본문 바로가기

모모 큐레이터'S PICK

지금 이 순간, 계속되는 고난과 역경의 생존 <아틱>

반응형



[모모 큐레이터'S PICK] <아틱>


영화 <아틱> 포스터. ⓒ삼백상회



매즈 미켈슨, 덴마크의 국민 배우라는 이 미중년을 사실 잘 모른다. 되게 오랫동안 봐온 것 같은데, 2010년대부터 눈에 띄었으니 채 10년이 안 된 것이리라. 물론, 2006년 <007 카지노 로얄>이 그를 전 세계에 알린 계기가 되긴 했지만 말이다. 이후 2012년 <더 헌트>로 그의 연기는 전 세계에 알려졌다. 이 작품으로 칸영화제 남우주연상을 탔다. 


최근 들어 그의 활동은 전에 없이 두드러지고 있다. 미드 <한니발>로 '미친' 연기를 선보였고, <닥터 스트레인지>와 <로그 원: 스타워즈 시리즈>에 주연급으로 출연하기도 했다. 이는 좋은 선택이 아니었을지 모르겠다. 넷플릭스 <폴라>에 단독주연급으로 출연해 인상 깊은 액션을 선보였다. 그리고 이 영화, 우리나라엔 2년 만에 개봉한 <아틱>이다. 


영화 특성상 주연배우에게 영화의 모든 걸 맡기다시피 해야 하는 바, 두드러지고 인상적이다 못해 완벽했다. 매즈 미켈슨이 아니라면 누가 이 영화의 이 배역을 감당해냈을까 생각할 정도. 제목 '아틱'의 Arctic이 한국어로 '북극'이라는 뜻이니만큼 대략이나마 상상이 되는데, 마냥 즐기지는 못할 것 같은 느낌이 물씬 풍긴다. 


계속되는 고난과 역경


끝없이 계속되는 고난과 역경. 영화 <아틱>의 한 장면. ⓒ삼백상회



오버가드(매즈 미켈슨 분)는 북극에 비행기가 불시착한 후 홀로 살아남아 어찌어찌 생을 영위하고 있는 듯 보인다. 불시착한 비행기에서 살며, 시간을 정해 놓고 송어 낚시를 하고 무전을 치고 지형을 살핀다. 구조될 날을 기다리며 하염없이 루틴하게 살아가는 것이다. 


날씨가 매우 안 좋던 어느 날, 아무 생각 없이 무전을 치다 근처에 구조헬기가 뜬 걸 발견한다. 긴급히 준비했던대로 구조요청을 해서 헬기도 본 것 같았는데, 심하게 몰아치는 눈폭풍 때문에 착륙을 하지 못하는 게 아닌가. 착륙은커녕 헬기는 추락하고 만다. 망연자실도 잠시 오버가드는 현장으로 달려가 죽어버린 남자는 놔두고 숨이 붙어 있는 여자를 구해 그의 '집'으로 데려온다. 


여자는 심각한 부상으로 오래 버티지 못할 것 같다. 다행히 구조헬기에서 생존에 필요한 중요 물품들을 입수할 수 있었지만, 이대로 언제까지고 구조를 기다릴 수만은 없게 된 것이다. 입수한 지도를 통해 임시기지가 있는 곳까지 가기로 결심한다. 비록 그곳으로 가는 길은 상상할 수 없을 정도의 고난과 역경이 기다리고 있을 테지만 말이다. 진짜 역경은 이제 시작된다. 


지금 이 순간의 치열한 생존


오직 '지금 이 순간'의 생존. 영화 <아틱>의 한 장면. ⓒ삼백상회



영화는 '지금 이 순간'에 처절하게 집중한다. 우리는 오버가드가 어떤 연유로 불시착하게 된 것인지, 또 그가 어떤 삶을 살아왔는지, 그래서 그가 왜 죽어가는 여자와 함께 하는 역경에서 그런 선택을 하는지 도통 알 수가 없다. 


그동안 참으로 다양한 재난 생존 영화를 봐왔다. 그중에 <아틱>과 비견되는 건 <그래비티> <캐스트 어웨이> <라이프 오브 파이> 정도가 아닐까 싶다. 이 영화들은 재난 당해 생존을 꿈꾸는 현재도 현재지만 그들 개인의 사연이 굉장히 중요하게 작용한다. 그래서 매우 감동적인 한편, 재난과 생존 이전과 이후가 존재하는 것이다. 


하지만 <아틱>은 '그 따위' 것들이 없다. 오로지 지금 당장의 생존이 가장 중요하다고 울부짖는 듯, 아무런 말도 없이 묵묵히 살아가는 데 집중할 뿐이다. 그 과감한 영화적 결단에 우리는 처절하게 몰입할 수 있다, 그 어느 누구보다 그 어느 상황에서보다 치열한 생존을. 


여기에 영화가 말하고자 하는 바, 아니 정확하게는 지향하는 바는 '공(共)'의 개념이다. '함께 공', 혼자 아닌 함께 하는 것의 중요성 말이다. 영화는 이를 단순히 중요성 정도가 아닌 반드시 해야만 하는 필수성으로 생각한다. 


나보다 더 당신을 생각하는 신념


나보다 더 '당신'을 생각하는 신념. 영화 <아틱>의 한 장면. ⓒ삼백상회



동양은 몰라도 서양이라면 공의 개념보다 사(私)의 개념이 앞서는 게 당연하지 않을까 생각해본다. 개인의 자유의지를 제1의 권리라고 받아들인 역사를 살아왔고 살아가고 있지 않은가. 물론 거기에 죽어가는 사람을 버리고 혼자만 살라는 정언이나 충고는 들어 있지 않지만 말이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이처럼 처절하고 치열하게 '나'만큼 아니 '나'보다 더 '너'를 생각하고 챙기는 모습은 충분히 의아하다. 때론 답답하다. 영화를 보면서 드는 생각의 변화를, '멋진 풍경->처절함->위대함->가슴 졸임->간절함'으로 나열해본 결과 점점 안으로 천착해 들어가며 투철한 감점, 현장 이입이 시행되었음을 알 수 있다. 자연스레 나 아닌 너'도', 너'를' 생각하는 걸 받아들이게 되는 것이다. 


재난 생존 영화라면 으레 생각하게 되는 것이 '내가 아니어서 다행이다'이고 그래서 모순적인 대리만족을 느끼게 되는데, 이 영화는 재난 생존 영화임에도 '나라면 어땠을까' 하고 생각해보게 된다. 나라도 그처럼 행동했을까? 그랬을 것이다. 그 상황에서 혼자 살아남는 게 무슨 소용일까 하는 생각이 가장 먼저 들어 끝까지 떠나지 않을 것 같다. 인간으로서 살아가는 게 도대체 무엇일까, 이 영화를 볼 때가 아니라 이 영화를 보고 나서 생각해보게 될 듯하다. 

728x90