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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나간 책 다시읽기/한국 대표 소설 읽기

짊어지지도 짊어지지 않을 수도 없는 전쟁의 비극 <아베의 가족>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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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국 대표 소설 읽기] <아베의 가족>



<아베의 가족> 표지 ⓒ아시아


"황량한 들판에 던져진 그 시든 나무들의 꿋꿋한 뿌리가 돼줄는지도 모를 우리의 형 아베의 행방을 찾는 일도 우선 그 무덤에서부터 시작할 생각이었다."


전상국의 소설 <아베의 가족>이 한국 분단 문학에서 갖는 의미는 특별하다. 60년이 넘도록 여전히 한반도에 깊이 아로새겨진 한국전쟁의 폭력성과 그로 인해 만들어진 분단의 비극을 능수능란하게 여과 없이 그리고 알아듣기 쉽게 전하고 있기 때문이다. 그 만으로도 충분한데 이 총체적 비극의 해결을 모색하고 있다. 거기서 이 소설은 분단 문학을 넘어 한국 문학에서도 특별하게 되었다. 


이 소설이 전하는 한국전쟁의 폭력성, 분단의 비극 그리고 비극 해결 모색을 들여다보자. 이를 들여다보는 건 한국전쟁을 이해하는 데에서만 그치는 게 아니라, 한국 사회와 한국인을 이해하는 데 큰 도움이 될 것이다. 전쟁의 폭력성과 분단의 비극을 상징하는 '아베'가 꿋꿋한 뿌리가 돼줄 것이지만, 상흔은 깊이 남아 있기 때문이다. 이를 받아들이는 동시에 풀어야 할 숙제가 된다. 반드시 풀어야 할 숙제. 


짊어지지도 짊어지지 않을 수도 없는 전쟁의 비극


진호의 가족은 미국으로 이민을 가게 된다. 어떻게든 적응을 하려 하지만 쉽지 않다. 어머니는 본래 강한 사람이었는데 미국에 오니 시든 병아리 마냥 힘이 없고 우울하다. 그건 '아베'를 한국에 남겨왔기 때문이었다. 아베는 누구인가. 그는 한마디로 백치. 가난한 진호의 가족들은 그들의 가난을 아베 때문으로 돌렸다. 미국에 와서는 아무도 아베를 입에 올리지 않았다. 그렇지만 그들은 나사가 하나 빠진 느낌으로 살고 있었다. 아베 때문이라고는 생각도 하지 못한 채 말이다. 


그러던 어느 날 진호는 어머니의 수기를 우연히 읽는다. 충격 그 자체였다. 그 수기에는 어머니와 아버지,아베의 과거가 낱낱이 그려져 있었다. 진호는 급기야 아베를 찾으러 한국에 가기로 마음 먹는다. 도대체 수기에는 어떤 기막힌 과거가 그려져 있는 것일까? 


어머니와 아버지의 행복한 시절이 있었다. 그 시절은 한국전쟁으로 단숨에 깨진다. 아버지가 전쟁에 끌려간 것이다. 어머니는 동맹국 미국군에 의해 강간을 당한다. 그렇게 태어난 게 아베다. 아베는 제대로 태어나지 못했다. 그 아베를 잘 보살펴준 게 지금의 아버지다. 그것은 아버지의 과거 때문이었다. 아버지는 군인이었는데 탈영을 하여 민가에 들어가 그곳에 사는 사람들을 죽였었다. 그 장면을 백치 아이가 고스란히 보고 있었는데, 아베가 그 백치 아이를 연상시켰고 아버지는 그 백치 아이에 대한 미안함을 아베에게 투영하여 속죄하려 한 것이었다. 


미국군이 어머니를 강간한 것과 아버지가 민가의 사람들을 죽인 것 모두 전쟁의 폭력성을 보여준다. 잘못 태어난 아베는 비극을 상징할 것이다. 폭력을 당한 사람, 폭력을 행한 사람 모두 비극을 안고 살아간다. 다만 그 비극의 이면, 감춰진 비밀을 누구한테도 말할 수 없다. 결국 비극이 가져다주는 아픔을 끝까지 짊어지지 못한다. 그렇다고 멀리한다고 아프지 않는 것은 아니다. 전쟁의 폭력이 가져다준 비극이란 그런 것이다. 짊어지지도 짊어지지 않을 수도 없다. 


피해자이자 가해자의 굴레


지금 우리 사회에 만연해 있는 딜레마 중 하나는 이렇다. 누구든 피해자이자 가해자의 굴레에서 벗어나기 힘들다는 것. 어떻게 피해자가 가해자가 되고, 가해자가 피해자가 된단 말인가? 그렇지만 이 극도의 모순이 우리 사회에 지극히 존재한다. 시대를 표현하는 데 가장 탁월한, 그중에서도 사회의 진짜 모습을 그리는 데 천착하는 독립 영화가 가장 많이 그리는 것이 바로 이 '피해자이자 가해자의 굴레'인 걸 보면 알 수 있다. 


<아베의 가족>이 보여주는 말할 수 없는 비밀이 바로 이 피해자이자 가해자의 굴레이다. 한국전쟁으로 인해 한국인은 피해자(미국군에 의해 강간을 당한 어머니)이자 가해자(군대에서 탈영하여 민가로 들어가 사람들을 죽인 아버지)의 굴레에 말려들어 갔다. 문제는 결과와는 달리 원인은 그들 자신이 아니라는 것이다. 다른 누구에 의해 그들로 하여금 그렇게 할 수밖에 없게 만들었다. 


개인의 경우는 이렇겠고 국가의 경우도 크게 다르지 않다. 36년의 치욕적인 일제강점기를 한국인에 의해 끝내지 못했고(김구 선생은 타국에 의한 한국의 광복을 한탄했다.) 분단 또한 한국인만의 의지가 아니었다. 비극의 원인이 다른 누구에게 있고 그렇게 만들어진 피해자이자 가해자의 굴레는 우리가 진 채 살아가고 있다. 


소설은 아베를 짊어진 채 살아갈 수밖에 없고 살아가야 한다고 말하고 있다. 그 말할 수 없는 비밀을 말하지 않은 채 살아갈 순 없다고 본 것이다. 비극의 원죄를 묻는 데 앞서 앉고 같이 가야 한다고 말하고 있다. 그 상처는 결국 곪아갈 것이고 그로 인해 몸은 시들어갈 뿐이다. 아베를 두고 온 어머니가 시들어가고 무기력해진 것처럼 말이다. 아프고 치욕적이지만 우리의 뿌리임이 분명한 아베다. 그 뿌리를 인정하고 받아들이지 않는 이상, 지금까지 우리 사회에 만연해 있는 딜레마를 극복하기란 쉽지 않을 것이다. 


아시아 출판사에 후원하는 '한국 대표 소설 읽기'의 일환입니다. 

'바이링궐 에디션 한국 대표 소설'과 함께 앞으로도 계속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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