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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국판 '백년의 고독'을 목도하라 <파친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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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애플TV+ 오리지널 리뷰] <파친코>

 

애플TV+ 오리지널 시리즈 <파친코> 포스터.

 

1920년대 일제 강점기 조선의 부산, 선자는 부모의 사랑 어린 보살핌에 무럭무럭 자라고 있다. 싹싹하고 굽힐 줄 모르는 심성이, 어디 내 놔도 잘살 것 같다. 시간이 지나 숙녀가 된 선자, 잘 차려 입고 잘생기고 수완 좋고 사람들 잘 챙기는 생선중개상 한수가 눈에 띈다. 한수 또한 순사가 지나가도 고개를 숙이지 않는 선자가 눈에 띈다. 그들은 산기슭에서 종종 만남을 갖고 급기야 사랑을 나누는 관계로까지 진전된다. 결국, 선자는 한수의 아기를 가지고 한수한테 얘기하지만 한수는 유부남이었고 오사카에 아이들도 있었다. 

 

실의와 절망에 빠진 선자, 아기를 낳으려면 집을 나와야 했다. 싱글맘으로 있는 한 부모한테 해를 끼칠 게 뻔했다. 그때, 그녀 앞에 구원자가 나타난다. 전도사 이삭, 구원인지 사랑인지 둘 다인지 알 수 없지만 선자로선 그를 받아들이지 않을 이유가 없었다. 그들은 함께 도망치듯 이삭의 형네 내외가 있는 일본 오사카로 향한다. 선자, 이삭, 선자와 한수의 아들 노아는 오사카에서 새로운 삶을 시작한다. 

 

1989년 미국 뉴욕, 솔로몬은 은행에 다니고 있다. 뛰어난 실적을 자랑하지만 승진 대상자에서 제외되고 만다. 그는 승부수를 던지는데, 일본 지점으로 가서 회사의 가장 중요한 사업인 콜든 호텔 건을 처리하고 돌아오려는 심산이다. 일본에는 할머니 선자도 있고 파친코장을 운영하는 아버지 모자수도 있다. 선자는 극진히 시형님 경희의 병 수발을 들며 살아가고, 모자수는 파친코장 2호점을 내고자 거액의 돈을 대출한다. 

 

오랜만에 집에 돌아와 옛날을 추억하는 한편, 콜든 호텔 건을 처리하고자 부지를 내놓지 않고 있는 한국인 할머니 집주인을 찾아가기도 한다. 믿을 수 없는 거액을 제안하지만 할머니는 계속 거절하고 있었다. 회사에선 하나한테서 가끔 전화가 걸려 오는데, 그녀는 아버지 애인의 딸이자 솔로몬이 사랑해 마지 않았던 여인이다. 솔로몬은 크게 한 건 하고 미국으로 다시 돌아갈 수 있을까? 하나와는 다시 만나 못 다한 이야기를 다시 할 수 있을까?

 

20세기 한국의 처절한 4대 이야기

 

1970년대 중반 7살 때 미국으로 이민을 가서 찢어지게 가난한 시절을 보내고 부모의 희생 어린 보살핌으로 명문 대학교를 졸업해 변호사로 일하며 성공한 이민진, 하지만 건강이 나빠져 변호사 일을 그만 두고 원래 재능을 보였던 글쓰기 일을 시작한다. 좋은 단편, 장편소설을 내며 입지를 굳혔다. 그러던 중 일본계 미국인 남편을 만나 2007년부터 4년 동안 일본 도쿄에 거주하게 된다. 남편이 도쿄의 금융회사에서 일하게 된 것이었다. 소설 <파친코>는 그렇게 만들어졌다. 

 

소설 <파친코>의 미디어 믹스는 애플TV+ 오리지널 시리즈로 이뤄졌는데, 다분히 마이너할 수 있는 20세기 한국의 지난하고 처절한 4대의 이야기가 외국 자본으로 재탄생했다는 게 상당한 의미를 지닌다고 하겠다. 모르긴 몰라도, 왠만한 한국 사람들조차 '자이니치(일본에 살게 된 조선인 또는 한국인)'의 이야기를 잘 알지 못할 것이다. 아니, 잘 알고 싶지 않을지도 모른다. 

 

그러니 작품을 시청하는 내내 복잡한 마음이 들 수밖에 없다. 불과 몇 세대 위의 분들이 이렇게나 고생을 하셨구나 하는 일차원적인 생각부터 우리 역사가 외국 자본에 의해 글로벌 콘텐츠로 재탄생하니 자부심을 갖게 되는 한편 왜 우리나라 자본으로 만들어지지 않았는지 아쉬움이 드는 것이다. 

 

선자, 양진, 경희, 고한수

 

<파친코>의 주인공이라고 할 수 있는 이는 '선자', 시대의 기구함을 온몸으로 받은 삶을 살았지만 극화시켰다는 느낌이 들지 않는다. 실제의 삶은 훨씬 더 하면 더 했지 덜하진 않았을 테다. 극 중에서도 스스로 말하지 않는다. 그래도 운이 좋았다고 말이다. 불꽃 같은 사랑을 나눴고 뜻밖의 구원을 받았으며 살아 남아 자손들을 볼 수 있었던 선자다. 

 

선자의 엄마 '양진'을 빼놓을 수 없다. 극중에선 초반에 잠깐 나왔을 뿐 선자가 일본으로 건너간 후엔 어떻게 살다가 어떻게 죽었는지도 모르지만, 선자가 결정적인 순간들에 절망하지 않고 기어코 이겨 내 생존하게 된 건 모두 엄마 덕분일 것이다. 양진이 선자에게 불어넣은 삶의 의미, 즉 어떻게든 살아 남으라는 전언이 후세에 전해진다. 

 

선자가 남편을 따라 일본 오사카에 정착하게 되었을 때 물심양면으로 지원을 아끼지 않았던 시형님 '경희'야말로 큰 존재였다. 선자로선 경희가 아니었으면 살아가기가 또 살아남기가 너무나도 힘들었을 것이다. 또 경희에겐 아이가 없어서 선자뿐만 아니라 선자의 아이들까지 알뜰살뜰 보살폈다. 

 

그런가 하면, 선자의 첫사랑이자 선자의 첫째 노아의 아빠이기도 한 '고한수'가 있다. 선자에게 진정한 삶의 절망을 안겨 준 처음이자 마지막 인물일 텐데, 그 덕분에 이후 어떤 일이 그녀를 닥쳐도 무던하게 지나갈 수 있었지 않나 싶다. 애증의 인물이자 삶의 아이러니를 몸소 체험하게 해 준 인물. 작품을 입체적으로 만드는 매우 중요한 인물이기도 하지만, 주인공이라고 하긴 힘들 것 같다.

 

개인의 가족사와 거대 흐름의 역사

 

4대에 걸친 가족의 파란만장하지만 특별하다고 할 것까진 없는 20세기 한국의 보편적인 이야기를 전하는 <파친코>는 가브리엘 가르시아 마르케스의 소설 <백년의 고독>, 펄 벅의 소설 <대지>, 허우샤우시엔의 영화 <비정성시>를 떠올리게 한다. 개인의 가족사와 거대 흐름의 역사를 조화롭게 교차시키는 건 결단코 어려운 일일 텐데, 이 작품들은 모두 해냈다. 

 

<파친코>만이 갖는 특징이 있다면 자못 의아한 제목에서 오는 궁금증일 텐데, 기가 막힌 제목이라고 하지 않을 수 없다. 자이니치로서 가질 수 있는 직업이 많이 않았던 바, 1950년대 중반 연발식 파친코 기계를 금지하면서 현지 일본인이 대거 파친코업에서 손을 뗄 수밖에 없었던 때 자이니치는 어쩔 수 없이 파친코업에 계속 종사해야 했던 것이다. 이후에도 파친코업의 위기는 계속되었지만 자이니치로서는 손을 뗄 수 없었다. 사행산업이자 사양산업에 종사해야 했던 자이니치의 절망 어린 비애가 제목 '파친코'에 담겨 있다. 

 

어른들이 들려주는 옛날 얘기가 재밌었던 때가 많지 않다. 당신들이 한 얘기란 매일매일 똑같았기 때문이다. 가난에 찌들어 먹을 게 없었고 차라리 죽는 게 나을 정도로 고생했고 아파도 병원에 갈 수 없을 정도로 열심히 일했고... 그런데 <파친코>가 보여 주는 게 바로 그런 얘기들이다. 재미 없고 지루한가? 아니, 정녕 시간 가는 줄 모르고 봤다. 이제 우리도 20세기 역사를 드러낼 때가 되었다. 치욕스러운 전반과 암울한 중반과 치열했던 후반을 모두 우리가 직접 드러내고 또 오롯이 알아야 한다. <파친코>가 충분히 그 첫 단추로서 역할을 해낼 수 있을 것 같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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