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영화 리뷰] <뱀의 길>

어느 범죄 조직의 하부 조직원 야마시타는 8살 난 딸 마리가 잔혹하게 살해당한 후 복수를 다짐한다. 그는 정체불명의 수학 교사 니지마의 리드로 딸을 죽인 자를 찾아 나선다. 그렇게 찾아낸 이는 오츠키, 야마시타와도 연이 있는 범죄 조직의 조직원이다. 그들은 오츠키를 납치해 버려진 폐창고로 끌고 가선 쇠사슬로 묶는다.
이후 야마시타는 폐창고에서 지내고 니지마는 수학을 가르치러 밖을 드나든다. 오츠키에겐 물은커녕 제대로 된 밥도 주지 않고 화장실에도 보내지 않는다. 인간으로서의 존엄성을 부여잡을 수 없게 하는 것이다. 이윽고 오츠키는 같은 조직의 고위 간부를 끌어온다. 그야말로 마리를 죽인 장본인이라는 것.
그렇게 폐창고에 끌려와 오츠키와 나란히 있게 된 나카야마, 하지만 야마시타와 니지마는 오츠키를 풀어 줄 용의가 없다. 둘은 하나같이 자신이 마리를 죽이지 않았다고, 결백하다고 주장한다. 먹히지 않자, 결국 다시금 그들보다 더 고위 간부를 끌어오는데… 이 복수의 끝은 어디일까?
복수는 정의가 아니라 또 다른 폭력이 된다
일본이 낳은 세계적인 거장 구로사와 기요시 감독의 과거 대표작들이 최근 몇 년간 한국을 찾았다. <큐어>를 시작으로 <차임> <회로> 등으로 이어졌고 <뱀의 길>로 방점을 찍었다. 비록 그의 최고작으로 평가받진 않으나 특유의 독보적인 하드보일드 스릴러 풍으로 보는 이들을 압도한다.
분명 야마시타는 굉장히 감정적으로 상황을 바라본다. 때론 웃고 때론 울부짖으며 감정을 주체하지 못한다. 반면 니지마는 감정을 배제한 채 수학 공식 대하듯 상황을 보고 수학 공식 풀듯 용의자들을 대한다. 하여 영화의 주체가 정체가 분명해 보이는 야마시타 아닌 정체불명의 니지마인 것처럼 보인다.
소위 감정과 이성이 얽히고설켜 만든 소용돌이는 가해자로 추측되는 이들이 오히려 애처로워 보이게 한다. 인간의 존엄성을 앗아가니 한없이 나약해 보인다. 반면 복수를 행하는 주체들, 즉 피해자가 오히려 악랄해 보인다. 들여다보면 그들이 범인이라는 확정적 증거가 없음에도 복수의 미명하에 그들은 나쁜 놈일 뿐이다.
밥은커녕 물도 먹지 못하고 화장실도 갈 수 없는, 인간의 존엄이 무너지는 상황을 초래하는 건 수위를 막론하고 그 자체로 가장 악랄한 고문이다. 그런 짓을 피해자들이 행할 때, 그들 또한 또 다른 가해자이자 잔혹한 괴물이 되어 버린 게 아닌가 싶은 것이다. 이 폭력의 굴레 끝에는 무엇이 있을까.
'뱀의 길' 끝에서 마주하는 인간의 본성
제목 '뱀의 길'이 눈길을 끈다. 야마시타와 니지마는 인간의 길에서 한참을 이탈해 뱀의 길에 들어선 걸까? 인간은 스스로 생각하고 관계에서 스스로를 돌아보며 선을 지킬 줄 알고 길에서 벗어나지 않을 줄 안다. 하지만 자의든 타의든 선을 넘고 길에서 벗어나면 어떻게 될지 어디로 향할지 알 수 없다.
뱀이 자신의 꼬리를 물고 삼키듯 가해자가 피해자가 되고 다시 피해자가 가해자가 되는 굴레에 빠지는 게 아닐까. 그 끝에는 아무것도 없다. 너도 없고 나도 없고 우리도 없다. 인간의 길을 벗어나 뱀의 길로 들어선 이들의 짓은, 복수의 미명하에 자행된다지만 더 이상 복수가 아니다.
여기서 '수학 선생' 니지마의 존재가 독특하고 또 특별하다. 수학이야말로 이성의 끝이자 그 자체로 거기에는 진리, 즉 답만 있을 뿐 다른 무엇도 없다. 가해자를 잡아와 잔혹한 고문을 가한 후 죽이기까지 하는 건, 그 가해자가 마리에게 행한 짓에 대한 당연한 후과일 뿐이다. 다분히 이성적이어 보이나, 통제되지 못하는 감정 못지않게 통제되는 이성 또한 얼마나 쉽게 잔혹한 범죄에 이용당하는지 잘 보여 준다.
구로사와 기요시는 1990년대 후반부터 2000년대 후반까지 전성기를 달렸다. 다작을 하면서도 대체로 작품성이 좋았다. 그중 태반이 공포/호러 장르였는데 <뱀의 길>이 스릴러로서 고고히 빛난다. 26년 만의 국내 최초 개봉을 환영하며 하드보일드 스릴러의 정수를 맛보는 시간을 가지면 좋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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