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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나간 책 다시읽기

볼테르가 던지는 질문, 낙관주의냐 비관주의냐 <낙천주의자, 캉디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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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나간 책 다시읽기] 볼테르의 <낙천주의자, 캉디드>


<낙천주의자, 캉디드> ⓒ아테네

'계몽주의'라고 들어보았을 것이다. 18세기에 유럽을 휩쓴 시대적 사조로, 이성과 진보를 앞세워 전방위적으로 구습 타파를 외친 혁신적 사상이다. 로크가 그 첫장을 열었고, 이후 루소와 볼테르, 칸트 등 사상가들이 중심에 있었다. 이 사상은 결정적으로 국가와 정부의 역할을 바꾸었고, 이후의 수많은 혁명들에 영향을 미친다. 


하지만 이들의 사상적 기반이 같은 건 아니었다. 루소는 낙관주의자라고 할 수 있을 테고, 볼테르는 비관주의자라고 할 수 있을 것이다. 이는 '계몽주의'라고 하는 시대적 사조와는 다르게, 당대 논란이 되었던 철학 논쟁이다. 그 중심에는 그들보다 한 세대 앞선 철학자인 라이프니츠의 예정조화설, 즉 세계는 신에 의해 조화롭게 예정되어 있다는 주장이 있었다. 낙관주의의 모태가 되는 사상이다. 


볼테르가 비관주의를 설파한 것은, 라이프니츠의 낙관주의가 구습에 해당하기 때문이기도 하겠지만 실생활에서의 모습때문이기도 할 것이다. 국가와 정부 그리고 기득권층들이 '세상은 최선으로 되어있다'는 낙관주의 하에, 가난하고 헐벗은 사람들을 현혹시키고 있었던 것이 아닐까 생각된다. 바른 말과 맑은 정신의 소유자 볼테르가 이를 그냥 두고 볼 수는 없는 일이었다. 


당대 논쟁에 깊숙이 개입한 소설


볼테르의 <낙천주의자, 캉디드>(혹은 <캉디드 혹은 낙관주의>, 이하 <캉디드>)는 이런 당대 철학적 논쟁에 깊숙이 개입한 철학 소설이다. 상징적 의미를 배재한 채 줄거리만 보면 기막힌 모험 소설이지만 말이다. 하지만 제목에서도 알 수 있듯이, 낙관주의와 비관주의 논쟁에 대해 정면으로 부딪히는 소설임이 분명하다. 


주인공 캉디드는 그의 이름이 뜻하는 바와 같이 아주 순진한대다가 본래 낙관주의자이다. 그의 위대한 가정 교사 팡글로스의 낙관주의 사상 '모든 것은 최선으로 이루어져 있다'를 기반으로 하고 있기 때문이다. 그는 세상에서 제일 아름답다고 생각되는 성인 독일 베스트팔렌 지방의 '툰더 텐 트롱크'라는 남작의 성에서 살고 있었다. 귀족 가문 출신이기도 한 그이지만, 소설이 시작되고 얼마 되지 않은 시점에서 쫓겨나고 만다. 그로써는 넘보지 말아야 할 남작의 딸 퀴네공드와 사랑에 빠졌기에. 


지상낙원(?)에서 쫓겨난 캉디드는 정처없이 떠돌게 되지만, 스승의 낙관주의를 버리지 않는다. 시련 또한 최선으로 이루어져 있는 세상의 일부라고 생각하는 그였다. 하지만 캉디드에게 계속해서 닥치는 일들이란 너무나도 불행한 일들 뿐이었다. 캉디드에게 일어나는 불행한 일은 곧 낙관주의에 대한 맹렬한 공격과 다름 아니었다. 


낙관주의냐, 비관주의냐 그것이 문제로다


캉디드는 네덜란드에서 시작해 포르투갈, 남아메리카, 프랑스, 영국, 이탈리아 등지를 유랑하며 쫓기기도 한다. 1755년 리스본 대지진이어 그 지진을 막기 위한 화형식, 살인을 연달아 하게 되는 캉디드. 이어 캉디드가 사랑했던 남작의 딸 퀴네공드와 그녀를 보살펴 준 노파의 절절하고 끔찍하고 슬픈 지난날의 이야기까지. 여기에 어떤 낙관주의가 끼어들 수 있겠는가? 캉디드는 흔들리기 시작한다. 


하지만 그의 낙관주의를 흔드는 불행한 일들은 계속해서 일어난다. 갈등, 매독, 해적질, 살육전, 그 밖의 수많은 작은 사건들... 숨쉴틈없이 이어지는 불행한 일들은 캉디드로 하여금 절망의 구렁텅이에 빠지게 만든다. 그리고 그이 낙관주의의 뿌리이자 정신적 지주 팡글로스는 화형식에서 화형을 당해 죽어버리고 만 것이다. 볼테르는 이런 일련의 일들을 나열함으로써, 낙관주의를 충분히 조롱했고 또한 자신의 비관주의를 설파하는데 성공한 것 처럼 보인다. 


그럼에도 캉디드는 절망하지 않는다. 그의 앞에 죽었던(?) 사람이 나타나고, 급기야는 황금의 나라 '엘도라도'가 나타난 것이었다. 그럴때마다 그의 입에서는 '역시 세상은 최선으로 되어 있구나'라는 말이 나왔다. 과연 그의 긴 여정의 끝은 어떻게 끝을 맺을지? 그리고 독자들은 어떤 판단을 내릴 수 있을런지? 낙관주의냐, 비관주의냐 그것이 문제로다. 


캉디드에게는 궁극적인 목표가 있었다. 헤어졌다가 다시 만났지만 다시 헤어지게 된 연인 퀴네공드를 찾아야만 하는 것이었다. 그가 진정한 지상낙원인 엘도라도에서 나오게 되는 이유도 바로 그것이었다. 그렇게 다시 여정을 떠나게 되는 캉디드. 그의 앞에 지독한 비관주의자 마르탱이 나타난다. 그는 '선한 것이라곤 본 적이 없고, 세계는 추악하고 괴로운 것'이라고 생각하고 있었다. 그리고 그들의 앞날은 마르탱의 말대로 추악하고 괴로운 것의 연속이었다. 


도저히 마르탱의 비관주의를 반박할 일이 생기지 않는 캉디드의 나날들. 이대로 그는 비관주의자가 될 것인가? 하지만 그의 앞에는 또 다시 죽었던 줄로만 알았던 팡글로스가 나타나고, 낙관주의는 다시금 힘을 얻는다. 점점 산(?)으로 가는 것 같은 느낌의 소설. 그 끝은 캉디드가 엘도라도에서 가져온 다이아몬드를 판 돈으로 구입한 어느 장원에서 다 같이 살게 되었다는 것이다. 


볼테르가 여전히 영향력 있는 이유


볼테르는 이 소설로 낙관주의와 비관주의의 면면을 보여주면서, 낙관주의를 조롱하고 현실적으로 일어나고 있는 일에 대비해 비관주의를 옹호하고 있다. 하지만 계속적으로 번갈아 가며 나오는 낙관과 비관적인 일들로 인해 쉽사리 판단하기가 어렵다. 즉, 볼테르는 그 판단을 유보하고 독자들에게 생각할 여지를 준 것이리라. 


모든 인물들과 상황, 그리고 환경들이 완벽한 상징성을 띠고 있는 작품이기에 소설로써의 작품성이나 개연성은 떨어진다고 생각하기 쉽다. 하지만 이 소설의 작품성은 매우 뛰어나다. 완벽한 서사적 구조에, 살아있는 듯한 인물들, 거기에 쉴새없이 들이닥치는 갖가지 사건들까지. 또한 빠른 속도감으로 철학 소설임에도 불구하고 재미있게 읽을 수도 있기에, 이야기로써의 소설로도 가치가 출중하다 할 수 있겠다.


작년에서 올해까지 이 시대의 자본주의 하에서의 낙관주의와 긍정주의의 폐단을 비판한 책들이 나와 많은 관심을 끈 바 있다. '할 수 있다' '하면 된다'라는 신념, 신자유주의와 자본주의 체제 하에서는 아마도 꼭 필요한 요소가 아닌가 싶다. 그러나 이런 신념이 이 시대를 병들게 하고 있다. 현실적으로 불가능한 일을 억지로 하게 되면서 피폐해지는 것이다. 또한 이 시대에 판치는 너무나도 많은 비관적인 일들을 모르는 척 하고 있는 것이다. 


볼테르는 400여년 후의 모습을 예견한 것인가? 그의 사상이, 철학이, 글이 여전히 살아 숨쉬고 많은 사람들에게 영향을 끼치며 연구되어 지고 있는 이유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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