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오래된 리뷰] <아메리칸 히스토리 X>
미국의 경우 오랫동안 보다 나은 삶의 기회를 찾아 미국으로 오는 모든 이에게 자유와 풍요를 약속하는 '아메리칸 드림'이 존재했다. 그 이면에는 잘 보이지 않는, 잘 드러내지 않은 큰 문제가 도사리고 있었다. 영화 <아메리칸 히스토리 X> 포스터 ⓒ뉴라인시네마
남 캘리포니아의 스킨헤드 데릭(에드워드 노튼 분)은 자동차를 훔치러 온 흑인들을 향해 무차별 총격을 가한다. 그러곤 신음하는 그들을 무참히 살해한다. 그와 함께 있던 여자친구와 남동생 대니는 놀라움을 금치 못한다. 충격적으로 시작된 영화 <아메리칸 히스토리 X>는 과거와 현재를 오가며 이야기를 전개한다.
유럽 난민 사태가 전 세계적인 이슈로 떠오른지 한참이다. 인도적인 차원에서 그들을 수용할 것인지 자국의 이익을 위해 받아들이지 않을 것인지, 논란도 엄청 나고 결정도 쉽지 않다. 안 그래도 전 세계적인 경제 위기가 완전히 사그라들지 않은 시점에, 불황에 허덕이는 자국민들은 그 분노를 이주민에게 돌리기 쉽다. 그 어느 나라도 예외일 수 없다.
미국의 경우 오랫동안 보다 나은 삶의 기회를 찾아 미국으로 오는 모든 이에게 자유와 풍요를 약속하는 '아메리칸 드림'이 존재했다. 미국의 상징인 '자유의 여신상'이 다름 아닌 아메리칸 드림의 상징과도 같으니 그곳은 정녕 꿈에서나 나올 법한 곳이 아닌가. 수많은 이들이 향했고, 때론 실패했고 때론 성공했다. 그리고 그 이면에는 잘 보이지 않는, 잘 드러내지 않은 큰 문제가 도사리고 있었다. 아메리칸 악몽(나이트메어)이다.
아메리칸 드림이 아닌, 아메리칸 나이트메어
이 영화를 관통하는 큰 주제가 아메리칸 나이트메어다. 그 중심에는 스킨헤드 데릭이 있다. 영화 <아메리칸 히스토리 X>의 한 장면 ⓒ뉴라인시네마
이 진지한 영화를 관통하는 큰 주제가 바로 그 아메리칸 나이트메어다. 그 중심에는 스킨헤드 데릭이 있다. 그는 3년 전 소방수 아버지를 잃었는데, 다름 아닌 흑인 거주지에서 일을 수행하다가 강도의 손에 죽음을 맞았던 것이다. 그 일을 계기로 백인 우월주의자로의 길을 걷는다. 남동생 대니는 그를 영웅처럼 떠받든다.
그런데 3년 간의 복역을 끝내고 나온 데릭의 행동이 뭔가 이상한 게 아닌가. 더 이상 스킨헤드의 길을 가지 않겠다고 천명하고는 대니를 설득하고 나선 것이다. 큰 깨달음이 없이는 그 길에서 헤어나오기 쉽지 않다. 대니 역시 그렇다. 결국 데릭은 결심을 하고는 자신이 감옥에서 겪었던 끔찍하지만 감동적인 이야기를 들려준다.
그는 감옥에 가서도 여전히 스킨헤드로 행동한다. 역시나 그곳의 스킨헤드 그룹에 들어가 중추적인 역할을 한다. 한편 흑인 한 명과 같이 일을 할 수밖에 없는 상황에도 처한다. 그러던 중 스킨헤드 그룹의 대장이 유색인종과 거래를 하는 사실을 알게 된다. 참을 수 없는 데릭은 항의하다가 참혹한 일을 당한다. 그가 갈 곳은 없고, 유색인종 그룹한테 더욱 더 참혹한 일을 당할 것이 분명했다. 그런 그를 지켜준 이가 다름 아닌 그와 함께 일하는 흑인이었다. 그는 큰 깨달음을 얻는다.
과연 그 깨달음은 다시 뭉쳐 비로소 온전히 잘 살아보려는 그의 가족을 지켜낼 수 있을까? 너무 늦은 게 아닐까? 그는 이미 돌이킬 수 없는 죄를 저질렀다. 흑인 두 명을 살해해 흑인들에게 언제 보복을 당할지 알 수 없다. 또한 복역이 끝나고 돌아와서는 백인 우월주의자들에게도 등을 돌렸다. 백인들한테도 언제 보복을 당할지 알 수 없는 일이다. 특히 대니는 그의 전철을 아주 차근차근 따라가고 있기 때문에 무슨 일을 당해도 할 말이 없는 것이다.
본노 자체가 아니라, 대상이 잘못 되었다
분노가 생길 수밖에 상황이고, 분노는 반드시 풀어주어야 한다. 그런데 그 대상이 왜 시대와 나라와 위정자가 아니라 약자여야 하는가. 영화 <아메리칸 히스토리 X>의 한 장면 ⓒ뉴라인시네마
활발한 이주민 정책으로 아메리칸 드림이 절정이었을 시기에, 스킨헤드의 활동 역시 절정으로 치닫을 수밖에 없었다. 유색인종의 유입이 급격히 늘어나면서 자연스레 백인의 실업률이 높아질 수밖에 없었고 그에 맞춰 정권은 자유 경쟁을 활성화시키는 보수적 정책을 시행하고 유지했다. 이주민 정책이 활성화될 때에 일자리를 잃게 된 백인 청년들은 그 화살을 이주민들에게 돌렸고, 그 사상의 기반을 백인 우월주의에서 찾았다. 권력에서 소외되고 자본주의 경쟁에서 패배한 그 분노는 대단한 것이었다. 피해자의 입장에서 가해자의 입장으로 변하는, 그 우월한 느낌 또한 무시할 수 없다.
혐한(嫌韓)으로 유명한 일본의 '재특회(재일 특권을 용납하지 않는 시민 모임)'도 그런 부류다. 장기 불황으로 실업률이 높아지고 많은 청년들이 절망에 빠져 있는 상황에서, 누군가 나서 '적'을 만들고는 그 적은 능력도 없거니와 선천적으로 후지다고 선전하는 것이다. 그러면 그들은 사상으로 똘똘 뭉치게 된다. 자신들은 우월한데, 다수의 적들이 침범해 어쩔 수 없이 자리를 보전하지 못하게 되었다는 기조다.
그런데 생각해보라. 피해자에서 가해자가 된 그들이지만, 자신들이야말로 피해자라고 약자라고 외친다. 여러모로 피해자였던 건 맞지만, 결코 약자는 아닌 것이다. 문제는 잘 살지 못하는 나라에서 왔을 대부분의 이주민이야말로 약자가 아닌가. 고로 피해를 당해도 그들이 더 많은 피해를 당할 게 아닌가.
문제는 증오의 대상이 잘못 되었다는 점이다. 그들의 분노 자체가 잘못되었다고 생각하진 않는다. 분노가 생길 수밖에 상황이고, 분노는 반드시 풀어주어야 한다. 그런데 그 대상이 왜 시대와 나라와 위정자가 아니라 약자여야 하는가. 그건 명백한 오류다.
이 영화가 괜찮은 이유
미시적으로 접근했기에 조금의 답을 찾을 수 있었다. 이런 류의 뿌리 깊은 대립은 개인 개인으로 접근해야 한다. 영화 <아메리칸 히스토리 X>의 한 장면 ⓒ뉴라인시네마
이 영화가 괜찮은 이유는 따로 있다. 그런 심각하고 첨예한 논란을 주제로 삼았다는 것도 점수를 듬뿍 줄 수 있겠지만, 그 문제를 굉장히 미시적으로 접근했다는 점이다. 통사적으로 접근했다면 오히려 받아들이기가 힘들었을지 모른다. 또한 조금의 답도 찾을 수 없었을 것이다. 더욱이 영화적으로 의미가 없었을 것이다. 그리하면 다큐멘터리 그 이상도 이하도 아니게 된다.
미시적으로 접근했기에 조금의 답을 찾을 수 있었다. 이런 류의 뿌리 깊은 대립은 개인 개인으로 접근해야 한다. 영화의 한 명대사가 함축적으로 보여준다. "네가 한 행동들이 너의 삶을 좋게 만들었니?" 누구보다 투철한 스킨헤드인 데릭도 그 한 마디에 아무런 대답을 할 수 없었다. 그들이 원하는 건 여하튼 더 좋은 삶일 텐데 말이다. 유색인종을 모두 몰아내고 백인들의 세상을 만드는, 그들의 입장에서는 이보다 더 좋을 수 없는 그런 삶을 만드는 게 목표일 텐데 말이다.
결국 황폐해질 수밖에 없는 행동을 했다는 것. 아무리 거창한 사상과 목표로 무장하고 있더라도 결코 삶을 더 좋게 만들 수 없다는 깨달음. 조직적인 거창함에서 사적인 삶의 세계로 내려올 때 알게 되는 깨달음이다. 거기엔 사소하지만 위대한 사랑과 우정이 있다. 이 영화가 말하고자 하는 게 바로 거기에 있다. 그걸 깨닫지 못하고는 이 대립은 영원히 끝나지 않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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