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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나간 책 다시읽기

<우리들의 일그러진 영웅> 자기 몫을 뺏기고도 분노 없던 이들이 만든 세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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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나간 책 다시읽기] 이문열의 <우리들의 일그러진 영웅>


<우리들의 일그러진 영웅> ⓒ 문학사상사

영화배우 홍경인은 20대가 되기 전 한국 현대사의 중요한 인물 두 사람을 훌륭히 연기한 바 있다. 1992<우리들의 일그러진 영웅>'엄석대', 1995<아름다운 청년 전태일>'전태일'이다. 앞의 인물은 가상의 인물이고, 뒤의 인물은 실존 인물이다. 이 두 영화는 당시 논란의 중심에 있으면서 많은 시사점을 남겼다. 그리고 20여년이 지난 지금도 이들 영화가 던지는 메시지는 유효하다.

 

이 중 '엄석대'라는 인물은 작가 이문열이 만든 캐릭터이다. 소설 <우리들의 일그러진 영웅>의 주인공으로, 한국 현대사의 상징적인 인물로 자리매김한지 오래다. 소설에는 엄석대뿐만 아니라 다양한 인간 군상들이 적재적소에 배치돼 있다. 모두가 확실한 캐릭터로, 그들이 갖는 상징성은 확고하다. 그리고 이들의 모습을 통해 작가 이문열이 전하고자 하는 바를 알 수 있다.

 

아니꼽고 하찮은 시골 학교의 '소왕국'

 

소설은 1950년대 말~1960년대 초를 시대적 배경으로, 시골 초등학교의 5학년 교실을 공간적 배경으로 하고 있다. 화자인 '' 한병태가 26년 전을 회상하며 내레이션 조로 이야기를 풀어나간다. 새삼 '26'이란 단어가 다가온다. 1987년에 출간된 소설의 화자 '' 한병태가 26년 전을 회상하는 것과, 필자가 2013년에 26년 전인 1987년 출간된 소설을 리뷰하는 것.

 

한병태는 서울의 고급 공무원인 아버지가 시골로 좌천되는 바람에 서울에서 시골로 전학을 가게 된다. 그는 전학을 오자마자 시골 학교를 매도하는 태도를 보인다. 그리고 '자유와 합리'를 내세우며, 엄석대 왕국에 반기를 드는 것이었다. 그의 눈에는 시골 학교의 '소왕국'이 아니꼽고 하찮게 보였던 것이다.

 

여기서부터 이미 작가의 이데올로기적 형상화 작업이 눈에 띄기 시작한다. 초등학생 아이들의 행동으로 보여주는 자유와 폭력, 합리와 불합리의 대립. 현실정치를 우화적으로 비판·풍자하려는 움직임이다.

 

엄석대 왕국은 어떻게 만들어졌는지 모른다. 다만 그가 다른 아이들보다 2~3살이 많고, 키는 머리 하나만큼 더 크며, 축구를 잘 한다는 것. 그리고 전교 1등의 시험 성적. 이런 저런 이유와 그의 카리스마가 빚어낸 리더십은 확고부동한 엄석대 1인 독재체제를 만들어 놓았다. 한병태는 외롭게 저항하다가 결국 굴복하고 만다.

 

하지만 엄석대 왕국은 조악하기 짝이 없다. 초등학교 5학년 학급이라는 공간적 배경에서 오는 선결적 조악함과 더불어, 엄석대의 능력에서 오는 조악함이다. 사실 엄석대는 다른 아이들보다 나이가 많다는 연유로 독재체제를 구축할 수 있었던 것이다. 또한 그가 전교 1등의 성적을 유지할 수 있었던 것은 대리시험 때문이었다.

 

당시의 정치상황을 담으려한 작가의 의도

 

이는 소설이 출간된 1987년 당시의 정치상황을 담으려한 작가가 의도한 바일 것이다. 소설적 배경은 1960년대지만, 작가는 1987년을 말하고자 했다. 엄석대 왕국의 조악함은 그 첫 번째이다. , 당시의 정치판이 초등학교 5학년 교실만큼 조악하다는 비판의 일갈이다. 여기에는 당시 대통령인 전두환이 조악함의 반석 위에 서 있다는 것과, 그 자신 조악함의 상징과도 같다는 것이 읽힌다. 또한 한병태로 상징되는 변절자들의 이미지도 보인다.

 

여기서 잊지 말아야 할 중요 인물이 있다. 바로 엄석대 왕국 교실의 5학년 담임선생님이다. 그는 한병태가 엄석대의 비리와 횡포를 알아내 호소할 때, 방관자적이며 무기력한 현실순응주의자적인 모습을 보인다. "석대의 위협이나 속임수에 넘어간 거짓된 것일지라도, 반 아이들 모두의 지지를 받고 있는 석대를 지지할 수밖에 없다"는 논리였다.

 

그의 눈에는 모든 것들이 보이지만, 학급이 겉으로 아무 문제없이 잘 돌아가므로 그 속과는 상관없이 괜찮다는 것이었다. 작가 이문열은 이를 두고 "폭력적이고 반민주적인 독재 정권을 실리에 따라서 허락한 60~70년대 미국 외교 정책"을 가리킨다고 말했다.

 

영화 <우리들의 일그러진 영웅>의 한 장면. 새로운 6학년 담임 선생님. ⓒ 대동흥업


6학년이 되자 새로운 담임선생님이 등장한다. 사범대를 갓 졸업해서 경험이 많지는 않지만, 유능하면서도 성실하고 예민한 사람이다. 그는 얼마 지나지 않아 엄석대 왕국의 실체를 알게 되고, 몇 일만에 엄석대 왕국을 무너뜨려 버린다. 모든 아이들이 보는 앞에서 엄석대의 대리시험을 까발리고, 그를 매질하게 되는 것이다. 그러며 그는 말한다.

 

"너희들은 당연히 너희 몫을 빼앗기고도 분한 줄 몰랐고, 불의한 힘 앞에 굴복하고도 부끄러운 줄 몰랐다. 만약 너희들이 계속해 그런 정신으로 살아간다면 앞으로 맛보게 될 아픔은 오늘 내게 맞은 것과는 견줄 수 없을 만큼 클 것이다. 그런 너희들이 어른이 되어 만들 세상은 상상만으로도 끔찍하다."(본문속에서)

 

그로 말할 것 같으면, 방관자적이며 무기력한 현실순응주의자적인 모습의 5학년 담임선생님과 다르게 민주적 절차와 방법을 존중하면서 개혁적 의지를 실천하는 인물로 보인다.

 

1950년대 말과 1987년의 기막힌 대치

 

여기서 작가가 의도하는 두 번째 포인트가 잡힌다. 역시 1987년 당시의 상황을 그리고 있다. 엄석대 왕국은 1950년대 말 무너져 가는 자유당 또는 이승만 정권을 상징하고 있다고 할 수 있을 것이다. 하지만 진짜 의도는 무너져 가는 전두환 정권에 있었다.

 

1987114"책상을 탁치니 억하고 죽었다"는 말로 유명한 박종철 고문치사 사건이 벌어진다. 이에 학생들은 분노를 금치 못하고 거리로 뛰쳐나와 시위를 계속했다. 그러던 413일 전두환은 호헌조치를 발표한다. 거세진 민주화 요구에 대통령 직선제 개헌 논의가 활발히 이뤄진 시기에, 갑자기 모든 개헌 논의를 금지한 것이었다. 이에 분노는 하늘을 찔렀고, 급기야 박종철 고문치사 사건이 은폐됐다는 성명까지 발표하게 된다. 이어서 민주화 투쟁은 전국적으로 번진다. 69일에는 고 이한열 열사가 최루탄에 맞아 사망하는 사건이 발생하고, 다음 날인 610일에 전국적으로 수십만 명이 참여한 6·10 민주항쟁이 시작된다. 이후 2백만 명이 넘는 시민들이 쏟아져 나왔고, 결국 629일 당시 노태우 민정당 대표위원은 직선제 개헌 특별선언'을 발표하게 된다. 이로써 신군부 전두환 독재체제는 허망하게 막을 내린다.

 

겉으로는 확고부동한 독재체제의 엄석대 왕국은 6학년 담임선생님이 부임한지 한 달도 안 되어, 겨우 한 나절 만에 산산조각 나고 말았다. 여기에는 새로 온 6학년 담임선생님의 의지가 큰 몫을 차지했지만, 교실 학생들의 '민주화 요구'도 상당한 몫을 차지했다. 봇물처럼 쏟아져 나오는 엄석대에 대한 고발과 그를 향한 매서운 화살들.

 

이는 허망하게 막을 내린 전두환 정권을 상징하며, 독자들로 하여금 일종의 카타르시스를 느끼게 해준다. 하지만 씁쓸하기 짝이 없다. 아이들이 보이는 눈물에 그것이 보인다. 그들은 승리했지만 영원한 승리를 보장받지 못할 것이었고, 이미 폭압에 대한 순응에 적응돼 있었으며, 독재자 엄석대는 어딘가에서 잘 먹고 잘살 것이었다. 하지만 그들은 여전히 힘없는 민중일 따름일 터였다.

 

작품의 높은 문학적 경지

 

이 소설은 얼핏 보면 독재체제에 대한 비판과 독재자의 말로를 애돌아 표현한 알레고리 소설로 읽힐 수 있다. 하지만 그렇기만 했다면, 굉장히 통속적으로 또는 유치하게 읽혀졌을 수도 있다. 또한 20년이 훌쩍 넘은 지금까지 그 위상이 지속되기도 힘들었을 것이다. 거기에는 분명 다른 이유가 존재했을 것으로 보인다. 평론가 이어령은 1987년 이상문학상 심사평에서 다음과 같이 지적했다.

 

"이 작품이 소설적으로 크게 성공하고 있는 부분은 교활한 독재자 엄석대의 일그러진 생애가 아니라 그에 대한 내레이터의 태도, 시각, 그리고 그 해석에 있다. 여기의 내레이터는 엄석대를 그리기 위한 단순한 화자가 아니라 실질적인 행위자로서의 주인공인 것이다. 그러므로 단순도식으로 이룩된 엄석대나 새로 온 담임선생 같은 인물보다는 <> 한병태가 보여주는 복합성이 이 작품의 높은 문학적 경지를 이루고 있다."

 

이 작품의 진정한 가치는, 소설의 알레고리가 그 힘을 잃었을 때 비로소 발휘될 것이다. 하루 빨리 그럴 때가 왔으면 하는 마음이다. 소설의 또 다른 성공에 대한 생각은 차치하고, 그럴 때에야 야만의 시대가 가고 만민의 시대가 오기 때문이다.



"오마이뉴스" 2013.8.2일자 기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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