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위대한 예술가 쳇 베이커의 불행했지만 빛났던 시절 <본 투 비 블루>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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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리뷰] <본 투 비 블루>


위대한 예술가 '쳇 베이커'. 그는 재즈 음악 역사상 다시 없을 천재 뮤지션인 바, 외모도 출중해 '재즈계의 제임스 딘'으로 불릴 정도였다. 하지만 1950년대 말부터 자신이 대표하는 웨스트 코스트 재즈가 쇠퇴하고 그에 맞물려 마약 인생이 시작된다. 영화 <본 투 비 블루>는 쳇이 불행했던 그 시절에 대한 이야기다. 영화 <본 투 비 블루> 포스터 ⓒ그린나래미디어(주)



천재 예술가, 천사와 악마가 양 어깨 위에 앉아 삶을 조종한다. 천사는 신을 대리해 그에게 천재적인 능력을 주었다. 어느 누구도 감화되지 않을 수 없는, 예술적 능력이다. 그런데 예술가에겐 단순히 '잘'하는 수준을 넘어선 그 무엇이 필요하다. 예술가들은 그 무엇을 보여주기 위해 평생 계속한다. 


천사가 아닌 악마가 그 무엇을 충족시켜줄 수 있다. 천사가 준 능력으로는 감당하지 못할 때 악마의 속삭임에 귀를 기울인다. 악마가 주는 능력은 너무나도 강력하다. 그것이야말로 인간이 감당할 수 없기에 무언가가 필요하다. 술이나 마약, 악마를 대리한 것들이다. 


위대한 트럼펫 연주자 쳇 베이커의 불행했던 시절


모든 걸 잃고 다시 일어서려는 쳇 베이커 앞에 제인이 나타난다. 영화는 제인의 출현으로 극적인 변곡점을 맞는다. 임체감을 선사한 것이다. 영화 <본 투 비 블루>의 한 장면. ⓒ그린나래미디어(주)



위대한 트럼펫 연주자 '쳇 베이커'. 그는 재즈 음악 역사상 다시 없을 천재 뮤지션인 바, 외모도 출중해 '재즈계의 제임스 딘'으로 불릴 정도였다. 그는 재즈를 대표할 단 한 사람 '찰리 파커'의 사이드 맨으로 재즈계에 데뷔하며 찰리 파커의 영향을 다분히 받았다. 실력도, 삶도. 


찰리 파커가 약을 구하기 위해 친구의 악기까지 훔쳐 팔아먹었다는 일화는 유명한데, 쳇 베이커 또한 평생 동안 마약과 싸워야 했다. 그는 약을 구하기 위해 부인을 사창가로 보내기도 했었다. 1950년대 말부터 자신이 대표하는 웨스트 코스트 재즈가 쇠퇴하고 그에 맞물려 마약 인생이 시작된다. 영화 <본 투 비 블루>는 쳇이 불행했던 이 시절에 대한 이야기다. 


1960년대 중후반의 쳇은 마약으로 감옥을 들락날라하고 갱한테 테러를 당해 앞니가 다 부러지는 치명상을 당했으며 결혼 생활을 두 번이나 실패한 상태였고 '한 물 갔다는' 평이 퍼져 있었다. 정신적으로나 물리적으로나 연주를 하기 힘들었다. 그 와중에 그 자신의 전기 영화에 그가 출현하게 되었고 그 앞에 제인이 나타난다. 


영화는 뜻밖에 제인의 출현으로 극적인 변곡점을 맞는다. 다분히 쳇 중심으로 전기적 영화가 될 줄 알았건만, 제인이 입체감을 선사한 것이다. 실제로는 존재하지 않는 이 여인은 쳇을 진심으로 사랑하여 그와 함께 살며 옆에서 극진히 보필한다. '인간 쓰레기'와 다를 바 없는 삶을 살았던 쳇, 그의 부활과 제인과의 사랑은 한 몸이다. 과연 그들의 사랑과 그의 부활은 함께 끝까지 갈 수 있을까. 아슬아슬하다. 


천사의 연주를 선사하는 악마의 속삭임 '마약'


쳇 베이커의 인생을 파탄나게 한 원흉인 마약. 하지만 그는 평생 동안 마약에서 벗어날 수 없었다. 비록 '악마의 속삭임'이지만 '천사의 연주'를 선사할 수 있게 도와주기 때문이다. 영화 <본 투 비 블루>의 한 장면. ⓒ그린나래미디어(주)



제인의 헌신과 본인의 피나는 노력으로 마약은 끊었지만 앞니가 없는 상태에서 제대로 된 연주를 하기는 불가능에 가깝다. 그런데 그가 할 수 있는 게 연주밖에 없고, 무엇보다도 연주를 너무나도 하고 싶었다. 제인을 비롯해 그를 진심으로 사랑하는 이들은 고통스럽기 짝이 없는 고행을 그만두라고 말한다. 


쳇은 귓등으로도 듣지 않고 고통스럽고 지루한 고행을 계속한다. 피나는 노력 같은 말은 그에게 어울리지 않는다. 그러던 어느 날 그에게, 아니 그들에게 기회가 찾아온다. 사실 감옥에 다시 가지 않으려면 어떻게든 일을 얻어야 했다. 결과적으로 일자리를 잡으려는 것과 기회가 같이 찾아 온 것이다. 


우여곡절이 없을 수 없다. 연주 실력은 전에 없이 떨어졌다. 그러나 개성이 뚜렷하고 '좋은' 음악이었다는 것. 비로소 그는 실력이 출중한 예술가에서 예술혼 가득한 진짜 예술가가 되었다. '삶'을 살아보고 왔기에 들려줄 수 있는 음악이었다. 그는 제2의 전성기를 구사하며 상승가도를 달린다. 그러나 불행의 그림자는 다시금 그를 찾아온다. 


그가 재기하고 나서도 약을 끊지 못했다는 건 알려진 사실이다. 마약 없이는 그 중압감을 이길 수 없었고 마약이 있어야 진정한 연주를 선보일 수 있었다고 한다. 그야말로 '악마의 속삭임'. 누구라도 한 번쯤 겪어봤을 이 가혹한 딜레마는 그에게 너무 자주 찾아왔다. 영화에서 쳇은 어떤 선택을 했을까. 익히 알고 있지만, 영화이기에 다른 결말을 기대해본다. 기대하고 싶다. 


자신만을 상처 입혀 위대한 연주를 선 보일 수 있다면?


쳇 베이커는 '연주'와 '사랑'의 갈림길에서 일생일대의 고민을 한다. 다시 없을 절대 부활의 기회에서, 마약에 손을 대면 기회를 완벽히 잡을 수 있지만 그의 사랑은 영영 사라진다. 어떤 선택을 할 수 있을까. 영화 <본 투 비 블루>의 한 장면. ⓒ그린나래미디어(주)



마약은 쳇의 가장 빛나는 순간들을 함께 해왔다. 지배했다는 표현이 맞을까. 그가 마약에 손대지 않았다면, 우린 그 순간들을 지켜보지 못했을 수도 있다. 그에게 인생 굴곡도 없었을 것이다. 이름은 적당히 떨쳤을지 모르지만, '쳇 베이커'라는 콘텐츠는 남아 있지 않았을 테다. 그래서, 마약을 했어야 한다는 건가?


극 중에서도 나오지만, 그는 찰리 파커를 보고 '오로지 자신만을 상처 입히던 분'이라고 했다. 지독히도 약을 했던 찰리 파커를 옹호하면서 했던 말이라 언뜻 와 닿지 않는데, 거기에 '고독'과 '두려움'을 넣으면 이해가 된다. 찰리 파커나 쳇 베이커나 고독과 두려움에 맞서 싸웠으며, 그 때문에 약을 하면서 자신만을 상처 입혔던 것이다. 자신만 상처 입으면 신의 대리인으로서의 예술혼을 많은 이들에게 선보일 수 있었다. 


그렇다면, 극 중에도 나오는 반가운 전설적 인물들인 '마일스 데이비스'나 '디지 길레스피'를 비롯한 수많은 예술가들은? 그들 중에는 애초에 마약 같은 거에 의지하지 않고도, 마약에 빠졌지만 회복하고 나서 더 좋은 예술혼을 선보였던 이들이 많다. 어떻게 설명할 수 있을까? 


여기서는 누가 잘했고 누가 잘못했다는 식의 공방은 불필요해 보인다. '어떻게'가 중요해 보이지 않나 싶다. 많은 논란이 있지만, 적어도 예술에서는 그래야 한다고 생각한다. 그 누구보다 파렴치 했지만 천재적이었던 그였기에 이 논란과 이 주장을 피해갈 수 없다. 누군가는 그렇게 말할 수도 있겠다. 마약을 해서 좋은 음악을 들려주는 걸 옹호한다고 쳐도, 그로 인해 그가 떵떵거리며 사는 건 볼 수 없다고 말이다. 하지만 절대적으로 그들은 불행하다. 예술과 삶을 바꾼 거라고 하면 이해가 되겠는가. 


오직 그 하나가 아니고서는 아무 의미도 없는 삶. 우리는 그런 그들을 두고 '위대한 삶'이라 말하지 않는다. 위대한 삶이란 지극히 일반적인, 끝없는 반복을 묵묵히 걸어가는 삶이다. 반면 그들의 삶은 '위대한 무엇'이라 해야 맞을 것이다. 쳇 베이커의 경우, 그것은 '위대한 연주'였다고 해야 할까. 그것이 '위대한 사랑'과 같은 길을 걸었으면 어땠을까 하는, 불행한 그의 삶에 비추어 생각해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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