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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래된 리뷰

괜찮은 삶이란? 끊임없이 부딪히고 깨닫고 성장하는 삶 <드라이빙 미스 데이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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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래된 리뷰] <드라이빙 미스 데이지>


깐깐하고 꽉 막힌 상류와 서글서글하고 활달한 하류의 잘못된 만남과 영원한 우정 또는 사랑 이야기는 굉장히 흔하다. <드라이빙 미스 데이지>도 그 흔한 이야기의 하나다. 영화 <드라이빙 미스 데이지> 포스터 ⓒ워너 브라더스



깐깐하고 꼬장꼬장한 전직 교사 출신 유태인 70대 할머니 데이지, 어느 누구도 그녀를 어찌 할 수 없다. 공장을 운영하고 있는 아들 불리, 그의 깐깐하고 성깔 있는 아내도 마찬가지다. 그녀는 그렇게 살아 왔고, 바뀌지 않을 거고, 굳이 바뀔 필요도 없었다. 그러던 어느 날 소소한 사고가 난다. 차를 끌고 장을 보러 가려다가 기어를 잘못 조작해 사고를 낸 것이다. 불리는 곧 흑인 기사 호크를 고용한다. 


가난했던 옛생각만 하며 부자가 된 현재의 모습을 뽐내길 싫어하고, 자신도 유태인으로 차별을 당하면서 흑인에 대한 나쁜 선입견을 가지고 있고, 종교에 대한 지나치게 확고한 신념으로 다른 종교(기독교)를 깍아내리는 데이지가 호크를 아니꼽게 보지 않을 도리가 없다. 그가 뭘하든 사사건건 참견하며 하지 못하게 하고 그가 운전하는 차에 타지 않으려 한다. 동네 사람들의 시선 때문에 어거지로 차에 탄다. 



깐깐하고 꼬장꼬장한 전직 교사 출신 유태인 70대 할머니 데이지, 어느 누구도 그녀를 어찌 할 수 없다. 그녀는 그렇게 살아 왔고, 바뀌지 않을 거고, 굳이 바뀔 필요도 없었다. 그러던 어느 날 소소한 사고가 나 불리는 곧 흑인 기사 호크를 고용한다. 영화 <드라이빙 미스 데이지>의 한 장면 ⓒ워너 브라더스



인생의 황혼기에 완전히 바뀌는 특별한 경험


깐깐하고 꽉 막힌 상류와 서글서글하고 활달한 하류의 잘못된 만남과 영원한 우정 또는 사랑 이야기는 굉장히 흔하다. 모르긴 몰라도 인류 역사를 관통하고 있다고 해도 과언이 아닐 것이다. <드라이빙 미스 데이지>도 그 흔한 이야기의 하나다. 다만 이 영화만 같는 특장점이 있다. 


인간은 30세가 넘어가면 잘 바뀌지 않는다고 한다. 자신이 의도하지 않아도 그동안 체화한 것들이 겉으로 드러날 정도라는 것이다. 공자가 말씀하시길 30세면 '이립'이라 하여 '마음이 확고하게 도덕 위에 서서 움직이지 않는다'고 하지 않았는가. 하물며 70세라야? 70세면 뜻대로 행해도 어긋나지 않는 경지다. 


데이지 여사는 살아 왔던 대로 계속 살아가면 되는 나이에 있었다. 아무도 그녀를 탓하지 않는다. 그냥 그런 사람인가보다 하고 말 것이다. 그런 그녀가 180도 바뀐다. 성격이 아니라 세상을 대하는 눈이 달라진다. 거의 불가능에 가깝지는 그녀는 '해낸다'. 인생의 황혼기에 다달아 완전히 바뀌는 특별한 경험은, 보는 이에게도 특별한 경험으로 다가온다. 


데이지 여사는 살아 왔던 대로 계속 살아가면 되는 나이에 있었다. 그녀가 180도 바뀐다. 성격이 아니라 세상을 대하는 눈이 달라진다. 인생의 황혼기에 완전히 바뀌는 특별한 경험은, 보는 이에게도 특별한 경험으로 다가온다. 영화 <드라이빙 미스 데이지>의 한 장면 ⓒ워너 브라더스



그녀는 유태인이다. 자신도 미국의 백인 사회에서 알게 모르게 차별을 당한다. 사실상 흑인인 호크와 다를 바가 없다. 호크와 함께 삼촌 댁에 가는 도중 잠시 길 옆에 차를 세워두었을 때 경찰 두 명이 와서 '이 고급차를 왜 너같은 흑인이 타고 있냐'는 식으로 얘기한다. 그녀는 알지 못한다. 그들이 그녀에게도 유태인이라는 이유로 차별의 시선을 날린 것을. 그녀가 가던 회당이 KKK로 예측되는 이들에게 폭탄 테러를 당하는 일까지 당하게 된다. 흑인에 대한 나쁜 선입견으로 호크를 도둑으로 몰았던 일도 있다. 


그녀는 자신이 피해자라는 걸 몰랐을까. 아니면 피해자라는 걸 애써 감추고 살았을까. 알면서도 모른 채 살았을까. 그녀의 머릿속엔 유태인이라는 단어가 그런 식으로 비춰지지는 않았을 것이다. 대신 다른 게 들어 있다. 과거의 가난과 현재의 부자. 그녀가 흑인 가정부를 아끼는 이유가 힘들었던 지난 날을 함께 해왔기 때문인 것과 같은 맥락이다. 그런 시절을 함께 하지 않은 호크는 그녀에게 그냥 흑인일 뿐이다. 


괜찮은 삶, 끊임없이 부딪히고 깨닫고 성장하는 삶


영화는 20년의 세월을 그린다. 이미 초로의 노인인 데이지 여사는 치매에 걸려 요양원에서 지내고 호크는 운전을 할 수 없어 손녀딸이 태워주는 차에 타고 다니게 된다. 아이델라는 세상을 떠났고, 아들도 늙고 바빠 잘 챙기지 못하며, 며느리는 언제나 그랬던 것처럼 말로만 안부를 전하니, 그녀에게 남은 이는 호크밖에 없었다. 한순간 정신을 차린 데이지 여사는 호크에게 진심을 전한다. 


"자네는 나의 친구야, 가장 친한 친구."


보다시피 영화는 의외로 성장 영화다. 초로의 여인 데이지 여사의 성장기. 그 성장에 차별 철폐, 우정, 화해, 진심이 담겨 있다. 그 성장을 죽을 때까지 멈추지 않는다. 흔하디 흔하지만 특별한, 그래서 특별함을 많은 사람들에게 전할 수 있었다. 어떤 사건사고 없이 몇몇의 대화로만 이루어진 이 단조로운 영화가 와 닿는 이유가 거기에 있다. 


그런 사실을 인지하게 되었을 때 직시하고 올바른 쪽으로 바꿔나가는 것이야말로 괜찮은 삶이고 잘 산 삶일 것이다. 그들이 부러운 듯 '운이 좋았다'고 말한 아이델라의 삶이 아니고. 영화 <드라이빙 미스 데이지>의 한 장면 ⓒ워너 브라더스



그들은 죽은 아이델라를 두고 '운이 좋았다'라고 표현한다. 왜 그렇게 말했을까. 그녀가 좋아하는 드라마를 보다가 죽음을 맞이해서? 고통스럽지 않게 자신도 모르는 새 죽음을 맞이해서? 말년의 비참한 꼴을 보지 않고 죽음을 맞이해서? 생각해봐도 그들이 그렇게 말한 정확한 이유를 모르겠다. 다만 영화의 맥락을 통해 이해해 볼라치면, '흑인의 삶치곤 괜찮은 삶이었다' 정도겠다. 씁쓸하다. 


어떤 삶을 살아야 할까. 자신이 차별 당하고 있는 사실을 이해하려고도 하지 않고 이해하지도 못한 채 '분수에 맞는' 삶을 사는 게 괜찮은 삶이고 잘 산 삶일까. 물론 그런 사실을 인지하면서도 어쩔 수 없이 체념한 채 살아가는 것보다는 괜찮은 삶이겠다. 여기서는 '아는 게 힘'이라기보다 '모르는 게 약'이지 않을까. 


그렇다면 그런 사실을 인지하게 되었을 때 체념하는 게 아니라 정확히 직시하고 올바른 쪽으로 바꿔나가는 것이야말로 괜찮은 삶이고 잘 산 삶일 것이다. 데이지 여사, 그리고 호크의 삶이 바로 그런 삶이다. 그들이 부러운 듯 '운이 좋았다'고 말한 아이델라의 삶이 아니고. 그녀의 삶은 '충실했다'고 표현하는 게 맞지 않을까. 결이 조금 다른. 


많은 사람들이 아이델라의 삶을 살아간다. 그저 살아가는 데 충실한 삶, 그 또한 어떤 의미에선 위대한 삶이다. 데이지 여사의 삶도, 호크의 삶도, 많은 이들에겐 상당히 다른 차원의 삶이다. 나는 아직 정하지 못했다. 어떤 삶을 살아갈지, 또 어떤 삶을 살 수 있을지. 부러운 삶은 아이델라의 삶일 것이다. 하지만 살고 싶은 삶은 데이지 여사와 호크의 삶이다. 끊임없이 부딪히고 깨닫고 성장하는 삶 말이다. 괜찮은 삶이길 바란다. 괜찮은 삶이 되길 바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