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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나간 책 다시읽기

'가족'은 다시 쓰여져야 한다, 소설 <고령화 가족>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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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나간 책 다시읽기] 천명관 소설가의 <고령화 가족>


소설 <고령화 가족> 표지 ⓒ문학동네



쫄딱 망한 영화감독에 아내와 이혼한 후 혼자 사는 마흔여덟의 중년 남자 '나'는 죽기보다 싫은 일을 감행할 수밖에 없게 되었다. 칠순이 넘는 엄마 집에 얹혀살게 된 것. 칠순이 넘은 엄마는 별말 없이 나를 받아 주었고 이후에도 아무것도 묻지 않은 채 그저 묵묵히 나를 챙겨줄 뿐이다. 뿐만 아니라 엄마는 그 연세에도 화장품을 팔러 밖으로 부지런히 돌아다닌다. 아버지는 교통사고를 당해 돌아가셨다.  


엄마 집에는 쉰두 살이 된 형 '오한모', 일명 '오함마'가 얹혀살고 있었다. 그는 백이십 킬로그램, 폭력과 강간, 사기와 절도로 얼룩진 전과 5범의 변태성욕자, 정신불구의 거대한 괴물... 한마디로 인간망종이다. 교도소를 오가고 사업을 말아먹은 후 엄마 집에 삼 년째 눌어붙어 있다. 얼마 안 가 셋째 미연이까지 딸 민경이를 데리고 엄마 집에 들어왔다. 개 같은 인간인 두 번째 남편이 툭하면 술을 처먹고 들어와 개 패듯 하여 집을 나와버렸다는 것이다. 


몇십 년만에 다시 모인 삼 남매는 평균 나이 사십구 세에 칠순 넘은 엄마 집에 얹혀살게 되었다. 굳이 속을 들여다볼 필요도 없이 이미 콩가루 집안임에 분명해 보이는 이 집안, 그 와중에도 나는 믿기 힘들고 믿기 싫은 집안의 과거사와 속사정을 하나하나 알게 된다. 이놈의 집구석... 안 그래도 밑바닥인 나를 어둠의 심연까지 밀어넣는구나... 우리 삼 남매와 엄마 그리고 민경이는 어떻게 될까? 어떻게 해야 할까?


이야기꾼 천명관


소설 <고령화 가족>(문학동네)은 이 시대 대표적 이야기꾼 천명관 작가가 지난 2010년에 두 번째로 내놓은 장편소설이다. 여러 직업을 전전하다 서른 줄에 이르러 영화판에 뛰어들었고 몇몇 시나리오는 영화화되었지만 마흔 줄까지 메가폰을 잡지 못해 문학판으로 와 지금에 이른 천명관 작가의 파란만장 인생이 담겨 있는 듯하다. 


사실 <고령화 가족> 이후에 내놓은 소설들, 특히 장편소설들 <나의 삼촌 브루스 리>(예담)나 <이것이 남자의 세상이다>(예담)에도 그만의 향기가 진하게 풍긴다. 영화판과 문학판을 오가며 어느 한 곳에 온전히 발 붙이지 못하는 그의 애환 또는 속성이 고스란히 묻어나는 것이다. 공통적으로 밑바닥 인생을 그리고 있고 말이다. 


그는 그 스스로도 말하듯 문학에서 인정 받았지만 영화에 적을 두고 싶다고 하는데, 그래서인지 그의 소설들에서는 문학 아닌 영화쪽 냄새(?)가 진하게 풍긴다. 그것도 아주 노골적인 대중영화. 그의 소설은 너무너무 재밌고 너무너무 잘 읽힌다. 더불어 진한 페이소스를 느낄 수 있다. 


이 소설은 소소할 수 있는 누구나의 가족 이야기이지만, 웃지 않고 못 배길 요소들이 곳곳에 깔려 있지만, 개인의 인생이나 사회를 관통하는 감당못할 메시지가 담겨져 있는 것도 아니지만, 그래서 선뜻 '아끼는' 소설이라고 말하기 힘들 수 있지만, 다름 아닌 천명관의 소설이기에 '아껴 읽는' 소설이라고 자랑스럽게 말할 수 있다. 


막장 가족


소설은 '막장' 가족의 의미와 '밑바닥' 인생들을 말하고 있을 테다. '가족'과 '인생'은 누구를 막론하고 자신을 이루는 가장 큰 개념들이다. 그래서 가장 중요하고 가장 공을 들인다. 하지만 제대로 꾸려 나가기가 가장 힘들기도 하다. 가족과 인생은 필연적으로 이 '세상'과 맞물려 돌아가기 때문이다. 세상이 내 마음대로 되는 게 아니지 않은가. 


막장이 되어버린, 아니 이미 되어버렸던 이 가족은 다시 모이받니 콩가루가 되어버린다. 도무지 답이 없는 구제불능의 이 가족이지만, 주요 구성원 삼 남매는 쉽게 저버리지 못한다. 그래도 이 세상에 나를 받아줄 곳은 여기 뿐이라서. 그리고 쉽게 저버리지 않는다. 그래도 이 세상에서 이들을 받아줄 사람은 나밖에 없으니. 


가족의 의미가 더 이상 혈연에 의한 천륜에 전적으로 의지하고 기대는 데 있지 않다. 가족에 있어 '관계'가 중심이 되어야 하는 시대로 나아가고 있는 것이다. 그런 의미에서 이 소설에서 보이는 막장 콩가루 가족의 모습은 혈연에 의한 천륜이 아닌 관계로 비춰지기에 충분하다. 거기엔 서로에 대한 의무와 책임보다 차라리 서로에 대한 노력과 학습이 존재했기 때문이다. 물론 기가 막히고 코가 막힌 상황 연출이 선행되어 있었지만 말이다. 작가가 메시지를 그런 식으로 전달한 것일 테다. 


밑바닥 인생


일본의 나오키상 수상자 나카지마 교코의 장편소설 <어쩌다 대가족, 오늘만은 무사히!>(예담)를 보면 사회에서 낙오된 밑바닥 인생들이 가족의 품으로 돌아와 대가족을 이뤄 살게 되는데, <고령화 가족> 또한 얼핏 비슷해 보일지 모른다. 하지만 이 소설에서의 가족은, 가족의 구성원들은 마냥 받아주지 않는다. 그렇다고 나갈 때 나간다고 말하지도 않는다. 


세상에 둘도 없는 따뜻한 보금자리도 아니거니와, 한 번 발 디디면 절대 나갈 수 없는 감옥 같은 곳도 아니다. 어찌 보면 굉장히 이성적이다 못해 피도 눈물도 없는 냉혈한들의 집합소처럼 보일 수도 있겠다. 하지만 가족은 다시 쓰여져야 한다. 그래야 한다고 믿는다. 


이 소설은 그런 메시지를 한 축에 놓고 천명관 작가만의 세계관을 구축하는 주요한 키워드인 '밑바닥 인생'을 한 축에 놓아 나아간다. 이 '비정상적인' 이들이 아니었다면 사실은 비정상적일 수 있는 작금의 '정상적인' 가족의 행태에 따끔한 일침을 놓지 못했을 것이 자명하다. 참으로 건들기 힘든 부분을 이토록 예리하면서도 수려하게 돌리도 돌려서 말할 수 있는 작가의 능력에 정녕 감탄의 박수를 보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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