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오래된 리뷰] <노트북>


당연하게도 재개봉을 해, 당연하게도 좋은 흥행을 기록한 영화 <노트북>. 현대판 로맨스 클래식으로서의 입지를 확고히 했다. ⓒ글뫼



최근 어김없이 재개봉 대열에 합류한 영화 <노트북>. 지난 2004년 개봉해 3천만 달러가 되지 않는 제작비로 전 세계 1억 달러가 넘는 흥행을 올린 바 있고, 국내에서는 약 80만 명의 관객을 동원해 괜찮은 흥행 성적을 올렸다. 재개봉 성적 또한 상당히 좋은 편으로, '구관이 명관'임을 입증했다. 


영화는 정통 멜로를 표방하며 2000년대 영화 중 가장 많은 눈물과 콧물을 쏟아내게 했다. 이 영화가 성공한 후 한동안 '<노트북> 따라쟁이' 영화들이 나와 성공을 꽤하기도 했다. 예측 가능한 스토리 내에서 나름의 반전을 시도해 누군가의 '반전 영화' 리스트에서 만난 적이 있다. 내외적으로 이야깃거리가 상당한 영화라 하겠다. 


클래식 반열에 올라서다


이 영화가 현대판 클래식으로 올라선 데에는 스토리라인 자체가 갖는 '고전적' 느낌이 크게 작용할 것이다. 한 눈 팔지 않고 고전에 올인해 제대로 된 걸 선보였다고 할까? ⓒ글뫼



영화의 스토리도 스토리거니와 스토리라인과 분위기가 왠만한 고전(영화) 뺨치게 고전적이다. 반전조차도 고전적 서사의 한 줄기 안에서 한 치의 어긋남이 없다. '전형적'이라는 말이 필요가 없다. '전형적'이라는 말을 생겨나게 한 장본인과 같은 라인에 속하니까 말이다. 이 영화가 여전히 인기를 끌고 있는 사실 그 자체가, 우리가 새롭고 쿨하고 스피디한 것만 원하는 건 아니라는 걸 알 수 있는 대목이다. 


놀이 공원에서 '앨리'(레이첼 맥아담스 분)를 보고 한 눈에 반한 '노아'(라이언 고슬링 분). 다자고짜 위험천만한 곡예를 펼치며 그녀에게 들이댄다. 마지못해 교제를 허락한 앨리지만 곧 잊어버린다. 하지만 노아는 포기하지 않고 그녀의 눈에 들기 위해 노력하고, 앨리는 그가 눈에 밟힌다. 그들은 우여곡절 끝에 사귀게 된다. 17세 한창인 그들은 곧 불이 붙어 주체할 수 없이 맹렬하게 서로를 원한다. 그야말로 불꽃 같은 사랑이다. 


문제는 집안의 격차다. 앨리는 지역 유지의 딸, 노아는 막노동꾼. 이어질 수가 없다. 당연히 앨리의 집안에서 극심한 반대가 따르고, 앨리는 극렬히 대항하지만 노아가 자신의 분수를 안다는 말로 앨리를 떠나보낸다. 먼 곳의 대학에 진학하게 된 앨리, 막노동꾼으로 생계를 이어가다 전쟁이 터져 군대를 다녀온 노아. 


그렇게 7년이 지난 후 노아는 아버지가 돌아가시기 전에 사주신 오래된 폐가를 공들여 재건축한다. 그를 계기로 신문에 난 노아를 결혼 직전의 앨리가 보게 되고, 앨리는 그 즉시 노아를 찾아간다. 7년 간 이어진 오해를 풀고 서로의 진심을 알게 된 그들. 어떤 선택을 하게 될까. 7년 전의 그 사랑은, 한순간 맹렬히 타오르고 꺼지는 불꽃일 뿐이었을까. 아니면 폭발하진 않아도 영원히 꺼지지 활화산처럼 만날 수 없어도 영원히 지속될 불꽃이었을까. 


예상치 못한 또 다른 절절한 로맨스


영화는 젊은 남녀의 로맨스 말고도 또 다른 로맨스를 선보인다. 오히려 이 영화의 꽃은 이 늙은 남녀의 로맨스일 것이다. 더욱 절절하고, 반전도 있다. ⓒ글뫼



영화는 알츠하이머병에 걸린 할머니에게 할아버지가 매일 찾아와 들려주는 이야기가 주된 내용인데, 이 할머니와 할아버지가 앨리와 노아라는 걸 직감할 수 있지만 확실할 순 없는 게 은근히 또 다른 재미이다. 앨리와 노아가 단지 할아버지가 각색한 이야기 속 주인공일 수도 있고, 앨리는 할머니가 맞는 게 확실하지만 노아는 할아버지가 맞는지 확신할 수가 없다. 


이 둘의 예상치 못한 절절한 로맨스가 앨리와 노아의 절절함을 넘어서는 게 또 다른 키포인트다. 당연히 멜로 영화인 만큼 이 둘 사이에도 가슴 아픈 뒷 이야기가 있을 거라 생각은 했지만, 이 정도의 절절함을 선보일 줄은 몰랐다. 그 절절함은 그대로 전해져와 눈물이 되어 흘러 내린다. 


화의 1차 반전이 앨리와 노아에게서, 2차 반전이 할머니와 할아버지에게서 일어나는 만큼 이들을 더욱 눈여겨볼 필요가 있다. 반전이 누구한테 일어난다는 걸 알려주는 건 범죄(?) 행위에 다름 없지만, 그것이 눈물을 동반한 로맨스에서 기인한 것이라면 미리 알려주는 게 예의라고도 할 수 있겠다. 깜짝 놀라게 하는 반전의 경우와는 달리, 알고 있어 준비하면 오히려 더 절절함을 느낄 수 있기 때문이다. 더구나 이 영화는 재개봉할 정도로 유명하니까 말이다. 


진정한 사랑이란?


이 영화를 보고 나면 필수적으로 따라오는 것들. '나라면?' '너라면?' '진정한 사랑이란?' 일단 영화를 보자. ⓒ글뫼



영화가 끝나고 나면 필수적으로 질문하게 되는 사항이 있다. '나라면 어떻게 할까, 너라면 어떻게 하겠니.' 다름 아닌 '사랑'에 대한 질문이다. 청춘을 오롯이 바쳐서, 평생을 오롯이 바쳐서 단 한 사람만을 사랑할 수 있을까? 그것이 과연 가능할까? 후회 없이 여러 사람과 사랑하고서야 비로소 진정한 사랑을 찾을 수 있는 게 아닐까?


영화는 한 사람만을 지극히 사랑하는 게 진정한 사랑이라 말한다. 진정한 사랑을 '찾기 위해' 노력할 필요가 없다. 진정한 사랑과 '재회하기 위해' 노력하면 되는 것이다. 선택은 그 진정한 사랑인 상대에게 달려 있지만, 그렇게 한 사람만을 사랑했다는 것 자체로 여한이 없다고 말한다. 


어느 동화에서도 이런 이야기는 찾아볼 수 없을 거다. 그런데 이 영화는 실화를 바탕으로 한 소설이 원작이다. '영화보다 더 영화 같다'는 말의 장본인이라고 할 수 있겠는데, 이야기 자체가 그런 말에서 자연스레 파생되는 기대를 저버리지 않을 만큼 재미있다. 고전적인 서사답지 않게 은근 파격적이고 은근 스피디하다. 그런 점들이 은근 새롭게 다가온다. 정녕 전형적으로 전형적이기만 했다면, 이 영화는 아무도 보지 않았을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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冊으로 策하다. 책으로 일을 꾸미거나 꾀하다. 책으로 세상을 바꿔 보겠습니다. singenv@naver.com Since 2013.4.16




[오래된 리뷰] 마틴 스콜세지 감독의 <디파티드>


마틴 스콜세지 손에 의해 부활한 <무간도>, <디파티드>. <무간도>가 가진 특유의 포스트 모더니즘 적이고 황량한 분위기를 잘 구현해냈을까? 아니면 그만의 스타일로 재탄생해냈을까? ⓒ워너브러더스 코리아



지난 2002년 홍콩 느와르가 느닷없이 부활했다. 유위강, 맥조휘 감독에 양조위, 유덕화가 주연을 맡은 영화 <무간도>에 의해서였다. 영화는 홍콩을 넘어 세계적으로 인기를 얻었고 오래지 않아 2, 3편이 만들어져 시리즈를 마무리지었다. 홍콩이라는 도시가 갖는 황량한 분위기와 주인공들의 비극적인 삶이 조화를 이루어 가슴을 후벼팠다. 


지난 2013년에 개봉해 좋은 평가와 흥행을 했던 <신세계>는 <무간도>와 많이 비교되곤 하는데, 신분을 완전히 세탁해 조직으로 잡입한 경찰 이야기 라는 점에서 비슷했기 때문이다. 하지만 워낙 뛰어난 <무간도>로 괜찮게 만들어진 <신세계>는 설 자리를 잃은 느낌이다. 


<신세계>보단 괜찮지만 역시 <무간도>에 비교해 많은 욕을 먹었던 영화가 하나 더 있다. <무간도> 시리즈를 리메이크 한 마틴 스콜세지 감독의 할리우드 영화 <디파티드>가 그것이다. 레오나르도 디카프리오, 멧 데이먼, 잭 니콜슨이 열연해 오스카 최고의 영예인 최우수작품상과 감독상을 수상했음에도 그러하다. 리메이크의 어쩔 수 없는 숙명인가, 정녕 <무간도>보다 <디파티드>가 못한가. 


마틴 스콜세지 스타일로 리메이크 한 <무간도>, 과연?


영화는 마틴 스콜세지 스타일이다. 특이하다면 특이할 수 있기에, 호불호가 나뉜다. 그렇지만 그는 거장이고, 이 영화가 명작인 건 부정할 수 없다. ⓒ워너브러더스 코리아



결론부터 말하자면, <무간도>를 본 입장에서 <디파티드>가 상대적으로 별로라고 느낄 수밖에 없다는 거다. 그건 아마 홍콩과 보스턴의 거리와 분위기의 차이 만큼일 거다. 그리고 한국 사람의 시선에서도 아무래도 보스턴보다는 홍콩이지 않을까. <영웅본색> 등으로 익숙한 홍콩 느와르이지 않은가. 또한 마틴 스콜세지의 독특한 스타일이 느와르라는 장르에 그리 적절하진 않은 듯한 느낌이 든다. 들 수밖에 없다. 


영화는 <무간도>를 본 이라면 따로 설명할 필요가 없을 정도이다. 보스턴 최대 범죄 조직을 이끄는 보스 코스텔로(잭 니콜슨 분), 메사추세츠 주 경찰청은 이 조직을 일망타진하기 위한 작전의 일환으로 신입 빌리(레오나르도 디카프리오 분)를 조직에 투입시킨다. 코스텔로도 메사추세츠 주 경찰청에 첩자를 투입시켰는데, 뛰어난 실력과 언변으로 승승장구 중인 신입 설리반(멧 데이먼 분)이 그다. 


이 둘은 침투한 조직과 경찰청에서 승승장구하며 핵심에 다가간다. 그렇게 그들은 핵심 정보를 정체성의 고향인 곳으로 적절히 알려준다. 경찰은 빌리의 정보로 코스텔로 조직을 일망타진하려 하지만, 설리반이 정보를 코스텔로에게 알려주어 위기를 넘기는 식이다. 번번이 추격당하고, 번번이 실패하고, 조직과 경찰청에서는 내부 스파이를 의심한다. 그 의심은 시시각각 빌리와 설리반, 특히 빌리의 목을 조여온다. 


리메이크니 만큼 스토리는 똑같을 테니, 마틴 스콜세지는 스타일로 승부를 본다. 그만이 가진 특유의 감각적인 스타일로, '대도시' 보스턴의 악명 높은 뒷골목을 그려냈다. 특히 이탈리아계 조직이 주름 잡았던 시대에 아일랜드계(코스텔로, 빌리)가 비집고 들어가 활동하는 모습을 통해 통통 튀는 감각을 극도로 끌어올릴 수 있었다. 바로 그 부분이 <무간도>의 진중하면서도 우중충해 한층 비극적인 분위기와 상충되는 것이다. 


아이러니의 절정, 큰 얘기를 담은 <디파티드>


영화는 철학적인 이야기까지 나아간다. 그건 아이러니이다. 그러며 굉장히 큰 이야기이기도 한데, 마틴 스콜세지만이 할 수 있겠다 싶다. ⓒ워너브러더스 코리아



<무간도> 리메이크라는 수식어를 던져 버리고 <디파티드> 자체를 보자. 그러면 보이지 않던 것들이 보인다. 아무래도 설리반 보다는 빌리에게 초점이 맞춰진 바, 빌리는 아버지와 삼촌이 코스텔로도 잘 알고 경찰청에서도 잘 아는 전설적인 보스이기 때문에 그의 인생을 들여다보고 경찰에 잘 맞지 않은 대신 조직에 잠입하면 더할 나위 없다고 판단해 조직원으로의 길을 걸을 수밖에 없게 되었기 때문이다. 


그 자체로 비극인데, 그는 아일랜드계로 이탈리아계가 주름 잡고 있는 보스턴 뒷골목을 휘젓고 다녀야 할 운명이다. 그 곳은 그가 있어야 할 자리가 아닌 것이다. 비극은 이미 잉태되어 무럭무럭 자라고 있었다. 여기서 잠시 <무간도>를 끄집어 내면, <무간도>가 캐릭터에 초점을 맞췄다면 <디파티드>는 캐릭터를 있게 한 상황에 초점을 맞췄다고 할 수 있겠다. 아무래도 캐릭터 중심이 더 스릴 있고 오히려 더 비극적으로 보일 수 있다. 반면 마틴 스콜세지의 감각적이고 풍자적인 스타일이 이 비극을 가릴 요지가 있는 것이다. 


상황은, 빌리를 더욱 더 조직원답게 설리반을 더욱 더 경찰답게 만든다. 그러면 그럴수록 더 꼬여간다. 빌리와 설리반이라는 존재 때문이다. 그런데 설리반은 궁극적인 목적이 무엇일까. 주 경찰청의 전복인가? 절대 그럴 수는 없을 거다. 그럼 설리반은 언제까지 그런 짓을 계속해야 할까. 한편 빌리는 코스텔로와 그의 조직 일망타진이 목적이다. 그런데 설리반 때문에 거의 불가능하다. 그렇다면 조직과 경찰의 관계는? 조직이 없다면 경찰도 없다. 경찰이 없다고 조직이 없진 않다. '조직'이라는 존재 때문에 이 모든 게 존재하는 거라는 명제가 도출된다. 하지만 영화는 그 뒤에 더 거대한 무엇을 숨겨놓는다. 그 끝은 어디일까. 


영화는 '살아가는 이유' '정체성의 방황' 등의 철학적인 생각까지 하게 만든다. 내가 온몸과 온 생각을 바쳐 두 발로 굳게 디딛고 서 있는 이 바닥이, 딱 그만큼의 공력을 들여 내가 무너뜨려야 할 바닥인 게 아닌가. 아이러니의 절정이다. 그런 너무나도 황망한 상황이니 쉬이 공감하지 못할 수 있다. 워낙 큰 얘기인데, 마틴 스콜세지라는 사람의 장막에 가려졌다. 그 얘기를 연기한 이들이 아직은 그를 따라잡지 못했었다. 넘어서지도 못했었다. 개인적으로 레오나르도 디카프리오는 <더 울프 오브 월스트리트>를 기점으로 마틴 스콜세지의 장막을 걷어낼 수 있었다고 생각한다. 


마지막에 보여주는 생각지 못한 서스펜스, 상황의 '잔인'


긴장을 푼 마지막 30분에 진정한 서스펜스를 선사한다. 멋진 배치라고 생각한다. 굉장히 잔인한데, <아수라>의 잔인과는 다른 차원. 이 역시 마틴 스콜세지의 스타일이다. ⓒ워너브러더스 코리아



영화는 150분이라는 긴 러닝타임을 자랑(?)하는데, 100분이 넘어가며 슬슬 마지막을 준비하는 듯하다. 통상적으로 20분이면 완전히 끝을 맺는데, 이 영화 또한 그랬다. 120분이라는, 보통 영화의 보통 러닝타임에 맞춰 영화를 끝맺고 다소 긴 에필로그를 보여주려니 생각했다. 


그렇게 일단락 났다고 생각한 영화는, 이후 30분 동안 생각지 못한 서스펜스를 선물한다. 사실 그 전까지 큰 긴장감 없이 즐기는 수준에서 봐 왔는데, 그래서 조금은 실망감을 감추지 못했는데, 마지막 즈음에서 빵 터진 것이다. 어떻게 보면 그 부분만 따로 만들어 붙인 듯, 어떻게 보면 그 부분을 보여주기 위해 그 전까지 위장 전술을 쓴 듯, 아리송하지만 충분히 멋진 연출이고 배치다. 


모골이 송연해지는 서스펜스, 스릴, 그리고 느와르는 인간이 저지르는 '잔인'하고는 거리가 있다. 잔인할 수밖에 없게끔 만드는 그 상황의 '잔인'이 주요 주제이자 소재인 것이다. <디파티드>는 그것을 긴 러닝타임, 톡톡 튀는 감각, 빼어난 연기, 자유자재의 연출 안에서 훌륭히 풀어내어 보여주었다. 인간이 저지르는 '잔인'이 주를 이룬 한국형 느와르의 최신작인 <아수라>가 아쉽게 다가오는 게 바로 그 때문이다. 눈에 보이는 게 전부가 아니거니와, 관객들은 눈에 보이지 않는 것들을 볼 수 있는 눈을 가졌다. 마틴 스콜세지는 그 사실을 아주 잘 아는 감독이다. 그러면서도 자신의 스타일을 고수할 줄 아는 그는 진정 거장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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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래된 리뷰] 우디 앨런 감독의 <매치 포인트>


세계적 거장 우디 앨런이 영국을 배경으로 한 인간의 빙퉁그러진 욕망을 파헤쳤다. 상업영화를 표방했는데, 그 이면을 들여다보면 그의 전매특허인 풍자가 보인다. 개인적으로 포스터는 별로다. ⓒCJ 엔터테인먼트



테니스 선수를 때려 치우고 부유층의 테니스 강사가 된 크리스. 그는 상류층으로의 진입을 꿈꾼다. 와중에 그가 가르치는 부유층 집안의 자제 톰과 친해진다. 톰의 가족과 오페라를 함께 보게 된 크리스는 톰의 여동생 클로에의 눈에 든다. 그렇게 크리스는 톰과 클로에와 급격히 가까워진다. 클로에와는 잘 될 눈치다. 


어느 날 눈부시게 아름다운 섹시한 여인을 보고 한눈에 반하는 크리스, 하지만 그녀는 다름 아닌 톰의 약혼자 노라였다. 그녀를 가슴 한구석에 고히 모셔둔 채, 크리스는 클로에와의 결혼과 장인 회사 취칙에 연이어 골인하며 꿈에 그리던 상류사회에 진입한다. 자타공인 상류층이 된 것이다. 그렇지만 톰의 약혼자 노라가 자꾸만 생각난다. 


예술영화의 상업화에 성공한 세계적 거장 우디 앨런의 <매치 포인트>다. 주로 미국의 자본주의 위선과 허위를 풍자한 그가 이번엔 영국을 배경으로 한 인간의 빙퉁그러진 욕망을 보여준다. 영국 상류층의 위선과 허위를 풍자할 줄 알았건만, 그런 양상은 크게 다뤄지지 않았다. 아니, 있을지 모르니 한번 찾아보는 시간을 갖겠다. 


천하의 죽일 놈에게 찾아가는 행운


왜 이런 천하의 죽일 놈에게 행운이 찾아가는 걸까. 정신없이 영화를 즐기다 보면 크리스 때문에 씁쓸함을 느낀다. ⓒCJ 엔터테인먼트



우리 앨런이 변화를 시도했다고 볼 수도 있겠는데, 좀 더 가벼워 보이고 좀 더 상업적으로 보이며 좀 더 이해하기 쉬운 것처럼 보인다. 전체적으로 큰 혼란 없이, 하나의 레일 위로만 달리는 기차와 같기 때문이다. 줄기차게 크리스만 따라가다보면 어느새 영화는 끝에 와 있다. 다만, 그렇게 정신 없이 끝에 와 보면 알 수 없는 씁쓸함을 느낄 수 있다. 크리스 때문이다. 


톰의 약혼자 노라를 가슴 한구석에 놓은 채 톰의 여동생 클로에랑 결혼해 톰의 아버지 회사에 취직해 중역의 자리까지 올라간 크리스. 그는 클로에라는 '성공'을 쟁취하고는, 노라라는 '사랑'을 향해 거침없이 달려간다. 누구나 성공과 사랑을 함께 얻고 싶어할 테지만, 크리스에게는 클로에가 사랑이 될 수 없고 노라가 성공이 될 수 없었다. 클로에는 그가 원하는 사람이 아니었고, 노라는 아무것도 가진 게 없는 배우지망생에 불과했다. 그는 어떤 선택을 할 수 있을까. 이대로 계속 지낼 수 있을까. 


'매치 포인트'라는 건 테니스를 비롯한 점수 내기 운동 경기에서 승부를 결정 짓는 마지막 1점을 말한다. 이 1점은 실력도 실력이지만 운이 상당히 작용한다. 너무나 결정적인 순간이기에 제 실력을 발휘할 수도 없거니와, 운에 맡기겠다고 마음 먹으면 이기든 지든 마음은 편하다. 


크리스는 참 운이 좋은 사내다. 일사천리로 성공을 쟁취하고는 사랑을 향해 달려가도 그를 의심하는 이가 없으니 말이다. 보통 이런 식의 전개라면 영화 <리플리>의 리플리처럼 돌이킬 수 없는 파국으로 치닫게 마련이지만, 또 그 파국이 너무 가슴 아프게 하지만, 크리스는 그렇지 않았다. 그는 끝까지 운이 좋았다. 이 영화가 씁쓸하지만 특별했던 이유다. 이런 천하의 죽일 놈에게 이런 행운이...


우디 앨런의 적나라함이 말하는 것들


크리스는 성공을 택할 것인가, 사랑을 택할 것인가. 그는 이 양자택일의 갈림길 앞에서, 적나라하고 지질하고 역겨운 싸움을 계속한다. 우디 앨런은 이를 통해 무엇을 말하고자 하는가. ⓒCJ 엔터테인먼트



영화는 시종 일관 눈을 뗄 수 없게끔 전개된다. 중간에 조금 지루한 공방이 이어지지만, 그조차 긴장 속에서이다. 태풍의 한 가운데는 잔잔한 것과 같은 이치이다. 우디 앨런의 연출력과 스타일을 가장 잘 엿볼 수 있는 대목인데, '적나라함'이 그것이다. 이 대목은 그때까지와의 긴장감이 주는 가슴 조임과는 다른 종류 가슴 조임이 있다. 


크리스는 영원히 '성공'을 멀리하고 영원히 '사랑'과 함께 할 수 있을까. 그토록 성공을 열망해 사랑하지도 않은 사람과 결혼한 그가? 상류층 진입이라는 목표로 테니스 선수를 때려 치우고 테니스 강사가 되었던 그가? 그럴 순 없을 테다. 하지만 상대가 한 번 보면 절대 눈을 뗄 수 없는 절세미녀다. 성공의 본능과 맞먹는 수준의 본능이다. 


하지만 성공과 사랑이 불꽃을 튀기며 대립각을 세우면 사랑은 더 이상 사랑이 아니게 된다. 성공이야 애초에 그럴 거라는 걸 알고 자신의 무엇을 희생한 채 시작한 것이기에 그러려니 할 수 있겠지만, 사랑은 그럴 수 없는 것이다. 현실이 있는 사랑에서 현실이 없는 사랑으로의 길을 갈 수는 없는 거다. 크리스는 그런 양자택일의 갈림길 앞에서 고민한다. 


이 고민 하에서의 크리스와 노라의 적나라하고 지질하고 역겹까지한 싸움이 계속된다. 아무것도 없이 오직 크리스만 바라보고 둘만 함께 하자는 노라, 그 앞에서 어쩔 줄 몰라하는 크리스. 먼저 시작한 건 크리스였지만, 막상 그 상황이 눈앞으로 오니 너무 두려운 거다. 정녕 인간 말종이라 할 만한 크리스, 그런데 왜 크리스의 상황에 공감이 가는 거지? 왜 나도 모르게 그를 응원하고 있는 거지? 인간이 다 그런 건가. 우디 앨런이 말하고자 하는 게, 그가 보여주는 '적나라함'의 의도가 바로 그것인가, 싶다. 


영국의 '용서 받을 수 없는 짓'


이미 '용서 받지 못할 짓'을 수도 없이 저지른 영국(상류층)에게, 역시 '용서 받지 못할 짓'을 저지른 이 하나를 포용하는 건 어렵지 않을 것이다. ⓒCJ 엔터테인먼트



우디 앨런이 이 영화에서는 예상과 다르게 영국 상류층의 위선과 허위를 드러내지 않았다고 생각했다. 왜냐하면 크리스가 상류층을 대변하진 못할 테니까. 하지만 그런 이들이 그 한 명뿐이 아니라고 한다면? 그와 같은 사람들을 충분히 포용(?)할 수 있을 정도의 영국 상류층이니 만큼, 더 한 이들도 충분히 포용할 수 있을지 모른다. 


영국 상류층은 세계 여러 나라의 상류층 중에서도 특별할 거다. 상류층이라는 개념의 원조라고 할 수 있지 않을까. 그렇지만 그들이 저지른 짓은, 나아가 영국이라는 나라가 저지른 짓은, 결코 용서받지 못할 게 많다. 1차, 2차 세계대전을 치르며 아주 훌륭하게 이미지를 탈바꿈했지만, 영국이라는 나라는 한때 '해가 지지 않는 나라'로 전 세계에 수많은 식민지를 만들었던 파렴치의 대명사였다. '산업혁명' 시대 때 자행된 말 못할 학대의 나날들은 달리 설명할 길이 없다. 빙퉁그러진 욕망의 발로라고밖에...


그런 '용서 받을 수 없는 짓'을 수없이 저지른 나라가 영국일진대, 지금은 '신사의 나라'이자 상류층만 존재할 것 같은 멋진 나라가 되었다. 알고도 쉬쉬 하기도 하지만, 아예 모르는 경우도 다반사다. 참으로 운이 좋은 것 같다. 


크리스 또한 용서 받을 수 없는 짓을 저질렀지만, 아주 훌륭하게 상류층에 편입되어 나날이 좋은 일들만 있을 것이다. 우리 앨런이 영국 상류층을 배경으로 그와 같은 사건을 보여준 건, 다름 아닌 영국이라는 나라와 영국 상류층의 역사를 그의 스타일로 풍자한 게 아닐까 생각해본다. 그들의 운은 언제까지 계속될까. 지금까지는 그들이 역사의 주인이었고 게임의 승리자였을지 모르나, 운이라는 대리인을 내려 보낸 신이 언제까지고 그들의 편을 들어주진 않을 거다. 인생이 좋은 쪽으로 계속될수록 어두워질 크리스의 표정을 보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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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래된 리뷰] <말죽거리 잔혹사>


검증이 안 된 신세대 스타를 앞세운 유하 감독의 차기작은 어땠을까? 주연뿐만 아니라 조연도 대부분 신인을 벗어나지 못했다. 감독의 의도일까? ⓒ싸이더스



2004년 당시 데뷔 3년이 채 안 된 두 신세대 스타를 앞세운 영화가 개봉한다. 영화 <동갑내기 과외하기>와 드라마 <천국의 계단>으로 최고의 주가를 올리고 있던 권상우, 여고 시절 KBS 도전 골든벨 출연 후 단번에 CF를 찍고 드라마 주연을 꿰차며 스타 반열에 오른 한가인이 그들이었다. 거기에 90년대 후반 패션모델로 데뷔한 후 연기자의 길을 꾸준히 걸으며 여러 드라마와 영화에서 얼굴을 보인 이정진이 주연의 중심을 잡았다. 지금의 기준으로 보면 상당히 파격적인 캐스팅이라 하겠다. 


조연의 면면도 비슷했다. 나름 잔뼈가 굵은 김인권을 제외하고는 이종혁, 박효준 등 경력은 물론 인지도에서도 거의 신인과 다름 없었다. 지금은 충무로 대세 배우 중 한 명인 조진웅은 이 영화에서 대사 한마디를 날리며 화려하게 데뷔(?)했다. 감독의 의도였을까, 제작비 등의 어쩔 수 없는 선택이었을까. 


주연, 조연 할 것 없이 화려하기 그지 없는 현재의 영화 캐스팅 수준과 비교를 해서 그렇게 느끼는 것일 수도 있겠지만, 경력을 떠나 인기나 연기 면에서 이 영화처럼 확실한 인지도 없는 이들이 대부분인 경우가 있었나 싶을 정도다. 독립영화라면 모를까 엄연한 상업영화에서 말이다. 


곤혹스러울 정도의 연기가 아쉽다


보는 사람으로 하여금 곤혹스러움을 느끼게 하는 두 주연배우의 연기는, 시간이 지나서 다시 보니 영화의 즐거움을 배가시킨다. 하지만 당시엔 얼마나 힘들었을까. ⓒ싸이더스



<결혼은 미친 짓이다>로 오랜만에 충무로에 돌아와 괜찮은 흥행과 비평에 성공한 유하 감독은 차기작으로 학교, 추억, 폭력의 앙상블 영화를 기획한다. 거리 3부작의 시작이기도 한 <말죽거리 잔혹사>다. 유하 감독은 학창 시절 경험을 바탕으로 시나리오를 썼다고 하는데, '남자'라면 누구나 꿈꿔봤음직한 그때 그 시절을 깔끔하게 보여준다. 


전남 보성에서 강남 말죽거리로 이사온 모범생 현수(권상우 분), 태권도장을 하는 아버지의 폭압적인 가르침 덕분에 공부도 곧잘하고 달리기나 농구도 곧잘하는 평범하지만 여러 모로 평균 이상의 학생이다. 그 덕분인지 학년 전체를 주름잡는 싸움꾼 우식(이정진 분)의 눈에 띄어 친구가 된다. 


그는 오지랍이 넓은 건지 태권도 정신에서 비롯된 정의감이 투철한 건지 생각이 없는 건지 나서지 말았으면 하는 데에 나서서 일을 자초하곤 한다. 그 와중에 천눈에 반한 은주(한가인 분)를 구해주려다가 일 아닌 일에 휘말리기도 한다. 그녀를 향한 사랑은 현수뿐만 아니라 우식이에게도 있었다. 결국 사귀게 된 건 우식과 은주, 소심하기만 한 현수는 주위를 맴돌기만 할 뿐이다.  


10년이 훌쩍 지난 작품이고, 신인들을 내세웠다지만, 아무리 봐도 형편 없는 연기는 웃음만 자아낼 뿐이다. 그 중심에는 현수와 은주, 즉 권상우와 한가인이 있다. 현수는 후반에서의 싸움 시작과 끝에서만 톤이 올라갈 뿐 시종일관 힘 없고 우울한 톤을 한 음으로 유지하고, 은주는 처음부터 끝까지 역시 힘 없고 우울한 톤을 한 음으로 유지한다. 여기서 질문을 던지지 않을 수 없다. 이건 의도된 연기인가?


70년대 후반을 배경으로 한 만큼 목소리에 있어서 당시의 느낌을 살리려 했을 지도 모른다. 당시 영화들을 보면 굉장히 연극톤이지 않은가. 그런 걸 의도한 것일까. 그렇다고 보기엔 다른 이들의 연기는 너무 다르다. 지극히 현대적이다. 이 두 주연배우의 연기, 특히 연기에서 굉장히 중요한 요소인 발성이 터무니 없이 형편없다는 걸 알 수 있다. 영화에는 이 둘만 등장하는 장면이 꽤 있는데, 이상하게 그 장면에서는 어색하기 짝이 없다. 눈과 귀를 둘 곳이 없다. 그들도 곤혹스러워하는 게 느껴질 정도다. 감독은 왜 그런 연기를 그 정도로 넘어갔을까. 의문이다. 


이런 식의 교육은 폭력 이상의 악질이다


교육이 아닌 교화를 하는 학교. 모든 학생이 똑같을 순 없는데, 똑같으라고 강요하는 학교. 지금도 여전할까? 그때는 참으로 잔혹했다. ⓒ싸이더스



영화는 현수의 성장 스토리로 읽힐 수 있다. 평범한 학생이 일진을 모조리 깨부수고 퇴학까지 당하는 처지가 되니까 말이다. 이게 도대체 왜 성장이냐고 의문을 가질 만하다. 학교폭력을 미화하는 게 아니냐고 되받아칠 만하다. 하지만 당시 시대를 본다면, 당시 국가상을 들여다본다면, 그들이 어떻게 학생들을 통제했는지 듣는다면, 현수의 그와 같은 행동을 성장으로 해석할 수 있음에 충분히 동의할 수 있을 것이다. 


때는 1978년, 박정희의 친위 쿠데타 이후의 유신 시대 한복판이다. 학생들은 등교하면서 선도부에게 '충성'을 외치고, 학교에는 학생 교화를 이유로 군인이 상주했다. 학생들에게 국가에 대한 충성을 요구하며, 국가가, 학교가 원하는 인간이 되길 바랐다. 그렇지 않을 때엔 가차 없는 폭력이 날아왔다. 


그 폭력에는 육체적 폭력, 정신적 폭력, 성적 폭력, 언어 폭력, 인권 유린 폭력 등 모든 종류가 망라되어 있었다. 차라리 단순무식한 육체적 폭력이 가장 낮은 수위의 폭력으로 생각될 정도였다. 그 나이 또래라면 누구나 한 번쯤 해봤음직한, 해보고 싶음직한 행동을, 학교에서는 상상을 초월할 정도의 폭력으로 교화시키려는 것이었다. 


엇나가는 게 당연한 거라 생각할지 모른다. 그걸 당연하다고 생각하면 현수의 성장 스토리는 더 이상 성장이 아니게 된다. 하지만 그와 같은 엇나감은 당연한 게 아니었다. 그런 폭력을 당하는데 당연히 움츠려들며 더욱더 국가가, 학교가 원하는 사람이 되려하는 게 정상 아니겠는가. 대부분의 아이들이 그런 인간이 되어 갔다. 어떤 인간으로 되어 갔든 그들의 잘못도 그들의 자발적인 선택도 아니었다는 게 중요하다. 


반면 현수는 최소한 자발적인 선택을 했다. 반항심과 함께 체력을 키워 가며 반발했다. 그렇다고 그가 돌이킬 수 없는 짓을 저지른 것도 아니었다. 그저 싸움에 휘말렸고 약간의 다툼을 했다. 그리고 성적이 떨어졌다. 학교는 그를 잡아주려 하지 않았다. 그저 '악질'이라고 몰아세울 뿐이었다. 그가 퇴학을 당하는 대형 사건을 저지른 건, 다른 누구도 아닌 학교의 책임이 아닌가. 최소한 '너의 미래를 위해서는, 그렇게 하면 안 된다'라는 제스추어는 취해야 하지 않겠는가. 무조건 '이거 악질이네. 안 되겠어. 혼 좀 나야겠다' 하고 끝나면 그게 무슨 교육인가. 


잔혹의 시대를 살아간 청춘을 위로하다


한 시대가 저무는 1978~9년. 그들이 헤쳐온 잔혹의 시대도 저무는가. 이 영화는 그 시대를 살아간 모든 청춘을 위로해준다. 하지만 그 상처는 쉬이 아물지 않을 듯하다. ⓒ싸이더스



영화는 이소룡으로 시작해 이소룡 대 성룡으로 끝난다. 무슨 말인고 하면, 영화의 시작이 이소룡 영화를 좋아해 빠져들듯 보는 현수의 어린 시절이었고, 영화의 끝이 영화관에 이소룡 영화와 성룡 영화가 동시에 걸렸을 때 현수의 이소룡 옹호와 흉내, 그리고 친구 햄버거의 성룡 옹호와 흉내가 대결하는 장면이었다. 


성룡이 본격적으로 이름을 알린 게 영화 <취권>이었는데 1978년에 나와 우리나라에는 1979년에 들어 왔다. <말죽거리 잔혹사>의 배경이 되는 1978~9년과 정확히 일치하는데, 그때까지도 아직 이소룡의 인기가 훨씬 우위에 있었다. 그렇지만 곧 성룡의 전성 시대가 열리는 바, 한 시대가 저물고 새로운 시대가 떠오른다는 말이겠다. 


박정희 유신시대도 1979년에 비극적으로 종말을 고하는 것과 궤를 같이 한다. 또한 그건 곧 현수와 친구들의 '말죽거리 잔혹사'도 비로소 끝났다는 게 아닐까. 한 시대가 저물고 새 시대가 열리는 건 시원섭섭하고 슬프고 흥분되고 기대되는 일이다. 하지만 어떤 건 그렇고 어떤 건 그렇지 않을 테다. 


이소룡의 시대가 저물고 성룡의 시대가 오는 건 그럴 테지만, 그들의 잔혹의 시대가 가는 건 조금은 다른 차원이다. 평생 다시 오지 않을, 사랑과 우정과 청춘의 학창 시절을 자기 손으로 지워버릴 수밖에 없었던 그들의 찢어진 마음을 보상해줄 이가 어디 있겠는가. 그들을 이해조차 하지 않을 이들이 대부분이 아닐까. 영화는 그런 시대를 살아간 모든 청춘들을 위해 나름의 방식으로 위로하는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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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래된 리뷰] <인정사정 볼 것 없다>


20세기를 마감하는 1999년, 한국 영화계에는 <쉬리>라는 괴물이 출현한다. 그 위상이 너무 압도적이라 다른 영화들은 보이지 않는다. 이 영화 <인정사정 볼 것 없다> 정도가 대항할 수 있을까? ⓒ시네마서비스



1999년은 한국영화계에서 가장 중요한 한 해이다. 한국영화 부흥의 분기점이라고 할 수 있겠다. 다름 아닌 <쉬리>의 출현 때문이다. '한국형 블록버스터'라는 신조어를 낳은 이 영화는, 30억 원이라는 당대 평균 영화제작비를 훨씬 상회하는 제작비부터 화제를 불러 일으키더니 서울 245만 명, 전국 620만 명을 동원해 한국영화사 최고의 흥행작으로 등극했다. 한국에서 영화를 전략적으로 접근해 성공한 첫 사례라 하겠다. 이후 한국영화는 급성장을 거듭했다. 1999년은 '한국영화 르네상스'의 시작이다.


이밖에 세기말 1999년을 수놓은 한국영화는 어떤 게 있을까. <주유소 습격사건> <해피 엔드> <여고괴담 2> <내 마음의 풍금> <태양은 없다> <간첩 리철진> 등, 의외로 크나큰 족적을 남긴 영화는 없는 것 같다. <쉬리>의 위상이 너무 압도적이라 상대적으로 작게 보이는 것이리라. 그 와중에 <쉬리>와 쌍벽을 이루는, 아니 영화 자체만 보자면 훨씬 능가하는 영화가 하나 존재한다. 헐리우드 영화 <식스 센스>도 아니고, <매트릭스> 도 아니다. 이명세 감독의 <인정사정 볼 것 없다>가 그 주인공이다. 


장면 하나하나에 쏟아부은 인정과 사정


영화는 형사 대 살인범, 지능적이고 날쌘 살인범 대 무식하고 집요한 형사의 대결을 다룬다. 그 대결로 다른 그 어떤 것도 수렴된다. 그렇다면 거기엔 액션과 폭력과 욕지거리가 빠질 수 없을 거다. 아마 모르긴 몰라도 코믹적인 요소도 있을 거고. 으레 형사물 영화가 그래왔으니까. 


그런데 <인정사정 볼 것 없다>는 제목과 다르게 장면 하나하나에 인정과 사정을 엄청나게 쏟아부었다. 아닌가. 인정사정 볼 것 없이 쏟아부은 건가. 흑백톤에서 보여주는 형사들의 무식한 때려잡기, 차분하고 묘묘한 배경에서 보여주는 살인범의 아름답기까지 한 살인 장면. 이 둘의 아이러니한 대조가 영화의 시작을 알린다. 이미 이 영화의 팬이 되어버린 기분이다. 


영화는 시작부터 장면 하나하나에 엄청난 공력을 쏟아붓는다. 스토리와 메시지는 확고하고 미장셴은 화려하고 실험적이고 엄청나다. ⓒ시네마서비스



마약상을 살해하고 도주한 장성민(안성기 분). 우 형사(박중훈 분)와 김 형사(장동건 분)을 비롯한 강력계 형사들은 장성민을 비롯해 살인 현장에서 장성민과 함께 있었을 것으로 추정되는 이들을 끈질기게 추적해 한 놈씩 잡아들인다. 그렇게 실마리를 잡아 장성민과 맞딱뜨리지만 번번히 놓치고 만다. 어느덧 사건이 발생한 지 70일이 넘어가고 그들은 다시 한 번 장성민과 맞딱뜨린다. 과연 그들은 장성민을 잡을 수 있을까?


모든 장면에서 찾을 수 있는 영화적 미학 '미장셴'


<인정사정 볼 것 없다>의 영화적 미학은 스토리에 있지 않다. 장면마다 수없이 다양한 미장셴이 수놓아져 있다. 살인 장면에도, 액션 장면에도, 추격 장면에도, 면 대 면 장면에도. 거기에서 미학을 찾을 수 있다. 아니, 찾지 않아도 느낄 수 있을 것이다. 이 장면 장면을 완벽하게 보여주기 위해 마련된 시나리오 또한 완벽하다 하겠다. 


영화는 완벽한 계산으로 만들어진 장면 안에서 극사실주의를 표방한다. 정적인 미장셴의 극치를 보여주는 김지운 감독 영화에 비해, 이 영화는 슬로우모션으로 동적이면서도 정적인 미장셴을 보여준다. 만들어 놓고 카메라로 찍은 게 아니라, 카메라로 찍으며 만든 것이다. 


그러며 종종 우스꽝스럽기까지 한 극화된 장면을 넣어 예술로의 영역까지 확장한다. 그림자로만 액션을 표현하기도 하고, '우당탕탕' 슬랩스틱으로 액션을 표현하기도 한다. 그림자극, 코미디극에 대한 존경의 표시이자 오마주일지 모르겠다. 그런 장면들이 치밀한 계산 하에 만들어졌다는 게 놀랍다. '그렇게는 일부러라도 못하겠다'는 말이 있는데, 이런 류의 장면을 일부러 만들기는 정말 어렵지 않을까 싶다. 


완벽한 계산으로 만들어진 장면, 그 안에 극사실주의를 넣는다. 상반된 두 영역을 하나로 합치는 어마어마한 능력을 선보이는 것이다. ⓒ시네마서비스



무식하게 집요하게 악당을 추격하지만 번번히 놓치고 마는 형사, 데이빗 핀처 감독의 <세븐>에서 요리조리 잘도 도망가는 살인범과 어설프게 뒤쫓다가 외려 다치고 마는 형사의 모습과 겹친다. 진중하고 으스스한 <세븐>의 분위기에 슬랩스틱을 연상시키는 형사의 추격이 실소를 불러일으켜 조금은 어울리지 않았다면, <인정사정 볼 것 없다>에서의 형사의 조금은 어설픈 듯한 추격은 제 몸에 맞은 듯 완벽했다. '잡힐 듯이 잡힐 듯이 잡히지 않는' '보일 듯이 보일 듯이 보이지 않는'이라고나 할까. 그렇지만 어떻게든 잡아야 형사 아니겠는가. 


영화에는 김 형사 대 장성민, 우 형사 대 장성민의 면 대 면 대결이 나오는데, 이 장면 또한 길이남을 일품이다. 앞엣것은 카메라의 위치가 면 대 면의 긴장감을 극도로 높여주었고, 뒤엣것은 그들의 만남 자체에서 풍겨져 나오는 아우라가 엄청났다. 배경 음악이 크게 일조했는데, 특히 뒤엣것에서 흘러나오는 비지스의 '홀리데이'는 이 장면을 예술의 영역으로 끌어올리는 데 결정적 역할을 했다. 한국영화사에 길이 남을 명장면이다. 한편 우 형사와 장성민은 중간에 한 번 더 맞딱뜨리는데, 복잡하기 그지 없는 산동네에서의 추격전이다. 요리조리 왔다갔다 하며 숨바꼭질 하는 것처럼 보이는 이들의 행동이 재미있으면서도 스릴감 넘친다. 


'무조건 잡아야 형사다'류의 독보적 존재감


아무래도 영화는 90년대 한국영화를 완전히 벗어나진 못했었던 듯하다. 전체적으로 풍겨나오는 이미지가 21세기 현대의 그것과는 거리가 멀다. 작년에 개봉해 기록적인 흥행을 한 바 있는 <베테랑>에서 <인정사정 볼 것 없다>의 장면들이 많이 오버랩 되는 건 그 때문이겠다. <베테랑>은 다분히 고전적인 액션과 스토리의 조합이었다. 지극히 현대적인 액션과 스토리에 지친 관객들에게 완벽히 먹여들었던 예다. 


영화를 끌고 가는 하나의 명제, '무조건 잡아야 형사다'. 우형사는 그 명제를 쫓기 위해 다른 어떤 것도 관심이 없다. 이 영화가 독보적인 존재감을 내보이는 데 절대적인 공헌을 한다. ⓒ시네마서비스



영화의 미학이 살인범을 비롯한 악당과의 액션에 집중되어 있던 반면, 스토리의 축은 형사들의 뚝심에 박혀 있다. '무조건 잡아야 형사다'라는 구호 아래 살인범을 잡기 위해 막무가내로 들이대는 것이다. <투캅스>류의 형사 느낌에서 크게 나아가진 못한 것 같지만, 그것을 표현해 내는 감독의 역량이 크게 진일보 했기에 느끼는 바는 천지차이다. 90년대와 이후 세대를 이어주는 교량 역할을 하는 영화라고 볼 수도 있겠지만, 이른바 '독보적인' 존재감을 발발하는 영화라고 보는 게 맞겠다. 


이명세 감독은 2000년대 중반에 강동원과 함께 <형사 Duelist> <M>으로 새로운 미장셴을 선보이려 하지만 흥행과 비평 모두에서 처참하게 무너지고 만다. 강동원에게도 역시 흑역사로 남아 있다. 이후 이명세 감독은 예전의 기량을 회복하지 못하고 있다. 그의 미학을, 그의 디테일을 다시 한 번 제대로 접하는 날이 있기를 기대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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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래된 리뷰] 유하 감독의 <비열한 거리>


문인 출신을 대표하는 유하 감독, 그를 대표하는 '거리 3부작', 그 중에서도 대표격인 <비열한 거리>다. ⓒCJ엔터테인먼트



거장 이창동 감독과 함께 한국 영화판의 대표적 문인 출신 감독으로 유명한 유하 감독. 1988년에 등단해 90년대 초 문명을 날렸다. 시집 <바람 부는 날이면 압구정에 가야 한다>가 평단으로부터 주목을 받고 대중으로부터 인기를 얻었다. 베스트셀러가 되니, 영화 제작 제의가 들어 왔다. 이미 1990년에 영화 감독으로 데뷔한 그는, 거액의 판권 계약을 거절하고 직접 연출에 이른다. 잘못된 선택이었을까. 이후 10여 년 동안 그는 영화를 만들지 못했다. 


10여 년 만에 들고 온 <결혼은 미친 짓이다>는 수작이었다. 새천년을 시작하는 시점에서 제목부터 센세이션했다. 동명의 소설을 영화화한 이 작품은, 지금은 고유명사를 넘어 보통명사가 되었다. 이후 3년 만에 기대를 안고 찾아 온 <말죽거리 잔혹사>. 이 작품으로 '유하'라는 이름이 고유명사가 되었다. 10년 간 이어질 '거리 3부작' 혹은 '강남 3부작'의 시작이다. 


이 3부작 중 2번째 작품이자 유하 감독의 대표작, '유하'를 보통명사로 만들어 줄 작품은 <비열한 거리>다. 세계 영화사에 길이 남을 명작인 마틴 스콜세지 감독의 <비열한 거리>와 같은 제목이다. 한국 느와르에서도 길이 남을 만하니, 그 제목에 큰 누를 끼치진 않을 듯하다. 


완벽한 시나리오, 헤어나올 수 없는 개미지옥으로


가장 먼저 시나리오를 언급하지 않을 수 없다. 벼르고 벼른 듯한 완벽한 시나리오 그리고 편집이다. 영화의 처음부터 끝까지 빈틈 없이 꽉 짜여 있다. 주인공이 그렇게 될 수밖에 없었다는 느낌이 강하게 들게 만든다. 선택의 여지는 없었을까? 어딜 봐도 찾기 힘들다. 그는 그런 선택을 할 수밖에 없었다. 신의 기계적 출현을 의미하는 '데우스 엑스 마키나'를 철저히 배제했다. 


'비열'하기 짝이 없는 판에서 '순수'한 영혼의 병두. 그는 식구들을 건사하기 위해 돌이킬 수 없는 길을 건넌다. 그를 낚는 황 회장. ⓒCJ엔터테인먼트



병두(조인성 분)는 여러 동생들을 건사하는 건달이다. 스폰서를 잘못 만나 허송세월 보낸 것도 모자라 빈털털이가 되었다. 그래도 식구들을 건사하고 동생들을 챙겨야 하기에, 돈 찾아와서 형님께 바치고 일정 부분을 받고 성인 오락실을 운영하며 어떻게든 살아가려 한다. 그런데 그것도 쉽지 않다. 형님은 돈을 적게 나눠 주고, 성인 오락실도 라이벌 조직에게 박살났다. 결국 그 때문에 후배한테 성인 오락실이 넘어가기도 했다.  

뭐든 했다고 생각하는 병두. 실상은 조직의 보스이지만 겉으론 엄연히 사업가인 황 회장은 끝없이 자신을 괴롭히는 박 검사 때문에 두 발 뻗고 살 수가 없다. 그를 '보고' 싶다. 그런데 최측근이자 병두의 형님인 상철이 못한댄다. 그 기회를 잡은 병두, 박 검사를 죽이면 황 회장이 스폰서를 서주고, 그는 다시금 메인이 되며, 식구들을 건사할 수 있다. 그는 돌이킬 수 없는 짓을 저지르고, 그의 인생은 그야말로 헤어나올 수 없는 개미지옥으로 빨려 들어간다. 


빛나는 폭력성, 비열하지만 순수한 이들


영화는 조직폭력배의 실상을 통해 극대화된 폭력성을 선보인다. 병두로 하여금 돌이킬 수 없는 짓을 저지르게 한, 극도로 사실적인 조폭들끼리의 싸움신이 초반에 펼쳐진다. 여러 조폭 영화들에서 봐 왔던, '준비, 시작' 류의 싸움과는 차원이 다르다. 다짜고짜 덤벼 싸우다가 칼을 꺼내 급소만 피해서 찌르고 베고 찍고. 이게 진짜겠구나 싶다. <죽거나 혹은 나쁘거나>의 섬뜩한 싸움신에 버금가는, 폭력성이 빛나는 명장면이다. 


또다른 장면은, 병두가 살인을 저지르는 장면이다. 여기에는 복잡한 감정이 소용돌이 친다. 폭력성 이상의 '욕망'이, 헤어나올 수 없는 욕망의 시작과 현재와 미래를 보여준다. 그가 조폭이 아니었더라도, 그와 같은 짓을 저지를 수 있었을 것이다. 욕망에서 비롯된 행동이니까 말이다. 그 욕망이라는 게 누구나 가지고 있는 거다. 가장 큰 건, 식구들 건사해야겠다는 의지 그리고 위로 더 올라가고 싶다는 본능, 지인들에게 잘 보이고 싶다는 생각 등. 일반 회사원의 욕망과 다를 게 무언가. 


<비열한 거리>는 폭력을 극대화한다. 싸움과 살인을 대표로 내세웠는데, 그 한 가운데에 병두가 있다. 극도의 사실주의에서 오는 소름. '이것이 진짜다.' ⓒCJ엔터테인먼트



그래서 병두는 이 영화에서 가장 비열하지만 가장 순수하다. 아니, 정확히 말하자면 자신이 가장 비열하다고 생각해 속을 끓이지만 사실 가장 순수하다는 것이다. 그에 비하면 황 회장을 비롯해 형님 상철, 친구 민호, 동생 종수 등은 비열하기 짝이 없다. 그 사실을 그만 빼곤 누구나 알고 있으니, 참으로 비극적이기 짝이 없는 캐릭터다. 


감독은 소름끼치는 싸움신과 이들의 비열한 모습을 통해, 이야말로 진짜 조폭의 세계라고 말하고 싶었던 것 같다. 그의 의도는 정확히 적중했다. 내가 죽지 않기 위해 누군가를 죽이는 적자생존, 단순히 내가 더 높이 올라가기 위해 누군가를 죽이는 게 아니다. 어제의 적이 오늘의 동료이자 형제가 되고, 어제의 식구가 오늘의 적이 되어 나를 죽인다. 그런데, 이들은 비열한가? 이들도 병두와 다를 바 없는 것 같은데, 다만 병두보다 조금 덜 순수한 것 같은데, 조금 더 순수한 병두 덕분에 살아남은 것 같은데, 이들도 비열한 건가? 진짜 비열한 건 이들로 하여금 그렇게밖에 할 수 없게 만든 누군가 혹은 운명이라는 헤어나올 수 없는 굴레가 아닌가?


'강남' '거리' '욕망' '폭력' 3부작


<비열한 거리>를 논할 때면, <말죽거리 잔혹사>와 <강남 1970>을 앞뒤로 둔 '거리 3부작' 또는 '강남 3부작'을 언급하지 않을 수 없다. 합쳐서 '강남 거리 3부작'이라고 해야 할까. 잘 들여다보면, '욕망 3부작'이라고 하는 게 맞겠다 싶다. 더 포괄적이고 핵심에 가깝다. 그렇지만 큰 얘기라 미시적으로 접근할 필요가 있다. 박찬욱 감독의 <박쥐>, <스토커>, <아가씨>도 '욕망 3부작'이고, 박범신 소설가의 <촐라체>, <고산자>, <은교>도 '욕망 3부작'이라 칭할 수 있다. 그러니 유하 감독의 3부작은 욕망 중에서도 '폭력'을 말하는 것이니 앞엣것보다는 '폭력 3부작'이라 하는 게 맞겠다. 


우린 여기서 한 개의 '라인'을 발견할 수 있다. '강남'에서 '폭력'으로 이어지는 라인이다. 화려하게 치장된 그곳이 태초에 폭력과 욕망이 서로를 잉태하고 서로를 죽이는, 그야말로 아수라의 지옥이다. 그 정점이 바로 이 <비열한 거리>인 것이다. 


한번 시작하면 돌이킬 수 없다는 걸 안다. 하지만 가야 한다. 가지 않는 것도 돌이킬 수 없기 때문이다. 아수라의 지옥으로 가야만 한다는, 고뇌. ⓒCJ엔터테인먼트



유하 감독의 '폭력 3부작' 앞에는 '청춘'이 따라다닌다. 그렇지만 거기에 '여성'은 없다. 여성은 남성의 전유물 또는 주위 인물로 비춰질 뿐이다. 그러는 한편 폭력의 한 가운데 던져진 남성이 유일하게 안식을 찾을 수 있는 안식처이기도 하다. 여하튼 중심이 될 순 없으니, '폭력 세계'에 발을 들여다 놓지 않게 하려는 의도의 산물일까 아니면 폭력으로 움직이는 이 '인간 세계'의 주변 인물인 걸까. 아무래도 전자가 맞지 않나 싶다. 감독이 그린 폭력 세계는, '폭력' 자체는 보편적일지는 몰라도 '세계'는 특수성을 띠고 있기 때문이다. 


폭력이라는 게, 욕망이라는 게, 반드시 시작이 있다. 누구나 그때가 있다. 그건 한 번 시작되면 돌이킬 수 없는, 헤어나올 수 없는 종류의 것이다. 우린 그렇게 살아간다. 인간이기에, 수위를 조절하면서 내보이지 않으면서 자신과 싸우면서 욕망에 먹히지 않을 수 있다. 그런데, 나도 모르는 새 욕망이 이끄는 대로 가버리면 어떡하지, 정신을 차려보니 돌이킬 수 없는 상황이면 어떡하지, 그것이 내가 어떻게 할 수 없는 운명이면 어떡하지... 순간 치를 떠는 생각을 하게 되는 나를 발견하곤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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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래된 리뷰] 브라이언 싱어의 <작전명 발키리>


1944년 7월 20일에 일어난 20세기 가장 극적인 사건 '히틀러 암살 계획'. <작전명 발키리>는 이 사건을 다루었다. ⓒ이십세기폭스코리아


역사에 '만약'은 있을 수 없다. 설령 미래의 누군가가 타임머신을 타고 와 역사를 바꾼다고 하더라도, 그건 그가 속한 차원에서의 일일 것이다. 모든 차원을 관통하는 역사의 수정은 있을 수 없다. 그럼에도 역사를 보면 '만약'을 생각하지 않을 수 없을 때가 많다. 21세기는 채 20년도 되지 않았으니, 20세기를 한번 보자. 


수많은 위인들이 20세기를 수놓았지만, 그중 단연 으뜸의 위치에 있는 이는 '히틀러'다. 그가 무슨 짓을 했든 그 영향력과 파급 면에서 따라올 자가 없다. 그는 살아생전 15번의 암살 위기를 넘겼다고 한다. 수많은 사람들이 그를 '독일민족을 구할 진정한 지도자'로 생각하는 만큼, '독일민족을 구하기 위해 반드시 사라져야 할 인물'로 생각했다. 그중 단연 유명한 암살 미수 사건은 나치 패망 1년 여 전인 1944년 7월 20일 사건이다. 가장 극적인 사건이기도 했다. 


누구나 알고 있는 이야기, 보고 싶은 이야기로 변모했을까?


반전 영화의 기원격인 <유주얼 서스펙트>와 현대 슈퍼 히어로 영화의 시초격인 <엑스맨>을 연출한 브라이언 싱어의 <작전명 발키리>는 다름 아닌 이 사건을 그린다. 사건 이름만 봐도 결과를 알 수 있는 이 사건을, 반전 영화의 대부가 왜 살려낸 것일까. 영화 외적으로 나치 독일의 만행을 간접적으로 알리고 싶었을까, 영화 내적으로 사건에서 끄집어낼 수 있는 극적인 요소가 훌륭하다고 판단해서 였을까. 둘 다일까. 


영화는 실제 인물의 행적으로 고스란히 추적한다. 먼저 반나치주의자들의 히틀러 암살 미수 사건을 맛보기로 보여준다. 긴박감 넘치는 액션은 없고 인물들 간의 숨막히는 고요와 어설픈 심리 게임이 주를 이룬다. 과연 본 사건으로 넘어가서는 긴박감이 추가될지? 이대로 숨막히는 고요와 어설픈 심리 게임만 계속된다면 조금은 실망이다. 


브라이언 싱어는 누구나 알고 있을 만한 사건인 '작전명 발키리'를 왜 영화로 살려냈을까? 과연 보고 싶은 이야기로 훌륭하게 살려냈을까? ⓒ이십세기폭스코리아



슈타펜베르크 대령은 북아프리카 전선에서 활약 중이다. 그런데 나치스 SS 친위대들의 만행을 전해 듣고 치를 떨며 '반나치'의 길을 걷고자 다짐한다. 얼마 뒤, 영국군의 기습 공격으로 부상을 당해 왼쪽 눈과 오른손 전체, 왼쪽 손가락 두 개를 잃고 본국으로 귀환한다. 요양 후 히틀러 제거 계획 모임에 가담하며 베를린 국방군 본부에 예비군 참모장으로 임명된다. 이후 어떤 고뇌도 없이 오직 히틀러 제거를 위해 내달린다. 


영화는 충분히 보여줄 만한 요소인 슈타펜베르크의 고뇌를 과감히 삭제한다. 또한 히틀러와 나치가 무슨 짓을 했는지, 히틀러 제거를 위한 반나치 세력이 누군지, 슈타펜베르크가 어떤 사람인지 일절 알려주지 않는다. 오로지 독일의 현 상태와 그에 따른 히틀러 제거 계획만이 영화의 대상이다. 누구나 알고 있고 또 오래된 이야기이기에 굉장히 지루할 것만 같은 소재는, 굉장히 서스펜스 넘치고 보고 싶은 이야기로 변모한다. 감독의 역량일 것이다. 동시에 그에 부흥할지 기대를 갖고 임하게 된다. 박진감이나 숨막힘 등의 서스펜스에 온 신경을 집중할 수밖에 없다. 일단 그쪽으로 집중하게 하는 데는 성공한 것 같다. 


결정적 순간에 꺼져버린 서스펜스


다양한 논의 끝에 나온 '발키리 작전'. 이는 연합군의 폭격이나 예기치 못한 일로 혼란스러운 상황이 발생했을 시 각 지역 국방군 본부에 있는 예비군을 출동시켜 사태를 수습하게 하는 계획이었다. 반나치 세력의 좋은 수단이 된 이 작전을 히틀러가 직접 승인하고, 이들은 히틀러를 암살한 후 이 작전을 발동하여 쿠데타를 일으키는 계획을 세웠다. 최종 목적은 전군을 장악하고 연합군에 휴전을 선언하는 것이었다. 


여기서 핵심은 단연 히틀러 암살인데, 슈타우펜베르크가 히틀러에게 직접 브리핑할 수 있는 요직에 임명되었기에 직접 처리하기로 마음 먹고 실행에 옮긴다. 그의 불구된 몸도 한 몫을 했을 것이다. 아무래도 덜 경계하게 되니까 말이다. 그는 전시 최고회의를 기회로 서류 가방으로 위장한 시한 폭탄을 들고 회의장으로 향한다. 거사는 1944년 7월 20일에 감행된다. 성공적인 폭발을 두 눈으로 확인한 슈타우펜베르크는 베를린에 다음 단계로의 이행을 지시한다. 속전속결, 베를린은 예비군을 효율적으로 이용한 반나치 세력의 수중에 떨어지는 것처럼 보인다. 


브라이언 싱어가 이 사건을 영화로 살려내며 '영화적 재미'에 충실했을 텐데, 가장 극적인 사건의 가장 극적인 순간에 제대로 충실하지 못했다. ⓒ이십세기폭스코리아



오랫동안 준비해 실행에 옮기는 히틀러 암살 계획은 순조롭게 진행된다. 문제는 영화의 사실상 거의 전부나 마찬가지거니와 최고의 하이라이트인 그 장면이 너무나도 허무하게 끝나버린다는 점이다. 약간의 박진감과 숨막힘이 있었을 뿐, 기대를 상회하는 서스펜스는 찾아보기 힘들었다. 오히려 그의 소식을 기다리는 베를린의 반나치 세력의 초조함이 더 와닿았을 정도이다. 하지만 그게 이 영화를 떠받치는 서스펜스는 아니었을 거다. 그 장면에서 보여줬어야 했다. 


'왜'가 삭제되고 '어떻게'만 남아 있는 상황에서 막상 '어떻게'의 실행이 아쉬운 상황이라니, 난감하다 아니할 수 없다. 처음부터 끝까지 철저히 실화를 바탕으로 구성했기 때문에 일어난 불상사라고 할까. 가타부타 설명 없이 내달리는 어조를 그 장면에서 만큼은 좀 지양했어야 하지 않았나 하는 아쉬움이 짙게 남는다. 전체적으론 더할 나위 없었는데. 


'왜'를 과감히 생략했지만, '어떻게'가 충족되지 못했다


익히 알려진 만큼 스포일러도 존재하지 않는다. 히틀러 암살을 확신한 슈타우펜베르크는 반나치 세력과 속전속결로 쿠데타를 감행한다. 하지만 반나절도 지나지 않아 전세는 역전된다. 히틀러가 죽지 않고 살아 있다는 게 아닌가! 결국 김옥균의 삼일천하만도 못한 반나절천하로 막을 내리고, 관련자들은 자살을 강요당하고 처형 당한다. 영화는 그렇게 끝난다. 


슈타우펜베르크를, 반나치 세력을 어떤 시각으로 바라봐야 하는지, 잘 알지 못하겠다. 독일에서는 제2차 세계대전이 끝난 후 반나치 운동의 대표 인물로 존경을 받게 되었다. 기념비, 거리, 추모관 등으로 그들을 기리고, 영화나 다큐멘터리도 제작되었다. 하지만 독일인이 아닌 입장에서 보면 선뜻 경의를 표시하기가 힘들다. 애매하다. 


'왜' 나치는 나치이고 반나치는 반나치인지 제대로 설명하지 않았다. '어떻게'에 심혈을 기울이며 영화적 재미를 극도로 끌어올리기 위함이었을 것이다. 하지만, 성공하지 못했다. ⓒ이십세기폭스코리아



이 영화를 본 이유가 그들의 위대한 작전에 '경의'를 표하기 위함이 아니라, 그들의 '흥미롭고 극적인 작전'을 재밌게 감상하며 아울러 20세기 중요한 역사의 한 장면을 새기고 싶었기 때문에 더욱 그러하다. 얻고자 하는 걸 얻지 못하니, 엄한 다른 곳으로 시선이 쏠리는 듯한 기분이 드는 것이다. '어떻게'가 충족되지 못하니 '왜'라도 알아야겠다는 언잖은 기분이랄까. 그 '왜'조차 별로다. 그럼에도 그런 생각을 하고 실행에 옮겼다는 것 자체에 충분히 위대함이 있다. 대의를 위해 자신 한 몸을 던진 게 아닌가. 그런 이들의 이야기는 언제나 가슴을 친다. 


물론 아닌 것도 있다. 얼마 전 개봉한 감독판으로 다시 찾아온 <인천상륙작전>을 보자. <작전명 발키리>와 상당히 유사한 모양새다. 하지만 영화 만듦새만 가지고도 한나절을 떠들 수 있을 만큼 형편 없다. 같은 '애국 영화'이자 '첩보 영화'인데, <인천상륙작전>은 <작전명 발키리> 정도의 스릴과 서스펜스도 갖추고 있지 못하다. 오로지 밑도 끝도 없는 애국이다. <작전명 발키리>는 애국을 외쳐대지 않고 영화 내적으로 승부를 봤지만, 그들이 말하고자 하는 애국이 충분히 드러난다. 왜 독일의 역사는 그렇게 그려질 수 있고, 우리 역사는 그려질 수 없는가. 안타깝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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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래된 리뷰] <낮술>


술로 시작해 술로 끝나는 영화 <낮술>. 여러 모로 보는 이의 혼을 빼놓는다. 때론 너무 웃겨서, 때론 너무 답답해서, 때론 너무 불쌍해서, 때론 너무 나 같아서. ⓒ영화사 진진



실연당하고 실의에 빠져 있는 혁진을 위로 하기 위해 친구들이 뭉쳤다. 의미 없는 말이 오가고 혁진은 여전히 실의에 빠져 있다. 기상이가 제안을 하나 한다. 내일 당장 강원도 정선으로 여행을 떠나자는 것. 아는 형이 폔션을 하고 있으니 몸만 가면 된다는 것. 마침 장날이기도 하단다. 폔션 잡고 놀다가 강릉 해수욕장에 가서 겨울바다를 마주하며 컵라면에 소주 한잔 들이키자는 것. 술김에 생각할 것도 없이 모두 승낙한다. 


혁진은 홀로 정선에 도착한다. 그런데 약속 시간이 지나도 친구들은 오지 않았다. 장은 어제 끝났다고 한다. 혁진은 점심을 먹는다. 기상한테 전화가 왔는데 서울이란다. 갑자기 일이 생겨서 내일모레나 갈 수 있다고 한다. 혁진은 기상을 욕하며 반주를 한다. 기상이가 계속 전화를 건다. 이왕 거기까지 간 거 폔션에 가서 쉬라고, 내일 모레 가겠다고. 혁진의 모험 아닌 모험이 시작된다. 


술로 시작해서 술로 끝난다


술로 시작해서 술로 끝나는 영화 <낮술>은 <조난자들>의 노영석 감독의 데뷔작이다. 그는 이 두 작품으로 수많은 영화제에 초청되었고 상도 많이 탔다. 비록 두 작품이지만 그만의 확고한 작품 세계를 만들었다는 평을 들었다. 하지만 본격 상업영화가 아닌 독립영화이다 보니 흥행하기가 쉽지 않고 영화를 계속 만들기도 쉽지 않다. 


주인공 혁진은 술을 엄청 좋아하는, 그런 이는 아니다. 다만 술을 거절하지 못할 뿐이다. 그럴 때마다 듣는 소리가 있으니, '술 잘 마시네~'. 그럴 때마다 혁진은 좋아하며 더 마신다. 우리 모든 남자의 자화상. ⓒ영화사 진진



영화는 내가 보아 온 여타 '주류' 독립영화와는 다르다. 독립영화 하면, 가해자와 피해자의 얽히고설킴이 주를 이루며 어떤 식으로든 사회 문제를 건드리곤 한다. <용서받지 못한 자> <똥파리> <파수꾼> <가시꽃> <마돈나> <4등>이 그랬다. <낮술>은 장르부터가 '코미디'이고 '술'이 주요 소재인 만큼 이들과는 멀 수밖에 없을 거다. 


영화에서 술 마시는 장면만 열 장면 이상이다. 장면당 5분씩만 해도 영화의 절반에 해당한다. 거기엔 어김 없이 주인공 혁진이 있는데, 술을 향한 폭주는 아니다. 그는 술을 거절하지 못할 뿐이다. 스스로가, 누군가가 무슨 이유를 대서 술을 권하면 때론 즐겁게 때론 억지로 술을 마신다. 빠지지 않는 말이 있으니 "이야, 술 잘 마시네~" 


정말 찌질하지 않나. 왜 그러고 있는지 이해를 못하겠다. 그런데 혁진에게서 내 모습이 보인다. 나 뿐만이랴? 여러 남자들이 보인다. 대다수이지 않나 싶다. 딱 저 한마디면 된다. 그러면 아마 대다수 남자들은 술을 거절하지 못할 거다. 술 마시는 장면만 나오면 손발이 오그라 들면서, 웃기고 슬프다가, 우울해지고, 술 진탕 마신 것처럼 허탈해진다. 그걸 의도한 거라면 정녕 잘 해냈다. 


홍상수표와는 또 다른 '진리'


남자 입장에서 술이 있는 자리에 여자가 빠질 수 없다. 혁진은 술이라면 거절을 못하는데, 또 여자도 거절 못한다. 혁진은 며칠의 여행 아닌 여행 동안 온갖 처참한 꼴을 당하는데, 온전히 술과 여자 때문이다. 애초에 실연을 당하고 술을 마시다가 술김에 정선에 가게 된 거 아닌가. 또 폔션에서 옆방 여자에게 들이대려다가, 옆방 여자의 유혹에 못 이겨 그리 된 게 아닌가. 


홍상수표 영화인듯 아닌듯, 가장 먼저 홍상수표 영화가 생각나지만 또 다르다. 또 다른 '찌질'의 진리를 보여주는 것이다. ⓒ영화사 진진



술과 여자, 술자리 하면 생각나는 영화가 있다. '홍상수표 영화'. 그의 영화에 빠짐 없이 등장한다. 그의 영화에, 특히 술자리에서 꼭 등장하는 게 있으니, 허세 가득한 술자리 비평들이다. 다 상대방을 꼬시려는 수작이다. 그게 너무 눈에 드러나는데, 그래서 너무 찌질해 온몸이 가려울 정도인데, 너무 나와 똑같아서 무섭기까지 하다. 


반면 <낮술>에는 술자리 비평이 등장하지 않는다. 그저 술을 마실 뿐이다. 고작 하는 얘기가 술에 관한 거다. '술 한잔 하러 가실까요' '술 한잔 쭈욱 들이키시죠' '술 잘 마시네' '주량이 어느 정도세요?' '거국적으로 건배' '원샷입니다' 등. 정녕 아무 의미 없는 말이 오간다. 홍상수표 술자리와는 또 다른, '진리'에 가까운 모습이다. 


'재미'의 향연, 그 뒤엔 여지없이 '술'로 인한 씁쓸함


한편으론 세상 물정 모르는 아이 어른 남자의 로드 무비로도 읽힌다. 생각나는 소설이 하나 있는데, <호밀밭의 파수꾼>이다. 최고의 성장소설 중 하나로, 아이지만 스스로가 어른 같다고 자부하는 홀든 콜필드가 학교를 자퇴하고 집으로 돌아오는 나흘 동안 겪는 각종 사건사고들을 다뤘다. 상상을 초월하는 이들을 만나기도 하는 한편 천사 같은 이들도 만난다. 진정한 천사인 여동생 피비를 만나며 콜필드는 집으로 돌아온다. 


술에 포커스를 맞추지 않고 그저 혁진의 여정에 포커스를 맞춰도 좋다. 일종의 폭소 로드 무비랄까. 그저 재밌고 재밌다. 또 보고 또 봐도 마찬가지. 단, 남자한테만 그럴듯? ⓒ영화사 진진



혁진은 어땠을까. 변태도 만나 당할 뻔하고 호의를 갖은 척 접근한 이들에게 제대로 털리기도 한다. 이상한 말을 해대는 못생긴 여자에게 명확한 거절의 뜻을 내비치니 쌍욕을 해대지 않나, 알고 보니 그 여자가 기상이의 아는 형의 사촌 여동생이라지 않나... 정말 되는 게 하나 없는, 콜필드의 여정 못지 않는 사건사고의 연속이다. 콜필드와 다른 점이 있다면, 콜필드는 집에 돌아가기 싫어 여정을 택한 거고 혁진이는 집으로 돌아가고 싶어 안달이다. 


영화는 아무 생각 없이 봐도 너무 재밌고 생각하며 봐도 역시 너무 재밌다. 박장대소를 치지 않을 수 없는 장면이 몇몇 등장한다. 조금은 예상이 되지만 너무도 천연덕스러운 연기 덕분에 웃음으로 마무리할 수 있다. 그렇지만 웃음 뒤에는 항상 씁쓸함이 묻어난다. 그 앞에 여지 없이 '술'이 있기 때문이다. 


개인적으로 일 년에 한 번은 꼭 술 때문에 인생에 남을 만한 사고를 치곤 한다. 차마 말 할 수 없는 그런 정도로 말이다. 그걸 아주 잘 알고 있으면서도 마치 기다렸다는 듯이 술을 진탕 먹고 사고를 치곤 하는 내 자신이 너무 황당하다. 혁진이도, 아니 술을 마시는 거의 모든 이들이 그러지 않을까 조심스레 예측해본다. 


'겨울바다를 배경으로 컵라면에 소주 한 잔', 생각만 해도 너무너무 환상적이다. 춥긴 너무 추울 텐데, 뜨거운 컵라면에, 속 깊이 지져주는 소주까지. 혁진이 직접 해보고 친구한테 말해줬다. "야, 너무 춥기만 하더라. (너무 추워서 컵라면하고 소주를 먹지 않을 수가 없더라고.)" 그렇다. 술은 항상 핑계가 있다. 핑계는 핑계로만 끝나지 않고 술도 술로만 끝나진 않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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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래된 리뷰] <프라이멀 피어>


전혀 생각지도 못한 결말에서 오는 충격과 쾌감, '반전 영화'. 그 기라성 같은 영화 중에서도 <프라이멀 피어>는 단연 최고급에 든다. ⓒ파라마운트 픽처스



90년대 중반에서 2000년대 초반까지 우후죽순 격으로 쏟아져 나왔던 영화 장르가 있다. 일명 '반전(反轉) 영화'인데, 전혀 생각지도 못한 결말을 선사해주는 경우가 많다. 나도 한때 반전 영화에 빠져 헤어나오지 못할 때가 있었다. 그 충격에서 오는 쾌감 하나를 위해 영화를 보곤 했다.그래서 영화는 기억나지 않고 반전만 기억나는 경우가 허다하다. 


많은 이들이 그런 우를 범했을 텐데, 제대로 된 반전 영화란 반전 자체가 장르가 되어서는 안 되고 영화가 가진 장르 안에 반전이 자연스레 스며들어야 한다. 특성상 공포, 스릴러, 범죄 장르가 많다. 몇몇 완벽한 반전 영화가 생각난다. <유주얼 서스펙트> <세븐> <식스 센스> <파이트 클럽> <메멘토> <디 아더스> <아이덴티티> <데이비드 게일> <쏘우> <맨 프롬 어스> 등. 


2010년대 이후에 생각나는 반전 영화는 거의 없다. 어떤 반전을 선보여도 10년, 20년 전에 나온 영화들의 클리셰가 될 수밖에 없는 운명인 것이다. 전쟁 영화가 거의 만들어지지 않는 이유와 같다. 그렇지만 아쉬워 할 필요는 없다. 지나간 영화들을 보면 되니까, 더불어 그 영화들만 보면 충분하니까. 


법률 영화로도 흠잡을 데 없는 '반전' 영화


이번에 다룰 영화는 1996년작 <프라이멀 피어>다. 엄연히 영화의 한 장르인 '법률 영화'로, 존경받는 카톨릭 대주교 살해 용의자로 지목된 아론 스탬플러(에드워드 노튼 분)를 둘러 싸고 벌어지는 법정 공방을 다뤘다. 최고의 실력을 자랑하는 최악의 범죄 변호사 마틴 베일(리차드 기어 분)과 그의 옛 애인이자 검사 동료였던 자넷 베너블(로라 리니)의 공방이 주를 이룬다. 


살해 현장에서 피해자의 피를 온몸에 도배한 채 도피해 모든 이들이 범인이라고 당연한 듯 지목한 아론, 하지만 그는 한사코 순진하기 그지 없는 얼굴과 행동으로 범행 사실을 부인한다. 그러며 그 자리에 제3자가 있었다는 것이다. 얼마 후 그가 그렇게 말한 이유가 밝혀진다. 그는 '해리성 인격장애(이인증)'를 앓고 있었다. 범인은 아론 자신이 아니라 또 다른 인격인 로이라고 말한다. 법정 공방은 2라운드를 알린다. 


법률 영화로서도 흠잡을 곳이 없다. 하지만 반전에 반전을 '당하고' 보면, 모든 기억이 사라지며 멍해질 뿐이다. ⓒ파라마운트 픽처스



영화는 법률 영화로서 흠잡을 곳이 없다. 검사로 재직하다가 나쁜 짓을 저지르는 걸 참을 수 없어 통칭 사기꾼이라고 알려진 변호사의 길을 가게 되었다는 베일의 고뇌, 그는 꼭 나쁜 놈들만 범죄를 저지르는 건 아니라는 지론을 갖고 있다. 치명적인 아론의 변호도 그렇게 맡게 된 것이다. 그런 한편, 모든 것들이 그가 살인자라는 걸 증명하고 있지만 결정적으로 동기를 찾을 수 없어 원고 측에선 확고한 승리를 장담할 수 없다. 와중에 원고 측에게 치명적이지만, 확실한 동기가 되는 걸 찾게 되는데...


역시 베일과 자넷의 끝없는 설전은 이 법률 영화의 묘미 중 하나다. 나라면 누구의 변호를 하고 있을까, 저 국면을 어떻게 타개할 수 있을까, 누가 이기게 될까 등. 휴정 기간에 오가는 뒷공작도 빼놓지 않는다. 사실 그때 이루어지는 설전과 공작이 진짜 싸움이라는 걸 알 것이다. 영화는 반전에 힘을 쏟는답시고 영화 자체를 허투루 하는 우를 범하진 않는다. 그건 그렇고 반전은 언제쯤? 이인증도 충분히 충격이었는데.


정신병이면 무조건 무죄?


'빌리 밀리건'이라는 사람이 있다. 1970년대 후반, 수많은 범죄를 저질러 체포되기에 이른다. 변호 과정에서 정신 심리 검사를 받았고, 영화에서처럼 해리성 인격장애로 판명된다. 자그마치 24개의 인격을 가지고 있었다는 것. 결국 그는 정신 이상을 이유로 모든 사건에 대해 무죄 판결을 받고 치료에 들어 간다. 10년 후 자유의 몸이 되었다고 한다. 그의 몸이 범죄를 저지른 건 사실이지만, 그의 인격이 범죄를 저지른 건 아니라고 본 것이다. 더불어 그를 죗값을 치러야 할 범죄자 이전에 치료해야 마땅한 환자로 보았다. 


영화는 아무래도 이 유명한 사건에서 영향을 받은 듯, 동일한 양상으로 흘러간다. 정신의학자까지 증인으로 나서서 아론을 환자로 두둔한다. 그렇지만 결코 쉽지 않다. 누가 봐도 믿기 힘들고 설령 믿는다 하더라도 논란의 여지가 너무나도 크기 때문이다. 내 몸이 살인을 저지른 건 맞는데, 범인은 내가 아니고 내 몸에 함께 있는 또 다른 이라는 것이다. 또 다른 '나'가 아니고. 


정신병이 있으면 무조건 무죄일까? 특히 이 영화의 정신병인 '해리성 인격장애'는 인권까지 건드린다. 실제로 무죄 판결을 받은 사례도 있다. 어떤 판결을 내려야 할까. ⓒ파라마운트 픽처스



'유정무죄'라는 신조어가 있다. 정신병이 있으면 무조건 무죄 판결을 받는다는 상황을 비꼰 거다. 최근 들어 여기저기에서 그런 소식들이 들려온다. 하다못해 술을 진탕 마시고 벌인 범죄도 무죄가 되곤 하는데, 그 사례 또한 술 취한 상태는 온전한 정신이 아니라는 판단 하에서 내린 판결이다. 악용될 소지도 충분하거니와, 그럼 정신병에 걸리면 아무렇게나 살아도 된다는 말인지 심히 의문이 간다. 


영화에서는 원고 또한 돌이킬 수 없는 죄를, 그것도 피고에게 행했기 때문에 논란의 파장은 훨씬 커질 수 있다. 어느 누가 완벽한 판정을 내릴 수 있겠냐만은, 이런 경우는 완벽의 근처도 가지 못할 것 같다. 한편, 이토록 완벽한 딜레마를 조성해 놓은 영화의 감독 및 작가에게 찬사를 보낸다. 이 영화의 진정한 반전이 무엇인지 아는가? 바로 이 <프라이멀 피어>가 할리우드 대표 연기파 배우 '에드워드 노튼'의 데뷔작이라는 사실이다. 다시 한 번 에드워드 노튼을 데뷔시킨 감독 및 작가에게 찬사를 보낸다. 


완벽한 장르 영화이자 반전 영화, 이런 영화 또 나올까?


'한 편의 잘 짜인 영화를 본 것 같다'는 말을 종종 한다. 다름 아닌 이 영화를 두고 한 말이 아닌가 싶을 만큼 잘 만들어진 영화다. 반전 영화라는 걸 공시한 이상, 마지막 5분까지도 긴장을 느춰선 안 된다는 걸 알려드린다. 하지만 영화에 푹 빠져 있다 보면 자연스레 긴장이 풀리는 순간이 올 테다. 영화는 바로 그때를 놓치지 않는다. 


세월이 흘러도 또 찾는 반전 영화는 드물다. 개인적으로 반전 자체는 최고지만 한 번 보고 다시 찾지 않는 영화가 있다. <식스 센스> <디 아워스> <아이덴티티> 같은 류, 반전을 위한 반전 영화라 하겠다. 영화 전체가 오직 반전을 향해 달려간다. <유주얼 서스펙트> <맨 프롬 어스>도 그런 종류지만, 이야기 자체가 너무 재미있다. <세븐> <파이트 클럽> <데이비드 게일> 그리고 <프라이멀 피어>는 반전을 빼고 영화 자체를 즐겨도 하나의 완벽한 장르 영화로 손색이 없다. 보고 또 보게 되는 영화들이다. 


반전을 생각하지 않고 그저 영화를 즐겨도, 충분하다. 충분히 완벽하다. 그래도 계속 기다린다, 반전을. 반전 영화를. ⓒ파라마운트 픽처스



이런 류의 영화, 완벽한 장르 영화이자 그 모든 걸 뒤엎고도 남을 충격적인 반전을 아주 기묘한 타이밍에 선사하는 영화를 다시 볼 수 있을까. 많은 이들이 사랑하기 때문에 계속 만들어질 거다. 하지만 그만큼 눈이 높아졌기에 기대를 충족시킬지는 의문이다. 그러다 보니 주류에서 상당히 밀려난 느낌이다. 나온다 해도 마니아적인 냄새가 물씬 풍기는 영화가 나올 것이다. 


안타깝지만 기다려야 할 것 같다. 역사가 돌고 도는 것처럼 영화도 돌고 도는 법. 시대의 조류가 다시 반전의 손을 잡아 끌 때가 올 것이다. 그러기 위해선 참신한 도전이 계속되어야 한다. 한 시대를 풍미했던 그런 종류의 반전이 아니라, 완전히 새로운 종류의 반전. 응원하며 기다리고, 찾아보며 비평하고, 반가워하며 다음을 기약하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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冊으로 策하다. 책으로 일을 꾸미거나 꾀하다. 책으로 세상을 바꿔 보겠습니다. singenv@naver.com Since 2013.4.16




[오래된 리뷰] <풀 메탈 자켓>


스탠리 큐브릭의 <풀 메탈 자켓>은 한창 전쟁 영화에 빠져 있던 당시의 나에겐 아무런 감흥을 주지 못했다. 10년만에 다시 찾으니, 그동안 봐왔던 수많은 전쟁 영화를 한 번에 정리해버렸다. ⓒ워너브라더스



군대 가기 전이었다. 온갖 전쟁 영화를 다 챙겨 봤다. 비록 드라마지만 웬만한 영화 이상가는 퀄리티를 자랑하는 <밴드 오브 브라더스>를 필두로 한 번쯤 들어봤을 만한 전쟁 대작 <라이언 일병 구하기> <씬 레드 라인>, 70~80년대를 대표하는 <지옥의 묵시록> <플래툰>, 그보다 윗 세대의 <패튼 대전차 군단> <콰이강의 다리>까지. 그리고 반드시 봐야 하는 영화 중 하나인 <전함 포템킨>도. 이밖에 수없이 많은 전쟁 영화를 챙겨봤다. 지금은? 신작은 안 보고 예전 전쟁 영화를 가끔 보곤 한다. 


전쟁 영화는 몇 가지 분류로 나눌 수 있다. 일명 '국봉(?)'. 나라를 위해 희생하는 숭고한 이들의 헌신을 다룬다. 주로 이데올로기 얘기가 들어가 있다. '반전'. 전쟁의 참상과 허무함과 쓸 데 없음을 사실적이고 때론 풍자적으로 보여줌으로써 전쟁을 반대하거나 전쟁의 불필요함을 역설한다. '액션'. 전쟁이 가지는 블록버스터적인 요소를 끄집어 내어 극대화 한다. '고민'. 전쟁에 대한 현실과 이상 사이에서 고민하다 죽거나 병신이 되어 살아남는 이들을 주인공으로 내세운다. 주로 가해자와 피해자의 얽힘을 얘기한다. 


액션에 눈이 가게 마련이다. 거기에 적당한 고민이 섞이면 괜찮다. 반전 요소가 있으면 아이러니하게도 액션이 더 풍부하다. 전쟁을 더 참혹하게 더 사실적으로 보여줘야 하기 때문이다. 많은 사람들이 전쟁 영화 하면 <라이언 일병 구하기>를 생각하는 게 그런 이유에서다. 나도 어김 없이 그랬다. 


전쟁 영화 재밌게 봐왔지? 이제 그만


스탠리 큐브릭 감독의 <풀 메탈 자켓>은 그 당시 나에게 아무런 감흥을 주지 않았다. 수많은 영화인들에게 극찬을 받은 작품이라지만, 전투신다운 전투신 하나 없는 이 영화가 과연 제대로 된 전쟁 영화인지 보는 내내 의문만 들었을 뿐이다. 시간이 지나 다시 본 이 작품은 그동안 봐왔던 수많은 전쟁 영화를 정리해주었다. '그동안 전쟁 영화 재밌게 봐왔지? 이걸로 이제 그만.'


영화는 크게 2부로 나눌 수 있다. 도입부라고도 할 수 있는 1부는 베트남전쟁 당시 미 해병대 신병교육대 이야기다. 신병들을 인간 병기로 개조한다는 취지 하에 신병들을 인간 쓰레기 취급하는 하트만 상사, 나름 순조롭게 그들은 미해병대 인간 병기로 거듭난다. 한 명만 빼고. 


일명 '뚱땡이' 레오나드 로렌스는 무슨 수를 써도 몸이 따라주지 않는다. 정신력도 꽝이다. 하트만은 그를 동기 조커에게 맡긴다. 한동안 잘 하는 듯했지만, 다시 돌아온 뚱땡이. 결국 하트만은 특단의 조치를 내린다. 뚱땡이가 사고를 칠 때마다 동기 전체가 벌을 받게끔 한 것이다. 이후 사건이 벌어지고 뚱땡이는 환골탈태를 하게 되는데...


아무것도 모르는 '뚱땡이'가 살인 기계가 되어간다. 그의 환골탈태는 어떤 결과를 낳을 것인가, 어떤 의미가 있는가. ⓒ워너브라더스



묻고 싶다. 감독은 이 신병교육대 이야기를 통해서 무슨 말을 하고 싶은 걸까? 아마 감독도 묻고 싶을 거다. 이 신병교육대에서 도대체 그 어떤 '전쟁'을 발견할 수 있는 걸까? 강도의 차이만 있을 뿐 어린애 장난 같은 이 교육들이 피와 살점이 난무하는 전쟁에 도대체 어떤 도움이 될 것인가? 하트만의 말처럼 킬러가 되면 되는 걸까. 누구를 죽이든 상관 없이. 특등 사수의 예를 365m 높이에서 14명을 쏴죽인 살인마로 든 걸 보면 알 수 있다. 나아가 베트남전쟁의 의미까지 유추할 수 있다. 


허무하고 애처롭고 참혹하다


"어떻게 여자와 어린 아이를 죽일 수 있습니까?"

"쉽지. 느리니까 그냥 갈기면 돼. 그럼 죽어. 크하하하."


종군기자가 된 조커 병장이 헬리콥터를 타고 전선으로 떠나면서 기관총 사수한테 물어본다. 어떻게 여자와 어린 아이를 죽일 수 있느냐고, 그러면 안 되지 않느냐는 말이 생략되어 있다. 그런데 돌아온 답은 죽이기 쉽다는 말이다. why에 해당하는 물음에 how로 답하는, 그의 머리엔 오로지 '살(殺)'만 있다. 신병교육대에서 배운 게 그런 걸까. 베트남전쟁의 목적이 그런 걸까. 


후방의 지루함을 참지 못하고 포성과 총성을 듣고 싶어 하는 조커, 허세로 중무장한 그가 원하던 대로 전선에 와 있다. 그곳엔 온갖 허세로 완전 무장한 이들이 득시글하다. 그들이 전쟁을 알까. 말본새나 행동 거지를 봐선 제대로 된 전투를 치러보지 못한 듯하다. 알면 어떻게 또 모르면 어떠랴. 베트남전쟁 자체가 아무 짝에도 쓸데 없거니와 일어나선 안 되는 전쟁이었던 것을. 


그 어떤 전쟁 영화보다도 포성이나 총성, 피와 살점이 난무하지 않지만, 그 어떤 전쟁 영화보다 참혹하다. 고수의 손길이 느껴진다. ⓒ워너브라더스



허무하고 애처롭고 참혹하다. 이 영화를 보고 나니 다시는 전쟁 영화를 보지 못할 것만 같다. 그 어떤 전쟁 영화보다 약한 장면들이 나오지만, 그 어떤 전쟁 영화보다 참혹하다. 포성과 총성이 끊임없이 오가고, 피와 살점이 휫날리는 참혹한 장면을 보여주지 않아도 된다. 충분히 구역질 나는 전쟁의 참모습을 보여줄 수 있는 것이다. '전쟁이란 이런 것이다'를 일반적이지 않은 방법으로 보여주는, 그리하여 전쟁에 진심으로 치를 떨게 만든다. 영화적으로 생각하면 고수의 손길이 느껴진다. 


스탠리 큐브릭의 사실상 마지막 작품


20세기 최고의 거장이라 일컬어 지는 '스탠리 큐브릭' 감독의 후기작 <풀 메탈 자켓>. 그는 이 작품을 마지막으로 10년 넘게 영화를 만들지 않았고, 이후 <아이드 와이즈 셧> 편집본을 넘기고는 타계했다. 어떤 의미에서는 그의 살아생전 마지막 작품이라고 할 수 있을 이 영화에도 역시 그의 완벽한 사실주의가 살아 있다. 


배경 한 컷, 소품 한 점 하나 소홀히 하지 않은 티가 난다. 재현한 건 물론이고 연기 또한 가감이 없다. 과하지도 모나지도 않다. 부담이 없다는 거다. 하물며 분위기랴? 베트남전쟁 당시를 그대로 옮겨놓은 거나 다름 없다. 전쟁은 인간 본성을 극치로 보여주게 만든다. 죽음의 공포가 눈앞에 그려지는데, 본성을 억누르긴 힘들 게 아닌가. 감독은 만들어진 인간상이 아닌 인간 군상 그 자체를 옮긴 것이다. 


영화는 시종일관 풍자다. 그런데 스탠리 큐브릭 감독은 극사실주의의 거장, 베트남전쟁을 그대로 보여줬을 뿐이다. 그대로가 풍자라니... ⓒ워너브라더스



영화는 처음부터 끝까지 풍자 일색이다. 눈에 보이는 모든 것들이 풍자다. 하지만 개중에 사실 아닌 것이 없다는 게 참으로 슬프다. 과장되지도 않게 모나지도 않게 사실 그대로를 옮겼을 뿐인데 그것이 풍자라니. 그것이 베트남전쟁의 인간 군상 그 자체라니. 그 자체가 하나의 거대한 아이러니, 수많은 사람의 인생을 아작낸 전쟁의 비극이다. 엄연한 역사지만 지우고 싶다. 역겨워 구역질이 나고 슬퍼서 웃음이 날 지경이다. 그런 한편 빼놓을 수 없는 생각 한 가지, '스탠리 큐브릭 감독은 역시 대단하구나'


역사는 되풀이 되고, 인간의 실수 또한 수없이 되풀이 된다. 역사를 통해 우린 많은 걸 알고 있지만, 언제 그랬냐는 듯 똑같은 짓을 반복한다. 아마 전쟁은 영원히 계속될 것이고, 베트남전쟁 같은 의미없는 짓도 계속할 것이다. 무엇 때문에? 누군가가 자신을 위해서. 그 피해를 누가 입게 되는 지는 굳이 말하지 않겠다. 이제 더 이상 이런 짓을 하지 않길 바란다는 말은 못 하겠다. 다만, 진실은 가려지지 않아야 하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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