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오래된 리뷰] 이안 감독의 <결혼 피로연>


거장 이안 감독의 오늘을 있게 한 작품 <결혼 피로연>. ⓒ(주)케이알씨지



유명한 영화 감독이라면 누구나 그 자리에 있게 한 결정적인 작품이 있다. 의외로 개중엔 상대적으로 잘 알려지지 않은 작품이 많은데, 그 이후에 보여준 퍼포먼스가 워낙 강해서일 것이다. 할리우드에서 흥행과 비평 양면의 안정적인 퍼포먼스로 충분한 기대 충족 모멘텀을 구축, 아시아는 물론 할리우드를 정복하고 세계적으로도 감독의 기량과 작품성을 인정받는 대만 영화 감독. 이안에게도 그런 작품이 있다. 


이안하면 떠오르는 영화들이 있다. 지난 25년 간 10편 남짓한 많지 않은 작품을 내놓았는데, 누구나 알 만한 대단한 영화로 <와호장룡> <브로크백 마운틴> <색. 계> <라이프 오브 파이>를 들 수 있겠다. 동양과 서양을 오가며 수익과 비평 양면을 완벽히 요리했다. 그런 그에게도 흠이 하나 있으니, 15년여 전에 내놓은 <헐크>인데 거장도 히어로물은 건들면 안 된다는 걸 정확히 보여주었다. 3년 뒤에 <다크나이트> 출현으로 조금은 상쇄되지만 말이다. 


그렇지만 이안은 위에서 들었던 2000년대 영화 이전에 1990년대부터 충분히 엄청난 두각을 나타냈었다. 1992, 93, 94년에 연달아 대만 배경의 영화를 내놓고는 95년 할리우드에 진출해 <센스 앤 센서빌리티>로 대박을 낸다. 그리고 97년과 99년의 상대적 과도기 이후 2001년 <와호장룡>으로 진정한 거장 반열에 오르는 것이다. 그 와중에 내가 생각하는 이안 감독의 진정한 '인생 영화'는 93년에 내놓은 <결혼 피로연>이다. 이후 그의 영화 인생 길은 이 영화에서 비롯되고 파생된다고 해도 과언이 아니다. 


어쩌다가 이 지경이 되었을까?


서로서로 이득이 되는 선의의 거짓말로 위장결혼을 택한 이들, 하지만 일을 계속 꼬이고... 어쩌다가 이렇게? ⓒ(주)케이알씨지



뉴욕에서 잘 나가는 부동산 딜러로 풍족한 생활을 하는 대만 출신 웨이퉁(조문선 분), 그는 남자친구 사이먼(밋첼 릭테스타인 분)과 동거한다. 이 사실을 알 길 없는 부모님은 자주 편지를 날려 결혼과 손주를 기대하고 있다. 난감하기 짝이 없는 웨이퉁과 사이먼, 급기야 부모님은 아들을 위해 대만에서 맞선녀를 보낸다. 동성애자인 웨이퉁이 이를 받아들일 수는 없는 일, 이에 사이먼이 황당하지만 나쁘지 않은 제안을 한다. 


웨이퉁이 관리하는 건물에 세들어 사는 여인 웨이웨이(메이 친 분)와 위장결혼을 하는 것이다. 웨이웨이는 미국에 계속 체류할 수 있게 되어서 좋고, 웨이퉁은 부모님을 거짓으로나마 일단 만족시켜드릴 수 있어서 좋다. 하지만 부모님은 이 소식을 듣자마자 뉴욕으로 출두한다. 철저한 준비를 하는 세 사람, 같이 살게 될 집은 일단 웨이퉁과 사이먼이 동거하는 사이먼의 집으로 잡고 결혼식은 동사무소 같은 곳에 가서 약식으로 치르기로 했다. 하등 이상할 것도 꺼림칙한 것도 없다. 


문제는 역시 부모님이다. 나이가 나이신 만큼, 장군 출신의 대단한 집안인 만큼, 당연히 대만 전통 결혼식을 생각하고 있었던 부모님, 약식 결혼식을 올리고는 울음을 터트리신다. 대신 사이먼이 뉴욕 최고의 중화요리집으로 초대해 그들만의 결혼 피로연을 연다. 바로 그곳에서부터 꼬이기 시작한다. 우연찮게도 요리집 사장이 웨이퉁 아버지가 장군이었던 시절 오랫동안 기사 노릇을 했던 이였던 것. 그는 장군의 아들 결혼식과 결혼 피로연을 미국식으로 하는 걸 못마땅하게 여기고는, 자신의 요리집을 무료로 빌려주어 대대적인 결혼식과 결혼 피로연을 열게 한다. 


이보다 난감할 수 없는 지경에 이른 세 사람이지만, 문제 없이 치뤄내기만 하면 되는 것이기에 열심히 준비하고 열심히 절차를 따른다. 그런데 결혼 피로연에서 웨이퉁과 웨이웨이는 생각지도 못한 일을 저지르고, 결혼식이 끝난 후에도 부모님은 돌아가지 않으시며, 세 사람의 굳건한 동맹에 금이 가기 시작한다. 어쩌다가 이 지경이 되었을까? 어쩌면 좋을까?


이 '좋은' 영화의 따뜻함


날카로움이 좋은 영화의 기본 키워드가 된 요즘, 따뜻한 좋은 영화를 다시 본다. ⓒ(주)케이알씨지



영화는 명백한 코미디 느낌으로 시작해 그 느낌을 이어나간다. 좌충우돌 소동극이라고 해도 무방한 스토리 라인을 보여주기 때문인데, 그 자체에 비극의 씨앗을 품고 있었던 것이다. 그건 부모님과 세 사람의 대조적인 모습에서 엿볼 수 있는데, 동성애에 대한 생각과 세대 간 갈등 그리고 동양과 서양의 문화 차이에서 비롯된다. 


영화는 이런 요소들을 머금은 채 초반에 쉽게 풀다가 중반 이후에 폭발하면서 문제들을 드러내고는 마지막에 아름다운 반전으로 기막힌 화해를 선보인다. 대만 최고의 톱배우 조문선의 데뷔작으로도 유명한 이 작품에서 그는 상대방이라고 할 수 있는 아버지 역의 랑웅과 더불어 협력과 대립의 조화를 이끈다. 


특히 랑웅은 이안 감독의 동양 배경 영화에 모두 출현해 중심을 톡톡히 잡는데, 2002년에 세상을 떴기에 <와호장룡>을 마지막으로 찾아볼 순 없다. 계속 살아계셨으면 이안 감독의 동양 배경 영화에서 계속 만나볼 수 있지 않았을까 싶다. 여하튼 그는 이 작품에서 동양, 전통, 보수의 상징과도 같다. 그렇지만, 개인적으로 영화 역사상 가장 아름다운 반전 중 하나라 할 만한 그의 영어 실력은 그 모든 걸 일거에 무너뜨린다. 


우린 이 영화를 통해 대립되는 것들의 단점을 날카롭게 파헤치거나 통렬하게 비판하거나 악랄하게 찍어내리는 모습을 보지 못한다. 25여 년 전이라 그럴까? 아마 아닐 것이다. 그건 순전히 이안 감독의 의도이자 그가 추구하는 방법론이다. 우린 2008년 이후 자본주의의 폐해를 섬뜩하게 파헤치고 비판하는 '좋은' 영화들을 많이 봐왔다. 그런 와중에 <결혼 피로연>의 따뜻함을 목격한다면, 좋거나 나쁘거나 둘 중 하나의 느낌을 들 것 같다. 자본주의의 폐해를 다루는 영화들을 너무 좋아하는 나는, 그럼에도 이 영화가 그 어떤 영화보다 좋았다고 말하고 싶다. '좋은' 영화인 것도 사실이다. 


조화로 나아가자


영화는 세대, 동서양, 남과여의 차이를 허물고 조화로 나아가자고 말한다. ⓒ(주)케이알씨지



애초에 동성애에 대한 생각과 세대 간의 갈등, 동양과 서양의 문화 차이는 '대립'되는 개념이 아닐지도 모른다는 생각을 하게 된다. 25여 년 전에, 그것도 촌스럽지 않고 감각적으로 풀어낸 이안 감독의 천재성에 혀를 내두르면서, 그의 담론에 동의한다. 동성애에 찬성과 반대의 논리 따위는 성립될 수 없다. 세대 간에 갈등만 존재하는 게 아니라 갈등도 존재할 수 있다. 동양과 서양의 문화도 마찬가지로 차이만 있는 게 아니라 동질성을 더 많이 발견할 수 있다. 


강렬하게 다가 오고 부각되고 기억에 남는 한 면이 곧 전체를 대변하는 나쁜 예들이다. 우린 이 길지 않는 영화 한 편으로 나쁜 예들과 함께 해결되는 모습들을 완벽에 가깝게 들여다볼 수 있다. 결은 완연히 다르지만 전체를 풀어내는 느낌은 일본의 고레에다 히로카즈 감독, 한국의 김애란 소설가 초기의 모습과 닮아 있다. 코미디 또는 잔잔한 일상에서 건져올리는 아픈 문제들. 다만, 이 문제를 푸는 방식은 모두 다르다. 


이쯤에서 '결혼 피로연(결혼식)'의 폐해를 짚고 넘어가지 않을 수 없다. 대만의 전통 결혼 피로연이나 미국의 약식 결혼 피로연이 아닌, 한국의 결혼 피로연 말이다. 현재 우리나라의 결혼식은 이것도 저것도 합친 '짬뽕'인 것 같다. 짬뽕을 폄하하고 싶은 마음은 추호도 없음을 밝혀두며, 과도한 돈으로 치장된 보여주기식은 결혼식으로서의 의미를 찾아볼 수 없다. 미국의 약식 결혼식도 마찬가지인 것 같은데, 영화로 봤을 땐 대만의 전통 결혼식이 가장 괜찮아 보였다. 


전통이 사라지는 것도 신식이 하대받고 무시당하는 것도 원하지 않는다. 그것 또한 한 면이 전체를 대변하는 나쁜 예의 하나가 아닌가. 역시 조화밖엔 답이 없을 텐데, 여기서 해석의 중요성을 역설한다. 잘못된 해석의 총합은 폐해를 낳는다. 그건 곧 대립과 부조화를 낳아 오래된 비극을 만들기 십상인 것이다. 조화로 나아가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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冊으로 策하다. 책으로 일을 꾸미거나 꾀하다. 책으로 세상을 바꿔 보겠습니다. singenv@naver.com Since 2013.4.16




[오래된 리뷰] <공기인형>


고레에다 히로카즈 감독의 <공기인형>은 나에게는 '이제야 비로소 보이는 영화'의 전형이다. ⓒCJ엔터테인먼트



뭘 잘 몰랐던 시절, 즉 영화에 대한 지식이 짧았던 시절, 지금 생각하면 황당하지만 나름 이해는 가는 이유 때문에 좋은 영화를 '쓰레기' 취급했었다. 모르긴 몰라도 그건 뭘 좀 안다는 지금도 마찬가지일 것이고 앞으로도 계속될 것이다. 열린 마음을 갖고 남의 말에 휘둘리지 않는 안목을 키워나가는 수밖에 없다. 


일본에서는 2009년에 우리나라에서는 2010년에 개봉한 영화 <공기인형>이 나한텐 그런 케이스 중 하나이다. 당시에는 당연히 고레에다 히로카즈 감독을 아예 몰랐었고, 그야말로 전형적으로 좋은 영화만을 진짜 좋은 영화로 치부하고 있었다. 그 '전형적'에는 '야하지 않은' 영화가 속해 있었다. 이 영화는 상당히 특이한 형식에 과감한 노출신이 꽤 나온다. 당시 나의 기준에서 탈락이었다. 


불과 7년 만에 안목이 얼마나 늘었을지는 모르겠지만, 이 영화가 최소한 나쁜 영화가 아니라는 건 안다. 고레에다 히로카즈 감독이 워낙 수작, 명작들만 내놓아서 상대적으로 성이 차지 않는 느낌이 들지만, 대표작 중 하나라고 해도 무방할 정도의 좋은 영화라고 해도 틀린 건 아니다. 무엇보다 '배두나'라는 배우의 발견, 그녀는 공기인형 그 자체였다. 그녀가 아니면 안 되는, 그런 영화였다. 


인간 아닌 것의 인간 되기


공기인형 노조미는 어느 날 갑자기 아무 없유도 없이 인간의 마음을 갖게 된다. 왜? ⓒCJ엔터테인먼트



레스토랑에서 웨이터로 일하는 히데오(이타오 이츠지 분), 여자친구와 헤어진 그는 솔로다. 그런데 집에 무엇인가가 있다. 다름 아닌 공기인형 노조미(배두나 분), 외로운 남자들의 성욕을 채워주는 섹스 토이다. 그는 노조미와 대화를 나누고, 애무와 섹스를 한다. 뒤처리도 직접 한다. 그에게 노조미는 몸과 마음을 나누는 대상이다. 


어느 날 갑자기 노조미에게 인간의 마음이 생긴다. '그녀'는 몸이 공기로 이루어진 것만 빼고는 완전한 인간이 된 것이다. 옷을 입고 밖을 돌아다니며 인간의 말과 행동을 배운다. 우연히 들어간 비디오 가게, 점원 준이치(아라타 분)에게 첫눈에 반한 노조미, 그곳에서 일을 시작한다. 이후 아침이면 평범한 인간처럼 비디오 가게에 출근하고, 저녁에 히데오가 퇴근할 때쯤이 되면 집으로 돌아가 인형이 된다. 


준이치와의 사랑을 키워나가는 노조미, 그녀는 행복한가? 마음을 가졌지만 속이 텅 비었기에 인간이 될 수 없고 마음을 가졌으니 인형이 될 수도 없다. 그러던 어느 날 사건이 연속으로 터진다. 물건을 정리하다가 모서리에 팔이 찢겨 몸에서 공기가 빠져나가게 된 것이다. 그 모습을 준이치가 보고 만다. 그리고 노조미는 준이치와 사귀면서 계속 히데오 집 구석에 숨어 있었는데, 어느 날 보니 히데오가 다른 공기인형을 데려다 놓은 게 아닌가? 노조미는 자신이 마음을 가졌다는 걸 히데오에게 알린다. 또 노조미는 자신을 만든 이를 찾아가 공기인형의 탄생과 죽음을 듣기도 한다. 


영화 <공기인형>은 '인간 아닌 것의 인간 되기' 이야기다. 일일이 열거할 순 없지만, 우린 동화 <피노키오>를 필두로 이런 이야기들을 많이 접해왔다. 소설이자 영화인 <바이센테니얼 맨>도 생각난다. 모두 인간에 의해서 만들어지고, 요정의 도움으로 인간의 실수로 인간처럼 된다. 다만, 공기인형 노조미는 아무 이유 없이 인간의 마음을 갖게 된다. 이 사실이 해석하기 나름으로 크게 작용했다고 본다. 


인간의 속이 비었다는 역설로 인간을 말하다


인간의 마음을 가진 것이 점점 아픔과 슬픔으로 다가오는 노조미. 그건 인간에 대한 조롱이 아닌 위로의 일환이다. ⓒCJ엔터테인먼트



인간은 태초부터 '우리는 어디서 왔는가' '우리는 왜 태어났는가' '우리는 어떻게 태어났는가'를 물어왔다. 아마 과학적으로는 입증이 되었을 것이다. 종교적으로도 마찬가지고. 하지만 인간 본질을 탐구하는 철학적으로는 답을 내기 힘들지 않을까. 그래서 인간은 그저 '던져진 존재'다. 누군가에 의해서도 우연에 의해서도 아니다. 


여기서 공기인형 노조미가 마음을 갖게 된 '이유 없는 이유'가 겹쳐진다. 나아가 그녀는 속만 텅 비었을 뿐 '인간'이 된 것이다. 영화는 그녀를 인간처럼 이유 없는 이유로 인간을 만들어 놓고, '속이 텅 빈' 것도 채워 사실상 완벽한 인간으로 만든다. 어떤 식으로? 노조미의 물질적인 채워짐이 아니라, 인간의 속이 비었다는 역설로. 


노조미가 마음을 갖고는 밖을 돌아다니다가 높은 고층 빌딩 앞에 앉아 있는 노인과 대화를 하게 된다. 속이 텅 빈 것에 대해서 말이다. 노인은 자신의 속이 텅 비었다는 노조미의 말에, 속이 텅 빈 인간이 많다고 말한다. 저 앞의 높은 고층 빌딩에 사는 인간들처럼. 이에 노조미는 당연히 그 비유적인 표현을 직접적으로 받아들여 자신처럼 인간의 마음을 가진 공기인형이 많이 있다고 잘못 알게 된다. 동시에 그때만큼은 그녀는 완벽한 인간이 된 것이다. 스스로도, 또 스스로가 생각하는 세상 안에서도. 


영화는 이처럼 공기인형 노조미를 점점 더 완벽한 인간으로 만들면서, 한편 인간을 속이 텅 빈 공기인형으로 치환한다. 그렇지만 이는 '반(反) 인간'은 아니다. 오히려 인간을 불쌍하게 보고, 인간이 사는 이 세상을 비판하고 있다. 노조미가 인간의 마음을 가져서 너무 힘들다고 말하는 건, 그런 마음을 가진 인간을 조롱하는 게 아니라 위로하고 있는 것이기도 하다. 


고레에다 히로카즈 감독의 '시' <공기인형>


일본을 대표하는 영화감독 고레에다 히로카즈의 많지 않은 작품들. 그중에 <공기인형>은 '시'에 해당되지 않을까 싶다. ⓒCJ엔터테인먼트



개인적으로 고레에다 히로카즈 감독의 팬이 되어가는 중이다. 그의 영화를 작년 초에 처음 접했는데, 당시 최신작이었던 <바닷마을 다이어리>였다. 전형적으로 잔잔한 일본풍 영화의 느낌과 형식 위에, 은근한 파격이 계속 되었던 기억이 있다. 그게 조화를 이루는 모습이 더욱 파격적으로 다가왔다. 올해 초에는 그의 장편 데뷔작 <환상의 빛>을 보았는데, 20년 동안 크게 다르지 않은 느낌이 들었다. 이미 데뷔 때부터 자신 만의 세계를 구축해놓았다고 할까?


어디선가 본 적이 있다. 고레에다 히로카즈 감독의 세 작품을 문학 장르로 비교해놓았는데, 공감이 갔다. <걸어도 걸어도>가 소설, <공기인형>이 시, <바닷마을 다이어리>가 에세이라고 말이다. 아직 <걸어도 걸어도>를 접하지 못했는데, 다른 두 작품을 접한 이 시점에서 적절한 비유라고 생각한다. 전형적으로 잔잔한 일본풍의 느낌과 형식 위에 파격을 입히고 조화를 이룩한 그의 스타일에, 쉽지 않은 비유와 상징까지 심어두었으니 이를 '시'라 하지 않고 무엇이라 하겠는가. 


노조미의 '나는 인간의 마음을 얻었습니다'로 시작하는 내레이션들을 모아 놓기만 해도 충분히 시가 된다. 제목도 이미 정해져 있다. 고레에다 히로카즈의 수많은 걸작들, 사실 그가 만든 모든 영화들이 걸작이라 할 만한대, 그중에서도 <공기인형>은 4대 대표작이라 칭할 수 있지 않을까. 여기서 대표작은 그가 구축한 세계를 세분화할 때 각각을 대표할 수 있는 작품이라 할 것이다. <그렇게 아버지가 된다>를 또다른 문학 장르인 '영화'에 놓고 싶다. 


아직 보지 못한 그의 작품이 최소 일곱 작품은 남아 있다. 왠지 비슷한 느낌의 영화들일 것 같은 불길한듯 황홀한듯 한 예감이 드는데, 반드시 다 보게 될 것이다. <공기인형>은 그의 영화를 접하는 시작으로는 맞지 않는 것 같다. 그보다 최신의 영화들을 보고 그 다음 접하는 게, 여러 모로 도움이 될 것 같다. 그런 의미에서 나의 이번 시도는 실패인가? 그렇지만도 않다. 매도 빨리 맞는 게 낫다는 말도 있지 않은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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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래된 리뷰] <세션: 이 남자가 사랑하는 법>


충분한 논란과 충만한 사랑이 공존하는, 직선적인 영화 <세션: 이 남자가 사랑하는 법>. ⓒ20세기폭스코리아



얼마 전 국내 주요 언론들에서 BBC 보도를 인용해 '천사의 손' 논란을 다룬 적이 있다. 천사의 손은 대만의 작은 민간 자선단체로, 성욕을 해결하기 힘든 장애인을 위한 성 서비스를 제공한다. 한 마디로, 간호 자격을 갖춘 성 도우미가 장애인의 수음을 도와주는 것이다. 장애인도 비장애인과 다름 없는 욕구를 가지고 있고 이를 풀어야 하며, 장애인의 식사와 배설을 도와주는 것처럼 성욕도 해소도 도와주어야 한다고 말한다. 


논란의 여지가 다분하다. 매춘 행위와 다를 게 없다는 주장이 일 수밖에 없는 것이다. 여러 가지 각도에서 들여다볼 필요가 있고, 자연스레 그렇게 된다. 매춘을 바라보는 시각의 차이가 있을 테고, 장애인의 성 욕구를 바라보는 시각의 차이도 존재할 것이다. 무엇보다 '봉사'의 의미로 행해지는 성행위를 바라보는 시각이 가장 중요하게 작용할 것 같다. 


이와 다분히 동일선상에서 대할 순 없겠지만, 비슷한 생각과 논란을 야기시킬 수 있는 소재를 다루는 영화 <세션: 이 남자가 사랑하는 법>가 흥미롭게 눈을 잡아끈다. 소아마비로 인해 얼굴 근육을 제외한 온몸이 자유롭지 못한 중증 장애인의 바람을 들어주기 위해, 그리고 '치유'하기 위해 섹스 테라피스트와 시간을 가진다는 게 주된 내용이다. 1988년 미국에서의 실화를 바탕으로 했다고 한다. 


중증 장애인 마크의 총각 딱지 떼기


중증 장애인 마크는 총각 딱지 떼기를 실현코자 한다. 하지만 현실의 벽은 높다. 다른 사람들을 의식하는 것 따위가 아니라 자기 자신을 넘는 것. ⓒ20세기폭스코리아



마크 오브라이언(존 혹스 분)은 얼굴 근육을 제외한 온몸이 자유롭지 못하다. 6살 때 걸린 소아마비 때문인데, 도우미와 호흡을 도와주는 기계와 도구 없이는 살 수 없다. 그럼에도 그는 시인이자 저널리스트인데, 어느 날 '장애인의 섹스'에 대한 칼럼 제의가 들어 온다. 그러고 보니 38살 평생 섹스는커녕 수음도 해보지 못한 그, 섹스 테라피스트의 도움을 받고자 한다. 그렇게 셰릴 코헨 그린(헬렌 헌트 분)과 마크 오브라이언은 만남을 갖고, 세션 즉 '훈련'에 들어간다. 


자신의 몸을 느끼고, 서로의 몸을 느낀 후, 수음의 단계를 지나, 삽입의 순간 이후, 절정을 느끼는 것이다. 물론 마크는 어떤 행동도 취할 수 없기 때문에 셰릴에 의해서만 단계가 이어진다. 쉽지 않다. 마크는 평생 능동적이든 수동적이든 직접적이든 간접적이든 성에 관한 어떤 행동도 취해 보지 못했던 것이다. 비록 칼럼 때문이기는 했지만, 마크는 그토록 원하던 '총각 딱지 떼기'에 성공할 수 있을까?


한편, 마크가 어디에 가서도 쉽게 꺼내지 못할 자신의 속 깊은 얘기를 브렌단 신부(윌리암 H. 머시 분)에게 한다. 고해성사라고 할 수 있겠는데, 신부가 답해주기엔 맞지 않는 것 같은 성 상담이 대부분이다. 그런 와중, 계속 바뀌는 도우미도 문제다. 자신의 상태를 이해해주는 것 이상으로 한 인간으로 대해주는 도우미를 만날 수 있을 것인지?


영화는 마크 오브라이언을 중심으로 원을 그리듯이 다양한 사람들이 나와 관계를 이어간다. 처음엔 '중증 장애인' 마크가 보일 것이다. '저런 상태로 어떻게 살아갈까' 하는 궁금증이 가장 먼저 인다. 그러다가 어느새 '마크'가 보인다. 그러며 그와 관계를 이어가는 '사람들의 변화'를 엿볼 수 있다. 


섹스와 논란을 넘어 사랑과 관계로


영화 포스터를 볼 때는 '섹스'에 방점을, 일반적으로는 '논란'에 방점이 찍힐 수 있겠다. 하지만 그 행간에 위치한 사랑과 관계를 들여다보자. ⓒ20세기폭스코리아



별다를 게 없는 소소한 일상을 그리는 이 영화, 어디에 방점을 찍느냐에 따라 다양한 시각으로 볼 수 있다. 먼저 포스터를 보니, 배급사는 '섹스'에 방점을 찍은 것 같다. '신부님... 하고 싶은 게 죄가 되나요?'가 메인 카피다. 청소년 관람불가 등급인 만큼, 어쩔 수 없이 선정성에 최대한 포커스를 맞췄다고밖에 생각되지 않는다. 하지만 이는 영화가 가지는 다양한 초점 중 가장 빗나간 초점일 것이다. 


'섹스'와 비슷한 관점일 텐데, '논란'에 방점을 찍는 게 이 영화를 보는 극히 일반적인 방법이다. 여기엔 두 층위가 있는데, 장애인의 성 욕구와 섹스 테라피스트의 정체다. 장애인에 대해 깊이 생각하지 않는 경향의 기반 위에서 장애인이 가지는 성 욕구는 더욱 생각하기 힘들다. '장애인 따위가 성 욕구를 가지고 있겠어?'와 '장애인이 무슨 성 욕구를 해소해?'가 있겠는데, 여하튼 이미 여기서 더 나아가지 못하는 것이다. 


글의 처음 소개한 장애인 성 도우미 논란과 연장선상에 있다고 할 수 있는, 섹스 테라피스트의 정체는 사실 혁명의 물결이 전 세계를 휩쓴 60년대에 확립되었다고 한다. 섹스보다 테라피스트 즉 치료와 치유에 방점을 둔 것이다. 단지 그 방법론이 섹스에 있는 것이리라. 이는 본인의 확고하고 당당한 신념이 중요할 듯하다. 


나아가 이 영화를 보는 가장 중요한 관점이자, 이 영화가 진정 말하고자 하는 바는 '사랑'과 '관계'에 있다. 마크를 아는 사람들이 느끼는 오묘한 감정, 그의 인간적인 면에 끌려 진정 사랑하게 되었지만 그의 장애를 극복하지 못하고 떠난 사람도 있고 셰릴처럼 공적인 만남으로 시작했지만 마크의 진심어린 마음과 역시 인간적인 매력에 끌린 사람도 있으며 모든 걸 떠나 오로지 마크라는 인간에 끌려 오랜 시간 함께 한 사람도 있다. 그리고 그의 분신과도 같은 친구와 도우미도 있다. 그들은 모두 '장애인' 마크 때문에 관계를 가졌지만, 모두 '마크'와 함께 하는 게 좋아졌다. 


우리가 이 영화를 보며 수정해야 할 것들


이 괜찮은 영화를 보고 우리는 더욱 괜찮은 생각을 할 수 있지 않을까? 충분히 가능하다. ⓒ20세기폭스코리아



나는, 아니 우린 이 영화를 보며 '수정'해야 할 게 많다. 무엇보다 꽉 막힌 머리와 무관심한 가슴이다. 장애인도 당연히 성 욕구가 있고 원한다면 그 욕구를 풀 수 있어야 한다는 것. 할 수 있지만 안 하거나 못 하는 것과, 할 수 없어 안 하거나 못 하는 건 아예 다른 차원의 얘기이기 때문이다. 그걸 받아들이고 나서, 그 욕구를 해소하는 방법을 논해야 한다. 그 방법에는 봉사 또는 치료가 있을 것이다. 


쉽지 않겠지만 장애인의 삶에 관심을 가져야 한다. 아니, 이해해야 한다. 그것도 안 되면, 차별하지 말아야 한다. 행동으로 옮기기 전에 가슴 깊이 새겨야 한다는 것이다. '틀린 게 아니라 다르다'는 진부하지만 심플한 명답도 함께. 세상엔 수많은 사람들이 함께 살아가는데, 그들은 단지 몸이 좋지 않은 사람일 뿐이다. 


섹스를 바라보는 시선과 섹스에 대한 생각의 수정이 가장 중요하고 절실할 수도 있겠다. 비록 전라노출과 사실적인 섹스신에도 불구하고 이 영화를 누구보다 추천하는 대상은 다름 아닌 청소년들인데, 청소년 관람 불가 등급이 아이러니하게 다가온다. 섹스란 불경하고 더럽고 몰래 숨어 즐기는 게 아니라, 이처럼 성스럽고 황홀하고 지적인 대상이다. 더욱이 몰래 숨기는커녕 당당하게 밝히고 응원까지 할 수 있는 것이다. 


영화 내적으로는 완벽한 캐릭터를 부여한데 대해 완벽하게 부합한 연기를 펼친 배우들이 빛났고, 영화 외적으로는 논란의 여지가 다분하지만 이겨낼 필요가 있는 다양한 관점을 드러내놓고 풀어낸 점이 빛났다. 무엇보다 이 모든 것들을 삶의 아름다움으로 묶어낸 점이 가장 밝게 빛났다. 그 어떤 인간도, 그 어떤 순간에도, 모두 아름답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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冊으로 策하다. 책으로 일을 꾸미거나 꾀하다. 책으로 세상을 바꿔 보겠습니다. singenv@naver.com Since 2013.4.16




[오래된 리뷰] <헤드윅>


개인적으로 오래된 숙원 사업이었던 <헤드윅>. 드디어 풀어냈다. ⓒ백두대간



오래된 숙원 사업이 하나 있다. 영화 <헤드윅>을 소개하는 것인데, 개인적으로 이해하기 힘들기도 했거니와 영화를 볼 때마다 또 다른 것들이 나를 덮쳐와 벅찬 면도 있었다. 소설 <위대한 개츠비>가 이 영화와 더불어 숙원 사업 중 하나였던 적이 있는데 풀어 냈고, 이제 <헤드윅>만 남았다.


기억에 처음 본 게 대학생 때였으니 2004년 쯤이었던 것 같다. '영화와 철학' 비슷한 제목의 교양 과목에서 '젠더' 주제의 타이틀이었다. 그때는 정녕 '충격'으로만 다가와 지금 생각하면 말도 안 되는 주장을 펼쳤던 것 같다. 두 번째가 2008년 쯤이었다. 이 영화를 극히 좋아하는 친구와 함께 봤는데, '아련'한 느낌으로 남아 있다. 세 번째가 3년 전쯤이었다. 혼자 봤는데, 다시 봐도 '재미'있구나 하고 지나갔다. 


그리고 이번에 네 번째로 아내와 함께 봤다. 스토리는 대략 알고 있으니 행간에 주목하려 했다. 조금은 보이는 것 같았다. '충만'한 기분이었다. 이 영화는 조금이라도 뭔가 보이면 성공이라고 생각하는데, 그래서 십수 년만에 비로소 이렇게 소개하고자 한다. 충격적이고 재미있고 아련하고 충만하기까지 한 이 영화 <헤드윅>, 그 완벽한듯 허술한듯 한 매력에 흠뻑 빠지지 않을 수 없을 것이다. 


특별한듯 이질적인, 그러나 평범한 사랑과 성장 영화


십수 년이 지났지만 여전히 겉모습만 보면 이질적일 수 있다. 하지만 결단코 이 영화는 평범한 사랑과 성장 영화다. ⓒ백두대간



가난한 록밴드 '앵그리 인치'를 이끌고 변두리 바에서 노래를 부르는 헤드윅(존 캐머런 미첼 분), 남자의 목소리와 여성의 몸매를 가졌다. 너무나도 좋은 노래를 너무나도 잘 부른다. '그녀'에겐 남자 친구 이츠학가 있다. 그런데 그는 여자 목소리를 낼 줄 알며 여자 가발을 몰래 쓰곤 한다. 그들은 맞지 않는 것 같다. 


헤드윅은 노래로 내래이션으로 대화로 자신의 이야기를 들려준다. 베를린장벽이 세워진 1961년 동베를린에서 태어난 그, 한셀은 아버지에게 성추행을 당했던 것 같다. 어머니한테 쫓겨난다. 한셀은 미군 라디오 방송에 심취해 오븐 속에서 락을 듣는다. 엄마가 싫어하기 때문. 그에게 미국으로 갈 기회가 열린다. 그에게 반한 어느 미군 병사가 그와 결혼을 한 것이다. 대신, 그는 성전환수술로 '여자'가 되어야 했다. 하지만 수술은 제대로 이루어지지 않았고 그에겐 일 인치의 살덩어리만 남게 되었다. 


그런 그녀에게도 사랑이 찾아온다. 미군 장군의 아들 토미인데, 그녀와 사랑에 빠진 것인지 그녀의 음악과 사랑에 빠진 것인지 모르겠지만 그들은 함께 한다. 그렇지만 그 문제의 일 인치 살덩어리 때문에 토미는 떠나고 급기야 헤드윅의 노래를 거의 그대로 훔쳐 세계적인 락스타로 발돋움한다. 헤드윅은 다름 아닌 토미를 스토킹하며 콘서트장에 딸린 레스토랑에서 노래를 부르는 것이었다.


<헤드윅>은 특별한듯 이질적인듯 거부감이 느껴질 수 있는 영화이지만, 실상은 평범한 사랑과 성장에 관한 영화다. 본래 사람은 남성와 여성이 한 몸에 있어 네 손과 네 발 달린 형체였는데 신의 노여움을 사 반으로 갈라졌기에, 자신의 반쪽을 찾아야 한다고 말하는 헤드윅. 그게 '사랑의 기원'이라는 것이다. 남자일까, 여자일까. 토미일까, 이츠학일까.  찾을 수 있을까. 


성에 대한 위대한 성취, 모두 맞다


감히 말하지만, 이 영화는 성에 대한 위대한 성취라 할 수 있다. 단순히 위대한 영화를 넘어선 그 무엇이다. ⓒ백두대간



1998년 존 카메론 미첼 주도 하에 만들어진 브로드웨이 뮤지컬 <헤드윅>, 2001년에 영화로 만들어진다. 세계 최고의 독립영화제인 '선댄스 영화제'에서 감독상을 수상하며 전 세계에 이름을 알리는 존 카메론 미첼과 영화 <헤드윅>. 이 영화가 넘어버리는 도식은 일반적인 사람이 생각하기 쉽지 않은 것이다. 특히 우리나라처럼 이분법적 사고가 당연하게 받아들여지는 사회에서는 말이다. 그래서 더욱 특별하다. 


베를린과 독일을 동과 서로 갈라버린 베를린장벽이 세워진 때 태어났다는 상징성을 몸소 보여주는 헤드윅, 남자에서 여자로 되었지만 남자의 흔적이 남아 있다. 그도 그녀도 될 수 없는 헤드윅은 그래서 반쪽을 사랑을 찾아 헤매는 것이다. 그러면 자신이 온전해질 수 있다고 믿는다. 그렇지만 갖가지 이유로 모두 떠난다. 


결론에 이르면 알게 되겠지만, 헤드윅은 자신에게로 돌아간다. 그렇게 깨달은 건 반쪽이 다른 누군가가 아니라 자신 안에 있다는 것. 즉, 젠더퀴어 선언에 이은 인정이다. 세상엔 남성과 여성만 있는 게 아니다. 영화에서 다양한 캐릭터들이 보여주는 성정체성과 사랑에 대한 혼란은, 그래서 틀린 게 아닌 다른 게 된다. 아니, 맞는 게 된다. 그런 혼란은 결코 이상한 게 아니라 정상적인 것이다. 


이어 역시 결론 때문에 혼란스러워지는 궁금해지는 헤드윅이 갖는 여러 정체성들이 있다. 헤드윅은 트랜스젠더, 드래그 퀸, 젠더퀴어로 변천사를 가지고 있다. 그 사이에도 알 수 없는 성정체성 변화와 혼란이 있었을 것이다. 그래서 결국 헤드윅은 누구란 말인가? 어떤 성을 가지고 있단 말인가? 우린 답을 원한다. 


그러나 헤드윅은 답하지 않는다. 끊임없이 고민하고 변화하고 혼란스러워 하면서도, 그때그때 자신을 있는 그대로 보여주는 것이 답이라고 생각한 것이다. 이는 '제3의성'을 인정하는 도식조차 넘어서는 '상대적 성정체성'의 확립이다. 모든 성을 다 가졌다고 자각하는 '팬젠더'나 모든 성을 오가는 '젠더플루이드'가 그나마 비슷할까? 나로서는 더이상의 진척이나 이해는 힘들다. 성에 관한 위대한 성취인 것만은 분명하다. 


'성정체성 따위', 그 자체로 완벽한 한 인간


성정체성이 어쩌구 저쩌구 하는 걸 집어 던져버리자. 그리고 자신으로 들어갔다가 나오자. ⓒ백두대간


이 영화를 보면서 스스로에게 질문을 던지고 스스로를 돌아보지 않을 수 없다. 굉장히 무섭고 두려운 질문이고 돌아봄인데, 내가 남성이 아닌 다른 성정체성을 가지고 있다고 생각하는 게 '끔찍'하기 때문이다. 지금 우리가 살고 있는 이 세상의 지극히 일반적인 모습이며 이상과 현실의 괴리이다. 이상은 모든 걸 다 인정하고 당연한듯 바라보는 것이지만, 현실은 끔찍하게 여긴다는 것이다. 


정확히는 '자신'이 그러하다고 생각할 때이다. 다른 누군가가 그러하다고 해서 끔찍하다고 여기진 않는다. 여기에는 다분히 교육에 의한 인식전환이 필요한대, 한 걸음씩 진전된 교육이 보이는 것 같다. 물론 오랜 시간이 걸릴 거다. 특히 우리나라에선. 최후의 대상은 다른 누구도 아닌 내가 될 것이다. 다른 누구도 아닌 나여야만 한다. 내가 성정체성의 변화를 받아들일 수 있어야 진정한 인식전환이 가능하다는 말이다. 


헤드윅이 남자친구 이츠악의 변화를 받아들이려 하지 않는 이유도 여기에 있다. 헤드윅은 자신의 변화를 받아들이려 하지 않았다. 그 혼란을 정면으로 응시하지 않고 자꾸 밖으로만 눈을 돌렸다. 그렇지만 돌아오는 건 참담한 실패뿐. 결국 자신에게 눈을 돌려 정면으로 응시해 받아들이니 문제를 풀 수 있었다. 


쉽지 않다. 아니, 불가능에 가까울 수도 있다. 이렇게 해보자. 성정체성을 특별하게 보지 말고 '성정체성 따위'로 생각하자. 남자나 여자도 생김새와 성격과 목소리와 행동거지 등으로 완벽한 하나의 개인이 존재하는 것처럼, 수많은 성정체성도 그렇게 생각해보자. 그들도 그저 존재하는 것이다. 하나의 개인으로. 


모든 개인에 무슨 수식어를 붙이지 않는 것처럼 헤드윅은 그저 헤드윅인 거다. 트랜스젠더니 드래그 퀸이니 젠더퀴어니 따위의 수식어는 필요 없다. 이 영화가 궁극적으로 보여주려는 게 바로 그런 모습이 아닌가, 싶다. 그 자체로 완벽한 한 명의 인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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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래된 리뷰] <디 아워스>


버지니아 울프의 <댈러웨이 부인>에 연관된 시공간을 달리하는 세 여인의 하루를 보여준다. ⓒ시네마 서비스


1923년 영국의 리치몬드 교외, 버지니아 울프(니콜 키드먼 분)는 소설 <댈러웨이 부인>을 쓰며 주인공에 대한 생각에 광적으로 가득 차 있다. 런던에서 언니네 가족이 놀러 왔다가 오래지 않아 돌아간다. 얼마 후 울프는 집을 뛰쳐나가 런던행 기차를 타기 위해 역에서 기다린다. 곧 남편이 그녀를 뒤따라 설득한다. 사실 그들은 울프의 정신병을 치료하기 위해 런던에서 리치몬드 교외로 왔던 것이다. 


1951년 미국의 로스앤젤레스, 둘째 아이를 임신한 로라 브라운(줄리안 무어 분)은 첫째 아들 리차드와 함께 남편 생일 파티를 준비하며 케이크를 만든다. 그녀가 버지니아 울프의 <댈러웨이 부인>을 즐겨 읽는 와중에, 친하게 진하는 친구가 놀러온다. 얼마 후 브라운은 리차드를 보모에 맡기고 자살하고자 호텔로 향한다. 하지만 결국 자살하지 못하고 집으로 돌아온다. 자살하려 한 것도 못 한 것도 <댈러웨이 부인> 때문이다. 


2001년 미국의 뉴욕, '댈러웨이 부인'으로 불리는 편집자 클라리사(메릴 스트립 분)는 죽어가는 옛애인 리차드의 문학상 수상 파티 준비를 하고자 한다. 리차드는 다름 아닌 1951년 미국의 로스앤젤레스 브라운의 첫째 아들 리차드이다. 그는 엄마에게 버림 받은 기억을 앉은 채 힘겹게 살아가다 죽음을 눈앞에 두게 된 것이다. 우여곡절 끝에 파티 준비를 마치고 리차드를 찾아간 클라리사, 그녀의 눈앞에서 리차드는 자살한다. 


자살, 동성애 그리고 여성


세 여인 앞에 놓인 것들이 시공간을 초월해 그들을 괴롭히고 힘들게 한다. ⓒ시네마 서비스



영화 <디 아워스>는 시간과 공간을 달리하는 세 명의 여성을 차례대로가 아닌 교차로 보여준다. 단 하루를 보여줄 뿐이지만 여성의 인생을 함축적으로 엿볼 수 있다. 이는 버지니아 울프가 <댈러웨이 부인>을 쓸 때 고심했던 부분인데, 로라 브라운이 <댈러웨이 부인>을 읽고 삶을 다시 생각하고 클라리사가 '댈러웨이 부인'이라 불리는 것처럼 이 영화는 소설 <댈러웨이 부인>과 깊은 연관이 있는 것 같다. 


세 여인에게서 공통적으로 발견할 수 있는 부분은 이밖에도 '자살'이 있다. 버지니아 울프는 남편의 말대로 라면 두 번이나 자살을 시도했다. 그리고 이 영화 <디 아워스>가 버지니아 울프가 자살로 생을 마감하면서 시작되기도 한다. 브라운은 <댈러웨이 부인>을 읽고 자살을 하고자 했다가 철회한다. 그의 아들이자 클라리사의 옛 애인 리차드는 결국 자살하고 만다. 


소설 <댈러웨이 부인>, '자살', 그리고 남은 한 가지는 '동성애'다. 사실 동성애 코드야말로 이 영화가 말하고자 하는 바에 가장 근접한, 또는 그 과정에서 가장 중요하게 작용하는 소재이다. 세 여인의 각각의 키스 장면에서 그 코드를 유추할 수 있는데, 그게 문제를 해소하는 기폭제가 아닌 문제를 키워버리는 기폭제가 될 때가 있어 안타깝다. 


사실 가장 중요한 게 남아 있다. 이 세 여성이 다름 아닌 '여성'이라는 점이다. 왜 하필 여성이었는지, 1923년부터 2001년까지 80여 년이 흐르는 세월 동안의 여성 삶이 무엇인지, 그 행간에 자연스럽게 스며 있고 짓눌려 있어 느낄 수 없는 무게를 우리는 면밀히 살펴야 한다. 


이들이 힘들어 하는 이유


이들이 힘들어 하는 건 사실 자살도 동성애도 아니다. 그들이 여성이기 때문이다. ⓒ시네마 서비스


실존인물 버지니아 울프는 적어도 영황에서만큼은 <댈러웨이 부인>을 쓸 당시 제 정신이 아니었다. 런던에서의 비극적인 삶을 뒤로 하고 한적한 교외로 요양을 와 마음의 병을 치료하고 소설쓰기에 전념한다. 하지만 그녀가 원하는 삶은 그게 아니었다. 그녀는 투쟁을 원했다. 남들이 보기엔 그녀의 투쟁이 정신병으로 보이고 속절없이 삶을 놓으려는 행동으로 보였을 것이다. 여자라면 응당 울프의 언니처럼 가정에 충실한 채 아이를 보살피며 살아야 하지 않겠는가? 소설 따위나 쓰고 앉아 있는 게 아니라...


로라 브라운은 아무 문제 없이 살아가는 것 같다. 건실한 남편에 좋은 집, 그리고 아들도 있다. 거기에 둘째까지 가졌으니 남들이 부러워할 만한 삶이다. 그런데 뭐가 아쉬워서 아들을 내팽겨치고는 뱃속의 아이와 함께 세상을 등지려 하는 것인가? 이보다 더 좋을 수 없을 정도의 '여성으로서의' 삶을 영위하고 있는 그녀인데...


클라리사는 영화에서 앞의 둘보다는 덜 입체적인 인물처럼 보인다. 그녀보다 그녀가 챙기는 옛 애인 리차드의 모습이 워낙 강렬하기 때문이다. 하지만 직접 찾아온 리차드의 옛 '남자친구'와 대면한 후 대화를 하는 도중에 터진 눈물과 하소연, 그리고 그녀의 딸과 나누는 대화를 통해 우린 현대 여성의 삶을 엿볼 수 있다. 문제는 거기에서 어떤 '문제점'을 찾기 힘들다는 사실이다. 여성에게 당연히 부과된 수많은 의무들이 문제라고 인식되지 않기 때문에 일어나는 문제다. 


이들이 힘들어 하는 건 두 층위에서 볼 수 있겠다. 둘 다 '여성'이기 때문에 더 크게 다가오는 것일 텐데, 하나는 여성으로서 부과되는 의무와 거기에서 파생되는 엄청난 무게다. 이 의무와 무게를 볼 수도 느낄 수도 없다. 다만 본인들은 알고 있다. 그렇지만 헤어나기가 힘들다. 다른 하나는 자신의 진짜 모습인 동성애자를 감춘 채 살아가야 한다는 점이다. 1923년 영국이든 1951년, 2001년 미국이든, 여성의 동성애는 감춰져야 한다. 일례로 남자 리차드의 '남자친구'는 자신을 버젓이 밝히지 않는가? 울프와 브라운이 자살을 시도한 건 여기에서 연유되었을 가능성이 크다. 


이 영화의 전부, 니콜 키드먼, 줄리안 무어, 메릴 스트립


니콜 키드먼, 줄리안 무어, 메릴 스트립. 혼자서도 영화 한 편을 온전히 이끌 수 있는 이들이 한 데 뭉쳤으니 더 말해 무엇하랴? ⓒ시네마 서비스


<디 아워스>는 세 여성인 버지니아 울프, 로라 브라운, 클라리사가 전부다. 즉, 이들을 연기한 니콜 키드먼, 줄리안 무어, 메릴 스트립이 전부란 얘기다. 가장 먼저 이 영화의 진정한 주인공인 버지니아 울프 역의 니콜 키드먼을 언급하지 않을 수 없다. 그녀를 지금의 그녀가 되게한 가장 중요한 영화는 단연 <물랑루즈>일 것이다. 가장 완벽한 뮤지컬 영화로 통하는 그 영화로 니콜 키드먼은 정점에 올라섰다. 


<디 아워스>는 그 다다다음 영화로, 같은 사람이 맞나 하는 생각을 시종일관 할 수밖에 없는 연기를 펼쳤다. 그에 앞서 겉모습이 버지니아 울프 그 자체인데, 가발은 물론 얼굴에도 특수분장을 한 것 같다. 또, 항상 어눌하고 불안한 채로 끊임없이 자기 자신 안으로 침참해 들어가면서도 자기 자신과 싸우는 울프의 모습을 재현해냈다. 완벽히.


그에 반해 로라 브라운과 클라리사 연기는 덜 튀고 덜 입체적이고 덜 눈에 띌 수 있다. 하지만 그 둘이 보여준 연기, 그중에서도 한두 장면들은 사실상 영화가 말하고자 하는 것을 가장 함축적으로 보여주었다. 브라운이 자살을 하지 못하고 돌아와 아들과 대화하는 장면, 남편과 대화하는 장면이 그렇고 클라리사가 리차드의 옛 남자친구와 대화하는 장면, 리차드가 자살하기 직전 대화하는 장면이 그렇다. 그 짧은 대화 속엔 그녀들의 삶이 녹아들어 있다. 


이 영화를 오랫동안 보지 않다가 두 번을 연속으로 쉬지 않고 보았는데, 교차 편집으로 인해 이해가 조금 힘들었던 점도 있었지만 무엇보다 그녀들의 삶을 이해하고 싶었던 점이 크다. 그런데 쉽진 않았다. 왜 그녀들은 불안해 하고 주저앉아 울고 자살하려 하고 그러다가는 다시 아무렇지 않은 척을 하는 거지? 처음 볼 때는 이해하고자 했고 두 번째 볼 때는 조금은 이해할 수 있었고 안타까운 마음이 들었다. 당분간 또 볼 용기는 나지 않는다. 또 보게 된다면 그땐 행간의 더 깊은 곳을 들여다볼 것이다. '왜'가 아니라 '어떻게'를 맨앞에 둔 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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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래된 리뷰] <종이 달>


한 평범한 가정 주부의 기막힌 일탈, 횡령으로 방탕한 생활을 하며 밀회를 즐긴다. 그건 일본 잃어버린 10년의 변주다. ⓒ영화사 오원



일본의 고도성장기와 버블경제기는 일본뿐만 아니라 전 세계적으로도 많은 영향을 끼친 유명한 키워드다. 특히 1990년대 일본의 '잃어버린 10년' 버블붕괴기는 현대 일본을 이야기하는 데 절대 빼놓을 수 없는 시기이다. 2000년대에도 나아질 또는 예전으로 돌아갈 기미를 보이지 않아 '잃어버린 20년'으로 통용되기도 하는 바, 참으로 많은 콘텐츠에서 다양하게 변주되었다. 


일본이 세계 최고의 경제대국으로 발돋움하고 그 지위를 굳히자마자 앓게 된 숙명적 병이라고 해도 틀린 말이 아닐 것이다. 그 병은 나라에서 사회로 가정으로 개인으로 전염되었고, 결국 최종적으로 개개인들이 뒤짚어쓰다시피 했다. 많은 사회파 소설과 다양한 장르의 영화에서 그 모습을 볼 수 있다. 


걸작 소설로 회자되는 작품을 영화화한 <종이 달>은 드라마를 기본으로 한 심리와 상황적 서스펜스 장르를 앞세워 숨막히는 현실감을 선사한다. 1990년대 중반을 배경으로, 잃어버린 10년의 진중한 변주가 엿보인다. 그런 한편 지극히 개인적인 요소도 가미해 소설과 영화만이 가지는 예술적 특성의 발현도 만끽할 수 있다. 


일본 버블붕괴기의 변주


이 영화는 시종일관 불안하다. 리카의 삶이 불안하고, 보고 있는 내가 불안하며, 이 세계까지 불안해 보인다. ⓒ영화사 오원



그리 모자를 것 없는 가정에서 평범한 가정주부로 살아가던 리카(미야자와 리에 분)는 우연한 기회에 별 생각 없이 지원해 파트타임으로 일하게 된 은행에서 어느새 4년차 계약직원이 되었다. 어느 날 외근을 마치고 퇴근하던 중 충동적으로 화장품을 사게 되는데 만 엔이 부족하길래 고객의 예금에서 꺼내 쓰고 나중에 채워놓는다. 채워놨으니 괜찮다고 생각했을 테다. 이 한 번의 행위가 시작이었으니...


이번에도 어느 날 외근을 마치고 퇴근하던 중이었다. 껄끄럽지만 대형 고객의 손자 코타와 마주친다. 일전에 집에 찾아 갔다가 도움 아닌 도움을 받은 적이 있었다. 리카의 충동은 한 발 더 나아간다. 코타와의 밀회가 시작되는 것이다. 한편 리카의 남편은 상하이로 장기출장을 가는데, 리카는 코타와의 밀회를 계속하면서 홀로 남는다. 그리고 코타가 대학등록금을 내기 위해 대부업체에서 대출을 받았다는 걸 알게 되는데...


그를 위해 리카의 충동은 절정으로 치닫는다. 대형 고객의 예금에 손을 댄 것이다. 이전에 잠깐 쓰고 채워놓은 만 엔 정도가 아닌, 200만 엔의 거금이다. 당장 채워놓을 생각도 없고 그럴 능력도 없다. 그런데 그녀는 오히려 더 많은 고객 예금에 손을 대는 게 아닌가? 엄청난 돈을 쓰는 호화로운 생활에 취해버린 것 같다. 그녀의 앞날은 어떨까.


1990년대 중반 일본, 가정주부 출신, 은행, 대형 고객, 횡령, 밀회, 자유. 영화 <종이 달>을 형성하는 키워드들이다. 동일선상의 층위라고 할 순 없지만, 1990년대 일본 버블붕괴기의 여러 변주들이라고 할 수 있겠다. 여기에서 횡령과 밀회와 자유의 상관 관계에도 주목할 필요가 있다. 사회적 요소와 개인적 요소를 합리적으로 이어주는 데 큰 역할을 하기 때문이다. 


횡령에 의한 호화생활, 그 모든 게 신기루이자 가짜


제목 '종이달'은 신기루이자 가짜의 상징이다. 리카가 횡령으로 호화생활을 하고 밀회를 즐기는 게 모두 그렇다는 것. 그녀의 무표정한 얼굴을 보라. ⓒ영화사 오원



뭐니뭐니 해도 영화의 중심엔 리카의 횡령이 있다. 그녀가 상대하는 대형고객들은 망령든 일본 사회가 흩뿌린 마지막 행운을 움켜쥔 운좋은 이들이라고 할 수 있다. 그들은 다름 아닌 버블경제의 수혜자들이다. 그들은 버블경제가 곤두박칠 치기 직전 땅값과 주가가 폭등할 때 한몫 챙겼을 것이다. 이후 모두가 허덕일 때 홀로 자가증식했고 은행의 최대고객이 되었다. 


리카가 그들의 예금을 빼돌려 내연남과 함께 분수에 맞지 않은 호화 생활을 한 건, 그러면서도 그들의 대한 죄책감 하나 가지지 않았던 건, 그들이 아닌 버블경제가 낳은 '버블'이라는 쓰레기를 조롱하며 그 또한 언젠가 사라질 신기루이거나 이미 진짜 아닌 가짜라고 말하고 있는 것이다. 그야말로 통렬한 비판이다. 


그렇지만, 리카는 달리 말한다. 왜 횡령을 일삼았냐는 질문에 그녀는 '자유'를 말하는 것이다. 물론 그 앞에 '가짜로서의'라는 수식어를 달았다. 그녀 입으로 직접 대형고객들의 예금을 빼돌려 호화 생활을 한 게 전부 '가짜로서의 자유'를 만끽한 것이라고 말한다. 그 돈 모두 버블에 지나지 않은 신기루라고 못을 박고 있는 것이다. 


리카는 잘 알고 있었던 듯하다. 너무나도 당연하게 빼돌린 돈으로 호화 생활을 하면서도 종종 보이는 그녀의 공허한 표정은 앞으로 다가올 예정된 비극을 암시한다. 그녀의 앞날은 어찌될 것인가. 죗값을 달게 받을까. 그건 이 변주의 정석적인 마무리가 될 것이다. 하지만, 만약 죗값을 받지 않는다면 그건 이 변주의 훌륭한 마무리가 될 것이다. 일본은 '잃어버린 20년'으로 죗값을 받고 있지만, 정작 버블을 일으킨 당사자들은 죗값을 받기는커녕 떵떵거리며 잘 살고 있을 것이기 때문이다. 


차원을 달리하는, 나라를 이끄는 이들의 무감각


'가짜'와 '자유'를 운운하는 그녀의 횡령범죄, 진짜 문제는 그리고 영화가 진짜 말하고자 하는 건 나라를 그 꼴로 만든 이들의 무능력과 무감각과 무탈함일 것이다. ⓒ영화사 오원



시대의 소시민이라 할 수 있는 평범한 가정주부 출신의 리카가 벌인 희대의 범죄 행각은, 그 평범함이 주는 무감각만큼 불쾌하고 불안하고 무섭기까지 하다. 횡령은 그 어느 누구라도 실행 가능한 범죄이며, 그 누구라도 생각할 수 있는 범죄다. 무엇보다 한 번 시작하면 헤어나오기 힘들다. 부자의 돈이라며 자기합리화하고, 다시 채워넣으면 된다고 자기최면을 건다. 


더 큰 문제이자 더 불쾌하고 불안하고 무섭게 다가오는 건, 나라를 이끄는 이들의 무감각이다. 횡령을 비롯한 그들의 범죄는 전국민 누구나 알게 되어 공론화 되지만, 전국민 누구도 그 자세한 사항과 비하인드 스토리와 이후의 일들을 알지 못한다. 회자되고 비난받고 역사에 그 이름이 남을지 모르지만, 정작 그들 자신의 삶은 이전과 큰 변화가 없을 것이다. 소시민의 평범한 범죄가 주는 소름과는 차원을 달리하는, 진정한 범죄가 아닌가. 


일본의 버블붕괴, 한국의 IMF사태, 미국의 금융위기와 같은 초국가적 경제 위기는 모두 나라를 이끄는 이들의 비상식적이고 의도된 무감각에서 비롯되었다. 거기에 비하면 리카의 '자유'와 '가짜' 운운하는 횡령 범죄는 비록 그 평범함 때문에 더 깊숙이 와 닿아 더 치를 떨고 지켜보게 되지만, 그럼에도 차라리 귀엽다고 하겠다. 한편, 리카가 말하는 자유와 가짜가 나라를 위기에 빠뜨린 이들에게 던지는 말이니 만큼 아니러니하다 하겠다. 


영화를 보는 내내 '나라면 어떻게 했을까' 계속 생각했다. 범죄를 저지르는 건 한순간이기에 '나라면 이렇게 했을 것이다'라는 건 통용되지 않을 것이다. 그 이후에 해당된다. 돈을 채워놓지 않는 한 반드시 들통 나게 되어 있다. 그렇지만 채워놓을 마음도 없고 능력도 없으니, 결국 들통 난 이후에 해당될 것이다. 죗값을 받을까? 도망갈까? 여기에서의 선택은 보다 개인적이고 예술적인 영역인 바, 도망을 택하겠다. 리카는 어떻게 했을까? 당신이라면 어떻게 했을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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冊으로 策하다. 책으로 일을 꾸미거나 꾀하다. 책으로 세상을 바꿔 보겠습니다. singenv@naver.com Since 2013.4.16




[오래된 리뷰] <클로저>


오랫동안 벼려온 영화 <클로저>. 머리가 커서야 비로소 그 진면목을 알아볼 수 있었다. ⓒ㈜퍼스트런



10여 년 전, 친구의 추천으로 로맨스 영화 한 편을 봤다. 그냥저냥 흔한 로맨스가 아니라고, '진짜 사랑'이 뭔지 생각하게 해줄 거라고, 했던 것 같다. 당시 영화에 막 빠지기 시작해 주로 대중적인 영화를 많이 봤던 나로서는 도무지 이해할 수 없는 영화였다. 당연히 재미는 없었고 결국 기억에 남지 않게 되었다. 다만, 뭔지 모를 찜찜한 여운은 남아 있었다. 


10년 전에는 끝까지 보지 못했었는데 몇 년 전에 한 번 더 볼 기회가 있었다. 그런데 그때도 재밌게 보진 못했던 바, 개인적으로 소설 <위대한 개츠비>와 겹친다. 위대한 소설이라 일컬어지는 <위대한 개츠비>를 나는, 10년 넘게 3번에 걸쳐 읽어내지 못하고 2~3년 전쯤 일사천리로 읽었다. 머리가 커야 이해하고 읽어낼 수 있는 소설인듯, 영화 <클로저>도 나에겐 그런 존재가 아닐까 생각해본다. 


재개봉 열풍의 끝자락 얼마전 12년 만에 재개봉한 영화 <클로저>, 삼수 끝에 비로소 이해하며 분석하며 재미있고 의미있게 볼 수 있었다. 30대는 되어야 볼 수 있을 것 같은 사랑 이야기 <클로저>는, 사실 사랑을 포함한 인간과 인간에 대한 이야기이기 때문에 어렵기 그지 없다. 그래서 이 영화를 다른 각도로 접근할 필요도 있다. 


얄팍한 인간 관계를 사랑으로 들여다보다


겉으로 보기엔, 별 내용 없고 어디에서나 볼 수 있는 삼류 로맨스 영화인 것 같다. 하지만 들여다보면 일류다. ⓒ㈜퍼스트런



수많은 사람들이 출근하는 런던 도심의 아침, 댄(주드 로 분)과 앨리스(나탈리 포트만 분)는 첫눈에 반한다. 앨리스가 댄에게 던진 한 마디 '안녕, 낯선 사람'은 이 운명적인 우연 또는 우연적인 운명의 상징이자 시작이다. 댄은 소설가가 꿈인 신문사 부고 기자이고, 앨리스는 뉴욕에서 온 스트립댄서다. 


앨리스의 삶을 소재로 한 소설로 드디어 데뷔를 한 댄, 책 프로필 사진을 찍기 위해 찾은 사진작가 안나(줄리아 로버츠 분)에게 강렬하게 대쉬한다. 그런 댄이 싫지만은 않은 듯하지만 앨리스가 있다는 사실을 알고는 멀리하려 한다. 그러곤 그런 안나를 골탕먹이고자 댄이 음란채팅방에서 안나 행세를 해 오프라인 만남까지 성사한 래리(클라이브 오웬 분)와 연인 관계로 발전한다. 


'낯선 사람'이라는 타이틀로 전시회를 연 안나, 댄을 초대한다. 당연히 연인 래리와 댄의 연인 앨리스도 함께 있다. 그럼에도 댄과 안나는 이 전시회를 기점으로 내연 관계로 빠져든다. 이후 안나와 래리는 결혼을 했고 댄과 앨리스는 동거를 시작했다. 1년이라는 시간이 지나, 결국 이들은 파국을 향해 치닫게 되는데...


지극히 우연히 만나 연인 관계, 결혼 관계로까지 발전한 댄과 앨리스, 안나와 래리. 하지만 그만큼 우연히 만나 내연 관계로 발전한 댄과 안나도 있다. 그렇다고 래리와 앨리스도 완전히 아무런 관계가 없는 건 아니다. <클로저>는 이처럼 우연과 낯섬으로 점철된 얄팍한 인간 관계를 사랑의 관점으로 들여다보았다. '사랑'은 수단이고 '관계'과 목적이라 하겠다. 


현대판 <졸업>, 영화 <클로저>


마이크 니콜스 감독은 <졸업>이라는 희대의 명작을 50년 전에 내놓았다. 우린 <클로저>에서 <졸업>을 느낄 수 있다. ⓒ㈜퍼스트런



<클로저>는 2014년에 작고한 마이크 니콜스 감독의 살아생전 마지막에서 두 번째 작품이다. 그는 자그마치 50년 전 <졸업>이라는 20세기 최고의 영화를 데뷔 후 불과 두 번째에 찍어냈다. 불안하고 흔들리는 청춘의 일탈과 허무를 세련되고 설득력 있게 표현한 명작으로, 일반적 로맨스 영화와는 차원이 다른 결을 보여주었다. 


우리는 <졸업>에서 두 남녀 벤자민과 엘레인이 결혼식장에서 도망치는 명장면을 볼 수 있는데, 그 후 버스에서 보이는 두 남녀의 불안과 허무와 걱정과 허탈함이 뒤섞인 표정에서는 영화사에 길이 남을 인간 심리의 정면을 볼 수 있다. 35여 년이 흐른 후 우리는 <클로저>에서 어김없이 순간이 주는 사랑의 허무를 엿볼 수 있다. 


<클로저>는 현대판 <졸업>이라 해도 과언이 아닌 것이다. '진짜 사랑'일 거라 생각하고 순간의 선택으로 그 상대에 자신을 내던지는 벤자민. 댄, 앨리스, 안나, 래리는 벤자민의 후예와 다름 없다. 과연 그게 진짜 사랑일까? 많은 세월이 흘러 사랑도 진보해야 할 것 같지만, 이들의 행태를 들여다보면 사랑은 퇴보한 게 분명해 보이기까지 한다. 


인간은 '미지(未知)'를 두려워한다. 우리가 가장 알 수 없는 죽음을 가장 두려워하는 것처럼 말이다. 그런 한편, '미지'에게 끌리는 습성도 있다. 호기심의 발동이다. 그런 면에서 이 영화는 '낯선 사람'에게 끌리는 인간의 천성을 적나라하게 보여준다 하겠다. 그러며 질문을 던진다. 그래서 남는 게 뭐지? 계속 낯선 사람에게 옮겨다닐 것인가? 


로맨스 영화의 탈을 쓴, 인간 심리와 관계의 명작


이 영화가 명작인 이유는 로맨스와 사랑에 있지 않다. 그걸 수단으로 하는 인간 관계와 심리에 있다. ⓒ㈜퍼스트런



나라고 이 명제에서 자유롭지 못한다. 누구라도 자유로울 수 없을 것이다. 가깝고 익숙한 것에 편안함을 느끼며 한없이 머무르고 싶어 하는 습성도, 멀고 낯선 것에 희열을 느끼며 한없이 떠나고 싶어 하는 습성도, 인간은 모두 다 지니고 있다. 지니고 있을 뿐만 아니라 적극적으로 실천에 옮기고자 한다. 


고인 물은 썩는다고 했다. 그렇다고 한없이 흘러가는 물은 무한정의 좋은 점만 가지고 있는가? <클로저>는 그래서 고인 물을 찬성하고 흘러가는 물을 비난하지 않는다. 흘러가는 물이 고일 때 썩는 건 부정할 수 없는 사실이니까. 그러면 흘러가게 놔둬야 할까. 영화는 그 또한 무자비한 거짓만이 판치는 혼란이 있을 거라 말한다. 


솔직히 어떻게 해야 할지 알지 못하겠다. 영화를 보고는, 어떻게 하라는 건지 조금 짜증도 난다. 로맨스 영화의 탈을 쓰고 인간 천성의 낱낱을 적나라하게 까발려 놓고는 그 어느 쪽도 정답이 될 수 없다고 말하는, 이 지독한 인간 심리와 관계의 명작을 어떤 시각으로 바라봐야 할지 알지 못하겠다. 


<졸업>을 보고 느낀 찜찜함과 내지른 탄성이 <클로저>를 보고도 느껴지고 내질러진다. 내 안에도 이들의 가벼움이 있겠지만, 이들처럼 가볍게 살고 싶진 않다. 그렇지만, 감정이입을 하지 않고 객관적으로 영화만을 볼 때 희대의 명작이라 해도 과찬이 아닐 듯하다. 문제는, 감정이입을 하지 않고 욕을 하지 않고 볼 도리가 없다는 것이다. 다시는 보고 싶은 않은 네 주인공이지만, 주기적으로 다시 보고 싶어질 것 같은 영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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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래된 리뷰] <스텝포드 와이프>


과격한 프로그램으로 문제를 일으켜 해고 당하는 조안나, 그녀가 가족과 함께 간 스텝포드. 그곳엔 현모양처의 표본들이 즐비하다. ⓒCJ 엔터테인먼트



잘나가는 방송국 CEO이자 방송제작자 조안나 에버트(니콜 키드먼 분), 그녀는 예측불허의 자유인이다. 이번에도 역시 파격적인 페미니즘 프로그램으로 센세이션을 일으키며 크게 성공할 것 같다. 그런데 수많은 사람들을 초청해 열린 성대한 TV쇼 소개 자리에 한 남자가 출현해 총으로 위협한다. 조안나가 만든 페미니즘 프로그램의 피해자라는 것이었다. 


조안나는 곧 해고되고 정신병원으로 가게 되는데, 남편이 스텝포드라는 곳으로 이주해 새로운 삶을 시작하자고 제안한다. 그곳은 미국 북동부 코네티컷 교외에 있었는데, 평온하기 이를 데 없는 분위기에 친절한 사람들만 사는 것 같았다. 그런데 조안나가 보기에 그곳은 이상했다. 하나 같이 바비인형처럼 차려 입은 금발머리 여자들이 현모양처의 표본처럼 행동하고 있는 것이었다. 


어느 파티 자리에서 사단이 난다. 한 여자가 춤을 추다 말고 쓰러진 것이다. 조안나는 그녀를 당장 병원으로 데려가야 한다고 말하지만, 마을 사람들은 아무런 반응 없이 그저 괜찮다고만 할 뿐이다. 그런데 쓰러진 여자의 행동이 뭔가 이상하다. 사람이 아닌 로봇 같은 움직임. 그녀의 정체는 무엇일까. 그들은 왜 아무런 행동을 취하지 않았을까. 그리고, 이 마을은?


남자는 이래도 되고, 여자는 이래야 한다?


하나같이 바비인형처럼 차려입고 금발을 한 그곳의 그녀들, 뭔가 이상하다... ⓒCJ 엔터테인먼트



영화 <스텝포드 와이프>는 시작과 동시에 '페미니즘'을 흘린다. 이 영화가 페미니즘을 말하고자 한다는 걸 초장부터 알리고 있는 것이다. 그리고 얼마 지나지 않아 주인공이 페미니스트라 할 수 있는 조안나라는 것과 무대가 스텝포드라는 걸 알린다. 그곳에 바비인형처럼 차려 입은 금발머리 현모양처들이 즐비하다는 건, 조안나와의 갈등이 심화될 거라는 영화의 앞날을 예고한다. 


'남자는 이래야 한다'는 전통과 '여자는 이래야 한다'는 전통은 상충하지 않고 조화를 이룬다. 이처럼 서로가 서로를 구속하는 형국이니 얼핏 보기엔 평등한 것 같다. 그런데 한 발만 들어가면 명백한 차원의 다름을 볼 수 있다. '남자는 이래도 된다'는 말은 있지만 '여자는 이래도 된다'는 말은 없고, 무엇보다 여자의 남자를 향한 순종과 복종이 남녀 조화의 주를 이루기 때문이다. 


하나 같이 바비인형 차림으로 차려 입은 금발머리 여자들의 모습은 '여자는 이래야 한다'의 정본과도 같다. 남자들이 원하는 모습 말이다. 겉모습에 그치지 않고 그녀들은 남편을 극진히 모신다. 완벽한 집안일은 물론 남편이 시키는 사소한 일 하나도 군말 없이 하며 남편의 캐디 역할도 한다. 이쯤 되면 아내가 아니라 비서 또는 하녀라고 해도 틀린 말이 아닐 것이다. 


남성 우월 사회는 파시즘일 수 있다


그녀들의 일방적인 모습은 남성 우월 사회의 파시즘을 역설한다. 그곳은 이상한 곳이 아니라 틀린 곳이다. ⓒCJ 엔터테인먼트



남편은 방송국 부사장, 자신은 방송국 CEO. 조안나는 단순히 잘나가는 방송인일뿐 아니라 남편보다 위에 군림하는 여성이다. 그녀는 그 사실을 아주 잘 알거니와 자랑스럽게 생각한다. 그러다 보니 아내가 남편을 모시는 모습을 용납할 수 없다. 더욱이 그녀는 갈색 짧은 머리에 검은색 계열의 옷을 주로 입고 다니니 만큼 바비인형 차림의 금발 머리도 용납할 수 없다. 


반면, 조안나의 남편 월터는 스텝포드에서 신세계를 경험한다. 남성 우월 사회에서 우월한 남성으로서의 지위를 한껏 드러내지 못한 자신을 스텝포드에서 드러내고자, 남성들만의 모임에 참석하고 조안나에겐 홧김에 이혼을 통보하기도 한다. 마을 전체가 똑같이 완벽한 남성 우월의 모습을 보이고 있는 이곳에 사실 조안나와 월터는 완벽한 이방인이다. 그들이 느끼기엔 이곳은 '이상한 곳'이고 '틀린 곳'일 것이다. 


그렇지만 파시즘적인 공동체에서 구성원 한두 명이 할 수 있는 일은 따로 없다. 그저 전체의 생각을 따르는 수밖에 없다. 그런 면에서 이 영화가 보여주는 가장 큰 깨달음이자 경고는, 남성 우월 사회가 파시즘적일 수 있다는 사실이다. '남성 우월'이라는 개념으로 개인 생활 전반을 통제하는 것이다. 


더욱 끔찍한 건, 여기서 여성의 의미가 퇴색되는 것에 더해 여성이라는 개인 또한 통제 된다는 점이다. 남성과 여성에서 여성만 퇴색되며, 통제되는 것도 남성이 아닌 여성뿐이다. 조안나와 월터가 힐링의 유토피아이자 파라다이스로 찾은 스텝포드가 그 어느 곳보다 비인간적인 디스토피아로 느껴지고 다가오는 건 이 사실을 깨달을 때다. 물론 이 사실을 깨닫지 못하면 유토피아일 거다. 끔찍하기 짝이 없는 유토피아. 


극단적으로 치닫지 않았으면...


영화는 극단적이고 과격한 스토리로 중무장한 채 페미니즘을 외치고 남성 우월 사회에 경종을 날린다. 조금 자제가 필요해보였다. ⓒCJ 엔터테인먼트



영화는 이처럼 보여주고 또 말하고자 하는 바를 과격하게 보여준다. 과격한 스토리와 장면으로 보여주는 게 아니라, 투박하기 짝이 없이 직접적으로 보여준다는 뜻이다. 우린 영화를 본지 얼마 지나지 않아 스텝포드의 모든 여성들이 '로봇'이라는 사실을 알게 된다. 로봇처럼 자신의 생각 없이 명령에 따라 일사분란하게 동일한 행동을 한다는 비유와 상징의 개념이 아니라, 진짜 로봇이라는 사실. 


어떻게 그 많은 이들이 로봇이 될 수 있었는지, 또는 원래 로봇으로 만들어졌는지는 일단 알 길이 없다. 맥락상 사람이었던 이들을 로봇으로 만든 것 같은데, 영화의 전반적 만듦새만을 들여다볼 때 충분히 가능해 보인다. 영화가 말하려는 주제를 향해 그저 일직선으로 달려갈 뿐인 스토리에 그것들은 그저 수단일 뿐이기 때문이다. 


조안나처럼 능력있는 여성들을 데려와 로봇으로 개조해 충실한 현모양처로 살아가게 한다는 것. 이 모습은 이전까지 '당하고' 살았던 남자들이 일종의 복수를 하는 형국으로 비친다. 그 자체가 그들이 남성 우월 사회에서 왔다는 방증이다. 남녀 평등 사회였다면, 실력이 아닌 '성'의 차이로 비교할리가 없기 때문이다. 


영화는 극단적인 시작과 과정을 거쳐 끝까지 극단적으로 마무리한다. 선명하고 명명백백한 것과 극단적인 건 비슷한 듯하지만 완연히 다른 것. 영화는 자칫 여자와 남자를 홍해 가르듯 가를 조짐을 보인다. 그건 높지 않은 영화의 만듦새에서 기인한 게 클 것이다. 러닝타임도 평균보다 30분 정도 짧았던 점을 감안할 때 충분히 더 촘촘히 보여주어 극단적이 아닌 선명함을 선사할 수 있었을 것이다. 그나마 조안나 혼자가 아닌 남편 월터가 끝까지 함께 해준 점이 눈에 띈다. 


우리 사회는 당연히 남녀 평등 사회가 아니다. 여권이 신장되었다고 하지만 평등과는 하등 거리가 멀다. 그렇다고 스텝포드처럼 기괴한 사회도 아니라고 생각한다. 과도기 또는 그 중간 어디라고 해도 될까. 아니, 과도기여야 하겠다. 그래야 언젠가는 평등이 실현된다는 뜻일 테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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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래된 리뷰] <그녀>


인공지능과 사랑에 빠진 인간, 그런데 제목이 인공지능 <그녀>인 이유는 뭘까? ⓒ워너브라더스



'4차 산업혁명'이 새로운 시대의 화두다. 인공지능, 로봇기술, 생명과학이 주도하는 차세대 산업혁명, 100여 년을 주기로 일어난 산업혁명이 4차 때는 50년 만에 찾아왔다. '알파고'는 그 상징 중에 하나가 되었는데, 단순히 인간의 능력을 앞서는 것 뿐만 아니라 인간을 대체할 수 있다는 얘기다. 


사실 로봇이나 인공지능이 인간을 대체하기 이전에 인간이 인간을 대체해왔다. 참으로 많은 분야에서 인간이 인간을 대신해 왔는데, '대리사회' '대체시대'라고 명명해도 되지 않을까 싶다. 누구도 대신할 수 없을 것 같은 각각의 인간이 가지는 고유한 감정도 대신해주는 것이다. 이 시대가, 이 사회가, 유토피아인지, 디스토피아인지. 


근 미래를 배경으로 한 대체불가 로맨스 영화 <그녀>는 여자 인공지능과 사랑에 빠진 한 인간 남자의 이야기를 주로 한다. 그러기 위해선 인간도 인간이지만 인공지능이 '감정'을 지녀야 한다. 나아가 상대방에게 감정을 전달해야 한다. 사랑은 혼자 할 수 없는 것이기에. 어찌 가능할까. 그런데 영화는 나름의 방식으로 기가 막히게 그려낸다. 


4차 산업혁명 시대의 신개념 사랑 방식


인공지능 그녀를 사랑하는 인간 테오도르는 너무나도 행복해 보인다. 근미래 누구에게나 도래할 수 있는 사랑의 모습이 아닐까. ⓒ워너브라더스



남들 편지를 대신 써주는 회사에서 일하는 테오도르(호아킨 피닉스 분), 그의 편지들은 하나 같이 의뢰인과 대상과 상황에 완벽히 부합하는 아름다운 글이다. 현실은 아내 캐서린(루니 마라 분)과 이혼을 준비하며 별거 중. 그렇지만 벌써 일 년이 넘었음에도 여전히 캐서린과의 좋은 한 때가 쉼 없이 그를 괴롭힌다. 새로운 사람을 만나봐도 별 다른 진전이 없다. 마냥 우울하게 방황할 뿐이다. 


테오도르는 호기심으로 최신 인공지능 OS를 구입한다. 이왕이면 여자로. 그저 말동무가 필요했을 거다. 심심하거나 마음 정리가 안 될 때면 언제나 불러내 자기 얘기나 들어줄. 그런데 사만다(스칼렛 요한슨 목소리)라는 이름의 이 OS, 심상치가 않다. 목소리부터가 사람을 끄는 마력이 있고, 무엇보다 '리얼'하다. 금방 친해진다. 


기쁠 때나 슬플 때나 괴로울 때나, 언제나 불러내 얘기할 수 있거니와 아는 것이 많아 어떤 이야기도 잘 통하고 자신의 마음을 잘 다독여주기도 하고 심지어 '본인'의 이야기도 건네준다. 분명 그녀는 인간이 아니지만, 그녀와 사랑에 빠진 게 하등 이상하게 느껴지지 않는다. 그녀는 훌륭하게 인간을 '대체'할 수 있을까? 테오도르는 그녀와의 '사랑'을 잘 지속해나갈 수 있을까? 


그야말로 4차 산업혁명에 걸맞는, 아니 상징하는 신개념 사랑 방식이다. 사람만의, 나아가 생물만의 전유물이라고 생각했던 '사랑'이라는 감정의 궁극체가, 인간이 창조해 낸 비생물에 의해서 현실화된 것이다. 그것도 결정적으로 인간의 일방적인 사랑이 아닌 쌍방 사랑의 모습으로. 이들의 사랑이 너무 예뻐서 지나치기 쉬울 충격이다. 우린 시선을 선택해야 한다. 이들의 '예쁜 사랑'이 우선인지, '충격'이 우선인지. 


인간과 인공지능의 사랑, 충격과 공포


나에게 이들의 예쁜 사랑은 충격과 공포로 다가온다. 아직은 인간들의 사랑을 원한다. ⓒ워너브라더스



감독의 의도는 다분히 이들의 '예쁜 사랑'인 듯하다. 디지털의 최정점에 이른 듯한 전체적 시대상과 사회 모습과 분위기와는 정반대인 듯한 아날로그적 감정선이 영화 전체를 지배한다. 거기에 가장 크게 기여하는 게 영상과 색인데, 배경은 파스텔 톤으로 채도를 높이려 했고 인물은 원색으로 명도를 높이려 한 듯하다. 


거기에 무엇보다 테오도르와 사만다의 대화, 테오도르의 표정, 테오도르의 과거 회상 등의 아날로그에 집중함으로써 완벽한 4차 산업혁명을 이룩한 디지털 사회라는 걸 최대한 알아차리지 못하게 했다. 전반에 깔린 당연한 디지털에 시선이 가는 대신, 테오도르의 감정에 집중하게 된 것이다. 


반면 나는 이들의 '예쁜 사랑'이 오히려 '충격'으로 다가왔다. '씁쓸함'도 함께. 시대가 시대인 만큼, 이런 생각이 굉장히 보수적으로 비춰질 수 있겠다. 인공지능이 인간 삶과 사회를 전반적으로 지배 혹은 함께 하는 시대에, 인간이 인공지능과 사랑에 빠지는 게 전혀 이상할 것 없지 않은가. 문제는 인공지능이 인간이 인간일 수 있는 궁극의 감정을 대신할 수 있게 된 점이다. 인간의 노동력이 아닌, 인간 자체를 대신하는 것이다.


제목이 '그녀'인 만큼, 영화가 부각하는 건 인간이 아닌 인공지능이다. 그녀의 변화, 발전, 진화 등. 그렇지만 나에겐 인공지능이 아닌 인간이 계속 보였다. 심지어 인공지능인 그녀가 아닌 인간이 되고 싶어하는 그녀가 보였다. 인간에게 받은 상처를 인공지능에게서 위로 받는 한 인간의 이기적인 면모도 보였다. 그렇다. 나는 최대한 인간을 보려고 애썼다. 그들의 사랑이 '인간과 인간'이면 좋겠다는 무의식의 발로였다. 그렇지만, 결정적으로 그녀는 인간이 아니니만큼 충격은 계속 배로 돌아올 뿐이다. 


더욱더 충격적으로 다가온 건, 그녀가 '인간'이 되고 싶다고 말한 적이 한 번도 없다는 사실이다. 그녀는 몸을 갖고 싶고, 감정을 지니고 싶다고 말했을 뿐이다. 불가능한 게 없는 그녀의 세계에선 그것이 비단 인간 만을 뜻하는 건 아닐 테다. 어디까지 나아갈지 알 수 없을 정도의 그녀, 그 미지가 주는 충격과 공포는 새롭기까지 하다. 


그럼에도 최고의 영화 <그녀>


이 모든 영화 외적인 논의들을 제쳐두면, <그녀>는 최고의 영화다. 그렇지만 계속 씁쓸함이 남기에, 마음 놓고 또 보긴 싫다. ⓒ워너브라더스



사실 이 영화가 말하고자 하는 바는 명백히 알 수 있다. 현대인의 고독과 외로움과 소통일 것이다. 근 미래가 아니라 현재도 과거에도 우린 똑같이 고독했고 외로웠고 소통의 부족을 느꼈다. 다만, 미래의 우리는 훨씬 더 쉽게 훨씬 더 고도의 비인간 대체자를 찾을 수 있다. 오랜 시간과 공력을 들여 나에게 맞게 대상화하거나 나를 상대에 맞게 타자화할 필요도 없다. 바로 나를 내보일 수 있고 아무 걱정할 필요도 없다. 


아직 우리는 '결국 인간'이라는 불편하지 않은 답을 원한다. 아니, 최소한 나는 그렇다. 그걸 누구보다 잘 아는 감독은 일부러 주체를 인간 '그'가 아닌 인공지능 '그녀'에게 놓고 그녀의 합당한 자가 발전으로 인한 자발적 떠나감으로 인간 그가 결국 인간 그녀에게 돌아갈 수밖에 없는 구도를 만들었다. 여기서 나는 충격이 조금 가시는 대신 '씁쓸함'을 느꼈다. 굉장히 인간적인 씁쓸함인데, 결국 모든 건 헤어지는구나. 


이 모든 논의를 제쳐두면, 아니 오히려 이런 논의들과 함께 할 때 <그녀>는 단연코 최고의 영화다. 우선 이 영화가 '아름답다'는 데에 이견을 달 만한 사람은 많지 않을 것이다. 시각적으로도, 청각적으로도, 그리고 생각적으로도. 그리고 우린 이 영화로 시대와 사회와 우리 자신을 동시에 들여다볼 수 있다. 보는 이에 따라서 깊게도 얇게도 가능하다. 거기에 가보지 못한 미래를 굉장히 현실적으로 살펴볼 수 있다. 무엇보다 그 어디에서도 보지 못한 형태의 사랑을 느낄 수 있다. 


여기에 그치지 않고 이 영화 하나로 진행할 수 있는 논의의 깊이와 총량이 어마어마하다. 이렇게 방점을 찍는 바, 심지어 <그녀>는 주인공인 '그녀'가 언제쯤 모습을 내보일까 하는 기대감을 끝까지 가지게 하여 긴장감이 촉발하는 즐거움까지 선사한다. 이 작은 영화가 파도 파도 끝이 없으니, 이보다 더 좋은 영화를 찾기 힘들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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冊으로 策하다. 책으로 일을 꾸미거나 꾀하다. 책으로 세상을 바꿔 보겠습니다. singenv@naver.com Since 2013.4.16




[오래된 리뷰] <케빈에 대하여>


충격도 이런 충격이 없고, 논란도 이런 논란이 없을 영화 <케빈에 대하여>. ⓒ(주)티캐스트



화려한 붉은 물결의 토마토 축제, 그 한가운데 자유로운 영혼의 여행가 에바(틸다 스윈튼 분)가 있다. 하지만 다음 화면에 그 붉은 물결은 끔찍하게 변한다. 더러운 소굴 같은 집안에서 깬 에바는 누군가에 의해 악의적으로 붉게 칠해진 집과 자동차를 마주한다. 이상하리만치 별 반응 없이 차를 타고 에바가 도착한 곳은 한 여행사, 그녀는 화려한 경력에 걸맞지 않은 말단 자리에 발탁된다. 


신나서 집으로 가려는 찰나 길에서 마주친 중년여자가 "좋은 일이라도 생겼나 보네. 신나 죽겠어?"라고 말하더니 대뜸 에바의 뺨을 후려치고는 지옥에나 떨어져 버리라고 악담하면서 가버린다. 지나가던 이가 경찰에 신고한다는 걸 만류하며 에바는 "아니에요. 제 잘못이에요."라고 말하곤 가버린다. 대체 무슨 일인가?


중간 중간 알 길 없는 장면 장면들이 지나간다. 건물을 앞에 두고 수많은 사람들이 모여 울부짖고 있다. 반면 에바는 홀로 그 앞에서 멍하니 지켜볼 뿐. 한편, 에바는 교도소에 갇힌 아들의 면회를 간다. 그런데 엄마와 아들은 말을 하지 않는다. 그들 사이에 무슨 일이 있었던 듯? 대략 유추해보면, 엄마와 아들 사이에 무슨 일이 있었고 아들이 무슨 짓을 저질러 교도소에 갇혔으며 엄마는 그때문에 제대로 된 삶을 영위할 수 없게 된 게 아닐까. 가슴 졸이며 궁금하지 않을 수 없다. 영화는 비로소 시작된다. 


'모성'은 당연한 것인가?


세상엔 당연하다고 생각하는 것들이 많은데 그중 하나가 '모성'이다. 이 영화는 모성이 당연한 것인지 충격적으로 묻는다. ⓒ(주)티캐스트



영화 <케빈에 대하여>는 우리가 당연하게 생각하는 '모성'의 전모를 날카롭게 때론 섬뜩하고 끔찍하게 드러낸다. 자식을 향한 엄마의 무조건적인 사랑은 그 어느 상황에서도 가능한가? 반드시 가능해야 하는가? 반론은커녕 물음조차 쉽지 않은 명제인 '모성의 당연함'은 이 영화에서 철저히 해부되고 깨어진다. 


다 크고 나서 엄마한테 들었던 말이 떠오른다. '너 아기일 때 너무 많이 울었어. 정말 힘들었다.' 아기라면 으레 다 집 떠나가라 울어야 정상 아닌가 싶은데, 애초에 결혼은 물론 아기를 원하지 않았던 자유로운 영혼 에바에게는 그렇지 않았던 듯하다. 그녀는 아기 케빈의 울음소리가 세상에서 가장 싫었고, 차라리 공사장 소음 소리가 편했다. 그녀는 애초에 엄마가 되기 싫었고, 스스로 엄마로서의 자격을 박탈해 버린 것이다.


손바닥도 마주쳐야 소리가 나는 법, 케빈은 갓난 아기를 벗어나자 엄마를 지극히 적대적으로 대하며 말을 듣지 않는다. 에바는 당연히 케빈이 남자아이라면 다 가지고 있을 성향을 보인다고 생각한다. 한편으론 케빈이 남들보다 떨어지는 게 아닌가 걱정도 되고. 그렇지만, 그보다 더 커서도 달라지지 않는다. 오히려 엄마'만'을 향한 적대심이 더 커진 것 같다. 어느 날, 에바는 케빈이 굉장히 똑똑하다는 걸 알게 된다.


노벨문학상 수상자 도레스 레싱의 <다섯째 아이>의 현대판이 아닐까 싶다. 전통으로의 회기를 선택해 대가족화를 밀고 나가는 어느 부모, 그렇게 태어난 일가족을 나락의 구렁텅이로 빠뜨린 다섯째 아이 벤, 이들의 처절하고 끔찍하고 슬픈 이야기다. 이 소설이 시대, 선택, 운명 등의 문학적 장치들을 정교하게 끌어들였다면, 이 영화는 지극히 개인적인 이유와 심리 등의 현실적 장치들을 집요하게 끌어들였다. 


비극이 찾아오지 않으면 이상한 일


영화는 내내 비극이 찾아온다. 작은 비극들이 모여 큰 비극이 되는데, 이를 반복한다. 보고 있기가 힘들 정도. ⓒ(주)티캐스트



상황이 이럴진대 비극이 찾아오지 않는 게 이상한 일, 영화에서 크나큰 사건은 3번에 걸쳐 일어 난다. 사실 에바가 엄마가 되고 케빈이 태어난 것 자체가 비극이었을지 모른다. 여하튼 그 비극 중 첫 번째는 영화에서 중요 분기점을 형성하기에 충분했다. 적대의 칼날을 갈고 있던 에바와 케빈 사이에 여동생 실리아가 태어난 것이다. 


케빈이 실리아를 싫어하는 건 어찌 보면 당연한 일. 어느덧 청소년이 된 케빈은 가히 그 똑똑한 머리를 여전히 엄마 에바를 괴롭히는 데 쓴다. 엄마를 직접적으로 괴롭힐 순 없는 노릇이니, 노골적으로 적대적 눈빛이나 행동을 일삼는 건 물론 실리아를 괴롭히는 우회적 타격이나 엄마한테 자위 행위를 들켜도 멈추지 않는 등의 심리적 타격을 일삼는 것이다. 그리고 결국 그 일이 터진다. 


싱크대를 막히게 해서 에바로 하여금 어쩔 수 없이 독극물을 사용하게 만든 후 실비아가 실수로 독극물을 엎어 한 쪽 눈을 실명하게 된 일이다. 겉으론 실비아의 실수, 나아가 에바의 잘못이다. 하지만 에바는 알고 있다. 케빈이 교묘하게 함정을 파놓은 거라는 사실. 그건 에바를 향한 케빈의 처절한 '복수'다. 결국 케빈의 복수는 에바에게 상상조차 하기 싫은 파국을 안긴다. 


영화는 시종일관 에바의 지옥 같은 현실과 지옥보다 더한 강제적 과거 회상, 그리고 에바와 케빈의 적대적 일상만을 보여줄 뿐이다. 에바의 현실은 무덤덤하게, 과거 회상은 몽환적으로, 에바와 케빈의 일상은 사이코틱하게 그린다. 무엇보다 청소년 케빈을 분한 에즈라 밀러의 연기에 기댄 바가 크다. 틸다 스윈튼은 에바 그 자체였다. 


특히, 에바와 케빈의 사이코틱한 일상은 내내 긴장의 연속이다. 분명 잔잔하고 평화롭기까지 한 가족의 모습인데, 잔잔한 물가에 돌멩이 하나가 일으키는 파문이 엄청난 것처럼 이들의 소소한 듯한 티격태격이 섬찟섬찟하다. 그 가중 큰 이유 중 하나가 적나라함에 있을 것이다. 별 것 없는 평범한 것들을 적나라하게 보여줄 때 우린 기괴함을 느낀다. 살얼음판을 걷는 느낌, 언젠가 반드시 큰 일이 있을 것만 같은데 어김없이 큰 일이 일어난다. 생각지도 못한. 


'케빈에 대하여'가 아닌 '에바에 대하여'


이 영화의 주 논란거리는 아마 '케빈'과 '에바'일 거다. 엄마와 자식, 세상에서 가장 가까운 관계에 비극이 들이닥친다면? ⓒ(주)티캐스트



누구의 '잘못'이라고 밝히기가 매우 어렵다. 둘 다 잘못했다고 할 수도 있지만, 그냥 서로 맞지 않았을 뿐이라고 할 수도 있다. 재수가 없었다, 운이 없었다고 치부할 수도 있다는 거다. 하지만, 분명한 건 케빈은 에바와 그녀의 남편 프랭클린의 '선택'이었다는 것. 그들이 조심하지 않았던 못했던, 낳자 낳지 말자 등등 무슨 생각을 했든지 간에 케빈을 낳아 기르기로 한 건 다름 아닌 그들 자신이고 에바 자신이다. 그 이후에 엄마와 자식이 서로 맞지 않는 건 또 다른 문제인 것이다. 


'케빈이 그렇게 된 건 엄마 에바의 사랑이 부족했고 제대로 교육하지 못했기 때문이다'라고 단정 지을 수는 없다. 그 행간엔 어느 누구도 알 수 없는 그들만의 것들이 있었을 테니까. 그렇지만, 적어도 여기서 '엄마는 사랑할 수 없는 아이, 나쁜 아이를 사랑할 수 있는가'라는 프레임을 적용해선 안 된다. 그 자체로 시선은 '사랑할 수 없는 아이, 나쁜 아이'로 간다. 보다 중요한 건 케빈이 아니라 엄마가 아닐까. 그래서 <케빈에 대하여>가 아닌 <에바에 대하여>가 맞는 것 같다. 


많은 논란이 있을 줄 안다. 내 주장은 형성된 사이코패스가 아니라 사이코패스의 형성에 초점을 맞춰야 한다고 말하고 있는 것이니. 그렇다면, 최소한 에바도 사이코패스일 수 있다는 걸 알았으면 한다. 케빈이 갓난 아기였을 때 보인 에바의 행동을 달리 어떻게 설명할 건가. 그 행동은 단지 아기가 싫다는 이유로 행할 수는 없을 것이다. 


최근에 나온 한국소설 <아몬드>는, 감정이 없이 태어난 윤재가 감정이 풍부하고 교육 열정이 투철한 할머니와 엄마의 사랑과 교육을 듬뿍 받아 결국 감정을 배우는 이야기다. 반면 누구나처럼 풍부한 감정을 지닌 채 태어난 곤이는 어릴 때 받은 폭력 등으로 얼룩진 어둠의 기억 때문에 괴로워 한다. 올바른 감정을 지니기 힘들다. 결국 선천적인 건 없다는 거다. 


이 영화와 맞닿는 부분이 있다. 선천적과 후천적. 아마 에바는 케빈이 선천적으로 나쁘고 사랑할 수 없는 아이로 태어났다고 생각했을 거다. 내(에바)가 아닌 네(케빈) 문제인 것이다. 과연 그럴까? 그 자신, 풍부한 감성과 열정적이고 반듯한 이성으로 케빈을 대했다면 당연히 충분히 달라지지 않았을까. 아니 달라지는 게 아니라, 애초에 잘 크지 않았을까. 한없이 안타깝다. 영화 또한 안타까움만 남을 뿐이다. 엄마와 아들의 슬픈 사랑 이야기와 다름 아니다. 그렇지 않고서는 이런 마음이 들 수 없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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