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오래된 리뷰] <러시: 더 라이벌>


<러시: 더 라이벌>이 나온 2013년만 해도 아직 F1이 완연한 하락세는 아니었다. 하지만 이제 F1은 퇴물 취급 받으며 세계 3대 스포츠 이벤트로 명맥을 이어나갈지 알 수 없는 상황. 새삼 이 영화가, 이 영화가 그린 그때가 보고 싶었다. ⓒ롯데엔터테인먼트



'올림픽' '월드컵'과 더불어 세계 3대 스포츠 이벤트 중 하나로 불리는 'F1(포뮬러1 월드 챔피언십)', 전 세계 수억 명이 시청하며 조 단위의 후원을 자랑하는 자타공인 꿈의 무대다. F1이 인기가 있던 가장 큰 이유는, '가장 현대적인 스포츠'라고 불리는 것과는 다르게 굉장히 인간적이었기 때문이다. 기계의 성능보다 드라이버의 실력이 우선되었기에, 그들이 펼치는 승부에 묘미가 있었다. 지금은 말그대로 '가장 현대적인 스포츠'가 되어 인간이 아닌 기계에 따라 승부가 갈리게 되었다. 


2010년대 들어 세바스찬 페텔이 4년 연속 월드 챔피언에 오르며 '황제' 미하엘 슈마허에 버금가는 업적을 달성했다. 새로운 황제의 출현에 전 세계는 열광했다. 그때는 페텔이라는 인간의 능력이 월등했다. 2014년부터 엔진과 연료량이 다운사이징된 새로운 시스템 규정이 생겼다. 이에 '메르세데스'가 발빠르게 차량을 만들어냈다. 곧바로 성적이 났다. 2014년부터 3년 동안 메르세데스의 드라이버(루이스 해밀턴, 니코 로즈버그)가 우승을 독식했다. 앞도적으로. 드라이버보다 팀의 이름이 앞세워진 것이다. 과거에도 10년 가까이 우승을 독식한 팀이 있었지만, 항상 드라이버와 함께였다. 


자연스레 관객이 줄고 후원이 줄고 대회 유치하는 도시가 줄었다. 기계의 위상은 어느 때보다 올라간 대신, F1 위상이 추락하고 드라이버의 시대는 저물었다. 옛날이 생각난다. 스타플레이어의 독식과 또는 라이벌. 오히려 최근이라 할 만한 2000년대 중반 이후가 가장 재밌었다. 춘추전국시대, 알론소, 해밀튼, 버튼, 페텔 등으로 이어지는 챔피언의 계보. 이제 이 계보가 끊어질 것 같다. 


F1을 상징하는 두 캐릭터, 두 라이벌


F1을 상징하는 세기의 라이벌, 어찌 보면 '라이벌'을 상징하는 둘일지도 모른다. 니키 라우다와 제임스 헌트. 길지 않은 만남이었지만, 그 여파와 영향력은 시대를 초월할 정도였다. ⓒ롯데엔터테인먼트


상황이 이러 해서 그런가, 차량이 아닌 인간이 서킷을 지배했던 예전이 생각난다. 내 나이로 70~90년대의 F1 전성기를 고스란히 함께 했을리는 없지만, 전설로 내려오는 그때를 마음속 깊이 연모해 마지 않을 수 없는 것이다. 90년대와 2000년대 미하엘 슈마허로부터 거슬러 올라가, 80년대의 세나와 프로스트, 그리고 70년대의 니키 라우다와 제임스 헌트까지. 


이 중 F1 역사상 최고의 천재 드라이버 세나의 이야기와 F1 역사상 최대의 라이벌 니키 라우다와 제임스 헌트의 이야기가 영화로 만들어졌다. 론 하워드 감독의 <러시: 더 라이벌>은 바로 니키 라우다와 제임스 헌트의 이야기다. 모르긴 몰라도 이 둘은 F1을 떠올리면 생각나는 두 캐릭터를 상징할 테다. 니키 라우다는 모범생 스타일의 기계 천재이자 불굴의 의지를 지닌 사나이이고, 제임스 헌트는 바람둥이 스타일의 불세출의 천재로 바람 같이 나타나 한 시즌을 재패하고 떠나버린 사나이다. 공통점은 이 둘은 서로를 미워하지만 서로를 부러워하고 서로 덕분에 더 빨리 달릴 수 있었다는 것. 


영화는 F1에 관심이 있는 사람이라면 누구나 알 만한 이들의 이야기를 고스란히 옮겨 놓았다. 그리하여 내용에 신경을 쓰는 대신, 1970년대 당시를 재현해내고 니키 라우다와 제임스 헌트를 다시 살려내며 F1이 갖는 긴박함과 스릴을 최대치로 불러내려 했다. 정녕 완벽하게 재현해내고 살려내고 불러냈는 바, 현재 F1에서 풍겨나오는 진한 실망감을 충분히 상쇄시키고도 남음이다. 그 중심에는 두 라이벌이 있다. 


본능에 충실한, 순수함의 결정체들의 질주



F1 드라이버들의 목숨을 건 사투를 무엇이라 해야 하겠는가. 돈과 명예와 스포트라이트? 화려한 삶? 그것도 맞지만, 그것만으로는 절대 불가능할 것이다. 본능에 충실한 순수함이 그들을 지배했다. ⓒ롯데엔터테인먼트



두 라이벌은 F3에서 처음 만난다. 터줏대감 제임스 헌트 눈에 예리한 신예 니키 라우다가 들어온다. 위험한 상황을 연출하는 이들, 사고가 나려는 찰나 니키가 양보하지만 레이스 불능 상태가 되고 제임스가 우승을 차지한다. 악연으로 시작된 이들의 인연, 이번엔 니키가 앞서간다. 거액의 돈을 대출받는 수완을 발휘해 단번에 F1 팀에 들어간 것이다. 그곳에서도 차량을 개조해 시간을 엄청나게 단축하는 기적을 선보이며 단번에 팀의 중심이 된다. 제임스 헌트와는 차원이 다른 F1 드라이버 니키 라우다. 


이에 제임스 헌트는 팀에 들어가는 대신 오랫동안 함께 해온 이들과 형의 도움으로 직접 F1에 뛰어든다. 다시 만난 이들, 이제부터 진정한 라이벌의 시작이다. 그야말로 매 레이스에서 엎치락 뒤치락, 다른 이의 접근을 불가하는 그들만의 대접전이다. 그 와중에 병행되는 그들의 삶과 사랑, 모든 면에서 다른 그들은 점차 선의의 경쟁자가 되어 간다. 하지만 영원한 건 없다. 


니키 라우다와 제임스 헌트 모두에게 시련이 찾아온다. 누구나 다 알 만한 대사건을 겪는 니키 라우다. 레이스 도중 일어난 사고로 화상을 입는다. 재기 불능은 고사하고 사는 것조차 알 수 없는 상황, 그는 다시 일어나 라이벌 제임스 헌트와 함께 서킷을 달릴 수 있을까? 한편, 제임스 헌트는 팀도 잃고 사랑도 잃는다. 생각보다 성적이 잘 나오지도 않는다. 드라이버로서 뿐만 아니라 인생에서도 절체절명의 위기에 빠진 제임스, 그는 특유의 대범함과 낙천성으로 난관을 뚫고 다시 일어나 라이벌 니키 라우다와 함께 서킷을 달릴 수 있을까? 


개인적으로 운전면허를 딴 지는 몇 년 되지만 운전을 본격적으로 시작한 지는 몇 개월도 채 되지 않는다. 얼마 전에 처음으로 고속도로를 탔는데, 숨겨져 있던 본능이 나오지 않았나 싶다. 시속 120km까지 달리며 한순간도 긴장이 되지 않았다. 아니, 황홀했다. 계속 생각이 났다. 이들이 왜 매 경기마다 20%에 달하는 죽음의 확률을 알면서도 계속 달리는지 조금은 알겠다는 말이다. 이들이야말로 본능에 충실한, 순수함의 결정체가 아닐까. 죽음에 가장 가까이 갈수록 삶의 절정을 겪을 수 있으니 말이다. 


다분히 남성적인 영화, 그럼에도 즐길 수 있는 영화


영화는 남성 중심적이다. 소재의 특성 상 어쩔 수 없겠지만, 굳이 여성을 등장시켜 남성 F1 드라이버의 삶을 설명하는 수단으로 쓸 필요가 있었을까? 그 점을 집고 넘어가며, 즐길 만한 준비가 되어 있다면 이 영화는 최고 중에 최고다. ⓒ롯데엔터테인먼트



F1이라는 스포츠는 자동차 그중에서도 어마어마한 속도를 자랑하는 차량의 '속도'로 순위를 가리는 종목이니만큼, 여성에겐 매우 힘들기도 하고 자연스레 여성에게서 멀 수밖에 없다. 여담으로, 자그마치 중력의 5배에 달하는 힘을 견뎌야 한다. 남녀 평등에 대해서 논하려는 건 아니다. 영화에서 여성을 남성에 대비되는 요소가 아닌 남성을 설명하는 수단으로 쓰려했다는 점이 걸리는 것이다. 


영화는 다분히 남성적이다. 영화에서 여성은 두 주인공이자 라이벌인 남성 드라이버의 전유물일 뿐이다. 인생관에 따라 다를 텐데, 니키에게는 평생 함께 할 단 한 명의 동반자이자 소유물로서 제임스에게는 때와 장소에 따라 바뀌는 일회용품으로서 존재한다. 물론 그건 남성뿐만 아니라 여성의 입장에서도 마찬가지일 것이다. 다만 이 영화에서는 남성의 입장에서, 그것도 그 남성의 인생관을 대변하는 여러 요인들 중 하나로서 비춰진다. 니키와 제임스의 라이벌 관계를 보여주는 요소말이다. 


이 점을 집고 넘어가며 영화를 즐길 만한 준비가 되어 있다면, 이 영화는 그에 완벽하게 부합할 것이다. 그야말로 인간의 한계를 넘는 기계 일색의 스포츠에서 박진감과 스릴감은 당연하고 인간미까지 넘치는 레이스를 펼칠 수 있는, 또 그걸 볼 수 있는 경우가 얼마나 많겠는가. 그 모습을 완벽하게 구현해낸 1976년 당시를 영화로 완벽하게 구현해낸 게 이 영화 <러시: 더 라이벌>이다. 


기적이 아닌가 싶다. 40년 전 기종은 찾을래야 찾을 수도 없을 텐데, 한두 대도 아닌 수십 대를 눈앞으로 대령해내다니. 고마운 일이 아닌가 싶다. 현장관람은커녕 TV중계로도 보기 어려운 실정에, 현장관람 정도의 현장감을 엿볼 수 있다니. 놀라운 일이 아닌가 싶다. 이토록 영화 같은 이야기가 다큐멘터리 같은 실제 이야기를 담고 있다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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冊으로 策하다. 책으로 일을 꾸미거나 꾀하다. 책으로 세상을 바꿔 보겠습니다. singenv@naver.com Since 2013.4.16




[오래된 리뷰] <렛 미 인>


하찮게 소모되던 뱀파이어, 와중에 뱀파이어 영화의 신세계를 연 작품이 <렛 미 인>이다. 토마스 알프레드슨 감독의 최고 데뷔작. ⓒ씨네그루 다우기술



1994년 <뱀파이어와의 인터뷰>의 대성공 이후 다양하게 재생산된 뱀파이어. <블레이드> <언더월드> <트와일라잇> 시리즈로 대변되는 액션 판타지의 주인공이 되어 참 많이도 고생했다. 그 중심에는 항상 영원한 삶과 가공할 만한 힘이 있었다. 찬란하게 시작된 현대판 뱀파이어물은 그렇게 하찮게 소모되고 있었던 것이다. 


그 와중에 뱀파이어 영화의 신세계를 연 작품이 있다. 북유럽에서 건너 온 잔혹하고 몽환적인 사랑과 성장 이야기. <팅커 테일러 솔저 스파이>로 격조 높은 스파이 이야기를 선보였던 토마스 알프레드슨 감독의 2008년 작 <렛 미 인>이다. 이 영화는 자그마치 그의 장편 영화 데뷔작이다. 데뷔와 동시에 최고의 감독으로 칭송받는다. 


스웨덴 출신의 감독이, 스웨덴을 배경으로, 정녕 스웨덴스럽게 연출해 낸 <렛 미 인>. 우리가 생각하는 북유럽 스웨덴 그 자체에, 그동안의 액션 판타지 마사지 때문에 우리가 생각하기 어려운 풍의 뱀파이어 이야기를 완벽히 입혔다. 하얀 설국과 빨간 피의 대비는 잊지 못할 최고의 조화다. 그 자체로 하나의 완벽한 미장셴. 영화를 그 미장셴으로만 보아도, 그 미장셴으로만 기억해도 충분할 정도이다. 


그 미장셴은 장면으로만 남지 않는 바, 영화를 관통하는 상징과 메시지 중 하나를 말하는 매개체이다. 하얀색은 무엇이고, 빨간색은 무엇일까. 아무래도 영화의 두 주인공인 인간 오스칼과 뱀파이어 이엘리를 상징할 텐데, 감독은 그들에게서 어떤 이야기를 끄집어냈을까. 우린 그 이야기에서 세상의 어떤 모습을 반추할 수 있을까. 


괴롭힘을 당하는 아이, 그에게 접근하는 뱀파이어


'돼지'라 불리며 괴롭힘을 당하는 12살 오스칼, 그에게 접근하는 12살 모습의 뱀파이어 이엘리. 그들은 어떤 모습을 보여줄까. ⓒ씨네그루 다우기술



12살 오스칼은 학교에서 '돼지'라고 불리며 괴롭힘을 당한다. 그는 집에 와서는 칼로 집 앞 나무에 해코지하며 자신을 괴롭히는 일당을 죽이는 꿈을 꾼다. 오스칼은 엄마와 단 둘이 사는데, 동성애자 아빠를 더 좋아한다. 그는 참으로 힘도 없고 의욕도 없는 무기력한 아이다. 그의 금발과 새하얀 피부가 잘 어울린다.


한편 12살 이엘리는 아버지처럼 보이는 이의 보살핌으로 살아간다. 그 보살핌이란 다름 아닌 어린 아이를 죽여 뽑아낸 피를 먹이는 것. 그녀가 뱀파이어이기 때문이다. 자신이 직접 사냥에 나서면 위험하기 때문에 누군가 대신해줄 필요가 있는 것 같은데, 그렇다면 아버지처럼 보이는 이는 뱀파이어가 아니라는 얘기. 그는 인간인 듯 보인다. 아버지는 아닌 것 같다. 그들은 어떤 관계일까? 


우연히 만난 오스칼과 이엘리, 하필이면 오스칼이 칼을 들고 나무를 해코지할 때다. 그 모습을 보고 이에리가 한 생각은, '이제부터 이 아이가 나를 먹여 살릴 것이다'. 반면 오스칼은 이엘리를 좋아하게 된다. 아버지처럼 보이는 이는 이엘리를 12세 때 만나 수십 년 동안 사랑하며 함께 해왔던 것. 오스칼이 그를 대신할 재목이다. 


이보다 아름답고 숭고한 사랑이 어디 있을까


영화는 두 주인공인 오스칼도 이엘리도 아닌 이엘리를 수십 년 동안 사랑해왔던 한 남자의 이야기이기도 하다. '렛 미 인(Let me in)', 들어가게 해줘. 이엘리의 사랑 방식이자, 이엘리를 사랑하는 방식이다. 살기 위해 어쩔 수 없이 사람을 죽여야 하는 그녀의 입장이 되어, 대신 사람을 죽여 피를 가져오는 극단적 사랑. 


이 기괴하고 잔혹한 사랑은 언젠가 반드시 파멸로 끝맺음을 낼 것이다. 이엘리의 전 사람도 그럴 것이고, 오스칼도 그러지 않을까. 그렇지만 '아름답다'고 하지 않을 도리가 없다. 이보다 더 '숭고'한 사랑이 어디 있을까. 자신의 모든 것을 바쳐 사랑한다는 건 이런 게 아닐까. 


그는 단순히 그 자신으로서 사람을 죽여 피를 가져오는 게 아니다. 그가 아닌 다른 이가 되어, 즉 이엘리가 되어 살기 위해 어쩔 수 없이 사람을 죽여 피를 가져오는 것이다. 모든 것에 앞서 자신을 버린 '희생'으로서의 사랑이다. 사랑이라는 이름이 붙여진 것 중 가장 높은 경지의, 가장 하기 힘든, 비인간적이기까지 한 사랑의 방식이 희생 아닌가. 아마 그의 마지막은 이엘리에게 자신을 바치는 것이리라. 


약한 이의 본능을 깨우는, 다른 사랑 방식


숭고하고 아름다운 희생으로의 사랑과는 다르게, 오스칼과 이엘리의 사랑은 뭔가 다르다. 오스칼의 본능을 이용한 '계약' 같다고 할까. ⓒ씨네그루 다우기술



오스칼과 이엘리, 이엘리와 오스칼. 그들은 곧 사귄다. 하지만 오스칼이 이엘리의 정체를 알아차린다. 이엘리를 멀리 하는 오스칼, 상처 받는 이엘리. 뱀파이어다운 극단적 행동으로 오스칼의 본능을 자극해 더욱 가까워지는 그들. 이엘리는 이때다 싶어, 예의 그 '렛 미 인'을 시도한다. 교감을 마친 그들, 그들은 곧 하나다. 


이엘리와 이엘리의 전 남자의 렛 미 인 교감이 오랜 시간의 '사랑'이라면, 이엘리와 오스칼의 교감은 사랑 이전에 오스칼의 본능을 깨우는 것으로 시작된다. 무기력하기 짝이 없지만 반대급부로 살인의 욕망이 엄청난 오스칼의 본능을 이엘리가 교감을 통해 이끌어 낸 것이다. 난 살기 위해 어쩔 수 없이 사람을 죽여, 너에겐 그들을 죽이고 싶은 마음이 있지, 나를 대신해 그들을 죽이면 되겠네. 


여기서 하얀색과 빨간색의 극명하고 아름다운 대비가 떠오른다. 아무것도 없는 흰색의 오스칼에게 욕망으로 가득 찬 빨간색의 이엘리가 들어온 것이다. 어느 날 그를 괴롭히는 패거리의 수장을 다짜고짜 막대기로 때려 고막을 파열시키는 오스칼, 그러고 나서 히죽히죽 웃는 그의 모습에서 미래가 보인다. 이엘리를 위해서인지 자신의 본능에 의해서인지 둘 다인지 알 수 없는 걸로 사람을 죽여 피를 뽑아 이엘리를 먹여 살리는 그의 모습을. 


'사랑'이라 할 수 있을까. 아니, 일종의 '계약'처럼 보인다. 내 안에 있는 거대한 욕망 덩어리를 끄집어내게 해주면서 양심의 가책도 줄여주는 대신, 너를 내 평생 책임지고 먹여 살리겠다. 누군가는 '결혼'을 그런 식으로 생각할지 모르겠다. 그 또한 사랑의 또 다른 모습일까. 무조건 아니라고 할 수 없는, 한 번쯤 생각하게 한다. 그건 내가 이상한 걸까, 이 세상이 그렇게 만든 걸까, 자연스러운 걸까. 


'성장'하는 오스칼과 '소수·소외'의 상징 이엘리 


영화에서 오스칼은 '성장'한다. 본능을 깨우고 세상을 알아간다. 이엘리는 성장과 거리가 멀다. 그녀는 겉모습과는 달리 이미 늙을 대로 늙은듯. 다만, 그녀는 세상과 절대 어울릴 수 없는 '소수 소외'의 상징이다. ⓒ씨네그루 다우기술


이엘리는 겉모습은 12살이지만 이미 엄청나게 오래 살았다. 그녀에게 '성장'이란 단어는 어울리지 않는다. 반면, 오스칼에게 '성장'은 당면한 현실이자 반드시라고 할 만큼 치러야 할 대상이다. 그는 이엘리를 만나 단번에 너무도 큰 성장을 한 것 같다. '힘'이자 '권력'의 달콤함, 양육강식의 세계를 알아버린 것. 


남에게 괴롭힘을 당하며 아래에서 굽신굽신대다가 한순간에 남 위에 군림하는 그 희열을 안 것이다. 누구는 평생 가도 하지 못하는 걸 그는 어릴 때 한순간에 알아버렸다. 그가 한없이 가여워지는 순간이다. 


한편, 영화를 보는 내내 이엘리가 가엽고 불쌍했다. 어불성설처럼 보일지 모르지만, 그녀는 정녕 이 시대 '소수·소외 계층'의 상징과도 같지 않은가. 이 세상에 자신을 알아줄 이 하나 없고, 자신에게 관심을 가져주는 이 하나 없다. 또한 다른 누구의 도움 없이는 먹고 살아가기 힘든 '취약 계층'의 상징과도 같다. 자신이 직접 먹고 살아가기엔 이 세상이 너무 위험(?)하다. 


그 이유는 그녀가 다르기 때문. 그녀는 단지(?) '사람의 피'를 원하는 것 뿐이다. 다른 무엇도 바라지 않는다. 그녀는 피를 마시지 않으면 죽지도 못한 채 영원히 고통 속에서 살아갈 것이다. 하지만 과연 세상이 용인할까? 물론 그 '다름'의 성질이 너무도 괴이쩍긴 하지만, 용인하지 '못하는' 게 아니라 '안하는' 것만은 확실하다. 


만약 신인류가 나타났다고 치자. 그것이 세상을 파멸로 이끌 수도 있는 능력을 가졌다고 치자. 물론 그건 능력의 유무이고 반드시 한다는 게 아니다. 뱀파이어가 사람을 죽일 능력을 가진 것과, 살기 위해 사람을 죽여 피를 마시는 것과는 별개인 것처럼 말이다. 우린 어떻게 할까? 세상은? 아마 무슨 짓을 써서라도 없애버리고자 할 것이다. 그것이 우리와 다른 이질적인 존재이기 때문에. 


서로가 서로를 인정하고 그렇게 조화로운 세상으로 나아가는 건 꿈에서나 가능한 말일까. 너무도 당연하고, 식상하지만 이렇게 또다시 말하지 않을 수 없다. 계속 말해도 세상은 바뀌지 않으니까. 세상이 바뀔 때까지 말하고 또 말할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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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래된 리뷰] 12년 촬영의 위대한 결과물 <보이후드>


'위대한'이라는 수식어를 붙이기에 한 점 부담이 없을 영화 <보이후드>. 6~18세의 소년기를 정녕 그대로 보여준다. ⓒUPI코리아



우리는 '최고'라는 수식어는 수없이 본다. 또 쓰기도 한다. 자신이 느끼기에 최고이면 되는 것이다. 상당히 주관적인 인식이 깔려 있다. 반면 '위대한'이라는 수식어는 함부로 붙일 수 없다. 만약 신이 있다면 신에게나 붙일 수 있을 것이고, 인간에게라면 극소수만 허락될 것이다. 그런 사항을 인지하고 있음에도, 이 영화 <보이후드>에 '위대한'이라는 수식어를 붙이는 데 주저함이 없다. 


'보이후드(boyhood)'라고 하면 '소년기'를 뜻하는데, 우리나라에서는 만 열두 살부터 스무 살까지로 잡는 반면 서양에서는 여섯 살부터 열여덟 살을 잡는다. 프로이트의 심리성적 발달단계, 에릭슨의 심리사회적 발달단계 등에서 공통적으로 이 시기를 소년기로 잡는다. 인생 전체에서 가장 중요한 시기라고 할 수 있는 보이후드, 이 시기를 그려내고자 하는 노력은 참으로 많았다. 소설만 보아도 <데미안> <호밀밭의 파수꾼> 등의 위대한 작품이 있다. 영화는? <보이후드>가 있다고 말하고 싶다. 


여섯 살부터 열여덟 살의 12년을 영화로 보여주는 건 쉽지 않아 보이지만 사실 굉장히 쉬울 수 있다. 시간의 흐름을 보여주는 방법은 너무나 다양하다. 그리고 영화를 보는 이들은 그런 것에 관대한 편이다. 하지만, 12년을 그대로 보여주려 한다면? 이야기는 완전히 달라진다. 일단 촬영 기간만 12년이 걸릴 것이다. 감독 이하 스탭들과 등장인물들은 12년 동안 촬영에 임해야 한다. 무엇보다 12년의 기간 동안 질주하는 영화 관련 기술들의 발전을 어떻게 할 것인가? 영화의 처음과 끝이 다르면 안 되겠는데. 


12년 간의 촬영으로 소년기를 온전히 보여주다



이 영화의 위대함은 소년기의 12년에 해당하는 기간을 촬영했다는 점이다. 어느 누구도 생각지 못하고 해낼 수 없을 것 같은 것을 해냈다. ⓒUPI코리아


영화 <보이후드>는 여섯 살부터 열여덟 살의 소년기를 온전히 영화로 보여주기 위해 실제로 12년 간의 촬영을 감행했다. 이런 무모하지만 위대한 생각을 한 이는 <비포 선라이즈> <비포 선셋> <비포 미드나잇> 그리고 <스쿨 오브 락>으로 유명한 리처드 링클레이터 감독이다. 그는 현실성을 극도로 강조하기로 유명한데, <비포> 시리즈뿐만 아니라 <보이후드>도 영화적 시간과 현실적 시간을 가능한 일치시키려 노력했다. 12년 동안 매년 15분씩 만나 촬영을 했다고 하는데, 러닝타임이 160분을 상회하니 만큼 거의 비슷하다. 


6살 메이슨은 누나 사만다, 엄마 올리비아와 함께 텍사스에서 살고 있다. 아빠 메이슨과는 주말마다 만나고 휴가도 함께 보내면서 항상 즐거운 시간을 보내지만 같이 살진 않는다. 십대 후반의 이른 나이에 사고를 쳐 아이를 낳고는 오래지 않아 헤어진 것 같다. 올리비아에게는 하고 싶은 걸 하지 못하고 아이를 위해 자신의 모든 걸 던지는 삶에 대한 설움이 있다. 어린 메이슨은 엄마의 절규에 가까운 성토를 엿듣는다. 


감수성이 특별해질 수밖에 없는 환경, 환경에 절대적으로 휘둘릴 수밖에 없는 소년기의 한 가운데, 어린 메이슨은 이런저런 일을 겪으며 나름대로 헤쳐나간다. 방황은 어른들에게도 찾아간다. 특히 올리비아. 그녀는 아이를 키우느라 하지 못했던 공부를 뒤늦게나마 시작해 승승장구하지만, 결혼 생활은 정반대이다. 때문에 아이들에게도 피해가 가지만 그녀가 할 수 있는 게 더 있겠는가?


어린 메이슨의 12년 소년기는 그 어떤 영화가 주는 현실성보다 더 현실적이다. 얼마나 현실적이고 주위에서 흔히 볼 수 있으면, 그래서 중간중간 안 봐도 될 만하다고 생각되는 장면이 있었겠는가. 덕분에 종종 밀려오는 졸음을 편안히 받아들일 수 있었다. 이 위대한 영화에게 큰 결례인 바 반드시 또 보도록 할 것이다. 하지만 이 영화가 추구하는 것이 인생 그 자체이기에, 영화보면서 조는 실수도 감싸주지 않을까?


이혼한 가정의 소년이 겪은 소년기의 전형


이혼한 가정의 소년은 어떤 삶을 살까. 이혼이 아무리 흔하다지만, 그래도 특별한 일일 거다. 그의 소년기는 내 이야기같아 공감가지만, 너무 기구해 영화 같기도 하다. ⓒUPI코리아



나의 여섯 살을 회상해본다. 솔직히 기억이 거의 나지 않는다. 사진으로 남아 있어 기억을 더듬어 보아도 모르겠다. 아마 모르긴 몰라도 어린 메이슨의 여섯 살과 크게 다르지 않을 것이다. 다만, 그에게는 부모님의 '이혼'이라는 요즘 세상에서는 특별할 것 없지만 그래도 특별한 일이 있었다. 그리고 이후의 또 다른 결혼 생활도 좋지 못했고. 그런 면에서 이 영화는 이혼한 가정의 소년이 겪은 소년기의 전형을 보여준다고도 할 수 있겠다. 


그렇다고 여느 가정과 크게 다르진 않을 거다. 주로 바깥 일을 하는 아빠와는 거리가 있는 반면 부딪히는 일도 별로 없을 테지만, 주로 집안 일을 하는 엄마와는 가까운 반면 부딪히는 일도 많다. 어린 메이슨의 엄마가 바깥 일도 하고 집안 일도 하며 아이들과 특별한 관계를 맺는 게 좀 다르지만, 보이는 모습이 다를 뿐 본질은 같다. 


피를 나눈 누나와는 가장 많이 부딪히지만 또 가장 의지가 되기도 한다. 친구나 형, 동생과는 다시 없이 좋은 때를 보내지만, 다른 학교로 가거나 이사를 가면 훌쩍 떠나 기억에서 잊히고 만다. 새 친구를 사귀는 건 참으로 고역이고 귀찮고 때론 두렵기까지 한 일이지만, 언제 그랬나 싶다. 


한편 거리가 있는 아빠지만, 또 엄마한테는 말 못할 비밀을 공유하기도 하는 존재다. 그렇지만 가장 무서운 존재도 아빠인 바, 집 안에서 가장 힘이 세고 발언권이 강한 가장이 폭력을 쓰기 시작하면 답이 없다. 집이 파탄을 맞이하는 건 정말 한순간이다. 그렇게 파탄난 가정을 되돌리는 건 사실 불가능에 가깝다. 부부싸움은 칼로 물 베기라지만, 아이를 낳아 키우고 난 후 금이 가고 깨어지는 건 돌이키기 힘들다. 어린 메이슨이 겪는 일들은 참으로 기구하다. 대부분 내 이야기 같아 공감하지만, 때론 너무 기구해 응원하고 있는 나를 발견한다. 


누구나 한 시기가 지나고 새로운 시기가 찾아온다


영화의 마지막은 예고되어 있다. 소년기의 마지막, 다음 시기로 가야 하는 소년. 그 순간은 누구에게나 찾아온다. 그저 받아들이면 될 것. ⓒUPI코리아



이러저러 해도 어린 메이슨이 겪는 소년기는 별 다를 게 없다. 아무리 즐거워도 아무리 힘들어도 아무리 슬퍼도 크나큰 사건이나 전환점 없이 물 흐르듯 흘러간다. 지금 내가 무엇을 하고 있는지, 앞으로 무엇을 하고 싶은지, 어떻게 살아갈 것인지 생각해볼 겨를도 없는 것 같다. 그저 그렇게 흐르고 흘러 지금의 내가 되었다고 할까. 영화 막바지, 메이슨이 독립을 하려고 짐을 싸 나가려는 순간 엄마 올리비아가 울면서 말하는 대사가 가슴을 찌르고 들어온다. 


"오늘은 내 인생 최악의 날이야. 떠날 건 알았지만 이렇게 신이 나서 갈 줄은 몰랐다. 결국 내 인생은 이렇게 끝나는 거야. 참 많은 일들이 있었지. 결혼하고 애 낳고 이혼하면서. 네가 난독증일까 애 태웠던 일, 처음 자전거를 가르쳤던 추억. 그 뒤로 또 이혼하고, 석사학위 따고, 원하던 교수가 되고, 사만다를 대학에 보내고, 너도 대학 보내고... 이젠 뭐가 남았는지 알아? 내 장례식만 남았어! 난 그냥... 뭔가 더 있을 줄 알았어."


뭔가 더 있을 줄 알았다는 올리비아의 말, 메이슨이 온전히 소년기를 겪을 때 그의 주위 사람들도 온전히 그들만의 '소년기'를 겪는다는 걸 나타내는 단적인 대사다. 소년기가 끝나고 새로운 시기와 맞닥뜨리게 되는 아이들을 떼놓으려고 매몰차게 대하는 엄마의 모습이 바로 전 시퀀스에서 비춰져 올리비아의 대사와 행동이 더욱 와 닿는다. 우리 부모님이 생각나지 않을 수 없었다. 내 인생의 주인은 다른 누구도 아닌 '나'라고 하지만, 내 인생은 나만의 것이 절대 아니다. 


그렇게 길고 긴 한 시기가 지나고 새로운 시기가 찾아온다. 누구나에게도 찾아올 것이다. 개인뿐만 아니라, 가정도, 나라도, 인류에게도 찾아온다. 그 경계가 언제인지는 잘 모른다. 기억 나지 않는다. 그런데 여기에서는 기억이 그렇게 중요해 보이지 않는다. 시간이 흘러 그때를 생각하는 기억이 아니라, 지금은 알 도리가 없지만 그때 당시의 '지금'을 인지하고 당시의 '순간'을 맛보았으면 되는 것이다. 


앞으로도 계속 찾아올 거다. 어떤 기나긴 시기의 시간, 그리고 다음 시기로의 길, 또 다른 어떤 기나긴 시기의 시간. 그 순간들을 억지로 잡으려 할 필요는 없다. 메이슨의 말대로 그 순간들이 우리를 잡으려 할 것이기 때문에. 받아들이려는 마음만 가지면 된다. 순간은 우리를 스쳐 지나가며 손짓하며 인사할 것이다. 순간은 영원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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冊으로 策하다. 책으로 일을 꾸미거나 꾀하다. 책으로 세상을 바꿔 보겠습니다. singenv@naver.com Since 2013.4.16




[오래된 리뷰] <천공의 성 라퓨타>


일본이 전 세계에 자랑하는 거장 '미야자키 하야오'의 1986년 작이자 '지브리 스튜디오'의 첫 작품 <천공의 성 라퓨타> ⓒ대원 C&A 홀딩스



일본이 전 세계에 자랑하는 거장이 많을 텐데, 소설에서는 무라카미 하루키가, 영화 에서는 고 구라사와 아키라가 있을 거다. 그렇다면 일본이 자랑하는 콘텐츠인 애니메이션에서는 누구나 알 만한 거장에 누가 있을까? 미야자키 하야오가 아닐까 생각한다. 적어도 전 세계인들이 알 만해야 하니, 위 세 명에 논란의 여지는 없을 듯하다. 


미야자키 하야오, 여전히 현역으로 활동 중인 75세 초로의 노 연출가. 여러 논란에도 불구하고 애니메이션 영화 그 자체로 더할 나위 없는 수준을 보여주는 거장이다. 지난 2013년 <바람이 분다>를 끝으로 '진짜' 은퇴를 선언했지만 2020년 '애벌레 보로'라는 캐릭터를 가지고 다시 돌아온다고 한다. <천공의 성 라퓨타> 이후 30년 간 5번의 은퇴를 선언했지만 매번 다시 돌아온 특이한 이력을 갖고 있는 그다. 


하야오 세계와 지브리 월드의 시작 <천공의 성 라퓨타>


올해 2016년은 미야자키 하야오에게 있어, 그의 분신과도 같은 지브리 스튜디오에 있어 특별하다고 할 수 있는 해일 것이다. 1984년에 세운 지브리 스튜디오의 첫 작품 <천공의 성 라퓨타>가 올해 30주년을 맞이했기 때문이다. 1984년 <바람의 계곡 나우시카>가 상업적으로 큰 성공을 거둔 후 세운 지브리 스튜디오, 첫 작품 <천공의 성 라퓨타>의 연이은 성공으로 미야자키 하야오는 그만의 세계를 만들어냈다. 하야오 세계, 지브리 월드.


<천공의 성 라퓨타>는 분명 30년 전의 애니메이션이다. 하지만 도무지 믿을 수도 없고 믿고 싶지 않기까지 하다. 현재의 애니메이션이 퇴보했다고 생각할 수밖에 없게 만들기 때문이다. 옛스러운 느낌이 드는 그림체가 지금 보기엔 조금 부자연스러울 뿐, 기시감을 찾아볼 수 없다. 완벽하다고 해도 과언이 아니다. 


분명 '30년 전'의 애니메이션인 이 작품은, 완벽 그 자체다. 캐릭터, 서사, 메시지 어느 것 하나 빠질 게 없다. ⓒ대원 C&A 홀딩스



가장 눈에 띄는 건 의외로 '캐릭터'다. 미야자키 하야오의 애니메이션들에는 공통적으로 나오는 캐릭터가 있는데, 여기 나오는 '돌라'가 대표적이다. 그녀는 다양한 애니메이션에서 다양한 캐릭터로 분한다. 여기서는 해적 일당의 대모로 분했는데, 세계적인 만화 <원피스>가 생각나지 않을 수 없다. 특유의 자유분방함과 보물에 대한 욕망, 그들만의 의리와 어디로 튈지 모를 개성 등이 그들을 구성한다. 정녕 캐릭터다운 캐릭터다. 그들의 좌충우돌을 구경하는 것만으로도 보는 재미가 충분하다. 


물흐르듯 전개되는 서사와 더 없이 확실한 메시지는 백미다. 슬픈 눈을 가진 소녀가 군인 집단으로 보이는 이들과 함께 어디론가 가고 있는 듯 보인다. 거기엔 정부에서 보낸 밀사도 있다. 그때 해적이 출물해 소녀를 노린다. 군인 집단, 정부 밀사, 해적 일당이 노리는 건 다름 아닌 소녀가 간직한 '비행석'이다. 무엇이든 하늘을 날게 해주는 막대한 힘을 지닌 돌. 기계의 힘을 빌리지 않고 하늘을 나는 건 인간 근원의 욕망이다.


막간을 노려 탈출을 시도하는 소녀 시타, 비행석의 놀라운 힘으로 천사같은 모습을 하고 탄광에서 일하는 소년 파즈에게 온다. 그들은 곧 친해지는데, 오래지 않아 군인 집단, 정부 밀사, 해적 일당이 일제히 시타를 노리고 쳐들어 온다. 그들끼리 치고박는 틈에 도망가보지만 결국 시타는 군인 집단과 정부 밀사에게 잡히고 만다. 그들은 전설의 천공의 성 라퓨타를 제압하려 시타의 비행석을 탐냈던 것이다. 그녀는 다름 아닌 라퓨타족의 마지막 공주였다. 그녀를 앞세우려는 수작이다. 


한편 파즈는 해적 일당에게 붙잡히는데, 곧 각자의 원하는 바가 같아 손을 잡고 시타를 구출하러 떠난다. 전과는 완연히 다른 새로운 국면으로 접어드는 구간으로, 대지에서의 행복하고 단란한 느낌은 온데간데 없고 창공에서의 욕망의 뒤엉킴과 불손함이 지배한다. 그렇지만 파즈에게는 라퓨타라는 존재 자체가 아버지를 상징하고 생각나게 하는 가장 큰 것이기에 또 다른 느낌이 드는 것이다. 과연 시타와 파즈는 다시 만날 수 있을까? 그들의 앞날엔 어떤 여정이 펼쳐질까? 천공의 성 라퓨타의 운명은?


아무리 강한 무기가 있어도, 땅을 떠나서는 살 수 없다!


미야자키 하야오가 특히 신경 쓰는 건 '메시지'다. 전반적으로 비슷한 메시지를 전달하고자 하는데, 이번엔 '자연' 그리고 '인간의 욕망'이다. ⓒ대원 C&A 홀딩스



캐릭터와 서사를 애니메이션이 갖는 성격이라고 생각되는 것에 가장 잘 맞게 꾸려 놓고선, 그야말로 확실하고 확고한 메시지를 던지는 미야자키 하야오. <천공의 성 라퓨타>를 통해서도 마찬가지다. 그 메시지를 대사를 통해 대놓고 직설적으로 던지는 장면이 있는데, 시타가 정부 밀사 무스카의 계략에 휘말려 위기에 처했음에도 강력히 주장한다. 


"아무리 강한 무기가 있어도, 수많은 로보트를 조종해도, 땅을 떠나서는 살 수 없는 거예요!"


엄청난 힘을 가진 천공의 종족 공주가 '하늘'이 아닌 '대지'를 중요시 여기고 있는 것이다. 자연과 더불어 사는 삶이 중요하다는 뜻으로 보이는데, 천공의 종족이 하는 말이라서 더욱 중요하고 깊이 있게 들린다. 일종의 겸손함까지 엿보인다. 이는 대지의 종족인 인간이 천공의 성을 침범해 보물을 훔치고 지배하려 드는 모습과 완벽히 대비된다. 인간의 끝간데 모를 욕망, 그 끝엔 자연이 있다. 다분히 미야자키 하야오가 만들어낸 구조겠다. 그들이 침범하는 곳은 결국 자연인 것이다. 


그들은 곧 자연에게 큰 벌을 받게 되어 있다. 그건 익히 알고 있는 서사 패턴, 하지만 그걸 어떤 식으로 보여줄지, 어떤 식으로 보여줘야 확실히 각인 되어 잊지 않게 할지는 만드는 이의 선택이자 역량이다. 특히 이 분야(?)에서 탁월함을 보이는 미야자키 하야오는 유감없이 그 실력을 발휘한다. 아마도 이 애니메이션을 보고난 후 풀 한 포기라도 아껴야 겠다, 함부로 재물을 탐하지 말아야겠다, 하는 생각이 들 것이다. 


30년 전부터 환경파괴와 환경보호가 애니메이션의 주된 내용으로 부각될 정도이니, 현재는 어떨지 상상도 되지 않는다. 이미 지구는 사람이 살 수 없는 곳이 되어버리지나 않았는지... 새삼스레 자연을 보호하자는 교훈을 던지고 싶진 않다. 누구나 인지하고 있는 것이기에 오히려 부작용이 일 수 있다. 그럼에도 후손들을 생각하면 그런 교훈을 생각하지 않을 수 없다. 말로 하는 대신 다른 방법이 있다. <천공의 성 라퓨타>를 보면 될 것. '백문이 불여일견' 아닌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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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래된 리뷰] 봉준호 감독의 <살인의 추억>


올해로 30년이 된 '화성 연쇄 살인 사건'을 가지고 지난 2003년에 봉준호 감독이 만들어낸 <살인의 추억>. 2000년대 한국 영화가 낳은 최대 최고의 쾌거다. ⓒCJ엔터테인먼트



올해로 30년이 되었다. 한국에서 발생한 최초의 연쇄살인사건이자, 최악의 미제 사건. 일명 '화성 연쇄 살인 사건'. 1986년 9월 15일에 시작되어 10명의 여성이 피해를 입었다. 반경 5km 안에서 일어났음에도, 180만 명의 경찰이 동원되었음에도, 결국 살인자를 잡을 수 없었다. 잡히지 않는 범인도 대단하지만, 범인을 잡지 못하는 경찰도 대단했다. 잡을 마음이 없었던 게 아닐까, 생각할 정도로. 


1990년대 중반에 3편의 단편으로 화제를 불러일으켰지만 한동안 연출을 이어나가지 않았던 봉준호 감독은, 2000년 <플란다스의 개>로 장편에 데뷔한다. 비록 흥행엔 실패하지만 평단의 호평과 마니아층의 환호 속에 2003년 <살인의 추억>으로 돌아온다. '화성 연쇄 살인 사건'을 모티브로 한 이 영화는 그야말로 대대적인 흥행과 호평을 받으며, 봉준호 감독을 단번에 충무로의 총아로 발돋움시킨다. 


대사과 장면은 물론, 캐릭터까지 완벽한 영화로서, 한국만이 가지는 시대상에 그동안 한국 영화가 가지지 못했던 할리우드식 구도를 훌륭히 접목시켰다. <살인의 추억>으로 한국 영화는 한 단계 업그레이드 되었다고 할 수 있을 것이다. 그것도 지극히 영화 내적이니만큼, 전후 어디서도 찾아 보기 힘든 쾌거다. 


'왜' 그때 범인을 잡을 수 없었을까


영화를 보면 답답하기 그지 없다. 도대체 왜 범인을 못 잡는 것인가. 지금이라면 잡을 수 있을 것 같은데, 아니 '미제' 사건이니까... ⓒCJ엔터테인먼트



1986년 경기도 시골에서 강간살인 사건이 발생한다. 오래지 않아 동일범의 소행으로 추정되는 사건이 발생하자, 특별수사본부가 꾸려진다. 두만(송강호 분)과 용구(김뢰하 분)는 토박이 형사로, 뛰어난 '감'과 끈질긴 '족치기'로 쉽게 범인을 잡으려 든다. 뒤늦게 서울에서 자진 합류한 태윤(김상경 분)은 거짓말 하지 않는 '서류'만 믿을 뿐이다. 


아무래도 처음엔 '감'에 의지하게 되는데, 도무지 '서류'에 맞지 않아 범인이 아니라고 말하는 태윤을 무시한 채 현장검증을 했다가 범인이 부인해 전국적으로 망신살을 당하고 만다. 결국 반장이 파면당하고 서울에서 새로운 반장이 오기에 이른다. 그는 두만과 태윤의 감과 서류를 모두 이용해 또 다른 유력 용의자를 잡아 들였지만, 그마저도 상식적으로 범인이 아니다. 그렇게 사건은 한없이 미궁 속으로 빠져들고 만다. 


영화는 한국 최악의 미제 사건을 모티브로 삼은 만큼 결말이 이미 나와 있는 거나 다름 없다. 결국 범인은 잡히지 않았다는 것. 그렇다면 도대체 '왜' 범인을 잡을 수 없었는가 하는 게 중요한 포인트일 것이다. 여기서 생각해봐야 할 게 있다. 그때가 아닌 지금이라면 범인을 잡았을까? 모르긴 몰라도 잡을 수 있을 듯하다. 그건 단순히 30년이라는 긴 세월의 차이 때문만은 아니다. 세월의 차이가 아닌 다른 차이, 이 영화가 보여주고자 하는 바이다. 


나라를 대표하는 이들의 '무능'


시골 형사, 도시 형사를 막론하고 그들은 '무능'하기 짝이 없다. 나라를 떠들썩하게 한 사건이니만큼 그들은 나라를 대표한다고 할 수 있겠다. 나라를 대표하는 이들의 '무능'이다. ⓒCJ엔터테인먼트



그건 시골이 가지는 후진성일까. 꼭 그렇지만은 않은 것 같다. '두만'이라는 한 개인이 가지는 특수성에 기인할지도 모든다. 아니면 둘이 합쳐졌는지도. 그는 감에 의지해 곧잘 범인을 때려잡는다. 그런데 그에겐 좁디좁은 동네 돌아가는 사정을 꿰뚫는 여자가 하나 있다. 그녀가 지나가는 말로 하는 얘기를 귀담아들었다가 행동으로 옮기는 것이다. '과학에 입각한 수사'와는 하늘과 땅만큼이나 떨어져 있다. 이게 과연 시골에만 해당하는 걸까. 나라를 떠들썩하게 한 만큼, 두만은 시골을 대표하는 게 아니라 나라를 대표하는 이라고 봐야 한다. 


그렇다면 유연성 없는 서류 수사의 후진성일까. 이 또한 '태윤'이라는 한 개인이 가지는 특수성에 기인 또는 둘이 합쳐졌는지도 모르겠다. 그는 서류에 의지해 범인을 잡으려 한다. 거기에는 사실만 있을 뿐이니까. 시험문제 답은 전부 교과서에 있는 법 아닌가. 그런데 중학생한테 고등학교 시험 문제를 내주면 풀 수 없는 법, 태윤한테는 이 신출귀몰한 범인은 너무 어려운 시험 문제다. 교과서 밖에서 낸 응용문제다. 그는 두만이 잡아들인 용의자가 범인이 아니라는 걸 알 뿐이다. 두만과는 또 다른 종류의 '무능'. 나라를 대표하는 이들의 무능은 종류도 다양하다. 


이 판국에 그들이 할 수 있는 건 많지 않다. 별의별 말 같지도 않은 추리를 진지하게 내뱉는 그들을 보고 있노라면 웃음도 나오지 않는다. 그 중에 절정은 무당. 두만과 용구는 무당한테 찾아가 범인의 얼굴을 알 수 있는 방법을 알아온다. 무당이 준 화선지에 먹물을 쓱 뿌리고 자연스럽게 내려 말리면 범인의 얼굴이 비춘다는 것. 얼마 전까지라면 도무지 이해할 수 없는 짓이었을 거라 생각했겠지만, 지금이라면 이해가 가고도 남는다. 어련하시겠어요. 


영화는 그럴 수밖에 없는 상태로 천천히 흘러간다. 완벽한 짜임새다. 그들만의 세상 - 이물질 투여 - 대립 - 그들과 이물질의 실행 - 실패 - 결합 - 성공 징후 - 최종 동반대실패. 분명 이들에게도 성공의 여지가 있었다. 그러나 그들 스스로가 망치고, 운이 따라주지 않았고, 정부가 도와주지 않았다. 무엇보다 시대가 그들을 버렸다는 느낌을 지울 수 없다. 


이 미제 사건의 근원, 지금도 활개치고 있다


이 미제 사건의 근원은 당시 '시대'에 있겠다. 그런데... 그런데 지금은 어떤가? 왜 여전히 이 사건은 미제인가? 그때나 지금이나 다를 바 없는 것인가. ⓒCJ엔터테인먼트



때는 1986년, 전두환 시대의 절정이다. 비록 이듬해 민주화 운동의 거침 없고 매서운 불길에 움츠러들 테지만, 바로 그 전이기에 시대의 흐름에 저항하는 정권의 움직임은 매서웠을 것이다. 영화는 그런 모습들을 짧게나마 잡아내는데, 그 순간이 의미심장하다. 연쇄 살인 사건의 유력한 용의자에게 행하는 발길질을, 데모하는 여학생에게 똑같이 행하는 용구의 모습은 시대의 상징 그 자체이다. 


우린 그 순간의 모습으로 한 가지 사실이자 이 '미제' 사건의 근원을 알 수 있다. 정부는 이 사건을, 이 여성 강간 살인 사건을 수사할 저의가 없었다는 사실 말이다. 그들의 눈은 강간당해 죽은 여성에게 향해 있지 않았고, 자신을 위협하는 여성에게 있었다. 그들의 발은 자신을 위협하는 여성을 밟는 데 힘을 소진해, 강간당해 죽은 여성의 억울함을 밝히는 데 힘을 쏟을 여지가 없었다. 그때는 그런 시대였다. 


지금도 그런 시대다. 그래서 마음이 아프다. 그 시대를 마음껏 욕하면서, 그 시대를 살았던 무능하고 악랄한 이들을 욕하면서, 그 시대를 향유했던 이들을 욕하면서, 그 시대가 물려준 아픔과 상실과 치욕을 치유하려 했는데 그러지 못하게 되었다. 우리 시대는 자칫 역사상 최악의 시대가 될 위기에 처한 것이다. 이 위기를 헤쳐나간다고 해도, 분명 이 시대는 '무능의 시대'로 남게 될 거다. 


'살인의 추억'은 여러 모로 잔인했다. 에먼 사람을 잡아 족치는 동안 또 다른 희생자가 발생하고, 서로 잘났다 못났다 싸우는 동안 또 다른 희생자가 발생하고, 화해한답시고 거나하게 술판을 벌이는 동안 또 다른 희생자가 발생한다. 이보다 잔인한 게 있나. 에먼 사람을 잡아 족치는 것 자체가 희생자를 유발하는 행위이기도 한 것을, 그런 추억은 기억에서 지워버리고 싶다. 


하지만 기억하지 않으면 발전하지 않는다. 그래서 기억하고 되새기고 잊지 않으려 한다. 그런데 왜 자꾸만 더 어처구니 없고 황당무계한 일들이 벌어지고 마는 것일까. 어째서 잊지 않으려 하는 데에서 멈추고 바꾸려 하지 않는 것일까. 바꾸지 못하는 것일까. 바뀌지 않는 것일까. 정녕 모든 걸 비우고 다시 시작해야 하는 것일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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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래된 리뷰] 김지운 감독의 <달콤한 인생>



'김지운식' 스타일에 정점에 오른 작품이라 할 수 있는 <달콤한 인생>. 주연배우 이병헌도 이 영화로 해외진출에 발판을 마련할 수 있었다. ⓒCJ엔터테인먼트



1998년 <조용한 가족>으로 열렬한 찬사와 지지를 받으며 데뷔한 김지운 감독. 이어서 2000년 <반칙왕>과 2003년 <장화, 홍련>으로 필모 정점을 찍는다. 동시에 '김지운식 영화'가 완성되었다. 장르 영화의 대가. 장르가 가지는 강렬함에 파묻히지 않고, 오히려 자신만의 스타일에 장르를 끼워맞추는 솜씨를 선보인다. 그 완성에 가장 가까이 간 작품은 아마도 2005년 작 <달콤한 인생>일 것이다. 


<달콤한 인생>은 이병헌이 '해외에 나를 알릴 수 있었다'는 이유로 자신의 인생작으로 뽑는 바, 당시 한국영화사상 최고가로 해외(일본)에 팔렸다. 그건 김지운 감독 영화의 특징 아닌 특징이기도 한데, 국내도 국내지만 해외에서 '스타일리스트'로서의 이미지가 좋게 비치는 것 같다. 그렇게 할리우드에 진출하기도 했다. 비록 참패를 면치 못해 더 이상 이어나갈 수 없었지만. 


김지운 감독다운, 김지운식 누와르 


'거기에 누와르가 있었을 뿐, 나는 나의 길을 갈 뿐이다.'로 영화를 또 다르게 요약할 수 있겠다. 장르에 구애받지 않은, '김지운'이라는 장르를 만들어낸 대가의 절정기이다. ⓒCJ엔터테인먼트



영화는 '누와르'라는 장르적 성격이 지극히 강한 장르를 표방하지만, 역시 김지운 감독답게 자신의 스타일을 앞세운다. 한 해 뒤에 개봉하는 유하 감독의 <비열한 거리>가 한국영화가 보여줄 수 있는 정통 누와르에 가장 가까이 다가간 영화 중 하나라고 한다면, 김지운 감독의 <달콤한 인생>은 그저 김지운 감독의 영화다. 이번에 그가 택한 게 '누와르'였을 뿐이다. 그래서인지 누와르에서 흔히 보이는 조직의 본모습, 치열한 뒷공작, 당연한 우정과 배신이 보이지 않는다. 대신 완벽하게 짜여진 미장셴과 기가 막힌 연기와 대사 신공, 숨겨진 상징들이 보인다. 결코 싫어하기 힘들다. 


선우(이병헌 분)는 강사장(김영철 분)의 신임을 얻어 '호텔 크라운'을 철저히 관리하고 있다. 룰을 어기면 피도 눈물도 없이 처단해버리는 냉혈한이다. 바로 그런 점이 강사장의 선우를 향한 믿음의 결정체일 것이다. 어느 날, 강사장이 상하이로 삼일간 출장을 다녀오게 되었다. 그러며 선우에게 긴히 한 가지 일을 맡긴다. 


어린 애인이 하나 있는데 아무래도 그녀가 바람을 피는 게 아닌가 의심스럽다는 것이다. 선우에게 삼일 동안 감시하면서 사실로 드러나면 즉시 자신에게 전화를 하거나 알아서 처치하라는 명령을 내린다. 언제나 그랬듯이 선우는 그 믿음에 보답하기 위해 불철주야 희수(신민아 분)를 감시한다. 


결국 희수가 바람을 피는 게 사실로 드러나고 선우는 당장 그녀와 그를 잡고 강사장에게 전화를 걸려 한다. 그들은 죽음을 면치 못할 것이다. 하지만 그 순간 선우는 짧은 기간 희수에게서 느낀 감정에 흔들린다. 그녀와 눈맞힌 찰나의 순간, 그녀의 귀와 입과 손과 어깨. 그 달콤한 순간들이 그에게 돌이킬 수 없는 최악의 선택을 하게 만든다. 선우는 강사장에게 전화도 하지 않고 그들을 살려준다. 강사장은 한국으로 돌아오고, 선우를 향해 무시무시한 죽음의 칼날을 드리미는데...


'사랑'과 '믿음'이라는 김지운식 콤비


한 사람의 인생을 뒤흔든 이 역정이 고작 그 순간의 '사랑' 때문이었나. (사실 사랑이라고 하기도 그렇다.) '믿음'을 저버렸다고 생각했겠지. 하지만 당한 사람 입장에서도 '믿음'이 배신당했다고 느꼈을 테다. ⓒCJ엔터테인먼트



영화의 스토리 자체는 특별할 만한 게 없다. 한 인간의 특별한 인생역정이라고 할 수 있을까. 거기에 달콤한 순간의 '사랑'이 있고, 그 특별할 것 없는 사랑으로 속절없이 깨지는 오랜 기간 숙성된 '믿음'이 있다. 누와르와는 상당히 거리가 멀어 보이지만, 어둠의 범죄와 폭력을 다룬다는 점에서 누와르 장르라고 할 수 있겠다. 이 영화에서는 '믿음'이라는, 인간 행동의 가장 강력한 동인(動因)이 사랑이라 말하기 모호한 순간의 '달콤함'에 속절없이 배신당하는 게 누와르랑 가장 근접해 보인다. 김지운식 누와르. 


'사랑'과 '믿음'이라는, 누와르에는 맞지 않을지 모르지만 김지운에게는 딱 들어 맞는 신기한 콤비는, 영화의 대미를 장식하는 희대의 대사로 표현할 수 있다. 선우의 '저한테 왜 그랬어요?'라는 물음에, 강사장이 대답한다. '넌 나에게 모욕감을 줬어.' 이 얼마나 치졸하고 치명적인 대답인가, 이 얼마나 유머러스한 대답인가. 이 대답 하나가 영화를 전복시켜버릴 만하다. 


영화 뿐이랴? 인간을 전복시킬 수도 있는 말이다. 겨우 그깟 이유로 한 사람의 인생, 나아가 수많은 사람들의 인생이 사라지다니. 그러면서도 '그게 바로 인간이지' 하는 생각도 들게 만든다. 뭐 별 거 있겠어 하고 말이다. 그들의 대화가 주는 허무함, 그 허무함으로 말미암은 유머적 감성이 만들어낸 수많은 패러디만으로 이 대사를 판단할 수 없는 것이다. 거기엔 참으로 많은 것들이, 높은 것들이 포함되어 있다. 


호불호의 연기, 완벽한 미장셴, 그리고 즐기는 영화


감독의 의도가 완벽하게 구현된 화면, 자신을 잊지 않으면서도 그 미장셴에 어울리게 연기하기란 정말 어려울 거다. 이러니 김지운 영화는 즐기기에 정말 최고다. ⓒCJ엔터테인먼트



상상을 초월한 상징도 상징이지만, 연기를 말하지 않을 수 없다. 이병헌의 액션, 김영철의 카리스마, 황정민의 메소드. 누와르 장르답게 보고도 믿지 못할 액션이 아닌 지극히 리얼한 액션을 선보인 이병헌. 액션은커녕 움직임도 별로 없지만 눈빛과 목소리와 분위기로 누구보다 압도적인 면모를 선보인 김영철. 그리고 어디서 양아치를 데려와서 연기 수업을 시킨듯한 느낌을 받게 한 황정민. 감독의 완벽주의적 작업 스타일이 영화 곳곳에서 나타나는 바, 연기에도 그 스타일이 고스란히 반영된 듯하다. 


하지만 영화의 홍일점 신민아의 연기는 아쉬운 정도를 넘어섰다. 그녀의 아름다움이야 정평이 나 있지만, 적어도 이 영화에서 두 남자가 제대로 된 대답도 못한 채 목숨을 걸고 싸울 만한 여자는 아니다. 내가 보기엔 그렇게 생각한 이유가 다름 아닌 신민아의 연기 때문인 것 같다. 영화 내용상 팜므 파탈의 모습을 선보여야 하지만, 그렇지 못할 바엔 지극히 위험하게 사랑스럽기라도 해야 하는데 전혀 그렇지 못했다. 에릭의 출현은 아직도 의문이다. 앞으로도 의문으로 남을 예정이다. 그 앞에 어떤 이유가 붙더라도 말이다. 


미장셴을 빼놓으면 섭하다. 너무나도 유명하지만 간단히라도 집고 넘어가지 않을 수 없다. 김지운의 미장셴은 아무래도 멈춰진 화면에 있을 거다. 카메라 워킹이 화려하지 않는 반면, 멈춰진 화면에 완벽하게 짜여진 소품들과 인물의 배치가 인상적이다. 그 프레임 안에서 최대한 역동적인 모습을 선보인다면, 그 모순이 주는 쾌감이 굉장할 것이다. 김지운이 추구하는 미장셴은 그런 게 아닐까. 


한편 <달콤한 인생>에서 선보이는 미장셴은 <장화, 홍련>의 연장선이라고도 할 수 있겠다. 명암의 확실한 대비에서 오는 또 다른 모순의 쾌감이 그것이다. 영화의 대부분을 어둠이 지배하고 있는 가운데, 하얗과 빨강이 주는 아름다움. 김지운 감독은 그 대비를 만들어 내기 위해 고의적으로 장치를 만드는 것처럼 보인다. 


영화를 보는 이유가 적지 않을 거다. 교훈, 힐링 등을 '얻기' 위해, 화려한 액션이나 미장셴을 '즐기기' 위해, 시대상이나 영화 자체를 '연구'하기 위해. <달콤한 인생>은 어디에 포함될까. 단연 '즐기기' 위함이 아닐까. 아마 김지운 감독이 추구하는 바일 것이다. 그 안에 다양한 것들, 이를 테면 상징, 연기, 캐릭터, 미장셴, 액션 등을 넣으니, 이 영화는 보고 또 봐도 전혀 질리지 않는다. 김지운 감독은 영화를 참으로 '잘' 만든다. <달콤한 인생>은 참으로 '잘' 만들어진 영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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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래된 리뷰] <노트북>


당연하게도 재개봉을 해, 당연하게도 좋은 흥행을 기록한 영화 <노트북>. 현대판 로맨스 클래식으로서의 입지를 확고히 했다. ⓒ글뫼



최근 어김없이 재개봉 대열에 합류한 영화 <노트북>. 지난 2004년 개봉해 3천만 달러가 되지 않는 제작비로 전 세계 1억 달러가 넘는 흥행을 올린 바 있고, 국내에서는 약 80만 명의 관객을 동원해 괜찮은 흥행 성적을 올렸다. 재개봉 성적 또한 상당히 좋은 편으로, '구관이 명관'임을 입증했다. 


영화는 정통 멜로를 표방하며 2000년대 영화 중 가장 많은 눈물과 콧물을 쏟아내게 했다. 이 영화가 성공한 후 한동안 '<노트북> 따라쟁이' 영화들이 나와 성공을 꽤하기도 했다. 예측 가능한 스토리 내에서 나름의 반전을 시도해 누군가의 '반전 영화' 리스트에서 만난 적이 있다. 내외적으로 이야깃거리가 상당한 영화라 하겠다. 


클래식 반열에 올라서다


이 영화가 현대판 클래식으로 올라선 데에는 스토리라인 자체가 갖는 '고전적' 느낌이 크게 작용할 것이다. 한 눈 팔지 않고 고전에 올인해 제대로 된 걸 선보였다고 할까? ⓒ글뫼



영화의 스토리도 스토리거니와 스토리라인과 분위기가 왠만한 고전(영화) 뺨치게 고전적이다. 반전조차도 고전적 서사의 한 줄기 안에서 한 치의 어긋남이 없다. '전형적'이라는 말이 필요가 없다. '전형적'이라는 말을 생겨나게 한 장본인과 같은 라인에 속하니까 말이다. 이 영화가 여전히 인기를 끌고 있는 사실 그 자체가, 우리가 새롭고 쿨하고 스피디한 것만 원하는 건 아니라는 걸 알 수 있는 대목이다. 


놀이 공원에서 '앨리'(레이첼 맥아담스 분)를 보고 한 눈에 반한 '노아'(라이언 고슬링 분). 다자고짜 위험천만한 곡예를 펼치며 그녀에게 들이댄다. 마지못해 교제를 허락한 앨리지만 곧 잊어버린다. 하지만 노아는 포기하지 않고 그녀의 눈에 들기 위해 노력하고, 앨리는 그가 눈에 밟힌다. 그들은 우여곡절 끝에 사귀게 된다. 17세 한창인 그들은 곧 불이 붙어 주체할 수 없이 맹렬하게 서로를 원한다. 그야말로 불꽃 같은 사랑이다. 


문제는 집안의 격차다. 앨리는 지역 유지의 딸, 노아는 막노동꾼. 이어질 수가 없다. 당연히 앨리의 집안에서 극심한 반대가 따르고, 앨리는 극렬히 대항하지만 노아가 자신의 분수를 안다는 말로 앨리를 떠나보낸다. 먼 곳의 대학에 진학하게 된 앨리, 막노동꾼으로 생계를 이어가다 전쟁이 터져 군대를 다녀온 노아. 


그렇게 7년이 지난 후 노아는 아버지가 돌아가시기 전에 사주신 오래된 폐가를 공들여 재건축한다. 그를 계기로 신문에 난 노아를 결혼 직전의 앨리가 보게 되고, 앨리는 그 즉시 노아를 찾아간다. 7년 간 이어진 오해를 풀고 서로의 진심을 알게 된 그들. 어떤 선택을 하게 될까. 7년 전의 그 사랑은, 한순간 맹렬히 타오르고 꺼지는 불꽃일 뿐이었을까. 아니면 폭발하진 않아도 영원히 꺼지지 활화산처럼 만날 수 없어도 영원히 지속될 불꽃이었을까. 


예상치 못한 또 다른 절절한 로맨스


영화는 젊은 남녀의 로맨스 말고도 또 다른 로맨스를 선보인다. 오히려 이 영화의 꽃은 이 늙은 남녀의 로맨스일 것이다. 더욱 절절하고, 반전도 있다. ⓒ글뫼



영화는 알츠하이머병에 걸린 할머니에게 할아버지가 매일 찾아와 들려주는 이야기가 주된 내용인데, 이 할머니와 할아버지가 앨리와 노아라는 걸 직감할 수 있지만 확실할 순 없는 게 은근히 또 다른 재미이다. 앨리와 노아가 단지 할아버지가 각색한 이야기 속 주인공일 수도 있고, 앨리는 할머니가 맞는 게 확실하지만 노아는 할아버지가 맞는지 확신할 수가 없다. 


이 둘의 예상치 못한 절절한 로맨스가 앨리와 노아의 절절함을 넘어서는 게 또 다른 키포인트다. 당연히 멜로 영화인 만큼 이 둘 사이에도 가슴 아픈 뒷 이야기가 있을 거라 생각은 했지만, 이 정도의 절절함을 선보일 줄은 몰랐다. 그 절절함은 그대로 전해져와 눈물이 되어 흘러 내린다. 


화의 1차 반전이 앨리와 노아에게서, 2차 반전이 할머니와 할아버지에게서 일어나는 만큼 이들을 더욱 눈여겨볼 필요가 있다. 반전이 누구한테 일어난다는 걸 알려주는 건 범죄(?) 행위에 다름 없지만, 그것이 눈물을 동반한 로맨스에서 기인한 것이라면 미리 알려주는 게 예의라고도 할 수 있겠다. 깜짝 놀라게 하는 반전의 경우와는 달리, 알고 있어 준비하면 오히려 더 절절함을 느낄 수 있기 때문이다. 더구나 이 영화는 재개봉할 정도로 유명하니까 말이다. 


진정한 사랑이란?


이 영화를 보고 나면 필수적으로 따라오는 것들. '나라면?' '너라면?' '진정한 사랑이란?' 일단 영화를 보자. ⓒ글뫼



영화가 끝나고 나면 필수적으로 질문하게 되는 사항이 있다. '나라면 어떻게 할까, 너라면 어떻게 하겠니.' 다름 아닌 '사랑'에 대한 질문이다. 청춘을 오롯이 바쳐서, 평생을 오롯이 바쳐서 단 한 사람만을 사랑할 수 있을까? 그것이 과연 가능할까? 후회 없이 여러 사람과 사랑하고서야 비로소 진정한 사랑을 찾을 수 있는 게 아닐까?


영화는 한 사람만을 지극히 사랑하는 게 진정한 사랑이라 말한다. 진정한 사랑을 '찾기 위해' 노력할 필요가 없다. 진정한 사랑과 '재회하기 위해' 노력하면 되는 것이다. 선택은 그 진정한 사랑인 상대에게 달려 있지만, 그렇게 한 사람만을 사랑했다는 것 자체로 여한이 없다고 말한다. 


어느 동화에서도 이런 이야기는 찾아볼 수 없을 거다. 그런데 이 영화는 실화를 바탕으로 한 소설이 원작이다. '영화보다 더 영화 같다'는 말의 장본인이라고 할 수 있겠는데, 이야기 자체가 그런 말에서 자연스레 파생되는 기대를 저버리지 않을 만큼 재미있다. 고전적인 서사답지 않게 은근 파격적이고 은근 스피디하다. 그런 점들이 은근 새롭게 다가온다. 정녕 전형적으로 전형적이기만 했다면, 이 영화는 아무도 보지 않았을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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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래된 리뷰] 마틴 스콜세지 감독의 <디파티드>


마틴 스콜세지 손에 의해 부활한 <무간도>, <디파티드>. <무간도>가 가진 특유의 포스트 모더니즘 적이고 황량한 분위기를 잘 구현해냈을까? 아니면 그만의 스타일로 재탄생해냈을까? ⓒ워너브러더스 코리아



지난 2002년 홍콩 느와르가 느닷없이 부활했다. 유위강, 맥조휘 감독에 양조위, 유덕화가 주연을 맡은 영화 <무간도>에 의해서였다. 영화는 홍콩을 넘어 세계적으로 인기를 얻었고 오래지 않아 2, 3편이 만들어져 시리즈를 마무리지었다. 홍콩이라는 도시가 갖는 황량한 분위기와 주인공들의 비극적인 삶이 조화를 이루어 가슴을 후벼팠다. 


지난 2013년에 개봉해 좋은 평가와 흥행을 했던 <신세계>는 <무간도>와 많이 비교되곤 하는데, 신분을 완전히 세탁해 조직으로 잡입한 경찰 이야기 라는 점에서 비슷했기 때문이다. 하지만 워낙 뛰어난 <무간도>로 괜찮게 만들어진 <신세계>는 설 자리를 잃은 느낌이다. 


<신세계>보단 괜찮지만 역시 <무간도>에 비교해 많은 욕을 먹었던 영화가 하나 더 있다. <무간도> 시리즈를 리메이크 한 마틴 스콜세지 감독의 할리우드 영화 <디파티드>가 그것이다. 레오나르도 디카프리오, 멧 데이먼, 잭 니콜슨이 열연해 오스카 최고의 영예인 최우수작품상과 감독상을 수상했음에도 그러하다. 리메이크의 어쩔 수 없는 숙명인가, 정녕 <무간도>보다 <디파티드>가 못한가. 


마틴 스콜세지 스타일로 리메이크 한 <무간도>, 과연?


영화는 마틴 스콜세지 스타일이다. 특이하다면 특이할 수 있기에, 호불호가 나뉜다. 그렇지만 그는 거장이고, 이 영화가 명작인 건 부정할 수 없다. ⓒ워너브러더스 코리아



결론부터 말하자면, <무간도>를 본 입장에서 <디파티드>가 상대적으로 별로라고 느낄 수밖에 없다는 거다. 그건 아마 홍콩과 보스턴의 거리와 분위기의 차이 만큼일 거다. 그리고 한국 사람의 시선에서도 아무래도 보스턴보다는 홍콩이지 않을까. <영웅본색> 등으로 익숙한 홍콩 느와르이지 않은가. 또한 마틴 스콜세지의 독특한 스타일이 느와르라는 장르에 그리 적절하진 않은 듯한 느낌이 든다. 들 수밖에 없다. 


영화는 <무간도>를 본 이라면 따로 설명할 필요가 없을 정도이다. 보스턴 최대 범죄 조직을 이끄는 보스 코스텔로(잭 니콜슨 분), 메사추세츠 주 경찰청은 이 조직을 일망타진하기 위한 작전의 일환으로 신입 빌리(레오나르도 디카프리오 분)를 조직에 투입시킨다. 코스텔로도 메사추세츠 주 경찰청에 첩자를 투입시켰는데, 뛰어난 실력과 언변으로 승승장구 중인 신입 설리반(멧 데이먼 분)이 그다. 


이 둘은 침투한 조직과 경찰청에서 승승장구하며 핵심에 다가간다. 그렇게 그들은 핵심 정보를 정체성의 고향인 곳으로 적절히 알려준다. 경찰은 빌리의 정보로 코스텔로 조직을 일망타진하려 하지만, 설리반이 정보를 코스텔로에게 알려주어 위기를 넘기는 식이다. 번번이 추격당하고, 번번이 실패하고, 조직과 경찰청에서는 내부 스파이를 의심한다. 그 의심은 시시각각 빌리와 설리반, 특히 빌리의 목을 조여온다. 


리메이크니 만큼 스토리는 똑같을 테니, 마틴 스콜세지는 스타일로 승부를 본다. 그만이 가진 특유의 감각적인 스타일로, '대도시' 보스턴의 악명 높은 뒷골목을 그려냈다. 특히 이탈리아계 조직이 주름 잡았던 시대에 아일랜드계(코스텔로, 빌리)가 비집고 들어가 활동하는 모습을 통해 통통 튀는 감각을 극도로 끌어올릴 수 있었다. 바로 그 부분이 <무간도>의 진중하면서도 우중충해 한층 비극적인 분위기와 상충되는 것이다. 


아이러니의 절정, 큰 얘기를 담은 <디파티드>


영화는 철학적인 이야기까지 나아간다. 그건 아이러니이다. 그러며 굉장히 큰 이야기이기도 한데, 마틴 스콜세지만이 할 수 있겠다 싶다. ⓒ워너브러더스 코리아



<무간도> 리메이크라는 수식어를 던져 버리고 <디파티드> 자체를 보자. 그러면 보이지 않던 것들이 보인다. 아무래도 설리반 보다는 빌리에게 초점이 맞춰진 바, 빌리는 아버지와 삼촌이 코스텔로도 잘 알고 경찰청에서도 잘 아는 전설적인 보스이기 때문에 그의 인생을 들여다보고 경찰에 잘 맞지 않은 대신 조직에 잠입하면 더할 나위 없다고 판단해 조직원으로의 길을 걸을 수밖에 없게 되었기 때문이다. 


그 자체로 비극인데, 그는 아일랜드계로 이탈리아계가 주름 잡고 있는 보스턴 뒷골목을 휘젓고 다녀야 할 운명이다. 그 곳은 그가 있어야 할 자리가 아닌 것이다. 비극은 이미 잉태되어 무럭무럭 자라고 있었다. 여기서 잠시 <무간도>를 끄집어 내면, <무간도>가 캐릭터에 초점을 맞췄다면 <디파티드>는 캐릭터를 있게 한 상황에 초점을 맞췄다고 할 수 있겠다. 아무래도 캐릭터 중심이 더 스릴 있고 오히려 더 비극적으로 보일 수 있다. 반면 마틴 스콜세지의 감각적이고 풍자적인 스타일이 이 비극을 가릴 요지가 있는 것이다. 


상황은, 빌리를 더욱 더 조직원답게 설리반을 더욱 더 경찰답게 만든다. 그러면 그럴수록 더 꼬여간다. 빌리와 설리반이라는 존재 때문이다. 그런데 설리반은 궁극적인 목적이 무엇일까. 주 경찰청의 전복인가? 절대 그럴 수는 없을 거다. 그럼 설리반은 언제까지 그런 짓을 계속해야 할까. 한편 빌리는 코스텔로와 그의 조직 일망타진이 목적이다. 그런데 설리반 때문에 거의 불가능하다. 그렇다면 조직과 경찰의 관계는? 조직이 없다면 경찰도 없다. 경찰이 없다고 조직이 없진 않다. '조직'이라는 존재 때문에 이 모든 게 존재하는 거라는 명제가 도출된다. 하지만 영화는 그 뒤에 더 거대한 무엇을 숨겨놓는다. 그 끝은 어디일까. 


영화는 '살아가는 이유' '정체성의 방황' 등의 철학적인 생각까지 하게 만든다. 내가 온몸과 온 생각을 바쳐 두 발로 굳게 디딛고 서 있는 이 바닥이, 딱 그만큼의 공력을 들여 내가 무너뜨려야 할 바닥인 게 아닌가. 아이러니의 절정이다. 그런 너무나도 황망한 상황이니 쉬이 공감하지 못할 수 있다. 워낙 큰 얘기인데, 마틴 스콜세지라는 사람의 장막에 가려졌다. 그 얘기를 연기한 이들이 아직은 그를 따라잡지 못했었다. 넘어서지도 못했었다. 개인적으로 레오나르도 디카프리오는 <더 울프 오브 월스트리트>를 기점으로 마틴 스콜세지의 장막을 걷어낼 수 있었다고 생각한다. 


마지막에 보여주는 생각지 못한 서스펜스, 상황의 '잔인'


긴장을 푼 마지막 30분에 진정한 서스펜스를 선사한다. 멋진 배치라고 생각한다. 굉장히 잔인한데, <아수라>의 잔인과는 다른 차원. 이 역시 마틴 스콜세지의 스타일이다. ⓒ워너브러더스 코리아



영화는 150분이라는 긴 러닝타임을 자랑(?)하는데, 100분이 넘어가며 슬슬 마지막을 준비하는 듯하다. 통상적으로 20분이면 완전히 끝을 맺는데, 이 영화 또한 그랬다. 120분이라는, 보통 영화의 보통 러닝타임에 맞춰 영화를 끝맺고 다소 긴 에필로그를 보여주려니 생각했다. 


그렇게 일단락 났다고 생각한 영화는, 이후 30분 동안 생각지 못한 서스펜스를 선물한다. 사실 그 전까지 큰 긴장감 없이 즐기는 수준에서 봐 왔는데, 그래서 조금은 실망감을 감추지 못했는데, 마지막 즈음에서 빵 터진 것이다. 어떻게 보면 그 부분만 따로 만들어 붙인 듯, 어떻게 보면 그 부분을 보여주기 위해 그 전까지 위장 전술을 쓴 듯, 아리송하지만 충분히 멋진 연출이고 배치다. 


모골이 송연해지는 서스펜스, 스릴, 그리고 느와르는 인간이 저지르는 '잔인'하고는 거리가 있다. 잔인할 수밖에 없게끔 만드는 그 상황의 '잔인'이 주요 주제이자 소재인 것이다. <디파티드>는 그것을 긴 러닝타임, 톡톡 튀는 감각, 빼어난 연기, 자유자재의 연출 안에서 훌륭히 풀어내어 보여주었다. 인간이 저지르는 '잔인'이 주를 이룬 한국형 느와르의 최신작인 <아수라>가 아쉽게 다가오는 게 바로 그 때문이다. 눈에 보이는 게 전부가 아니거니와, 관객들은 눈에 보이지 않는 것들을 볼 수 있는 눈을 가졌다. 마틴 스콜세지는 그 사실을 아주 잘 아는 감독이다. 그러면서도 자신의 스타일을 고수할 줄 아는 그는 진정 거장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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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래된 리뷰] 우디 앨런 감독의 <매치 포인트>


세계적 거장 우디 앨런이 영국을 배경으로 한 인간의 빙퉁그러진 욕망을 파헤쳤다. 상업영화를 표방했는데, 그 이면을 들여다보면 그의 전매특허인 풍자가 보인다. 개인적으로 포스터는 별로다. ⓒCJ 엔터테인먼트



테니스 선수를 때려 치우고 부유층의 테니스 강사가 된 크리스. 그는 상류층으로의 진입을 꿈꾼다. 와중에 그가 가르치는 부유층 집안의 자제 톰과 친해진다. 톰의 가족과 오페라를 함께 보게 된 크리스는 톰의 여동생 클로에의 눈에 든다. 그렇게 크리스는 톰과 클로에와 급격히 가까워진다. 클로에와는 잘 될 눈치다. 


어느 날 눈부시게 아름다운 섹시한 여인을 보고 한눈에 반하는 크리스, 하지만 그녀는 다름 아닌 톰의 약혼자 노라였다. 그녀를 가슴 한구석에 고히 모셔둔 채, 크리스는 클로에와의 결혼과 장인 회사 취칙에 연이어 골인하며 꿈에 그리던 상류사회에 진입한다. 자타공인 상류층이 된 것이다. 그렇지만 톰의 약혼자 노라가 자꾸만 생각난다. 


예술영화의 상업화에 성공한 세계적 거장 우디 앨런의 <매치 포인트>다. 주로 미국의 자본주의 위선과 허위를 풍자한 그가 이번엔 영국을 배경으로 한 인간의 빙퉁그러진 욕망을 보여준다. 영국 상류층의 위선과 허위를 풍자할 줄 알았건만, 그런 양상은 크게 다뤄지지 않았다. 아니, 있을지 모르니 한번 찾아보는 시간을 갖겠다. 


천하의 죽일 놈에게 찾아가는 행운


왜 이런 천하의 죽일 놈에게 행운이 찾아가는 걸까. 정신없이 영화를 즐기다 보면 크리스 때문에 씁쓸함을 느낀다. ⓒCJ 엔터테인먼트



우리 앨런이 변화를 시도했다고 볼 수도 있겠는데, 좀 더 가벼워 보이고 좀 더 상업적으로 보이며 좀 더 이해하기 쉬운 것처럼 보인다. 전체적으로 큰 혼란 없이, 하나의 레일 위로만 달리는 기차와 같기 때문이다. 줄기차게 크리스만 따라가다보면 어느새 영화는 끝에 와 있다. 다만, 그렇게 정신 없이 끝에 와 보면 알 수 없는 씁쓸함을 느낄 수 있다. 크리스 때문이다. 


톰의 약혼자 노라를 가슴 한구석에 놓은 채 톰의 여동생 클로에랑 결혼해 톰의 아버지 회사에 취직해 중역의 자리까지 올라간 크리스. 그는 클로에라는 '성공'을 쟁취하고는, 노라라는 '사랑'을 향해 거침없이 달려간다. 누구나 성공과 사랑을 함께 얻고 싶어할 테지만, 크리스에게는 클로에가 사랑이 될 수 없고 노라가 성공이 될 수 없었다. 클로에는 그가 원하는 사람이 아니었고, 노라는 아무것도 가진 게 없는 배우지망생에 불과했다. 그는 어떤 선택을 할 수 있을까. 이대로 계속 지낼 수 있을까. 


'매치 포인트'라는 건 테니스를 비롯한 점수 내기 운동 경기에서 승부를 결정 짓는 마지막 1점을 말한다. 이 1점은 실력도 실력이지만 운이 상당히 작용한다. 너무나 결정적인 순간이기에 제 실력을 발휘할 수도 없거니와, 운에 맡기겠다고 마음 먹으면 이기든 지든 마음은 편하다. 


크리스는 참 운이 좋은 사내다. 일사천리로 성공을 쟁취하고는 사랑을 향해 달려가도 그를 의심하는 이가 없으니 말이다. 보통 이런 식의 전개라면 영화 <리플리>의 리플리처럼 돌이킬 수 없는 파국으로 치닫게 마련이지만, 또 그 파국이 너무 가슴 아프게 하지만, 크리스는 그렇지 않았다. 그는 끝까지 운이 좋았다. 이 영화가 씁쓸하지만 특별했던 이유다. 이런 천하의 죽일 놈에게 이런 행운이...


우디 앨런의 적나라함이 말하는 것들


크리스는 성공을 택할 것인가, 사랑을 택할 것인가. 그는 이 양자택일의 갈림길 앞에서, 적나라하고 지질하고 역겨운 싸움을 계속한다. 우디 앨런은 이를 통해 무엇을 말하고자 하는가. ⓒCJ 엔터테인먼트



영화는 시종 일관 눈을 뗄 수 없게끔 전개된다. 중간에 조금 지루한 공방이 이어지지만, 그조차 긴장 속에서이다. 태풍의 한 가운데는 잔잔한 것과 같은 이치이다. 우디 앨런의 연출력과 스타일을 가장 잘 엿볼 수 있는 대목인데, '적나라함'이 그것이다. 이 대목은 그때까지와의 긴장감이 주는 가슴 조임과는 다른 종류 가슴 조임이 있다. 


크리스는 영원히 '성공'을 멀리하고 영원히 '사랑'과 함께 할 수 있을까. 그토록 성공을 열망해 사랑하지도 않은 사람과 결혼한 그가? 상류층 진입이라는 목표로 테니스 선수를 때려 치우고 테니스 강사가 되었던 그가? 그럴 순 없을 테다. 하지만 상대가 한 번 보면 절대 눈을 뗄 수 없는 절세미녀다. 성공의 본능과 맞먹는 수준의 본능이다. 


하지만 성공과 사랑이 불꽃을 튀기며 대립각을 세우면 사랑은 더 이상 사랑이 아니게 된다. 성공이야 애초에 그럴 거라는 걸 알고 자신의 무엇을 희생한 채 시작한 것이기에 그러려니 할 수 있겠지만, 사랑은 그럴 수 없는 것이다. 현실이 있는 사랑에서 현실이 없는 사랑으로의 길을 갈 수는 없는 거다. 크리스는 그런 양자택일의 갈림길 앞에서 고민한다. 


이 고민 하에서의 크리스와 노라의 적나라하고 지질하고 역겹까지한 싸움이 계속된다. 아무것도 없이 오직 크리스만 바라보고 둘만 함께 하자는 노라, 그 앞에서 어쩔 줄 몰라하는 크리스. 먼저 시작한 건 크리스였지만, 막상 그 상황이 눈앞으로 오니 너무 두려운 거다. 정녕 인간 말종이라 할 만한 크리스, 그런데 왜 크리스의 상황에 공감이 가는 거지? 왜 나도 모르게 그를 응원하고 있는 거지? 인간이 다 그런 건가. 우디 앨런이 말하고자 하는 게, 그가 보여주는 '적나라함'의 의도가 바로 그것인가, 싶다. 


영국의 '용서 받을 수 없는 짓'


이미 '용서 받지 못할 짓'을 수도 없이 저지른 영국(상류층)에게, 역시 '용서 받지 못할 짓'을 저지른 이 하나를 포용하는 건 어렵지 않을 것이다. ⓒCJ 엔터테인먼트



우디 앨런이 이 영화에서는 예상과 다르게 영국 상류층의 위선과 허위를 드러내지 않았다고 생각했다. 왜냐하면 크리스가 상류층을 대변하진 못할 테니까. 하지만 그런 이들이 그 한 명뿐이 아니라고 한다면? 그와 같은 사람들을 충분히 포용(?)할 수 있을 정도의 영국 상류층이니 만큼, 더 한 이들도 충분히 포용할 수 있을지 모른다. 


영국 상류층은 세계 여러 나라의 상류층 중에서도 특별할 거다. 상류층이라는 개념의 원조라고 할 수 있지 않을까. 그렇지만 그들이 저지른 짓은, 나아가 영국이라는 나라가 저지른 짓은, 결코 용서받지 못할 게 많다. 1차, 2차 세계대전을 치르며 아주 훌륭하게 이미지를 탈바꿈했지만, 영국이라는 나라는 한때 '해가 지지 않는 나라'로 전 세계에 수많은 식민지를 만들었던 파렴치의 대명사였다. '산업혁명' 시대 때 자행된 말 못할 학대의 나날들은 달리 설명할 길이 없다. 빙퉁그러진 욕망의 발로라고밖에...


그런 '용서 받을 수 없는 짓'을 수없이 저지른 나라가 영국일진대, 지금은 '신사의 나라'이자 상류층만 존재할 것 같은 멋진 나라가 되었다. 알고도 쉬쉬 하기도 하지만, 아예 모르는 경우도 다반사다. 참으로 운이 좋은 것 같다. 


크리스 또한 용서 받을 수 없는 짓을 저질렀지만, 아주 훌륭하게 상류층에 편입되어 나날이 좋은 일들만 있을 것이다. 우리 앨런이 영국 상류층을 배경으로 그와 같은 사건을 보여준 건, 다름 아닌 영국이라는 나라와 영국 상류층의 역사를 그의 스타일로 풍자한 게 아닐까 생각해본다. 그들의 운은 언제까지 계속될까. 지금까지는 그들이 역사의 주인이었고 게임의 승리자였을지 모르나, 운이라는 대리인을 내려 보낸 신이 언제까지고 그들의 편을 들어주진 않을 거다. 인생이 좋은 쪽으로 계속될수록 어두워질 크리스의 표정을 보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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singenv

冊으로 策하다. 책으로 일을 꾸미거나 꾀하다. 책으로 세상을 바꿔 보겠습니다. singenv@naver.com Since 2013.4.16




[오래된 리뷰] <말죽거리 잔혹사>


검증이 안 된 신세대 스타를 앞세운 유하 감독의 차기작은 어땠을까? 주연뿐만 아니라 조연도 대부분 신인을 벗어나지 못했다. 감독의 의도일까? ⓒ싸이더스



2004년 당시 데뷔 3년이 채 안 된 두 신세대 스타를 앞세운 영화가 개봉한다. 영화 <동갑내기 과외하기>와 드라마 <천국의 계단>으로 최고의 주가를 올리고 있던 권상우, 여고 시절 KBS 도전 골든벨 출연 후 단번에 CF를 찍고 드라마 주연을 꿰차며 스타 반열에 오른 한가인이 그들이었다. 거기에 90년대 후반 패션모델로 데뷔한 후 연기자의 길을 꾸준히 걸으며 여러 드라마와 영화에서 얼굴을 보인 이정진이 주연의 중심을 잡았다. 지금의 기준으로 보면 상당히 파격적인 캐스팅이라 하겠다. 


조연의 면면도 비슷했다. 나름 잔뼈가 굵은 김인권을 제외하고는 이종혁, 박효준 등 경력은 물론 인지도에서도 거의 신인과 다름 없었다. 지금은 충무로 대세 배우 중 한 명인 조진웅은 이 영화에서 대사 한마디를 날리며 화려하게 데뷔(?)했다. 감독의 의도였을까, 제작비 등의 어쩔 수 없는 선택이었을까. 


주연, 조연 할 것 없이 화려하기 그지 없는 현재의 영화 캐스팅 수준과 비교를 해서 그렇게 느끼는 것일 수도 있겠지만, 경력을 떠나 인기나 연기 면에서 이 영화처럼 확실한 인지도 없는 이들이 대부분인 경우가 있었나 싶을 정도다. 독립영화라면 모를까 엄연한 상업영화에서 말이다. 


곤혹스러울 정도의 연기가 아쉽다


보는 사람으로 하여금 곤혹스러움을 느끼게 하는 두 주연배우의 연기는, 시간이 지나서 다시 보니 영화의 즐거움을 배가시킨다. 하지만 당시엔 얼마나 힘들었을까. ⓒ싸이더스



<결혼은 미친 짓이다>로 오랜만에 충무로에 돌아와 괜찮은 흥행과 비평에 성공한 유하 감독은 차기작으로 학교, 추억, 폭력의 앙상블 영화를 기획한다. 거리 3부작의 시작이기도 한 <말죽거리 잔혹사>다. 유하 감독은 학창 시절 경험을 바탕으로 시나리오를 썼다고 하는데, '남자'라면 누구나 꿈꿔봤음직한 그때 그 시절을 깔끔하게 보여준다. 


전남 보성에서 강남 말죽거리로 이사온 모범생 현수(권상우 분), 태권도장을 하는 아버지의 폭압적인 가르침 덕분에 공부도 곧잘하고 달리기나 농구도 곧잘하는 평범하지만 여러 모로 평균 이상의 학생이다. 그 덕분인지 학년 전체를 주름잡는 싸움꾼 우식(이정진 분)의 눈에 띄어 친구가 된다. 


그는 오지랍이 넓은 건지 태권도 정신에서 비롯된 정의감이 투철한 건지 생각이 없는 건지 나서지 말았으면 하는 데에 나서서 일을 자초하곤 한다. 그 와중에 천눈에 반한 은주(한가인 분)를 구해주려다가 일 아닌 일에 휘말리기도 한다. 그녀를 향한 사랑은 현수뿐만 아니라 우식이에게도 있었다. 결국 사귀게 된 건 우식과 은주, 소심하기만 한 현수는 주위를 맴돌기만 할 뿐이다.  


10년이 훌쩍 지난 작품이고, 신인들을 내세웠다지만, 아무리 봐도 형편 없는 연기는 웃음만 자아낼 뿐이다. 그 중심에는 현수와 은주, 즉 권상우와 한가인이 있다. 현수는 후반에서의 싸움 시작과 끝에서만 톤이 올라갈 뿐 시종일관 힘 없고 우울한 톤을 한 음으로 유지하고, 은주는 처음부터 끝까지 역시 힘 없고 우울한 톤을 한 음으로 유지한다. 여기서 질문을 던지지 않을 수 없다. 이건 의도된 연기인가?


70년대 후반을 배경으로 한 만큼 목소리에 있어서 당시의 느낌을 살리려 했을 지도 모른다. 당시 영화들을 보면 굉장히 연극톤이지 않은가. 그런 걸 의도한 것일까. 그렇다고 보기엔 다른 이들의 연기는 너무 다르다. 지극히 현대적이다. 이 두 주연배우의 연기, 특히 연기에서 굉장히 중요한 요소인 발성이 터무니 없이 형편없다는 걸 알 수 있다. 영화에는 이 둘만 등장하는 장면이 꽤 있는데, 이상하게 그 장면에서는 어색하기 짝이 없다. 눈과 귀를 둘 곳이 없다. 그들도 곤혹스러워하는 게 느껴질 정도다. 감독은 왜 그런 연기를 그 정도로 넘어갔을까. 의문이다. 


이런 식의 교육은 폭력 이상의 악질이다


교육이 아닌 교화를 하는 학교. 모든 학생이 똑같을 순 없는데, 똑같으라고 강요하는 학교. 지금도 여전할까? 그때는 참으로 잔혹했다. ⓒ싸이더스



영화는 현수의 성장 스토리로 읽힐 수 있다. 평범한 학생이 일진을 모조리 깨부수고 퇴학까지 당하는 처지가 되니까 말이다. 이게 도대체 왜 성장이냐고 의문을 가질 만하다. 학교폭력을 미화하는 게 아니냐고 되받아칠 만하다. 하지만 당시 시대를 본다면, 당시 국가상을 들여다본다면, 그들이 어떻게 학생들을 통제했는지 듣는다면, 현수의 그와 같은 행동을 성장으로 해석할 수 있음에 충분히 동의할 수 있을 것이다. 


때는 1978년, 박정희의 친위 쿠데타 이후의 유신 시대 한복판이다. 학생들은 등교하면서 선도부에게 '충성'을 외치고, 학교에는 학생 교화를 이유로 군인이 상주했다. 학생들에게 국가에 대한 충성을 요구하며, 국가가, 학교가 원하는 인간이 되길 바랐다. 그렇지 않을 때엔 가차 없는 폭력이 날아왔다. 


그 폭력에는 육체적 폭력, 정신적 폭력, 성적 폭력, 언어 폭력, 인권 유린 폭력 등 모든 종류가 망라되어 있었다. 차라리 단순무식한 육체적 폭력이 가장 낮은 수위의 폭력으로 생각될 정도였다. 그 나이 또래라면 누구나 한 번쯤 해봤음직한, 해보고 싶음직한 행동을, 학교에서는 상상을 초월할 정도의 폭력으로 교화시키려는 것이었다. 


엇나가는 게 당연한 거라 생각할지 모른다. 그걸 당연하다고 생각하면 현수의 성장 스토리는 더 이상 성장이 아니게 된다. 하지만 그와 같은 엇나감은 당연한 게 아니었다. 그런 폭력을 당하는데 당연히 움츠려들며 더욱더 국가가, 학교가 원하는 사람이 되려하는 게 정상 아니겠는가. 대부분의 아이들이 그런 인간이 되어 갔다. 어떤 인간으로 되어 갔든 그들의 잘못도 그들의 자발적인 선택도 아니었다는 게 중요하다. 


반면 현수는 최소한 자발적인 선택을 했다. 반항심과 함께 체력을 키워 가며 반발했다. 그렇다고 그가 돌이킬 수 없는 짓을 저지른 것도 아니었다. 그저 싸움에 휘말렸고 약간의 다툼을 했다. 그리고 성적이 떨어졌다. 학교는 그를 잡아주려 하지 않았다. 그저 '악질'이라고 몰아세울 뿐이었다. 그가 퇴학을 당하는 대형 사건을 저지른 건, 다른 누구도 아닌 학교의 책임이 아닌가. 최소한 '너의 미래를 위해서는, 그렇게 하면 안 된다'라는 제스추어는 취해야 하지 않겠는가. 무조건 '이거 악질이네. 안 되겠어. 혼 좀 나야겠다' 하고 끝나면 그게 무슨 교육인가. 


잔혹의 시대를 살아간 청춘을 위로하다


한 시대가 저무는 1978~9년. 그들이 헤쳐온 잔혹의 시대도 저무는가. 이 영화는 그 시대를 살아간 모든 청춘을 위로해준다. 하지만 그 상처는 쉬이 아물지 않을 듯하다. ⓒ싸이더스



영화는 이소룡으로 시작해 이소룡 대 성룡으로 끝난다. 무슨 말인고 하면, 영화의 시작이 이소룡 영화를 좋아해 빠져들듯 보는 현수의 어린 시절이었고, 영화의 끝이 영화관에 이소룡 영화와 성룡 영화가 동시에 걸렸을 때 현수의 이소룡 옹호와 흉내, 그리고 친구 햄버거의 성룡 옹호와 흉내가 대결하는 장면이었다. 


성룡이 본격적으로 이름을 알린 게 영화 <취권>이었는데 1978년에 나와 우리나라에는 1979년에 들어 왔다. <말죽거리 잔혹사>의 배경이 되는 1978~9년과 정확히 일치하는데, 그때까지도 아직 이소룡의 인기가 훨씬 우위에 있었다. 그렇지만 곧 성룡의 전성 시대가 열리는 바, 한 시대가 저물고 새로운 시대가 떠오른다는 말이겠다. 


박정희 유신시대도 1979년에 비극적으로 종말을 고하는 것과 궤를 같이 한다. 또한 그건 곧 현수와 친구들의 '말죽거리 잔혹사'도 비로소 끝났다는 게 아닐까. 한 시대가 저물고 새 시대가 열리는 건 시원섭섭하고 슬프고 흥분되고 기대되는 일이다. 하지만 어떤 건 그렇고 어떤 건 그렇지 않을 테다. 


이소룡의 시대가 저물고 성룡의 시대가 오는 건 그럴 테지만, 그들의 잔혹의 시대가 가는 건 조금은 다른 차원이다. 평생 다시 오지 않을, 사랑과 우정과 청춘의 학창 시절을 자기 손으로 지워버릴 수밖에 없었던 그들의 찢어진 마음을 보상해줄 이가 어디 있겠는가. 그들을 이해조차 하지 않을 이들이 대부분이 아닐까. 영화는 그런 시대를 살아간 모든 청춘들을 위해 나름의 방식으로 위로하는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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