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오래된 리뷰] <인정사정 볼 것 없다>
20세기를 마감하는 1999년, 한국 영화계에는 <쉬리>라는 괴물이 출현한다. 그 위상이 너무 압도적이라 다른 영화들은 보이지 않는다. 이 영화 <인정사정 볼 것 없다> 정도가 대항할 수 있을까? ⓒ시네마서비스
1999년은 한국영화계에서 가장 중요한 한 해이다. 한국영화 부흥의 분기점이라고 할 수 있겠다. 다름 아닌 <쉬리>의 출현 때문이다. '한국형 블록버스터'라는 신조어를 낳은 이 영화는, 30억 원이라는 당대 평균 영화제작비를 훨씬 상회하는 제작비부터 화제를 불러 일으키더니 서울 245만 명, 전국 620만 명을 동원해 한국영화사 최고의 흥행작으로 등극했다. 한국에서 영화를 전략적으로 접근해 성공한 첫 사례라 하겠다. 이후 한국영화는 급성장을 거듭했다. 1999년은 '한국영화 르네상스'의 시작이다.
이밖에 세기말 1999년을 수놓은 한국영화는 어떤 게 있을까. <주유소 습격사건> <해피 엔드> <여고괴담 2> <내 마음의 풍금> <태양은 없다> <간첩 리철진> 등, 의외로 크나큰 족적을 남긴 영화는 없는 것 같다. <쉬리>의 위상이 너무 압도적이라 상대적으로 작게 보이는 것이리라. 그 와중에 <쉬리>와 쌍벽을 이루는, 아니 영화 자체만 보자면 훨씬 능가하는 영화가 하나 존재한다. 헐리우드 영화 <식스 센스>도 아니고, <매트릭스> 도 아니다. 이명세 감독의 <인정사정 볼 것 없다>가 그 주인공이다.
장면 하나하나에 쏟아부은 인정과 사정
영화는 형사 대 살인범, 지능적이고 날쌘 살인범 대 무식하고 집요한 형사의 대결을 다룬다. 그 대결로 다른 그 어떤 것도 수렴된다. 그렇다면 거기엔 액션과 폭력과 욕지거리가 빠질 수 없을 거다. 아마 모르긴 몰라도 코믹적인 요소도 있을 거고. 으레 형사물 영화가 그래왔으니까.
그런데 <인정사정 볼 것 없다>는 제목과 다르게 장면 하나하나에 인정과 사정을 엄청나게 쏟아부었다. 아닌가. 인정사정 볼 것 없이 쏟아부은 건가. 흑백톤에서 보여주는 형사들의 무식한 때려잡기, 차분하고 묘묘한 배경에서 보여주는 살인범의 아름답기까지 한 살인 장면. 이 둘의 아이러니한 대조가 영화의 시작을 알린다. 이미 이 영화의 팬이 되어버린 기분이다.
영화는 시작부터 장면 하나하나에 엄청난 공력을 쏟아붓는다. 스토리와 메시지는 확고하고 미장셴은 화려하고 실험적이고 엄청나다. ⓒ시네마서비스
마약상을 살해하고 도주한 장성민(안성기 분). 우 형사(박중훈 분)와 김 형사(장동건 분)을 비롯한 강력계 형사들은 장성민을 비롯해 살인 현장에서 장성민과 함께 있었을 것으로 추정되는 이들을 끈질기게 추적해 한 놈씩 잡아들인다. 그렇게 실마리를 잡아 장성민과 맞딱뜨리지만 번번히 놓치고 만다. 어느덧 사건이 발생한 지 70일이 넘어가고 그들은 다시 한 번 장성민과 맞딱뜨린다. 과연 그들은 장성민을 잡을 수 있을까?
모든 장면에서 찾을 수 있는 영화적 미학 '미장셴'
<인정사정 볼 것 없다>의 영화적 미학은 스토리에 있지 않다. 장면마다 수없이 다양한 미장셴이 수놓아져 있다. 살인 장면에도, 액션 장면에도, 추격 장면에도, 면 대 면 장면에도. 거기에서 미학을 찾을 수 있다. 아니, 찾지 않아도 느낄 수 있을 것이다. 이 장면 장면을 완벽하게 보여주기 위해 마련된 시나리오 또한 완벽하다 하겠다.
영화는 완벽한 계산으로 만들어진 장면 안에서 극사실주의를 표방한다. 정적인 미장셴의 극치를 보여주는 김지운 감독 영화에 비해, 이 영화는 슬로우모션으로 동적이면서도 정적인 미장셴을 보여준다. 만들어 놓고 카메라로 찍은 게 아니라, 카메라로 찍으며 만든 것이다.
그러며 종종 우스꽝스럽기까지 한 극화된 장면을 넣어 예술로의 영역까지 확장한다. 그림자로만 액션을 표현하기도 하고, '우당탕탕' 슬랩스틱으로 액션을 표현하기도 한다. 그림자극, 코미디극에 대한 존경의 표시이자 오마주일지 모르겠다. 그런 장면들이 치밀한 계산 하에 만들어졌다는 게 놀랍다. '그렇게는 일부러라도 못하겠다'는 말이 있는데, 이런 류의 장면을 일부러 만들기는 정말 어렵지 않을까 싶다.
완벽한 계산으로 만들어진 장면, 그 안에 극사실주의를 넣는다. 상반된 두 영역을 하나로 합치는 어마어마한 능력을 선보이는 것이다. ⓒ시네마서비스
무식하게 집요하게 악당을 추격하지만 번번히 놓치고 마는 형사, 데이빗 핀처 감독의 <세븐>에서 요리조리 잘도 도망가는 살인범과 어설프게 뒤쫓다가 외려 다치고 마는 형사의 모습과 겹친다. 진중하고 으스스한 <세븐>의 분위기에 슬랩스틱을 연상시키는 형사의 추격이 실소를 불러일으켜 조금은 어울리지 않았다면, <인정사정 볼 것 없다>에서의 형사의 조금은 어설픈 듯한 추격은 제 몸에 맞은 듯 완벽했다. '잡힐 듯이 잡힐 듯이 잡히지 않는' '보일 듯이 보일 듯이 보이지 않는'이라고나 할까. 그렇지만 어떻게든 잡아야 형사 아니겠는가.
영화에는 김 형사 대 장성민, 우 형사 대 장성민의 면 대 면 대결이 나오는데, 이 장면 또한 길이남을 일품이다. 앞엣것은 카메라의 위치가 면 대 면의 긴장감을 극도로 높여주었고, 뒤엣것은 그들의 만남 자체에서 풍겨져 나오는 아우라가 엄청났다. 배경 음악이 크게 일조했는데, 특히 뒤엣것에서 흘러나오는 비지스의 '홀리데이'는 이 장면을 예술의 영역으로 끌어올리는 데 결정적 역할을 했다. 한국영화사에 길이 남을 명장면이다. 한편 우 형사와 장성민은 중간에 한 번 더 맞딱뜨리는데, 복잡하기 그지 없는 산동네에서의 추격전이다. 요리조리 왔다갔다 하며 숨바꼭질 하는 것처럼 보이는 이들의 행동이 재미있으면서도 스릴감 넘친다.
'무조건 잡아야 형사다'류의 독보적 존재감
아무래도 영화는 90년대 한국영화를 완전히 벗어나진 못했었던 듯하다. 전체적으로 풍겨나오는 이미지가 21세기 현대의 그것과는 거리가 멀다. 작년에 개봉해 기록적인 흥행을 한 바 있는 <베테랑>에서 <인정사정 볼 것 없다>의 장면들이 많이 오버랩 되는 건 그 때문이겠다. <베테랑>은 다분히 고전적인 액션과 스토리의 조합이었다. 지극히 현대적인 액션과 스토리에 지친 관객들에게 완벽히 먹여들었던 예다.
영화를 끌고 가는 하나의 명제, '무조건 잡아야 형사다'. 우형사는 그 명제를 쫓기 위해 다른 어떤 것도 관심이 없다. 이 영화가 독보적인 존재감을 내보이는 데 절대적인 공헌을 한다. ⓒ시네마서비스
영화의 미학이 살인범을 비롯한 악당과의 액션에 집중되어 있던 반면, 스토리의 축은 형사들의 뚝심에 박혀 있다. '무조건 잡아야 형사다'라는 구호 아래 살인범을 잡기 위해 막무가내로 들이대는 것이다. <투캅스>류의 형사 느낌에서 크게 나아가진 못한 것 같지만, 그것을 표현해 내는 감독의 역량이 크게 진일보 했기에 느끼는 바는 천지차이다. 90년대와 이후 세대를 이어주는 교량 역할을 하는 영화라고 볼 수도 있겠지만, 이른바 '독보적인' 존재감을 발발하는 영화라고 보는 게 맞겠다.
이명세 감독은 2000년대 중반에 강동원과 함께 <형사 Duelist> <M>으로 새로운 미장셴을 선보이려 하지만 흥행과 비평 모두에서 처참하게 무너지고 만다. 강동원에게도 역시 흑역사로 남아 있다. 이후 이명세 감독은 예전의 기량을 회복하지 못하고 있다. 그의 미학을, 그의 디테일을 다시 한 번 제대로 접하는 날이 있기를 기대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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