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영화 리뷰] <회로>

일본 도쿄, 화원에서 일하는 미치는 동료 타구치가 말도 없이 며칠째 출근하지 않자 심상치 않은 분위기를 감지하고 그의 집을 방문한다. 타구치는 아무렇지도 않은 듯 그녀를 대하지만, 이내 방 한구석에서 목을 매 스스로 목숨을 끊는다. 이후 도쿄 곳곳에서 벽에 검은 얼룩(또는 연기 자국)만을 남긴 채 사라지거나 스스로 목숨을 끊는 일들이 이어진다.
한편 대학생 가와시마는 컴퓨터를 구입해 인터넷이라는 걸 처음으로 접속해 봤다가 이상한 사이트에 연결된다. “유령을 만나고 싶습니까? “라는 문구와 함께 방 안에 혼자 있는 사람들의 모습이 나타난다. 가와시마는 학교의 컴퓨터 전공생 하루에의 도움을 받아 조금씩 실체에 접근해 간다.
시간이 갈수록 도쿄는 황폐해진다. 유령을 만난 이들은 영원한 고독과 죽음에 감염되어 삶에의 의지를 잃고 자살해 버리기 일쑤다. 유령이 나온 방은 붉은 테이프로 봉인해 보지만, 깨진 독에 물 붓는 격이다. 미치와 가와시마는 동료와 친구, 가족 할 것 없이 주위의 모든 이를 잃고는 황량한 거리에서 조우하는데… 도대체 무슨 일이, 왜 벌어지고 있는 걸까?
25년 전, 인터넷 시대의 고독을 예언한 영화
일본 영화의 거장 구로사와 기요시가 내놓은 일명 '공포 3부작' 중 하나인 <회로>는 일본 현지에서 2001년에 개봉하였으나 우리나라에는 5년 뒤에 개봉했다. 그리고 20년이 지나 재개봉하여 우리를 다시 찾아왔다. 일본 세기말 공포의 대표작인 이 작품, 왜 지금 선보이는 걸까. 그 이유는 의외로 명료하다.
영화가 제작되어 소개된 2000년대 초는 '인터넷'이라는 전 세계 연결 도구가 본격적으로 보급되던 시기다. 말 그대로, 흩어져 있던 모두를 하나로 연결시킨다는 데 큰 의의가 있었다. 지금도 유효한 바, 인터넷 하나면 못할 게 없다. 반대로 인터넷이 아니면 할 수 있는 게 많지 않아졌다.
<회로>는 바로 그 인터넷의 맹점, 하나로 연결시키려는 의도가 인간을 더 외롭고 고독하게 만들 거라고 내다봤다. 타인과 연결시키는 게 아니라 오히려 혼자 고립되고 유령이라는 이름의 ‘죽음’과 연결되고 마는 것이다. 유령이 뿜어내는 '절대적 고독으로서의 죽음'에 압도 또는 매료되어 사람들은 스스로 목숨을 끊는다.
현대인의 무기력을 꿰뚫은 섬뜩한 통찰
일종의 감염으로서의 '무기력'에 이은 '자살', 치료 방법을 찾을 수 없으니 도시는 황폐해져 가고 나라는 무너져 간다. 사람은 점점 사라지고 유령만 점점 많아진다. 절대적 고독이 존재 이유인 유령은 환영이 아닌 실제하지만, 살아 숨 쉬는 사람이 아니기에 도시에 활기를 불어넣을 수 없다.
작금 시대에 팽배한 무기력증을 25년 전에 예언한 셈이다. 서로 연결되어 있다고 믿지만 외로움과 고독 속에서 몸부림치다가 무기력에 빠지기 일쑤인 현대인, 구로사와 기요시는 25년 전 모두를 하나로 연결해 준다는 '인터넷' 태동기에 영화 <회로>를 통해 그 폐해를 꿰뚫어 봤다.
이제 인터넷은 훨씬 더 고차원으로 나아갔다. 앞으로 어디까지 우리를 이끌지 알 수 없을 정도다. 언제 어디서나 인터넷에 접속해 실시간으로 전 세계와 연결될 수 있다. 그 정확성과 빠르기가 과거와 비교할 수 없다. 그리고 가히 모든 걸 알 수 있다. 하지만 현대인들은 그 어느 때보다 심리적으로 고통받고 있다.
적이 없는 공포, 그래서 더 오래 남는 걸작
보통의 호러 공포 영화는 명명백백 '적'이라는 게 존재한다. 적에게서 도망가거나 하다못해 적에게 대항해 이겨 내면 살 수 있다. 물론 너무나도 막강하거니와 언제 어디서 나타나 해를 가할지 알 수 없으니, 그 자체로 공포를 유발한다. 하지만 이 작품 <회로>는 다르다. 달라도 한참 다르다.
정체를 알 수 없는 '유령'의 존재, 그들이 남을 해치지 않고 스스로를 해치는 이유, 유령과 조우한 사람들이 유령처럼 되는 이유를 단번에 알아차리기 힘들다. 그리고 무엇보다 이 현상이 언제, 어디서, 누구에 의해, 어떻게, 왜 일어났는지 알 수가 없다. 그렇게 사회가 무너지는 걸 보고만 있어야 하는 것이다.
그야말로 근원적 공포를 선사한다. 나도 모르게 내가 나를 해친다는 것, 소름 끼친다는 정도로 갈무리할 수 없다. 나아가 압도될 수밖에 없는 고독감과 바로 그 고독감 후에 찾아올 허무함까지, 일개 개인으로 어찌해 볼 도리가 없는 것들이 묵직하게 짓누른다. 확실하게 추천할 수 있는 마스터피스.
'신작 열전 > 신작 영화' 카테고리의 다른 글
| 가해자와 피해자가 뒤바뀌는 순간, 진짜 공포가 시작된다 (0) | 2026.07.21 |
|---|---|
| 생존과 존엄 사이, 어느 미등록 이주민의 파리 48시간 (0) | 2026.07.16 |
| 정착은 끝이 아니라 시작이었다… <하나 코리아>가 건네는 질문 (0) | 2026.07.07 |
| 살아남은 신부의 두 번째 전쟁, 더 거대해진 악마의 게임 (0) | 2026.06.30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