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권리 위에 잠자는 시민이 되지 말라고요! 소설 <미스 함무라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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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서평] <미스 함무라비>


<미스 함무라비> 표지 ⓒ문학동네



지난 5월 21일 시작된 JTBC 월화 드라마 <미스 함무라비>, 지금까지 본 적 없던 법원 사람들의 모습을 사실적으로 솔직히 담아내 괜찮은 반응을 이끌어내고 있다. 법정 드라마나 영화는 많이 봐와서 익숙하고 거기에 검사나 변호사 또한 굉장히 익숙한 편이지만, 판사는 전혀 익숙하지가 않다. 이 드라마가 신선하고 색다른 재미를 주는 건, 다름 아닌 판사들이 주인공이 되어 판사들의 일상과 일을 그리고 있기 때문인 것이다.


드라마의 원작 소설 <미스 함무라비>(문학동네)는 글쓰는 판사로 유명한 현 서울중앙지법 부장판사 문유석의 세 번째 책이다. 그는 '현직 부장판사'가 전하는 법과 사람과 일상에 대한 전문적 혹은 비전문적 글을 모아 이미 두 권의 베스트셀러 <판사유감>(21세기북스), <개인주의자 선언>(문학동네)을 내놓은 바 있다. 


저자의 기존 두 책이 판사의 눈으로 바라보는 무엇이었다면, 이 책 <미스 함무라비>는 소설이라는 형식을 빌려 판사가 바라보는 판사라고 할 수 있겠다. 그 중심에는 '눈에는 눈, 이에는 이'라는 철학 아래 엄격한 법치주의 통치로 나라를 다스렸던 고대 바빌로니아 왕조의 함무라비 왕 이름이 별명으로 달린 초임 판사 박차오름이 있다. 그녀의 기행(?) 아닌 기행은 정숙하고 위엄 있는 법정에 어떤 바람을 불러 올까.


처음 담아내는 판사의 일과 법정의 모습


서울중앙지법 제44부로 발령 받은 초임 판사 박차오름은 첫 출근 날 아침 만원 지하철에서 젊은 아가씨를 추행하는 아저씨에게 거침없는 언사를 날리고 그의 사타구니에 니킥을 날리기도 한다. 그러곤 지하철 경찰대에 넘겨버렸다. 그걸 가지고 '짧은 치마나 입고 다니니까 그런 일을 당하지'라며 일갈하는 한세상 부장판사에 대항해 다음 날에는 초미니 스커트에 하이힐을 신고 출근한다. 


한 부장이 그녀에게 '그게 판사 옷차림으로 가당키나 하냐'고 일갈하니, 이에 박 초임은 머리에서 발끝까지 천을 시커먾게 덮어쓰고 눈 부위도 망사로 가린 부르카 차림으로 나타나는 것이다. 세상의 정의 실현에 물불 가리지 않고 다혈질적인 면모로 달려드는 박 초임, 그녀와 한 방을 쓰는 선배 임바른 판사는 당혹스러울 뿐이다. 


소설은 '글쟁이' 판사의 작품이라고 하지만 온전한 '소설 작품'으로서 무엇을 논하기엔 무리가 따른다. 그보다 저자가 밝혔듯, 단편소설보다 훨씬 적은 분량의 소설을 연재하는 콩트에 가까워 보인다. 하지만 인생의 한 단면을 예리하게 담되 착상이 기발해야 하고 유머와 풍자까지 담고 있어야 하는 콩트에 합당한 글인지도 애매하다. 


그러하기에 이 작품은 일반 소설을 대하는 것과는 다르게 접근해야 한다. 일단 눈을 낮춘 후 범위를 넓히고는 판사의 일과 법정의 모습을 사실상 처음 담아내는 의의를 지닌 작품이라는 점에 천착해야 한다. 소설이니 콩트니 하는 건, 단지 수단일 뿐이다. 그 이상도 이하도 아닌 것이다. 


권리 위에 잠자는 시민이 되지 말라고요!


양승태 전 대법원장 시절 법원행정처의 사법권 남용 의혹이 일파만파로 커지며 현 대법원장이 나서서 사과하고 전국 법관에게 이메일을 발송하는 등 사태 수습에 나섰다. 조만간 각계 각층의 의견을 수립해 최종 결정을 내릴 예정이라고 한다. 민주 정치를 지탱하는 국가 3 권력 중 하나인 사법부(법원)를 향한 불신은 더 하면 더 했지 나아지지 않고 있다. 또 하나의 권력인 입법부(국회) 못지 않은 것이다. 


이 귀여운(?) 소설은 존재의 밑바닥, 어둠의 심연을 들여다보는 판사의, 밑바닥까지 추락한 신뢰 회복을 위한 최소한의 밑거름을 위한 듯이 보인다. 일반 사람들이 해결할 수 없는 판단을 '신'의 목소리를 대신해 내려주는 듯한 판사의 신비로움은, 그동안은 알아서도 안 되었고 알 수도 없었으며 알고 싶지도 않은 그것이었다. 우리도 그 사실을 잘 알고 있었고 그들도 그 사실을 잘 인지하고 있었다. 


하지만 이젠 내려와야 할 시대라는 것을, 그 높고 저 먼 곳에서 우리들이 두 발 붙이고 살고 있는 이곳으로 와야 한다는 것을 깨달았으리라. 저자는 더불어 그가 오래전부터 천착해온 듯한 '개인주의자' 개념을 통해 시민의 권리와 의무를 지적한다. 두 손뼉이 맞아야 소리가 나는 것처럼, 판사들의 움직임과 맞물린 시민들의 움직임이 필요하다는 것이다. 문유석 판사의 전작들에서뿐만 아니라 이 가벼워 보이는 소설 곳곳에서 그런 주장이 담긴 목소리를 들을 수 있다. 


'권리 위에 잠자는 시민이 되지 말라고요!'는 시민들이 행해야 할 움직임을 한마디로 암축한 문장이다. 시민에게는 당연히 주장할 수 있는 권리가 있다. 하지만 주장해 실행하고 실현에 옮기고 이후에도 계속 쟁취해 나가는 건 굉장히 귀찮을 뿐만 아니라, 생존에 기반한 삶을 영위하기에도 벅찬 많은 이들에겐 '힘든' 일이다. 


저자는 바로 그것이 권리 위에 잠자는 행위라고 말한다. 오랜 판사 일을 통해 위에서 언급한 힘든 점을 누구보다도 잘 알고 있음에도 말이다. 오랫동안 다져진 땅을 파내 잘게 부수고 다른 무엇으로 만드는 건 너무나도 힘든 일임에 분명하다. 하지만 그것이 반드시 필요한 일, 그것도 다른 누구도 아닌 본인들에게 긍정적으로밖에 필요하지 않은 일이라면 해야 하지 않겠나. 문유석 판사에게 박수를 보내며, 박차오름 판사를 응원하고, 우리들도 움직여보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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