본문 바로가기

넷플릭스 오리지널

국민의 저항은 어떻게 발현되어야 하는가 <그리고 내일은 온 세상이>

반응형

 

[넷플릭스 오리지널 리뷰] <그리고 내일은 온 세상이>

 

넷플릭스 오리지널 영화 <그리고 내일은 온 세상이> 포스터. ⓒ넷플릭스

 

독일 남서부에 위치한 도시 만하임, 대학교 법학과를 다니는 루이자는 친한 친구를 따라 반 나치·반 파시스트 활동단체 'P-31'에 들어간다. P-31은 그들만의 아지트를 두고 그곳에서 숙식하며 전략전술을 짜는 등 공동체 생활을 영위한다. 루이자는 귀족 집안의 여식으로, 부모님은 그녀의 활동을 용인하며 '서른 살 이전에 좌파가 아니면 심장이 없는 거고 서른 살 이후에 좌파면 뇌가 없는 거다' 정도로 치부해 버린다. 어느 날 파시즘 성향의 정치인이 정치 연설을 하는 현장에 나가게 된 P-31 그리고 루이자이다. 

 

현장에서 루이자는 어느 파시즘 활동단체원이 동영상을 찍는 핸드폰을 주워 도망가다가 파시스트한테 붙잡혀 심한 폭행을 당한다. 그녀를 구한 건 다름 아닌 P-31 내 강경파 수장 알파다. 온건파 쪽으로 시작한 루이자의 성향이 강경파 쪽으로 기울게 된 계기라 할 수 있겠다. 이후 루이자는 알파와 함께 강경파의 핵심으로 활동하기 시작한다. 

 

네오 나치 또는 파시스트 활동단체 모임을 사전에 입수해 습격하는 P-31 강경파, 물품 부수는 걸 목적으로 할 때도 있고 사람을 다치게 하는 걸 목적으로 할 때도 있다. 루이자는 강경파로서의 활동이 정답이라는 걸 확신할 수 없지만, 네오 나치와 파시스트의 폭력에 대항하기 위해선 어쩔 수 없이 해야 하는 일이라고 자기합리화를 한다. 그렇다고 온건파로서의 활동이 정답일 수 없는 건, 세상을 향한 구호일 뿐 네오 나치와 파시스트를 향한 직접적인 타격이 불가능하다는 것이다. 루이자는 어떤 활동을 해야 할까. 

 

국민저항권에 대하여

 

독일 기본법 제20조 4항은 다음과 같다. '독일 연방 공화국은 민주적 사회적 연방 국가이다. 이러한 질서의 폐지를 기도하는 자에 대하여 다른 구제 수단이 불가능할 때에는, 모든 독일인은 저항할 권리를 가진다.' 넷플릭스 오리지널 영화 <그리고 내일은 온 세상이>의 처음과 끝을 장식하는 문구이다. 어떤 뜻을 가질까?

 

'국민저항권'이라 불리는 이 조항은, 일찍이 존 로크가 1690년 <시민정부론>에서 주창하고 1776년 '미국 독립선언'과 1789년 '프랑스 인권선언'에서 구현되었다. 설혹 헌법에 구체적이고 명확하게 명시되어 있지 않더라도 '자연권'으로 간주되고 있는, 인간이라면 당연히 가지고 있는 기본 권리 중 하나인 것이다. 

 

벌써 5년 여가 지난 2016년 12월의 '촛불혁명'은 국민저항권을 발동시켜 성공에 이른 사례로, 비록 국민저항권이 대한민국 헌법에 직접적으로 명시되어 있지 않지만 자연권으로서 간주되고 있다는 방증이다. 영화는 그런 면에서 충격을 던진다. 우리가 아는 독일은 세계에서 가장 선진적인 나라이자 민주적인 나라가 아닌가?

 

국가질서를 파괴하려는 자 vs 저항하는 자

 

독일 기본법 제20조 4항을 다시 들여다보면, 민주적·사회적인 독일의 국가질서를 파괴하려는 자가 있는데 막을 수단이 없다면 국민이 나설 수 있다고 말하고 있다. <그리고 내일은 온 세상이>를 보면, 네오 나치와 파시스트들이 명명백백 국가질서에 해를 끼치려 하는데 나라에서 수수방관하고 있으니 국민들로 이뤄진 P-31 같은 단체가 나서서 저항하려 한다. 그런데 그들을 막아서는 게 비단 네오 나치와 파시스트뿐만 아니라 경찰이 아닌가. 즉 정부 말이다. 

 

여기서 오묘한 해석이 가능하다. 하나는, 네오 나치와 파시스트의 활동 또한 민주적·사회적 활동의 일환으로 보는 것이다. 이런 의견도 있으면 저런 의견도 있는 게 당연하고 또 건강한 거라는 주장 말이다. 다른 하나는, 네오 나치와 파시스트의 활동이 현 독일의 국가질서에 반하는 활동의 일환으로 보는 것이다. 그들의 활동은 경계선을 넘어섰다는 주장이다. 

 

P-31은 공통적으로 후자의 시선을 공유한다. 네오 나치와 파시스트의 활동은 제제받아야 하며 정부에서 책임지지 못하니 자신들이 나서서 해결을 모색해야 한다고 생각한다. 하지만, 방법론에선 첨예하게 둘로 갈린다. 이상 실현을 위해 절대적인 무폭력주의 지향의 '온건파'와 이상 실현을 위해 테러도 불사한다는 '강경파'. 

 

온건하게 저항해야 하는가, 강경하게 저항해야 하는가

 

이론적으론 온건파가 맞을 것이다. 폭력은 적에게 빌미를 제공하거니와 자칫 수단이 목적으로 변질되어 돌이킬 수 없는 길로 들어설 여지가 너무나도 다분하고 영원할 수도 없다. 폭력 없이 이상을 이룰 수만 있으면 그보다 더 좋은 건 없을 것이다. 결국 다 잘 먹고 잘 살자는 게 아닌가. 하지만 현실을 완전히 다를 요량이 크다. 

 

강경파는 현실에 맞닿아 있다. 제아무리 구호를 외쳐도 조금의 폭력만으로 충분히 와해시켜 버릴 수 있으니, 폭력의 힘은 매우 크다. 막상 폭력을 당해 보면 그 두려움으로 제대로 된 활동을 이어나가기가 힘들 테다. 즉각적이고 확실한 반응이 있기에, 폭력은 이상 실현을 위해 가장 완벽하다고까지 할 수 있는 수단이자 도구인 것이다. 누구도 부인하기 힘들다. 

 

영화에서 루이자는 온건파와 강경파를 두루 경험한다. 하지만 무엇도 완벽할 수 없었고 정답 또한 없었다. 나름의 해답도 정하기 힘들었다. 어떻게 해야 하는지 마땅한 길이 보이지 않은 것이다. 그저 활동 한 번 거나하게 해 본 걸로 만족해야 할까? 본격적으로 활동하기에 앞서 좋은 경험을 해 봤다고 생각해야 할까? 영화가 답을 제시하진 않는다. 대신 생각해 보게끔 한다. 어떤 시선을 견지하며 살아갈 거냐고 말이다. 

728x90