수 없었다.


노인은 상어를 보며 욕지거리를 하고 자신이 인위적으로 얻게 된 청새치를 빼앗기지 않으려 용을 쓰지만, 자연은 자연으로 돌아갈 수 밖에 없었나 보다. 그는 많은 수의 상어를 죽였음에도 결국은 청새치를 모조리 빼앗기고 말았다. 뼈만 남긴 채.


그렇지만 상어는 노인을 공격하지 않았다. 아니, 못한건가? 여하튼 자연은 자연만을 취했고 인위적인 취함은 행하지 않았다. 죽은 상어들 또한 자연으로 돌아갔을 것이다. 노인 또한 물질적으로는 아무것도 가지지 못한 채 집으로 돌아간다.


다시 인간 and 인간


기진맥진한 상태로 거대한 청새치의 뼈 만을 가지고 항구로 돌아온 산티아고. 그 뼈를 보고 항구의 어부들은 벌어진 입을 다물지 못한다. 놀라움을 금치 못한다. 이것을 가리켜 인간 승리라 하지 않고 뭐라 말하겠는가? 산티아고는 이런 말을 한다.


"인간은 패배하기 위해 태어나진 않았어. 죽을 수는 있지만 패배할 수는 없어." (본문 속에서)


맥아더가 이런 말을 했던가. "노병은 죽지 않는다. 단지 사라질 뿐." 누구는 죽을 수는 있지만 패배할 수는 없다고 하고, 누구는 죽지 않고 사라질 뿐이라고 한다. 누구의 말이 맞을까? 한 번 생각해 볼 일이다.


쓰러지듯 잠이 든 노인이 깨어났을 때 그의 곁에는 마놀린이 있었다. 다른 배를 타서도 큰 물고기들을 잡은 그지만, 노인 걱정만 앞설 뿐이다. 청새치의 뼈로 증거를 제시한 노인의 모습에, 그는 자신의 믿음을 지킬 수 있어 기쁘다. 다음에는 꼭 같이 배를 타기로 약속한다. 그는 노인을 위해 갖은 굳은 일을 마다하지 않고, 노인을 위해 울어주기까지 한다. 인간의 인간에 대한 한없이 배려와 믿음이 묻어 난다.


이 소설을 보니 종종 '인간'이라는 단어 앞에 붙곤 하는 '고독'을 빼버려도 되지 않나 싶다. 인간과 자연의 고독한 사투가, 실은 인간과 인간의 진실된 믿음과 사랑이었으니 말이다. 헤밍웨이가 진정 그리고자 했던 바는 산티아고(인간)와 청새치(자연)가 아니라, 산티아고(인간)와 마놀린(인간)이 아니었을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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Posted by singenv
노인, 노인과 바다, 어니스트 헤밍웨이, 인간, 자연, 청새치, 파이 이야기
  • BlogIcon 도서출판 문학과감성
    2014.04.23 09:46 신고

    안녕하세요. 잘 보고 갑니다.

  • BlogIcon 티코햄
    2014.04.23 23:21

    <노인과바다> 읽은지 얼마 안 된지라 이렇듯 인간,자연을 대비시켜 설명하시니 쏙쏙 들어 오네요. <파이이야기>는 동물과의 공존이 비현실적이죠. 사실은 난파 선원일지 동물들일지 원하는대로 해석하라는 마무리가 묘함을 줬던 걸로 기억합니다.

  • 파이
    2014.05.31 20:13

    파이이야기와 노인과바다는 서로 다른 주제를 다루고 있는 내용인데, 이런 식으로 비교하는 걸 보면, 파이이야기를 제대로 읽어보셨는지가 궁금하네요.

    • BlogIcon singenv
      2014.05.31 20:43 신고

      작품을 읽고 주제를 생각하는데 정답이 있나요? 사람마다 다르게 읽는 거지요.
      그러는 파이님은 <파이 이야기>를 어떻게 읽으셨는지 한 번 말씀해 주시죠.
      납득할 수 있게 말이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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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퇴적 공간> 노인을 무능하다 여기는 순간, 사회는 무너진다

신작 열전/신작 도서 2014. 3. 14. 07:0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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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서평] 사회적 기준의 '노인' 들이 모이는 <퇴적 공간>


<퇴적 공간> ⓒ민음인

얼마 전 종로 3가에 있는 기타를 사기 위해 '낙원 상가'에 갔었다. 정말 오랜만에 방문하는 것인지라, 왠지 모를 '후레쉬'한 느낌까지 들었다. 하지만 그 신선한 느낌은 곳곳에서 상처를 입고 결국 사라지고 말았다. 오랜만에 오게 되어서 느끼는 한 개인으로서의 얄팍한 시각적·시간적 관념은, 인류적 시간 관념 하의 '노(老)'의 향연에 의해 무참히 깨지고 만 것이다. 그곳에서 젊은이의 모습은 거의 찾아볼 수 없었다. 대신 노인분들이 자리를 차지하고 계셨다. 


오늘날 노인이라고 하면, 통상적으로 65세 이상의 어르신을 말한다. 이는 단지 나이의 기준으로만 선정되지는 않는다. 사회적 기준, 즉 가정이라는 집단에서의 추방과 사회적 변화에 따른 추방이 대체적으로 65세 즈음에 이루어지기 때문이기도 하다. 무슨 말인고 하면, 유교적 사회 질서가 무너진 지금에는 노인이 가정에서 나이에 맞는 대우를 받지 못하니거니와 평생 적을 둔 곳에서 은퇴를 해서 사회적으로도 대우를 받지 못한다는 것이다. 또한 대한민국 기초노령연금법 제3조의 연금 지급대상자 규정과 노인장기요양보험법 제2조 1항에 근거한 것이다.


퇴적 공간, 사회적 기준의 노인들이 모이는 곳


그리고 이들이 모여드는 곳은 그리 많지 않다. 서울과 인천을 중심으로 보자면, 탑골공원과 자유공원 정도일 것이다. <퇴적 공간>(민음인)에서는 이를 제목처럼 '퇴적 공간'이라 칭한다. 이는 "도시의 인위성에 밀려나고 속도에 적응하지 못한 인간들이 강의 상류로부터 떠밀려 내려 하류에 쌓은 모래섬처럼 몰려드는 모습"(저자의 말)을 지칭한다. 사회적 기준의 '노인'들이 모이는 곳이라는 말이다. 


저자는 얼마 전 교수를 은퇴하고 사회적 기준의 '노인'이 되었다고 한다. 그는 노인의 실체를 들여다보고자 그 노인들의 삶에 깊이 천착해본다. 그 방법론으로 직접 노인들이 모이는 곳으로 뛰어든 것이다. 이는 보들레르나 조지 오웰이 직접 현실에 뛰어들어 이해하고자 하는 바를 이루려고 한 것과 같은 이치이다. 하지만 이 책에서 저자는 그들과 다르게 적절한 거리감을 유지한다. 


"재직하고 있던 대학에서 퇴임을 한 후 나는 한동안 탑골공원과 종묘시민공원 일대를 탐사했다. '탐사'라고 하는 까닭은 나의 발걸음이 내 안에  고인 어떤 질문을 해석하고자 하는 여정이었기 때문이다. 교수라는 직함을 반납하는 동시에 나는 '노인'이 되었다. 자본주의 사회에서 공인된 직업으로 일정 수준의 소득을 벌어 들이지 않는 이상, 나이든 자는 개인의 선택이 아닌 사회적인 잣대로 '노인'으로 분류된다는 사실을 알았다." (본문 중에서)


먼저 저자는 평생을 예술에 천착해 온 학자답게 화려한 인문학적 지식을 뽐내며 글을 시작한다. 이는 대부분의 챕터에서 통용된다. 노인 얘기와 전혀 상관없을 것 같은, 그러나 굉장히 지적 자극을 돋우는 지식들로 화려하게 시작하는 것이다. 그리고 이는 자연스레 노인 문제로 귀결된다. 이후 그 지식들을 발판 삼아 관찰하고 연구하고 사유한 현실의 문제로 고개를 돌리는 것이다. 지적 자극으로 한껏 고무된 머리는 차갑게 식어서 챕터가 끝날 때는 때로는 슬픔, 때로는 분노, 때로는 허탈함 등을 느끼곤 한다. 


누구나 노인이 될 것이다, 그리고 노인에 대한 정책이 바뀌어야 한다


이 책이 던지는 메시지는 크게 두 가지라고 할 수 있다. 하나는 누구나 반드시 노인이 될 것이라는 사실 전파이다. 누구나 나이를 먹어갈 것이고, 자본주의 사회에서 나이 들고 전체적으로 능력이 쇠퇴한다면 그 또한 노인이 될 것이기 때문이다. 하지만 이는 공허한 외침이 될 가능성이 다분히 높다. 자칫 절대적 경험주의에 빠져 일명 '꼰대' 노릇을 하는 것으로 비춰질 수도 있다. 저자도 직접 노인이 되고서야 느낀 처절한 깨달음이지 않은가? 그래서 인지 이 부분은 책에서 직접적으로 표현되지 않는다. 다만 책을 다 읽은 후 놓았을 때 자연스레 느끼게 될 것이다. 


또 다른 메시지는 노인에 관한 정부의 정책이 바뀌어야 한다는 것이다. 작금의 정부는 노인을 무능한 대상으로 규정하여 그들에 대한 복지를 한없이 늘려만 가고 있다. 저자가 보기에 그렇게 계속 가다가는 견디기 어려운 고통에 시달리게 될지도 모른다는 것이다. 이는 단적으로 말해 지원 불가능성에 도전하는 무모한 정책이라고 말한다. 이에 지원 방법을 바꿔야 한다고 설파한다. 노인을 개별자로 보는 것이 아니라, 노인을 포함한 가정이나 공동체에 지원을 해야 한다. 


하지만 저자가 정작 하고 싶은 말은 이것이었던 것 같다. 책의 마지막 문장이다. 


"종묘시민공원을 중심으로 하는 종로3가 역, 허리우드 클래식 등은 가정으로부터의 1차적 추방과 도시의 속도가 주는 소멸이라는 이름의 제2의 추방이 교차하면서 형성된 도피성 공간일지 모른다. 그곳은 도시의 인위성에 밀리고 속도에 적응하지 못한 인간들이 강 하구의 삼각주에 쌓여 가는 모래성처럼 모여드는 퇴적 공간이다. 그 공간에서 나날을 보내는 노인들은 어쩌면 이제는 서울 시민들이 잃어버리고 있는, 인간이 지닌 자연의 감각을 원형처럼 간직하고 있는 원질(原質)과 같은 대상이 아닐까. 우리가 현대의 갖가지 정신질환으로부터 벗어나기 위해 만일 다시 자연의 감각을 지니기를 원하는 시기가 도래한다면, 이 퇴적 공간은 우리가 영원히 보존해야 할 자산적 가치가 있는 귀중한 공간이 될 것이다." (본문 중에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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Posted by singenv
낙원 상가, 노인, 자유공원, 탑골공원, 퇴적 공간
  • BlogIcon mindman
    2014.03.14 11:47 신고

    흐!~ 제 주위엔 아직도 연세 78세에 봉사하시고 함께 사진찍으시는 현역 사진가가 계십니다. 그런 분들은 전혀 노인이 아니예요 .^

  • BlogIcon 알숑규
    2014.03.14 12:38 신고

    전통적인 관점에서의 노년기로 지금의 사람들의 삶을 살펴보면, 인생의 절반 이상이 노년기로 분류되어 버리는
    현 상황이기에 이제 노인들이 주도적으로 참여하는 사회는 반드시 갖춰야 하는 것이 되었으니까요.

  • BlogIcon 울프팩
    2014.03.14 15:17 신고

    흥미로운 제목이네요. 여러가지를 시사하는 의미심장한 제목이라는 생각이 듭니다. 더불어 블로그 제목도 참 좋네요.^^. '책으로 책하다'라는 제목에서 문향이 느껴집니다.^^ 잘 보고 갑니다.

    • BlogIcon singenv
      2014.03.14 21:37 신고

      안녕하세요? 지나가다 들렸는데, 이렇게 댓글 방문 와주셔서 감사합니다^^ 앞으로 잘 부탁 드립니다!


  • 2014.03.21 13:39

    비밀댓글입니다


  • 2014.03.31 13:57

    비밀댓글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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