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생각하다/팡세 다시읽기

파스칼의 <팡세>를 통한 자유로운 사유(思惟)의 장-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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파스칼은 "인간은 생각하는 갈대다"라는 명언을 남겼다. 인간이 자연에서 가장 연약한 한 줄기 갈대일 뿐이라는 것이다. 그러나 그는 생각하는 갈대이고 우주가 그를 죽이기 위해서는 한번 뿜은 증기, 한 방울의 물이면 충분하다고 말한다. 그러나 우주가 그를 박살낸다 해도 인간은 고귀하다. 인간은 알고 있기 때문이다. 인간의 존엄성은 사유(思惟)로 이루어져 있다. '생각하는 것' 그것은 인간이 인간다울 수 있는 원리이다. 그러니 올바르게 사유하도록 힘쓰자. 단, 올바름에 절대적인 것은 없다는 것, 생각하기에 있어 높고 낮음은 없다는 것을 알아두자. 파스칼의 <팡세> 아포리즘은 계속된다. 자유로운 공론의 장이 되길 바란다. 


1. 이 편과 저 편에 대해 동정심을 가져야 한다. 그러나 한 편에 대해서는 사랑에서 태어난 동정을, 다른 편에 대해서는 경멸에서 태어난 동정을 가져야 한다. 그들을 경멸하지 않으려면 정녕 그들이 경멸하는 종교 안에 있어야 한다. 


그것은 결코 멋이 아니다. 이것은 그들에게 할 말이 아무것도 없다는 것을 보여준다. 그들을 경멸해서가 아니라 그들이 양식이 없기 때문이다. 신이 그들을 감동시켜야 한다. 


이런 종류의 인간들은 아카데미스트(회의론자들)이고 에코리에(모방자들)이다. 내가 아는 한 가장 악한 인간 유형이다. 


2. 회의하는 것은 불행한 일이다. 그러나 회의 안에서 추구하는 것은 필수적인 의무다. 따라서 회의하면서도 추구하지 않는 사람은 불행과 불의를 동시에 겸하고 있다. 만약 이런 처지에서도 즐겁고 오만한 자가 있다면 나는 이렇게 해괴한 인간을 무슨 말로 형용해야 할지 모른다. 


한 곳에서 기적들이 이루어지고 한 민족에게 신의 섭리가 나타나는 것으로 충분하지 않은가. 그러나 인간은 너무나도 변질된 나머지 마음속에서 이것을 기쁨으로 삼기까지 한다는 것은 확실하다. 이것은 기쁨으로 말할 일인가. 이것은 마땅히 비통하게 말 할 일이다. 


3. 여기 이렇게 머리를 치켜들고 만족과 자랑으로 삼을 주제가 있다. 그러나 즐거워하자. 두려움도 불안도 없이 살자. 그리고 어차피 불확실하다면 그냥 죽음을 기다리자. 우리가 어떻게 되리라는 것은 그때 가보면 알 일이다. 나는 그 결말을 볼 수가 없다. 


소위 멋진 태도는 친절한 마음을 갖지 않게 되고, 착한 연민은 타인에 대해 친절을 베풀게 된다. 


죽어가는 사람이 육체의 쇠약과 죽음의 고통 속에서 전능하고 영원한 신과 맞선다면 이것이 과연 용기인가. 


내가 그런 상태에 있을 때 누군가가 나의 어리석음을 동정하고 내 뜻을 어겨서라도 거기서 나를 건져주는 호의를 베푼다면 나는 얼마나 행복할까!


이것을 괴로워하지도 않고 그렇다고 사랑하지도 않는다면 이것은 정신의 극도의 결함과 의지의 극도의 사악함을 나타낸다. 


4. 어떤 해결책도 없이 비참만을 기다린다면 무슨 기쁨의 이유가 있겠는가! 어떤 위안자도 바랄 수 없는 절망 속에 무슨 위안이 있겠는가! 


내가 이렇게 생각하는 것은 편협한 신앙심에서가 아니라 인간의 마음이 만들어진 방식에 의해서이다. 신앙심과 초연함의 열의에 의해서가 아니라 순전히 인간적인 원리 그리고 이기심과 자애심의 움직임에 의해서이다. 그리고 또 인생의 모든 불행 끝에 시시각각 우리를 위협하는 피할 수 없는 죽음이 머잖아 가공할 필연 속에 우리를 몰아넣는다는 사실을 확실히 아는 것은 우리의 마음을 뒤흔들어놓을 만큼 절실한 일이기 때문이다. 



민음사 세계문학전집 83. 파스칼의 <팡세>에서 발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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