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신작 열전/신작 영화

"이 영화는 원작과는 다른 이야기로 생각해달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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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기획] 대배우들의 굴욕 배역


대배우라 일컫는 이들이라면 대작에 참여하는 건 당연한 이치겠다. 유명세를 떨치고 돈과 명예를 얻으며 계속될 차기작에 좋은 영향을 끼칠 수 있으니 말이다. 어차피 완벽한 영화는 존재하기 힘드니, 이왕이면 괜찮은 수준의 영화에 이왕이면 눈에 띄는 배역에 출연하게 되는 것이다. 이번에 소개하는 건 한국&동양 영화이다. 


여기 영화 고르는 안목이 좋기로 소문난 배우가 있다. 필모를 전부 들여다보아도 크게 흠 잡을 영화가 거의 없다. 여기 영화 '캐릭터'의 귀재가 있다. 연기는 물론 잘하고 좋은 영화, 나쁜 영화에 두루두루 출연했지만, 무엇보다 그가 맡은 배역은 확실하게 기억에 남는다. 여기 '세기의 배우'가 있다. 그 이름 세 글자만으로도 수많은 이들의 심금을 울리고 기억 저편을 아련하게 헤집는다. 지금도 여전히 진행 중이다. 


하지만 그런 그들의 필모에서 절대 지울 수 없지만 절대 지우고 싶은 영화가 있다. 많은 영화들에서 영원히 기억에 남을 캐릭터를 연기한 그들이, '격'에 맞지 않은 굴욕 배역을 연기했다. 기억하기 싫은 걸 끄집어내려니 찾기도 쉽지 않고 괴롭지만, 반면교사로 삼는 셈 치고 앞으로 그럴 일이 없길 바란다. 



<협녀, 칼의 기억>의 '유백' 역 이병헌과 '월소' 역 전도연




'할리우드 스타' 이병헌과 '칸의 여왕' 전도연은 1999년 영화 <내 마음의 풍금>으로 함께 했다. 당시 이병헌은 아직 뜨기 전이었고, 전도연은 제1의 전성기였다. 그들은 16년 후 <협녀, 칼의 기억>으로 재회한다. 누가 먼저랄 것도 없는 최고의 배우들 자리에 오른 그들이기에, 최고의 영화여야만 했고 최고의 영화가 될 것이 자명했다. 


적어도 2015년 최고의 영화여야 했을 <협녀, 칼의 기억>은 당시는 물론 한국 역사상에서도 최악의 영화 중 하나로 많은 이들이 뽑는다. 눈 씻고 찾아야 흑역사 한두 편 겨우 보이는 이병헌과 전도연 두 배우에게 가장 큰 흑역사로 남을 영화가 된 것이다. 




100억짜리 영화가 50만 명도 넘지 못했고, 전체적으로 장이모우 감독의 무협 스타일을 따라하면서 <와호장룡> 느낌을 차용했지만 제대로 따라하지조차 못했으며, 억지 막장과 황당 결말 스토리로 한국 최고 연기파 배우들의 연기도 이상하게 만들어버렸다. 전도연은 두 차례나 멜로 영화를 찍으며 서로 윈윈했던 좋은 기억 때문에 박흥식 감독의 첫 사극에 의리로 출연한 것일까? 이병헌은 전도연이라는 대배우와 16년 만에 재회해 영광을 함께 하려 출연한 것일까?


아이러니하게 이 영화에서 유일하게 빛나는 게 그나마 이병헌의 연기다. 전도연의 연기조차도 이 엄청난(?) 스토리와 액션에 묻혀버렸다. 그러하기에 더 이해할 수 없고 더 안타깝다. 이병헌은 그 좋은 연기력을 왜 이 영화에 써버렸고, 전도연은 그 좋은 연기력을 왜 이 영화에서 써보지도 못했나. <남한산성> 제작보고회 때 사회가 이병헌에게 말하길 <광해, 왕이 된 남자> 이후 정말 오랜만에 사극으로 돌아왔고 했는데, 이에 이병헌이 중간에 <협녀, 칼의 기억>도 있었다고 말했다는 슬픈 영화...



<은행나무 침대 2 - 단적비연수>의 '적' 역 설경구




1999년부터 2003년까지 설경구는 한국 영화계에 여러 가지 의미로 금자탑을 쌓았다. <박하사탕> <공공의 적> <오아시스>로 한국의 모든 영화상에서 남우주연상을 수상하는 기염을 토했고 해외에서도 호평을 받았다. 그야말로 한국 영화 역사상 길이 남을 영화들로 추앙받고 있다. 거기에 설경구가 주연 중의 주연으로 출연한 <실미도>는 한국 영화 사상 최초로 1000만 관객을 동원한 영화로 기억되고 있다. 


그뿐이랴? 네 영화의 김영호, 강철중, 홍종두, 강인찬은 절대 잊을 수 없는 캐릭터이기도 하다. 그중에서도 특히 강철중은 한국 영화 역사상 가장 유명한 캐릭터로 손꼽힌다. 그 사이사이 <송어> <나도 아내가 있었으면 좋겠다> 심지어 <광복절 특사>도 좋은 평가를 받았다. 그런데 <단적비연수>가 왠 말이랴...




<은행나무 침대> 신드롬에 힘입어 강제규의 전폭적인 지원을 등에 업은 대형 프로젝트로, 당대 최고의 배우들을 단, 적, 비, 연, 수로 캐스팅했다. 차례로 김석훈, 설경구, 최진실, 김윤진, 이미숙. 그들 모두의 흑역사일 테지만, 영화는 은근 흥행에 성공한 축에 속한다. 물론 손익분기점을 따진다면 성공이라고 하기엔 애매하겠다. 


비슷한 시기에 개봉한, 비슷한 느낌의 한국형 판타지/액션/멜로 <비천무>가 역대 최악 중 하나로 손꼽히는데 <단적비연수>는 그보다 더 못한 평가를 받으며 그보다 훨씬 못한 영향력과 유명세를 발휘했고 발휘하는 중이다. 설경구로서는 수많은 연극 무대에서 갈고 닦은, 또 이제 막 발을 들여놓은 영화판에서 물오른 연기력을 발휘했을 테지만 영화 고르는 안목이 연기력을 따라가지 못했다. 가장 잘 나갔던 시기 바로 직전의 유일한 치명타였지만 그때의 설경구라면 이해가 간다. 



<드래곤볼 에볼루션>의 '무천도사' 역 주윤발




'드래곤볼' 네 글자를 들어보지 않은 사람은 아마 없을 것이다. 전 세계에서 가장 많이 본 만화이자 가장 유명한 만화임에 분명하다. 일본에서 처음 나온 지 30년이 훌쩍 지났지만 여전히 마니아가 많고 여전히 후속작이 만들어져 인기를 끌고 있다. '주윤발' 세 글자를 들어보지 않은 한국 사람 역시 없을 것이다. 1980~90년대 최고의 대스타, <와호장룡>이라는 불후의 명작에도 출연했으며, 할리우드에 진출해 좋은 성적도 냈다.


드래곤볼과 주윤발이 만났다. 영화 <드래곤볼 에볼루션>이다. 다만, 만들어진 시기가 2009년으로 언제적 드래곤볼이고 주윤발인지 기억이 가물가물할 정도인 게 걸렸고 원작이 워낙 유명한 것도 걸렸다. 하지만 뚜껑을 열어보니 진짜 문제는 영화 그 자체. 그야말로 전 세계 영화 역사상 독보적인 흑역사다. 그런 영화에 주윤발이 주요 역으로 나오다니... 20세기폭스가 배급하고 주성치가 프로듀서를 맡았다는 사실도 충격이다. 




사실 주윤발이 이 영화에서 한 건 많지 않다. 다행히도(?) 그저 폼을 잡고 움직임을 가졌을 뿐이다. 물론 대사도 했고. 기자회견에서 말한 아내가 돈 벌어오라고 등 떠밀어서 출연했다는 획기적인 이유가 서글프다. 영화는 모든 면에서 평범한 아마추어 수준 이하의 아동용이라고 해도 욕 먹을 수준이다. 이 영화를 본 사람이라면 원작 '드래곤볼'에 대한 이미지도 엄청나게 추락했을 것이다. 


원작자 토리야마 아키라가 공식적으로 "이 영화는 원작과는 다른 이야기로 생각해달라"라고 말할 정도로 치가 떨릴 만큼 형편없었는데, 주윤발이 2000년대 이후 영화 고르는 행태를 보면 이해가 가기도 한다. 그는 <와호장룡>으로 2000년대를 화려하게 열어젖힌 후, 바로 <방탄승>으로 이후 계속될 졸작 대열을 예고했다. 


좋아하는 배우들이 형편없는 영화에 출연하는 걸 많이 봐왔다. 아마 앞으로도 자주 보지 않을까 싶다. 그들이 그런 영화에서 좋은 연기력을 선보여도 서글프고 막대기처럼 서 있어도 서글프다. 그들만의 이유로 출연하게 되었겠지만, 정작 그들은 개의치 않아 할지도 모르겠지만, 서두르지 않고 조바심내지 않았으면 좋겠다. 세상에 좋은 영화가 얼마나 많은가? 좋은 배역이 얼마나 많이 기다리고 있는가? 가끔은 눈을 다른 데로 돌리는 것도 한 방법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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