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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나간 책 다시읽기/한국 대표 소설 읽기

삶에 직결되니 만큼 아주 중요하게 작용하는 <오늘의 운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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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국 대표 소설 읽기] 한창훈의 <오늘의 운세>



<오늘의 운세> 표지 ⓒ아시아



1987년 형식적으로 나마 민주화가 실현되면서 이후 소설은 중심을 잃은 듯 보였다. '우리'는 흩어지고 '나'만 남게 되었고 '대의'는 그 존재 가치를 상실하게 되었다. 그런 와중에 자본주의가 우리네 삶에 깊숙이 들어 왔고 이는 소설도 마찬가지였다. 너도나도 대도시로 몰려갔고(이미 예전부터 몰려갔지만) 소설은 그들의 삶을 그리기 시작했다(전보다 더욱 공격적으로). 바야흐로 대도시의 자본주의 행태에 대한 탐구가 90년대 소설의 주류를 이루게 된 것이다. 


그 와중에도 대도시와 자본주의를 그리지 않는 이들이 있었다. 윤정모, 한창훈, 김석중, 전성태 등. 이들 은 그야말로 '희귀'한 소설가들이었다. 아무도 들여다보려 하지 않는 소외된 이들을 그려냈으니 말이다. 그 중에서 한창훈은 조금 다른 격을 지니고 있는 것 같다. '농촌'에 천착하기 보다 '소외'에 중점을 두고 있는 듯 보인다. 그래서 그의 소설 세계는 농촌과 도시를 아우르고 있다. 


농촌과 도시의 과도기적인 모양새


<오늘의 운세>의 배경 또한 그런 면모를 보인다. 그는 이 소설의 배경을 설명하기 위해 '세천상회'라고 하는 '요즘 것에 밀려난 고랫것'을 묘사하는데, 그러면서 '그러나 그게 아니다'라고 말한다. 세천상회에서 더 들어가면 나오는 공원 정문 앞의 신식 건물과 간이 분수대가 돈 쓰기 좋은 곳이라 젊은이들이 많이 찾지만, 유람객 중 상당수를 차지하는 노인네들에게는 그림의 떡에 불과하다. 그들에게는 '옛적 점방 수준'의 세천상회가 딱 이다. 


이런 의미를 가진 세천상회에서 시작되는 소설은 농촌과 도시의 과도기적인 모양새를 내포하고 있다. 그렇다면 저자가 앞으로 말하고자 하는 바도 이 과도기를 배경으로 과도기적인 삶을 사는 사람의 이야기일 공산이 크다. 90년대 당시 시대적으로 국가적으로 개인적으로 과도기였던 상황을 그리고자 한 것일 수 있겠다는 생각도 든다. 


용표는 트럭을 몰며 계란을 파는 계란 장수다. 식장산이 보인다니 대전 근처 옥천군에서 장사를 하는 것 같다. 그는 여지 없이 세천상회를 들러 계란을 한 판 팔고 마을 안으로 들어간다. 그러고는 구장집에 들른다. 그때 마침 구장댁 개들이 짝짓기를 하고 있었다. 그런데 잘 되지 않는 모양인지 구장댁이 욕을 하며 도와주려 했다. 그 모습을 보고 누가 또 와서 농을 쳤는데 용표가 웃어버렸다. 결국 용표는 계란은 팔지도 못하고 욕만 먹고 쫓겨 났다. 


아침에 길을 나서며 아로새겼던 다짐을 지키지 못했다. 눈조심, 입조심, 손조심. 왜 그런 다짐을 했냐 하면 여동생 용순 때문이었다. 어제 밤에 갑자기 용순이가 아들 아람이를 질질 끌면서 들이닥친 게 아닌가. 알고 보니 남편한테 얻어 맞고 온 것이었다. 이제는 이혼할 거라 떠들어 대는데, 술 취한 매제까지 들이닥치지 않았겠는가. 일진이 좋지 않을 예감이었다. 


하루 벌어 하루 사는 자영업자의 삶


일진이 좋지 않을 예감은 구장댁한테 욕 먹은 일 말고도 3번이나 더 적중한다. 재수 없는 고객 때문에 하루 일당 벌이도 못했고, 술 처먹은 방위병 때문에 애꿎은 조수석만 토사물로 엉망진창이 된 것도 모자라, 버스를 추월하려 다가 경찰한테 딱지를 끊기기 까지 하다니... 딱히 용표가 잘못한 게 없는 것 같은데, 오늘의 운세는 정말 최악이었다. 


용표의 하루는 우리의 평범한 하루와 다를 바 없다. 특히 하루 벌어 하루를 사는 많은 자영업자들의 삶과 완전히 같아 보인다. 어쩔 수 없이 자영업을 하게 되었든 자의로 자영업을 하게 되었든 말이다. 여러 일간지에서 연재하는 '오늘의 운세'를 진지하게 보는 사람은 없겠고 재미로 보겠지만, 용표에게 있어서 '오늘의 운세'는 삶에 직결되니 만큼 아주 중요하게 작용한다. 


문제는 운이라는 게 자신의 뜻대로 되는 게 아니라는 점에 있다. 아무리 열심히 노력해도 용표의 하루처럼 불운이 계속되면, 아니 하나라도 찾아오면 그날의 벌이는 신통치 않아 지는 것이다. 그건 곧 생존으로 직결되는 거고. 이 현실을 타파할 방법은 없어 보인다. 그런데 소설의 마지막에서 용표는 상상을 초월하는(?) 행동을 벌인다. 속이 시원하게도 말이다. 


한창훈 소설가의 균형 감각


경찰한테 딱지를 끊길 위기에 처하자 용표는 모든 비굴을 다 끄집어 내어 딱지의 금액을 낮추려 한다. 어떻게 어떻게 해서 오천 원까지 낮췄는데, 만 원을 받은 경찰이 줄행랑을 치는 게 아닌가? 이에 용표는 계란 트럭을 타고 경찰차를 쫓아간다. 그리고는 확성기로 외친다. 


"빽차(경찰차)는 우측으로, 빽차는 우측으로"


그러고는 외려 경찰에게 소리를 쳤다. 하루 종일 불운했던 용표는 불운의 끝에서 용기를 낸 것이리라. 죽이 되든 밥이 되든 자신의 뜻대로 말이다. 그랬더니 불운의 끝이 운으로 변했다. 경찰이 만 원을 던지고는 도망치듯이 가버린 것이었다. 이 웃픈(웃기고 슬픈) 상황이란.(영화배우 김윤식이 잘 소화할 수 있을 것 같다.)


이 짧은 단편 소설 한 편으로도 한창훈 소설가의 균형 감각을 엿볼 수 있다. 농촌과 도시, 불운과 행운, 유머러스와 서글픔, 기쁨과 슬픔 등을 한 쪽으로 치우치지 않고 아우르면서 절묘하게 서술하고 있다. 그 적절한 균형 자체가 과도기적 상황에서 갈팡질팡 못하는 당대에게, 그리고 지금에게 던지는 메시지이다. 


아시아 출판사에서 후원하는 '한국 대표 소설 읽기'의 일환입니다. 

'바이링궐 에디션 한국 대표 소설'과 함께 앞으로 계속 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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