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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는 무엇을 위해 살아왔는가> 버트런드 러셀의 사상 지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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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서평] 버트런드 러셀의 <나는 무엇을 위해 살아왔는가>

 

<나는 무엇을 위해 살아왔는가> ⓒ문예출판사

초등학교 6학년 때였다. 수련회를 마치고 돌아오는 기차 안에서 이무송의 <사는게 뭔지>가 흘러나왔다. 전체 가사와는 상관없이, '사는게 뭔지'라는 단어만이 날아들어 머릿속을 헤집어 놓았다. 그 어린 아이가 삶에 대해서 알면 얼마나 알겠냐마는, 그래도 충분히 고민할 수 있는 나이였나 보다. 살아온 날들보다 살아갈 날들이 훨씬 많을 것이었기에 앞으로 어떻게 살아가야 할 것인가 고민하기 시작했다. 20여 년 가량 흐른 지금, 여전히 살아갈 날들이 많기에 고민은 계속된다. 그래도 나름대로 추구했던 바가 있다.

 

공교롭게도 그 동안 살아오면서 추구했던 바는, 내가 책이나 영화 등의 콘텐츠를 소비할 때 기준과 꼭 들어맞는다. 무엇인고 하면, '재미'와 '감동'이다. 내 스스로 진중한 가운데 유머를 잃지 않으려 노력해 왔다는 것이다. 이는 자연스레 나 아닌 다른 사람 또는 사물을 대할 때도 똑같이 적용되었던 것 같다. 이 둘 중 어느 하나가 빠져 있다면, 그게 무엇이든 나에겐 맞지 않는 것이었다.

 

버트런드 러셀의 생애를 지배해온 것들

 

이처럼 정해놓지는 않았더라도, 누구든지 신념 내지 추구하는 바가 있을 것이다. 20세기를 대표하는 저명한 철학자이자 사회학자, 지식인인 '버트런드 러셀'에게도 여지없이 인생의 방향타 구실을 한 것들이 있었다. 책 <나는 무엇을 위해 살아왔는가>(문예출판사)는 에세이로 가볍게 풀어 쓴 그의 삶을 관통하는 생각과 사상과 신념과 행동철학이 집대성되어 있다.

 

책에 의하면 러셀의 생애를 지배해온, 그리고 러셀이 평생 추구해본 바가 세 가지 있다고 한다. 사랑(에 대한 갈망), 지식(의 탐구), (인류가 겪는 고통에 대한) 연민. (연민은 애정어린 관심으로 볼 수도 있겠다.) 냉철하기만 할 것 같은 투사 이미지의 철학자가 사랑과 연민을 평생 추구했다니 조금은 의외다. 하지만 그의 삶을 들여다보면, 지식의 탐구보다 사랑과 연민을 더욱 추구했다는 것을 알 수 있다. 잠시 그의 생애를 들여다본다.

 

책에 나와 있지는 않지만, 러셀은 영국 총리를 지낸 존 러셀 백작의 손자로 귀족 가문에서 태어났다. 러셀의 아버지는 무신론자였는데, 존 스튜어트 밀에게 러셀의 대부가 되어주기를 부탁하기도 했다. 비록 러셀이 태어나고 얼마 후에 사망했지만, 밀은 러셀의 사상에 지대한 영향을 끼친다. 결국 러셀은 무신론자가 되었다.

 

책에 나와 있는 내용으로, 러셀은 사춘기 시절에 굉장히 고독했으며 몇 번이나 자살 충동을 느꼈다고 한다. 하지만 그는 수학을 조금이라도 더 알고 싶다는 마음에 자살 충동을 억제할 수 있었다. 이는 훗날 수학을 이용해 논리학의 기틀을 다지는 업적으로 이어진다. 그의 생애를 지배한 '지식'의 탐구는 이렇게 시작된 것이리라.

 

한편 러셀은 '천재' 비트겐슈타인을 제자로 두어 자신의 논리철학을 잇게 하였다. 제1차 세계 대전 중에는 몇 명 없는 반전 운동가였고, 제2차 세계 대전 중에도 이어간다. 또한 베트남 전쟁 때에도 반전 운동을 계속 하는 등, 그의 후반 생애는 반전 운동으로 점철되다시피 하였다. 이 반전 운동에야말로 그가 추구한 '사랑'과 '연민'이 깊숙이 자리잡고 있다고 할 수 있겠다.

 

버트런드 러셀의 사상 지도

 

 

버트런드 러셀(1916년 모습) ⓒ위키피디아

이 책은 40여 권의 책을 쓴 러셀의 사상 지도와 같다. 자전적 성찰 파트를 제외하고 행복, 종교, 학문, 정치의 4개 파트로 이루어져 있는데, 이는 곧 그의 사상을 집약적으로 보여주고 있다고 볼 수 있다. 그는 먼저 행복에 대해 설파하면서 다음과 같이 두 가지의 비결을 내보인다.

 

"요컨대 행복의 비결은 다음과 같다. 첫째, 가능한 한 폭넓은 관심을 가질 것. 둘째, 당신의 관심을 끄는 사물들과 사람들에게 적대적인 반응보다는 우호적인 반응을 보일 것."(본문 속에서)

 

그가 평생 추구해왔던 '연민'의 다른 면모이다. 그가 연민을 추구해왔고, 연민이 그의 생애를 지배했던 까닭은 궁극적으로 행복을 위한 것이라고 볼 수 있지 않을까. 또한 그는 그리스도보다 소크라테스와 붓다를 더 높이 치면서, 궁극의 연민을 선보인다. 그리스도는 일면 잔인한 면도 있었다는 것이다. 이를 통해 종교 파트에서 러셀은 기독교 비판의 칼을 가차없이 휘두른다. 사랑의 가치를 평생 추구해온 러셀이 사랑을 강조한 그리스도를 비판하는 아이러니라니.

 

러셀은 감성적인 사랑과 연민을 중요시했지만, 그 무엇보다 이성을 중요시했다. 다만 그 칼날같은 이성을 사랑과 연민을 추구하기 위해 사용했을 뿐이다. 이 또한 아이러니이다. 이성을 통해 감성을 지키고 추구하려 하다니? 하지만 또 생각해보면 이는 그 어떤 것보다도 조화로운 모습이다.

 

예를 들자면 이런 것이다. (러셀은 쉬운 예를 들어 어려운 이론을 설명하곤 했다.) 그는 논리적이고 이성적인 이유를 들어 반전 운동의 최선봉에 섰다. 하지만 정작 그가 지키려 했던 건 전쟁으로 말미암아 피해받는 사람들이었던 것이다. 즉, 사랑과 연민. 그는 이런 것들을 지키기 위해 이성을 도구로 사용했던 것 같다.

 

흔들리지 않고 꼿꼿이 세우다

 

물론 그의 삶을 찬찬히 들여다보면, 우리네 일반 사람과 확연히 다른 것들이 보인다. 그는 유서깊은 귀족 가문 출신으로, 가진 것이 너무 많은 사람이었다. 그래서 그런지 그의 사상에는 '노블리스 오블리제'의 일면이 보이는 것이다. 가진 것이 많은 사람이 베푸는 미덕까지 갖췄으니 완벽하다고 할 수 있겠지만, 배고픔에서 우러나오는 필사적인 맛이 부족하다고나 할까. 그의 사랑과 연민은 부족한 사람들에 대한 동정이 기반되어 있다고 할 수도 있겠다.

 

그럼에도 러셀은 전혀 흔들리지 않았다. 수많은 비판과 비난과 반대와 방해가 뒤따랐지만, 그는 자신의 신념을 그야말로 꼿꼿이 곧추 세웠다. 왜냐하면 그의 눈 앞에는 고통으로 신음하는 사람들이 있었기 때문이다. 굶주리는 아이들, 압제자들에게 고문당하는 희생자들, 자식들에게 혐오스러운 짐이 되어버린 의지할 곳 없는 노인들, 그리고 고독과 빈곤과 고통으로 가득한 전 세계가 그가 살아가야 할 이유였다. 마지막으로 러셀이 생각하는 훌륭한 삶이란 무엇인지 들어본다.

 

"훌륭한 삶이란 사랑으로 힘을 얻고 지식으로 길잡이를 삼는 삶이다. 지식과 사랑은 둘 다 무한히 확장될 수 있다. 그러므로 어떤 삶이 아무리 훌륭하다 하더라도 우리는 그보다 나은 삶을 얼마든지 상상할 수 있다. 지식이 없는 사랑, 사랑이 없는 지식은 훌륭한 삶을 만들어낼 수 없다." (본문 속에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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