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넷플릭스 오리지널

원자폭탄은 위대한 업적인가 최악의 무기인가, 아인슈타인의 고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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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넷플릭스 오리지널 리뷰] <아인슈타인과 원자폭탄>

 

넷플릭스 오리지널 다큐멘터리 <아인슈타인과 원자폭탄> 포스터.

 

1933년 독일은 아돌프 히틀러가 국가수상에 오르며 나치의 손아귀에 떨어진다. 이후 유대인 탄압이 시작된다. 목숨이 위태로워지자 수많은 유대인이 고향 독일을 떠난다. 역사상 가장 위대한 이론 물리학자로 명성을 떨치고 있던 알베르트 아인슈타인 또한 그럴 수밖에 없었다. 그가 향한 곳은 영국 노퍽, 로커램슨 중령이자 국회의원의 개인 사유지 로턴 히스였다.

로커램슨은 대영제국 밖에 거주하는 유대인의 시민권 획득 기회를 증진하고 확대하기 위해 최선을 다하고 있었다. 아인슈타인은 로턴 히스에서 경호원의 보호도 받는 등 비록 '누추한' 곳이었지만 극진히 대접받는다. 그는 그 어떤 폭력도 싫어했지만 경호원의 산탄총은 용인했다.

넷플릭스 오리지널 다큐멘터리 영화 <아인슈타인과 원자폭탄>은 1933년 나치의 탄압을 피해 독일을 떠난 아인슈타인이 영국과 미국에서 거주하는 한때를 보여주는 한편 히틀러의 나치가 어떻게 독일을 집어삼키고 유럽 전역으로 야욕을 퍼뜨리는지를 교차하며 보여준다. 나아가 제2차 세계대전을 종식하는 데 결정적으로 한몫한 원자폭탄 제조 및 투하 과정에서 아인슈타인이 어떤 역할을 했는지 들여다본다.

작년 크리스토퍼 놀란 감독의 영화 <오펜하이머>가 개봉해 전 세계적 신드롬급 화제를 불러일으켰다. '원자폭탄의 아버지' 줄리어스 로버트 오펜하이머가 세상을 구하고자 세상을 파괴할 수 있는 무기를 만드는 이야기. 그 과정에서의 인간적인 고뇌가 짙게 묻어난다. 한편 <아인슈타인과 원자폭탄>에선 아인슈타인의 고뇌가 짙게 묻어난다.

 

독일에서 영국으로, 영국에서 미국으로

 

아인슈타인은 폭압적이고 전체주의적인 나치에 대항해 법 앞에서 모든 국민에게 정치적 자유와 관용, 평등이 주어진 국가에서만 살겠다고 다짐한다. 하여 그는 평화주의자일 뿐 아니라 '전투적 평화주의자'임을 선언한다. 평화를 위해 기꺼이 싸우겠다고 말이다. 훗날 원자폭탄에 관한 고뇌의 시작점이라 할 수 있겠다.

한편 그가 발견한 세상을 뒤흔들 만한 상대성이론의 핵심은 과거, 현재, 미래가 허상일 뿐이라는 점이다. 그런데 한 가지 결과가 더 생각난다. 아주 작은 양의 질량이 엄청난 양의 에너지로 전환될 수 있다는 것. 아인슈타인은 그 에너지가 발산되는 게 1933년 당시 과학으로는 거의 불가능하다고 봤지만, 가히 우려스러운 발상이었다.

시간을 거슬러 올라 1920년 독일은 제1차 세계대전에서 패한 후 혼란에 빠져 있다. 와중에 히틀러는 독일 혈통만이 국가의 일원이 될 수 있고 유대인은 될 수 없다고 선언한다. 이후 아인슈타인을 향한 무자비한 비방이 이어진다. 아인슈타인은 굴하지 않고 신문 기고를 통해 자신이 유대인이고 유대인의 일원인 게 기쁘다고 공표한다. 목숨이 위태롭기 한참 전에 유대인을 배척하려는 나치와의 전면전이나 다름없었다.

다시 1933년 영국, 학술지원의원회에서 아인슈타인을 찾아와 부탁하길 독일을 떠나야 할지도 모르는 실향민 학자들을 돕기 위한 행사에서 연설을 해 주십사 하는 것이었다. 하지만 그랬다간 독일 내 유대인들이 끔찍한 상황에 몰릴 수도 있었다. 심사숙고하는 아인슈타인, 투철한 반파시즘의 신념으로 연설을 수락한다. 1933년 10월 13일 런던의 로열 앨버트 홀에서 나치 독일을 향한 격렬한 비판 연설 후 그는 곧 미국 망명길에 오른다. 영국도 더 이상 안전하지 못했던 것이다.

 

원자폭탄을 둘러싼 첨예한 논란의 한가운데

 

프리스턴 대학교가 아인슈타인을 모셔 물리학과장에 앉힌다. 곧바로 수학연구소가 개관한다. 프리스턴과 아인슈타인 서로 윈윈하는 모습이었다. 그러던 1939년 조지 워싱턴 대학의 과학자들이 놀라운 보고를 듣는다. 독일에서 건너온 소식에 의하면 우라늄 원자가 중성자에 의해 충격을 받으면 둘로 쪼개진다는 것이다. '아주 작은 양의 질량이 엄청난 양의 에너지로 전환될 수 있다'는 아인슈타인의 말이 실현될 수 있었다.

군사정보부는 나치가 원자폭탄을 향한 첫걸음을 내디뎠을까 우려한다. 아인슈타인도 동일한 우려를 했고 대통령에게 서신을 보낸다. 한마디로 원자폭탄 제조를 서둘러 달라는 것이었다. 나치보다 빠르게. 그렇게 '맨해튼 프로젝트'의 닻이 오른다. 하지만 아인슈타인은 보안상의 위험이라는 명목으로 프로젝트에서 배제된다. 1939년에 시작된 제2차 세계대전은 1945년까지 계속되는데, 나치가 항복한 이후에도 일제가 항복하지 않자 히로시마, 나가사키에 원자폭탄을 투하한다.

폭탄 투하와 함께 수만 명이 즉사했고 이후 수개 월에 걸쳐 십수 만 명이 죽어갔다. 도시 전체가 한순간에 폐허가 된 건 물론이다. 조직 과학 역사상 가장 위대한 업적이라고 하는 한편, 과연 평화를 위해 치를 만한 대가였는지 논란이 일었다. 아인슈타인은 말했다. "독일이 원자폭탄 제작에 성공하지 못한 걸 알았다면 판도라의 상자를 여는 데 일조하지 않았을 것이다"라고 말이다.

시간이 흘러 러시아가 핵폭탄을 만들었다는 소식이 미국을 뒤흔든다. 뉴욕 불바다, 적색경보, 반공주의 등으로 매카시즘 광풍이 휩쓴다. 아인슈타인은 좌절한다. 또다시 시작된 전쟁 공포, 그런데 정치인의 욕망이 짙게 묻어 있다. 나치와 다를 게 무엇인가 생각하지 않을 수 없게 한다. 아인슈타인은 말한다. "인류의 운명은 전적으로 인간의 도덕적 발전에 달려 있다"라고 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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