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오래된 리뷰] 양익준 감독·각본·주연 <똥파리>


똥파리 같은 삶을 사는 이가 있다. 모두가 다 피하는 그. 그는 어쩌다가 그런 삶을 살게 되었을까? 그는 어떤 삶을 살게 될까? ⓒ(주)영화사 진진



용역 깡패 상훈(양익준 분)은 닥치는 대로 욕을 하고 폭력을 휘두른다. 돈을 받아와야 할 대상은 물론, 같이 일하는 후배들도 마음에 안 들면 가차 없이 팬다. 그런 그도 이복 누나와 그 아들인 이복 조카한테는 그나마 대해주는 편이다. 상훈은 사람을 패서 번 돈을 조카 손에 쥐어주며 그 표현을 한다. 


한편 상훈은 길을 가다 우연히 여고생 연희(김꽃비 분)와 시비가 붙는다. 안하무인 상훈에게 대적할 사람이 과연 이 세상에 있을까 하는데, 연희는 전혀 주눅들지 않고 상훈에게 대들며 욕을 날리고 침을 뱉고 때리기도 하지 않는가? 이에 상훈도 주먹을 날리고는 곧 둘은 그들만의 방식으로 가까워진다. 그들에겐 어떤 사연이 있는 것일까? 


상훈은 15년 만에 출소한 아버지를 찾아가 무지막지한 폭력을 가한다. 그는 왜 아버지에게 폭력을 날리는 것인가? 곧 기가 막힌 사연이 밝혀진다. 상훈이 어린 시절 아버지는 어머니에게 무차별 폭력을 휘둘렀다. 어느 날 급기야 식칼로 위협을 하려 하는데, 여동생이 사이에 끼어들어 대신 칼에 맞고 죽는다. 상훈이 여동생을 들쳐엎고 병원으로 향하고 뒤따라 오던 어머니는 차에 치여 유명을 달리한다. 그리고 이미 아버지는 새살림을 차렸던 것이다. 


연희에게도 사연이 있다. 엄마는 포장마차를 운영하다 용역 깡패에 맞아 죽고 없다. 아빠는 정신 이상으로 집에서 놀고 먹는데, 허구헌날 죽고 없는 엄마 타령이다. 오빠라고 있는 영재는 하는 일 없이 연희에게 돈을 뜯어가며 욕을 하고 폭력을 휘두른다. 여고생에 불과한 연희는 공부는 물론 알바를 해서 돈을 벌고 집안일을 도맡아 한다. 


양익준 원맨쇼의 수작 <똥파리>


개인적으로 생각하는 한국 독립영화 르네상스 한 가운데에 <똥파리>가 있다. ⓒ(주)영화사 진진



2009년작 독립영화 <똥파리>는 양익준 감독·각본·주연의 원맨쇼에 가까운, 그럼에도 수작 중 수작이라 할 만한 작품이다. 악마의 폭력을 휘두르는 가해자와 그로 인해 어떤 식으로든 인생을 송두리째 빼앗긴 피해자가 가족이라는 울타리 안에 함께 살아가면 어떻게 되는지 보여주거니와, 그 해결 방도를 나름대로 제시하고 또 피해자였던 가해자의 흔하디 흔한 자기 변명을 정면으로 응시한 문제작이다. 


이 작품은 2010년을 좌우한 독립영화의 르네상스 한가운데에 위치한다. 개인적으로 우리나라 독립영화 3대 작품으로 2005년작 <용서받지 못한 자>, 2009년작 <똥파리>, 2011년작 <파수꾼>을 뽑는데 <똥파리>가 그중 가장 덜 어렵고 가장 직선적인 작품이다. 그래서 역설적으로 가장 성공한 독립영화 중 하나이다. 


사실 이 영화는 상대적으로 그리 폭력적으로 비춰지진 않는다. 육체적 폭력의 수위 자체가 그리 높진 않은 것이다. 다만, 폭력의 주 상대가 다름 아닌 가족이라는 점에서 거부감이 크게 다가온다. 그리고 영화 내내 쉬지 않고 나오는 쌍욕도 거북하게 다가온다. 욕은 육체적 폭력의 전조처럼 느껴지기에 더 두렵고 무서운 것이다. 


그렇다면 우린 이 영화의 폭력 수위 자체가 아닌 폭력의 주 상대와 그 연유에 집중해야 한다. 혹여 거기서 폭력의 미학이라든지 폭력의 정당함 따위를 찾으려고 해서는 안 될 것이다. 폭력의 되물림이 결코 정당방위처럼 여겨져서는 안 된다. 나는 상훈의 폭력성이 아닌 상훈의 자상함과 따뜻함, 착함을 찾으려고 노력할 것이다. 


<똥파리>가 남겨둔 기회의 희극 가능성


일말의 가능성도 없이 나락 같은 비극으로 끝나기 마련인 폭력에 관한 영화들 와중에 기회의 희극 가능성을 남겨둔 <똥파리>. ⓒ(주)영화사 진진



위에서 언급한 <용서받지 못한 자>나 <파수꾼> 또한 다분히 폭력에 관한 영화이다. 자신도 모르는 사이에, 또는 인지 정도는 하고 있는 사이에 '폭력의 되물림'의 희생자가 된 이들이 주인공이다. 그들은 그 사슬을 끊고 과거의 나와 단절하고자 도움을 청하고 자신을 바꾸려고 노력하지만 결국 받아들여지지 않는다. 그 대상은 어쩔 수 없이 폭력의 되물림과 연관된 자들이다. 결국 주인공은 자살을 택한다. 


<똥파리> 주인공 상훈 역시  '폭력의 되물림'의 희생자다. 그 역시 그 사슬을 끊고자 다짐하고 자신을 바꾸고자 하려는데, 어이없게도 그는 죽임을 당한다. 그 대상은 예상했듯이 폭력의 되물림과 연관된 자이다. 누군가가 시작했을 이 폭력들은 결론적으로 가해자 없이 피해자만 속출시킨다. 


하지만 <똥파리>는 다른 작품과 달리 여지를 남겨둔다. 비극적 요소는 당연한 것이지만, 한편으론 기회의 희극 가능성, 그 씨앗을 완전히 거두어들이진 않는다. 상훈이 죽고 나서, 그를 제외한 거의 모든 이들이 함께 하는 모습이 보인다. 상훈의 아버지, 상훈의 이복누나와 남편, 그 어린 아들, 그리고 연희까지. 여기서 다른 누구도 아닌 상훈의 아버지가 눈에 띈다. 아이러니하지만, 어떤 '희망'과 '기회'의 열망을 엿볼 수 있다. 


물론, 다분히 비극적 요소도 있다. 그 연결고리는 제2의 상훈이라고 할 수 있는, 연희의 오빠인 영재. 그는 비록 불우하기 짝이 없는 가정환경이지만 꿋꿋하게 살아가는 연희와는 달리 상훈처럼 용역깡패의 길을 간다. 다름 아닌 그가 상훈을 죽이는데, 상훈의 아버지조차 희망과 기회의 공동체 안에 속하지만 그만은 속하지 못한다. 그리고 그 안엔 연희와 영재의 엄마를 죽게 한 이가 상훈이라는 비극의 선대(先代)가 있었으니...


폭력의 사슬을 끊어내는, 최소한의 해결 또는 방편


이 뫼비우스의 띠 같은 폭력의 사슬을 끊어낼 방법이 있는가? 이 영화는 그걸 몸소 보여준다. ⓒ(주)영화사 진진



어떤 종류의 폭력이든, 그것이 잉태된 이후에는 수많은 길이 존재한다. 하지만 가장 악질적인 폭력인 '가족에의 폭력'은 누가 어떻게 구원할 수 있을까. 거기엔 과연 길이 존재할까. 오직 비극으로의 길밖에 없지 않은가. 영화에서처럼 당사자들 중 누군가가 어떤 식으로든 사슬의 고리를 끊어내야 하는데, 그 사이에 퍼진 암세포들이 언제 들이닥칠지 모를 일이다. 이쪽이 해결되는 저쪽이, 저쪽이 해결되면 그쪽이 문제다. 


양익준 감독은 이런 거시적인 관점까지 완벽하리만치 균형있게 그려냈다. 이 세상에 완벽한 해결이라는 건 없다는 진리 위에, 비극의 계속되는 잉태와 희망을 꿈꾸고 기회를 주어야 한다는 양면을 올려놓은 것이다. 그는 불안하지 않은 상태를 불안해 하는 현대인의 모순적인 정상을 이런 식으로 포착해낸 듯하다. 


나 또한, 우리 또한 어떤 식으로든 폭력의 사슬 위에 서 있다. 생각하고 싶지도 않지만, 무수히 많은 종류의 폭력들이 지난 세월 나를 괴롭혀 왔다. 그건 즉, 나 또한 누군가를 괴롭혀 왔다는 뜻이다. 내가 알기론, 사람은 받은 것을 최소한은 돌려주려는 습성이 있다. 문제는, 그걸 당사자한테 돌려주긴 쉽지 않으니 다른 누군가에게도 전해지는 것이다. 그건 설사 내가 의식하고 있어도 할 수밖에 없는 부분이다. 


거기엔 당사자 또는 당사자가 포함된 집단에 어떤 큰 결단 내지 큰 사건이 수반되어야 한다. 그게 어떤 결과를 낳을지 전혀 알 수 없음에도 말이다. 심지어 그 결과가 대부분 그리 좋지만은 않다는 걸 알고 있음에도 말이다. 영화는 그 잔인하기 짝이 없는 속성에도 불구하고, 그것이 최소한의 해결 또는 나아감을 위한 방편이라고 말하고 있다. 


나는 다르다. 제3의 인물이 도울 수 있다고 생각한다. 비슷한 아픔을 겪은 사람이라면 비록 애초에 다가가기 힘들겠지만 훨씬 더 가깝고 이해 가능한 도움을 줄 수 있을 테지만, 그저 그(그녀)를 사랑하는 사람이라면 그 이후를 생각하지 않은 불행한 끝을 막을 수 있다고 생각한다. 인생이라는 게 멀리서 보면 희극이고 가까이서 보면 비극이라지만, 그 반대의 경우도 있을 수 있지 않은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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冊으로 策하다. 책으로 일을 꾸미거나 꾀하다. 책으로 세상을 바꿔 보겠습니다. singenv@naver.com Since 2013.4.16




[오래된 리뷰] <금발이 너무해>


여러 가지로 여러 면에서 잽을 날리는 영화 <금발이 너무해>. ⓒ이십세기폭스코리아



미국 할리우드가 영화 하나는 정말 '잘' 만든다고 생각할 때가 종종 있다. 작정하고 세상이 놀랄 블록버스터를 내놓을 때도, 제대로 된 진지하고 의미있고 비판적인 작가주의 영화를 내놓을 때도 아니다. 물론 돈 벌고자 만든 그렇고 그런 상업 영화도 아니다. 다름 아닌 여러 가지로 여러 면에 적당히 잽을 날리는 영화를 볼 때 그런 생각이 든다. 


15년도 더 된, 자그마치 2001년에 나온 영화 <금발이 너무해>는 내게 그런 영화 중 하나다. 이 영화는 영화사에 길이 남을 명작은커녕, 아마도 많은 이들에게 나쁘진 않은 상업 영화 중 하나로 남아 있을 것이다. 나에게도 그 이상의 것을 주지도 않았고 그 이상의 명작으로 남아 있지도 않을 거다. 하지만 여러 모로 '잘' 만든 것만은 확실하다. 


나아가 이 영화가 주는 게 아니라, 우리가 이 영화에서 얻어가고 의미 있게 끄집어낼 것들이 있을 것 같다. 영화는 때론 그 자신이 가지고 있는 것보다 더 많은 걸 내놓거나, 그 자신의 포지션보다 더 많은 포텐셜을 터트려 더 많은 영향을 끼치기도 하는 법 아닌가. 가령, 니콜 키드먼이 주연으로 분한 최악의 리메이크 중 하나로 뽑히는 <스텝포드 와이프>도 나에겐 참으로 많은 걸 생각하게 해주었다. <금발이 너무해>라면?


잘 만든 영화 <금발이 너무해>가 줄 것들은?


<금발이 너무해>는 '잘' 만든 영화이다. 마냥 재밌게 볼 수도, 문제의식의 시선으로 볼 수도, 다분히 할리우드식 영화를 보는 느낌으로 볼 수도 있다. ⓒ이십세기폭스코리아



<금발이 너무해>로 괜찮은 퍼포먼스를 선보이며 데뷔한 후 연달아 흥행면에서는 당시 톱랭커에 들게 된 로버트 루케틱 감독. <21>로 정점을 찍고, 2010년대 들어서는 되도 않는 우려먹기로 폭망의 길을 걷게 된다. 여하튼 그런 그가 데뷔작을 함께 할 주연으로 점찍은 이는 리즈 위더스푼. 작은 키에 올망졸망 귀여운 얼굴, 스탠퍼드대학 출신(중퇴라고는 해도)에 이전까진 주로 정적인 영화에 많이 출연했다. 


이 영화가 마냥 귀엽고 재밌고 즐거운 것처럼 보이지만, 그 이면에는 오래된 편견과 고정관념이 내재되어 있으며, 주인공에게 그것을 타파하려는 타파해야 하는 임무 아닌 임무가 주어져 있으니, 리즈 위더스푼만 한 배우가 없었을 것이다. 지금 생각해봐도 마찬가지인데, 이후 종종 <금발이 너무해>의 느낌을 울궈먹고자 하는 게 보여 안타까울 때가 있긴 하다. 그것도 그녀의 생김새에 따른 편견이 작용한 결과가 아닐까?


리즈 위더스푼이 분한 엘 우즈는 청초한 금발, 귀엽고 예쁜 얼굴, 군살 없는 몸매, 핑크핑크하고 화려한 옷가지, 장학생이자 캠퍼스 모델, 부잣집 딸로 세상 모든 이들이 부러워할 만한 스펙의 소유자이다. 하버드 법대생 남자친구까지 있다. 문제의 시작은 다름 아닌 그 남자친구 워너. 워너가 청혼을 할 거라고 생각했던 특별한 저녁 자리에서, 워너는 엘에게 이별통보를 한다. 자신의 집안이 5대 째 상원 의원을 배출한 명문가이기 때문에 명문가 딸이랑 결혼해야 한다는 등 별별 이유를 다 대지만, 중요한 건 엘이 'Legally Blonde', 즉 머리 나쁜 금발이라는 이유였다. 


엘은 곧바로 하버드 법대를 준비하고 좋은 성적으로 붙어버린다. 하지만 그곳은 화려한 겉모습을 자랑하는 그녀가 있을 곳 같지 않다. 이에 엘은 화려함을 벗어 버리고 다시금 열심히 공부한다. 비로소 하버드 법대생이 된 것 같은 엘, 급기야 극소수의 엘리트만 붙는다는 인턴에도 붙어 승승장구한다. 그렇지만 여전히 수많은 난관들이 그녀를 기다리고 있는데... 거기에 존재하는 난관들은 그동안 그녀를 옭아맨 편견에서 기인한 것들이다. 과연 그녀는 극복할 수 있을까? 아니, 어떻게 극복할까?


'머리 나쁜 금발머리'가 부딪히고 극복해야 할 편견과 고정관념들


화려한 금발머리는 머리가 나쁘다는 인식. 이 영화가 던지는 문제의식이자, 주인공 엘 우즈가 극복해야 할 편견과 고정관념의 화신이다. ⓒ이십세기폭스코리아



이 영화의 재미 포인트는, 아이러니하게도 가장 진지해야 할 또는 진지하게 비칠 엘의 난관 극복이다. 앞서 언급했듯이, 그녀가 계속해서 부딪히게 되는 난관들은 수없이 많고 엄청 깊은 편견과 고정관념들이다. 애써 코믹하게 그려내 자각하지 못하고 지나칠 수 있기에 더욱 주의깊게 들여다보아야 한다. 한편으론 에두르지 않고 직설적으로 드러내는 감이 있어 조금만 살펴도 될 것 같기도 하다. 


단연코 그녀를 가장 충격에 빠지게 한 한 마디이자 이 영화가 말하고자 하는 편견의 상징과도 같은 말은 워너가 그녀에게 건넨 '머리 나쁜 금발머리'이다. 금발머리 여성이 머리가 나쁘다는 인식은 상당히 오래되었고 엄청나게 고착화 되었을 거다다. 그건 일종의 형상화인데, 유추되고 유추된 것들의 총합이다. 굉장히 무서운 편견이다. 경우에 따라선 가장 많이 선행되고 있지만 가장 피해야 할 악질적 차별인 '인종차별'과 '남녀차별' 등과도 동급이라 할 만하다. '우생학'과도 연결시켜볼 수 있다. 


금발머리는 일단 그 자체로 화려하다. 화려한 금발머리 여성 중 당연히 몇몇은 화려한 겉모습을 하고 있을 것이다. 그리고 그중에서도 당연히 몇몇은 실제로 머리가 나쁠 것이다. 이런 화려한 것들의 당연한 총합은 굉장히 눈에 잘 띄고 자연스레 하나의 형상화로 뇌리에 박혀 잘 기억하게 된다. 그렇게 머리 나쁜 금발머리의 형상이 굳어진다. 이런 식이라면 만들기 나름이지만, 이 총합이 주는 시각적 충격이 워낙 크기에 알려지기는 쉽고 기억되기 쉽지만 잊히기는 쉽지 않고 바로잡기도 쉽지 않다. 


엘이 이후에 계속 넘어야 하고 넘게 되는 난관들은 모두 이 대표적인 편견에서 파생된 변종들이다. 그래서 아마도 그녀가 금발이 아니었더라도 겉모습이 화려하지 않았더라도 얼굴과 몸매가 예쁘지 않았더라도, 셋 중 하나만으로도 편견은 계속 그녀를 향했을 것이다. 편견들의 총합이 큰 형상을 이룬 이상, 각각의 편견들도 각자 충실히 기능한다. 모두 다 하나씩 깨부술 수밖에 없다. 


자신을 버리지 말고 나아가자


결국 극복에 성공한 엘 우즈. 그녀는 말한다. 자신을 버리지 말라고, 확신에 찬 용기와 열정, 강한 자신감이 있어야 한다고 말이다. ⓒ이십세기폭스코리아



엘을 가로막는 편견은 사실 굉장히 이성적이다. 감성하고는 거리가 멀다. 머릿속에 박혀 있는 당연한 사실 또는 진리라고 할 수도 있는데, 이성적 사고의 산실과도 같은 하버드 법대에서조차 그녀를 그렇게 대한다는 건 더 이상의 방법이 없다는 걸 뜻한다. 이성에서 길을 찾을 수 없고 외부에서 방법을 찾을 수 없으니, 그녀가 택한 건 이성이 아닌 감성 즉 열정이고 외부가 아닌 내부 즉 자신이다. 


수많은 난관을 뚫고 당당히 졸업하게 되는 엘은 졸업연설로 명대사를 시전한다. '하버드에서의 첫 강의 때 존경하는 교수님이 아리스토텔레스의 말을 인용하셨죠. "법은 열정을 배제한 이성이다." 아리스토텔레스에게는 죄송하지만 하버드에서의 3년을 되돌아보니 열정이란 법과 인생에 있어서 중요한 요소이더군요.' 


그러고는 마지막으로 자신을 믿어야 한다는 말을 하는데, 미국의 트럼프 대통령이 지난달 리버티 대학교 졸업연설에서 표절했다는 논란이 있었다. '확신에 찬 용기와 열정, 강한 자신감이 있어야 세상에 나갈 수 있어요. 첫인상은 틀릴 수 있다는 걸 기억하세요. 무엇보다 가장 중요한 것은 자신을 믿어야 한다는 거예요.'


엘은 그럼에도 자신을 버리지 않아야 한다고 말한 것이다. 사람들의 머릿속 깊이 박힌 편견의 형상, 그 표준과도 같은 엘은 그 모습이 그대로 세상을 향했다. 얼마나 어렵고 두려운 것인지는 굳이 영화를 보지 않아도 안다. 그래서 한편 이 영화는 자기확신과 그에 이르는 열정, 그에 따른 용기라는 자기계발의 주요 요소를 보여주기도 한다. 세상 탓하지 말고 우선 자기부터 계발하라는 말이다. 


조금 꺼림칙하지만 틀린 말은 아니다. 그렇다고 완전히 맞는 말은 아닌 것이, 혼자만 바뀐다고 될 일은 아니기 때문이다. 그렇지만 이 영화는 나부터 먼저 바뀌고 또는 올바른 길을 가면 그 영향이 두루두루 퍼진다고 말하고 있기에, 그 주장에도 일리가 있다고 인정하고 싶다. '연대'는 애초에 마음 맞는 사람들끼리 만나 주고받으면서 잇는 것도 가능하지만, 깨달은 누군가가 툭 튀어나와 찾아다니고 설득하며 잇는 것도 가능하다. 엘은 잘 할 것 같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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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래된 리뷰] <더 랍스터>


현대사회에 대한 우화로도, 사랑에 대한 기막힌 상상으로도 읽을 수 있는 압도적 수작 <더 랍스터>. ⓒ영화사 오원



근시라는 이유로 아내에게 버림받은 데이비드(콜린 파렐 분)는 호텔로 오게 되었다. 그곳은 일명 '커플 메이킹 호텔'로, 45일 간 머무르며 커플이 되는 교육을 받는다. 만약 그 시간이 지나서까지 커플이 되지 못하면 동물로 변한다. 단, 매일 숲으로 가서 마취총을 이용해 서로 사냥을 하는데 거기에 성공한 횟수만큼 기간이 늘어난다. 이 시대는 누구나 반드시 사랑을 하고 커플의 일원이 되어야 하는, 그런 시대다. 


데이비드는 혹시 동물이 되는 상황이 되면 랍스터가 되고자 한다. 100살까지 살 수 있고 피는 귀족적인 푸른색이며 근시다. 그렇지만 동물이 되긴 싫다. 동물이 되면 숲에 버려지는데, 위험에 상시노출되어 있지 않은가. 커플 메이킹 호텔에서 사람들은 자신과 공통점을 가지고 있는 상대방을 찾아 다닌다. 그것이 일차적인 사랑의 증표인 것이다. 데이비드는 커플 되기에 성공할까?


우여곡절 끝에 호텔에서 탈출해 숲으로 향한 데이비드, 그곳은 호텔과는 완전히 반대로 절대 사랑을 해서도 안 되고 커플이 되어서도 안 되는 솔로 구역이다. 안 그러면 동물이 되는 게 아니라 죽는다. 그런데 데이비드는 하필 그곳에서 운명의 상대를 만난다. 근시를 가진 여인을 말이다. 데이비는 어떻게 이 상황을 타개할까? 또 탈출 감행?


영화 <더 랍스터>는 현대사회에 대한 실험 우화를 치명적으로 통렬하게 보여주는 데 정통한 요르고스 란티모스 감독의 네 번째 장편이다. 그리스에서 온 이 젊은 감독을 세계 3대 영화제에서 지극히 사랑하는데, 이 영화는 제68회 칸영화제에서 심사위원상을 수상했다. 세상은 넓고 좋은 감독과 작품은 많다는 생각을 하게 하는 퍼포먼스다. 


'솔로 지옥 커플 천국' 커플 메이킹 호텔


절대적으로 커플이 되어야 하는 '커플 메이킹 호텔'에서 커플이 되기란 결코 쉬운 일이 아니다. ⓒ영화사 오원



먼저, 커플이 되지 못하면 동물로 변해버리는 '솔로 지옥 커플 천국' 커플 메이킹 호텔 이야기다. 개인의 자유를 심히 억압하는 전체주의를 노골적으로 보여주고자 한다. 아프게도 민주주의 한복판에 위치한 우리도 이 전체주의에서 결코 자유로울 수 없다는 걸 알려준다. 참으로 눈물난다. '커플 천국'의 아이러니다.


굳이 과거의 우리나라나 이웃나라 중국의 산아 제한 정책이나 출산 장려 정책을 들여다보지 않아도 연애와 결혼에 대한 당연한 시각이 지배하고 있음을 안다. 동물로 변해버리는 것 못지 않게 커플이 되지 못한 이, 결혼을 하지 못한 이가 갖는 절망을 피할 길이 없는 것이다. 그건 역사에서 사회로, 사회에서 개인으로 내려온 역겨운 전통이다. 


문제는 '혁명'이라는 단어를 꺼낼 수조차 없는 분위기에 놓여 있다는 것이다. 이는 분명 '체제'일 텐데, 그렇다면 누군가는 '체제 전복'을 외칠 만한대, 아무도 그렇게 하지 않는다. 여기에 온 이들도 사랑을 하고 싶기 때문일 거다. 그렇지만 사랑을 해야 한다고 하면 얘기는 달라진다. 그 부분에서 사랑은 더 이상 지극히 은밀하고 가장 아름다운 개인의 사생활이 아니라, 자유를 속박 당한 집단에 속한 개인의 의무가 된다. 


그래서 자유를 찾아 솔로 천국의 숲으로 도망치는 것 말고는 할 수 있는 일이 없게 된다. 그 이상의 무엇을 생각하고 행동할 수 있는 여지가 아예 없어지는 것이다. 이 세계를 둘러싸고 있는 거대한 장막을 걷어내기란 불가능하다. 어찌저찌 도망을 간 솔로 천국의 숲은 어떨까? 거대한 장막의 자장 밖에 있을까?


'솔로 천국 커플 지옥' 숲


절대적으로 솔로가 되어야 하는 '숲'에서는 솔로로 남기가 여간 어렵지 않다. ⓒ영화사 오원



다음, 커플이 되면 죽음을 면치 못하는 '솔로 천국 커플 지옥' 숲 이야기다. 커플이 되지 않을 자유를 찾아 커플 메이킹 호텔에서 탈출한 이들이 사는 곳이다. 그런데, 이곳이 어째서 자유로운 곳이라고 하는지 이해할 수 없다. 솔로 지옥 입장에서 보면 솔로를 선택할 수 있는 이 곳이 자유라고 할 만하다. 하지만 솔로도 커플도 자유로운 제3자 입장에서 보면 거기나 거기나 거기가 거기다. 도긴개긴이다. 


문제는 자신도 모르는 새 운명적인 '만남'은 들어봤어도 운명적인 '헤어짐'은 익히 들어보지 못했다는 것. 만나면 반드시 헤어지게 된다는 역설이 이성적인 깨달음이라면, 이것저것 볼 것 없이 만남은 감성과 이성을 초월한 깨달음이다. 커플이 되는 것만큼 어려운 게 솔로로 살아가는 거라는 말이다. 


이런 초월성을 죽음으로 막겠다는 건 어불성설이다. 우리는 안다. 사랑을 택하고 죽음을 받아들인 수많은 커플들의 역사를 말이다. 솔로 천국의 아이러니다. 굳이 이들의 세계에 전체주의의 뱃지를 달아주지 않는 이유다. 대신 이곳에는 어리석음의 뱃지를 달아주고자 한다. 


단순 비교를 하자면, 무조건 커플과 무조건 솔로의 통제 중 무조건 솔로가 더 어려울 것이다. 이는 인간의 본성과 본능, 인간다움, 아니 생물다움을 버린 처사다. 물론 이 역시 역겨운 처사다. '사랑을 해야 한다' 안에는 조금이나마 '사랑하고 싶다'가 내재되어 있는 반면, '사랑하면 안 된다' 안에는 '사랑하기 싫다'가 조금도 내재되어 있지 않다. 


뼈아프게 잔인하고 잔혹한 이 세상의 실체, 나의 실체


이 영화가 치명적인 이유는, 세계를 형성하는 가장 무섭고 두려운 부분을 간파하고 있기 때문이다. ⓒ영화사 오원



나부터도 그러한대, 우리는 흔히 이것을 피하고자 저것을 택한다. 아마 우리 앞에 놓여 있는 선택지가 이것 아니면 저것이기 때문일 거다. 남자 아니면 여자, 커플 아니면 솔로, 삶 아니면 죽음, 커플 메이킹 호텔 아니면 숲. 데이비드도 그렇게 했다. 나름 자의적인 선택, 그나마 혁명의 끄나풀 정도 잡고자 한 행동. 그것도 결코 쉽지 않은 게, 자그마치 죽음을 각오한 탈출인 거다. 


고약한 건, 내가 제3자의 입장이 아니라는 것이다. 왜 이것 아니면 저것, 저것 아니면 이것만을 선택해야 하는지 안타깝고 분통 터지고 욕지거리까지 튀어 나오지만, 나는 이곳에서 탈출할 용기나 지혜, 하다못해 지식도 없다. 세상에서 알고서도 실행에 옮기지 못하는 게 가장 '나쁜' 거라는데, 나는 못난 것도 아니고 나쁘다. 


영화에서 제3지대나 제3자는 아예 나오지 않거니와 누구도 생각하지 못하고 말로 꺼내지 않는다. 내가 사는 이곳에서 원하는 것들이 불편하고 역겨울 때가 시도때도 없지만, 다들 그렇게 살아간다고 말하고 어딜 가나 똑같을 거라고 말할 뿐이다. 그건 사실이다. 영화에서 보지 않았나. 


원점으로 돌아간다. 커플 메이킹 호텔의 짓거리가 전체주의적이라 했던가? 숲 인간들의 짓거리가 한심하다 했던가? 둘 다 똑같다고 했던가? 그렇다. 내가 고작 생각할 수 있는 한도치는 '둘 다 똑같다' 정도의 깨달음과 비판이다. 감독은 영리하게, 너무 영리하게 그 이상을 보여주지 않는다. 그 이상의 깨달음을 생각할 여지를 주지 않는다. 그게 우리가 사는 이 세상의 실체, 나의 실체라고 말한다. 


너무나도, 그 어떤 영화보다도 잔인하고 잔혹하다. 고작 현실의 부정적이고 우스꽝스러운 우화의 나열과 그 사이를 건너는 한 인간의 서사를 보여줄 뿐이지만, 이 세계를 관통하는 가장 무섭고 두려운 부분을 간파하고 있기 때문이다. 이 영화는 감히 말하지만, 그 어떤 것보다 정확한 이 세계의 지도(MAP, 地圖)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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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래된 리뷰] <에브리바디 올라잇>


이 영화는 '복잡미묘'하지만, 결코 '섹시 코믹 스캔들'은 아니다. ⓒ(주)화천공사



의사 닉(아네트 버닝 분)과 조경사 줄스(줄리안 무어 분)는 각각 낳은 아이들 조니(미아 바쉬이코브스카 분), 레이저(조쉬 허처슨 분)와 함께 평범하게 살아간다. 그렇다, 그들은 레즈비언 부부이다. 큰딸 조니는 일찍 철이 든 케이스로 엄마들을 이해하고 존중한다. 그녀는 똑똑하다. 반면 작은 아들 레이저는 사춘기의 한복판에 있어서인지 몰라도 의문과 함께 위화감을 지니고 있다. 그는 운동을 좋아한다. 


조니와 레이저는 아빠를 찾고자 한다. 그들은 누군가가 정자은행에 제공한 정자로 태어났는데, 공교롭게도 닉과 줄스는 한 명의 정자를 받아 임신해 그들을 낳았다. 생물학적 아빠 폴(마크 러팔로 분)을 찾은 그들, 조니는 좋은 느낌을 받은 반면 레이저는 그리 좋은 느낌을 받진 못했다. 이후 조니와 레이저는 번갈아 가면서 혹은 함께 폴과 시간을 보낸다. 서로가 끌리는 걸 그들이 막을 도리는 없다. 


그 사실을 알게 된 닉과 줄스의 시선이 그리 곱지는 않다. 함께 식사자리도 마련하는 등 노력하지만, 가장의 역할을 떠맡은 닉은 더욱 노심초사할 뿐이다. 그 와중에 줄스는 오랜만에 조경사 일이 들어오는데, 다름 아닌 폴의 의뢰였다. 급기야 줄스는 자신의 성정체성까지 의심해야 하는 상황에 직면하는데... 


'평범한' 동성결혼 가족


동성결혼 가족이라는, 한국에는 법적으로 없는 가족 형태. 이 영화는 극히 평범하게 그려낸다. ⓒ(주)화천공사



수많은 영화를 통해 일반적이지 않은 가족 형태를 많이 봐왔는데, 영화 <에브리바디 올라잇>이 보여준 가족 형태는 또 새롭다. 특히 동성결혼이 법적으로 금지되어 있는 우리나라에선 어설픈 상상은 가능하지만 실제에 기반한 현실적인 상상은 불가능하다. 그러하기에 허구에 기반한 영화에서도 비춰지기 힘들다. 


반면 이 영화에서 동성결혼에 의한 가족 구성은 아주 평범하게 보인다. 전혀 위화감이 없고 편안하다. 작은 아들 레이저가 지니는 의문과 위화감도 심각한 수준은 아니고 감성적인 면이 두드러진다. 아마 거기엔 레즈비언 부부를 연기한 두 베테랑 줄리안 무어와 아네트 버닝의 연기력이 크게 작용했을 것이다. 


물론 거기에도 조금의 제약은 따른다. 사회의 시선으로부터 자신들을 보호할 보호막은 예전에 쳤을 테지만, 아이들 특히 레이저에겐 제대로 된 설명이 필요하다. 남들과 다른 가족 형태는 물론 남들과 다른 섹스 라이프까지도. 이런 것까지 말해야 하나 할 정도로 모든 사생활을 남김없이 말해주어야 이해가 가능한 것이다. 


그럼에도 우린 이 영화의 이 가족을 보며 하등 이상한 생각이 들지 않는다. 단, 생물학적 아빠 폴을 만나기 전까지. 두 아이들의 아빠 폴이 등장하면서 생각이 많아진다. 이를 삐딱한 시선으로 보자면, 즉 지극히 생물학적인 시선으로만 보자면 일부이처가 아닌가? 여기서 이처가 부부인 건 이상할 게 없다. 그런데 이처 중 하나가 일부와 다시 그렇고 그런 관계를 형성시킨다면... 모든 게 이상해지는 것이다. 


특수한 경우를 헤쳐나온 이들의 삐걱거림


특수한 경우를 수도 없이, 즉 산전수전 다 겪은 이들에게도 삐걱거림이 존재한다. ⓒ(주)화천공사



사실 이 영화는 초반 20분도 채 되지 않아 1막이 끝난 느낌을 들게 한다. 레즈비언 부부의 두 아이들이 생물학적 아빠를 만나 어색한 인사와 대화를 마무리하고 헤어진다. 더 이상 어떤 스토리가 있을까 싶다. 그리고 2막이 시작된다. 아이들이 생물학적 아빠를 계속 만나는 것이다. 그런 한편 닉과 줄스는 뭔가 삐걱대는 것 같다. 


여기서 주목할 건 아이들이 생물학적 아빠를 계속 만나는 게 아니라 닉과 줄스의 삐걱거림이다. 우리는 당연히 그렇게 생각할 수 있다. 레즈비언 부부라는 특수한 경우를 함께 헤쳐나온 이들이라면 살아가는 데 아무 문제도 없을 것 같다고 말이다. 그리고 둘 다 여자이니 남자와 여자로 이루어진 부부보다 서로가 서로를 더 잘 이해할 수 있을 거라고 말이다. 그들에게 삐걱거림이라는 없다고 생각할 것이다. 


하지만 그들에게도 똑같은 삐걱거림이 존재한다. 18년 동안 함께 한 닉과 줄스에게도 당연히 각자의 역할이 생겼을 것이고 완연히 다른 성격이 존재할 것이다. 그에 따른 갈등은 너무나도 당연하다. 그런 모습에서 우린 역으로 올라가 레즈비언 부부의 평범함과 비(非)이질성을 감지한다. 그들은 레즈비언 이전에 부부다. 


이 영화에선 닉이 더 돈을 잘 벌고 더 괄괄하며 더 가부장적이다. 반면 줄스는 일을 거의 안 하는 반면 아이들과 집안을 책임지다시피 한다. 그들이 합의 하에 정한 역할일 테지만, 여느 부부의 모습에서 볼 수 있는 모습이다. 2막에서 아이들이 폴과 가까워지는 모습이 아닌, 눈여겨 보아야 할 닉과 줄스의 삐걱거림에는 이런 연유가 있다. 


평범한듯 평범하지 않은듯, 이 가족


다른 누구도 아닌 이들의 삐걱거림은, 이들이 지극히 평범한 존재들이라는 반증이다. ⓒ(주)화천공사



영화의 3막 시작은 폴의 의뢰에 의해 줄스가 오랜만에 조경 디자인을 하게 되는 장면이다. 이내 그들은 어이 없게 한 몸이 된다. 그러며 닉과 줄스의 삐걱거림은 더 심해지고 그럴수록 줄스의 외도도 더 심해진다. 한편 아이들과 폴의 관계도 더 진전되어 어색함은 사라지고 의미있는 관계로 발전되는 기미가 보인다. 


결국 들킬 것이 분명한 폴과 줄스의 밀회, 이 황당하고 어이 없는 관계보다 우리가 이 3막에서 눈여겨 봐야 할 건 이 가족이다. 2막에서 닉과 줄스의 삐걱거림으로 이 레즈비언 부부의 평범함을 역설했듯이, 3막에서는 폴과 줄스의 밀회로 터져버린 네 가족의 삐걱거림으로 이 가족의 평범함을 역설한다. 


백 번 양보해 일반적이라고 할 순 없는 이 가족이, 거기에 폴이라는 생물학적 아빠의 출현으로 꼬여버린 듯한 이 가족이, 평범하다는 걸 역설하기 위해서 황당한 일을 겪었을 때 평범하게 대처하는 모습을 보여준다. 우린 생각한다. 일반적이지 않은 가족이라면, 일반적이지 않은 일을 겪었을 때 일반적이지 않은 모습을 대처할 거라고 말이다. 


하지만 이들은 지극히 일반적으로 대처한다. 당사자들을 욕하고 배척하고 몰아세운다. 누군가는 비뚤어진다. 그럼에도 진심어린 사과와 속죄, 받아들임과 시작이 이어진다. 그게 가족이다. 그리고 이 가족도 그런 모습을 보인다. 당연하게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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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래된 리뷰] 이안 감독의 <결혼 피로연>


거장 이안 감독의 오늘을 있게 한 작품 <결혼 피로연>. ⓒ(주)케이알씨지



유명한 영화 감독이라면 누구나 그 자리에 있게 한 결정적인 작품이 있다. 의외로 개중엔 상대적으로 잘 알려지지 않은 작품이 많은데, 그 이후에 보여준 퍼포먼스가 워낙 강해서일 것이다. 할리우드에서 흥행과 비평 양면의 안정적인 퍼포먼스로 충분한 기대 충족 모멘텀을 구축, 아시아는 물론 할리우드를 정복하고 세계적으로도 감독의 기량과 작품성을 인정받는 대만 영화 감독. 이안에게도 그런 작품이 있다. 


이안하면 떠오르는 영화들이 있다. 지난 25년 간 10편 남짓한 많지 않은 작품을 내놓았는데, 누구나 알 만한 대단한 영화로 <와호장룡> <브로크백 마운틴> <색. 계> <라이프 오브 파이>를 들 수 있겠다. 동양과 서양을 오가며 수익과 비평 양면을 완벽히 요리했다. 그런 그에게도 흠이 하나 있으니, 15년여 전에 내놓은 <헐크>인데 거장도 히어로물은 건들면 안 된다는 걸 정확히 보여주었다. 3년 뒤에 <다크나이트> 출현으로 조금은 상쇄되지만 말이다. 


그렇지만 이안은 위에서 들었던 2000년대 영화 이전에 1990년대부터 충분히 엄청난 두각을 나타냈었다. 1992, 93, 94년에 연달아 대만 배경의 영화를 내놓고는 95년 할리우드에 진출해 <센스 앤 센서빌리티>로 대박을 낸다. 그리고 97년과 99년의 상대적 과도기 이후 2001년 <와호장룡>으로 진정한 거장 반열에 오르는 것이다. 그 와중에 내가 생각하는 이안 감독의 진정한 '인생 영화'는 93년에 내놓은 <결혼 피로연>이다. 이후 그의 영화 인생 길은 이 영화에서 비롯되고 파생된다고 해도 과언이 아니다. 


어쩌다가 이 지경이 되었을까?


서로서로 이득이 되는 선의의 거짓말로 위장결혼을 택한 이들, 하지만 일을 계속 꼬이고... 어쩌다가 이렇게? ⓒ(주)케이알씨지



뉴욕에서 잘 나가는 부동산 딜러로 풍족한 생활을 하는 대만 출신 웨이퉁(조문선 분), 그는 남자친구 사이먼(밋첼 릭테스타인 분)과 동거한다. 이 사실을 알 길 없는 부모님은 자주 편지를 날려 결혼과 손주를 기대하고 있다. 난감하기 짝이 없는 웨이퉁과 사이먼, 급기야 부모님은 아들을 위해 대만에서 맞선녀를 보낸다. 동성애자인 웨이퉁이 이를 받아들일 수는 없는 일, 이에 사이먼이 황당하지만 나쁘지 않은 제안을 한다. 


웨이퉁이 관리하는 건물에 세들어 사는 여인 웨이웨이(메이 친 분)와 위장결혼을 하는 것이다. 웨이웨이는 미국에 계속 체류할 수 있게 되어서 좋고, 웨이퉁은 부모님을 거짓으로나마 일단 만족시켜드릴 수 있어서 좋다. 하지만 부모님은 이 소식을 듣자마자 뉴욕으로 출두한다. 철저한 준비를 하는 세 사람, 같이 살게 될 집은 일단 웨이퉁과 사이먼이 동거하는 사이먼의 집으로 잡고 결혼식은 동사무소 같은 곳에 가서 약식으로 치르기로 했다. 하등 이상할 것도 꺼림칙한 것도 없다. 


문제는 역시 부모님이다. 나이가 나이신 만큼, 장군 출신의 대단한 집안인 만큼, 당연히 대만 전통 결혼식을 생각하고 있었던 부모님, 약식 결혼식을 올리고는 울음을 터트리신다. 대신 사이먼이 뉴욕 최고의 중화요리집으로 초대해 그들만의 결혼 피로연을 연다. 바로 그곳에서부터 꼬이기 시작한다. 우연찮게도 요리집 사장이 웨이퉁 아버지가 장군이었던 시절 오랫동안 기사 노릇을 했던 이였던 것. 그는 장군의 아들 결혼식과 결혼 피로연을 미국식으로 하는 걸 못마땅하게 여기고는, 자신의 요리집을 무료로 빌려주어 대대적인 결혼식과 결혼 피로연을 열게 한다. 


이보다 난감할 수 없는 지경에 이른 세 사람이지만, 문제 없이 치뤄내기만 하면 되는 것이기에 열심히 준비하고 열심히 절차를 따른다. 그런데 결혼 피로연에서 웨이퉁과 웨이웨이는 생각지도 못한 일을 저지르고, 결혼식이 끝난 후에도 부모님은 돌아가지 않으시며, 세 사람의 굳건한 동맹에 금이 가기 시작한다. 어쩌다가 이 지경이 되었을까? 어쩌면 좋을까?


이 '좋은' 영화의 따뜻함


날카로움이 좋은 영화의 기본 키워드가 된 요즘, 따뜻한 좋은 영화를 다시 본다. ⓒ(주)케이알씨지



영화는 명백한 코미디 느낌으로 시작해 그 느낌을 이어나간다. 좌충우돌 소동극이라고 해도 무방한 스토리 라인을 보여주기 때문인데, 그 자체에 비극의 씨앗을 품고 있었던 것이다. 그건 부모님과 세 사람의 대조적인 모습에서 엿볼 수 있는데, 동성애에 대한 생각과 세대 간 갈등 그리고 동양과 서양의 문화 차이에서 비롯된다. 


영화는 이런 요소들을 머금은 채 초반에 쉽게 풀다가 중반 이후에 폭발하면서 문제들을 드러내고는 마지막에 아름다운 반전으로 기막힌 화해를 선보인다. 대만 최고의 톱배우 조문선의 데뷔작으로도 유명한 이 작품에서 그는 상대방이라고 할 수 있는 아버지 역의 랑웅과 더불어 협력과 대립의 조화를 이끈다. 


특히 랑웅은 이안 감독의 동양 배경 영화에 모두 출현해 중심을 톡톡히 잡는데, 2002년에 세상을 떴기에 <와호장룡>을 마지막으로 찾아볼 순 없다. 계속 살아계셨으면 이안 감독의 동양 배경 영화에서 계속 만나볼 수 있지 않았을까 싶다. 여하튼 그는 이 작품에서 동양, 전통, 보수의 상징과도 같다. 그렇지만, 개인적으로 영화 역사상 가장 아름다운 반전 중 하나라 할 만한 그의 영어 실력은 그 모든 걸 일거에 무너뜨린다. 


우린 이 영화를 통해 대립되는 것들의 단점을 날카롭게 파헤치거나 통렬하게 비판하거나 악랄하게 찍어내리는 모습을 보지 못한다. 25여 년 전이라 그럴까? 아마 아닐 것이다. 그건 순전히 이안 감독의 의도이자 그가 추구하는 방법론이다. 우린 2008년 이후 자본주의의 폐해를 섬뜩하게 파헤치고 비판하는 '좋은' 영화들을 많이 봐왔다. 그런 와중에 <결혼 피로연>의 따뜻함을 목격한다면, 좋거나 나쁘거나 둘 중 하나의 느낌을 들 것 같다. 자본주의의 폐해를 다루는 영화들을 너무 좋아하는 나는, 그럼에도 이 영화가 그 어떤 영화보다 좋았다고 말하고 싶다. '좋은' 영화인 것도 사실이다. 


조화로 나아가자


영화는 세대, 동서양, 남과여의 차이를 허물고 조화로 나아가자고 말한다. ⓒ(주)케이알씨지



애초에 동성애에 대한 생각과 세대 간의 갈등, 동양과 서양의 문화 차이는 '대립'되는 개념이 아닐지도 모른다는 생각을 하게 된다. 25여 년 전에, 그것도 촌스럽지 않고 감각적으로 풀어낸 이안 감독의 천재성에 혀를 내두르면서, 그의 담론에 동의한다. 동성애에 찬성과 반대의 논리 따위는 성립될 수 없다. 세대 간에 갈등만 존재하는 게 아니라 갈등도 존재할 수 있다. 동양과 서양의 문화도 마찬가지로 차이만 있는 게 아니라 동질성을 더 많이 발견할 수 있다. 


강렬하게 다가 오고 부각되고 기억에 남는 한 면이 곧 전체를 대변하는 나쁜 예들이다. 우린 이 길지 않는 영화 한 편으로 나쁜 예들과 함께 해결되는 모습들을 완벽에 가깝게 들여다볼 수 있다. 결은 완연히 다르지만 전체를 풀어내는 느낌은 일본의 고레에다 히로카즈 감독, 한국의 김애란 소설가 초기의 모습과 닮아 있다. 코미디 또는 잔잔한 일상에서 건져올리는 아픈 문제들. 다만, 이 문제를 푸는 방식은 모두 다르다. 


이쯤에서 '결혼 피로연(결혼식)'의 폐해를 짚고 넘어가지 않을 수 없다. 대만의 전통 결혼 피로연이나 미국의 약식 결혼 피로연이 아닌, 한국의 결혼 피로연 말이다. 현재 우리나라의 결혼식은 이것도 저것도 합친 '짬뽕'인 것 같다. 짬뽕을 폄하하고 싶은 마음은 추호도 없음을 밝혀두며, 과도한 돈으로 치장된 보여주기식은 결혼식으로서의 의미를 찾아볼 수 없다. 미국의 약식 결혼식도 마찬가지인 것 같은데, 영화로 봤을 땐 대만의 전통 결혼식이 가장 괜찮아 보였다. 


전통이 사라지는 것도 신식이 하대받고 무시당하는 것도 원하지 않는다. 그것 또한 한 면이 전체를 대변하는 나쁜 예의 하나가 아닌가. 역시 조화밖엔 답이 없을 텐데, 여기서 해석의 중요성을 역설한다. 잘못된 해석의 총합은 폐해를 낳는다. 그건 곧 대립과 부조화를 낳아 오래된 비극을 만들기 십상인 것이다. 조화로 나아가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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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래된 리뷰] <공기인형>


고레에다 히로카즈 감독의 <공기인형>은 나에게는 '이제야 비로소 보이는 영화'의 전형이다. ⓒCJ엔터테인먼트



뭘 잘 몰랐던 시절, 즉 영화에 대한 지식이 짧았던 시절, 지금 생각하면 황당하지만 나름 이해는 가는 이유 때문에 좋은 영화를 '쓰레기' 취급했었다. 모르긴 몰라도 그건 뭘 좀 안다는 지금도 마찬가지일 것이고 앞으로도 계속될 것이다. 열린 마음을 갖고 남의 말에 휘둘리지 않는 안목을 키워나가는 수밖에 없다. 


일본에서는 2009년에 우리나라에서는 2010년에 개봉한 영화 <공기인형>이 나한텐 그런 케이스 중 하나이다. 당시에는 당연히 고레에다 히로카즈 감독을 아예 몰랐었고, 그야말로 전형적으로 좋은 영화만을 진짜 좋은 영화로 치부하고 있었다. 그 '전형적'에는 '야하지 않은' 영화가 속해 있었다. 이 영화는 상당히 특이한 형식에 과감한 노출신이 꽤 나온다. 당시 나의 기준에서 탈락이었다. 


불과 7년 만에 안목이 얼마나 늘었을지는 모르겠지만, 이 영화가 최소한 나쁜 영화가 아니라는 건 안다. 고레에다 히로카즈 감독이 워낙 수작, 명작들만 내놓아서 상대적으로 성이 차지 않는 느낌이 들지만, 대표작 중 하나라고 해도 무방할 정도의 좋은 영화라고 해도 틀린 건 아니다. 무엇보다 '배두나'라는 배우의 발견, 그녀는 공기인형 그 자체였다. 그녀가 아니면 안 되는, 그런 영화였다. 


인간 아닌 것의 인간 되기


공기인형 노조미는 어느 날 갑자기 아무 없유도 없이 인간의 마음을 갖게 된다. 왜? ⓒCJ엔터테인먼트



레스토랑에서 웨이터로 일하는 히데오(이타오 이츠지 분), 여자친구와 헤어진 그는 솔로다. 그런데 집에 무엇인가가 있다. 다름 아닌 공기인형 노조미(배두나 분), 외로운 남자들의 성욕을 채워주는 섹스 토이다. 그는 노조미와 대화를 나누고, 애무와 섹스를 한다. 뒤처리도 직접 한다. 그에게 노조미는 몸과 마음을 나누는 대상이다. 


어느 날 갑자기 노조미에게 인간의 마음이 생긴다. '그녀'는 몸이 공기로 이루어진 것만 빼고는 완전한 인간이 된 것이다. 옷을 입고 밖을 돌아다니며 인간의 말과 행동을 배운다. 우연히 들어간 비디오 가게, 점원 준이치(아라타 분)에게 첫눈에 반한 노조미, 그곳에서 일을 시작한다. 이후 아침이면 평범한 인간처럼 비디오 가게에 출근하고, 저녁에 히데오가 퇴근할 때쯤이 되면 집으로 돌아가 인형이 된다. 


준이치와의 사랑을 키워나가는 노조미, 그녀는 행복한가? 마음을 가졌지만 속이 텅 비었기에 인간이 될 수 없고 마음을 가졌으니 인형이 될 수도 없다. 그러던 어느 날 사건이 연속으로 터진다. 물건을 정리하다가 모서리에 팔이 찢겨 몸에서 공기가 빠져나가게 된 것이다. 그 모습을 준이치가 보고 만다. 그리고 노조미는 준이치와 사귀면서 계속 히데오 집 구석에 숨어 있었는데, 어느 날 보니 히데오가 다른 공기인형을 데려다 놓은 게 아닌가? 노조미는 자신이 마음을 가졌다는 걸 히데오에게 알린다. 또 노조미는 자신을 만든 이를 찾아가 공기인형의 탄생과 죽음을 듣기도 한다. 


영화 <공기인형>은 '인간 아닌 것의 인간 되기' 이야기다. 일일이 열거할 순 없지만, 우린 동화 <피노키오>를 필두로 이런 이야기들을 많이 접해왔다. 소설이자 영화인 <바이센테니얼 맨>도 생각난다. 모두 인간에 의해서 만들어지고, 요정의 도움으로 인간의 실수로 인간처럼 된다. 다만, 공기인형 노조미는 아무 이유 없이 인간의 마음을 갖게 된다. 이 사실이 해석하기 나름으로 크게 작용했다고 본다. 


인간의 속이 비었다는 역설로 인간을 말하다


인간의 마음을 가진 것이 점점 아픔과 슬픔으로 다가오는 노조미. 그건 인간에 대한 조롱이 아닌 위로의 일환이다. ⓒCJ엔터테인먼트



인간은 태초부터 '우리는 어디서 왔는가' '우리는 왜 태어났는가' '우리는 어떻게 태어났는가'를 물어왔다. 아마 과학적으로는 입증이 되었을 것이다. 종교적으로도 마찬가지고. 하지만 인간 본질을 탐구하는 철학적으로는 답을 내기 힘들지 않을까. 그래서 인간은 그저 '던져진 존재'다. 누군가에 의해서도 우연에 의해서도 아니다. 


여기서 공기인형 노조미가 마음을 갖게 된 '이유 없는 이유'가 겹쳐진다. 나아가 그녀는 속만 텅 비었을 뿐 '인간'이 된 것이다. 영화는 그녀를 인간처럼 이유 없는 이유로 인간을 만들어 놓고, '속이 텅 빈' 것도 채워 사실상 완벽한 인간으로 만든다. 어떤 식으로? 노조미의 물질적인 채워짐이 아니라, 인간의 속이 비었다는 역설로. 


노조미가 마음을 갖고는 밖을 돌아다니다가 높은 고층 빌딩 앞에 앉아 있는 노인과 대화를 하게 된다. 속이 텅 빈 것에 대해서 말이다. 노인은 자신의 속이 텅 비었다는 노조미의 말에, 속이 텅 빈 인간이 많다고 말한다. 저 앞의 높은 고층 빌딩에 사는 인간들처럼. 이에 노조미는 당연히 그 비유적인 표현을 직접적으로 받아들여 자신처럼 인간의 마음을 가진 공기인형이 많이 있다고 잘못 알게 된다. 동시에 그때만큼은 그녀는 완벽한 인간이 된 것이다. 스스로도, 또 스스로가 생각하는 세상 안에서도. 


영화는 이처럼 공기인형 노조미를 점점 더 완벽한 인간으로 만들면서, 한편 인간을 속이 텅 빈 공기인형으로 치환한다. 그렇지만 이는 '반(反) 인간'은 아니다. 오히려 인간을 불쌍하게 보고, 인간이 사는 이 세상을 비판하고 있다. 노조미가 인간의 마음을 가져서 너무 힘들다고 말하는 건, 그런 마음을 가진 인간을 조롱하는 게 아니라 위로하고 있는 것이기도 하다. 


고레에다 히로카즈 감독의 '시' <공기인형>


일본을 대표하는 영화감독 고레에다 히로카즈의 많지 않은 작품들. 그중에 <공기인형>은 '시'에 해당되지 않을까 싶다. ⓒCJ엔터테인먼트



개인적으로 고레에다 히로카즈 감독의 팬이 되어가는 중이다. 그의 영화를 작년 초에 처음 접했는데, 당시 최신작이었던 <바닷마을 다이어리>였다. 전형적으로 잔잔한 일본풍 영화의 느낌과 형식 위에, 은근한 파격이 계속 되었던 기억이 있다. 그게 조화를 이루는 모습이 더욱 파격적으로 다가왔다. 올해 초에는 그의 장편 데뷔작 <환상의 빛>을 보았는데, 20년 동안 크게 다르지 않은 느낌이 들었다. 이미 데뷔 때부터 자신 만의 세계를 구축해놓았다고 할까?


어디선가 본 적이 있다. 고레에다 히로카즈 감독의 세 작품을 문학 장르로 비교해놓았는데, 공감이 갔다. <걸어도 걸어도>가 소설, <공기인형>이 시, <바닷마을 다이어리>가 에세이라고 말이다. 아직 <걸어도 걸어도>를 접하지 못했는데, 다른 두 작품을 접한 이 시점에서 적절한 비유라고 생각한다. 전형적으로 잔잔한 일본풍의 느낌과 형식 위에 파격을 입히고 조화를 이룩한 그의 스타일에, 쉽지 않은 비유와 상징까지 심어두었으니 이를 '시'라 하지 않고 무엇이라 하겠는가. 


노조미의 '나는 인간의 마음을 얻었습니다'로 시작하는 내레이션들을 모아 놓기만 해도 충분히 시가 된다. 제목도 이미 정해져 있다. 고레에다 히로카즈의 수많은 걸작들, 사실 그가 만든 모든 영화들이 걸작이라 할 만한대, 그중에서도 <공기인형>은 4대 대표작이라 칭할 수 있지 않을까. 여기서 대표작은 그가 구축한 세계를 세분화할 때 각각을 대표할 수 있는 작품이라 할 것이다. <그렇게 아버지가 된다>를 또다른 문학 장르인 '영화'에 놓고 싶다. 


아직 보지 못한 그의 작품이 최소 일곱 작품은 남아 있다. 왠지 비슷한 느낌의 영화들일 것 같은 불길한듯 황홀한듯 한 예감이 드는데, 반드시 다 보게 될 것이다. <공기인형>은 그의 영화를 접하는 시작으로는 맞지 않는 것 같다. 그보다 최신의 영화들을 보고 그 다음 접하는 게, 여러 모로 도움이 될 것 같다. 그런 의미에서 나의 이번 시도는 실패인가? 그렇지만도 않다. 매도 빨리 맞는 게 낫다는 말도 있지 않은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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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래된 리뷰] <세션: 이 남자가 사랑하는 법>


충분한 논란과 충만한 사랑이 공존하는, 직선적인 영화 <세션: 이 남자가 사랑하는 법>. ⓒ20세기폭스코리아



얼마 전 국내 주요 언론들에서 BBC 보도를 인용해 '천사의 손' 논란을 다룬 적이 있다. 천사의 손은 대만의 작은 민간 자선단체로, 성욕을 해결하기 힘든 장애인을 위한 성 서비스를 제공한다. 한 마디로, 간호 자격을 갖춘 성 도우미가 장애인의 수음을 도와주는 것이다. 장애인도 비장애인과 다름 없는 욕구를 가지고 있고 이를 풀어야 하며, 장애인의 식사와 배설을 도와주는 것처럼 성욕도 해소도 도와주어야 한다고 말한다. 


논란의 여지가 다분하다. 매춘 행위와 다를 게 없다는 주장이 일 수밖에 없는 것이다. 여러 가지 각도에서 들여다볼 필요가 있고, 자연스레 그렇게 된다. 매춘을 바라보는 시각의 차이가 있을 테고, 장애인의 성 욕구를 바라보는 시각의 차이도 존재할 것이다. 무엇보다 '봉사'의 의미로 행해지는 성행위를 바라보는 시각이 가장 중요하게 작용할 것 같다. 


이와 다분히 동일선상에서 대할 순 없겠지만, 비슷한 생각과 논란을 야기시킬 수 있는 소재를 다루는 영화 <세션: 이 남자가 사랑하는 법>가 흥미롭게 눈을 잡아끈다. 소아마비로 인해 얼굴 근육을 제외한 온몸이 자유롭지 못한 중증 장애인의 바람을 들어주기 위해, 그리고 '치유'하기 위해 섹스 테라피스트와 시간을 가진다는 게 주된 내용이다. 1988년 미국에서의 실화를 바탕으로 했다고 한다. 


중증 장애인 마크의 총각 딱지 떼기


중증 장애인 마크는 총각 딱지 떼기를 실현코자 한다. 하지만 현실의 벽은 높다. 다른 사람들을 의식하는 것 따위가 아니라 자기 자신을 넘는 것. ⓒ20세기폭스코리아



마크 오브라이언(존 혹스 분)은 얼굴 근육을 제외한 온몸이 자유롭지 못하다. 6살 때 걸린 소아마비 때문인데, 도우미와 호흡을 도와주는 기계와 도구 없이는 살 수 없다. 그럼에도 그는 시인이자 저널리스트인데, 어느 날 '장애인의 섹스'에 대한 칼럼 제의가 들어 온다. 그러고 보니 38살 평생 섹스는커녕 수음도 해보지 못한 그, 섹스 테라피스트의 도움을 받고자 한다. 그렇게 셰릴 코헨 그린(헬렌 헌트 분)과 마크 오브라이언은 만남을 갖고, 세션 즉 '훈련'에 들어간다. 


자신의 몸을 느끼고, 서로의 몸을 느낀 후, 수음의 단계를 지나, 삽입의 순간 이후, 절정을 느끼는 것이다. 물론 마크는 어떤 행동도 취할 수 없기 때문에 셰릴에 의해서만 단계가 이어진다. 쉽지 않다. 마크는 평생 능동적이든 수동적이든 직접적이든 간접적이든 성에 관한 어떤 행동도 취해 보지 못했던 것이다. 비록 칼럼 때문이기는 했지만, 마크는 그토록 원하던 '총각 딱지 떼기'에 성공할 수 있을까?


한편, 마크가 어디에 가서도 쉽게 꺼내지 못할 자신의 속 깊은 얘기를 브렌단 신부(윌리암 H. 머시 분)에게 한다. 고해성사라고 할 수 있겠는데, 신부가 답해주기엔 맞지 않는 것 같은 성 상담이 대부분이다. 그런 와중, 계속 바뀌는 도우미도 문제다. 자신의 상태를 이해해주는 것 이상으로 한 인간으로 대해주는 도우미를 만날 수 있을 것인지?


영화는 마크 오브라이언을 중심으로 원을 그리듯이 다양한 사람들이 나와 관계를 이어간다. 처음엔 '중증 장애인' 마크가 보일 것이다. '저런 상태로 어떻게 살아갈까' 하는 궁금증이 가장 먼저 인다. 그러다가 어느새 '마크'가 보인다. 그러며 그와 관계를 이어가는 '사람들의 변화'를 엿볼 수 있다. 


섹스와 논란을 넘어 사랑과 관계로


영화 포스터를 볼 때는 '섹스'에 방점을, 일반적으로는 '논란'에 방점이 찍힐 수 있겠다. 하지만 그 행간에 위치한 사랑과 관계를 들여다보자. ⓒ20세기폭스코리아



별다를 게 없는 소소한 일상을 그리는 이 영화, 어디에 방점을 찍느냐에 따라 다양한 시각으로 볼 수 있다. 먼저 포스터를 보니, 배급사는 '섹스'에 방점을 찍은 것 같다. '신부님... 하고 싶은 게 죄가 되나요?'가 메인 카피다. 청소년 관람불가 등급인 만큼, 어쩔 수 없이 선정성에 최대한 포커스를 맞췄다고밖에 생각되지 않는다. 하지만 이는 영화가 가지는 다양한 초점 중 가장 빗나간 초점일 것이다. 


'섹스'와 비슷한 관점일 텐데, '논란'에 방점을 찍는 게 이 영화를 보는 극히 일반적인 방법이다. 여기엔 두 층위가 있는데, 장애인의 성 욕구와 섹스 테라피스트의 정체다. 장애인에 대해 깊이 생각하지 않는 경향의 기반 위에서 장애인이 가지는 성 욕구는 더욱 생각하기 힘들다. '장애인 따위가 성 욕구를 가지고 있겠어?'와 '장애인이 무슨 성 욕구를 해소해?'가 있겠는데, 여하튼 이미 여기서 더 나아가지 못하는 것이다. 


글의 처음 소개한 장애인 성 도우미 논란과 연장선상에 있다고 할 수 있는, 섹스 테라피스트의 정체는 사실 혁명의 물결이 전 세계를 휩쓴 60년대에 확립되었다고 한다. 섹스보다 테라피스트 즉 치료와 치유에 방점을 둔 것이다. 단지 그 방법론이 섹스에 있는 것이리라. 이는 본인의 확고하고 당당한 신념이 중요할 듯하다. 


나아가 이 영화를 보는 가장 중요한 관점이자, 이 영화가 진정 말하고자 하는 바는 '사랑'과 '관계'에 있다. 마크를 아는 사람들이 느끼는 오묘한 감정, 그의 인간적인 면에 끌려 진정 사랑하게 되었지만 그의 장애를 극복하지 못하고 떠난 사람도 있고 셰릴처럼 공적인 만남으로 시작했지만 마크의 진심어린 마음과 역시 인간적인 매력에 끌린 사람도 있으며 모든 걸 떠나 오로지 마크라는 인간에 끌려 오랜 시간 함께 한 사람도 있다. 그리고 그의 분신과도 같은 친구와 도우미도 있다. 그들은 모두 '장애인' 마크 때문에 관계를 가졌지만, 모두 '마크'와 함께 하는 게 좋아졌다. 


우리가 이 영화를 보며 수정해야 할 것들


이 괜찮은 영화를 보고 우리는 더욱 괜찮은 생각을 할 수 있지 않을까? 충분히 가능하다. ⓒ20세기폭스코리아



나는, 아니 우린 이 영화를 보며 '수정'해야 할 게 많다. 무엇보다 꽉 막힌 머리와 무관심한 가슴이다. 장애인도 당연히 성 욕구가 있고 원한다면 그 욕구를 풀 수 있어야 한다는 것. 할 수 있지만 안 하거나 못 하는 것과, 할 수 없어 안 하거나 못 하는 건 아예 다른 차원의 얘기이기 때문이다. 그걸 받아들이고 나서, 그 욕구를 해소하는 방법을 논해야 한다. 그 방법에는 봉사 또는 치료가 있을 것이다. 


쉽지 않겠지만 장애인의 삶에 관심을 가져야 한다. 아니, 이해해야 한다. 그것도 안 되면, 차별하지 말아야 한다. 행동으로 옮기기 전에 가슴 깊이 새겨야 한다는 것이다. '틀린 게 아니라 다르다'는 진부하지만 심플한 명답도 함께. 세상엔 수많은 사람들이 함께 살아가는데, 그들은 단지 몸이 좋지 않은 사람일 뿐이다. 


섹스를 바라보는 시선과 섹스에 대한 생각의 수정이 가장 중요하고 절실할 수도 있겠다. 비록 전라노출과 사실적인 섹스신에도 불구하고 이 영화를 누구보다 추천하는 대상은 다름 아닌 청소년들인데, 청소년 관람 불가 등급이 아이러니하게 다가온다. 섹스란 불경하고 더럽고 몰래 숨어 즐기는 게 아니라, 이처럼 성스럽고 황홀하고 지적인 대상이다. 더욱이 몰래 숨기는커녕 당당하게 밝히고 응원까지 할 수 있는 것이다. 


영화 내적으로는 완벽한 캐릭터를 부여한데 대해 완벽하게 부합한 연기를 펼친 배우들이 빛났고, 영화 외적으로는 논란의 여지가 다분하지만 이겨낼 필요가 있는 다양한 관점을 드러내놓고 풀어낸 점이 빛났다. 무엇보다 이 모든 것들을 삶의 아름다움으로 묶어낸 점이 가장 밝게 빛났다. 그 어떤 인간도, 그 어떤 순간에도, 모두 아름답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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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래된 리뷰] <헤드윅>


개인적으로 오래된 숙원 사업이었던 <헤드윅>. 드디어 풀어냈다. ⓒ백두대간



오래된 숙원 사업이 하나 있다. 영화 <헤드윅>을 소개하는 것인데, 개인적으로 이해하기 힘들기도 했거니와 영화를 볼 때마다 또 다른 것들이 나를 덮쳐와 벅찬 면도 있었다. 소설 <위대한 개츠비>가 이 영화와 더불어 숙원 사업 중 하나였던 적이 있는데 풀어 냈고, 이제 <헤드윅>만 남았다.


기억에 처음 본 게 대학생 때였으니 2004년 쯤이었던 것 같다. '영화와 철학' 비슷한 제목의 교양 과목에서 '젠더' 주제의 타이틀이었다. 그때는 정녕 '충격'으로만 다가와 지금 생각하면 말도 안 되는 주장을 펼쳤던 것 같다. 두 번째가 2008년 쯤이었다. 이 영화를 극히 좋아하는 친구와 함께 봤는데, '아련'한 느낌으로 남아 있다. 세 번째가 3년 전쯤이었다. 혼자 봤는데, 다시 봐도 '재미'있구나 하고 지나갔다. 


그리고 이번에 네 번째로 아내와 함께 봤다. 스토리는 대략 알고 있으니 행간에 주목하려 했다. 조금은 보이는 것 같았다. '충만'한 기분이었다. 이 영화는 조금이라도 뭔가 보이면 성공이라고 생각하는데, 그래서 십수 년만에 비로소 이렇게 소개하고자 한다. 충격적이고 재미있고 아련하고 충만하기까지 한 이 영화 <헤드윅>, 그 완벽한듯 허술한듯 한 매력에 흠뻑 빠지지 않을 수 없을 것이다. 


특별한듯 이질적인, 그러나 평범한 사랑과 성장 영화


십수 년이 지났지만 여전히 겉모습만 보면 이질적일 수 있다. 하지만 결단코 이 영화는 평범한 사랑과 성장 영화다. ⓒ백두대간



가난한 록밴드 '앵그리 인치'를 이끌고 변두리 바에서 노래를 부르는 헤드윅(존 캐머런 미첼 분), 남자의 목소리와 여성의 몸매를 가졌다. 너무나도 좋은 노래를 너무나도 잘 부른다. '그녀'에겐 남자 친구 이츠학가 있다. 그런데 그는 여자 목소리를 낼 줄 알며 여자 가발을 몰래 쓰곤 한다. 그들은 맞지 않는 것 같다. 


헤드윅은 노래로 내래이션으로 대화로 자신의 이야기를 들려준다. 베를린장벽이 세워진 1961년 동베를린에서 태어난 그, 한셀은 아버지에게 성추행을 당했던 것 같다. 어머니한테 쫓겨난다. 한셀은 미군 라디오 방송에 심취해 오븐 속에서 락을 듣는다. 엄마가 싫어하기 때문. 그에게 미국으로 갈 기회가 열린다. 그에게 반한 어느 미군 병사가 그와 결혼을 한 것이다. 대신, 그는 성전환수술로 '여자'가 되어야 했다. 하지만 수술은 제대로 이루어지지 않았고 그에겐 일 인치의 살덩어리만 남게 되었다. 


그런 그녀에게도 사랑이 찾아온다. 미군 장군의 아들 토미인데, 그녀와 사랑에 빠진 것인지 그녀의 음악과 사랑에 빠진 것인지 모르겠지만 그들은 함께 한다. 그렇지만 그 문제의 일 인치 살덩어리 때문에 토미는 떠나고 급기야 헤드윅의 노래를 거의 그대로 훔쳐 세계적인 락스타로 발돋움한다. 헤드윅은 다름 아닌 토미를 스토킹하며 콘서트장에 딸린 레스토랑에서 노래를 부르는 것이었다.


<헤드윅>은 특별한듯 이질적인듯 거부감이 느껴질 수 있는 영화이지만, 실상은 평범한 사랑과 성장에 관한 영화다. 본래 사람은 남성와 여성이 한 몸에 있어 네 손과 네 발 달린 형체였는데 신의 노여움을 사 반으로 갈라졌기에, 자신의 반쪽을 찾아야 한다고 말하는 헤드윅. 그게 '사랑의 기원'이라는 것이다. 남자일까, 여자일까. 토미일까, 이츠학일까.  찾을 수 있을까. 


성에 대한 위대한 성취, 모두 맞다


감히 말하지만, 이 영화는 성에 대한 위대한 성취라 할 수 있다. 단순히 위대한 영화를 넘어선 그 무엇이다. ⓒ백두대간



1998년 존 카메론 미첼 주도 하에 만들어진 브로드웨이 뮤지컬 <헤드윅>, 2001년에 영화로 만들어진다. 세계 최고의 독립영화제인 '선댄스 영화제'에서 감독상을 수상하며 전 세계에 이름을 알리는 존 카메론 미첼과 영화 <헤드윅>. 이 영화가 넘어버리는 도식은 일반적인 사람이 생각하기 쉽지 않은 것이다. 특히 우리나라처럼 이분법적 사고가 당연하게 받아들여지는 사회에서는 말이다. 그래서 더욱 특별하다. 


베를린과 독일을 동과 서로 갈라버린 베를린장벽이 세워진 때 태어났다는 상징성을 몸소 보여주는 헤드윅, 남자에서 여자로 되었지만 남자의 흔적이 남아 있다. 그도 그녀도 될 수 없는 헤드윅은 그래서 반쪽을 사랑을 찾아 헤매는 것이다. 그러면 자신이 온전해질 수 있다고 믿는다. 그렇지만 갖가지 이유로 모두 떠난다. 


결론에 이르면 알게 되겠지만, 헤드윅은 자신에게로 돌아간다. 그렇게 깨달은 건 반쪽이 다른 누군가가 아니라 자신 안에 있다는 것. 즉, 젠더퀴어 선언에 이은 인정이다. 세상엔 남성과 여성만 있는 게 아니다. 영화에서 다양한 캐릭터들이 보여주는 성정체성과 사랑에 대한 혼란은, 그래서 틀린 게 아닌 다른 게 된다. 아니, 맞는 게 된다. 그런 혼란은 결코 이상한 게 아니라 정상적인 것이다. 


이어 역시 결론 때문에 혼란스러워지는 궁금해지는 헤드윅이 갖는 여러 정체성들이 있다. 헤드윅은 트랜스젠더, 드래그 퀸, 젠더퀴어로 변천사를 가지고 있다. 그 사이에도 알 수 없는 성정체성 변화와 혼란이 있었을 것이다. 그래서 결국 헤드윅은 누구란 말인가? 어떤 성을 가지고 있단 말인가? 우린 답을 원한다. 


그러나 헤드윅은 답하지 않는다. 끊임없이 고민하고 변화하고 혼란스러워 하면서도, 그때그때 자신을 있는 그대로 보여주는 것이 답이라고 생각한 것이다. 이는 '제3의성'을 인정하는 도식조차 넘어서는 '상대적 성정체성'의 확립이다. 모든 성을 다 가졌다고 자각하는 '팬젠더'나 모든 성을 오가는 '젠더플루이드'가 그나마 비슷할까? 나로서는 더이상의 진척이나 이해는 힘들다. 성에 관한 위대한 성취인 것만은 분명하다. 


'성정체성 따위', 그 자체로 완벽한 한 인간


성정체성이 어쩌구 저쩌구 하는 걸 집어 던져버리자. 그리고 자신으로 들어갔다가 나오자. ⓒ백두대간


이 영화를 보면서 스스로에게 질문을 던지고 스스로를 돌아보지 않을 수 없다. 굉장히 무섭고 두려운 질문이고 돌아봄인데, 내가 남성이 아닌 다른 성정체성을 가지고 있다고 생각하는 게 '끔찍'하기 때문이다. 지금 우리가 살고 있는 이 세상의 지극히 일반적인 모습이며 이상과 현실의 괴리이다. 이상은 모든 걸 다 인정하고 당연한듯 바라보는 것이지만, 현실은 끔찍하게 여긴다는 것이다. 


정확히는 '자신'이 그러하다고 생각할 때이다. 다른 누군가가 그러하다고 해서 끔찍하다고 여기진 않는다. 여기에는 다분히 교육에 의한 인식전환이 필요한대, 한 걸음씩 진전된 교육이 보이는 것 같다. 물론 오랜 시간이 걸릴 거다. 특히 우리나라에선. 최후의 대상은 다른 누구도 아닌 내가 될 것이다. 다른 누구도 아닌 나여야만 한다. 내가 성정체성의 변화를 받아들일 수 있어야 진정한 인식전환이 가능하다는 말이다. 


헤드윅이 남자친구 이츠악의 변화를 받아들이려 하지 않는 이유도 여기에 있다. 헤드윅은 자신의 변화를 받아들이려 하지 않았다. 그 혼란을 정면으로 응시하지 않고 자꾸 밖으로만 눈을 돌렸다. 그렇지만 돌아오는 건 참담한 실패뿐. 결국 자신에게 눈을 돌려 정면으로 응시해 받아들이니 문제를 풀 수 있었다. 


쉽지 않다. 아니, 불가능에 가까울 수도 있다. 이렇게 해보자. 성정체성을 특별하게 보지 말고 '성정체성 따위'로 생각하자. 남자나 여자도 생김새와 성격과 목소리와 행동거지 등으로 완벽한 하나의 개인이 존재하는 것처럼, 수많은 성정체성도 그렇게 생각해보자. 그들도 그저 존재하는 것이다. 하나의 개인으로. 


모든 개인에 무슨 수식어를 붙이지 않는 것처럼 헤드윅은 그저 헤드윅인 거다. 트랜스젠더니 드래그 퀸이니 젠더퀴어니 따위의 수식어는 필요 없다. 이 영화가 궁극적으로 보여주려는 게 바로 그런 모습이 아닌가, 싶다. 그 자체로 완벽한 한 명의 인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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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래된 리뷰] <디 아워스>


버지니아 울프의 <댈러웨이 부인>에 연관된 시공간을 달리하는 세 여인의 하루를 보여준다. ⓒ시네마 서비스


1923년 영국의 리치몬드 교외, 버지니아 울프(니콜 키드먼 분)는 소설 <댈러웨이 부인>을 쓰며 주인공에 대한 생각에 광적으로 가득 차 있다. 런던에서 언니네 가족이 놀러 왔다가 오래지 않아 돌아간다. 얼마 후 울프는 집을 뛰쳐나가 런던행 기차를 타기 위해 역에서 기다린다. 곧 남편이 그녀를 뒤따라 설득한다. 사실 그들은 울프의 정신병을 치료하기 위해 런던에서 리치몬드 교외로 왔던 것이다. 


1951년 미국의 로스앤젤레스, 둘째 아이를 임신한 로라 브라운(줄리안 무어 분)은 첫째 아들 리차드와 함께 남편 생일 파티를 준비하며 케이크를 만든다. 그녀가 버지니아 울프의 <댈러웨이 부인>을 즐겨 읽는 와중에, 친하게 진하는 친구가 놀러온다. 얼마 후 브라운은 리차드를 보모에 맡기고 자살하고자 호텔로 향한다. 하지만 결국 자살하지 못하고 집으로 돌아온다. 자살하려 한 것도 못 한 것도 <댈러웨이 부인> 때문이다. 


2001년 미국의 뉴욕, '댈러웨이 부인'으로 불리는 편집자 클라리사(메릴 스트립 분)는 죽어가는 옛애인 리차드의 문학상 수상 파티 준비를 하고자 한다. 리차드는 다름 아닌 1951년 미국의 로스앤젤레스 브라운의 첫째 아들 리차드이다. 그는 엄마에게 버림 받은 기억을 앉은 채 힘겹게 살아가다 죽음을 눈앞에 두게 된 것이다. 우여곡절 끝에 파티 준비를 마치고 리차드를 찾아간 클라리사, 그녀의 눈앞에서 리차드는 자살한다. 


자살, 동성애 그리고 여성


세 여인 앞에 놓인 것들이 시공간을 초월해 그들을 괴롭히고 힘들게 한다. ⓒ시네마 서비스



영화 <디 아워스>는 시간과 공간을 달리하는 세 명의 여성을 차례대로가 아닌 교차로 보여준다. 단 하루를 보여줄 뿐이지만 여성의 인생을 함축적으로 엿볼 수 있다. 이는 버지니아 울프가 <댈러웨이 부인>을 쓸 때 고심했던 부분인데, 로라 브라운이 <댈러웨이 부인>을 읽고 삶을 다시 생각하고 클라리사가 '댈러웨이 부인'이라 불리는 것처럼 이 영화는 소설 <댈러웨이 부인>과 깊은 연관이 있는 것 같다. 


세 여인에게서 공통적으로 발견할 수 있는 부분은 이밖에도 '자살'이 있다. 버지니아 울프는 남편의 말대로 라면 두 번이나 자살을 시도했다. 그리고 이 영화 <디 아워스>가 버지니아 울프가 자살로 생을 마감하면서 시작되기도 한다. 브라운은 <댈러웨이 부인>을 읽고 자살을 하고자 했다가 철회한다. 그의 아들이자 클라리사의 옛 애인 리차드는 결국 자살하고 만다. 


소설 <댈러웨이 부인>, '자살', 그리고 남은 한 가지는 '동성애'다. 사실 동성애 코드야말로 이 영화가 말하고자 하는 바에 가장 근접한, 또는 그 과정에서 가장 중요하게 작용하는 소재이다. 세 여인의 각각의 키스 장면에서 그 코드를 유추할 수 있는데, 그게 문제를 해소하는 기폭제가 아닌 문제를 키워버리는 기폭제가 될 때가 있어 안타깝다. 


사실 가장 중요한 게 남아 있다. 이 세 여성이 다름 아닌 '여성'이라는 점이다. 왜 하필 여성이었는지, 1923년부터 2001년까지 80여 년이 흐르는 세월 동안의 여성 삶이 무엇인지, 그 행간에 자연스럽게 스며 있고 짓눌려 있어 느낄 수 없는 무게를 우리는 면밀히 살펴야 한다. 


이들이 힘들어 하는 이유


이들이 힘들어 하는 건 사실 자살도 동성애도 아니다. 그들이 여성이기 때문이다. ⓒ시네마 서비스


실존인물 버지니아 울프는 적어도 영황에서만큼은 <댈러웨이 부인>을 쓸 당시 제 정신이 아니었다. 런던에서의 비극적인 삶을 뒤로 하고 한적한 교외로 요양을 와 마음의 병을 치료하고 소설쓰기에 전념한다. 하지만 그녀가 원하는 삶은 그게 아니었다. 그녀는 투쟁을 원했다. 남들이 보기엔 그녀의 투쟁이 정신병으로 보이고 속절없이 삶을 놓으려는 행동으로 보였을 것이다. 여자라면 응당 울프의 언니처럼 가정에 충실한 채 아이를 보살피며 살아야 하지 않겠는가? 소설 따위나 쓰고 앉아 있는 게 아니라...


로라 브라운은 아무 문제 없이 살아가는 것 같다. 건실한 남편에 좋은 집, 그리고 아들도 있다. 거기에 둘째까지 가졌으니 남들이 부러워할 만한 삶이다. 그런데 뭐가 아쉬워서 아들을 내팽겨치고는 뱃속의 아이와 함께 세상을 등지려 하는 것인가? 이보다 더 좋을 수 없을 정도의 '여성으로서의' 삶을 영위하고 있는 그녀인데...


클라리사는 영화에서 앞의 둘보다는 덜 입체적인 인물처럼 보인다. 그녀보다 그녀가 챙기는 옛 애인 리차드의 모습이 워낙 강렬하기 때문이다. 하지만 직접 찾아온 리차드의 옛 '남자친구'와 대면한 후 대화를 하는 도중에 터진 눈물과 하소연, 그리고 그녀의 딸과 나누는 대화를 통해 우린 현대 여성의 삶을 엿볼 수 있다. 문제는 거기에서 어떤 '문제점'을 찾기 힘들다는 사실이다. 여성에게 당연히 부과된 수많은 의무들이 문제라고 인식되지 않기 때문에 일어나는 문제다. 


이들이 힘들어 하는 건 두 층위에서 볼 수 있겠다. 둘 다 '여성'이기 때문에 더 크게 다가오는 것일 텐데, 하나는 여성으로서 부과되는 의무와 거기에서 파생되는 엄청난 무게다. 이 의무와 무게를 볼 수도 느낄 수도 없다. 다만 본인들은 알고 있다. 그렇지만 헤어나기가 힘들다. 다른 하나는 자신의 진짜 모습인 동성애자를 감춘 채 살아가야 한다는 점이다. 1923년 영국이든 1951년, 2001년 미국이든, 여성의 동성애는 감춰져야 한다. 일례로 남자 리차드의 '남자친구'는 자신을 버젓이 밝히지 않는가? 울프와 브라운이 자살을 시도한 건 여기에서 연유되었을 가능성이 크다. 


이 영화의 전부, 니콜 키드먼, 줄리안 무어, 메릴 스트립


니콜 키드먼, 줄리안 무어, 메릴 스트립. 혼자서도 영화 한 편을 온전히 이끌 수 있는 이들이 한 데 뭉쳤으니 더 말해 무엇하랴? ⓒ시네마 서비스


<디 아워스>는 세 여성인 버지니아 울프, 로라 브라운, 클라리사가 전부다. 즉, 이들을 연기한 니콜 키드먼, 줄리안 무어, 메릴 스트립이 전부란 얘기다. 가장 먼저 이 영화의 진정한 주인공인 버지니아 울프 역의 니콜 키드먼을 언급하지 않을 수 없다. 그녀를 지금의 그녀가 되게한 가장 중요한 영화는 단연 <물랑루즈>일 것이다. 가장 완벽한 뮤지컬 영화로 통하는 그 영화로 니콜 키드먼은 정점에 올라섰다. 


<디 아워스>는 그 다다다음 영화로, 같은 사람이 맞나 하는 생각을 시종일관 할 수밖에 없는 연기를 펼쳤다. 그에 앞서 겉모습이 버지니아 울프 그 자체인데, 가발은 물론 얼굴에도 특수분장을 한 것 같다. 또, 항상 어눌하고 불안한 채로 끊임없이 자기 자신 안으로 침참해 들어가면서도 자기 자신과 싸우는 울프의 모습을 재현해냈다. 완벽히.


그에 반해 로라 브라운과 클라리사 연기는 덜 튀고 덜 입체적이고 덜 눈에 띌 수 있다. 하지만 그 둘이 보여준 연기, 그중에서도 한두 장면들은 사실상 영화가 말하고자 하는 것을 가장 함축적으로 보여주었다. 브라운이 자살을 하지 못하고 돌아와 아들과 대화하는 장면, 남편과 대화하는 장면이 그렇고 클라리사가 리차드의 옛 남자친구와 대화하는 장면, 리차드가 자살하기 직전 대화하는 장면이 그렇다. 그 짧은 대화 속엔 그녀들의 삶이 녹아들어 있다. 


이 영화를 오랫동안 보지 않다가 두 번을 연속으로 쉬지 않고 보았는데, 교차 편집으로 인해 이해가 조금 힘들었던 점도 있었지만 무엇보다 그녀들의 삶을 이해하고 싶었던 점이 크다. 그런데 쉽진 않았다. 왜 그녀들은 불안해 하고 주저앉아 울고 자살하려 하고 그러다가는 다시 아무렇지 않은 척을 하는 거지? 처음 볼 때는 이해하고자 했고 두 번째 볼 때는 조금은 이해할 수 있었고 안타까운 마음이 들었다. 당분간 또 볼 용기는 나지 않는다. 또 보게 된다면 그땐 행간의 더 깊은 곳을 들여다볼 것이다. '왜'가 아니라 '어떻게'를 맨앞에 둔 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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singenv

冊으로 策하다. 책으로 일을 꾸미거나 꾀하다. 책으로 세상을 바꿔 보겠습니다. singenv@naver.com Since 2013.4.16




[오래된 리뷰] <종이 달>


한 평범한 가정 주부의 기막힌 일탈, 횡령으로 방탕한 생활을 하며 밀회를 즐긴다. 그건 일본 잃어버린 10년의 변주다. ⓒ영화사 오원



일본의 고도성장기와 버블경제기는 일본뿐만 아니라 전 세계적으로도 많은 영향을 끼친 유명한 키워드다. 특히 1990년대 일본의 '잃어버린 10년' 버블붕괴기는 현대 일본을 이야기하는 데 절대 빼놓을 수 없는 시기이다. 2000년대에도 나아질 또는 예전으로 돌아갈 기미를 보이지 않아 '잃어버린 20년'으로 통용되기도 하는 바, 참으로 많은 콘텐츠에서 다양하게 변주되었다. 


일본이 세계 최고의 경제대국으로 발돋움하고 그 지위를 굳히자마자 앓게 된 숙명적 병이라고 해도 틀린 말이 아닐 것이다. 그 병은 나라에서 사회로 가정으로 개인으로 전염되었고, 결국 최종적으로 개개인들이 뒤짚어쓰다시피 했다. 많은 사회파 소설과 다양한 장르의 영화에서 그 모습을 볼 수 있다. 


걸작 소설로 회자되는 작품을 영화화한 <종이 달>은 드라마를 기본으로 한 심리와 상황적 서스펜스 장르를 앞세워 숨막히는 현실감을 선사한다. 1990년대 중반을 배경으로, 잃어버린 10년의 진중한 변주가 엿보인다. 그런 한편 지극히 개인적인 요소도 가미해 소설과 영화만이 가지는 예술적 특성의 발현도 만끽할 수 있다. 


일본 버블붕괴기의 변주


이 영화는 시종일관 불안하다. 리카의 삶이 불안하고, 보고 있는 내가 불안하며, 이 세계까지 불안해 보인다. ⓒ영화사 오원



그리 모자를 것 없는 가정에서 평범한 가정주부로 살아가던 리카(미야자와 리에 분)는 우연한 기회에 별 생각 없이 지원해 파트타임으로 일하게 된 은행에서 어느새 4년차 계약직원이 되었다. 어느 날 외근을 마치고 퇴근하던 중 충동적으로 화장품을 사게 되는데 만 엔이 부족하길래 고객의 예금에서 꺼내 쓰고 나중에 채워놓는다. 채워놨으니 괜찮다고 생각했을 테다. 이 한 번의 행위가 시작이었으니...


이번에도 어느 날 외근을 마치고 퇴근하던 중이었다. 껄끄럽지만 대형 고객의 손자 코타와 마주친다. 일전에 집에 찾아 갔다가 도움 아닌 도움을 받은 적이 있었다. 리카의 충동은 한 발 더 나아간다. 코타와의 밀회가 시작되는 것이다. 한편 리카의 남편은 상하이로 장기출장을 가는데, 리카는 코타와의 밀회를 계속하면서 홀로 남는다. 그리고 코타가 대학등록금을 내기 위해 대부업체에서 대출을 받았다는 걸 알게 되는데...


그를 위해 리카의 충동은 절정으로 치닫는다. 대형 고객의 예금에 손을 댄 것이다. 이전에 잠깐 쓰고 채워놓은 만 엔 정도가 아닌, 200만 엔의 거금이다. 당장 채워놓을 생각도 없고 그럴 능력도 없다. 그런데 그녀는 오히려 더 많은 고객 예금에 손을 대는 게 아닌가? 엄청난 돈을 쓰는 호화로운 생활에 취해버린 것 같다. 그녀의 앞날은 어떨까.


1990년대 중반 일본, 가정주부 출신, 은행, 대형 고객, 횡령, 밀회, 자유. 영화 <종이 달>을 형성하는 키워드들이다. 동일선상의 층위라고 할 순 없지만, 1990년대 일본 버블붕괴기의 여러 변주들이라고 할 수 있겠다. 여기에서 횡령과 밀회와 자유의 상관 관계에도 주목할 필요가 있다. 사회적 요소와 개인적 요소를 합리적으로 이어주는 데 큰 역할을 하기 때문이다. 


횡령에 의한 호화생활, 그 모든 게 신기루이자 가짜


제목 '종이달'은 신기루이자 가짜의 상징이다. 리카가 횡령으로 호화생활을 하고 밀회를 즐기는 게 모두 그렇다는 것. 그녀의 무표정한 얼굴을 보라. ⓒ영화사 오원



뭐니뭐니 해도 영화의 중심엔 리카의 횡령이 있다. 그녀가 상대하는 대형고객들은 망령든 일본 사회가 흩뿌린 마지막 행운을 움켜쥔 운좋은 이들이라고 할 수 있다. 그들은 다름 아닌 버블경제의 수혜자들이다. 그들은 버블경제가 곤두박칠 치기 직전 땅값과 주가가 폭등할 때 한몫 챙겼을 것이다. 이후 모두가 허덕일 때 홀로 자가증식했고 은행의 최대고객이 되었다. 


리카가 그들의 예금을 빼돌려 내연남과 함께 분수에 맞지 않은 호화 생활을 한 건, 그러면서도 그들의 대한 죄책감 하나 가지지 않았던 건, 그들이 아닌 버블경제가 낳은 '버블'이라는 쓰레기를 조롱하며 그 또한 언젠가 사라질 신기루이거나 이미 진짜 아닌 가짜라고 말하고 있는 것이다. 그야말로 통렬한 비판이다. 


그렇지만, 리카는 달리 말한다. 왜 횡령을 일삼았냐는 질문에 그녀는 '자유'를 말하는 것이다. 물론 그 앞에 '가짜로서의'라는 수식어를 달았다. 그녀 입으로 직접 대형고객들의 예금을 빼돌려 호화 생활을 한 게 전부 '가짜로서의 자유'를 만끽한 것이라고 말한다. 그 돈 모두 버블에 지나지 않은 신기루라고 못을 박고 있는 것이다. 


리카는 잘 알고 있었던 듯하다. 너무나도 당연하게 빼돌린 돈으로 호화 생활을 하면서도 종종 보이는 그녀의 공허한 표정은 앞으로 다가올 예정된 비극을 암시한다. 그녀의 앞날은 어찌될 것인가. 죗값을 달게 받을까. 그건 이 변주의 정석적인 마무리가 될 것이다. 하지만, 만약 죗값을 받지 않는다면 그건 이 변주의 훌륭한 마무리가 될 것이다. 일본은 '잃어버린 20년'으로 죗값을 받고 있지만, 정작 버블을 일으킨 당사자들은 죗값을 받기는커녕 떵떵거리며 잘 살고 있을 것이기 때문이다. 


차원을 달리하는, 나라를 이끄는 이들의 무감각


'가짜'와 '자유'를 운운하는 그녀의 횡령범죄, 진짜 문제는 그리고 영화가 진짜 말하고자 하는 건 나라를 그 꼴로 만든 이들의 무능력과 무감각과 무탈함일 것이다. ⓒ영화사 오원



시대의 소시민이라 할 수 있는 평범한 가정주부 출신의 리카가 벌인 희대의 범죄 행각은, 그 평범함이 주는 무감각만큼 불쾌하고 불안하고 무섭기까지 하다. 횡령은 그 어느 누구라도 실행 가능한 범죄이며, 그 누구라도 생각할 수 있는 범죄다. 무엇보다 한 번 시작하면 헤어나오기 힘들다. 부자의 돈이라며 자기합리화하고, 다시 채워넣으면 된다고 자기최면을 건다. 


더 큰 문제이자 더 불쾌하고 불안하고 무섭게 다가오는 건, 나라를 이끄는 이들의 무감각이다. 횡령을 비롯한 그들의 범죄는 전국민 누구나 알게 되어 공론화 되지만, 전국민 누구도 그 자세한 사항과 비하인드 스토리와 이후의 일들을 알지 못한다. 회자되고 비난받고 역사에 그 이름이 남을지 모르지만, 정작 그들 자신의 삶은 이전과 큰 변화가 없을 것이다. 소시민의 평범한 범죄가 주는 소름과는 차원을 달리하는, 진정한 범죄가 아닌가. 


일본의 버블붕괴, 한국의 IMF사태, 미국의 금융위기와 같은 초국가적 경제 위기는 모두 나라를 이끄는 이들의 비상식적이고 의도된 무감각에서 비롯되었다. 거기에 비하면 리카의 '자유'와 '가짜' 운운하는 횡령 범죄는 비록 그 평범함 때문에 더 깊숙이 와 닿아 더 치를 떨고 지켜보게 되지만, 그럼에도 차라리 귀엽다고 하겠다. 한편, 리카가 말하는 자유와 가짜가 나라를 위기에 빠뜨린 이들에게 던지는 말이니 만큼 아니러니하다 하겠다. 


영화를 보는 내내 '나라면 어떻게 했을까' 계속 생각했다. 범죄를 저지르는 건 한순간이기에 '나라면 이렇게 했을 것이다'라는 건 통용되지 않을 것이다. 그 이후에 해당된다. 돈을 채워놓지 않는 한 반드시 들통 나게 되어 있다. 그렇지만 채워놓을 마음도 없고 능력도 없으니, 결국 들통 난 이후에 해당될 것이다. 죗값을 받을까? 도망갈까? 여기에서의 선택은 보다 개인적이고 예술적인 영역인 바, 도망을 택하겠다. 리카는 어떻게 했을까? 당신이라면 어떻게 했을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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