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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나간 책 다시읽기

<호밀밭의 파수꾼> 위선과 거짓의 가면을 벗기고픈 소년의 방황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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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나간 책 다시 읽기] <호밀밭의 파수꾼>


<호밀밭의 파수꾼> ⓒ 문예출판사

고등학교 2학년이 끝나고 3학년이 되기 전 애매모호한 시간을 보냈을 무렵, 학교 도서관을 배회했다. 인생에 있어 큰 영향을 줄 수 있는 명저를 찾기 위해서였다. 아니, 꼭 그렇진 않았다. 그냥 원래 도서관을 좋아했고, 딱히 할 일도 없었다. 


그렇게 한량같이 도서관을 휘젓고 있는데, 정말 우연하게 성장 소설 한 편을 발견했다. 제목은 <호밀밭의 파수꾼>. 무슨 이유였는지 지금으로선 도무지 알 수 없지만 그 자리에서 그 소설을 훔쳐왔다. 즉, 도서관 대출을 하지 않고 대출 코드 스티커를 떼어버린 채 그냥 가져와 버린 것이다. 이유없는 반항이었을까, 소설에 대한 알 수 없는 끌림때문이었을까. 홀든 콜필드처럼 모든 걸 증오하고 있어서 였을까.


"그래. 난 학교를 증오해. 정말 증오하고 있어. 그것뿐이 아냐. 모든 게 다 그래. 뉴욕에 사는 것도 싫어. 택시, 매디슨 가의 버스들, 뒷문으로 내려달라고 항상 고함치는 운전사들에다 런트 부부를 천사라고 부르는 엉터리에게 소개되어야 하고, 밖에 잠깐 나가려 해도 엘리베이터로 올라갔다 내려갔다 해야 하고, 항상 부룩스에 가서 바지를 맞추어 입는 자실들, 항상....."(호밀밭의 파수꾼, 195쪽, 문예출판사 판)


어찌 되었든 이후로 10년이 넘는 세월 동안 <호밀밭의 파수꾼>은 내 인생 최고의 소설로 자리매김 중이다. 


<호밀밭의 파수꾼>은 명문 사립학교에 다니는 16세 소년인 홀든 콜필드가 네 과목에서 낙제하여 4번째 퇴학을 당한 후 겪는 2박 3일 동안의 일을 1인칭으로 풀어간 소설이다. 부유한 중산층의 자제인 소년은 왜 이리 세상에 불만이 많은 것일까. 


누구나 겪는 사춘기의 모습일 뿐일까? 위에서 언급한 주인공의 말을 보면 어느 정도 알 수 있다. 속물적이고 허위에 가득 찬, 자신이 속한 중산층의 삶을 증오하고 있다. 자동차를 좋아하지 않고 말을 갖고 싶어하는 주인공의 생각은, 현대 사회가 가지는 비인간적인 면에 점점 지쳐가는 현대인들에게 어떤 메시지를 던지고 있을까.


이 소설은 디킨스의 <데이비드 코퍼필드>나 헤세의 <데미안>과는 확연히 다른 류의 성장소설이다. 그건 젊은이들만이 가지는 방황과 일탈, 호밀밭에 머물며 꼬마 아이들이 절벽 아래로 떨어지는 걸 지켜주는 파수꾼이 되겠다는 소박한 꿈을 절묘히 파악한 덕분이겠다.


"어쨌거나 나는 넓은 호밀밭 같은 데서 조그만 어린애들이 어떤 놀이를 하고 있는 것을 항상 눈앞에 그려본단 말야. 몇천 명의 아이들이 있을 뿐 주위에 어른이라곤 나밖엔 아무도 없어. 나는 아득한 낭떠러지 옆에 서 있는 거야. 내가 하는 일은 누구든지 낭떠러지에서 떨어질 것 같으면 얼른 가서 붙잡아주는 거지. 애들이란 달릴 때는 저희가 어디로 달리고 있는지 모르잖아? 그런 때 내가 어딘가에서 나타나 그 애를 붙잡아야 하는 거야. 하루 종일 그 일만 하면 돼. 이를테면 호밀밭의 파수꾼이 되는 거야. 바보 같은 짓인 줄은 알고 있어. 하지만 내가 정말 되고 싶은 것은 그것밖에 없어. 바보 같은 짓인 줄은 알고 있지만 말야."(호밀밭의 파수꾼, 256~257쪽, 문예출판사 판)


하지만 이것이 전부는 아니다. 콜필드는 결국 집에 돌아갔고, 병원에서 정신과 치료를 받고 있으며 학교로 다시 돌아가게 되었다. 서부로 도피하고 싶다던 콜필드의 꿈은 미성숙한 인간이었던 청춘의 꿈으로 남게 된 것일까.


꿈을 꾸고 좌절하고 성장하고 포용하고 인정하고 성숙하는 인간. 콜필드가 가장 믿고 존경했던 선생님인 엔톨리니 선생님이 한 말을 통해 콜필드는 성숙한 인간이 되어가는 통과의례를 지난 것이었다. 


'미성숙한 인간의 특징은 어떤 일에 고귀한 죽음을 택하려는 경향이 있다는 것이다. 이에 반해 성숙한 인간의 특징은 어떤 일에 비겁한 죽음을 택하려는 경향이 있다' (호밀밭의 파수꾼, 277쪽, 문예출판사 판)


1952년에 소설이 출간되자 미국 사회는 엄청난 논쟁에 휩싸인다. 한 소년의 성장소설에 불과할지 모르지만, 그가 말하는 말 하나하나가 당시 미국 중산층의 치부를 드러내고 있고 사용하는 언어들도 직설적일 뿐만아니라 비속어가 난무했기 때문이다. 또한 교사, 변호사, 목사를 비난하는 것도 한 이유가 될 것이다. 하지만 논쟁이 계속될수록 판매는 급증하고, 윌리엄 포크너는 '현대문학의 최고봉'이라는 격찬을 보낸다. 


이 소설은 지금까지 1500만부 이상이 팔렸고, 세계 굴지의 출판사 랜덤하우스가 뽑은 20세기 최고의 소설'과 미국 여대생들이 뽑은 '금세기 100대 소설'에도 뽑혔다. 한편 작가 제롬 데이비드 샐린저는 2010년 타계했다. 이 소설이 세대를 거듭해 계속 읽히고 현대성을 갖는 이유는 아마도 지금 우리가 허위에 가득 찬 세상을 살아가고 있다는 방증일 것이다.


필자는 이 소설을 매년마다 한 번씩 읽는다. 혹자는 단순한 성장소설이라는 점을 들어 '피터팬 증후군'이라도 걸렸는지 알고 있지만, 그렇지는 않다. 합당한 이유가 될지 모르겠지만, 중학생의 시선으로 세상을 바라보는 소설을 읽으며 일종의 소통을 하고 있다고 생각한다. 그리고 소설을 처음 접했을 당시의 나와 대면하고 있다고도 할 수 있다. 세대 간의 불통(不通)은 존재 자체에서 빚어지는 것이 아니다. 또한 해결하지 못할 것도 아니다. 서로를 알고 싶어하고 이해하려는 태도가 있으면 충분히 해결될 수 있는 것이다. 


여기 <호밀밭의 파수꾼>을 좋아한 사람을 소개한다. '존 레논'을 암살한 자 '마크 채프먼'. 그는 존 레논을 암살한 혐의로 체포될 당시 <호밀밭의 파수꾼>을 읽고 있었다고 한다. 여러가지 추측이 있는데, 그 중 하나가 마크 채프먼이 정신이상자였다는 설이다. 마크 채프먼은 자신을 존 레논이라 생각하고 앞에 있는 존 레논이 가짜, 허위라고 생각해 그를 암살했다는 것이다. 평소 자신을 홀든 콜필드에게 집착했던 그는, 허위와 기만을 극도로 증오했던 홀든 콜필드처럼 행동한 것이었다. <호밀밭의 파수꾼> 부작용의 대표적 사례라 할 수 있다. 1981년 존 레논을 암살한 마크 채프먼은 종신형을 언도받고 지금도 교도소에 복무중이라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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