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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나간 책 다시읽기/한국 대표 소설 읽기

1998년 한국사회의 웃픈 자화상 <전당포를 찾아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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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국 대표 소설 읽기] <전당포를 찾아서>


<전당포를 찾아서> 표지 ⓒ아시아



짧은 단편소설에는 등장인물이 최소한으로 나오기 마련이다. 작가가 하고자 하는 이야기의 핵심을 몇몇의 등장인물을 통해 짧고 굵게 그리고 비교적 손쉽게 할 수 있기 때문이다. 장편소설이나 대하소설에서 수십 명에서 수백 명의 등장인물이 등장하는 것과 대조적이다. 가끔 장편소설에서 소수의 등장인물이 등장할 때가 있는데, 굉장히 느리거나 반대로 굉장히 빠르게 진행되곤 한다. 


그런데 소설가 김종광은 단편이고 장편이고 수많은 등장인물을 등장시키곤 한다. 특히 단편에서 수많은 등장인물을 등장시키고도 핵심에서 벗어나지 않게 하는 능력은 발군이라고 할 수 있겠다. 더욱이 그의 소설은 단연 재미있다. 재미를 추구하는데도 이야기하고자 하는 바를 이야기할 수 있다는 건 신기한 능력이라고까지 말할 수 있겠다. 짧디 짧은 단편 <전당포를 찾아서>는 그 대표 중 하나이다. 


1998년 당시의 한국사회 자화상


단행본으로 채 50쪽도 되지 않는 짧은 단편 안에 자그마치 16개의 챕터가 있고 챕터마다 한 명의 주인공이 있으니, 최소 16명의 등장인물이 있는 것이다. 그 중에서 주인공이라 할 수 있는 이가 박무현인데, 약관 20살의 한민대학교 2캠퍼스 1학년생이다. 


그는 이사장이 학교발전기금으로 적립된 수백억 원 중 수십억 원을 빼돌린 것에 대한 항의 집회를 위해 서울로 향하는 결사대에 합류한다. 다만, 그에겐 투쟁의 각오 같은 건 없고 소값이 개값 되는 시국에 이사장 놈이 있다는 게 잘못된 것 같다는 생각 때문이었다. 그의 아버지가 소를 키우고 있었던 것이다. 시골 청년의 시선이다. 


작가는 이야기를 매우 가볍게 이어나가는 듯하다. 시골 청년 박무현의 어리바리한 모습을 가벼운 터치로 보여주고 있는 게 그 단적인 예다. 하지만 그 이면엔 예리한 칼날이 번쩍인다. IMF 당시의 상황을 그리는 것은 물론, 데모와 시위가 더 이상 호응을 얻지 못하는 90년대 말의 대학가 자화상, 대학의 서울캠퍼스와 지방캠퍼스의 은근한 대립에서부터 서울과 지방의 대립까지, 은퇴 후 서울로 올라온 노인의 소회, 처량한 처지의 대학 시간 강사, 금모으기 풍경 등이 16개의 에피소드 하나하나에 배어 있다. 


그렇게 하나의 에피소드에는 한 명의 주요 등장인물과 그 인물을 통해 보여주는 1998년 당시의 한국사회 자화상이 있다. 그러면서도 주인공 박무현의 행적을 꼼꼼히 살핀다. 다름 아닌 시골 청년 박무현이 서울에 무심코 올라와 겪게 되는 웃지 못할 헤프닝들 말이다. 그 헤프닝에서, 박무현의 모습에서, 우리를 볼 수 있다. 


사회는, 그러지 않았으면 하는 방향으로 차근차근 흐른다


박무현은 '정신 못 차린 애들' 중 하나로 '요즘 세상에 설마' 하는 데모에 참석하고는 얻은 것 없이 전경에게 진압 당한다. 그러곤 한강을 건너서 어딘지 모르는 곳에서 강제 하차 당한다. 본격적으로 서울 바닥을 헤매기 시작한다. 어딜 가든 불빛이 보이고 사람이 있고 편의시설이 있는 서울이, 조금만 나가도 아무것도 없는 시골보다 헤매기 더 어려울 것 같은데 말이다. 


헤매다가 차비도 다 소진해버린 박무현. 결국 그가 생각해 낸 건 '전당포'. 그곳에 가서 뭐라도 맡기면 돈을 주지 않을까 하는 바람이었다. 하지만 서울에서 전당포 찾기가 왜 그리 힘든지. 모든 게 다 있을 것 같은 서울인데, 왜 전당포는 보이지 않는 건지. 과연 박무현은 전당포를 찾아서 돈을 받아 무사히 집으로 돌아올 수 있을까? 설령 전당포를 찾아 돈을 받는다고 해도 쉽게 집으로 돌아올 것 같지는 않다. 


이건 마치 1998년이 아니라 2016년을 보는 것 같다. 하등 다를 바가 없다. 90년대 이후 대학가는 여전하다. 아니, 퇴보했다고 하는 게 맞다. 이도 저도 아닌 취업양성소가 되었다. 그 시작이 IMF 당시였겠다. 서울(캠퍼스)과 지방(캠퍼스)의 대립도 여전하다. 참으로 쓸 데 없는 걸로 자신을 드러내는, 그야말로 무식한 방법이다. 


무엇보다도 대학 시간 강사의 처량한 처지와 은퇴 후 서울 숲에 갇힌 노인의 소회는 20년이 지난 지금 그 어느 때보다 아래에 있다. 그때 본격적으로 시작된 것들이 지금에 비로소 꽃을 피운 것이리라. 그런 식으로 흘러가지 않았으면 하는 바람은 무참히 짓밟히고, 사회는 차근차근 그런 식으로 흘러가서 지금에 이르렀다. 


솔직히 두렵다. 또다시 IMF, 그 이상의 위기가 도래할 것 같다는 생각에. 그 사이에 세계금융위기를 겪었는 데도 말이다. 그럴 때도 이렇게 날카롭지만 웃음을 잃지 않는 소설을 쓰고 읽을 수 있을까. 그나마 '전당포'라는 희망을 찾아 정처 없이 떠돌 수나 있을까. 웃기지만 슬프고 재밌지만 씁쓸하다. 


아시아 출판사가 후원하는 '한국 대표 소설 읽기'의 일환입니다. 

'바이링궐 에디션 한국 대표 소설'과 함께 앞으로도 계속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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