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넷플릭스 오리지널

자살로 생을 마친 가족의 추모와 치유를 위한 여정 <이블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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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넷플릭스 오리지널 다큐멘터리] <이블린>


넷플릭스 오리지널 다큐멘터리 <이블린> ⓒ넷플릭스



단편 다큐멘터리 <화이트 헬맷: 시리아 민방위대>로 2017 아카데미 단편다큐멘터리상을 수상한 올랜도 폰 아인지델 감독, 그는 다큐멘터리 감독으로 그동안 자신을 밀어붙이며 분쟁 지역에서 작업을 계속해왔다고 한다. 그런 그도 차마 꺼내지 못한 주제가 동생 이블린이다. 이블린은 13년 전(영화를 제작한 2018년 기준) 우울증으로 자살했다. 


올랜도는 이름을 말하는 것조차 고통인 그 이름 이블린과 그의 죽음을 둘러싼 이야기를 혼자, 지인, 가족들과 어쩔 수 없을 때를 제외하곤 일절 피했다고 한다. 걷는 걸 좋아했던 이블린, 올랜도는 동생들 그웨니와 로빈 그리고 다른 가족들, 지인들과 걸으면서 그동안 외면했던 진실을 마주보기로 한다. 그동안 일절 피하고, 피하지 못했을 때도 경계를 넘진 못했던 이블린 이야기와 진실 말이다. 


넷플릭스 오리지널 다큐멘터리 <이블린>은 올랜도 폰 아인지델 감독이 주연으로도 출연해 살아남은 사람들과 함께 오래전에 죽은 동생 이블린이라는 산을 넘고 극복하는 이야기이다. 작품은 시작과 동시에 주요 소재와 주제와 내용을 모두 밝히며 관객으로 하여금 최대한 빨리 감정을 이입할 수 있게 하였다. 하여 감정을 이입해 그들과 함께 여정을 떠나는 듯할 것이다. 


엄마와 함께


이블린의 생일이었던 날 시작된 5주 동안의 영국 횡단, 그 중심엔 첫째 올랜도와 셋째 그웨니와 넷째 로빈 그리고 둘째 이블린이 있다. 그들은 걷는 걸 좋아했던 이블린 살아생전 함께 갔었던 길을 다시 걷는다. 여정은 스코틀랜드에서 엄마 베타와 함께 시작된다. 베타는 80년대 후반부터 혼자 아이 넷을 키웠다고 한다. 나름 열심히 키웠지만, 이블린이 조현병이라는 판명을 받고 자살하게 된 책임에서 자유롭지 못하다. 가장 힘들었을 그녀와 가장 먼저 여정을 시작하는 건 당연하다. 


베타는 이블린이 죽은 날로 돌아간다. 그동안 입밖으로 꺼내기는 커녕 생각조차 하기 싫었던 그때 그곳의 이야기를 말이다. 그러하기에 이 작품이 들여다보려는 원천에 가깝게 다가갈 수 있을지도 모른다. 다른 누구도 아닌 엄마의 이야기라면 다를 수 있지 않을까. 태풍의 눈은 고요한 것처럼, 오히려 두려움의 중심엔 두려움이 없지 않을까. 하지만 역시 듣기만 편하지 않다. 애써 담담한 듯 말하는 엄마의 이야기에 어떠한 대꾸도 할 수 없다. 과연 진실을 마주하면 치유가 되는 것인가. 


아빠와 함께


엄마와의 종주를 끝마친 삼 남매는 아빠 안드레아스와 그의 부인 조안나를 만난다. 이블린을 포함해 사 남매가 어렸을 때부터 같이 살지 않게 된 아빠와 이블린을 추모하는 여정을 떠나는 게 그리 어울려 보이진 않는다. 그들과 그의 기억은 많이 다를 수 있기 때문이다. 하여 그들은 이블린을 추억하면서 서로를 향한 거리를 확인하고 좁히려 노력한다. 공통의 누군가를 추억하는 건, 그때를 함께 한 사람과 장소와 시간을 되새기는 행위이기도 하다. 오직 그를 향할 수는 없는 것이다. 


아빠 안드레아스도 엄마 베타처럼 이블린의 죽음에서 자유롭지 못하다. 자신을 탓한다. 그러며 역시 이블린이 죽은 날로 돌아간다. 삼 남매로선 한없이 가슴 미어지고 무너지는 이야기를 그저 듣고 있을 수밖에 없다. 첫째 올랜도는 피해왔던 이야기, 셋째 그웨니는 피하고 싶지만 맴돌았던 이야기, 넷째 로빈은 알고 싶던 이야기, 보았던 모두와 듣고 있는 모두를 슬프게 하는 이야기. 정신병이라는 낙인과 싸우기 위해 계속 얘기를 해야 하고, 자살과 죽음에 대해서도 역시 계속 얘기해야 한다. 궁극적 치유를 위해서, 아니 조금씩 나아가기 위해서. 


지인들과 함께


가족들과의 종주 이후 삼 남매는 잉글랜드에서 지인들과 만난다. 그들은 이블린 생전 단짝 친구들로 삼 남매와도 친하다. 그들이야말로 가족들로선 알기 힘들 수 있는 이블린의 진짜 모습을 잘 알고 봐왔던 이들일 것이다. 정작 그들은 이블린의 모든 걸 알고 있다고 생각한 자신들이 정작 이블린의 중요한 무엇을 놓쳤다고 생각한다. 역시 자신들을 책망하는 것이다. 하지만 이블린의 죽음에 엄마와 아빠 그리고 가족들 모두 자유롭지 못한 책임에서 자유로울 필요가 있는 것처럼 그들 또한 그래야 한다. 기억하고 추억하고 얘기하며 살아가야 한다. 


시선은 점점 올랜도를 향한다. 가족들에게 질문하고 얘기를 듣고 울음을 받아주기만 한 올랜도는, 정작 자신의 얘기를 꺼내지 않는다. 그걸 정확하게 간파한 지인 레온은 감정을 억누르지 말고 받아들이곤 내보이라고 충고한다. 그것이 얼마나 힘들고 아프다는 걸 잘 알지만 말이다. 내가 아닌 이블린을 위한 길이라는 것도 잘 안다. 이제는 듣기만 하는 게 아니라 그때를 생각하고 그를 추억하고 직접 얘기해야 한다. 


다시 스코틀랜드 그리고 다시 잉글랜드. 삼 남매는 다른 누구도 아닌 삼 남매끼리의 시간을 갖는다. 여정의 마지막은 그들 스스로 얘기하는 시간이다. 비로소 깨달은 게 아닐까. 다른 이들과 함께 하며 그들에게 기대어 치유를 하려던 게 아니었을까. 본인의 치유는 다른 이의 도움을 받되 결국엔 본인이 하는 수밖에 없는 것이다. 


추모와 치유의 여정


삼 남매의 여정은 추모와 치유의 목적이 있었다. 하지만, '치유'가 되었는지는 의문이다. 그웨니는 말한다, 이블린이 여전히 머리에서 맴돌아 떠나지 않는다고. 고통이나 상처가 줄어들지는 않는다고. 로빈은 말한다, 이블린의 인생과 힘들었던 기억에 대해 얘기한다고 해서 고통이 덜하진 않는다고. 하지만 이블린에 대해 생각하거나 얘기하는 건 쉬워진다고. 


그들의 여정에 가족들과 지인들만 함께 했던 건 아니다. 지나가는 사람들 중 그들에게 관심을 가진 이들이 있는데, 하나같이 '죽음'을 관통하고 함께하며 고통을 받았던 사람들이었다. 그들과 누군가를 생각하고 얘기하며 더불어 이블린을 생각하고 얘기한다. 이 여정 이전까진 생각조차 하지 않은 채 아예 지워버렸던 것들을. 


생각하기도 싫은 끔찍한 기억이 있다. 누구나 그럴 것이다. 생각하고 얘기하면 고통만이 함께 온몸을 사로잡을 그 기억들. 하지만, 어느 대화를 통해 그 고통이 말끔히 사라진 사례가 있다. 고통스럽기 그지 없지만 그때 그곳으로 몇 번이고 돌아가 그 사람 혹은 그 상황을 계속해서 정면으로 맞대면하는 것. 이왕이면 누군가와 함께. 제3자라도 나를 이해해주는 이라면 좋다. 


죽음을 대하는 데 있어 진정한 치유는 없을지 모른다. 치유를 바라는 게 사치일지 모른다. 남은 사람에겐 나를 향한 치유의 권리가 아닌 그(들)를 향한 기억의 의무만이 있을지 모른다. 정답은 없지만, 오히려 기억 자체가 치유로 치환될지 모르겠다. 기억의 고통이 공허의 고통을 이겨낼 수 있을 것이기 때문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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