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신작 열전/신작 영화

꿈과 현실, 스릴러와 드라마, 그리고 외로운 인간 <혼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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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리뷰] 2016년 최후의 발견 <혼자>


근래 본 적이 없는 강렬한 포스터다. 헤어나올 수 없는 악몽에 갇혀 괴로워하는 모습을 완벽하게 보여주고 있다. ⓒ인디스토리



조그마한 방, 바닥과 책상이 피 칠갑이다. 일정하지 못한 숨소리의 주인공이 당황과 짜증이 섞인 손놀림으로 피를 닦는다. 중도 포기. 그러곤 벽에 붙은 사진들에게로 손을 뻗는다. 수없이 많은 사진들, 동네인 듯한 곳 여기저기를 찍어서 이어 붙여 놓았다. 그 중 한 건물의 옥상에 있는 한 여자, 숨소리는 더욱 거칠어지고 사진으로 뻗는 손은 떨린다. 이제 영화가 시작된다. 


영화 <혼자>는 궁금증을 자아내게 하는 전형적인 방법으로 시작된다. 그 어떤 설명도 없이 다짜고짜 영화의 중요 장면이나 끝 장면을 보여주는 것이다. 이 영화의 첫 장면이 달랐던 건 '롱테이크', 약 4분 간을 한 번에 보여주며 긴장감을 극대화시킨다. 더불어 그 방식이 점진적이라는 점. 좁은 방을 보여주는 데 1초면 끝났을 텐데 말이다. 아무래도 롱테이크는 이 영화가 말하고자 하는 바를 보여주는 점진적인 방식의 주요 수단이 될 것 같다. 여러모로 기대되는 첫 장면이다. 


꿈 속의 그것들은 무엇인가


첫 시퀀스에서 복면남자들에게 당하는 수민. 영화를 다 보고 나니 가장 궁금하다. 이 시퀀스는 꿈일까 현실일까. ⓒ인디스토리



사진으로 뻗은 손이 닿은 옥상, 장면은 실제 옥상으로 옮겨간다. 한 여자가 비명을 지르며 도망치는데 세 명의 복면 남자들이 쫓아와 여자를 죽인다. 맞은 편에서 그 장면을 사진 찍는 남자, 길가는 사람에게 소리쳐 도움을 청하려는데 복면남자들에게 들키고 만다. 길을 건너 곧 들이닥치는 복면남자들, 남자는 급히 집 안으로 들어가지만 복면남자들은 유리창을 부수고 집안으로 들이닥친다. 그러곤 망치로 남자를 가격한다. 


다음 순간 발가벗은 채 어느 정자에서 깨어난 남자, 얼어 죽지 않으려면 무작정 길을 나설 수밖에. 정자가 있는 곳은 산동네로 보이는 어느 동네의 중간 이상 쯤으로 보인다. 남자는 길을 나서 내려간다. 도중에 만나는 칼을 든 남자아이, 계단에 쭈그리고 앉아 우는 어른여자. 그리고 망치를 들고 쫓아오는 복면남자. 


영화는 비교적 초반에 정체를 보여준다. 모르긴 몰라도 남자가 깨어나는 정자부터 꿈이 계속되는 게 아닌가 싶다. 그리고 분명 칼을 든 남자아이, 우는 어른여자, 그녀가 변한 엄마, 망치를 들고 쫓아와 남자를 죽이려는 복면남자는 꿈에 나오는 이들다운 상징이 있을 것이다. 이 상징들을 하나하나 해석하는 건 큰 의미가 없을 듯. 


피 칠갑 되어 있는 남자의 좁은 방, 머리에서 갑자기 흐르는 엄청난 피, 무엇보다 미로처럼 나갈 길이 없을 것만 같은 산동네의 골목길까지, 온통 상징투성이다. 이 역시 해석하는 데에 초점을 맞추는 건 큰 의미가 없을 듯하다. 다만, 영화를 보다 보면 자연스럽게 알게 될 것들, 그 중에서도 알면 좋을 것들은 있다. 칼을 든 남자아이는 주인공 남자의 어린 시절을, 우는 어른여자는 남자의 여자친구라는 걸. 남자를 죽이려는 복면남자는 죄의식으로 똘똘 뭉친 남자를 무너뜨리려 오는 저승사자들이라는 걸, 미로같은 골목길은 남자 내면의 헤어나올 수 없는 혼란을 뜻한다는 걸. 


꿈과 현실의 경계가 자아내는 매력


꿈과 현실의 경계를 표현함에 있어 가장 큰 공을 세운 게 바로 산동네다. 미로처럼 꼬이고 복잡하고 혼란스러운 그곳, 수민의 내면과 같다. ⓒ인디스토리



그렇다. 영화는 주인공 남자 수민이 꾸는 꿈으로 내면을 드러내고 있다. 누구나의 내면이 그렇듯 수민의 내면도 인간의 뇌처럼 생겼다는 산동네 골목길만큼 꼬이고 복잡하고 혼란스럽다. 그러면서 서로 이어져 있으니 답을 구할 수 없는 와중에 문제들만 계속 쌓이는 느낌이다. 


결국 영화가 끝날 때까지 꿈만 꾸는 것 같은데, 그렇다고 꿈이라고만 하기에도 미심쩍다. 종종 꿈이라고 말하기 때문이다. 꿈 속의 꿈이 아닌. 그렇다고 현실처럼 보이나? 그건 또 절대 아니다. 여기서 롱테이크 기법이 빛을 발하는데, 장면의 전환이 거의 보이지 않으니 분명히 꿈으로 끝나는 한 장면의 시작이 현실이 아닌 게 분명하기 때문이다. 꿈과 현실의 경계를 모호하게 하기 위한 기막힌 수법이다. 


왜 감독은 꿈과 현실의 경계를 모호하게 하려 했을까. 그건 비단 꿈과 현실뿐만 아니다. 영화에서 보여지는 모든 것들의 경계가 모호하다. 영화를 보다 보면, 수민의 여자친구를 죽인 게 수민인지 복면남자들인지 알 수 없고, 칼을 든 남자아이가 아버지를 죽인 것인지, 즉 수민이 아버지를 죽인 게 맞는지 알 수 없고, 수민을 찍는 카메라가 수민과 함께 하는지 수민 자체인지 수민이 속한 세계 바깥에 속하는지 알 수 없다. 


경계는 불안해서 절묘하고 미스터리해서 궁금증을 자아내곤 하는데, 이 영화도 그런 매력을 발산하고자 했는지 모른다. 무슨 내용인지, 무엇을 말하려는지 잘 모르지만 절묘하게 궁금증을 자아내는 그런 영화 말이다. <혼자>는 초반에 지극히 스릴러적인 면모를 뽐내며 당장의 궁금증과 추후 계속 이어질 것 같은 궁금증을 자아내는 데 성공했다. 가슴을 조이면서 깜짝 놀라게 하는 공포스러운 스릴러가 아닌, 미스터리에 추격 아닌 추격이 가미된 서스펜스가 주를 이루는 재밌는 스릴러 말이다. 


우리의 본 모습 '혼자', 하지만 가장 멀리하고 싶은 모습


언제나 혼자가 되는 그, 아무리 혼자로 태어난 인간이라지만 혼자가 되고 싶은 인간은 아무도 없다. '인생은 혼자 왔다가 혼자 간다'는 말이 무섭게 다가온다. ⓒ인디스토리



꿈을 꿀 때마다 혼자가 되는 수민, 그는 왜 혼자일까. 그 또한 그의 꿈에서 찾을 수밖에 없다. 꿈에서만인지 현실에서도인지 알 수 없지만 아버지를 죽인 어린 수민, 그는 아마도 폭력적인 아버지 밑에서 컸을 거다. 지금은 혼자 사는 수민 그리고 꿈에서 나와 수민을 책망하는 어머니, 아마도 그는 아버지에게 당하고 사는 어머니를 놔두고 집을 나왔을 거다. 수민이 아무리 어르고 달래도 헤어지려는 여자친구 지연과 돌변하는 수민, 아마도 수민이 지연에게 돌변하여 상처를 주었을 거다. 


그의 잘못이 아니었든 그의 잘못이었든, 수민은 상처가 쌓이고 죄의식이 쌓이고 불안이 쌓이고 불만이 쌓인다. 그건 곧 자신뿐만 아니라 주위 사람들에게, 과거의 나에게, 꿈 속의 사람들에게까지 전달되었을 것이다. 그는 어떻게 하든 혼자가 될 수밖에 없다. 타임루프처럼 꿈 속에서 다시 한 번 기회가 주어지지만 언제나 혼자가 될 뿐이다. 


영화는 초반의 스릴러를 뒤로 하고 후반으로 갈수록 드라마에 치중한다. 아무래도 혼자가 되어 가는 남자의 이야기를 치밀하게 다루기 위해서는, 그 이야기를 역시 롱테이크로 차분하게 따라가기 위해서는 스릴러 형식이 아닌 드라마 형식이 필요했을 것이다. 그래서 중반 이후 지루한 맛이 있는 컷이 나오는데, 바로 그 컷이야말로 수민의 의식 가장 밑바닥에 있는 상처와 죄의식을 드러내니만큼 중요하다 하겠다. 그 컷을 여지 없이 스릴러로 표현했다면, '혼자'라는 느낌이 많이 퇴색되었을 거라 예측해본다. 


영화가 끝날 때 쯤이면 골목길이 낀 사거리 언저리에서 그 어디로도 가지 못하고 고개만 숙일 뿐인 한 남자를 발견하게 되는데, 나 또한 언젠가 그런 느낌을 받은 적이 있었던 것 같다. 도무지 어디로 가야 할지 몰랐었던. 그 누구한테도 손을 내밀지 못했었던. 이 세상에 오로지 나 혼자만 있었던 것 같은. 


외로움은 인지하지도 못한 채 그렇게 갑자기 찾아오는 것 같다. 그 외로움을 몸소 겪을 때면 헤어나오지 못하는 미로 속을 헤매는 것 같다. 인지하지 못하는 건, 인지할 수 없는 건, 외로움을 발산시키는 그 무엇들이 무의식에 오랫동안 쌓이기 때문이다. 더구나 그것들은 오랫동안 쌓이는 만큼 한 번에 없애버릴 수도 없다. 그것들은 '외로움'이라는 이름으로 찾아오지도 않는다. 다양한 이름과 모습으로 찾아와 외로움의 무리를 이루어 우리를 조금씩 괴롭히는 것이다. '혼자'는 이 세상에 홀로 던져진 우리의 본모습이지만, 우리가 가장 멀리하고 힘들어 하는 모습이다. 인간은 자기 자신이 아닌 다른 누구한테서 자신을 찾으려 하지 않는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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