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오래된 리뷰] <아키라>


<아키라> 포스터. ⓒ(주)삼지애니메이션



일본 애니메이션, 일명 '재패니메이션' 하면 <철완 아톰>의 '데즈카 오사무'와 30년 넘게 최고의 영향력 위에서 군림하고 있는 '미야자키 하야오'가 떠오를 것이다. 그들 덕분에 재패니메이션은 그 어떤 문화 콘텐츠와도 어깨를 나란히 하는, 아니 그보다 더 위에서 굽어보는 위치에 서게 되었다고 해도 과언은 아니다. 


하지만, 1980~90년대 재패니메이션의 진정한 중심에는 일명 '사이버 펑크' 장르가 있었다. 너무나도 유명한 것도 모자라 전설이 되어버린 <공각기동대> <에반게리온> <인랑>, 세 작품만으로도 충분하고도 넘친다. 이 세 작품은 1990년대 태생이다. 굳이 명명하자면, 일본의 버블경제 시기에 태어난 작품들. 이들이 보여주는 디스토피아는 현재진행형이었던 것이다. 


반면, 이들보다 거의 10년 가까이 먼저 태어난 시조격의 작품이 있다. <아키라>가 그것이다. 붕괴 조짐은 보였지만, 여전히 사상 최고이자 전 세계 최고의 물질적 토대를 세우고 있던 1980년대 후반 일본에서 만들어졌다. 이 작품이 보여주는 디스토피아는 현재만 아니었을 뿐, 과거와 근 미래와 먼 미래까지도 아울렀다. 재패니메이션의 기준이 되었다는 <아키라>는 어떻게, 무엇으로, 왜 진정한 전설이 되었나.


더할나위 없는 완벽한 마스터피스


더할나위 없는 완벽한 마스터피스. <아키라>의 한 장면. ⓒ(주)삼지애니메이션



1988년 제3차 세계대전으로 도쿄는 무너진다. 그로부터 30여 년이 흐른 2019년, 네오도쿄라는 이름으로 재건되어 첨단을 달리는 도시가 된 도쿄이지만, 안으로는 혼돈 그 자체이다. 그래서일까, 반정부 시위가 극렬하다. 한편 도시는 폭주족의 세상이기도 하다. 테츠오도 그중 하나인데, 사고를 당하고는 누군가에 의해 어딘가로 끌려간다. 


테츠오의 친구이자 폭주족 집단 대장이라 할 수 있는 카네다는 테츠오를 구하고자 하지만 당연히 쉽지 않다. 와중에 반정부 조직 활동에 휩쓸리게 되고 조직원 케이와 함께 테츠오를 구하려는 움직임을 갖는다. 한편 테츠오가 끌려간 곳은 군 직할 연구소로, '아키라'라는 무지막지한 초능력 에너지를 봉인해 놓은 곳이다. 


그곳은 시키시마 대령이 관리하는 곳으로, 오오니시 박사로 하여금 아키라를 비롯한 초능력 에너지들을 제대로 관리해 무너지고 있는 도시를, 사회를 지키고자 한다. 과거 한때 아키라의 폭주로 큰 피해를 본 적이 있기에 그 무시무시한 힘을 잘 알고 있다. 여기에 테츠오가 끌려왔고 그들은 테츠오에게 제2의 아키라가 될 수 있는 잠재력을 발견했다. 하지만 테츠오는 점점 폭주하게 되는데... 테츠오의 미래는? 도쿄의 미래는?


<아키라>는 여러 면에서 더할나위 없이 완벽한 콘텐츠다. 아니, 애니메이션이자 만화였기에 가능한 완벽함이 있는 만큼 콘텐츠보다 애니메이션이라고 지칭하는 게 맞겠다. 이 작품은 일본의 과거와 현재와 미래를 아우르는 동시에, 만화와 애니메이션만이 뽐낼 수 있는 모든 걸 보여준다. 그 자체로 마스터피스이면서도, 이전의 걸작들을 계승하고 이후의 걸작들에게 영향을 끼쳤다. 


일본을 설명하는 가장 탁월한 작품


일본을 설명하는 가장 탁월한 작품. <아키라>의 한 장면. ⓒ(주)삼지애니메이션



너무나도 유명한, 하나의 상징이 되어버린 이 작품에 대해 더 이상 무슨 말이 필요하랴 싶다. 그럼에도, 그렇기 때문에 더더욱 위험을 무릎쓰고(?) 최선의 소개를 해야 하지 않겠는가. 뭐니뭐니 해도 이 작품에서 가장 충격적인 건 일본의 전과 현과 후를 아우른다는 점이다. 일본을 설명하는 가장 탁월한 작품 중 하나가 아닐까. 


20세기 초중 일본은 사실상 전 세계를 상대로 전쟁을 일으킨다. 크지 않은 섬나라의 불과한 나라에서 분출되는 넘치는 에너지를 밖으로 뿜어내야 했는지, 나라를 이끄는 고위급들이 일반 사람들의 시선을 돌리기 위해서 였는지, 다양한 이유로 그러했을 것이다. 하지만 알다시피 결말은 끔찍하다. <아키라>의 시작과 겹치는 부분이다. 


이후 시간이 흘러 일본은 전후 재건과 호황을 맞이한다. 1964년 도쿄 올림픽은 그 상징과도 같다. <아키라>의 마지막을 화려하게 장식하는 주무대가 다름아닌 공사가 한창인 올림픽 경기장이다. 2020년에 올림픽이 치러지는가 보다. 실제로 2020년은 도쿄 올림픽이 예정되어 있다는... 30년의 시간차를 두는 소름끼치는 예언이다. 한편 그와 반대급부의 극렬한 반정부 시위가 이어지는데, <아키라>에서도 볼 수 있다. 


한편, <아키라>가 당시 현재의 시대상을 녹여낸 건 테츠오의 광기와 폭주의 모습이다. 그는 자격지심이 심한대, 그 욕망이 잘못되게 분출되어 폭주하고 마는 것이다. 일본의 과거가 그러했고, 1980년대 후반 당시도 그러했다. <아키라>는 그것이 결국 한낱 거품에 지나지 않는다고 단언한다. 그렇다고 반정부 조직에 손을 들어주지도 않는다. 모든 것이 허망함으로 귀결되는, 허무주의의 한 단면이 엿보이기도 한다. 


<아키라>의 절대적인 스타일


<아키라>의 절대적 스타일. <아키라>의 한 장면. ⓒ(주)삼지애니메이션



이 정도는 세 발의 피다. <아키라>의 진정한 힘은 위에서 언급한 연출과 이야기보다 작화와 스타일에 있다. 말도 안 되게 세밀한 작화는 1989년부터 연재를 시작한, 장인정신에 빛나는 작화를 자랑하는 <베르세르크>에 비견되지 않을까. 즉, 최고라고 해도 과언이 아니라는 말이다. 


스타일이야말로 <아키라>를 규정짓는 가장 큰 개념이다. 수많은 <아키라> 이후 사람들이 존경하고 팬을 자처하고 오마주하고 패러디한다. 심지어 사이버펑크의 대표주자들, 일반인들에겐 <아키라>보다 훨씬 유명하다고도 할 수 있는 <공각기동대>나 <에반게리온>도 같은 급일 수 없다. 아류라고 할 순 절대 없지만, '제2의 <아키라>'라고 할 순 있겠다. 아니, 그래야만 할 것이다. 


<아키라>는 '사이버펑크'라는 반체제, 반문화적인 성격을 갖는 문화개념의 원류 중 하나이다. 그렇지 않아도 서브컬쳐로 인식되었던 재패니메이션인데, 거기에 서브 중의 서브적인 모습을 보여주는 파격을 선보인 것이다. 결과는 모두가 다 아는 압도적인 모습의 발현. 콘텐츠 자체가 갖는 힘 앞에선 어떤 성찬의 미사여구나 불안과 걱정 따위는 필요가 없다. <아키라>는 그저 <아키라>일 뿐이고, 앞으로도 영원히 그럴 거다. 


이런 작품이 또 나오긴 절대적으로 힘들 것이다. 다만, 한 가지 바라는 건 다름 아닌 '리메이크'다. <아키라>가 상당 부분 오마주했을 거라 생각되는 영화 <매드 맥스> <블레이드 러너>가 최근에 리메이크되지 않았는가. <공각기동대>처럼 실사로 리메이크하는 건 쉽지 않아 보이지만, 어떤 식으로든 다시 보고 싶다. 재개봉이 아닌 형태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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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래된 리뷰] 벤 애플렉의 <아르고>


영화 <아르고> 포스터. ⓒ워너브라더스코리아



2500년 동안 이란 땅은 '샤'라는 이름의 왕들이 통치했다. 1950년 이란 국민들은 세속주의 민주주의자인 무함마드 모사테크를 수상으로 선출했다. 그는 영미(英美)의 석유 보유를 국영화하여 국민들에게 이란의 석유를 돌려주었다. 그러나 1953년 영미는 쿠데타를 꾀하여 모사테크를 퇴위시키고 레자 팔레비를 취임시켰다. 


팔레비는 부유와 방종으로 유명했다. 반면 국민들은 굶주렸다. 그는 무자비한 국가 치안 정보국 '사바크'를 통해 권력을 유지했다. 고문과 공포의 시대가 시작된 것이다. 그 후 그는 이란을 서구화시키기 위한 운동을 시작했고 국민들은 격분했다. 결국 1979년 이란 국민들은 팔레비를 타도했다. 


추방되었던 종교지도자 아야톨라 호메이니가 이란을 통치하기 위해 귀환했다. 이란은 보복과 암살, 혼란의 시대로 빠져 들어갔다. 한편, 팔레비는 미국으로의 망명을 허락받았다. 이에 이란 국민들은 미국 대사관으로 몰려가 팔레비가 귀환하여 재판을 받고 교수형에 처해지길 요구했다. 


미국인의 이란 탈출을 위한 가짜 영화 만들기


미국인의 이란 탈출을 위한 가짜 영화 만들기. ⓒ워너브라더스코리아



영화 <아르고>의 2분 여의 프롤로그에 불과한 내용이지만, 영화를 제대로 짚고 이해하기 위해선 반드시 알아야 할 역사이다. 이른바 '이란 혁명', 국민들의 손으로 왕조를 타도하고 공화정을 수립한 후 이어지는 일련의 행동이다. 팔레비를 향한 분노는 미국을 향한 분노로 바뀌었고, 곧 미국 대사관을 향한 분노로 바뀐다. 


미국 대사관은 점령 당하고 60명이 넘는 미국 시민들은 인질로 잡히고 만다. 한편 미국 대사관 직원 6명은 극적으로 탈출해 테헤란에 있는 캐나다 대사 집으로 피신한다. 하지만 머지 않아 혁명수비대는 6명이 탈출했다는 사실을 알게 되고 집집마다 '사냥'을 시작한다. 이에 미국 CIA는 차라리 안전한 인질들보다 캐나다 대사 집에 피신해 있는 직원들을 탈출시키기로 결정한다. 


하지만 그 어떤 작전도 최악을 벗어나지 못하는 가운데, 탈출 전문가 토니 멘데스(벤 애플렉 분)는 아들과 통화를 하며 영화 <혹성탈출>을 보다가 영감을 얻는다. 가짜로 영화를 찍는다 하고, 그 6명을 캐나다인 로케이션 스카우터로 위장시키고자 한 것이다. 곧 상부의 허락을 받고 본격적인 가짜 영화 만들기에 돌입하는데...


영화는 날카로운 연출력과 유머를 장착해 미국이라는 나라의 여러 모습과 이란 혁명수비대를 통해 보는 폭력적 민족주의의 모습, 그리고 할리우드 풍자와 드러나지 않는 개인의 위대함 등을 두루두루 살핀다. 이 모든 걸 지나치더라도 가짜 영화 제작과 극적 탈출의 실화를 감상하는 것만으로도 충분한 재미와 가치를 지닌다. 


미국을 향한, 이란을 향한 서슴없는 비판과 풍자


미국을 향한, 이란을 향한 서슴없는 비판과 풍자. ⓒ워너브라더스코리아



미국은 세계 경찰을 자임하며 전 세계를 '정리'하려 한다. 그것이 그 나라와 그 나라 국민들을 위함이고 전 세계를 위함이라고 말한다. 하지만 결국 모든 건 미국을 위한 일일 테다. '주 이란 미국 대사관 인질 사건'은 이란의 혁명수비대에 의한 치명적 위험에서 미국 시민을 탈출시키는 게 주요한 사정이지만, 실상 거슬러 올라가면 미국에 의한 치명적 개입과 오판에서 시작된 것이다.


영화는 그런 미국의 이면을 이란 여성의 기자회견 장면을 통해 상당히 직접적으로 비판한다. '미국은 인권을 옹호한다지만, 실상 인권을 옹호하지 않을 뿐만 아니라 모든 나라에서 인권을 침해합니다.' 그리고 미국 시민 사회는 이란이라는 나라뿐만 아니라 일반 이란인을 향한 분노를 서슴지 않고 표현한다. 이에는 이, 눈에는 눈이라는 것인가. 그 즉시 미국은 그들이 비난하는 이란과 다를 바 없어진다. 


한편, 이란의 폭력적 민족주의를 향한 비판은 영화 전반에 퍼져 있다. 그들이 인질로 잡고 있는 수십 명의 미국인들과 그들이 사냥하려 하는 6명의 미국인들 또한 미국의 입장을 조금도 반영하지 못한다. 사실상 그들은 잘못이 없는 것이다. 그런 그들에게 프레임을 씌워 미국을 협박하는 건 애초에 하지 말아야 할 잘못이다. 


잠깐이지만 등장하는 이란에서의 'KFC'는 할리우드와 함께 미국 그 자체라고도 할 수 있는 상징이다. 문화적 점령의 첨병이라고 할까. 이란은, 이란인들은 투철한 반미 감정을 지니며 미국을 소비한다. 영화는 그들의 무지에 의한 내부 모순을 신랄하게 비판하는 것이다. 


씁쓸함을 동반하는 위대한 개인의 탄생


씁쓸함을 동반하는 위대한 개인의 탄생.ⓒ워너브라더스코리아



할리우드와 합작해 가짜 영화를 만드는 프로젝트에 착수한 CIA, 저명한 제작자와 함께 해야 하는 건 물론이다. 가짜이지만 진짜 같아 보여야 하기 때문에, 그 어떤 영화를 제작하려 할 때보다 많은 신경을 써야 한다. 즉, 훨씬 더 많은 사람들을 속여먹여야 한다. 그렇지만, 그건 그들에게 그리 어려운 일이 아니다. 그들이 매일같이 하는 일이란 게 사람들 속여먹는 것이기 때문에. 


아는 사람은 안다. 수많은 영화들이 제작 직전에 엎어지고, 심지어 제작이 되었으면서도 개봉되지 못한다는 걸. 그럼에도 수많은 사람들이 모이고, 엄청난 돈이 몰려드는 곳이 영화판 할리우드이다. 그러므로 '가짜 영화'란 존재하지 않는다. 아니 '진짜 영화'라는 게 존재하지 않으므로 '가짜 영화'가 존재하지 않는다고 하는 게 맞다. 


결국 작전을 성공시키는 건 다름 아닌 '개인'들이다. 미국이라는 세계 경찰도 아니고 CIA라는 세계 최고의 공작기관도 아니며, 할리우드라는 세계 최고의 영화판의 힘도 아니다. 적어도 영화에서는 토니 멘데스라는 개인의 용단과 그와 함께 한 할리우드 제작자의 믿음과 인내이다. 때로 개인은 사회, 국가, 조직보다 힘이 쎄다. 


영화가 궁극적으로 말하고자 하는 건 이와 같을 것이다. 영화가 비판하는 것들인 미국이나 이란이나 할리우드의 실체는 개개인의 삶의 향상이나 긍정적 도움에 있는 게 아니라 그들 각자도생에 있다는 사실. 더 이상의 정의는 없고, 더 이상의 긍극적 인권은 존재하지 않는다. 위대한 개인의 탄생과 부각은 씁쓸함을 동반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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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래된 리뷰] 크리스토퍼 놀란의 <인터스텔라>


영화 <인터스텔라> 포스터. ⓒ워너브라더스코리아



10년 전 <다크나이트>부터였던 것 같다. 크리스토퍼 놀란이라면 어떤 방식으로든 우리에게 무엇인가를 던져줄 거라고. 2년 뒤에 나온 <인셉션>은 그 기대에 부합하는 최상의 작품이었다. 아니, 놀란의 이름을 전 세계에 알린 <메멘토>부터 우린 그에게 기대를 해왔고 그는 항상 부합해 왔다고 보는 게 맞다. 


2017년 최고의 영화 중 하나라 할 만한 <덩케르크>로 '부활'하기까지 그에겐 사실상 여러 부침이 있었다. 그가 연출하지는 않았지만 기획하고 프로듀서하고 제작했던 영화들이 흥행과 비평에서 쓴맛을 맛본 것이다. 그 한가운데 그가 연출한 <인터스텔라>도 있다. 우리나라에서 1000만 명 관객을 돌파한 이 영화가 놀란의 '흑역사'라니?


단도직입적으로 말해, '놀란이라면'에 부합하지 못한 흥행과 비평 성적을 거두었다. 북미에서는 손익분기점을 넘기지 못했고 그나마 월드와이드 흥행이 잘 되었다. 영화는 놀란의 엄청난 필모에 비해 명백한 '평작'이다. 그럼에도 <인터스텔라>를 다시금 들여다보는 이유는, 영화가 던지는 이야기들 때문이다. 우리는 이 영화를 가지고 다양하게 즐길 수 있는 것이다. 일단 줄거리를 알 필요가 있다.


실현 가능한 최신·최고의 우주적 상상력


영화 <인터스텔라>의 한 장면. ⓒ워너브라더스코리아



20세기에 저지른 잘못으로 모든 게 무너진 미래의 머지 않은 미래의 어느 때, 인류는 끝없이 불어닥치는 먼지와 옥수수밖에 남지 않은 식량 고갈로 앞날이 캄캄하다. 아들 딸과 함께 옥수수밭을 일구며 농부로 살아가는 전직 NASA 연구원 쿠퍼(매튜 매커너히 분)는 집에서 일어난 초자연적인 일이 중력에 의한 좌표를 말하는 걸 알고 그곳을 찾아간다. 알고 보니, 그곳은 극비로 운영되고 있는 NASA였다. 


NASA는 다목적 우주선 인듀어런스호를 만들어 지구를 떠나 '새 집'을 찾기 위한 마지막 탐험을 준비하고 있다. 쿠퍼는 모두를 뒤로 하고 막중한 임무를 받아들인다. 그들은 48년 전에 생겨난 '웜홀'을 통해 다른 은하계로 가고자 한다. NASA는 이미 여러 행성에 여러 탐험대를 내보냈었고 이번 탐험으로 그들 중 몇몇을 구출하며 그들에게서 행성의 정보를 얻어 '새 집' 여부를 판단하고자 한다. 


성공적으로 떠나는 탐험대 겸 구출대, 여지없이 실패를 맛보며 대원 중 한 명을 잃고 아무런 소득 없이 지구 시간으로 20년 넘게 써버리는 불상사도 겪지만 굴하지 않고 전진한다. 결국 성공에 가까워지지만, 뜻하지 않은 거대한 비밀 또는 거짓말을 알게 된다. 그들은 지구로 돌아갈 수 있을까, 지구는 여전히 사람이 살 수 있는 곳인가. 


영화는 실현 가능한 최신·최고의 이론을 바탕으로 상상 그대로의 우주를 스크린으로 고스란히 옮겨놓았다. 3시간 가까이 다른 무엇도 아닌 그 신세계들만 감상해도 충분할 정도이다. 이 영화를 앞뒤로 1년의 차이를 두고 찾아온 <그래비티>와 <마션>을 훨씬 뛰어넘는 압도적 고증과 상상력이다. 


압도적인 반쪽 짜리


영화 <인터스텔라>의 한 장면. ⓒ워너브라더스코리아



놀란은 <인터스텔라>로 보여주고 싶은 것도 말하고 싶은 것도 많았다. 그 중심엔 다른 누구도 무엇도 아닌 '인간'이 있었을 텐데, 그래서 볼 거리와 감상할 거리보다 생각할 거리가 많았으면 했을 텐데, 보는 이로 하여금 과학적으로 단련된 상상력의 구현과 함께 그와는 굉장히 거리가 멀어보이는 사랑과 가족애가 돋보였다. 


영화는 현재까지 물리학, 그중에서도 우주론에 입각해 역사상 가장 위대한 발견들이 다수 나온다. 인듀어런스호가 웜홀 입구로 가기 위해 화성 주변에서 화성의 중력을 이용하는 건 '중력기둥'이라 한다. 인듀어런스호가 계속 회전하는 이유는 '등가원리' 때문이다. 이것을 활용하면 인위적인 중력을 만들 수 있어 불편함 없이 우주선 생활이 가능하다. 그리고 '블랙홀과 웜홀'이 있다. 


<인터스텔라>는 블랙홀의 '중력렌즈' 효과, 즉 블랙홀을 원반층이 적도를 가로지르고 있고 블랙홀 주면으로 고리 모양의 층이 보이는 모습을 최초로 묘사했다. 웜홀을 이용한 시간여행이야말로 이 영화의 백미인데, 영화의 감수를 본 세계적인 학자 킵 손은 웜홀의 입구를 광속으로 운동시킬 수 있다면 시간여행이 가능하다고 주장했다. 영화는 그의 주장에 입각해 이야기를 펼쳐나간다. 


이 놀랍도록 비영화적인 이론에 놀란의 상상력이 입혀지니 경이롭다고 말할 수밖에 없는 장면들이 압도한다. 그런데, 거기에 '사랑'이라는 옷을 입히니 많이 어설퍼 보인다. 아니, 사랑이라는 건 옷 따위가 아닌 결정체이니 '과학'의 옷을 입히고자 했다는 게 맞다. 하지만 과학이 쏘아보낸 강렬함이 눈길을 모조리 뺏아가 버리니 사랑의 위대함이 오히려 묻혀버리고 만 것이다. 


영화는 그렇게 두 마리 토끼를 다 잡으려다, 한 마리 토끼만 그것도 의도치 않은 토끼만 잡은 셈이 되었다. 그래서 이 영화는 사실상 반쪽 짜리, 아니 반쪽도 못 되는 정도이지만, 그 반쪽 짜리가 엄청난 힘을 발휘했기에 이 정도 대접(?)을 받는 것이다. 적어도 그 힘과 영향력에 대해선 이의가 없다. 


크리스토퍼 놀란이라면


영화 <인터스텔라>의 한 장면. ⓒ워너브라더스코리아



돌고 돌아 다시 '놀란'이다. 사실 이 영화에서 놀란이 설 자리는, 놀란의 전후 작품들보다 훨씬 적다. 경이로운 볼 거리에 압도 당하고, 블랙홀과 웜홀 등에 관한 과학적 논란에 흥미를 빼앗기고, 점점 사랑의 산으로 향하는 영화를 향한 호불호 때문에 정신을 차릴 수 없다. 이 영화만큼은 귀결점이 놀란이 아닌 것이다. 


그럼에도 다른 누구도 아닌 놀란의 영화에서 놀란을 빼놓을 순 없다. 놀란의 생각과 의도를 아는 것과 알지 못하는 건 큰 차이다. 그의 필모와 인터뷰를 살펴 봤을 때, '인간'에 대해 말하고자 했던 것 같다. 결국 과학도 사랑도 모두 인간에 의해 행해지는 것이리라. 쿠퍼가 NASA에 가게 되어 우주 저 멀리까지 가게 된 것도 결국 알 수 없는 '그들'이 아닌 생생하게 살아 있는 '그' 때문이지 않은가. 


문제는, 우주를 은하계를 심지어 시간을 관통하고 관장까지 하게된 인간의 중심성이 과도하지 않았나 하는 것이다. 안으로 안으로 들어간 <인셉션>과 달리 밖으로 밖으로 나간 <인터스텔라>의 성향과 맞지 않았을지도. 과도해서 아무도 알아채지 못한 것인지, 아무도 알아채려 하지 않은 것인지는 모르지만, 그 부분에서 놀란은 실패했다. 그럼에도 다시금 '인간'에 천착한 놀란은 <덩케르크>로 성공과 부활을 만끽했다. 


그의 차기작도 인간에 천착할 것은 명약관화이다. 그가 다시금 초심으로 돌아갔으면 하는 바람이 있다. 또 다른 <다크나이트>를 보고 싶다고 하면 너무 큰 바람일까. 내러티브와 스타일에 매몰되지 않고 완전히 장악한 그의 면모를 말이다. 기대는 기대를 낳고 실망은 실망을 낳지 않는 법. 크리스토퍼 놀란을 향한 기대는 영원할 듯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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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래된 리뷰] <웜 바디스>


2010년을 전후해 전성 시대를 열었던 패러노멀 로맨스의 마지막 흥행작이라 할 수 있는 <웜 바디스>. ⓒCJ엔터테인먼트




트와일라잇 시리즈가 시작이었던 것 같다. 판타지적인 캐릭터가 인간과 사랑에 빠지는 '패러노멀 로맨스'의 현대 시작점이 말이다. 이후 <렛 미 인> <늑대소년> <웜 바디스> 등이 잇달아 우리를 찾아왔다. 내년 초에는 길예르모 델 토로 감독의 최고 기대작 <셰이프 오브 워터: 사랑의 모양>도 찾아올 예정이다. 거의 30여 년 전에 전 세계를 강타한 팀 버튼의 <가위손>도 생각난다. 


'결국 사랑이다'라고 말하는 이 영화들, 각종 장르의 탈을 쓴 로맨스 영화들이라고 할 수 있다. 더불어 그 대상이 어른도 아닌 어린이도 아닌 청소년들이다. 영화 산업의 변화와 함께 시대의 흐름까지 엿볼 수 있다. 적어도 이 영화들이 한창 나왔던 2010년 전후는 10대들의 시대였다는 것. 


<웜 바디스>는 패러노멀 로맨스 전성 시대의 사실상 마지막 흥행작이다. 흥행작이면서 괜찮은 평을 얻었던 작품이기도 하고 말이다. 현대적 공포물의 대명사격인 좀비가 인간과 사랑에 빠져 로맨스를 펼친다는 설정에 더 이상 어떤 패러노멀 로맨스가 나설 수 있겠는가. 물론 무수한 영화들이 나 몰래 찾아왔다가 스쳐지나 갔을 것이다. 


좀비 1인칭 시점의 파격


좀비 1인칭 시점이라는 파격을 훌륭히 소화한다. ⓒCJ엔터테인먼트



자기가 누구였는지 알 길이 없는 좀비 R(니콜라스 홀트 분)은 좀비 뿐인 공항에서 생활한다. 그의 집은 멈춰버린 비행기 안, 그래도 전(前) 인간다운 생활을 영위하고 있는 듯하다. 좀비들이 하는 생각은 배고프다는 생각, 하는 일은 인간 사냥이다. 그날도 여느 때와 마찬가지로 좀비 사냥을 온 인간들과 대면한다. 


치열한 싸움 끝에 R은 어느 젊은 남자를 죽이고 뇌를 먹는다. 아이러니하게도 인간의 뇌를 먹을 때면 그 인간의 기억이 고스란히 전해져와 좀비인 자신도 한때 인간이었다는 걸 잊지 않게 한다. 그러곤 남아 있는 젊은 여자에게로 향하는 R, 하필 그 여자가 방금 먹은 뇌의 주인의 여자친구 줄리(테레사 팔머 분)가 아닌가. 


그 때문인지, 아니면 잠깐 인간의 기억이 들어왔을 때 그녀에게 반한 건지 R은 줄리를 죽이는 대신 보호한다. 피냄새로 인간과 좀비를 판별하는 좀비의 특성을 이용해, 그녀에게 죽은 인간의 피를 묻힌 것이다. R과 줄리는 비행기 안에서 기거하기 시작한다. R은 인간의 감성이 완전히 없어진 것 같진 않고 말도 더듬더듬 할 줄 안다. 무엇보다 줄리를 아끼고 사랑하게 된 것 같다. 그들의 앞날이 예견되기에 과정이 궁금하다. 


영화는 거의 좀비 R의 1인칭 시점으로 진행된다. 기본적으로 죽은 인간이기 때문에 생각 같은 걸 하는 게 말이 안 되지만, 이미 그런 걸 포함한 여러 개연성은 포기한 채 시작한 영화이기에 그런 영화라는 걸 익히 잘 알고 있기에 코믹하고 사랑스럽게 다가올 뿐이다. '이게 말이 돼?'라고 묻는 건 의미없는 일이다. 


좀비의 인간 되기


좀비의 인간 되기 프로젝트라는 파격도 역시 훌륭히 소화한다. ⓒCJ엔터테인먼트



좀비 대 인간의 구도, 좀비 콘텐츠의 시작부터 절대적으로 지켜져야 할 선이다. 좀비한테 물려 좀비가 되거나, 아예 좀비조차 되지 못하고 죽거나. 결국 인간으로서 계속 살아가기 위한 투쟁인 것이다. 좀비는 어떨까. 좀비라고 좀비가 되고 싶지는 않았을 것이다. 아무래도 다시 인간이 되길 바라고 있지 않을까. 


이 영화의 판타지적 로맨스의 이면에는 좀비의 인간 되기 프로젝트가 있다. 역으로 그 프로젝트의 필수적 요소가 다름 아닌 로맨스인 것이다. 그렇게 죽어버린 심장이 다시 뛰고 점점 인간이 되어가는 좀비들이다. 휴머니즘으로 넘어가는 건 자연스러운 수순이리라. 그럴 때면 당연하게도 공공의 적이 있어야 한다. 


<웜 바디스>에도 등장한다, 공공의 적이자 궁극의 적. 그들은 인간의 형체가 아닌 뼈의 형태만을 가진, 인간은 물론 같은 좀비들한테도 무서운 존재인 '보니'들이다. 그들이야말로 인간의 적인 건 물론, 인간이 되고자 하는 좀비들의 적이다. 휴머니즘의 가장 큰 걸림돌. 그들이 없으면 휴머니즘의 의미와 목적과 연대가 옅어지지만, 그들이 없어야만 휴머니즘으로의 길을 갈 수 있다. 


인간이 되는 길은 어려운 듯하면서도 쉽고 험난한 듯하면서도 평탄하다. 제목 그대로 몸에 피가 돌고 심장이 뛰어 체온을 유지하게 되면 되는 것이다. 인간으로선 살아가는 데 '당연한' 이치, 하지만 그것이 얼마나 어렵고 신비하기까지 한 일인지는 부연하지 않아도 될 듯하다. 거기엔 육체적인 필요뿐 아니라 정신적 필요도 있어야 한다. 


가장 애틋하고 절실한 로맨스


파격의 결정체, 좀비와 인간이 사랑에 빠진다는 설정마저 '로미오와 줄리엣'이 연상될 정도로 잘 소화해낸다. ⓒCJ엔터테인먼트



영화는 명명백백 '로미오와 줄리엣'을 연상시킨다. 서로 죽고 못사는 앙숙인 몬태규 가문과 캐플릿 가문, 그리고 첫눈에 반해 버린 몬태규의 로미오와 캐플릿의 줄리엣. 당연한 집안의 엄청난 반대에 결국 비극적인 최후를 맞이하는 두 사람. 로미오의 R, 줄리엣의 줄리는 이보다 더 끔찍한 태생적 반대에 부딪힌다. 좀비와 인간. 


이보다 더 애틋하고 절실한 로맨스가 이 세상 어디에 있겠는가. 달달한 틴에이저의 로맨스, 현실에서 절대 일어날 수 없을 것 같은 몇 겹의 판타지적 로맨스 외피 안에는 사랑의 100% 가능성을 향한 강력한 주장이 있는 것이다. '이것도 사랑일까'라고 자문하고 고민하는 것도 사치인 그의 사랑, 좀비의 사랑. 


많고 많은 로맨스 영화들을 우리는 '판타지'라고 부른다. 거기엔 '저런 사랑이 현실에서 가능한가. 절대 말도 안 된다'라는 비꼼의 정서가 담겨 있다. 그때부턴 사랑의 고귀함과 위대함, 사랑의 가능성은 사라지고 오락만 남을 뿐이다. 반면 이 영화는 어떤가. 오히려 오락에서 시작해 사랑의 본질로 나아가는 것 같지 않은가. 


그런 로맨스의 외피를 쓴 판타지 영화보단 차라리 이런 판타지의 외피를 쓴 로맨스가 낫지 않은가, 나는 그렇게 생각한다. 물론 이 영화로 진정한 사랑을 논하긴 힘들 것이다. 판타지적 외연이 주는 포스가 워낙 강렬하니까 말이다. 그럼에도, 굳이 가져다 붙이는 것이 아닌 그 자체로 이 영화의 로맨스가 사랑의 본질을 조금이나마 보여주고 있다고 본다. 만듦새야 어떻든 우리가 진정 행해야 할 사랑의 모습이 거기에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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冊으로 策하다. 책으로 일을 꾸미거나 꾀하다. 책으로 세상을 바꿔 보겠습니다. singenv@naver.com Since 2013.4.16




[오래된 리뷰] 다르덴 형제의 <내일을 위한 시간>


자타공인 거장 '다르덴 형제'의 원숙하고 완성된 스타일을 보여준 <내일을 위한 시간>. ⓒ그린나래미디어㈜



1990년대에 이어 2000년대, 2010년대까지도 칸이 가장 사랑하는 감독(팀)이라 할 수 있는 다르덴 형제. <로제타> <더 차일드>로 황금종려상을, <자전거 탄 소년>으로 심사위원대상을, <아들>로 심사위원특별상과 남우주연상을, <로나의 침묵>으로 각본상을 탔다. 그야말로 자타공인 명백한 거장이다. 


영화제가 사랑하는 그들의 작품은 예술성보다 현실성에서 기인한다. 그 현실성엔 지극히 현대적인 불안이 내재되어 있는데, 그들은 그 불안에 천착한다. 그 불안이야말로 현실에서 기인한 것이다. 그렇기 때문일까, 대체로 짧고 굵은 느낌이다. 군더더기 없이, 겉치레 없이, 미사여구 없이 다큐멘터리적으로 메시지를 전한다. 


2014년작 <내일을 위한 시간>은 다르덴 형제의 명성에 걸맞는 수상 실적을 내진 못했지만, 그들의 원숙하고 완성된 스타일의 면모를 가장 잘 내보인 작품이라해도 무방하다. 지극히 현실적이어서 특별할 것 없는 설정이지만, 여지없이 그 이면에 깊숙이 깔려 있는 불안이 너무 직접적이어서 특별하게 다가온다. 거장의 솜씨다. 


짧지만 악몽 같은 투쟁 일지


영화는 주말 동안의 투쟁, 그 짧지만 충분히 악몽 같은 1박 2일을 보여준다. ⓒ그린나래미디어㈜



복직을 앞둔 금요일 오후, 산드라(마리옹 꼬띠아르 분)에게 줄리엣의 전화가 걸려온다. 청천벽력 같은 소식, 회사 동료들이 그녀의 복직 대신 보너스 1000유로를 선택하는 투표를 했다는 것. 그리고 그것이 반장에 의한 겁박에 의해 행해졌기에 사장한테 말하면 월요일에 재투표를 하게 해줄 거라는 것. 


산드라는 일자리를 되찾고 싶지만, 동료들에게 보너스 1000유로를 포기하고 자신의 복직을 선택하라고 말할 자신이 없다. 하지만 그녀의 월급 없이는 생계를 충분히 꾸려가기 힘들다. 산드라는 남편의 격려와 협박 아닌 협박에 힘입어 주저하고 힘들어 하면서도 주말 동안의 동료 설득하기 여정에 나선다. 


이미 자신의 복직을 지지해주는 몇 명의 동료들을 확보해놓았지만 16명의 과반수인 9명을 설득시키기란 너무나도 어렵다. 말그대로 '일희일비', 우울증을 앓았고 아직 그 후유증에서 벗어나지 못하고 있는 산드라에겐 지옥과 다름 아니다. 지지해주는 동료를 만나면 한없이 기쁘고 힘이 나지만, 반대하는 동료와 폭력을 휘두르려 하는 동료를 만나면 당장 때려치고 싶다. 복직한다고 해도 반대한 동료를 어떻게 대할 것인가... 운명의 월요일이 다가오고 있다. 


<내일의 위한 시간>은 주인공 산드라의 복직을 위한 주말 동안의 짧지만 악몽 같은 투쟁을 그린다. 그녀는 회사 동료들을 찾아다니며 계속 같은 말을 되풀이한다. 월요일 재투표에서 자신의 복직에 투표해 달라고. 그러면 동료들은 하나같이 묻는다. 다른 동료들은 어떤 의견을 냈느냐고. 이 단순한 설정에서 오는 긴장감이 묘하게 상당하다. 


산드라를 원하는 동료들, 원하지 않는 동료들


산드라를 지지하는 동료들과 지지하지 않는 동료들, 전부 각자의 사정이 있다. 누구도 뭐라 할 수 없는... ⓒ그린나래미디어㈜



상상을 해본다. 대입을 해본다. 내가 산드라였다면? 내가 아파서 자리를 비웠음에도 회사는 충분히 잘 돌아갔다는데, 그리고 내가 복직하는 대신 동료들이 보너스를 받는다는데, 내가 할 수 있는 게 뭔가. 그들 모두 각자의 사정이 있다. 보너스를 받아야 하는 사정 말이다. 그걸로 그 이들을 원망할 수도 없는 거 아닌가. 


내가 산드라의 회사 동료들이었다면? 솔직히 말해서 무슨 이유를 지어내든 보너스를 택했을 가능성이 아주 크다. 그녀가 돌아오든 돌아오지 않든 내가 일하는 데 있어 큰 변화가 있을 것 같지 않고, 그녀가 돌아오지 않는다면 나에게 꽤 큰 돈이 돌아오는데 말이다. 그녀가 돌아온다면 그녀가 나에게 해줄 수 있는 게 뭐지?


하지만 꼭 그렇지도 않는다는 걸 영화는 보여준다. 나처럼 생각하는 게 당연하지 않고, 모두 그렇게 생각하진 않는다. 산드라를 원하지 않는 동료들은 모두 다 다른 이유와 사정이 있지만, 산드라를 원하는 동료들은 아무 이유없이 그저 산드라의 복직을 원하고 산드라에게 미안하고 산드라를 응원할 뿐이다. 


톨스토이의 저 유명한 <안나 카레리나>의 첫 문장 "행복한 가정은 모두 엇비슷하고 불행한 가정은 제각각 다르다."가 생각나게 하는 대목인데, 주말 동안의 여정에서 산드라가 행복할 때는 그저 활짝핀 웃음만을 내보이는 반면 불행할 때는 그때마다 다른 표정과 행동과 말투가 불쑥불쑥 튀어나온다. 


현대사회의 '악', '불안', '투쟁', '연대', '희망'


현대사회의 '악'에 직면해 연대 투쟁의 희망을 이어나간다. ⓒ그린나래미디어㈜



영화는 산드라의 여정, 그 반복되는 여정에서 오는 긴장감 어린 서스펜스를 겉으로 내보이고 있지만, 이면에는 사실 이 현대사회의 뿌리내린 거대한 '악'의 결정체가 자리하고 있다. 애초에 한 사람의 인생이 달린 회사 복직과 생계에 아주 미묘하게 결정적인 보너스를 동일선상에 놓고 양자택일을 하게 만드는 것 자체가 악랄하기 그지없는 짓이 아닌가. 그에 비하면 반장이 협박을 일삼으며 자신을 포함한 사원들이 보너스를 타게끔 하려는 수작은 애교에 가깝다. 


거기에 산드라를 비롯한 회사 동료들은 모두 현대사회에 만연해 있는 '불안'의 일면들이다. 기본적으로 월급 없이는 생계조차 꾸려갈 수 없는 건 물론이거니와, 1000유로 정도의 보너스로 동료 한 명의 생계를 알면서도 짓뭉개버리는 결과를 찬성한다. 심지어 그 돈이 원래 받지 않았어야 할 돈임에도 말이다. 돈에 대한 막연한 불안은 이 사회에서 절대적인 것이다. 


한편, 산드라는 '열심히' 싸웠다. 지지하는 동료들과 함께 반대하는 동료들에 맞서 싸운 게 아니라, 심지어 반장과 사장을 상대로 싸운 게 아니라, 이 악몽같은 상황 그리고 우울증에 시름하는 자신에 맞서 싸웠다는 것이겠다. 그녀는 이겼을까, 졌을까. 이기는 게, 지는 게 의미가 있는 것일까. 무엇보다, 그녀는 왜 싸운 것일까. 그 회사가 아니면 안 되는 이유는 없어 보였는데 말이다. 


그녀의 짧은 여정이 긴 여운을 남기고 번뜩이는 깨달음을 안기는 이유가 여기에 있다. 그녀는 바로 다른 회사를 알아볼 수도 있었을 텐데... 다름 아닌 그녀를 지지해준 이들이 있었기에 그녀는 이를 악물고 끝까지 힘을 낼 수 있었던 것이다. 그리고 그들을 위해 그녀는 싸웠던 것이다. 그들 덕분에 그녀는 불행하지 않고 행복하다. 이것이 '연대'의 힘이 아닌가. 영화는 이 지독한 현대사회에 맞설 수 있는 희망의 불씨를 연대에서 찾았다. 우리도 찾아보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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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래된 리뷰] 이준익 감독의 <동주>


최근 몇 년간 인상적인 행보를 보이는 이준익 감독의 특별한 영화 <동주>. 믿기 힘들지만 최초로 윤동주를 주연으로 하였다. ⓒ메가박스 플러스엠



이준익 감독은 일찍이 영화 일을 시작해 90년대 초반 드디어 연출 데뷔를 하지만 성공하지 못한다. 그러고 2000년대 초반 <황산벌>로 화려하게 돌아오기까지 10년 동안 제작자로 이름을 높였다. <간첩 리철진> <아나키스트> <달마야 놀자>가 전부 그가 제작한 영화들이다. 그러곤 <왕의 남자> <라디오 스타>로 흥행과 비평 양면에서 한국 최고 감독 대열에 합류한다. 


하지만 곧바로 찾아온 기막힌 슬럼프, 4년 동안 4편의 영화를 내놓지만 흥행과 비평 양면에서 목적을 달성하지 못했던 것이다. 그는 2010년 은퇴 선언을 하고 철회하는 '은퇴 소동'을 일으키기도 한다. 절치부심, 2013년부터 내놓은 역시 4년 동안 두 글자 제목 4편의 작품들이 모두 흥행과 비평 양면에서 목적을 훨씬 상회함으로써 예전의 명성을 뛰어넘는 시대를 맞이한다. 


2016년 개봉한 <동주>는 겉보기에 특별할 것 없이 굉장히 특별한 영화다. 자타가 공인하는 상업영화'감독인 이준익이 가장 비상업적으로 만든 게 분명하지만, 제작비 대비 가장 큰 폭의 성공을 거둔 영화이다. 윤동주는 한국인이 가장 사랑하는 시인임에 분명하지만, 이 영화야말로 최초로 윤동주를 주연으로 한 영화이다. 그리고 2017년, 올해는 윤동주 시인 탄생 100주년이다. 


윤동주와 송몽규의 10년


영화는 윤동주와 송몽규의 후반 일생을 따라간다. 그들은 불과 28살의 꽃다운 나이에 죽음을 맞이했다. ⓒ메가박스 플러스엠



윤동주(강하늘 분)는 북간도 용정에서 태어나 스무 살이 넘을 때까지 북간도 땅을 떠나지 않았다. 그와 한 지붕 아래에서 함께 사는 동갑내기 고종사촌 송몽규(박정민 분)는 동주와 다른듯 한 길을 함께 걷는다. 스무 살이 채 되기도 전에 군관학교에 입교하기 위해 중국으로 떠난 그는 독립운동으로 체포 압송되어 결국 석방되었고, 동주와 함께 경성에 있는 연희전문학교에 입교한다. 


몽규의 주도 아래 잡지를 만들어 문학으로 그들이 할 수 있는 최대한의 독립운동을 이어나간다. 시로는 세상을 바꿀 수 없다고 믿은 몽규는 문학에 의한 혁명에서 행동에 의한 혁명에로 나아갔고, 끝없이 회의하고 고뇌하고 괴로워하고 부끄러워했던 동주는 그 모든 걸 시 속에 녹여냈다. 


동주와 몽규는 일본으로 향한다. 전시총동원체제 하의 일제에 의한 엄청난 압박 속에서는 차라리 일본 본토가 낫다는 판단이었다. 동주는 평생을 염원한 시집 출판을 눈앞에 두게 되었다. 반면 몽규는 일본 본토에서 대대적인 혁명을 준비하는데... 동주와 몽규는 이 살벌한 시대의 광풍에서 어떤 삶을 살아가고 어떤 죽음을 맞이하는가. 


영화는 윤동주와 송몽규의 10년을 오롯이 따라간다. 그들의 삶을 100% 그대로 가져오지는 않았기에 '팩션'이라고 할 수 있겠지만, 윤동주의 절절하면서 아름다운 시와 엮이는 상황들이 진짜보다 더 진짜 같이 다가온다. 흑백의 힘이고, 윤동주를 분한 강하늘의 힘이며, 무엇보다 이준익의 힘이겠다. 


완성된 우주가 있는 소품


<동주>는 명백한 '소품'이다. 하지만 그 안에는 명백한 '우주'가 존재한다. ⓒ메가박스 플러스엠



이준익 감독은 대작보다 소품을 만드는 재주가 탁월하다. 대작의 기상을 웅비하고 있지만 소품밖에 못 만드는 게 아니라, 애초에 탁월하기 그지 없는 웰메이드 소품을 만들고자 한다. 그래서 그에게는 소품만을 만드는 이의 한계점이 보이지 않는다. 그 작은 것 안에 하나의 우주가 존재하고 있기 때문이다. 


<동주>는 소품 중에서도 소품이라고 할 수 있는 영화이지만, 그곳엔 온전히 완성된 하나의 우주가 있고 인간이 있고 사상이 있다. 영화는 그저 동주와 몽규가 암흑의 시대를 치열하게 살아간 걸 그야말로 간략하게 추려 보여주려 한 것이겠지만, 우리는 그 이상의 것들을 보고 듣고 느낄 수 있는 것이다. 


누가 봐도 알 만하고 피부로 느낄 정도의 일제강점기 어둠을 광범위하게 주인공으로 내세운 게 아닌, 그 시대를 피부로 느끼며 살아간 이들만을 통해 알게 되는 어둠 그리고 무엇보다 '사람'이 우리를 일깨운다. 그 시절은 역사상 가장 어두운 시절이지만, 그래서 지금 우리가 사는 시절과 비교조차 할 수 없을지 모르지만, 그들이 살아가고 생각하고 행동하는 건 우리와 크게 다를 바 없지 않은가. 


일제강점기를 살다간 모든 이들


윤동주와 송몽규를 비롯, 일제강점기를 살다간 모든 이에게 바치는 영화다. ⓒ메가박스 플러스엠



너무나도 유명해서 오히려 잘 알지 못하고 잘 알고자 하지도 않는 윤동주 시인의 삶, 그리고 내면. 또한 살아생전 동주가 한 번도 넘지 못한 산, 송몽규라는 사람. 동주가 한 번도 이룩하지 못한 신춘문예 당선을 몽규는 18세 때 해냈고, 19세 때는 당차게 혼자 중국으로 향했으며, 함께 진학한 연희전문학교를 최우등생으로 졸업한 것도 몽규였다. 또한 함께 일본으로 가 몽규 혼자만 최고의 교토제국대학에 입학한다. 


그야말로 윤동주는 송몽규와 함께라면 언제나 조연을 면치 못했던 것이다. 그럼에도 윤동주는 한국문학사 아니 한국 역사에서도 영원히 남을 위인이 되었다. 우리가 <동주>를 보며 느끼는 공감과 아이러니가 여기서 비롯되거니와, 위인을 대함에 있어 어울리지 않는 친숙함의 이유 또한 여기에 있겠다. 


한편, 송몽규라는 인물의 새로운 발견 또는 재조명이라는 점에서 엄청난 공헌을 했다. 그 유명한 문익환 목사가 이들의 어린 시절 친구였다는 사실은 익히 알려진 바, 역시 그 유명한 정지용 시인이 윤동주 시인이 그토록 존경했던 대상이었단 사실도 역시 익히 알려진 바, 윤동주와 평생을 함께 한 송몽규란 존재가 그다지 알려지지 않았다는 사실이 새삼 신기하고 민망하다 싶다. 


새삼 다시 한 번 보게 된다. 일제강점기를 살다간 이들의 면면을. 그리고 불러본다. 친일반민족행위자들의 이름을. 그리고 새겨본다. 독립운동가들의 이름을. 그리고 그려본다. 그 시대를 살아간 모든 이들을. 그들은 모두 어떤 식으로든 들여다보아야 하고 재조명되어야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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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래된 리뷰] 스티븐 소더버그 감독의 <에린 브로코비치>


스티븐 소더버그 감독의 가장 '좋은' 작품 <에린 브로코비치>. ⓒ소니픽쳐스코리아



1989년 <섹스, 거짓말 그리고 비디오테이프>로 칸영화제 황금종려상을 수상하며 역대급의 화려한 데뷔를 한 스티븐 소더버그 감독, 그때 그의 나이 불과 26살이었다. 그야말로 천재 감독의 탄생, 이후 인디와 메이저를 오가며 작품성과 흥행력을 두루 갖춘 감독으로 성장한다. 


그의 전성기는 1990년대 후반에서 2000년대 초반, <표적> <에린 브로코비치> <트래픽> <오션스 일레븐>을 잇달아 내놓는다. 모두 작품성과 흥행력을 갖춘 작품들로, 특히 2000년 오스카에서는 <에린 브로코비치>와 <트래픽>으로 동시 감독상 후보에 오르는 유일무이한 기록을 남기기도 했다. 결국 <트래픽>으로 접수했다. 


단언컨대 이후 지금까지 그가 내놓은 작품들 중에 그의 경력 초중반, 즉 2000년대 초반까지의 작품보다 나은 건 없다. 그래서 스티븐 소더버그를 말하려면 옛날로 돌아갈 수밖에 없다. <에린 브로코비치>는 그중 가장 좋은 작품이라 생각한다. 실화를 바탕으로, 지극한 일반인 에린 브로코비치의 영웅적인 활약상을 그린다. 


다윗과 골리앗


신화 '다윗과 골리앗'의 완벽한 현실재연이다. ⓒ소니픽쳐스코리아



에린 브로코비치(줄리아 로버츠 분)는 세 아이의 엄마이자 두 번 이혼한 돌아온 싱글이자 고졸에 뚜렷한 이력이나 경력도 없거니와 16달러 짜리 잔고만 지니고 있는 여자다. 당장 일자리를 구해야 하는데 당연히 어렵다. 결국 그녀는 이전에 한바탕 난리를 친 볍률회사에 어거지로 취직한다. 


안하무인 성격에 살인적인 몸매를 훤히 드러내는 파격적 옷차림으로 온 사람들의 시선을 받는 그녀, 특히 사장 에드 마스리(앨버트 피니 분) 변호사와 많이 부딪힌다. 어느날 서류를 검토하던 중 PG&E사와 관련된 이상한 의학기록을 보게 되고, 거기서 석연치 않음을 느끼고는 곧바로 진상을 파헤치기 시작한다. 


그녀가 알아낸 진상의 첫 번째이자 모든 것에는 '크롬'이라는 독극물이 있었다. 발전소에 쓰는 엔진의 과열을 막기 위해 엔진에 물을 넣는데 녹 방지용으로 크롬도 넣는 것이다. 그녀는 마을 사람들을 찾아다니고 수도국에서 증빙서류를 찾고 에드에게 압력도 넣으면서 본격적으로 PG&E사와의 일대결전을 준비한다. 하지만 그런 초거대기업과의 결전이 마음처럼 쉽게 성사되겠는가? 


영화는 힘없는 한 개인이 초거대 조직에게 맞서 영웅적인 활약을 펼치는 신화적인 이야기 그 자체다. '다윗과 골리앗'이 생각나는 건 지극히 자연스러운 일이다. 거기에 그녀는 일반적으로 생각하는 일반인보다 훨씬 마이너스 인생을 살고 있었던 만큼 더욱더 드라마틱하고 감동적인 면모를 갖추고 있다. 전설도 이런 전설이 없고 신화도 이런 신화가 없다. 


믿기지 않는 실화, 출중한 드라마


믿기지 않는 이 실화는 그 자체로 완벽한 드라마다. ⓒ소니픽쳐스코리아



에린의 영웅적인 행보는 가차없다. 수많은 사람들이 그녀를 믿게 만들었으며 그녀는 그 믿음에 충실히 보답한다. 그렇게 관계된 거의 모든 사람들에게 행복을 선물한다. 하지만 기본적으로 그녀의 행동은 반영웅적이다. 아슬아슬하다. 양면성을 겸비한 채 경계에서 아슬아슬 줄타기 하는 신화 속 트릭스터(Trickster)의 현신이다. 


실화라는 게 믿기지 않을 이 여인의 활약상은 그 자체로 출중한 드라마다. 신화에서 트릭스터의 존재가 드라마를 이끌어 가는 데에선 절대적이듯이, 그녀는 이 영화에서 절대적인 위치를 차지한다. 실제로 모든 걸 다 갖춘 줄리아 로버츠가 분한 에린은 그 영화 내외적인 모순 사이에서 형형하게 빛난다. 거장이라 할 만한 앨버트 피니는 소시민 변화사 에드로 영웅적인 모습의 그녀 옆에서 인간적인 면모를 유감없이 발휘한다. 


여기에 영화 각본으로 새롭게 지어냈다고 해도 이상한 게 없을 그녀의 속사정, 두 번 이혼하고 어린 아이 세 명을 돌보지만 아무것도 가진 게 없는 생활. 그래서 그녀의 영웅적인 행보가 주는 빛은 더할 나위 없다. 하지만 빛이 있으면 어둠이 있는 법. 그녀의 영웅적인 행보는 '일'에 국한된 것이지 '가정'에까지 연결되는 건 아니다. 


홀로 아이를 키우며 일까지 하는 이혼녀이자 워킹맘가 곳곳에서 보인다. 영화로는 20여 년 전, 실화로는 25여 년 전의 그녀의 이야기가 특별하면서도 보편적으로 다가오는 부분이거니와 영화로서는 드라마틱한 요소가 굉장히 많고 깊은 부분이기도 하다. 그건 또한 영화의 주를 차지하는 PG&E사와의 싸움에만 초점을 맞춰 다큐멘터리로 빠지지 않게 하는 고도의 노림수이기도 하겠다. 


에린의 활약, 교육적인 영화


영웅 에린 브로코비치의 활약은 교육적인 면모로 이어진다. ⓒ소니픽쳐스코리아



익히 알려진 사실이지만, 당연히(?) 에린 브로코비치는 PG&E사와의 싸움에서 대대적인 승리를 거둔다. 알려진 바에 따르면 PG&E사는 미국 역사상 유래가 없을 만큼의 보상을 해주었다고 한다. 수많은 어려움을 극복하고 결국 관련된 거의 모두에게 행복을 선물한 에린의 활약에 시선이 많이 가지만, 거대 기업의 도덕성을 다시 생각해보는 계기가 되기도 한다. 영화 자체로 상당히 교육적인 것이다. 


현재, 거대 기업들의 기업가치는 이전과 비교할 수 없을 정도가 되었다. 모든 사람들의 생활 곳곳에 스며들어 모든 걸 지배하고 있는 것이다. 하지만 이전 시대, 거대 기업들이 긍극적인 파워가 지금보다 훨씬 거대했을 때가 있었다. 그들이 무슨 짓을 하든 일반 사람은 알 도리가 없었다. 반면, 지금은 적어도 모두가 알고 있진 않은가. 


이 영화는 그때 그 시절의 이야기이다. PG&E사는 참으로 오랫동안 소위 '나쁜 짓'을 저질러 왔던 것이다. 당연히 아무도 몰랐고, 설령 알았다손 치더라도 소수의 힘으론 그 어떤 대응도 할 수 없었다. 그래서 에린이 가장 열을 올린 게 확실한 내부 증빙 자료를 구하는 것과 더불어 피해자를 최대한 많이 모으는 것이었다. 


다수의 목소리가 한마음 한뜻이 되어 자신의 합당한 권리를 외칠 때 그 권리를 되찾을 수 있는 가능성은 전과 비교할 수 없다. 이게 혁명이 아니고 무엇이 혁명이겠는가? 혁명은 누구에게나 언제 어느 순간에고 가능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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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래된 리뷰] <서극의 칼>


서극표 무협의 정점이자, 서극표 무협의 마지막 <서극의 칼>. ⓒ워너브러더스 디지털배급



소싯적 무협이나 판타지 장르에 빠져 보지 않은 사람이 있을까. 현실에선 있을 수 없는 일들이 벌어지고, 할 수 없는 일들과 하고 싶은 일들을 할 수 있는 세계를 그리는 무협과 판타지. 무협은 동양 그중에서도 중국을, 판타지는 서양을 상징한다고 할 수 있겠는데, 무협은 소규모적이거니와 지극히 개인적인 관점이 주를 이루는데 반해 판타지는 대규모적이거니와 지극히 조직적인 게 특징이다. 


그렇다면 우리는 판타지보단 무협을 더 좋아할까. 결론부터 말하자면, '아니다'. 우리뿐만 아니라 전 세계가 다분히 판타지적인 장르에 푹 빠져 있다. 비록 수십 년 전부터 이미 미국을 점령해온 코믹스를 영화로 옮겨왔을 뿐이라고 해도 말이다. 여기, 2~30년 전 무협 장르의 새로운 흐름을 만들어낸 이가 있다. 그 이름도 유명한 '서극'이다. 


그는 <촉산>과 <황비홍> 시리즈로 8~90년대를 풍미한 감독으로 잘 알려져 있지만, <영웅본색> 시리즈를 비롯 <소오강호>와 <천녀유혼> <동방불패> 시리즈를 제작한 이로도 유명하다. 우리가 알고 있는 유명한 무협 영화가 모두 그의 손에서 태어났으니, 그야말로 8~90년대 홍콩 무협의 대부인 것이다. 95년작 <서극의 칼>은 서극표 무협의 정점이자, 사실상 서극표 무협의 마지막이다. 


전형적인 스토리와 캐릭터를 묻어버릴 액션


참 많이도 봐왔던 줄거리와 전개를 무참히 묻어버릴 정도의 액션을 선보인다. ⓒ워너브러더스 디지털배급



명검 제조소로 유명한 연봉호, 사부의 딸 소령은 고아 출신의 정안과 4년차 철두에게 두루 애정을 과시하며 저울질하는 중이다. 정안과 철두는 함께 일을 보러 나갔다가 좋은 일을 한 스님이 마적단에게 처참하게 살해당하는 걸 목격하고는 사이가 틀어진다. 와중에 사부는 정안을 후계자로 지목하고 철두 일행은 몰래 스님의 복수를 하려 한다.


한편, 정안은 소령과 소령의 유모가 하는 말을 우연히 듣고 사부의 만류에도 불구하고 죽음으로 향하는 복수의 길을 나선다. 정안은 아버지가 온몸에 문신을 한 비룡이라는 자객에서 처참하게 살해당하고 자신은 사부가 간신히 탈출시켜 키웠다는 사실을 알게 된 것이다. 하지만, 그를 따라나선 소령이 하필 마적단에게 잡히고 정안은 소령을 구하려다가 오른팔이 잘리는 부상을 당하고 만다. 


흑두라는 아이 덕분에 구사일생으로 살아난 정안, 정안을 가만히 놔두지 않는 마적단, 죽을 고비를 넘기고 우연히 발견한 무급 비서, 고수가 된 정안은 마적단을 물리치고 또다시 위험에 처한 소령도 구한다. 급기야 마적단은 비룡에게 외팔의 고수를 처단해줄 것을 의뢰한다. 드디어 복수의 길 그 끝에 다다른 정안, 과연 복수는 가능할까?


영화는 지금 보면 전형적이다 못해 시시하기까지 한 스토리와 예측에서 한 치도 빗나감 없는 정직한 전개와 캐릭터를 선보인다. 반면, 그 모든 걸 즉, 그 모든 단점을 일거에 잊어버리게 할 만한 액션을 선보인다. '리얼 액션'이라고 많이들 홍보하는데, 이 영화야말로 진정한 리얼 액션이 아닌가 싶다. 


<서극의 칼>의 액션, 날 것의 액션


이 영화가 자랑하는 액션은 다름 아닌 '날 것'의 액션, 현존 영화들이 따라하기 힘들다. ⓒ워너브러더스 디지털배급



액션 기술은 나날이 진보해 이젠 왠만한 리얼 액션으로는 성에 차지 않는다. 대역 없이 위험천만한 액션을 맨몸으로 구사하는 맨몸액션은 일찍이 성룡이 정점을 찍었고, 타격감이 훌륭한 와중에 서로간의 완벽한 합으로 감탄을 자아내는 기술액션 또한 일찍이 <본 시리즈>가 정점을 찍었다. 그렇다면 이 <서극의 칼>의 액션은 무엇인가. 


굳이 이름을 붙이자면, '날것의 액션'이라고 해야 할까. 무협 액션이 가지는, 가질 수밖에 없는 '판타지'적인 모습을 이 영화에선 찾아볼 수가 없다. 거기엔 장풍가 오가고, 허공을 걷고, 소리보다 빠른 칼의 움직임이 있을 텐데, 이 영화엔 오로지 칼과 칼의 부딪힘만이 있을 뿐이다. 


이 '날것'에는 비단 칼과 칼의 부딪힘만이 있는 것만은 아니다. 죽었다 살아나 외팔이 된 정안이, 아버지가 남긴 반쪽짜리 칼에, 타다만 반쪽짜리 비서로, 더 이상 복수의 의미가 아닌 살아남기 위한 싸움들을 헤쳐나가기 때문이다. 거기엔 날것의 액션 이전에 날것의 삶이 있다. 


그런 의미에서, 삶의 나락으로 추락했다가 우연히 얻은 비서로 절정고수가 되어 나타난 영웅 정안의 뜻밖의 전혀 영웅 같지 않은 모습은, 서극 감독의 의도가 다분히 깔려 있는 모습이라 할 수 있겠다. 처음부터 끝까지, 이 영화엔 삶을 오롯이 감당하는 있는 그대로의 육체와 그에 걸맞는 둔탁한 폭력과 판타지와 이상과는 거리가 먼 현실이 있는 것이다. 


<와호장룡>와 극점을 이루는 '아름다운' 무협


가장 아름다운 무협 영화라 할 수 있는 <와호장룡>, 그와 정반대의 극점에서 또다른 아름다움을 뽐내는 <서극의 칼>. ⓒ워너브러더스 디지털배급



개인적으로, 역대 최고의 무협 영화는 단연 이안 감독의 <와호장룡>이라 생각한다. 무협이 이리도 섬세하고 아름답고 감동적일 수 있는가. 어찌 그 어떤 영화보다 진한 여운을 남길 수 있는가. <와호장룡>은 완벽한 와이어 액션과 기술 액션을 자랑한다. 거기에 감각적이라느니 비주얼적이라느니 하는 말이 끼어들 여지가 없다. 


<서극의 칼>은 이와 정반대의 극점에서 또 하나의 '아름다운' 무협을 탄생시켰다. 거기에 온갖 수식어를 붙여도 여한이 남는다. 스타일리시하고 비주얼리시하고 화려하면서도 날것이고 거칠면서 역동적이고 현실적이면서도 현란하게 정신 없다. 한마디로 정해진 합이나 정교한 양식 없이 최대한 있는 그대로를 담아낸 것이다. 


오래전부터 소문이 자자했던 이 영화의 액션이 재조명되고 있는 것 같다. <와호장룡>이 그 자체로 완벽을 자랑하며 더 이상의 후계자 없이 고고히 하늘 위에 존재하는 느낌이라면, <서극의 칼>은 그 자신 또한 개척의 주자였던 만큼 많은 여지를 남기면서 수많은 후계자와 추종자를 만든 느낌이다. 


진보를 거듭하고 있는 액션의 끝에 무엇이 있을지 궁금하다. 모르긴 몰라도 이 영화가 보여준 액션의 한 단면이 그 끝에 있을 게 분명하다. 결국 영화가 추구하는 건, 진짜 영화다운 것과 진짜 현실같은 것 아니겠는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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冊으로 策하다. 책으로 일을 꾸미거나 꾀하다. 책으로 세상을 바꿔 보겠습니다. singenv@naver.com Since 2013.4.16




[오래된 리뷰] 드니 빌뇌브 감독의 <시카리오: 암살자의 도시>


'전성기' 드니 빌뇌브 감독의 거장으로 가는 길 <시카리오: 암살자의 도시>. ⓒ롯데엔터테인먼트



드니 빌뇌브 감독의 스타일은 명확하다. 기본적으로 정적이고 건조하며 느릿느릿하다. 김훈 소설가의 작품들, 그리고 그의 문체와 비슷하지 않을까 싶다. 멀리서 조망하다가도 급격히 치고 들어가 깊숙히 찌른다. 정적이면서 느릿한 전개는 어느 순간 숨도 못쉬게 내달리는 전개로 바뀌기도 한다. 그리고 건조함은 피비릿내에 자리를 내준다.


거의 매년 장편을 내놓고 있는 드니 빌뇌브 감독의 전성기는 지금이 아닌가 생각해본다. 그는 이미 더 없이 좋은 작품들을 내놨고 흥행감독이 아님에도 많은 사람들의 머릿속에 각인되어 있다. 그리 많지 않은 그의 작품들을 하나하나 음미하며 영화의 참맛을 알아가는 건 축복이 아닐까. 


그의 2015년작 <시카리오: 암살자의 도시>는 그의 연출작들 중에서도 특히 빼어나다. 드니 빌뇌브의 스타일을 모두 구현해내면서도 완벽하리만치 표현해냈다. 적어도 해당 장르에서는 역대 최고급 퀄리티를 자랑하고, 영하를 본 사람이라면 찬사를 던지지 않을 수 없으며, 영화의 모든 구성요소들을 빈틈없이 배치했기에 교과서라 불러도 하등 이상하지 않을 수준이다. 


치밀하게 그려낸 치열한 심리전쟁


세 주인공이 각각의 목적과 목표를 시카리오에 모였다. ⓒ롯데엔터테인먼트



애리조나에서 있었던 아동납치살인사건 수사에서 소기의 성과를 올린 FBI 요원 케이트(에밀리 블런트 분), 법무부의 요청에 따라 멕시코 카르텔 소탕작전의 일원으로 차출된다. 그녀가 성과를 올린 사건의 실상이 카르텔에 의한 거대 범죄였던 것. 그녀가 속한 팀을 이끄는 이는 CIA 소속의 맷(조슈 브롤린 분), 그리고 그들과 함께 하는 또 하나의 인물인 멕시코 검사 출신이라는 알레한드로(베니치오 델 토로 분). 


그들이 향하는 곳은 멕시코 후아레즈로, 일명 암살자의 도시로 불린다. 그들이 과연 어떻게 최악의 카르텔 조직을 일망타진할 수 있을진 모르지만, 맷과 알레한드로는 잘 알고 있는 반면 케이트는 아무것도 모르는 눈치다. 특히 가장 중요한 건 아무래도 이 도시 자체인 것 같다. 민간인들 눈앞에서 카르텔이라 의심되는 이들을 무차별로 죽여버리는... 그 모습을 당연하게 생각하는 모두들...


케이트에게는 이 모든 게 너무나도 충격적으로 다가온다. 충격은 곧 분노로 바뀌고, 분노는 곧 스스로의 무력감과 순진함에 대한 체념으로 바뀐다. 그들 앞에는, 그녀 앞에는 어떤 일이 기다리고 있을까. 그 어떤 예측도 쉬이 할 수 없다. 


영화는 범죄 스릴러를 기본으로, 세 주인공 간의 치열한 심리 전쟁을 치밀하게 그려내고 있다. 범죄 장르에 어울리는 액션과 더불어 피와 살이 난무하는 모습도 물론 볼 수 있지만, 영화가 스릴러 장르에 더 가깝다고 말하는 듯한 제스처가 영화 곳곳에서 보인다. 그래서 우린 세 주인공의 일거수 일투족을 눈여겨 볼 필요가 있다. 


오직 '이익'만이 있을 뿐인 그곳


거기엔 선악 따위, 이상과 현실 따위의 구분은 없다. 오로지 이익 추구만 있을 뿐이다. ⓒ롯데엔터테인먼트



영화는 의도적으로 줌아웃과 줌인을 교차하는 듯하다. 암살자의 도시 후아레즈를 비롯 선과 법과 윤리를 찾아볼 수 없는 곳을 멀리서 조망하며, 개인과 조직을 위해 그곳의 생리를 이용하는 이들의 행동거지와 모양새롤 밀착해 보여주려 한다. 단순히 촬영 기술적인 줌아웃과 줌인이 아닌, 영화 전체에 스며든 이야기며 분위기를 뜻한다. 


케이트는 두말할 필요 없이 이상주의자이다. 오로지 현실만이 있는 이곳에서 법을 지키며 작전을 수행하려는 그녀는 이상적일 수밖에 없다. 반면 선악 개념은 모호하다. 악의 행동이 분명한 카르텔을 섬멸하고자 그들이 벌이는 짓들은 선보다 악에 가깝다. 최소한 의도는 선하되 행동은 악하다고 할 수 있다. 


고민이 깊어진다. 그들의 행동을 어떻게 바라보아야 하는지, 그들의 행동에 어떤 잣대를 들이대야 하는지. 특히 평범한 가정을 둔 어느 멕시코 경찰의 끝을 목격한다면 반드시 혼란에 빠질 것이다. 선한 의도와 악한 행동이 만나 빚은 결말이 선하게 끝나는지 악하게 끝나는지, 아니 애초에 선과 악을 구분하는 게 의미가 있기나 한 건지. 


거기엔 오로지 이익만 있을 뿐이다. 법 따위는 당연히 없고, 선과 악의 개념 따위도 없으며, 옳고 그름의 기준 따위는 애초에 존재하지 않았다. '출중한 능력의 소유자' 케이트는 철저히 이용만 당한 채 그곳을 떠나야 할 운명이었고, 차라리 그곳에서 그들이 무엇을 하는지 모르는 게 나았으며, 그곳은 여전히 그곳이었다. 그들은 언제고 그곳을 그들의 이익을 위해 이용할 것이었다. 과연 '암살자'는 누구인가. 


모든 면에서 교과서 같은 영화


영화는 각본, 연출, 촬영, 음악, 사건, 인물 등 모든 면에서 교과서적인 풍모를 풍긴다. ⓒ롯데엔터테인먼트



앞서 말했듯이 <시카리오: 암살자의 도시>는 모든 면에서 교과서 같다. 현존 최고의 각본가이자 연출에도 일가견을 보인 테일러 셰리던의 정석적인 각본, 오로지 영화에만 몰입하게 만드는 치밀하면서도 독창적인 연출, 개개인이 따로 빛나면서도 영화에 자연스럽게 스며드는 캐릭터들, '이게 바로 영화음악이다'라고 할 만한 음악까지. 무엇보다 영화의 전체적인 분위기를 이끌 이 도시가 압권이다. 


숨막히고 손에 땀을 쥐게 하는 건, 영화 속 사건들 때문이지 드니 빌뇌브의 숨막히기만 하는 연출 때문은 아니다. 그는 줌아웃과 줌인을 자유자재로 교차하듯 전체적인 흐름과 분위기를 자유자재로 다룰 줄 안다. 평화 속에 전쟁이 있고, 정적 속에 동적이 있으며, 무표정 속에 수많은 곡절들이 숨겨져 있다. 


드니 뵐뇌브와 테일러 셰리던의 연출과 각본의 앞날을 기대한다. 그들의 뛰어나고 빼어난 영화적 능력만이 아닌, 독창적 시선 속에 내포된 다채로운 비판의식과 소외를 향한 따뜻함 말이다. 소외를 바라보고 생각하는 것 또한 다채로우니 기대의 수치는 더 높을 수밖에. 


마지막 장면, 그 무법지대에 여전히 남겨진 사람들을 비추는 영화의 시선이 씁쓸하다. 결국 그들이 이용한 그곳의 정체는, 그곳에 사는 사람들인 것이다. 모든 종류의 전쟁, 그 진정한 피해자는 민간인들이 아닌가. 우리가 이 영화를 보며 그냥 지나쳐서는 안 되는 부분이 바로 그 부분이다. 영화 또한 그 부분을 결코 그냥 지나치지 않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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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래된 리뷰] 박찬욱 감독의 <공동경비구역 JSA>


박찬욱 감독의 본격적 상업영화 진출작 <공동경비구역 JSA>, 21세기 시작을 알리는 한국영화의 명작이다. ⓒCJ엔터테인먼트



지난 2000년 6월 15일 김대중 전 대통령과 김정일 전 국방위원장이 굳게 악수를 나누며 남북은 극적인 화해 모드로 돌입한다. 이른바 역사적인 '6·15 남북공동선언'. 때마침 나왔던 박찬욱 감독의 3번째 장편 <공동경비구역 JSA>는 시대를 대변하는 영화로 명성을 떨쳤다. 박찬욱 감독은 비로소 상업영화계에 진출할 수 있게 되었다. 


1998년 김대중 대통령의 임기가 시작되면서 일본대중문화가 개방되고 남북간 화해모드가 조성된다. 특히 후자의 영향으로 1999년 <쉬리> <간첩 리철진> 등의 상업영화가 만들어져 대대적인 인기를 끈다. <쉬리>의 경우 한국영화 흥행 기준을 바꾼 영화이다. 이 여세를 몰아 이듬해 나온 <공동경비구역 JSA>는 명작+상업+시대적 관심의 삼박자를 두루 갖춘 최초의 한국영화라고 해도 무방했다. 


이후 적어도 상업영화에서 보여주는 박찬욱 스타일의 시작이라고 해도 될 것이다. 2년 뒤에 나온 <복수는 나의 것>으로의 외도(?)를 가능하게 해준 작품이기도 하다. 개인적으로 박찬욱 감독의 작품들 중에 가장 재밌지만 은근 어려워서 가장 많이 보기도 했다. 20년 가까이 지났지만 여전히 쉽게 생각하기도 말하기도 힘든 국면이다. 


그때 그곳에선 무슨 일이 있었는가


북한과 남한의 엇갈리는 진술, 과연 진실은? 그때 그곳에서 무슨 일이 있었던 것인지? ⓒCJ엔터테인먼트



판문점 공동경비구역, 북한군 초소에서 총성이 울린다. 살인사건이다. 중립국감독위원회는 한국계 스위스인 소피(이영애 분)를 책임수사관으로 파견한다. 소피는 한국군 당사자 이수혁 병장(이병헌 분)과 북한군 당사자 오경필 중사(송강호 분)를 만나 당시 사건의 정황을 묻는다. 하지만 그들의 진술은 다르다. 


북한은 남한 측의 북한군 초소 기습공격으로, 남한은 북한 측에 의한 남한군 납치라고 주장하는 것이다. 어쨌든 북한군 초소에서 살인 사건이 일어난 건 사실, 사건 후 그곳에는 북한 초소병 정우진 전사(신하균 분)가 총알 8방을 맞고 죽어 있었고, 그 옆에 북한 상위가 죽어 있었다. 한편, 오경필은 오른쪽 팔에, 이수혁은 오른쪽 다리에 총상을 입은 상태였다. 


하지만 소피가 보기에 뭔가 의심쩍은 상황, 소피는 사건 당시 북한군 초소에 제5의 인물이 있을 거라 확신하고 이수혁의 후임 남성식 일병(김태우 분)을 추궁한다. 그 와중에 남성식이 투신하고, 사건은 점점 진실에 다가간다. 그때 그곳에선 어떤 일이 있었던 것일까. 영화는 사실 이제 비로소 시작이다. 


영화가 초반을 넘기면서 보여주는 진실은, 당시 당사자들이 한없이 재미있어 하고 즐거워 하는 것에 비해 지나서 생각하면 너무나도 씁쓸하다. 분단된 현실의 한계를 여실히 보여주는 결과물이 아니겠는가. 역사와 시대의 무게를 한낱 개인이 견뎌낼 재간이 있겠는가. 안타깝고 안타깝고 안타깝다. 


선과 경계, 그리고 금기 깨기


북한과 남한, 절대적인 선과 경계가 존재한다. 영화는 그것들을 넘어 금기 깨기를 서슴치 않는다. ⓒCJ엔터테인먼트



영화는 선과 경계를 넘어 금기 깨기에 주저함이 없다. 이수혁이 일행과 떨어져 북한 땅에서 지뢰를 밟았을 때 나타난 오경필과 정우진, 오경필이 이수혁의 목숨을 구해주는 장면에서 이미 금기는 깨진 것이다. 이후 계속되는 그들의 우정은 오히려 20년 가까이 지난 지금에 와서는 상상하기 힘든 모습이다. 


남과 북은 오랜 세월 서로 총부리를 겨누고 있다. 그래서 우리에게 있어 '안보'라고 하면 거의 100% 대북 정책의 기조 아래 있는 것이다. 여기엔 절대 넘어갈 수도 넘어올 수도 없는 명확한 선과 경계만 있을 뿐, '중립'이 들어설 자리에 어디 있겠나 싶다. 영화에서 소피는 그 자신이 남과 북을 드나들 수 있을 뿐이다. 


결국 넘어야 할 당사자는 중립 따위가 아니다. 경계 밖에 있는 이가 아니란 말이다. 경계를 두고 대치하고 있는 남과 북이야말로 경계를 넘어야 할 당사자들이다. 그런 면에서 이 영화는 시대와 완벽히 조우했고, 시대의 한계를 완벽히 그려냈으며, 과거에 있었고 미래에 있을 수 있는 일을 다시 바라보았고 예견했다. 


반공의 남한, 반미의 북한, 그리고 제3지대. 영화는 세 입장을 대변하는 최고위층의 경계를 지키려는 속셈을 은근히 부정적으로 흘려내는 반면, 경계를 허물고 넘어서려는 지극한 개인을 대놓고 긍정적으로 그려내며, 금기 깨기를 시도하지만 영화 이후까지 보여주려 했기에 실패하고 만다. 영화만이 줄 수 있는 판타지를 지향했다면 충분히 금기 깨기를 완성시켰을 테지만, 이미 사건의 진실로 판타지는 완성되었다. 


남과 북의 '연결', 그 해석의 의미


영화에는 '연결'로 해석할 수 있는 다양한 장면들이 나온다. 그건 북한과 남한의 '같음'으로 어이질 수 있지 않을까. ⓒCJ엔터테인먼트



영화는 다양한 영화적 기법, 소소하고 소품, 꼼꼼한 조작 등으로 핵심 주제를 때론 비틀어 때론 정면으로 보여준다. 박찬욱 감독이 이후에도 즐겨하는 미장셴이 주를 이루는데, 한 치의 흐트러짐 없는 정확함을 그 기조로 한다고 하겠다. 그것들이 품은 의미를 찾는 것도 한 재미이거니와, 그것들이 굉장히 중요한 의미이기 때문에 반드시 찾아내야 하는 유의미한 스트레스도 존재한다. 


두 번의 자살(시도)가 같은 장소에서 행해졌다든지, 소피가 사진에서 숨기려고 했던 아버지의 존재와 남성식이 마지막으로 사진을 찍을 때 감추고자 했던 김일성과 김정일 존재의 일치성이라든지, 근무를 서는 와중에 이수혁에게 그림자도 넘지 마라고 하는 오경필과 오밤중에 처음으로 선을 넘으려는 남성식에게 어서 오라고 말하는 이수혁의 역설 등이 그렇다. 이밖에도 무수히 많은 장면장면들이 연결되어 있다. 


이런 연결은 모두 남과 북의 '다름'이 아닌 남과 북의 '같음'을, 또는 남과 북이 다르다고 해도 최소한 '연결'되어 있다는 것을 내포하는 게 아닐까 싶다. 물론, 이런 해석과 시각과 생각은 전쟁을 겪어보지 않았기에 할 수 있는 것들일 수 있다. 그 참혹하고 치가 떨리는 전쟁을 겪었다면 이런 생각조차 하지 않을 수 있는 것이다. 


그럼에도, 그럴수록 그런 생각을 해야 하고 그런 시각을 가져야 하고 그런 해석을 해야 한다. 전쟁이 더 이상 일어나지 않으려면 그렇게 해야 하는 게 맞다. 대치는 언젠가 일어날 수 있는 전쟁의 보험 같은 게 아닌가, 언제 전쟁이 일어날지 알 수 없기에 대치를 하는 게 아닌가. 영화에서 보여준 파라다이스이자 유토피아가 비단 그들만의 것이 아니길 바란다. 언젠가는 반드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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