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오래된 리뷰] <광해: 왕이 된 남자>
영화 <광해: 왕이 된 남자> 포스터. ⓒCJ E&M
현재까지 1000만 이상 관객을 동원한 한국영화는 2003년도 <실미도> 이후 16편이다.(조만간 <신과 함께-인과 연>이 이 대열에 합류할 듯하다.) 2010년대에 11편이 나왔다. 이제 매년 한 편 이상 나오는 게 이상하지 않다. 이 영화들은 하나같이 웰메이드 대중영화라 할 만하다. 하지만 이중 '웰메이드'에 중점을 놓고 얘기할 만한 영화는 많지 않다. 즉, 영화 내적인 요소보다 외적인 요소가 흥행에 큰 도움을 주었다는 말이다.
그 와중에 영화 내적으로도 빛나는 성취를 이룩했다고 평가받고 또 개인적으로 평가하는 작품들이 있다. 봉준호 감독의 <괴물>이 단연 돋보이고, <부산행> <베테랑> <도둑들> <변호인> 등이 눈에 띈다. 이들 작품은 '1000만 영화'라는 꼬리표 아닌 꼬리표를 떼고 그 자체로 영화적 인정을 받을 만하다.
<광해: 왕이 된 남자>(이하 '광해')를 빼먹을 뻔했다. 개봉 당시가 제18대 대통령선거가 불과 3개월 전으로 다가왔을 때였다. 이 영화가 재조명하는 광해군의 모습이 고 노무현 대통령을 연상케 한다 하여 영화 외적으로 큰 반향을 일으켰다. 하지만 영화 내적으로만 보아도 이 정도의 흥행이 충분히 가능할 것 같다. 대중영화의 정석이다.
'성군' 광해를 만나다
영화 <광해: 왕이 된 남자>의 한 장면. ⓒCJ E&M
조선 제15대 왕 광해 8년, 자신을 노리는 정적들의 술수가 날로 심해짐을 느끼는 광해(이병헌 분)는 도승지 허균(류승룡 분)에게 명해 위협에 대비한 대역을 찾게 한다. 그렇게 끌려온 광대 하선(이병헌 분)은 광해와 얼굴이 똑같을 뿐 아니라 특유의 말투와 몸짓까지 똑같다. 그는 영문도 모른 채 왕이 자리를 비운 하룻밤을 채운다.
어느 날 광해가 쓰러져 의식을 잃는다. 정적의 술수가 분명하지만 당장 달리 도리가 없다. 허균은 모든 책임을 지고 하선으로 하여금 왕이 깨어날 때까지 그 자리를 대신하게 한다. 왕이 될 수도 왕이 되어서도 안 되는 천민 하선은 왕이 된 것이다. 정녕 아무것도 모르는 그는 무엇을 할 수 있을까.
하선은 도승지 허균에게 가르침을 받고 궁의 말단 기미나인을 살뜰히 챙기고 중전에게 전에 없던 호감을 보이고 내관과도 스스럼 없이 지내고 부장에게 진심을 내보인다. 이 모든 건 원래의 광해에게선 찾아볼 수 없는 선선함과 솔직함과 여유 덕분이다. 하지만 와중에도 변함없는 정적의 술수는 날로 더해져만 가는데...
영화는 광해군 8년 2월 28일 '광해군 일기'에 남아 있는 글귀 "숨겨야 할 일들은 기록에 남기지 말라 이르다"를 토대로 영원히 사라진 15일간의 기록을 되살려놓은 것이다. 그 밑바탕엔 '폭군' 아닌 실리외교와 민생안정의 재평가로서의 '개혁군주' 광해가 있다. 그리고 우린 이 영화를 통해 '성군' 광해를 만날 수 있다.
완벽한 대중 상업 영화
영화 <광해: 왕이 된 남자>의 한 장면. ⓒCJ E&M
대중 상업 영화는 당대 대중의 심리를 잘 파악해야 한다. 이 영화가 나왔을 당시 한국은 대선이 코 앞으로 다가왔을 때였는데, 광해 아닌 하선의 행동 하나하나 말 하나하나가 사무치게 다가왔을 것이다. 우리는 "그대들이 말하는 사대의 예, 나에겐 사대의 예보다 내 백성들의 목숨이 백곱절 천곱절 더 중요하단 말이오!"라고 말하는 지도자가 필요했다. 그야말로 완벽한 대중 심리 반영이다.
또한 안정과 파격의 조화가 필요한 대중 상업 영화다. 이병헌의 180도 달라지는 광해와 하선의 1인 2역과 허균을 비롯한 주요 조연들의 연기는 영화의 안정에 절대적인 영향을 끼쳤고, 천민이 왕의 대역을 넘어서 실제 왕보다 더 왕다운 생각과 행동을 하는 파격 너머 파격의 모습이 신선했다. 감동적이기까지 했다.
시대 반영과 메시지 전달은 과하지 않게, 그렇다고 아예 넣지 않으면 안 될 수준이어야만 한다. 맞는 말을 한다고 하지만 너무 과하거나 과격하면 프로파간다가 되기 십상인데, 그런 함정에 빠지기란 너무나도 쉽다. <광해>는 주로 하선의 말로 전한다.
광해를 위시한 비주류 대북파가 주장하고 전통적 주류 기득권 서인이 반대한 대동법의 핵심은 "땅 열 마작을 가지고 있는 자에게 쌀 열 섬을, 한 마작을 가지고 있는 자에게 한 섬을 받겠다는데 그것의 어떤 것이 그릇된 말이오?"란 말에 있다. 한 토시도 빠짐 없이 400여 년이 지난 지금 그대로 반영해도 된다. 하지만 지금도 여전히 찬성과 반대가 극렬히 싸우는 이 법을 기득권이 받아들일 리가 없다.
자신의 위치를 알고 지키다
영화 <광해: 왕이 된 남자>의 한 장면. ⓒCJ E&M
일본의 전설적인 감독 구로사와 아키라의 <카게무샤>라는 작품이 있다. 일본 전국시대 전설적인 무장 다케다 신겐의 그림자 무사를 통해 정체성과 허무함을 그린 이 영화는 1980년 칸영화제 황금종려상을 비롯해 전 세계 수많은 상을 휩쓴 명작이다. 소재만 비슷할 뿐 전혀 다른 영화임에도 <광해>를 보는 내내 <카게무샤>가 생각났다.
영화의 역사에서 <카게무샤>는 그 자체가 하나의 주체가 되어 영원히 명작으로 남을 것이고, 아마도 <광해>는 무엇을 말하고 할 때 소품 또는 도구로서 가끔씩 불려나오는 정도에 그칠 것이다. 하지만 영화를 봄에 있어 그게 전부는 아닐 테다. 이 영화는 대중상업영화로서 더할 나위 없는 수준을 선사했다. 자신의 위치를 알고 지켰다.
이 영화는 참으로 많은 사람들이 봤고 본 사람이라면 대부분 행복했을 게 분명하다. 이 착한 영화는 우리를 박장대소하게 하고 대성통곡하게 하고 종국엔 씁쓸하지 않은 환한 미소를 짓게 한다. 그렇게 할 수 있는 영화가 많지 않다. <카게무샤> 같은 영화는 절대 해낼 수 없다. 예술 명작 영화와 대중 상업 영화 사이는 높고 낮음의 기준을 매겨서는 안 될 것이다. 그 둘은 다른 차원에 존재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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