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넷플릭스 오리지널 리뷰] <내 몸이 사라졌다>
넷플릭스 오리지널 애니메이션 <내 몸이 사라졌다> 포스터. ⓒ넷플릭스
지난 5월 개최된 제72회 칸 영화제는 많은 화제를 뿌렸다. 특히, 봉준호 감독의 <기생충>이 한국 최초로 황금종려상을 수상하며 유례 없이 국내에서 많이 회자되었다. 이 뿐만 아니라, 엘르 패닝은 약관 20살이 막 넘은 나이에 역대 최연소 심사위원으로 위촉되었으며 프랑스 애니메이션 <내 몸이 사라졌다>는 역대 최초로 비평가주간 그랑프리를 수상하는 기염을 토했다.
그런가 하면, <내 몸이 사라졌다>는 일본 히로시마, 캐나다 오타와, 크로아티아 자그레브와 더불어 국제애니메이션협회가 공인한 세계 4대 애니메이션 영화제로 군림하는 프랑스 안시 국제 애니메이션 페스티벌에서 장편부문 안시 크리스탈상과 관객상을 수상했다. 장편부문에 3개 섹션밖에 없는 점을 감안할 때 속된 말로 싹쓸이 수준인 것이다. 작품 퀄리티는 보장된 셈.
2019년 넷플릭스 연말 프로젝트 중 애니메이션 부문 대표격이라고 할 만한 <내 몸이 사라졌다>, 꾸준히 단편 애니메이션을 내놓으며 좋은 평가를 받아온 제레미 클라핀 감독의 장편 데뷔작이다. 원작이 있는데, 2001년작으로 오래된 영화이지만 여전히 회자되는 <아멜리에> 각본에 참여해 아카데미 각본상 노미네이트까지 되었던 기욤 로랑의 소설 <행복한 손>이다.
잘린 손의 여정과 손 주인의 일상
잘린 손이 해부학실에서 빠져 나온다. 그것이 향하는 곳은 아마도 주인일 터, 하지만 여정이 평탄하지는 않다. 해부학실도 겨우 빠져나왔는데, 비둘기 둥지와 쓰레기차와 지하철과 쥐 떼와 개미 떼와 얼음물 속과 개와 아기 등을 차례로 맞닥뜨린다. 모두 일신에 조금의 피해도 주지 못할 것 같은 별 게 아닌 존재들이지만 한낱 손목 잘린 손한테는 크나큰 위협일 수 있겠다.
한편, 손의 주인 나우펠은 어릴 때 꿈이 피아노 치는 우주비행사였다. 두 부모님의 영향을 두루두루 받은 결과였으리라. 하지만, 사고로 나우펠 혼자 살아남고 부모님 모두 돌아가신다. 이후 그는 희망 없이 살아가다 오토바이 피자 배달부로 연명하고 있다. 어느 비 오는 날 약간의 접촉 사고 후 당도한 오피스텔에서 목소리로만 고객과 실랑이 끝에 진심이 묻어나는 대화를 나눈다.
나우펠은 그녀 가브리엘을 그냥 잊을 수 없었고 도서관 사서라는 사실만으로 뒤를 캐내어 만난다. 그러곤 그녀가 자주 방문하는 삼촌의 나무 공장에 무작정 취직하고 그곳에서 숙식하며 가브리엘의 도서관을 자주 드나든다. 문제는, 나우펠이 그녀에게 자신이 피자 가게가 아닌 초밥 가게에서 일한다고 속였다는 것이다. 그는 그녀와 잘 이어질 수 있을까? 그의 손은 주인의 손목으로 돌아올 수 있을까?
어디서 와서 어디로 가고 있는가
영화는 잘린 손과 손의 주인 나우펠의 이야기 모두 의미다운 의미를 띄고 있다. 또한 누구든 이 둘 모두 또는 둘 중 하나에 감정을 이입할 수 있을 것이다. 프랑스에서 건너온 콘텐츠답게 기괴하지만 아름답고 철학적이지만 현실적이며 처연하지만 희망적이다. 개인적으로 손의 여정에 더 공감이 되는 한편 영화적으로 더 재미 있었다.
잘린 손이 주인공에 가깝다는 생각이 든다. 그것은 나우펠의 일부이지만 본인만의 정체성이 있는 것으로도 보이는데, 일단 태어난(!) 이유는 주인의 손목에 다시 붙는 것이다. 그 어떤 난관이라도 당연한 듯 맞서며 뚫고 나가는 모습을 보고 있노라면, 아무 생각 없이 의미도 모른 채 과정이야 어떻든 앞만 보고 가는 우리네 삶이 겹쳐진다.
그런가 하면, 그런 우리네 삶이 애처롭게 느껴지기도 한다. 그렇게 태어난 것인지, 목적지에 도달하기 전엔 깨달을 수 없는 것인지, 깨닫기 전엔 알 수 없는 것인지, 사회나 시대가 그렇게 만든 것인지. 처음엔 손만 있는 기괴한(?) 모습에 놀라고, 가면서 손에 땀을 쥐게 되고, 종국엔 응원하고 있는 나를 발견하면서 다름 아닌 나를 돌아본다. 나는 어디서 와서 어디로 가고 있는 것인지. 어떻게, 왜 가고 있는 것인지. 이 짧고 굵은 애니메이션 한 편이 나를 잠시 멈추게 한다. 보는 모든 이도 한 번쯤 멈춰서고 돌아봤으면 한다.
나름의 해답을 찾아서
한편, 나우펠의 희망 없고 처연한 삶의 종적도 공명을 자아낸다. 세계 최고 선진국 중 하나인 프랑스의 절망적인 젊은이라는, 한국 젊은이로선 선뜻 공감하기 힘든 주인공의 면면이지만 이야기 자체로 울림을 주는 건 분명하다. 그건 아마 모든 인간이 지니고 있는 선천적 결함에서 비롯되는 게 아닐까 싶다. 단순히 같은 상황에서만 이어지는 공감의 끈이 아니라는 말이다.
극 중에서 나우펠은 자신의 꿈의 실현자인 부모님을 어렸을 때 잃고 꿈 없이 살아가지만, 사실 모든 인간이 꿈을 꾸고는 이내 잃고 만다. 어디로, 어떻게, 왜 가야 하는지 모르는 건 모두 마찬가지인 것이다. 누군가는 그럴 틈이 어디 있느냐고, 먹고사는 데 바쁘다고 하겠지만 그것만이 삶의 전부가 아니라는 건 인류의 오랜 역사가 방증한다. 인간이 무엇인지, 무엇이어야만 하는지에 대한 답의 변주는 끊임없이 나왔고 나오고 있고 나올 것이다. 이 애니메이션도 그 일종이다.
이렇게 보니, 나우펠의 잘린 손의 여정과 나우펠 본인의 삶은 다른 듯 똑같다. 생존을 위해 쉴 틈 없이 나아가는 손과 끝없이 안으로만 천착하는 나우펠, 하지만 그들은 자신을 모르고 삶도 모르며 세상도 모른다. 단지, 하나는 하염없이 갈 뿐이고 다른 하나는 멈춰서 있을 뿐이다. 우리는 이 둘 중 하나의 모습을 하고 있으면서도 둘 모두의 모습을 띄고 있을 것이다. 그 무엇도 정답일 수 없다. 다만, 나름의 해답을 찾을 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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