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리뷰] <부산행>
여러모로 '적절한' 영화다. 연상호 감독의 작가주의적 집요함이 블록버스터에 잘 녹아들었고, 이 영화로 할 얘기가 무궁무진하게 만들어놨다. 영화 <부산행> 포스터. ⓒNEW
지난 5월에 <곡성>을 보고는 곡성군은 고사하고 곡성 비슷한 곳도 생각하기 힘들었다. 영상의 힘이 대단하구나, 싶었다. 채 3개월도 안 되어 그 힘을 또다시 느꼈다. 공교롭게도 수원에서 <부산행>을 보고 바로 ‘부산행’ 기차를 타야 했는데 도무지 발 길이 떨어지지 않았다. 더군다나 목적지는 대전, 영화에서 중요 키포인트가 되는 지점이다. 결국 한 시간 정도 몸과 마음을 안정시키고 기차에 몸을 실었다. 그래도 나름 리뷰에 힘을 싣고자 기차 안에서 글을 쓴다.
좀비의 출현에 맞서는 사람들의 사투
영화는 좀비의 출현에 맞서는 사람들의 사투를 그린다. 많은 고민을 했을 것이다. 주인공은 왜 부산행 열차를 탔어야 했는가, 적절한 사연이 필요하다. 주인공과 함께 사투를 벌일 이들은 어떻게 할 것인지, 모두 사연을 붙여 각각의 캐릭터를 부각시켜야 하나 큰 덩어리에 속해 있으면서 상황에 따라 변하는 인간 본성의 매개체로 작동하게 해야 하나. 사태의 원인 규명에 시간을 나눌 것인가, 사태 자체에 최대한 시간을 할애할 것인가. 제목이 그러하니 부산에 도착할 건데, 그때까지 누구를 어떻게 죽일 것인가. 부산에 도착한 이후를 어떻게 보여줄 것인가. 장르 특성 상 후속편에 대한 생각을 하지 않을 수 없는데, 영화 전체의 방향을 결정하는 중요한 부분이기에 심사숙고해야 한다.
<부산행>을 연출한 연상호 감독은 그동안 애니메이션만을 연출해왔다. 그의 작품 <돼지의 왕> <창> <사이비>를 모두 보았는데, 특유의 ‘집요함’을 엿볼 수 있었다. 인간 내면을 밑바닥까지 핥고 사회 문제를 처절하게 드러냈다. 비현실적인 요소들로 현실을 너무도 리얼하게 그려냈다. 그런 그가 모든 면에서 블록버스터임을 감추지 않는 실사 영화를 들고 나온 건 의외였다. 그만이 보여줄 수 있는 집요함을 이 큰 영화에 잘 녹여낼 수 있는 자신감이 있었을 것이다. 그렇게 영화는 좀비의 출현이나 그에 따른 대응, 부산으로 가는 길이 아닌 기차라는 공간에 포커스를 맞춘다. 매우 적절한 선택이었다. 특히 좀비에, 별의별 이유로 출현한 좀비에 포커스를 맞추는 영화는 너무 많이 나왔다.
우리는 내부에서 좀비가 탄생하고 그들과 싸우다가 급기야 우리끼리 싸운다. 진짜 공포는 무엇인가. 영화 <부산행>의 한 장면. ⓒNEW
좀비는 미국의 베트남전쟁 패전에 대한 공포로 태어났다. 죽여도 죽여도 끊임없이 공격하는 게릴라들의 모습이 흡사 좀비와 닮아 있다. 아니, 연상시킨다. 애초에 연상할 수 있게 만들어졌을 테다. 바야흐로 작금 세계는 ‘테러’의 시대, 한국은 ‘지옥’의 시대이다. 끝없이 테러를 자행하는 이들을 좀비로 볼 수 있을까? 아마 그럴 거다. 차라리 속이 시원하겠다. 당면한 적이 있을 테니까. 그렇다면 한국은? 북한인가, 일본인가, 중국인가, 미국인가, 러시아인가. 유럽의 대 테러 집단을 향한 시선과는 차원이 다르다. 우리는 내부에서 좀비가 탄생하고 그들과 싸우다가 급기야 우리끼리 싸운다.
영화가 시작하고 예상보다 일찍 좀비가 출현한다. 이미 조짐은 한참 전에 보인 바, 사람들이 가장 많이 모이는 곳 중 하나인 서울역에도 나타났고 그 중 단 하나가 부산행 열차에 탔을 뿐이다. 아직 제정신일 때 열차에 탄 그녀는 곧 좀비로 변하고 순식간에 열차 전체를 덮친다. 기차 밖 세계에서는 좀비의 출현을 ‘폭동’이라 치부해 열차 내 생존자들을 혼란으로 밀어 넣는다. 오히려 연유를 채 생각할 겨를도 없이 덮쳐오는 위협을 피해 도망가야 하기에 혼란스럽지 않을 수도 있겠다. 이성은 작동을 멈추고 본능만이 살아 움직인다.
이기적 유전자와 이타적 유전자의 격렬한 충돌
본능은 여러 층으로 갈라져 나와 격렬히 부딪힌다. 살고자 도망친다. 나 혼자 또는 나를 비롯한 ‘이쪽’만 살고자 한다. 자칫 이쪽을 위험에 빠뜨릴 행동은 가급적 삼간다. 그러다가 누군가는 또 다른 본능에 눈을 뜬다. 나와 같은 사람이라는 이유로 위험을 무릎 쓰고 구하려는 마음 말이다. 그 마음들이 모여 강한 힘을 발휘한다. 혼자라면, 서로를 생각하지 않은 여럿이라면 절대 하지 못할 과감하고 강력한 행동을 실행에 옮긴다. 성공한다.
하지만 이기적 유전자는 여전히 강력하다. 이번엔 이기적 유전자들이 뭉친다. 이타적 유전자들이 뭉친 것보다 훨씬 강력하다. 이기적 유전자의 조직이 이타적 유전자의 조직을 완전히 밀어낸다. 자신만 살겠다는 강력한 힘이 발휘한 것이다. 거기엔 맹점이 있다. 이기적 유전자는 결국엔 자기 자신만 빼고 모두를 절벽으로 밀어 넣을 거라는 사실 말이다. 어느 누구도 믿을 수 없다. 죽음의 구렁텅이에서 같이 빠져나온 사이일지라도.
이타적 유전자들에게도 맹점은 있다. 돌이킬 수 없는 위험이 닥쳤을 때 자신의 차례가 온 걸 알아챈 듯 이 한 몸을 장렬히 던진다. 나머지는 위험에서 벗어날 수 있다. 그렇지만 계속해서 이어지는 죽음의 행렬로 조직은 약해질 뿐이다. 결국 아무도 남지 않게 된다. 한 사람이 나서서 희생하기 전에 모두가 달려들어 위기를 타파할 순 없을까. 답답한 감이 없지 않아 있다.
본능은 여러 층으로 갈라져 나와 격렬히 부딪힌다. 나 혼자 또는 나를 비롯한 ‘이쪽’만 살고자 한다. 그러다가 누군가는 또 다른 본능에 눈을 뜬다. 나와 같은 사람이라는 이유로 위험을 무릎 쓰고 구하려는 마음 말이다. 영화 <부산행>의 한 장면. ⓒNEW
결국 어떤 종류의 인간이든 당면한 거대 위협을 피하기 힘들다. 속절없이 죽어가거나 힘겨운 사투 끝에 죽어가거나 겨우겨우 살아남아 죽음보다 못한 삶을 살아야 한다. 여느 영화에서는 살아남는 이가 겁쟁이, 아이, 엄마, 노인 등인데 <부산행>에서는 어떨까.
이런 모습을 여실히 보여주는 이 영화의 좀비는 여타 미국 영화의 자기 위안적 좀비와 비할 바가 아니다. 비현실적인 요소들로 가장 리얼한 현실을 보여주는 연상호 감독답게, 그가 만들어낸 좀비는 너무나도 현실적이다. 눈에 보이지만 실체를 모른다. 언제, 어디서, 어떻게, 왜 생겨나 나를 위협하는지 모른다. 설령 알게 되더라도 다름 아닌 ‘나’ 또는 ‘우리’ 때문에 생겨난 거란다. 기막힐 노릇이다. 달아날 구멍이 없다.
피할 수 없는 신파와 입체적이지 못한 캐릭터
영화는 깜짝 놀라게 하는 장면은 많지 않다. 시종일관 심장을 쥐고 놓지 않을 뿐이다. 기차라는 폐쇄된 공간에서만 이뤄지는 인간과 좀비와의 격렬한 맨손 액션은 <에일리언> 시리즈 류의 괴수 영화를 생각나게 한다. 캐릭터성이 전혀 부과되지 않은 채 한 덩어리가 되어 달려드는 좀비들의 모습은 <월드워 Z>를 생각나게 한다. 좁고 한정된 공간에서 많지 않은 인간들만 있음에도 첨예하게 갈라지는 한심하지만 다름 아닌 우리들의 모습은 <설국열차>가 생각나게 한다. ‘작가주의’ 감독으로서의 모습을 드러내면서 블록버스터로서의 모습을 피하지 않는다.
영화는 깜짝 놀라게 하는 장면은 많지 않다. 시종일관 심장을 쥐고 놓지 않을 뿐이다. 영화 <부산행>의 한 장면. ⓒNEW
재난 SF 영화에서 빠짐없이 등장하는 게 바로 ‘신파’인데, 이 영화도 장르가 지향하는 걸 피할 수 없는바 신파적인 요소가 곳곳에 나온다. 다름 아닌 이타적 유전자들의 희생 장면에서. ‘피할 수 없으면 즐겨라’는 말이 있듯이, ‘신파를 피할 수 없으면 눈물바다로 만들어라’가 정답일 것이다. 죽음의 행렬을 다루는 영화에서 이타적 유전자들의 희생은 불가피한바, <부산행>은 완벽에 가깝게 그 고난의 임무를 완료한다. 그 중심에는 아이가 있고, 아이의 마음을 가진 어른과 아이의 마음을 가지게 된 어른이 있다.
한 가지 아쉬운 점이 있다면, 상황에 초점을 맞추다 보니 입체적인 캐릭터가 없다는 점이다. 이문열의 소설 <필론의 돼지>에 나오는, 격렬한 대립 상황에서 아무것도 하지 않는 주인공 같은 인물 말이다. 그나마 가장 입체적인 인물은 영화에서 이기적 유전자의 화신 같은 삼천리 고속 상무라는 자였다. 그렇지만 그는 인간 본능의 한 측면을 충실히 구현했을 뿐, 제3의 모습을 보여주진 않는다.
작금의 한국 사회를 보여주다
<부산행>에는 격렬히 부딪히는 덩어리들이 있을 뿐이다. 혹자는 이들을 인간군상이라 말할지 모르겠는데, 필자가 보기엔 인간군상이라기보다 세력군상 같았다. 그렇게 보니, 이타적 유전자 조직도 완전한 이타를 행할 수 없다는 사실을 알 수 있다. 그들도 이기적 유전자 조직까지 품에 안기는 힘들지 않는가.
그래서 영화는 작금의 한국 사회를 칼로 베어 보여주고 있는 듯한 인상을 준다. 입체적인 인물이나 생각은 사라지고 오로지 너(너희)와 나(우리)로 갈라져 대립하고 있는 사회, 그 사이 어딘가 위치한 이들은 아예 대상화조차 되지 않는 사회, ‘회색분자’라는 말이 나올 기반조차 없는 사회 말이다. 좀비 대 인간이고, 인간 대 인간이고, 이기적 대 이타적이다.
유일한 희망은 ‘아이’다. 아이처럼 맑은 영혼의 소유자다. 그들은 누가 뭐라 해도, 어떤 상황에서도 소신과 신념을 굽히지 않는 강인한 영혼의 소유자이기도 하다. 그들이 만든 세상이어야만 한다. 영화 <부산행>의 한 장면. ⓒNEW
유일하다고까지 말할 수 있는 희망은 ‘아이’다. 아이처럼 맑은 영혼의 소유자다. 그들은 누가 뭐라 해도, 어떤 상황에서도 소신과 신념을 굽히지 않는 강인한 영혼의 소유자이기도 하다. 그들이 만든 세상이어야만 한다. 그렇지 않을 바엔 영화에서처럼 다 쓸어버리고 그들만 남겨져야 한다, 라고 말하고 싶다. 과연 그 힘은 어디에서 나오는가. 올바르고 선하게 자라난 본성이 아직 현실의 벽에 부딪히기 전, 보호받고 있기 때문이다. 그들을 지키며 ‘현실의 벽’을 허물어야 한다. 혹은 그들이 무너뜨릴 수 있도록 기반을 만들어줘야 한다. 서울에서 부산까지 그 어느 때보다 빨리 갈 수 있는 시대에 도달했지만, 그만큼 시야는 좁아지고 살 길 또한 좁아지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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