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애플TV+ 오리지널 리뷰] <세브란스: 단절>
일과 삶, 그러니까 직장생활과 사생활을 완전히 분리시킬 수 있으면 어떨까? 직장에서는 깔끔하게 일만 하고 직장 밖에서는 일을 완전히 잊은 채 삶을 즐길 수 있다면 말이다. 생각만 해도 짜릿하지 않은가? 이제는 모르는 사람이 없는 단어 '워라밸(워크 앤 라이프 밸런스)', 즉 일과 삶의 균형 또는 저녁이 있는 삶을 완벽하게 실현할 수 있다니.
애플TV 플러스 오리지널 드라마 시리즈 <세브란스: 단절>은 완벽한 워라밸을 실현시켜 주는 '단절 수술'을 받은 이들의 이야기를 담아 냈다. 단절 수술이 뭔가 하면, 출근하는 즉시 회사 밖에서 일어난 일을 완벽하게 잊고 퇴근하는 즉시 회사 내에서 일어난 모든 일을 완벽하게 잊는 것이다. 환상적이고도 기발한 아이디어라고 하지 않을 수 없다. 그야말로 (거의) 모두가 바라던 게 아닌가.
<세브란스: 단절>은 모두가 환영할 만한 아이디어를 비롯해 기획, 연출, 연기, 음악, 미장센 등 모든 면에서 고르게 극찬을 받으며 2022 제52회 프라임타임 에미상에서 12개 부문 14개 후보에 오르는 기염을 토했다. <오징어 게임>의 기록과 동일한 수치다. 한편, 애플TV 플러스 오리지널 최초로 드라마-최우수작품상 후보에 올랐다고 한다. 얼마나 대단한 작품이기에?
회사 안과 밖을 완벽하게 분리하는, 단절 수술
마크는 죽은 아내에 대한 기억으로 괴로워한다. 다행히 여동생과 가깝게 지내며 슬픔을 달래고 위로도 많이 받지만 그때뿐이다. 그는 결국 회사에서라도 아내의 기억을 잊고자 단절 수술을 감행했다. 출근 직전까지 우울해하며 펑펑 울어도 출근만 하면 회사 밖 기억이 싹 사라지기에 회사에서나마 마음 편히 일에 집중할 수 있게 되었다.
마크는 기존 팀장 피티가 퇴사하며 새로운 팀장으로 승진한다. 팀에는 4명이 있는데, 그들이 하는 일이란 게 모니터를 뚫어져라 보면서 기분 나빠 보이는 숫자들을 삭제하는 것이다. 무슨 의미인지 알 도리가 없는 일. 신입 팀원 헬리를 교육해야 하는 마크, 하지만 그녀는 자신이 처한 상황을 곱게 받아들일 의향이 없는 것 같다. 퇴사를 하려 하지만 회사 밖의 헬리가 막는다.
한편, 회사 밖의 마크는 한 남자를 만난다. 그는 자신을 마크의 전 회사 동료 피티라고 소개하며 회사에 관한 아리송한 이야기를 들려주는데, 마크로선 회사 안의 일을 알 도리가 없으니 어리둥절할 뿐이다. 회사 안의 일이 자신과 무슨 상관이랴 싶기도 할 것이다. 회사 안과 밖을 완벽하게 분리하고자 단절 수술을 받았는데 말이다.
그런데, 회사 안에서도 그렇고 회사 밖에서도 그렇고 뭔가 범상치 않게 흘러간다. 회사 안의 마크와 팀원들이 회사 밖의 마크와 팀원들에게 알리고 싶은 일들이 벌어지고 있었던 것이다. 그 반대의 일도. 과연 회사에서는 무슨 일이 벌어지고 있는 걸까? 마크와 팀원들은 별 탈 없이 워라밸을 이어갈 수 있을까?
궁극의 워라밸, 하지만 자아가 나뉜다...?
<세브란스: 단절>의 원제는 당연히 '세브란스(severance)', 우리나라에 소개되며 뒤에 친절하게 '단절'이라는 부제를 붙여 줬다. 아무래도 우리나라에선 '세브란스' 하면 병원 이름이 가장 먼저 떠오르기 때문이 아닐까 싶은데, 그렇다고 '단절: 단절'이라는 제목은 좀 웃긴 것 같다. 그만큼 '단절'이라는 단어가 이 영화의 핵심 중 핵심이라고 할 수 있을 텐데, 의미심장한 게 '세브란스'에는 '해고'라는 뜻도 있다. 이 작품에서 회사를 나간다는 게 어떤 의미인지 알면 또 다른 느낌이 들 것이다.
직장생활과 사생활을 완전히 단절시키다 보니 몸은 하나지만 자아는 둘로 나눠졌다. 작품에선 회사 안의 자아를 이너라고 부르고 회사 밖의 자아를 아우티라고 부른다. 이너는 출근만 반복하고 아우티는 퇴근만 반복한다. 완벽하게 아우티만을 위한 삶, 이너는 아우티가 회사를 그만둔다고 할 때까지 회사 밖으로 나갈 수 없다. 하지만 그토록 퇴사를 원하는 이너에겐 이너 나름대로 회사 안의 삶이 존재하기에 퇴사를 하는 순간 소멸되어 버린다. 회사 안에서만 존재하는 이너가 더 이상 회사 안에서 존재할 수 없게 된 것이다.
이쯤 되면 모골이 송연해질 수밖에 없다. 궁극의 워라밸을 보장해 주는 환상의 단절 수술을 받아 직장생활과 사생활을 완전히 분리하는 것까진 좋지만, 아우티가 아닌 이너의 삶을 들여다보면 과연 그 누가 환영할까 싶다. 어느 날 갑자기 알 수 없는 회사 안에서 깨어나 언제까지인지도 모른 채 오로지 일만 해야 한다니 말이다.
이 작품에서 이너를 따라가다 보면, 어리둥절했다가 긴장했다가 나가고 싶었다가 포기했다가 적응했다가 힘을 합쳤다가 대치했다가 진실을 마주하는 수순으로 나아간다. 초반엔 뭐가 뭔지 알 수 없어 조금 지루할 수 있겠으나 뒤로 가면 갈수록 사건이 파도처럼 밀려올 테고 재미도 비례할 것이다. 2022년 최고의 드라마를 넘어 역대급 드라마라고 해도 손색이 없다.
이 작품의 풍부한 볼거리
<세브란스: 단절>이 영상 콘텐츠로서의 본분(?)을 망각한 채 스토리와 메시지로만 작품을 꾸렸다고 생각할 수 있겠으나, 이 작품의 볼거리는 대단하다. 기본적으로 미스터리한 분위기와 절제된 모양새를 보이는데, 마크가 다니는 회사가 전부 새하얀색으로 되어 있다는 점과 특히 컴퓨터가 애플 iMac 초창기 버전의 그 느낌이 나는 게 심플과 절제의 조화를 만끽할 수 있다. 작품 전체의 분위기와 결을 같이하기에 이질감이 들기는커녕 너무 잘 어울린다.
그런가 하면, 이 작품의 핵심 중 하나이자 상징과도 같은 오프닝 인트로 애니메이션의 충격적으로 인상 깊다. 보통 시리즈 같으면 반복되는 오프닝 인트로의 경우 한 번 보고 다시는 보지 않곤 하는데, 이 작품의 경우 봐도 봐도 질리지 않거니와 작품의 분위기를 완벽히 살려 주면서도 작품의 후반부로 갈수록 조금씩 이해가 되는 경험까지 한다. 난해하고 또 비위가 상할 수도 있지만, 빨려들어갈 듯 황홀한 오프닝 인트로이다. 가장 유명한 오프닝 인트로라고 하면 '007 시리즈'가 생각날 텐데, 감히 말하건대 이 작품이 훨씬 위다.
또한, 작품의 분위기와 정확하게 또는 절묘하게 맞아 떨어지는 기기묘묘한 베이직 선율과 OST들이 인상적이다. 미스터리한 상황의 한가운데에 있는 것 같고 긴장감으로 자극을 받지 않을 수 없다. 작품만의 세계에 오롯이 집중할 수 있게 하는 음악이다.
이 작품의 제작, 연출 핵심은 놀랍게도 '벤 스틸러'다. 대체로 벤 스틸러를 코미디 전문 영화배우로 알고 있을 텐데, 경력 초창기부터 연기와 연출을 했고 중간중간 <쥬랜더> 시리즈나 <트로픽 썬더> 같은 작품은 연출, 제작, 각본, 주연을 도맡아 했다. 일찍이 이미 다방면에서 재능을 꽃피웠지만 <세브란스: 단절>로 훨씬 더 크게 날아 오를 것이다. 너무나도 대단하고 또 좋은 작품을 마련해 준 그에게 박수를 보내며 제작이 확정된 시즌 2의 공개를 손꼽아 기다린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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