본문 바로가기

지나간 책 다시읽기/한국 대표 소설 읽기

욕망의 충돌과 분출, 그리고 누군가의 이야기 <젓가락여자>

반응형




[한국 대표 소설 읽기] <젓가락여자>



<젓가락여자> 표지 ⓒ아시아



"예리한 바늘이 정곡을 찔러 육체에 음산하고 정교한 수를 놓으며 살 속에서 맴돌던 언어를 해방시킨다"


소설가 천운영이 2000년 동아일보 신춘문예에서 <바늘>로 당선되었을 당시의 심사평이다. 소설을 읽는 다양한 이유들 중에서 개인적으로 최고의 가치로 치는 게 두 가지 있는데, 바로 '재미'와 '감동'이다. 이 둘만 있으면 그 소설은 나에게 최고의 시간을 선사할 것이다. 


이 둘 중에 하나만 고르라고 한다면 '재미'를 고르겠다. 나이가 조금씩 들어갈수록 시선이 바뀌었는데, '감동'조차도 큰 틀에서 '재미'의 요소 중 하나로 편입되었다. 이 둘은 더 이상 동등한 입장이지 못하게 된 것이다. 재미있는 소설을 보고 흔히 '처음부터 끝까지 손에서 놓을 수 없었다' '읽자마자 그 자리에서 끝까지 다 읽어버렸다' 따위의 말을 늘어놓는다. 거기엔 스토리, 캐릭터, 사건, 형식, 문체, 분위기 등의 요소가 자리 잡고 있음이 분명하다. 


그녀의 소설은 재미있을 것 같다


천운영 작가의 소설은 접한 적이 없었지만 그 명성과 함께 스타일은 익히 알고 있었다. 누구는 스타일리쉬하다고 하고, 누구는 그로테스트하다고 하며, 누구는 날카롭다고 했으며, 누구는 불편하다고 했다. 종합해서 내 식대로 해석하자면, 그녀의 소설은 '재미있을 것' 같았다. 흔하지 않고 정형화되지 않았으며 식상하지 않을 것 같았다. <젓가락여자>. 제목부터 흥미가 돋지 않는가?


소설은 시종일관 화자의 원맨쇼로 진행된다. 혼자 말하고 혼자 답하는 식이다. 그래서 서술이 일체 없다. 그야말로 한 번 손에 쥐면 물 흐르듯 자연스레 끝까지 읽을 수밖에 없게 만든다. 형식도 이러한데, 내용은 더욱 나를 옥죈다. 다음 장을, 아니 끝 장을 보고 싶어 안달 나게 만든다. 욕망으로 가득 차 있는 소설이 나의 욕망을 부추긴 이유에서 일까?


화자는 조그마한 독서토론회 모임의 회장이다. 그녀는 회원들로부터 서진이라는 유명한 작가를 한 번 초청해 강의를 들을 수 있게 힘 좀 써볼 것을 부탁 받는다. 그녀가 다름 아닌 서진 작가의 학교 후배였기 때문이다. 그러면서도 반신반의하는 회원들에게 서진 작가와의 첫만남을 이야기해준다. 한 마디 붙인다. 서진 작가가 자신한테 빚진 게 좀 있다고. 


서진 작가의 본명은 양영은이었다. 영은과 그녀는 첫만남부터 뭔가 통하는 게 있어 사 년이라는 나이 차이를 극복하고 어울릴 수 있었다. 그녀는 누가 봐도 정말 멋진 사람이었던 영은에게 인간적으로 반했던 것이다. 그녀의 말에 따르면 영은에게는 남의 기운을 자기 쪽으로 끌어모으면서 단번에 잡아 채는 매력이랄지 마력이랄지 아무튼 빠져들게 만드는 힘이 있었다.


영은의 별명은 '고물상'이었다. '고민고물상'. 고민을 가지고 가면 들어본 다음에 해결책을 주거나 방향을 제시해주거나 위안을 주었다. 근데 나중에 알고 보기 그 고물들이 소설의 소재가 된 것이 아닌가? 그 중에서도 그녀와 할머니 사이에서 있었던 '닭 모가지' 이야기를 고스란히 소설로 옮긴 게 아닌가? 그녀는 추억이 소설로 되살아났다고 좋아하면서도 그 경험을 소설로 옮기는 행위를 비꼰다. 


"제 추억을 소설로 쓴 게 미안해서 자꾸 그렇게 생각하시나 본데. 너무 신경 쓰지 마세요. 언니가 그 글을 베껴 쓴 것두 아니구. 나한테 들은 얘기 소설로 쓴 건데. 언니가 진정성 이런 거에 너무 집착하다 보니까. (중략) 물론 언니가 그거 쓰겠다고 나한테 허락을 받은 건 아니지만. 내 추억을 누구도 쓰면 안 된다고 상표등록 해놓은 것도 아니고. 내가 소유권 주장하겠다고 나설 사람도 아니고." (본문 중에서)


소설을 관통하는 욕망의 충돌


소설의 서사는 별 게 없다. 독서토론회 회장이 학교 선배였던 유명한 작가를 초청해 강의를 듣고자 만나서 이야기를 나누는 게 전부이다. 거기에 어떤 갈등이나 마찰이 있을 것 같지도 않고, 그녀의 시각으로만 소설이 전개되기 때문에 잘 살피지 않으면 겉으로 드러나는 갈등도 없는 것 같다. 다만 그녀의 말투가 지독하리 만치 비꼬아져 있고, 중간 중간 섬뜩한 말 한 마디들이 오고갈 뿐이다. 


그 한 마디들을 그냥 지나치지 않고 자세히 들여다보면 소설을 관통하는 욕망의 충돌이 보인다. 독서토론회 회장인 그녀는 사실 익명의 파워 블로거(리뷰어)이기도 하다. 그것도 서진 작가의 안티 행위를 선도하는. 서진 작가는 이 사실을 알고 있었는데, 그 행위들을 모두 다 캡처해 벼르다가 이 만남을 기해 따지려 한 것이다. 이는 그녀 또한 마찬가지이다. 


먼저 어떤 짓을 한 건 서진 작가였다. 대학교를 다닐 당시, 그녀를 학생회도 아닌 운동권도 아닌 철학 공부회 비스무리한 비밀스러운 조직(학생 운동)에 집어 넣고 자신은 아예 졸업을 해 소설가가 되겠다고 전문대에 들어갔던 것이다. 5학년으로 남아서 총여학생회장으로 출마해 당선이 거의 확실시되어 있던 것도 알고 있었는데 말이다. 그야말로 '배신'이었다. 


그녀는 이 배신을 잊지 않고 유명 파워 블로거가 되어 서진 작가의 소설 리뷰를 쓴다. 아니 서진 작가의 소설 리뷰를 쓰며 유명해진다. '진정성' 있는 리뷰. 하지만 그 리뷰는 서진 작가에게 만은 '배신'이었다. 자신에게서 체득한 걸로 자신을 공격하는 짓이었던 것이다. 욕망의 충돌은 계속 이어진다. 


그녀는 서진 작가가 타인의 경험을 가지고 소설을 쓰는 걸 두고 계속해서 비꼬면서 말하고, 서진 작가는 그녀의 블로그 대문에 자신이 대학교 때 해준 이야기를 고스란히 올린 것을 두고 비난한다. 이 둘은 이미 폭발한 게 분명한데, 소설의 형식 상으로 보면 알 수가 없다. 다만 그녀의 한 마디에서 유추할 수 있다. 


"언니한테서 깃발을 가져온 건 좀 미안하게 되었어요. 하지만 언니도 내 거 가져가셨잖아요. 

내 닭 모가지." (본문 중에서)


누구라도 한 번 생각해 봤을 것 같은


표절에 대한 욕망인가. 더 크게 보면 글쓰기에 대한 욕망인가. 나만 아는 비밀을 폭로하고 싶은 욕망인가. 이는 소설 쓰기 혹은 작가 되기의 욕망으로 까지 이어지는가. 그녀의 입장에서 더 자세히 보자. 소설가가 되지 못하고 대신 파워 블로거 되어, 다른 방면으로 나마 욕망을 분출하고 있다. 자신의 이야기를 다른 사람들에게 내보이고 싶은 욕망. 


그렇다면 서진 작가가 자신의 이야기가 아닌 남의 이야기를 다른 사람들에게 내보이는 행위는 어떤 욕망인가? 이건 소설가가 소설을 짓는 여러 가지 방법 중 하나로 봐야 하는가, 아니면 자신의 이야기를 보여주는 것도 평생에 걸쳐 해보지 못할 것이니 남의 이야기 할 시간이 없다고 말했던 박경리 소설가가 될 수 없었던 서진 작가의 어쩔 수 없는 선택이었나? 즉, 남의 재미있는 이야기를 훔치는 '꼼수'로 소설을 지으려는 질 나쁜 욕망의 분출이었나? 


소설을 읽으며 뜨끔 한 적이 한두 번이 아니다. 내 얘기 같고, 아는 사람의 얘기 같고, 누군가의 얘기 같기 때문이다. 누구라도 한 번은 적어도 한 번은 생각해 봤을 것 같다. 바늘로 천천히 그리고 깊숙이 찌르는 것 같은 느낌이 들게 하는 이 소설, 작가의 다른 작품을 읽어보고 싶게 만든다. 확실한 재미와 생각할 거리를 보장한다. 


아시아 출판사에서 후원하는 '한국 대표 소설 읽기'의 일환입니다. 

'바이링궐 에디션 한국 대표 소설' 시리즈와 함께 앞으로 계속 됩니다. 


728x90