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생각하다

임진왜란 직전: 조선은 임진왜란이 시작되기 전에 패하고 말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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류성룡의 <징비록> ⓒ역사의 아침

황윤길과 김성일의 엇갈린 보고가 있은 후, 조선과 왜국이 내통할지도 모른다는 명나라 조정의 의심도 풀어졌다. 이후 조선 조정은 왜국의 동태를 걱정하여 국방에 밝은 사람을 뽑아 하삼도(충청도, 전라도, 경상도)를 방비하게 한다. 병기를 준비하고 성지를 수축했으며, 병영을 새로 쌓거나 더 늘려 수축하게 하였다. 


이처럼 흔히 알려져 있는 바와는 달리, 조선은 임진왜란 발발 전 혹시 모를 전란에 대비하기 위한 준비의 노력을 마다하지 않는다. 문제는 다른 데에서 터져 나온다. 그건 바로 오랜 전에 4군 6진 개척으로 북방을 안정시키고 쓰시마 정벌로 왜구 침략에서 어느 정도 자유로워져, 태평성대의 시대가 계속되었기 때문이다. 유성룡의 <징비록> 중에서 가장 중요한 부분이라고 할 수 있는 임진왜란 직전의 상황으로 들어가 보자. 조선은 왜 임진왜란이 시작되기도 

전에 패배하고 만 것일까. 



준비와 방비를 철저히 함에도 불구하고, 이때 세상이 태평한 지가 이미 오래 되었으므로, 중앙과 지방이 안일에 젖어 백성들은 노역을 꺼려 원망하는 소리가 길거리에 자자했다. 유성룡의 동년 친구 이로는 "성을 쌓는 것이 좋은 계책이 아니다"라고까지 말하기도 하였다. 그러며 "삼가 고을은 정암진이 앞을 막고 있으니 왜적이 어찌 날아서 건너겠는가? 무엇 때문에 공연히 성을 쌓느라고 백성들을 괴롭히는가"라고 말하고 있다. 


이에 유성룡은 이를 반박하며 코 앞에 있는 왜적이라면 더욱 쉽게 건너올 것이기에 더더욱 방비에 소홀함이 없어야 한다고 말한다. 하지만 이로의 생각이 곧 대다수 백성과 같았기에 문제는 더욱 심각하였다. 조선이라는 나라 자체가, 오랜 세월 동안 이어진 태평성대로 곪은 것이었다. 고인 물은 썩는다고 했던가. 한 두명의 깨어 있는 사람의 의견은 아무짝에도 쓸모가 없었다. 


유성룡의 말에 따르면 "대체로 성은 튼튼하고 작은 것이 좋은 것인데, 오히려 그것이 넓지 않음을 걱정했으니 또한 그 당시의 의론이 그런 것이었다. 군정의 근본이라든지, 장수를 뽑는 요령이라든지, 군사를 훈련하는 방법 같은 것은 백 가지 중에 어느 한 가지도 정돈되지 않아 결국 전쟁에 패하고 만 것이다." 나름대로 준비를 하고 있었지만, 실상은 그 어떤 것도 제대로 준비되지 않고 있었다. 


유성룡은 어릴 때 친구이자 사변이 많은 북쪽 변방에서 맹위를 떨친 이순신을 발탁하여 전라좌도 수군절도사로 삼는다. 본래 정읍 현감으로 있었는데, 왜적이 쳐들어온다는 소식이 나날이 급하게 전해지자 유성룡이 급박하게 천거한 것이었다. 이에 이순신은 현감에서 수사로, 차례를 뛰어넘어 임명되자 사람들은 혹시 그가 갑작스레 승진한 것을 의심하기도 했다. 그리고 이 의심은 훗날 계속 커져 이순신으로 하여금 많은 고생을 하게 만든다. 


이때 조정에는 신립과 이일 정도가 있었다. 경상 우병사에는 조대곤이 있었는데 늙고 용맹이 없어, 유성룡이 이일이 대신해야 한다고 주장했다. 하지만 조정에서는 이일이 서울을 지켜야 한다며 거부한 뒤 답이 없었다. 


이어서 유성룡은 비변사로 나가 여러 사람들과 의론하여 '진관의법'을 수복하고자 계청했다. 임진왜란 직전에는 '제승방략'이었다. 그 내용은 대략 다음과 같다. 


"조선 건국 초기에는 각 도의 군병이 모두 진관에 나누어 소속되어서, 사변이 있으면 진관이 소속된 고을을 통솔하여 장군의 호령을 기다리게 되어 있었다. 그리하여 적병이 쳐들어와서 한 진관의 군사가 실패했더라도 다른 진이 차례로 군대를 엄중히 하였기 때문에, 한꺼번에 무너지지 않았다.   

하지만 1555년 을묘사변 후에 분군법이 실행되어 각각의 장군들에게 나누어 소속시키게 되었다. 이를 제승방략이라 한다. 이때문에 서로 연결이 잘 되지 않았고 한 번 경보가 있으면 반드시 먼 지방과 가까운 지방이 한꺼번에 움직이게 되고, 장수 없는 군사들은 먼저 들 가운데 모여 천리 밖에서 장수 오기를 기다려야 하는 처지가 되었다. 많은 군졸이 한번 무너지면 다시 수습하기가 어려워 진 것이다."


그리하여 유성룡은 평상시에는 훈련하기 편리하고 사변이 있을 때는 병사를 징발, 집합할 수 있고 또 전후가 서로 호응하여 안팎이 서로 의지하여 갑자기 무너질 염려가 없으니 조선 초기의 진관의법을 시행해야 한다고 의견을 피력한다. 하지만 갑자기 변경할 수 없다는 주장으로 인해, 이 의론은 완전히 파묻혀 중지되고 만다. 


이후 조선은 이일을 충청도와 전라도로 순시를 보내고, 신립을 경기도와 황해도로 순시를 보낸다. 하지만 이들이 점검한 것은 활, 화살, 창, 칼 같은 것 뿐이고 군읍에서는 모두 문서의 형식만 갖추고는 법을 회피하려 들기만 하고 방어에 관해 좋은 계책이 없었다. 특히나 신립은 잔인하고 사나우면서, 자신감이 지나치고 경망하였다. 


유성룡이 방비를 제대로 하라, 왜적을 가볍게 보지 마라, 태평한지가 오래 되어 사졸들이 나약해졌으니 걱정이 된다, 라고 말을 해도 도무지 말을 듣지 아니하였다. 반성하거나 깨닫지 않고 가버리는 것이었다. 그리하여 모두 그를 걱정하였다. 


-'역사의 아침' <국역정본 징비록> 발췌 및 참조-



이처럼 오래토록 지속되는 태평성대 시대로 인해 자연스레 내려가는 사기 그리고 나약해지는 군졸들, 조선군을 책임지는 장군들의 안하무인과 안일한 대처, 조선 조정의 방심과 지리멸렬한 방비 노력 등은 임진왜란이 시작도 하기 전에 패배하게 되는데 커다한 영향을 끼치게 되었던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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