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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나간 책 다시읽기

소설 <위대한 개츠비>는 위대하지만, 소설 속 '개츠비'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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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나간 책 다시읽기] <위대한 개츠비>



<위대한 개츠비> ⓒ민음사

수줍게 오래된 기억 하나를 떠올려본다. 10여 년 전 한창 소설에 빠져있을 때쯤, 나를 괴롭힌 소설 두 편이 있었다. 그 이름도 유명한 움베르토 에코의 <장미의 이름>과 F. 스콧 피츠제럴드의 <위대한 개츠비>. 아무런 연관성이 없어 보이는 두 작품이지만, 나에게는 공통되게 ‘난해함’으로 기억된다.

 

<장미의 이름> 같은 경우엔 프롤로그를 넘기는 데 한 달이 걸렸었다. 지금 생각하면 이해할 수 없는 시간이지만, 당시에는 움베르토 에코의 해박함이 어찌나 어렵게 다가왔던지. 최근에 나온 그의 작품 <프라하의 묘지>(열린책들)은 비교적 쉽고 재밌게 봤다.

 

반면 <위대한 개츠비>는 다른 종류의 난해함으로 다가왔다. 도저히 이해할 수 없을 정도로 재미가 없었던 것이다. 3번이나 도전했다가 결국 읽지 못하고 책은 팔아버렸다. 참으로 어리석은 짓이었다. 지금 생각해보면 아무래도 번역에서의 문제인 것처럼 느껴진다. 다시 보니 이처럼 재미있는 소설이 또 있는가 싶다.

 

<위대한 개츠비>는 그 엄청난 인기와 더불어, 20세기 최고의 미국 소설로 칭송받으며 오래전에 이미 고전문학의 반열에 올랐다. 그와 동시에 대중에게 사랑을 받으며 고전문학이 가지고 있는 특유의 이질성까지 허물어버렸다. 얼마 전에는 영화로 다시 한 번 리메이크 되며 나의 <위대한 개츠비>에 대한 불편함 내지 선입관 또한 떨쳐냈다.

 

하지만 소설을 섭렵해도 불편함은 떠나지 않았다. 다만, 이번엔 소설 자체에 대한 불편함이 아닌 소설의 배경과 비극적인 혹은 우스꽝스러운(?) 결말 때문이다. 10년 사이에 많이 변한 나를 발견하게 된다. 이 소설의 참맛을 조금이라도 알게 되었으니 말이다.

 

대공황 전, 미국 상류층을 말하다

 

소설은 화자 닉의 독백으로 시작된다.(그의 독백은 시종일관 계속 될 것이다) 그는 중서부 도시에서는 꽤 알려진 부유한 집안이다. 하지만 중서부는 세계의 중심에서 물러나 초라하기 짝이 없어졌다. 그래서 닉은 동부의 뉴욕으로 떠나게 된다. 그곳에는 그의 친척 데이지와 그녀의 남편이자 닉의 대학시절 지인인 톰이 있었다.

 

닉은 뉴욕으로부터 20마일쯤 떨어진 웨스트에그에 자리 잡는다. 그리고 작은 만을 사이에 두고 서쪽엔 이스트에그가 있다. 데이지와 톰은 그곳에 살고 있다. 닉은 그들과의 첫 만남에서 둘 다 외도를 했었다는 것 또는 외도를 하고 있다는 사실을 알게 된다. 그리고 집으로 돌아온 그는 옆집에 성(城)처럼 으리으리한 건물이 있다는 사실도 알게 된다. 개츠비의 집이었다.

 

그곳에서는 매일 밤 알 수 없는 초대형 파티가 열린다. 각계각층의 인사들이 그 파티에 참석한다. 닉도 초대를 받게 되고, 그 곳에서 개츠비를 만난다. 조금은 지루했던 초반을 지나 소설은 급물살을 타기 시작한다.

 

개츠비가 어마어마한 집을 사들이고, 매일 밤 초대형 파티를 여는 이유가 밝혀진다. 그건 바로 5년 전 잠깐 사귀었던 데이지를 잊지 못하고, 그녀로 하여금 파티 소식을 듣게 하려는 수작이었던 것이다.

 

가난했던 개츠비가 상류층 여식인 데이지를 만나 한 눈에 반하게 되고, 자신 또한 상류층이라고 거짓말을 했던 과거와 수단과 방법을 가리지 않고 부자가 되어 데이지와 같은 상류층에 들고자 했던 과거. ‘진짜’ 상류층인 데이지 없이는 꿈을 이룰 수 없는 현재. 개츠비는 데이지를 얻어야 했다.

 

소설 <위대한 개츠비>는 위대하다

 

소설은 이처럼 개츠비의, 개츠비에 의한, 개츠비를 위한 커다한 얼개 위에 톰의 외도와 데이지의 외도(개츠비와의), 그들을 비롯한 부(富)촌의 흥청망청한 생활, 너무나도 아스라하고 나른하고 재미없는 나날들의 경치를 보여준다.

 

이는 정확히 세계 대공황이 일어나기 전인 1920~30년대의 미국을 보여준다. 일명 ‘재즈시대’이다. 1차 세계 대전의 승전 후, 마치 재즈의 경쾌한 선율에 취한 것처럼 향락과 사치가 만연한 시대. <위대한 개츠비>는 이 시대의 단면을 정확히 그려내고 있다.

 

하지만 소설의 분위기는 단연 씁쓸하고 우울하다. 안개가 낀 것처럼 뿌옇고 공허하다. 재즈시대의 이면(異面)이었다. 이것만으로도 이 소설은 충분히 위대하다. 그럼에도 소설은 한 발 더 나아가 인간이 가지는 보편성을 훌륭히 다루고 있다. 위대함에 위대함이 얹혀졌다.

 

과연 소설 속 '개츠비'는 위대한가?

 

얼핏 보면 개츠비는 참으로 위대하다. 어찌 5년 동안이나 한 여자를 ‘잊지 않을 수’ 있는가. (개츠비는 데이지와 다시 만날 날을 고대하며 자신의 앞날을 개척해왔기에, ‘잊지 못하고’가 아닌 ‘잊지 않고’가 맞다고 생각한다), 또한 비록 졸부일지라도 보란 듯이 짧은 시간 안에 자수성가를 이루지 않았는가. 하지만 다음의 구절을 보면, 결코 그가 위대하다고만 할 수는 없을 것이다.

 

“그녀는 그가 처음 만난 ‘상류층’ 여자였다. 그는 자기 나름의 수단으로 그런 부류의 여자들을 완전히 빠져버렸다... 그렇게 멋진 집은 일찍이 본 적이 없었다. 그러나 그 집이 그토록 숨이 막히도록 강렬했던 것은 바로 데이지가 거기 살고 있었기 때문이었다... 게다가 다른 많은 남자들이 데이지에게 목을 매고 있다는 사실도 그를 흥분시켰다. 그의 눈에는 그녀가 점점 더 가치 있는 존재로 보였다.”(본문 속에서)

 

개츠비가 데이지를 사랑하게 된 직접적 이유이다. 사실 데이지는 만인의 여인 이미지와는 거리가 멀다. 하지만 데이지는 상류층 여자였고, 멋진 집에서 살았던 것이다. 전설처럼 내려오던 갑부 개츠비의 실체가 밝혀지면서, 그의 신화는 무너진다. 결코 개츠비는 위대할 수가 없는 것이다.

 

또한 데이지는 개츠비의 구애에도 불구하고 결국 톰에게로 돌아가 버리고 만다. 이에 대치되어 톰도 외도를 뒤로 하고 데이지에게로 돌아간다. 톰의 외도 상대가 죽어버리고 말았던 것이다. 개츠비의 꿈과 희망은 허망하게 끝나버리고 만다. 닉은 소설의 첫 장면에서 이런 개츠비를 옹호한다. 조금 길게.

 

“오직 이 책에 이름을 제공한 개츠비, 내가 내놓고 경멸하는 모든 것을 대표하는 바로 그 인물에게만은 다른 기준을 적용할 수밖에 없다. 인간의 개성이라는 게 결국 일련의 성공적인 제스처라고 한다면, 그에겐 정말 대단한 것이 있었다. 1만 마일 밖의 흔들림까지 기록하는 지진계처럼 그는 인생에서 희망을 감지하는 고도로 발달된 촉수를 갖고 있었다. 그러한 민감성은 ‘창조적 기질’이라는 미명하에 흔히 미화되곤 하는 진부한 감성과는 차원이 달랐다. 희망, 그 낭만적 인생관이야말로 그가 가진 탁월한 천부적 재능이었으며, 지금껏 그 누구도 갖기 못했고 앞으로도 그러할 성질의 것이었다. 아니, 결국 개츠비는 옳았다. 인간들의 설익은 슬픔과 조급한 기고만장에 대해 내가 잠시나마 관심을 잃게 되었던 것은 개츠비를 삼킨 것들, 그리고 개츠비의 꿈이 지나간 자리에 부유하는 더러운 먼지들 때문이었다.”(본문 속에서)

 

그렇다. 개츠비는 더럽기 그지없는 소굴에서 형형하게 빛나고 있었다. 그래서 ‘위대한’ 보다는 그나마 ‘대단한’이라는 수식어를 붙여줄 수는 있겠다.

 

개츠비는 일면 어리석기도 하다. 씁쓸한 느낌도 든다. <위대한 개츠비>의 불편함은 여기서 오는 듯하다. 재즈의 경쾌한 선율이 언제부터 서글퍼졌을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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