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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보통 사람' 가해자들의 '조국과 민족'을 위한 진심어린 짓거리 <조국과 민족>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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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서평] <조국과 민족>


<조국과 민족-상> 표지 ⓒ비아북



아직도 한 단어도 틀리지 않고 외울 수 있다. 국기에 대한 맹세다. "나는 자랑스런 태극기 앞에 조국과 민족의 무궁한 영광을 위하여 몸과 마음을 바쳐 충성을 다할 것은 굳게 다짐합니다." 2007년에 수정되었다고 하는데, 여하튼 고등학교 때까지 아침 조례 시간이면 빠짐 없이 행하던 그 맹세. 군인이었을 땐 국기 게양 음악이 나오면 언제 어디서 무얼 하든 동작을 멈추고 그곳을 향해 몸을 돌려 엄숙한 자세로 경례를 하였다. 지금도 그 음악이 어디선가 들리면 그냥 지나치지 못한다. 조국과 민족을 향한 몸에 봰 동작이자 감성이다. 


그땐 알지 못했고 알고 싶지도 않았다. 내가 무얼 하고 있는지, 왜 그래야 하는지, 내가 충성을 다짐한 '조국과 민족'이 무엇인지. 깨우쳐서 알게 된 건 아니라서 '알았다'는 말이 정확한 수사인지는 모르겠지만, 하나는 알았다. '나라를 사랑해야 한다' 나아가 '(나는) 나라를 사랑한다' 나라를 사랑하는 건 너무나 당연한 것이고, 나라를 위해서 무엇이든 해야 한다는 생각도 당연했다. 학생이 공부를 열심히 하는 건 학생의 본분, 학생의 본분을 다하는 건, 나라를 위해 학생이 할 수 있는 최선. 


머리가 크니 조국과 민족이 국가를 위해 본분을 다하는 국민을 지켜주지 못한다고 느끼기 시작했다. 지켜주기는커녕 국민이 낸 혈세로 개인의 잇속을 챙기질 않나, 국민 대다수가 반대하는 사업을 역사에 길이남을 만한 돈을 쓰며 밀어부치지 않나, 급기야 국민 몰래 나라를 통째로 넘기려들지 않나... 국가라는 게 무엇인지, 국가는 국민을 위해 존재하는 게 아닌지. 국가라는 이름 하에 거행되는 짓거리가 한심하고 어이없고 무섭기까지 하다. 그런 짓거리는 불과 30여 년 전까지만 해도 드러내 놓고 거행되었다. 


<조국과 민족-하> 표지 ⓒ비아북


국가라는 이름 하에 거행된 '조국과 민족'을 위한 짓거리의 가해자


만화 <조국과 민족>(비아북)은 국가라는 이름 하에 거행된, '조국과 민족'을 위한 짓거리를 색다른 시각으로 조명했다. 바로 '가해자'의 입장에서, '가해자'가 주인공이 되어, 서술된 이야기이다. 자칫 감화될까봐 알고 싶지 않았고, 차마 그 짓거리들을 두고 볼 수 없어서 알 수 없었다. 그렇지만 궁금한 건 사실. 왜 그들은 그러했을까, 어째서 그들은 그런 생각과 행동을 했을까. 누구를 위해서? 무엇을 위해서?


때는 1987년. 안기부로 유추되는 정보기관에서 고문기술자로 명성을 떨치는 젊은 청년 박도훈, 그는 장실장의 인도 하에 조국과 민족의 영광을 위해 바쁜 나날을 보내고 있다. 불행하고 특이한 어린 시절을 장실장 덕분에 잘 보내왔다고 믿는 도훈은, 장실장이 멘토이자 롤모델이다. 도훈은 일본과 금괴 밀수를 추진하다가 고정간첩 '광명산'의 마약 밀수를 돕게 된다. 그리고는 어쩔 수 없이 이중간첩 아닌 이중간첩이 된다. 하지만 장실장과 가깝게 지내는 이중고정간첩 '량강 1호'의 첩보로 광명산이 잡히게 되고 도훈은 위기에 처한다. 도훈의 앞날은?


도훈과 함께 일하는 김대한은 수단 방법을 가리지 않고 굴지의 건설사 회장 자리에 오른 김판구의 아들이다. 그는 '빨갱이'를 잡아 족치며 여기까지 왔다는 자부심이 대단한대, 대한은 다름 아닌 그가 조총련계와 연결되어 있다는 첩보를 입수한다. '조국과 민족'에 대한 대단한 신념을 지닌 대한은 아버지임에도 불구하고, 김판구를 나락으로 떨어뜨리려 한다. 그러는 한편, 장실장의 명령을 받아 홍콩에서 한 남자가 아내를 죽인 사건을 파헤친다. 그런데 그 사건을 간첩의 짓으로 둔갑시키라는, 말도 안 되는 명령이 이어진다. 대한은 어떤 선택을 할까? 


만화는 여러 실제 사건과 인물을 참조한 것 같다. '악의 축' 장실장은 장세동을, '고문기술자' 박도훈은 이근안을, 홍콩간첩조작사건은 '수지킴간첩조작사건'을 참조했다. 이밖에도 당시 전두환 정권 하에서 벌어진 기상천외하고 황당무계하고 무시무시한 조작 사건들을 다뤘다. 저자가 만든 이야기에 실제에서 빌린 인물과 사건을 곳곳에 배치하니 멋진 첩보물이 탄생했다. 기시감을 줄이고 생생함을 더했다. 


'보통 사람'의 조국과 민족을 위한 진심


작가는 만화를 통해서 말한다. 이 가해자들이 조국을 위해서, 민족을 위해서 그러했다고 말이다. 말도 되지 않는 헛소리를 짓거리고 있다고 생각되는데, 그게 이 작품의 노림수인 것 같다. 여기서 더욱 무서운 건 뭐냐고? 그들은 지극히 평범한 '보통 사람'이라는 것. 특수하게 길러졌거나 훈련받은 게 아니다. 또한 그들은 지극히 정상적인 사고 체계를 통해 '진심으로' 조국과 민족을 생각했다는 것. 마약을 상시 복용해서 정신이 돌아버렸거나 애초에 이상이 있는 바보라서 그런 게 아니다. 


만화를 보며 그림체, 말투, 배경 등 모든 면에서 느낄 수 있다. 적어도 실무자들은 그들이 행하는 끔찍한 일을 그저 '일'로 받아들이고 있다는 것을. 그런 생각을 한다는 것에서 영화 <박하사탕>을 보고 받은 충격을 다시 한 번 받았고, 그 눈쌀 지뿌려지고 가슴이 오므라들게 하는 잔인함은 영화 <남영동 1985>와 <변호인>을 생각나게 했다. 그들 모두는 '조국과 민족'을 위해 일했다. '일했다고 믿었다' 라고 말하고 싶지만, '일했다'고 하는 게 가해자의 진심이다. 


이쯤 되면 혼란이 찾아오지 않을 수 없다. 방법이 잔인했을 뿐 진심으로 조국과 민족을 위해 일을 했다는 그들, 그들도 또 다른 피해자가 아닌가 라는 생각이 들지 않을 수 없는 거다. 더군다나 평범하다 못해 귀엽기까지(?)한 그들의 모습을 보고 있노라면, 더 이상 잔인하지도 끔찍하지도 않게 느껴질 때가 온다. 장난처럼 느껴지는 거다. 


작가는 왜 그런 그림체로 가해자의 입장에서 한국 현대사의 가장 어두운 그림자를 그려냈을까. 아이히만으로 상징되는 한나 아렌트의 '악의 평범성'을 떠올리게 하려는 의도일까. 홀로코스트가 광신도나 반사회적 성격장애자가 아닌 상부의 명령에 순응한 지극히 평범한 사람들에 의해 자행되었음을 말하는 개념이다. 유대인 말살을 저지른 아이히만은 그저 자신의 직무를 성실히 수행한 것에 불과하다는 것. 여기에 <조국과 민족>의 주인공 가해자들은 나라를 사랑하고 나라에 충성하는 진심이 얹혀 있다. 


'악의 평범성'과 차원을 달리하는, 계속되는 반인륜적인 짓


이슬람의 꾸란에서 최초로 시작되었다는 '고의적인 살인'과 '고의적이지 않은 살인'의 구분. 고의적인 살인에는 사형을 내렸고, 그렇지 않은 살인에는 벌금을 물었다고 한다. 그렇다면 조국과 민족을 위해서든 지시에 충실히 따르든 그들이 저지른 반인륜적인 짓거리는 고의일까 고의적이지 않은 걸까. 자기의 행위에 의하여 일정한 결과가 생길 것을 인식하면서 그 행위를 하는 짓임이 분명하기에 '고의'라고 하겠다. 직무를 성실히 수행하는 것과는 별개로 그 행동이 나라에 충성하는 거라고 믿었기 때문이다. 


그런 면에서 <조국과 민족>이 내포하고 있는 바는, 말하고자 하는 바는 무시무시하다. '악의 평범성'과는 차원을 달리한다. 거기에는 상명하복에서 오는 복종과 갈등 없는 기술적 임무만이 존재해 틀이 깨지면 일순간에 무너진다. 하지만 여기에는 자신도 어쩔 수 없는 맹목적 사랑과 충성이 도사리고 있기에, 틀이 깨져도 무너지지 않는 것이다. 아주 오래도록 암약하며 다른 형태로 계속된다. 


우리나라가 수십 년이 지나도 바뀌지 않은 것처럼 느껴지는 이유 중 하나가 거기에 있지 않을까, 싶다. '고문도 예술'이라는 망언 중에 망언도 서슴지 않았던 고문기술자 이근안이 하나의 사례가 될 텐데, 그는 김근태 의원을 고문하고 납북어부 김성학 씨를 감금한 혐의로 지명수배된 후 10여 년의 도피생활 끝에 자수해 감옥살이를 하는 도중 목사 안수를 받기도 했다. 2011년 말에 김근태 의원이 사망하고는 2012년 2월에 책을 펴냈는데, '그 당시에는 애국으로 한 일. 그때로 돌아간다 하더라도 똑같을 것이다'라며 사죄를 회피했다. 또한 '정치형태가 바뀌니 역적이 됐다. 멍에를 내가 지고 가고 있다'며 변명하기도 했다. 이 행태를 어떻게 설명할 수 있을까. 


이근안을 '시대가 만들어낸 괴물'이라고 표현하는 이들도 있다고 한다. 참으로 가져다 붙이기 쉬운 수식어다. 누구라도 어느 정도 납득이 가게 만드는 수사이기 때문이다. 그런데, 그는 국가의 명을 받는 사람임과 동시에 국가가 무엇을 원하는지 예측하고 행동하기도 하는 바 누군가에게는 국가 그 자체로 비치기도 할 것이다. 


조국과 민족을 사랑하는 진심어린 마음에서 충성과 애국심으로 똘똘 뭉쳤다고 해서, 그렇게 저지른 반인륜적인 짓을 용서해야 할까. 용서할 수 있을까. 그땐 그럴 수밖에 없었다고, 그땐 다른 무엇도 아닌 바로 그것이 애국의 길이었다고 말이다. 그에게도 그들에게도 만화에 나오는 것처럼 분명 어떤 사연이 있을 거다. 하지만 분명한 건, 그들도 인지하고 있었다는 것이다. '애국'이지만 '나쁜 짓', 조국과 민족이라는 대의를 위해선 소수의 희생이 필요하다는 당위 또는 자기 합리화. 그 시대를 다시 돌아봐야 한다. 더 다양한 시각으로, 더 깊이 있게, 더 활발하게. <조국과 민족>은 이 세 층위를 고루 만족시킨 수작이라 하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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