본문 바로가기

오래된 리뷰

<광해> 감독님, 이 영화 보셨죠?

반응형


[리뷰] 구로사와 아키라의 <카게무샤>

ⓒ 네이버 이미지

1998년, 김대중 정부의 일본 문화 개방 정책에 힘입어 책과 노래, 영화, 애니매니션을 비롯한 수많은 일본의 문화 콘텐츠들이 한국에 들어왔다. 개중에는 공교롭게도 당년에 죽음을 맞이한 '구로사와 아키라' 감독의 영화 작품들도 있었다. 구로사와 아키라가 누구인가? 일찍이 1950년대에 <라쇼몽>과 <7인의 사무라이>로 베니스 영화제에서 수상을 했으며, 이후로도 베를린 영화제, 칸 영화제, 미국 아카데미, 영국 아카데미 등에서 수상을 하며 세계적인 거장의 반열에 올랐다. 그 중, 1980년에 나온 <카게무샤>를 소개하고자 한다.

본격적으로 소개하기에 앞서 영화 외적으로 간략히 소개해 보자면, 이 영화는 20세기폭스사에서 배급을 맡아 미국의 메이저 영화사가 세계에 배급한 최초의 일본영화라고 할 수 있겠다. 구로사와 감독이 직접 미국으로 건너가 프랜시스 포드 코폴라와 조지 루카스의 도움으로 20세기폭스사로부터 제작비를 지원받았다고 한다.

작품성 면에서는 엄청난 성과를 거두었는데, 1980년 칸영화제의 그랑프리인 황금종려상,1981년 영국 아카데미상의 감독상과 의상상, 프랑스 세자르상의 최우수 외국어 작품상, 이탈리아영화비평가상의 감독상, 휴스턴영화제의 감독상 등을 받았다. 인간 존재에 대한 심오한 성찰이 돋보인 명작이라는 평이었다. 

16세기 일본 전국시대. 풍림화산의 기치를 건 다케다 신겐은 전국 통일을 향해 순항하고 있었다. 도쿠가와 이에야스와의 전투 중, 총에 맞아 결국 숨을 거두고 그의 카게무샤(그림자 무사)가 대신하여 신겐 진형을 이끌게 된다.

개인적으로 '다케다 신겐'에 대해 예전부터 관심이 있어서 잘 알고 있다.(필자의 아이디가 'singenv'인 이유이기도 하다.) 흔히들 일본 전국시대하면 세 사람을 떠올린다. 오다 노부나가, 도요토미 히데요시, 도쿠가와 이에야스. 그런 그들이 제일 무서워하고 숭배까지 했던 무장이 바로 다케다 신겐이다.

그는 대단한 지략가이자 전략가로 전국 통일의 시작점인 교토 입성을 얼마 남기지 않고 오다 노부나가와 대치하게 되는데, 적군의 총탄에 목숨을 잃게 된다. 그 이후 그의 그림자 무사를 통해 이 영화는 전개된다. 사실에 충실히 입각한 내용을 바탕으로 제작되었다는 걸 알 수 있겠다.

카게무샤는 일본 전국시대 당시에 영주들이 자주 사용했다고 한다. 적을 기만하는 일종의 전략인 것이다. 하지만 그림자는 실체가 있어야 그림자인 법. 영화를 보면 한때 카게무샤였던 다케다 신겐의 동생인 다케다 노부카도는 "그림자는 실체가 있어야 그림자인데 지금 형님이 계시지 않으니 난 어찌해야 할지 모르겠다"라고 한다. 

그렇다. 신겐이 죽고 난 후 죽음을 숨기기 위해 그의 카게무샤는 신겐이 되어 시동과 시종, 처첩들 심지어 손자까지도 속여넘기게 된다. 하지만 원래는 천한 도둑이었던 그. 또한 그의 실체였던 다케다 신겐은 이미 죽고 없다. 그가 꿈을 꾸는 대목을 살펴보면 알 수 있다.

죽었던 신겐이 다시 살아 돌아와 자신을 쫒는 꿈을 꾸는 카게무샤. 그는 방황한다. 자신의 실체인 신겐이 죽고 방황하는 그림자인 카게무샤를 표현하는 대목이 아닐까 생각한다. 또한 그는 견디지 못하고 보물을 훔쳐 달아나려 하기도 한다. 내 인생에서 나는 과연 실체일까 그림자일까. 

2012년 최고의 흥행작 중 하나인 <광해>도 일종의 카게무샤에 대한 이야기이다. 일본의 전국시대 때 수많은 암살 위험에 처해 있던 영주처럼, 조선시대 광해군도 수많은 암살 위험에 처해 있었다. 영화에서는 직접적인 독살이나 암살 대신 약에 의한 살인을 노렸다. 이에 광해는 위독한 상태에 빠지고, 본래 광해군의 파트타임 대역에 불과했던 시정잡배 논다니는 자그만치 보름 동안 대역을 하게 되는 것이다. 

영화 <카게무샤>에서는 카케무샤인 도둑과 카케무샤였던 다케다 노부카도. 그리고 또 다른 다케다 신겐의 그림자가 존재한다. 그의 아들(서자)인 스와 가쓰요리. 그는 뛰어난 장수였지만 다혈질이고 서자라는 사실에 굉장한 딜레마를 갖고 있었다고 한다.

영화를 보면 스와 가쓰요리가 독단으로 전투를 치르는 장면이 있다. 하지만 어느새 나타나 그의 뒤에 산처럼 버티고 있는 신겐. 이미 죽고 없지만 여전히 그에게서 벗어날 수 없다. 결국은 후에 다케다가의 영주가 된 후 독단적으로 군사를 일으켜 일본 전국시대의 판도를 바꾸는 나가시노 전투에서 전멸을 한 후 역사 속으로 사라지게 된다. 이 비극은 이미 예견되어 있었지 않았을까.

위에서 언급한 나가시노 전투를 끝으로 다케다 신겐의 신화는 끝을 맺는다. 당시 전국 최강을 자랑하는 풍림화산의 기마대는 오다 노부나가-도쿠가와 이에야스 연합군의 총포 앞에 맥없이 무너진다. 이 허무함은 영화의 중요한 주제 중 하나이다. 인류 역사를 보면 이런 경우는 허다하다. 광활한 아시아 대륙을 점령한 칭기스칸이나 동서에 걸쳐 엄청난 영토를 굴복시킨 위대한 고대의 알렉산더 대왕. 하지만 그들이 죽고 나서 그들이 세운 제국은 급속도로 무너진다. 이 얼마나 허무한가. 

이 영화는 분명히 전쟁 영화이다. 하지만 직접적인 전투장면은 한 번도 나오지 않는다. 예를 들어 마지막 전투 장면인 나가시노 전투신에서 다케다가의 기마대들은 돌격하고 총포에 맞고 전멸한다. 하지만 그 장면들은 나오지 않고 스와 가쓰요리와 가문 중신들의 표정으로 대변한다. 그 후에 보여주는 널부러진 시체들. 직접적인 전투 장면 없이도 충분히 박진감 넘치고 긴장된다. 그건 감독의 역량이 출중하다고밖에 설명할 길이 없다. 

한편 카게무샤는 어느 날, 신겐밖에 다룰 수 없는 난폭한 말을 타게 되고 결국은 낙마하게 된다. 그로 인해 처첩들에게 그에게 신겐이 전투에서 다친 상처가 없다는 사실을 알게 되고 가차없이 쫒겨나게 된다. 다시 부랑자 신세가 된 그. 하지만 그는 이미 신겐의 그림자가 되어 그의 곁을 떠날 수 없게 되었다. 나가시노 전투에 나타난 그는 다케다가의 기마대가 전멸한 후 풍림화산의 깃발을 들고 무작정 뛰어가지만 총포에 맞고 죽고 만다.

이 장면 역시 허무함을 표현하고 있다고 생각한다. 다케다 신겐의 상징인 풍림화산의 깃발을 들고 뛰어나간 그. 그림자인 그는 진정으로 실체인 신겐이 되고 싶었던 게 아닐까. 하지만 그 희망은 속절없이 죽음으로써 꺾여지고 만다. 마지막 장면에서 주인공과 풍림화산의 깃발 그리고 핏물이 바다로 흘러간다. 인생의 허무함 나아가 가문 역사의 허무함. 또한 전쟁의 허무함을 통해 역사의 허무함을 표현하고 있는듯하다.

허무함을 통해 말하고자 하는 것은 무엇일까. 그림자 무사를 통해 자기정체성에 대해 묻고 있는 것 같다. 일본은 서구 문명에 우리나라는 일본을 통한 기형적인 서구 문명에 근대화를 열어젖힌다. 세계 수많은 나라들도 다를 바 없을 것이다. 과연 이런 가운데 우리의 진정한 자신은 어디에 있는 것일까 생각해본다. 또한 전쟁을 통한 강함의 종말을 통해 역사를 되돌아보고자 한 것이 아닐까.

특히 자국인 일본. 고대의 일본은 하찮은 섬나라에 불과했지만 토요토미 히데요시의 전국 통일 이후 조선을 침략하고 몇 백년 후에 메이지 유신을 통해 발빠르게 서구문명을 받아들인 결과 제국주의를 앞세워 동아시아를 공포에 물들이게 하는 강대국이 된다. 하지만 역사를 되돌아보면 결국은 강하면 강할수록 그만큼 빠르게 무너진다. 그중의 한 단면을 이 영화를 통해 보여주려는 것이 아닐까.



"오마이뉴스" 2013.02.10일자 기사

728x90