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신작 열전/신작 도서

"실패해도 괜찮아, 나만의 길이 있어" <불펜의 시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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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신작 도서 리뷰] <불펜의 시간>

 

장편소설 <불펜의 시간> 표지. ⓒ한겨레출판

 

한국에 존재하는 수많은 문학상들, 그중에서도 몇몇은 한때 위세가 굉장했다. 이상문학상, 동인문학상, 현대문학상, 황순원문학상 등이 대표적인데 그밖에도 이효석문학상, 김유정문학상, 한국일보문학상 등이 뒤를 받치는 형국이다. 아니, 그랬었다. 2020년대 들어선 지금은, 주지한 문학상들 대부분이 명맥을 이어가지 못하고 있다. 각종 논란과 함께 금전적인 여력이 더 이상 없지 않았나 싶다. 

 

그럼에도 꾸준히 명맥과 함께 이슈까지 몰고 오는 문학상들이 있으니, 어느덧 10년을 훌쩍 넘긴 '젊은작가상'과 어느덧 30년 가까이 계속되고 있는 '한겨레문학상'이 대표적이다. 이중 '젊은작가상'은 전통적인 방식의 문학상이라 할 수 없기에 '한겨레문학상'이야말로 사실상 현존 유일이자 대표 문학상이라 해도 과언이 아닐 테다.

 

한겨레문학상의 역사를 간략히나마 살펴보면, 고개가 저절로 끄덕여지지 않을까 싶다. 대표작만 간추려 본다. 심윤경의 <나의 아름다운 정원>, 박민규의 <삼미 슈퍼스타즈의 마지막 팬클럽>, 윤고은의 <무중력 증후군>, 장강명의 <표백>, 강화길의 <다른 사람>, 박서련의 <체공녀 강주룡> 등 작품도 작품이지만 대중성과 작품성 겸비한 작가들의 등용문이라 하지 않을 수 없다. 

 

매년 7월경에 출간되는 한겨레문학상 수상작 단행본이 올해에도 어김없이 찾아왔다. 김유원의 <불펜의 시간>, 무한경쟁 시스템에서 자발적으로 실패를 선택한 이들의 이야기라고 할 수 있겠다. 우선 저자를 집고 넘어가야 할 것 같은데, 이 소설이 김유원 작가의 첫 작품이라고 한다. 그녀는 '손경화'라는 본명으로 활발히 활동했던 독립 다큐멘터리 영화감독 출신이다. 이제 스스로를 '소설 쓰는 사람'으로 생각한다는 그녀, 이 소설이 한겨레문학상에 뽑혔을 당시의 원제는 <계투>다. 

 

혁오, 준삼, 기현의 이야기

 

고등학교 시절 소문난 전국구 에이스였던 혁오, 실력과 인성을 두루 갖춘 그는 기대에 걸맞게 고졸 최고 연봉을 받으며 프로로 진출한다. 하지만 프로에 데뷔하기도 전에 그의 인생을 송두리째 흔드는 사고를 접한다. 고교 시절 그를 시기질투했던 진호가 교통사고로 죽었다는 것이었다. 혁오는 진호의 죽음에 자신이 절대적으로 영향을 미쳤다고 생각하며, 더 이상 최고의 에이스다운 실력을 보여 주지 못하는데... 그는 선발 또는 마무리가 아닌 중간 계투가 될 수밖에 없었다. 

 

중학교 시절에도 역시 독보적 에이스였던 혁오, 그의 야구부 동료였던 준삼은 일찌감치 자신의 재능이 부족하다는 걸 깨닫고 다른 길을 간다. 공부는 곧잘 했던 바, 대학 졸업 후 증권 회사에 공채로 입사한다. 입사 후 더 이상 공채를 뽑지 않는 상황에서 막내로 있으며, 계약직 여직원에게 행해지는 폭력 아닌 폭력을 모른 체하고 사측 노조에 가입해 각종 부조리도 모른 체한다. 그러던 어느 날, 복수노조 갈등에 따른 구조조정 문제에 휘말리고 만다. 

 

초등학교 시절 유일한 여자 야구 선수로 맹위를 떨쳤던 기현, 하지만 중학교에부턴 여자 야구부가 없거나 야구부에 여자가 들어갈 여전이 되지 못했기에 프로야구 선수를 포기할 수밖에 없었다. 그럼에도 그녀는 야구계에 있고 싶었고 스포츠신문 기자를 택했다. 신입 때부터 특종을 터뜨리며 스포츠신문 최초의 여자 편집장을 꿈꾸며 또 다른 특종을 파헤치는데, '승부조작'의 꼬투리가 걸린다. 그녀는 완벽한 폼에도 불구하고 이상하리만치 볼넷이 많은 혁오에게 의심을 품고 다가가려 하지만, 신문사 내외부에 걸친 비리에 발목 잡힌다.

 

실패하지만, 자신만의 길로

 

제목 <불펜의 시간> 중 '불펜'이라는 단어, 기본적으론 2가지 의미를 지니고 각각 의미가 하나씩 파생되었다. 우선, '소의 우리'를 뜻하는 용어로 투우나 로데오 경기에서 소가 대기하는 곳을 말한다. 그런가 하면, 노동자를 소에 빗대어 노동자들이 합숙하는 곳을 불펜이라고도 한다. 그리고, 보다 친숙한 의미로 야구 경기 중 곧 투입될 구원 투수가 몸풀기 및 투구연습을 하는 곳을 말한다. 그런가 하면, 선발 투수를 제외한 구원 투수진을 불펜이라고 통칭해 부르기도 한다. 

 

원제 <계투> 중 '계투'라는 단어, 계투보단 '중간계투'가 더 통용되는데 말그대로 야구 경기에서 선발 투수와 마무리 투수의 중간 다리 역할을 한다. 우리나라 야구에선 중간계투를 크게 두 가지 개념으로 분리하는데, '필승조'와 '추격조'다. 필승조는 아슬아슬하게 이기고 있는 상황에서 반드시 점수를 지켜야 할 때 투입되고, 추격조는 크게 이기고 있거나 지고 있는 상황에서 이닝을 떼우기 위해 투입된다. 소설 속 혁오의 경우 필승조라고 볼 수 있으니, 사실 팀의 전폭적인 지지를 얻으며 가장 중요한 선수진 중 하나이다. 

 

<계투>에서 <불펜의 시간>으로 제목을 변경한 건 아주 현명한 듯하다. '불펜'에 '계투'를 아우르는 단어이기도 하거니와, 실패자들의 실패담을 다루는 데 있어 혁오의 필승조 계투의 개념은 적어도 겉으로 보기에 실패와 거리가 멀어 보이기 때문이다. 물론 이 소설이 '실패'에만 시선이 쏠려 있진 않다. 이 세상을 이루는 거대한 시스템의 부조리와 폭력 속에서 한없이 약한 개인들이 고군분투하지만 실패할 수밖에 없다. 그럼에도 그들은 의지를 지닌 채 자신만의 길을 개척해 나가는 것이다. 

 

개인사적에서 세상사적으로

 

돌아 보면, 나 그리고 우리는 삶의 최전선에서 활약해야만 사람답게 살 수 있을 거라고 교육받으며 살아 왔다. 교육이 아니라 협박처럼 들리기도 하는데, 최전선이 아니면 사람답지 않거니와 도태된 채 살게 될 거라고 말하는 것과 다름없기 때문이다. 야구로 보자면, 경기를 선도하는 선발 투수 또는 경기를 확실하게 마무리짓는 마무리 투수 말이다. 그 사이 어딘가에서 별로 눈에 띄지도 않고 확실한 것도 없어 보이는 중간 계투는 안 된다. 그런가 하면, 마운드에 서지 못하고 불펜에서 몸풀기 또는 투구 연습이나 하는 것도 안 된다. 

 

작중 세 인물 혁오, 준삼, 기현은 한때 자기 인생의 주인공이자 세상의 MVP감이었을 것이다. 각각 고등학교, 중학교, 초등학교 시절 야구 선수로 이름을 날렸거니와 한때 자기가 있는 자리에서 날아올랐었다. 높이는 차이가 있겠지만 말이다. 그런데, 각자의 이유와 사연으로 물러났고 쫓겨났고 주저앉았다. 딱히 잘못한 것도 누군가에게 피해를 준 것도 없이.

 

그 과정에서 이 작품의 미덕이 빛난다. 작품 자체론, 한없이 개인사적으로만 다뤄질 수 있는 야구서사 상에서 세계를 이루는 시스템의 문제를 가져와 이질적이지 않고 짜임새 있게 접목시킨 게 빛을 발했다. 캐릭터적으도 마찬가지인데, 성장 서사 정도만 다뤄도 충분하지 않을까 싶은 와중에 시스템의 폭력과 부조리를 가져와 지금 이 순간의 세상으로 시선을 돌리게 하는 묘수를 발휘했다. 

 

소설을 제대로 써 본 게 처음이라는 사실이 믿기 힘든 만큼의 직조력인 듯하다. 천편일률적으로 빠지기 쉬운 문학계에 새로운 얼굴, 새로운 글은 언제나 환영이다. 요즘 소위 '잘 나가는' 소설가들의 과거를 보면, 정유정 작가는 간호사 출신이고 정세랑 작가는 편집자 출신이고 손원평 작가는 영화인 출신이고 김초엽 작가는 과학도 출신이고 장류진 작가는 회사원 출신이다. 한국 문학에 보다 다양한 이야기와 서사가 펼쳐지길 기대해 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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