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편집자가 독자에게] <역사에 불꽃처럼 맞선 자들>
작년 말에 출판사를 옮기고 가장 빠르게 해야 했던 일이 기획·계약·원고였습니다. 경제경영이 주력 분야인 출판사에서 저는 인문·역사·에세이를 맡게 되었는데, 기대와 걱정이 공존했죠. 이쪽으론 진행된 원고가 거의 없었기에 경제경영 책을 만들며 기획도 빠르게 진행했습니다. 경제경영 책을 만든 지 오래라서 부담감이 상당했던 기억이 새록새록 피어납니다.
그러다 보니, 연재물 쪽으로 시선을 돌릴 수밖에 없었습니다. 최소한의 기획과 어느 정도의 원고가 이미 나와 있으니, 계약하고 진행하면 책이 빠르게 나올 수 있었기 때문입니다. 물론 단행본 출간에 최종 목표가 있는 것이 아니기에 질 좋고 단행본에도 안성맞춤인 연재물을 찾는 건 매우 어려운 일입니다.
꽤 오래 전부터 눈여겨 봐온 사이트가 떠올랐습니다. '아홉시'라고 하는 지식 구독 채널이었죠. 이름이 잘 알려져 있진 않지만 어느 모로 보나 괜찮기만 한 글이 꽤 많았습니다. 적극적으로 알아봤고 아홉시 대표님께서 직접 중재해 주셔서 작가분들과 긴밀하게 소통할 수 있었습니다. 우리 출판사 대표님께서는 저를 믿고 기획이 진행되는 데 있어 빠르게 결재를 해 주셨고요.
앞으로 이 분야에서 꾸준히 책을 내놓아야 했기에 신중에 신중을 기해야 했지만, 좋은 원고를 앞에 두고도 이리 재고 저리 잰다면 아무런 의미가 없었을 것입니다.
'아홉시' 연재물을 단행본으로
그렇게 강부원 작가를 만날 수 있었습니다. 애초에 작가님과 함께하고 싶었던 연재물은 'Historic moment: 우리가 살았던 시간들'이었습니다. 지난 수십 년 동안의 소소한 사건에서부터 큰 사고들까지 숨겨진 의미를 살피는 작업이 마음에 쏙 들었죠. 그런데 연재를 끝내기까지 많은 시간이 남아 있었습니다. 빠르게 책을 낼 순 없었던 것입니다.
그런데 아홉시 대표님이 강부원 작가의 다른 작품을 추천해 주셨습니다. 연재가 끝난 지 조금 된 '모험과 충돌의 역사: 크랙과 트릭스터'라는 연재물이었습니다. 제목부터가 끌리더군요. 진행하지 않을 수 없었습니다. 책으로 만들어 더 많은 분들께 소개하고 싶었죠. 작가님께 연락을 드렸고 오래지 않아 직접 봬며 계약을 마쳤습니다. 이후 가능한 한 가장 빠르게 책을 내고자 했습니다.
여타 다른 책의 경우 가장 먼저 해야 할 일이 원고 마감이라면, 이 책의 경우 원고 마감은 되어 있는 반면 방대한 분량의 연재물을 어떻게 나누냐는 것이 급선무였습니다. 비록 하나의 연재물이지만 굉장히 길었기에 두 권으로 쪼개고자 했고 분권 형식이 아닌 완전히 다른 책으로 포지셔닝하기로 했습니다.
작가님께서 흔쾌히 받아들여 주시고 하나의 주제로 진행하셨던 하나의 연재물을 둘로 쪼개는 데 심혈을 기울이셨습니다. 기획편집자인 제가 해야 할 일을 작가님께 전가한 게 아닌가 하는 마음에 불편하기에 했지만, 작가님께서 직접 나눠 주시는 게 훨씬 정확할 거라는 생각이 앞섰습니다. 저는 서포트하기로 마음 먹었죠.
세상과 충돌하고 부딪히며 모험을 감행한 25명
'모험과 충돌의 역사: 크랙과 트릭스터'는 그렇게 두 개로 쪼개졌습니다. 그게 가능했던 건 새로운 세상을 꿈꾸며 세상에 맞서 싸운 이들의 이야기인 건 맞지만 방식이 달랐기 때문이었습니다. 크게 두 진영으로 나눠 보자면, 싸우고 도전하고 시대에 불화하며 적극적인 인생을 산 이들이 있었고 스스로 빛나고 약자 편에서 서서 시련을 견디며 극적인 인생을 산 이들이 있었죠.
<역사에 불꽃처럼 맞선 자들>에 소개된 25명의 인물들은 일평생 세상과 충돌하고 부딪히며 모험을 감행했습니다. 낯설고 익숙하지 않은 인물들이 상당할 텐데, 강주룡, 김학순, 김진숙, 박열, 나운규, 전혜린, 김수근, 김승옥 정도만 낯이 익을 뿐 나머지 분들은 사실상 처음 들어보는 이름이었습니다.
기생에서 열혈 독립운동가로 탈바꿈한 '정칠성', 조선 독립운동가들의 실질적 리더였던 '남자현', 우리나라 최초의 여의사 '김점동', 조선 최초의 비행사 '서왈보', 한국 최초의 여성 영화감독 '박남옥', 한국의 미켈란젤로 '이쾌대', 시대가 만든 괴물 '박흥숙' 등의 이야기는 전율을 일으키게 하고 감동에 마지 않게 했으며 피를 들끓게 하고 피가 거꾸로 솟을 만큼 분노케 하기도 했습니다.
'아무렇게나 잊혀도 무방한 이름은 없다'
어디선가 들어봤음직하다고 해도 자세히는커녕 대략이나마 알기 힘든 사람들뿐입니다. 그러니 이들을 두고 '숨겨진 존재' '잊힌 존재'라고 해도 틀린 말은 아닐 것입니다. 곰곰 살펴보니, 이들에겐 세상이 뭐라 하든 온몸으로 스스로를 밀고 나갈 수 있는 자신만의 '무엇'이 있었던 것 같습니다. 저자는 '규칙'과 '리듬'이라고 했는데 더 적합한 말을 찾기 힘들군요.
20세기 한국사에서 사라지다시피 한 25명을 이 책이 들여다보고자 했다면, 이 책이 말하고자 하는 바는 '아무렇게나 잊혀도 무방한 이름은 없다'는 것입니다. 이 선언 덕분에 설령 역사 앞에서 용납할 수 없는 저지른 이라도 끄집어 내 우리 앞에 세울 수 있습니다. 덕분에 조선공산당 여성 트로이카의 막내로 젊은 시절 강인한 혁명가였지만 친일 협력으로 전향한 '고명자'나 민족 독립과 사회주의 해방을 위해 치열하게 급진적으로 살았지만 극렬 친일파로 전락한 '신태악' 같은 이도 다룰 수 있었던 것이죠.
부, 명예, 권력을 가진 자의 이야기만으로 채워진 20세기 한국사, 재미 없기도 하고 시대를 제대로 읽는 데 하등 도움이 되지 않기도 합니다. 저자도 말했듯 숨겨진 존재, 잊힌 존재들의 알려지지 않은 이야기를 20세기 한국사의 빈 곳들에 채워 넣을 필요가 있습니다. 이 책 <역사에 불꽃처럼 맞선 자들>로 시작해 보는 게 어떨까요. 생각지도 못한 인물들의 생각지도 못한 이야기들로 생각지도 못한 인사이트를 얻을 거라고 확신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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