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오래된 리뷰] <한공주>


압도적일 게 없을 것 같은 연출로 그 어느 영화보다 압도적인 힘을 보여주었다. 영화가 갖는 소재도 소재이지만, 그 소재를 어떻게 쓰느냐에 따라 달라질 것이다. ⓒ무비꼴라주



"전 잘못한 게 없는데요."


어른들에게 둘러싸인 한 소녀, 꾹꾹 눌러왔던 말 한마디를 애써 웃음 띤 얼굴로 내뱉는다. 그런데 이내 그녀는 선생님과 전학 수속을 밟으러 다른 학교를 찾는다. 잘못한 게 없다는 그녀가 떠나는 것이다. 명백한 모순이 아닌가, 이 상황은. 무서워서 피하는 건가, 더러워서 피하는 건가. 아직까진 알 수 없다. 그녀의 앞날을 지켜보는 수밖에. 


그녀의 이름은 '한공주', 하필 공주다. 그녀의 시련은 전 인생에 걸쳐 있다. 부모님은 이혼해서 엄마는 다른 이와 살림을 차렸고 아빠는 일 때문에 몇 달에 한 번 볼까 말까이다. 그래도 알바와 학업을 병행하며 씩씩하게 살아가는 그녀, 편의점 사장 아들, 딸과 친하게 지내며 의지도 되어준다. 이겨낼 수 있을 정도의 시련이다. 


알 수 없는 이유로 전학을 가게 된 공주, 분위기가 전과는 완연히 다르다. 뭔가 얼이 빠진 느낌이랄까. 그녀에게 남은 건 오직 음악뿐인 듯하다. 음악 덕분에 친구도 생긴다 또 수영을 배우는 그녀, 이유가 살고 싶어질 때를 대비해서란다. 뭔가 그 사이에 크나큰 일이 있었던 것 같다. 전 학교 담임 선생님 집에서 선생님의 엄마와 지내게 된 공주, 운영하는 마트 일도 도와주며 호감을 얻는다. '다시 시작'할 수 있을 것 같다는 실날 같은 희망을 자신도 모르게 품게 된 공주, 하지만 학교로 찾아온 어른들로부터 도망치는데... 이제 어디로 가야 할까. 왜 도망쳐야 할까. 무슨 일이 있었던 것일까. 


피해자가 도망치는 현실, 이게 현실이다


왜 공주가 도망쳐야 할까, 왜 피해자인 공주가 도망쳐야 하는 것일까, 왜 급기야 공주가 가해자처럼 되어버린 것일까. 우리 모두의 책임이다. ⓒ무비꼴라주


지난 2014년 4월 17일, 세월호가 침몰된 지 하루 뒤에 개봉한 영화 <한공주>는 국민적인 공분을 사며 뛰어난 연출과 연기에 힘입어 흥행과 비평에 성공했다. 독립영화의 영역을 뛰어넘은 것이다. 개인적으로 이 작품을 당시 보지 못한 건, 대략의 내용을 알고서 도저히 볼 용기가 나지 않았던 탓이었다. 또한 그동안 생각해왔던 가해자와 피해자의 뒤바뀐 양상을 또 다른 시각으로 완벽하게 보여준 탓이겠다. 


영화는 가해자가 될 수밖에 없는 피해자의 어쩔 수 없는 상황을 보여주었던 기존의 독립영화론에 일종의 반기를 든다. 그동안 피해자는 세상으로부터 사회로부터 개인으로부터 받은 끔찍한 피해를 '가해자'가 되어 되돌려주려 했다. 아니, 그렇게 할 수밖에 없었다. 다른 방도를 찾을 수 없는, 끊임없이 되풀이 되는 폭력의 뫼비우스 띠. 


이 영화는 어떤가. 공주가 당한 건 끔찍하다 못해 악마적인 행위. 입으로도 손으로도 언급하기 역겨운 43명에 의한 집단 성폭행. 피해자 공주는 어떤가. 홀로 강하게 큰 그녀이지만, 한없이 약한 그녀이기도 하다. 그녀는 가해자가 되기는커녕 도망 치는 것 말고는 할 수 있는 게 아무것도 없다. 


또 다른 가해자들인 가해자들의 부모, 자기 아들 삶을 망가뜨리지 말라는 협박과 호소와 부탁 때문이다. 차라리 공주가 가해자가 되어 그 악마들에게 평생 씻을 수 없는 무엇을 남길 수 있다면, 그러면 내 마음이 덜 아플 것 같다. 하지만 알고 보니 그건 현실에서 불가능한 일이었던 것, 현실은 이렇다. 


끔찍한 와중에 다가오는 포근하고 아련한 감성


그 와중에 포근하고 아련한 감성을 선보인다는 건 거의 믿을 수가 없을 지경이다. 아... 공주가 가엽다. 공주가 하고 싶은 음악을 할 수 있게 도와주고 싶어진다. ⓒ무비꼴라주


이 영화가 대단한 이유는 비단 이것 뿐이 아니다. 마음이 뒤틀리는 공주의 상황을 알게 됨에도 불구하고, 순간순간 지극히 감성적으로 될 수 있다는 데 있다. 그건 공주가 진정 하고 싶었지만 이제 다시는 할 수 없는 '음악'에서 기인된다. 공주가 음악과 함께 일 때 느껴지는 감성은 한없이 포근하고 아련하다. 


이 감성은 <파수꾼>에서 기태가 함께이고 싶었지만 다시는 그럴 수 없는 친구들과의 즐거운 시간, <해에게서 소년에게>에서 시완이 계속되길 원했지만 다시는 그럴 수 없게 된 가족들, <성실한 나라의 앨리스>에서 수남이 열심히 일해서 장만하고 싶었지만 결국 빛으로 사게 된 집과 궤를 같이 한다. 


그렇지만 <한공주>에서 공주가 보여주는 감성은 타의 추종을 불허하는 바, 그녀가 당한 짓이 그만큼 강렬하다는 반증일 것이다. 극은 극으로밖에 해결하지 못한다는 걸 말하고자 하는 걸까. 영화를 다 보고 난 후엔 아이러니 하게도 공주의 괴로운 모습이 아니라 즐거운 모습이 뇌리에 남는다. 


우린 공주를 온전히 받아들일 수 있을까. 공주의 괴로움을 뒤로 하고 즐거움을 취하면서. 아무렇지도 않게, 대수롭지도 않게. 그러면서 그녀 안에 영원히 없어지지 않을 괴로움을 조금씩 치료해주면서 말이다. 아마 결코 쉽지 않을 것이다. 공주가 전학 간 학교에서 큰 관심을 보이는 은희도 결국 온전히 받아들이지 못하지 않았는가. 이게 현실이라는 말을 다시금 하게 된다. 


'혼자'라는 사실보다 더 잔혹하고 가혹한 게 있을까


공주의 모든 걸 알고 온전히 그녀를 받아들일 수 있는 사람은, 적어도 영화에선 아무도 없었던 것 같다. 그 아픔이 너무도 큰 탓에 나도 휩쓸릴 것 같기 때문일 테다. 그렇지만 현실은... 현실도 마찬가지일 터. 과연 나는? ⓒ무비꼴라주


이 영화가 보여주는 현실은, 생각해보고 들여다보면 너무나도 잔혹하고 가혹하다. 백도 없고 집도 없고 부모님도 없고 친구도 없는 어린 여고생이 할 수 있는 게 무언가. 뭐라도 해서 희망의 불씨가 있다는 걸 보여주어야 하지 않겠나, 싶은 게 개인적인 바람이다. 하지만 그건 공염불에 불과하지 않나. 실상은 이런데.


단도직입적으로 말해, 그녀에게는 그녀의 아픔을 가슴 절절히 공감하고 외치고 기억해줄 이가 아무도 없다. 누군가는 다수의 가해자가 한 목소리로 외치는 '개소리'를 듣고 가해자를 옹호하고, 누군가는 가해자와 피해자 사이에서 갈피를 잡지 못하며, 누군가는 한순간의 망설임으로 그녀를 떠나보낸다. 그녀는 혼자다. 


많고 많은 사람이 사는 이 크나는 세상에 '혼자'라는 사실보다 더 잔혹하고 가혹한 게 있을까. 더욱이 잘못한 게 없는데, 오히려 피해를 당했는데, 누군가에게는 가해자로 인식되기까지 하다니. 숨이 턱턱 막히고 알 수 없는 소름이 덮친다. 가만히 있기가 힘들다. 세상이 어떻게 이럴 수 있을까, 하고 생각하는 것도 귀찮다. 그저 사라지고 싶다.


그런데, 공주는 수영을 배운다. 다시 살고 싶을까봐, 다시 시작하고 싶을까봐. 그러면 너무 억울하니까. 그녀는 알고 있는 것이다. 언젠가 마지막을 선택하게 될 거라는 걸. 그때를 대비해 수영을 배운 것이다. 이건 치를 떨지 않을 수 없다. 눈물을 흘리지 않을 수 없다. 무너져 내리지 않을 수 없다. 


이 영화를 보고 결심한 게 있다. 받아들이겠다고 말이다. 타의에 의해 세상으로부터 버려져 혼자가 된 이들을 받아들일 것이다. 정녕 어려운 일이다. 그래도 누군가는 해야 한다. 다름 아닌 내가 하고 싶다. 이 영화 <한공주>를 보고 난 후부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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冊으로 策하다. 책으로 일을 꾸미거나 꾀하다. 책으로 세상을 바꿔 보겠습니다. singenv@naver.com Since 2013.4.16




[오래된 리뷰] 좀비 영화의 대부 <28일 후>


현대 좀비영화의 시초격이자 최고의 좀비영화라 할 만한 <28일 후>. 대니 보일 감독만이 선보인 액션과 영상을 집대성하였다. 거기에 인간에 대한 메시지가 훌륭하게 조화되었다. ⓒFox Searchlight Pictures



지난 여름 한국을 강타했던 영화 <부산행>. 한국형 좀비 영화의 새 지평을 열며 흥행뿐만 아니라 열렬한 호평이 잇따랐다. 전 세계적인 호평도 잇따랐다고 하는데, 좀비 영화가 지녀야 할 덕목(?)을 빠짐 없이 갖추었기 때문일 것이다. <부산행>은 기본적으로 '좀비'하면 떠오르는 공포, 공포에 대적하는 액션, 인류애, 그리고 좀비보다 더 무서운 인간의 악랄한 모습을 두루두루 잘 보여줬다. 


좀비물로서 영화는 조지 로메로 감독의 1968년작 <살아있는 시체들의 밤>이, 소설로는 리처드 매드슨 작가의 1954년작 <나는 전설이다>가 그 시작이다. 지극히 현대적인 콘텐츠로 인식되고 있는 좀비물의 비하인드 스토리라고도 할 수 있겠다. 그런 좀비물은 2000년대 들어서 대 호황을 이루었는데, 현대 좀비 영화의 대표로는 두 편을 들 수 있겠다. 잭 스나이더의 2004년작 <새벽의 저주>, 대니 보일의 2002년작 <28일 후>. 


<새벽의 저주>는 굉장히 빠른 전개와 그에 맞춘 잔인한 장면의 연속, 호쾌한 액션으로 엄청난 호응을 얻었다. 그야말로 '좀비 영화' 하면 생각나는 가장 대중적인 영화임에 분명하다. 평단보다 관객에게 압도적인 지지를 받았다고 할까. 반면 그보다 2년 전에 개봉한 <28일 후>는 관객도 관객이지만 평단에게 압도적인 지지를 받은 작품이다. '뛰어다니는 좀비'를 출현시켜 공포와 액션 두 마리 토끼를 사로잡았으며, '좀비보다 더 무서운 인간'을 출현시켜 인간이란 무엇인지를 심오하게 탐색했다. 


최고의 좀비 영화 <28일 후>


개인적으로 좀비 영화를 그리 많이 챙겨보진 않았지만, 그럼에도 <28일 후>가 최고의 좀비 영화라고 단정할 수 있는 건 감독이 대니 보일인 이유가 크게 작용할 것이다. 그는 이 길지 않은 영화에서 좀비 영화가 보여줄 수 있는 모든 걸 보여줬다고 할 수 있는데, 전작 <트레스포팅>으로 보여줬던 속도감 있는 액션과 <비치>로 보여줬던 인간이 주는 실망, 그리고 후작 <127시간>으로 보여줄 감각적인 영상을 집대성하였다. 


총을 든 무장 단체 일원들이 연구시설을 습격한다. 시설 안에는 영장류들만 갖혀 있고, 그들은 하나같이 분노에 휩싸여 있다. 시설을 습격한 이들은 다름 아닌 동물 보호 단체의 일원, 영장류들을 가둬놓고 불법으로 실험을 일삼는 이들을 습격한 것이다. 그들은 연구원의 말을 무시하고 영장류를 풀어주는데, 곧 영장류들은 이들을 습격한다. 일명 '분노 바이러스'의 방출. 불과 28일 만에 영국은 분노 바이러스에 점령당한다.  

영화 초반, 아무도 없는 거리를 활보하는 주인공의 모습이 꽤 오래 비춰진다. 이 영화가 보여주는 또 하나의 무서움이 바로 이 장면이 아닐까 싶다. '외로움'이랄까. ⓒFox Searchlight Pictures



한편 교통사고로 의식을 잃었던 짐은 병원에서 깨어난다. 아무도 없는 병원, 아무도 없는 도로, 아무도 없는 런던. 헤매다가 성당에 들린 짐, 멀리서 다가오는 신부에게 말을 걸려한다. 하지만 신부는 두 눈이 빨갛게 물들어 짐을 쫓아오고, 짐은 영문도 알지 못한 채 도망간다. 그런 그를 도와주는 셀레나와 마크. 


마크도 곧 감염 당해 셀레나에게 죽고, 그들은 길을 떠난다. 길을 가던 도중 만나게 된 부녀, 프랭크와 해나. 이들은 생존을 보장한다는 군인의 방송을 듣고 무작정 맨체스터로 향한다. 하지만 그곳에서 알게 되고 겪게 되는 군인들의 끔찍한 실체는 좀비보다 더 무서운 것이었으니... 과연 이들의 앞날은 어떨까. 항상 되풀이되는 좀비 영화 결말의 논쟁을 이 영화는 빚겨갈 수 있을까.


좀비가 주는 공포, 그에 대적하는 액션, 그리고 인간


'좀비'는 되살아난 시체를 말한다. 좀비의 탄생을 비중 있게 다루는 작품도 있는데, 그 원인을 찾아내어 이 사태를 해결하려는 의도에서이다. 한편 <28일 후>를 위시한 많은 작품에서는 좀비의 탄생보다 그 이후를 비중 있게 다루며, 그에 따른 액션과 공포, 그리고 인간을 말하고자 한다. 결국 말하고자 하는 건 좀비가 아니지 않은가. 좀비 같은 인간, 아니 좀비보다 더 한 인간이 이 세상을 활개한다는 것이다. 


영화는 좀비로 인한 공포, 그에 대적하는 액션을 짧고 굵게 보여준다. 좀비보다 더 무서운 존재인 인간이 있기 때문이다. 분노 바이러스에 걸린 인간이 좀비 아닌가. ⓒFox Searchlight Pictures



이 영화는 이에 절반씩을 할애했다. 좀비가 주는 공포와 그에 대적하는 액션, 그리고 좀비보다 더 한 인간들과의 사투. 이 둘 간의 연계가 자연스럽고 또 각기 심혈을 기울여 모난 곳이 없기에 더욱 대단하다고 느껴지는 작품이다. 다만, 상대적으로 뒤엣것보다 앞엣것에서 단순한 영화적 재미를 더 느낄 수 있기에 누군가에게는 뒤로 갈수록 몰입도가 떨어질 수 있을지 모르겠다. 


그렇지만 그건 단순히 앞과 뒤를 비교했을 때 순수하게 좀비가 주는 재미 부분이고, 대니 보일이 선사하는 영화적 재미는 영화를 느보는 내내 느낄 수 있을 거라고 확신한다. 아니, 영화의 마지막 부분은 장르 영화가 줄 수 있는 최고의 장면들이다. 더불어 그 장면들을, 영화 전체를 관통하는 OST는 최고다. 


그러면서도 인간 세계에 던지는 확고한 메시지도 가려지지 않으니 그야말로 순도 연출 100%의 힘이다. 연출의 신이라고 불러야 마땅하지 않을까 싶을 정도인데, 영화적 재미와 영화적 메시지가 서로 믿기지 않을 만큼 조화를 잘 이루며 상응하고 있다. 


<28일 후>의 '히어로'(?)는 아이러니하게도 인간이 아닌 분노 바이러스에 먹힌 '뛰어다니는 좀비'에게 돌아갈 듯하다. 그가 아니었다면 속도감 있는 액션도, 감각적인 영상도 불가능했을 것이다. 또 그것들과 상응해야 더욱 빛을 발하는 '인간에 대한 실망'이란 메시지도 없었을 것이다. 탁월한 선택이거니와 대니 보일만이 해낼 수 있을 소재였다. 


작금의 인간 세계에 주는 강력한 경고, 분노 바이러스 좀비


분노 바이러스 설정은 탁월했다. 그 메시지는 이 영화가 단순한 공포액션 좀비 영화의 격을 훨씬 뛰어넘게 해주었다. 우리는 어떻게 해야 할까? ⓒFox Searchlight Pictures



'분노 바이러스'에 걸린 좀비라는 설정은 그 자체로 작금의 인간 세계에 주는 강력한 경고이다. 누군가는 이 세상이 돌아가는 꼴을 보고 가만히 있으면 안 된다고 하며 '분노하라!'를 외치지만, 이 영화를 보면 이미 세상은 분노로 가득 차 점차 헤어나올 수 없는 수렁에 빠지고 있다는 사실을 직시할 것이다. 세상을 올바르게 바꾸려는 의도라지만 분노가 가장 위에서 중요한 위치를 차지해 사람들을 조종하게 할 수는 없지 않나.


분노에 휩싸이지 않은 이들을 '사람'이라 하고 분노에 휩싸인 이들을 '좀비'라 하니, 좀비라도 되어서 사람들의 세상을 또는 이미 좀비들의 세상을 바꿔야 한다는 것인가. 그건 어느 모로 보나 '일단 바꾸고 보자'는 무책임한 말로밖에 보이지 않는다. 반대로 분노하지 않으면 이미 분노한 이들이 꾸리는 세상에 승차하게 될 텐데, 과연 그것은 옳은 것인가 하는 의견도 나올 수 있다. 그건 가만히 앉아서 아무것도 못한 채 내 인생을 송두리째 바치는 것밖에 안 될 것이다. 


그렇다면 어떻게 해야 할까. 영화는 그에 대한 답을 얼핏 던진다. 분노하라, 그러나 사람임을 잊지 마라. 무엇보다 희망을 잃지 마라. 분노는 그 이상의 분노로 다스릴 수 있다고 말한다. 분노가 사람을 조종하는 게 아닌, 사람이 분노를 조종하는 것. 문제는 어떻게 사람임을 잊지 않을 수 있는가. 그것이 숙제라면 숙제겠다. 


애초에 분노에 휩싸이지 않은 세상을 구축하면 되는 일이 아닌가, 하는 생각을 해본다. 그건 쉽지 않은 일, 아니 사실 이미 당면한 일, 이제와서 그런 생각을 해본들 무슨 소용이 있겠는가. 문제가 있을 때는 해결책을 마련하고, 그와 더불어 훗날 반드시 또다시 생길 동일한 문제의 원인을 생각하며 매뉴얼을 만들어야 하겠다. 그게 안 되서 문제이고, 그게 안 되서 인류사가 반복되는 것이지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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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래된 리뷰] <멋진 하루>


하정우가 아직 신인이었을 당시, 베테랑 전도연과의 만남으로 많은 기대를 받은 작품 <멋진 하루>. 역시, 최고의 한국 영화 중 하나다. ⓒ스폰지 Ent



가끔 '한국 영화'가 보고 싶을 때가 있다. 다른 어느 나라 영화도 아닌 한국 영화가 말이다. 중국이나 일본 영화와는 달리 한국 영화는 '풍'이 확고하지는 않은 것 같다. 미국을 위시한 외세의 영향을 많이 받아서 일까. 굳이 뽑아보자면 한이 서려 있는 풍이 한국 영화의 풍이랄까. 그래서 일명 '국뽕' 영화가 많이 만들어 지고 또 많은 인기를 얻는 게 아닌가 생각해본다. 


개인적으로 생각하는 한국 영화의 풍은 섬세한 멜로를 기반으로 멜랑꼴리와 유머와 현실 감각이 조금씩 섞인 장르인 것 같다. 이 또한 영향을 받을 것일 수 있지만, 그래도 가장 한국 영화 같지 않을까. 내가 가끔 '한국 영화'가 보고 싶을 땐 바로 이런 풍의 영화가 보고 싶을 것을 게다. 


전도연과 하정우가 멋들어지게 연기한 2008년작 <멋진 하루>는 비록 원작은 일본 소설이지만 한국 영화 같은 느낌을 자아내는 영화다. 모르긴 몰라도 일본풍이 강할 수밖에 없을 단편 소설을 훌륭하게 재단해낸 각본의 힘이겠다. 이제 막 신인을 벗어난 하정우는 날아다니고, 베테랑 전도연은 자신을 낮추고 모든 걸 받아주었다. 이 둘의 서울에서의 하루를 멋지게 그려냈다. 다시 봐도 정녕 괜찮은 영화다. 


왠지 '멋진 하루'일 것 같은 이들의 하루


영화는 지나가는 행인들의 일상적 이야기를 포착하며 시작한다. 두 번째, 세 번째에 비로소 우리의 주인공 희수(전도연 분)가 등장한다. 카메라는 이제 그녀에게 집중한다. 여타 영화와는 다른, 신선한 시작이다. 희수가 있는 곳은 경마장이다. 그녀는 어슬렁거리며 누군가를 찾고 있는 듯하다. 어디선가 들리는 익숙한 목소리, 그에게로 가 반가워하는 그의 얼굴에 대해 대뜸 '돈 갚아'라고 한마디 한다. 


희수의 싸늘한 한마디와 병운(하정우 분)의 천연덕스러운 반응은 이 영화의 앞날을 예견한다. 시종 일관 계속될 이 둘의 티격태격이 눈 앞에 그려지는 듯하다. 희수가 병운에게 받아야 할 돈은 350만 원, 참으로 애매한 액수다. 병운은 당장 갚을 돈이 없어 빌리러 가야 한다고 말한다. 며칠 뒤에 붙여준다는 병운을 믿지 못하는 희수, 오늘 당장 받아야 한다고 하며 병운을 따라 나선다. '멋진 하루'의 시작이다. 


과연 멋진 하루일까. 굳이 끝을 보지 않아도 알 수 있을 것 같다. 멋진 하루는커녕 우울하기 짝이 없는 하루가 될 거라고. 꿔준 돈을 받기 위해, 돈 꾸는 현장을 따라나서야 하다니. 영어 제목인 'My Dear Enemy'에서도 풍기는 이 정반대 콤비의 모순적인 하루. 그런데 병운의 천연덕스러움, 그가 돈을 꾸러다니는 풍경, 영화 <미드나잇 인 파리>가 생각나게 하는 OST까지, 마치 설렘 가득한 산책을 가는 기분이다. 왠지 이들의 하루가 '멋진 하루'일 것 같다. 싱숭생숭한 기분은 어딘가로 가버리고 설렘만 남는다.


여성에 대한 천착에서 인간에 대한 섬세한 시선까지


영화는 이윤기 감독이 오랫동안 천착해왔던 여성에 대한 천착을 간직한 채, 인간에 대한 섬세한 시선까지 보여준다. 한국 영화의 발전 양상을 보는 것 같다. ⓒ스폰지 Ent



그럴 때가 종종 있다. 정말 가기 싫은 곳을 어쩔 수 없이 억지로 따라 가서 시종 일관 인상을 쓰며 빨리 이곳을 빠져나가고 싶다는 생각만 하며 있었는데 막상 떠나면서는 뭔가 괜찮았다는 기분이 들 때가 말이다. 희수가 느낀 감정이 그렇지 않았을까 싶다. 내 돈 내가 돌려받겠다는데, 왜 내가 모르는 사람이랑 함께 말 같지도 않은 말을 듣고 있어야 하는지. 병운은 그게 다 너한테 돈 갚으려고 하는 거고 또 좋은 게 좋은 거 아니냐고 둘러대니 더더욱 마음에 안 들고 인상이 찌뿌려진다. 


와중에 이윤기 감독은 오랫동안 천착해왔던 여성에 대한 섬세한 시선을 놓치지 않는다. 형식은 두 남녀의 좌충우돌 로드무비지만, 병운이 돈을 꾸러 다니는 사람들이 하나 같이 여성이기 때문이다. 골프장을 운영하는 듯한 회장님, 이혼하고 홀로 딸을 키우며 마트 일을 하는 여자, 밤일 하는 여자, 주차요원으로 일하는 여자, 어디를 다쳤는지 자리에서 일어나지 못하는 듯한 여자 등, 그야말로 다양한 여성군이다. 


희수가 보기엔 병운이 여자들의 돈을 뜯어 먹는다기 보다 여자들이 병운에게 돈을 가져다 바치는 것처럼 보인다. 그게 역겨워 보였는지 밤일 하는 여자한테 해서는 안 될 말을 하고 만다. 곧 사과를 하는 희수, 그녀는 여자들을 향한 분노를 병운에게 돌린다. 반반한 얼굴과 사람 기분 좋게 하는 입담으로 여자들 돈 뜯어 먹는 놈. 


그렇지만 그녀가 그에 대해 무엇을 알겠는가. 그들은 그저 오래전 헤어진 연인일 뿐인데. 일 년 사이에도 몇 번이나 180도 바뀌는 게 인생 아닌가. 다시 보니 병운과 그녀들은 서로를 돕고 살아가고 있는 게 아닐까 생각해본다. 분명 그녀들이 어려울 때 병운은 두 발 벗고 도와줬을 것이다. 감독의 여성에 대한 천착은 이렇게 인간에 대한 천착, 인간에 대한 섬세한 시선으로 발전했다. 


내 영화 인생에 나타난 특별한 영화 한 편


잘 기억나진 않지만 아마 개봉한 지 오래지 않아서 이 작품을 봤을 것이다. 당시에는 별 생각 없이 두 주연 배우 때문에 봤을 텐데, 묘하게도 근 10년이 지나도록 가끔 생각이 났다. 이 영화가 풍기는 분위기가 정녕 어디 서도 느끼기 힘들기 때문일 텐데, 묘하게 위로해주는 기분이랄까. 거기에 병운으로 분한 하정우의 천연덕스러운 연기는 처음부터 끝까지 기분을 좋게 해준다. 더군다나 영화가 진행되면서 자연스러워지는 게 눈에 보이는데, 기특하다는 생각까지 들게 만드는 게 아닌가. 


자꾸 떠오르는 영화는 또 보게 마련이지만, 또 보게 되었을 때 실망할 여지가 많다. 그때 그 영화를 봤을 때 나의 상황과 나를 둘러싼 환경과 영화를 둘러싼 환경 등이 변했을 것이기 자명하기 때문이다. 무엇보다 이 세상이 변했을 테니 말이다. 하다 못해 예전의 것이기에 촌스럽고 유치하고 예상되고 지루하고 재미 없을 가능성이 농후하다. 기억 속 옛 연인을 다시 한 번 보고 싶은 마음은 알겠지만, 막상 보고 난 후 실망을 금치 못하느니 안 보는 게 낳다는 느낌이랄까. 


<멋진 하루>는 어땠나. 그런 기시감은 찾아볼 수 없었다. 오히려 그때 못 봤던 것들(영화 스킬, 장면, 영화 제목의 반어법)이 보이고, 그때 느끼지 못했던 감정(병운이 돈 꾸러 다니는 여자들의 감정)이 보이는 게 아닌가. 그땐 참 '빈약한' 영화인 줄 알았는데, 이렇게 '풍부한' 영화일 줄이야. 살아가면서 보고 또 보게 될 영화인 것 같은데, 몇 년 뒤에 또 보게 되면 또 어떤 것들이 되살아나 내 눈 앞으로 다가올지 기대된다. 내 영화 인생에 특별한 영화 한 편이 나타났다. 


전도연과 하정우에게 특별하게 다가올 영화


영화의 두 주연배우 전도연과 하정우. 그리고 이윤기 감독. <멋진 하루>는 감독뿐만 아니라 두 배우에게도 큰 의미로 다가왔을 것이다. 그들의 조합을 다시 보고 싶다. ⓒ스폰지 Ent



이 작품은 무엇보다 두 주연 배우 전도연과 하정우에게, 특히 하정우에게 큰 의미로 다가올 것 같다. 전도연은 2007년 <밀양>으로 역사적인 '칸의 여왕'이 되어 한국 영화계에 깊은 족적을 남겼는데, 바로 다음 작품으로 이 <멋진 하루>를 선택했다. 전작에서 모든 걸 다 바친 듯한 연기를 선보였다면 이 작품에선 모든 걸 다 내려 놓고 후배 하정우에게 모든 걸 다 넘겨준 듯한 연기를 선보인다. 그녀의 필모그래피를 볼 때, 이 작품으로 말미암아 진정한 완성형 연기자가 된 듯한 느낌이다. 


한편 하정우는 2008년이 특별할 것이다. <추적자>로 필모 최고의 연기를 선보이고, <비스티 보이즈>로 윤종빈 감독과 다시 만나 열연을 펼쳤으며, <멋진 하루>로 비로소 '하정우표' 연기를 완성시켰다. 하정우표 연기의 시작이 <용서받지 못한 자>였다면, <멋진 하루>는 최근 <터널>까지 이어진 그의 연기의 정점이라고 할 수 있지 않을까. 왠지 그도 이 작품에서의 병운이라는 캐릭터를 가장 좋아할 듯하다. 


연기를 잘하는 건 둘째 치고 배우 필모그래피 전체에서 터닝포인트가 되는 작품들이 있을 텐데, 전도연과 하정우 두 배우에게 <멋진 하루>가 상징하는 바는 남다를 것이 분명하다. 비단 두 주연 배우뿐만 아니라 이윤기 감독에게도 마찬가지이지 않을까. 2005년 <여자, 정혜>로 데뷔하자마자 많은 주목을 받았던 그, 계속해서 많은 사랑을 받다가 <멋진 하루>로 정점을 찍었다. 이후 <사랑한다, 사랑하지 않는다>로 비평과 흥행에서 참패, 작년엔 <남과 여>로 돌아왔지만 흥행에서 참패했다. 


물론 이윤기 감독의 작품들이 흥행에서 좋은 성적을 거둔 적은 없지만, 적어도 비평에선 좋은 점수를 얻었던 바 최근의 행보가 조금 아쉬운 건 사실이다. 연출도 연출이지만 그만의 색채가 묻어나는 각본을 다시 접하고 싶다. <멋진 하루>가 생각나는 멋진 이야기를 말이다. 그런 의미에서 지난해 11월에 개봉할 예정이었던 <어느날>의 개봉 소식이 들려오지 않는 게 아쉽다. 후반작업 때문이라고 하는데 하루 빨리 보고 싶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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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래된 리뷰] <러시: 더 라이벌>


<러시: 더 라이벌>이 나온 2013년만 해도 아직 F1이 완연한 하락세는 아니었다. 하지만 이제 F1은 퇴물 취급 받으며 세계 3대 스포츠 이벤트로 명맥을 이어나갈지 알 수 없는 상황. 새삼 이 영화가, 이 영화가 그린 그때가 보고 싶었다. ⓒ롯데엔터테인먼트



'올림픽' '월드컵'과 더불어 세계 3대 스포츠 이벤트 중 하나로 불리는 'F1(포뮬러1 월드 챔피언십)', 전 세계 수억 명이 시청하며 조 단위의 후원을 자랑하는 자타공인 꿈의 무대다. F1이 인기가 있던 가장 큰 이유는, '가장 현대적인 스포츠'라고 불리는 것과는 다르게 굉장히 인간적이었기 때문이다. 기계의 성능보다 드라이버의 실력이 우선되었기에, 그들이 펼치는 승부에 묘미가 있었다. 지금은 말그대로 '가장 현대적인 스포츠'가 되어 인간이 아닌 기계에 따라 승부가 갈리게 되었다. 


2010년대 들어 세바스찬 페텔이 4년 연속 월드 챔피언에 오르며 '황제' 미하엘 슈마허에 버금가는 업적을 달성했다. 새로운 황제의 출현에 전 세계는 열광했다. 그때는 페텔이라는 인간의 능력이 월등했다. 2014년부터 엔진과 연료량이 다운사이징된 새로운 시스템 규정이 생겼다. 이에 '메르세데스'가 발빠르게 차량을 만들어냈다. 곧바로 성적이 났다. 2014년부터 3년 동안 메르세데스의 드라이버(루이스 해밀턴, 니코 로즈버그)가 우승을 독식했다. 앞도적으로. 드라이버보다 팀의 이름이 앞세워진 것이다. 과거에도 10년 가까이 우승을 독식한 팀이 있었지만, 항상 드라이버와 함께였다. 


자연스레 관객이 줄고 후원이 줄고 대회 유치하는 도시가 줄었다. 기계의 위상은 어느 때보다 올라간 대신, F1 위상이 추락하고 드라이버의 시대는 저물었다. 옛날이 생각난다. 스타플레이어의 독식과 또는 라이벌. 오히려 최근이라 할 만한 2000년대 중반 이후가 가장 재밌었다. 춘추전국시대, 알론소, 해밀튼, 버튼, 페텔 등으로 이어지는 챔피언의 계보. 이제 이 계보가 끊어질 것 같다. 


F1을 상징하는 두 캐릭터, 두 라이벌


F1을 상징하는 세기의 라이벌, 어찌 보면 '라이벌'을 상징하는 둘일지도 모른다. 니키 라우다와 제임스 헌트. 길지 않은 만남이었지만, 그 여파와 영향력은 시대를 초월할 정도였다. ⓒ롯데엔터테인먼트


상황이 이러 해서 그런가, 차량이 아닌 인간이 서킷을 지배했던 예전이 생각난다. 내 나이로 70~90년대의 F1 전성기를 고스란히 함께 했을리는 없지만, 전설로 내려오는 그때를 마음속 깊이 연모해 마지 않을 수 없는 것이다. 90년대와 2000년대 미하엘 슈마허로부터 거슬러 올라가, 80년대의 세나와 프로스트, 그리고 70년대의 니키 라우다와 제임스 헌트까지. 


이 중 F1 역사상 최고의 천재 드라이버 세나의 이야기와 F1 역사상 최대의 라이벌 니키 라우다와 제임스 헌트의 이야기가 영화로 만들어졌다. 론 하워드 감독의 <러시: 더 라이벌>은 바로 니키 라우다와 제임스 헌트의 이야기다. 모르긴 몰라도 이 둘은 F1을 떠올리면 생각나는 두 캐릭터를 상징할 테다. 니키 라우다는 모범생 스타일의 기계 천재이자 불굴의 의지를 지닌 사나이이고, 제임스 헌트는 바람둥이 스타일의 불세출의 천재로 바람 같이 나타나 한 시즌을 재패하고 떠나버린 사나이다. 공통점은 이 둘은 서로를 미워하지만 서로를 부러워하고 서로 덕분에 더 빨리 달릴 수 있었다는 것. 


영화는 F1에 관심이 있는 사람이라면 누구나 알 만한 이들의 이야기를 고스란히 옮겨 놓았다. 그리하여 내용에 신경을 쓰는 대신, 1970년대 당시를 재현해내고 니키 라우다와 제임스 헌트를 다시 살려내며 F1이 갖는 긴박함과 스릴을 최대치로 불러내려 했다. 정녕 완벽하게 재현해내고 살려내고 불러냈는 바, 현재 F1에서 풍겨나오는 진한 실망감을 충분히 상쇄시키고도 남음이다. 그 중심에는 두 라이벌이 있다. 


본능에 충실한, 순수함의 결정체들의 질주



F1 드라이버들의 목숨을 건 사투를 무엇이라 해야 하겠는가. 돈과 명예와 스포트라이트? 화려한 삶? 그것도 맞지만, 그것만으로는 절대 불가능할 것이다. 본능에 충실한 순수함이 그들을 지배했다. ⓒ롯데엔터테인먼트



두 라이벌은 F3에서 처음 만난다. 터줏대감 제임스 헌트 눈에 예리한 신예 니키 라우다가 들어온다. 위험한 상황을 연출하는 이들, 사고가 나려는 찰나 니키가 양보하지만 레이스 불능 상태가 되고 제임스가 우승을 차지한다. 악연으로 시작된 이들의 인연, 이번엔 니키가 앞서간다. 거액의 돈을 대출받는 수완을 발휘해 단번에 F1 팀에 들어간 것이다. 그곳에서도 차량을 개조해 시간을 엄청나게 단축하는 기적을 선보이며 단번에 팀의 중심이 된다. 제임스 헌트와는 차원이 다른 F1 드라이버 니키 라우다. 


이에 제임스 헌트는 팀에 들어가는 대신 오랫동안 함께 해온 이들과 형의 도움으로 직접 F1에 뛰어든다. 다시 만난 이들, 이제부터 진정한 라이벌의 시작이다. 그야말로 매 레이스에서 엎치락 뒤치락, 다른 이의 접근을 불가하는 그들만의 대접전이다. 그 와중에 병행되는 그들의 삶과 사랑, 모든 면에서 다른 그들은 점차 선의의 경쟁자가 되어 간다. 하지만 영원한 건 없다. 


니키 라우다와 제임스 헌트 모두에게 시련이 찾아온다. 누구나 다 알 만한 대사건을 겪는 니키 라우다. 레이스 도중 일어난 사고로 화상을 입는다. 재기 불능은 고사하고 사는 것조차 알 수 없는 상황, 그는 다시 일어나 라이벌 제임스 헌트와 함께 서킷을 달릴 수 있을까? 한편, 제임스 헌트는 팀도 잃고 사랑도 잃는다. 생각보다 성적이 잘 나오지도 않는다. 드라이버로서 뿐만 아니라 인생에서도 절체절명의 위기에 빠진 제임스, 그는 특유의 대범함과 낙천성으로 난관을 뚫고 다시 일어나 라이벌 니키 라우다와 함께 서킷을 달릴 수 있을까? 


개인적으로 운전면허를 딴 지는 몇 년 되지만 운전을 본격적으로 시작한 지는 몇 개월도 채 되지 않는다. 얼마 전에 처음으로 고속도로를 탔는데, 숨겨져 있던 본능이 나오지 않았나 싶다. 시속 120km까지 달리며 한순간도 긴장이 되지 않았다. 아니, 황홀했다. 계속 생각이 났다. 이들이 왜 매 경기마다 20%에 달하는 죽음의 확률을 알면서도 계속 달리는지 조금은 알겠다는 말이다. 이들이야말로 본능에 충실한, 순수함의 결정체가 아닐까. 죽음에 가장 가까이 갈수록 삶의 절정을 겪을 수 있으니 말이다. 


다분히 남성적인 영화, 그럼에도 즐길 수 있는 영화


영화는 남성 중심적이다. 소재의 특성 상 어쩔 수 없겠지만, 굳이 여성을 등장시켜 남성 F1 드라이버의 삶을 설명하는 수단으로 쓸 필요가 있었을까? 그 점을 집고 넘어가며, 즐길 만한 준비가 되어 있다면 이 영화는 최고 중에 최고다. ⓒ롯데엔터테인먼트



F1이라는 스포츠는 자동차 그중에서도 어마어마한 속도를 자랑하는 차량의 '속도'로 순위를 가리는 종목이니만큼, 여성에겐 매우 힘들기도 하고 자연스레 여성에게서 멀 수밖에 없다. 여담으로, 자그마치 중력의 5배에 달하는 힘을 견뎌야 한다. 남녀 평등에 대해서 논하려는 건 아니다. 영화에서 여성을 남성에 대비되는 요소가 아닌 남성을 설명하는 수단으로 쓰려했다는 점이 걸리는 것이다. 


영화는 다분히 남성적이다. 영화에서 여성은 두 주인공이자 라이벌인 남성 드라이버의 전유물일 뿐이다. 인생관에 따라 다를 텐데, 니키에게는 평생 함께 할 단 한 명의 동반자이자 소유물로서 제임스에게는 때와 장소에 따라 바뀌는 일회용품으로서 존재한다. 물론 그건 남성뿐만 아니라 여성의 입장에서도 마찬가지일 것이다. 다만 이 영화에서는 남성의 입장에서, 그것도 그 남성의 인생관을 대변하는 여러 요인들 중 하나로서 비춰진다. 니키와 제임스의 라이벌 관계를 보여주는 요소말이다. 


이 점을 집고 넘어가며 영화를 즐길 만한 준비가 되어 있다면, 이 영화는 그에 완벽하게 부합할 것이다. 그야말로 인간의 한계를 넘는 기계 일색의 스포츠에서 박진감과 스릴감은 당연하고 인간미까지 넘치는 레이스를 펼칠 수 있는, 또 그걸 볼 수 있는 경우가 얼마나 많겠는가. 그 모습을 완벽하게 구현해낸 1976년 당시를 영화로 완벽하게 구현해낸 게 이 영화 <러시: 더 라이벌>이다. 


기적이 아닌가 싶다. 40년 전 기종은 찾을래야 찾을 수도 없을 텐데, 한두 대도 아닌 수십 대를 눈앞으로 대령해내다니. 고마운 일이 아닌가 싶다. 현장관람은커녕 TV중계로도 보기 어려운 실정에, 현장관람 정도의 현장감을 엿볼 수 있다니. 놀라운 일이 아닌가 싶다. 이토록 영화 같은 이야기가 다큐멘터리 같은 실제 이야기를 담고 있다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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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래된 리뷰] <렛 미 인>


하찮게 소모되던 뱀파이어, 와중에 뱀파이어 영화의 신세계를 연 작품이 <렛 미 인>이다. 토마스 알프레드슨 감독의 최고 데뷔작. ⓒ씨네그루 다우기술



1994년 <뱀파이어와의 인터뷰>의 대성공 이후 다양하게 재생산된 뱀파이어. <블레이드> <언더월드> <트와일라잇> 시리즈로 대변되는 액션 판타지의 주인공이 되어 참 많이도 고생했다. 그 중심에는 항상 영원한 삶과 가공할 만한 힘이 있었다. 찬란하게 시작된 현대판 뱀파이어물은 그렇게 하찮게 소모되고 있었던 것이다. 


그 와중에 뱀파이어 영화의 신세계를 연 작품이 있다. 북유럽에서 건너 온 잔혹하고 몽환적인 사랑과 성장 이야기. <팅커 테일러 솔저 스파이>로 격조 높은 스파이 이야기를 선보였던 토마스 알프레드슨 감독의 2008년 작 <렛 미 인>이다. 이 영화는 자그마치 그의 장편 영화 데뷔작이다. 데뷔와 동시에 최고의 감독으로 칭송받는다. 


스웨덴 출신의 감독이, 스웨덴을 배경으로, 정녕 스웨덴스럽게 연출해 낸 <렛 미 인>. 우리가 생각하는 북유럽 스웨덴 그 자체에, 그동안의 액션 판타지 마사지 때문에 우리가 생각하기 어려운 풍의 뱀파이어 이야기를 완벽히 입혔다. 하얀 설국과 빨간 피의 대비는 잊지 못할 최고의 조화다. 그 자체로 하나의 완벽한 미장셴. 영화를 그 미장셴으로만 보아도, 그 미장셴으로만 기억해도 충분할 정도이다. 


그 미장셴은 장면으로만 남지 않는 바, 영화를 관통하는 상징과 메시지 중 하나를 말하는 매개체이다. 하얀색은 무엇이고, 빨간색은 무엇일까. 아무래도 영화의 두 주인공인 인간 오스칼과 뱀파이어 이엘리를 상징할 텐데, 감독은 그들에게서 어떤 이야기를 끄집어냈을까. 우린 그 이야기에서 세상의 어떤 모습을 반추할 수 있을까. 


괴롭힘을 당하는 아이, 그에게 접근하는 뱀파이어


'돼지'라 불리며 괴롭힘을 당하는 12살 오스칼, 그에게 접근하는 12살 모습의 뱀파이어 이엘리. 그들은 어떤 모습을 보여줄까. ⓒ씨네그루 다우기술



12살 오스칼은 학교에서 '돼지'라고 불리며 괴롭힘을 당한다. 그는 집에 와서는 칼로 집 앞 나무에 해코지하며 자신을 괴롭히는 일당을 죽이는 꿈을 꾼다. 오스칼은 엄마와 단 둘이 사는데, 동성애자 아빠를 더 좋아한다. 그는 참으로 힘도 없고 의욕도 없는 무기력한 아이다. 그의 금발과 새하얀 피부가 잘 어울린다.


한편 12살 이엘리는 아버지처럼 보이는 이의 보살핌으로 살아간다. 그 보살핌이란 다름 아닌 어린 아이를 죽여 뽑아낸 피를 먹이는 것. 그녀가 뱀파이어이기 때문이다. 자신이 직접 사냥에 나서면 위험하기 때문에 누군가 대신해줄 필요가 있는 것 같은데, 그렇다면 아버지처럼 보이는 이는 뱀파이어가 아니라는 얘기. 그는 인간인 듯 보인다. 아버지는 아닌 것 같다. 그들은 어떤 관계일까? 


우연히 만난 오스칼과 이엘리, 하필이면 오스칼이 칼을 들고 나무를 해코지할 때다. 그 모습을 보고 이에리가 한 생각은, '이제부터 이 아이가 나를 먹여 살릴 것이다'. 반면 오스칼은 이엘리를 좋아하게 된다. 아버지처럼 보이는 이는 이엘리를 12세 때 만나 수십 년 동안 사랑하며 함께 해왔던 것. 오스칼이 그를 대신할 재목이다. 


이보다 아름답고 숭고한 사랑이 어디 있을까


영화는 두 주인공인 오스칼도 이엘리도 아닌 이엘리를 수십 년 동안 사랑해왔던 한 남자의 이야기이기도 하다. '렛 미 인(Let me in)', 들어가게 해줘. 이엘리의 사랑 방식이자, 이엘리를 사랑하는 방식이다. 살기 위해 어쩔 수 없이 사람을 죽여야 하는 그녀의 입장이 되어, 대신 사람을 죽여 피를 가져오는 극단적 사랑. 


이 기괴하고 잔혹한 사랑은 언젠가 반드시 파멸로 끝맺음을 낼 것이다. 이엘리의 전 사람도 그럴 것이고, 오스칼도 그러지 않을까. 그렇지만 '아름답다'고 하지 않을 도리가 없다. 이보다 더 '숭고'한 사랑이 어디 있을까. 자신의 모든 것을 바쳐 사랑한다는 건 이런 게 아닐까. 


그는 단순히 그 자신으로서 사람을 죽여 피를 가져오는 게 아니다. 그가 아닌 다른 이가 되어, 즉 이엘리가 되어 살기 위해 어쩔 수 없이 사람을 죽여 피를 가져오는 것이다. 모든 것에 앞서 자신을 버린 '희생'으로서의 사랑이다. 사랑이라는 이름이 붙여진 것 중 가장 높은 경지의, 가장 하기 힘든, 비인간적이기까지 한 사랑의 방식이 희생 아닌가. 아마 그의 마지막은 이엘리에게 자신을 바치는 것이리라. 


약한 이의 본능을 깨우는, 다른 사랑 방식


숭고하고 아름다운 희생으로의 사랑과는 다르게, 오스칼과 이엘리의 사랑은 뭔가 다르다. 오스칼의 본능을 이용한 '계약' 같다고 할까. ⓒ씨네그루 다우기술



오스칼과 이엘리, 이엘리와 오스칼. 그들은 곧 사귄다. 하지만 오스칼이 이엘리의 정체를 알아차린다. 이엘리를 멀리 하는 오스칼, 상처 받는 이엘리. 뱀파이어다운 극단적 행동으로 오스칼의 본능을 자극해 더욱 가까워지는 그들. 이엘리는 이때다 싶어, 예의 그 '렛 미 인'을 시도한다. 교감을 마친 그들, 그들은 곧 하나다. 


이엘리와 이엘리의 전 남자의 렛 미 인 교감이 오랜 시간의 '사랑'이라면, 이엘리와 오스칼의 교감은 사랑 이전에 오스칼의 본능을 깨우는 것으로 시작된다. 무기력하기 짝이 없지만 반대급부로 살인의 욕망이 엄청난 오스칼의 본능을 이엘리가 교감을 통해 이끌어 낸 것이다. 난 살기 위해 어쩔 수 없이 사람을 죽여, 너에겐 그들을 죽이고 싶은 마음이 있지, 나를 대신해 그들을 죽이면 되겠네. 


여기서 하얀색과 빨간색의 극명하고 아름다운 대비가 떠오른다. 아무것도 없는 흰색의 오스칼에게 욕망으로 가득 찬 빨간색의 이엘리가 들어온 것이다. 어느 날 그를 괴롭히는 패거리의 수장을 다짜고짜 막대기로 때려 고막을 파열시키는 오스칼, 그러고 나서 히죽히죽 웃는 그의 모습에서 미래가 보인다. 이엘리를 위해서인지 자신의 본능에 의해서인지 둘 다인지 알 수 없는 걸로 사람을 죽여 피를 뽑아 이엘리를 먹여 살리는 그의 모습을. 


'사랑'이라 할 수 있을까. 아니, 일종의 '계약'처럼 보인다. 내 안에 있는 거대한 욕망 덩어리를 끄집어내게 해주면서 양심의 가책도 줄여주는 대신, 너를 내 평생 책임지고 먹여 살리겠다. 누군가는 '결혼'을 그런 식으로 생각할지 모르겠다. 그 또한 사랑의 또 다른 모습일까. 무조건 아니라고 할 수 없는, 한 번쯤 생각하게 한다. 그건 내가 이상한 걸까, 이 세상이 그렇게 만든 걸까, 자연스러운 걸까. 


'성장'하는 오스칼과 '소수·소외'의 상징 이엘리 


영화에서 오스칼은 '성장'한다. 본능을 깨우고 세상을 알아간다. 이엘리는 성장과 거리가 멀다. 그녀는 겉모습과는 달리 이미 늙을 대로 늙은듯. 다만, 그녀는 세상과 절대 어울릴 수 없는 '소수 소외'의 상징이다. ⓒ씨네그루 다우기술


이엘리는 겉모습은 12살이지만 이미 엄청나게 오래 살았다. 그녀에게 '성장'이란 단어는 어울리지 않는다. 반면, 오스칼에게 '성장'은 당면한 현실이자 반드시라고 할 만큼 치러야 할 대상이다. 그는 이엘리를 만나 단번에 너무도 큰 성장을 한 것 같다. '힘'이자 '권력'의 달콤함, 양육강식의 세계를 알아버린 것. 


남에게 괴롭힘을 당하며 아래에서 굽신굽신대다가 한순간에 남 위에 군림하는 그 희열을 안 것이다. 누구는 평생 가도 하지 못하는 걸 그는 어릴 때 한순간에 알아버렸다. 그가 한없이 가여워지는 순간이다. 


한편, 영화를 보는 내내 이엘리가 가엽고 불쌍했다. 어불성설처럼 보일지 모르지만, 그녀는 정녕 이 시대 '소수·소외 계층'의 상징과도 같지 않은가. 이 세상에 자신을 알아줄 이 하나 없고, 자신에게 관심을 가져주는 이 하나 없다. 또한 다른 누구의 도움 없이는 먹고 살아가기 힘든 '취약 계층'의 상징과도 같다. 자신이 직접 먹고 살아가기엔 이 세상이 너무 위험(?)하다. 


그 이유는 그녀가 다르기 때문. 그녀는 단지(?) '사람의 피'를 원하는 것 뿐이다. 다른 무엇도 바라지 않는다. 그녀는 피를 마시지 않으면 죽지도 못한 채 영원히 고통 속에서 살아갈 것이다. 하지만 과연 세상이 용인할까? 물론 그 '다름'의 성질이 너무도 괴이쩍긴 하지만, 용인하지 '못하는' 게 아니라 '안하는' 것만은 확실하다. 


만약 신인류가 나타났다고 치자. 그것이 세상을 파멸로 이끌 수도 있는 능력을 가졌다고 치자. 물론 그건 능력의 유무이고 반드시 한다는 게 아니다. 뱀파이어가 사람을 죽일 능력을 가진 것과, 살기 위해 사람을 죽여 피를 마시는 것과는 별개인 것처럼 말이다. 우린 어떻게 할까? 세상은? 아마 무슨 짓을 써서라도 없애버리고자 할 것이다. 그것이 우리와 다른 이질적인 존재이기 때문에. 


서로가 서로를 인정하고 그렇게 조화로운 세상으로 나아가는 건 꿈에서나 가능한 말일까. 너무도 당연하고, 식상하지만 이렇게 또다시 말하지 않을 수 없다. 계속 말해도 세상은 바뀌지 않으니까. 세상이 바뀔 때까지 말하고 또 말할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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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래된 리뷰] 12년 촬영의 위대한 결과물 <보이후드>


'위대한'이라는 수식어를 붙이기에 한 점 부담이 없을 영화 <보이후드>. 6~18세의 소년기를 정녕 그대로 보여준다. ⓒUPI코리아



우리는 '최고'라는 수식어는 수없이 본다. 또 쓰기도 한다. 자신이 느끼기에 최고이면 되는 것이다. 상당히 주관적인 인식이 깔려 있다. 반면 '위대한'이라는 수식어는 함부로 붙일 수 없다. 만약 신이 있다면 신에게나 붙일 수 있을 것이고, 인간에게라면 극소수만 허락될 것이다. 그런 사항을 인지하고 있음에도, 이 영화 <보이후드>에 '위대한'이라는 수식어를 붙이는 데 주저함이 없다. 


'보이후드(boyhood)'라고 하면 '소년기'를 뜻하는데, 우리나라에서는 만 열두 살부터 스무 살까지로 잡는 반면 서양에서는 여섯 살부터 열여덟 살을 잡는다. 프로이트의 심리성적 발달단계, 에릭슨의 심리사회적 발달단계 등에서 공통적으로 이 시기를 소년기로 잡는다. 인생 전체에서 가장 중요한 시기라고 할 수 있는 보이후드, 이 시기를 그려내고자 하는 노력은 참으로 많았다. 소설만 보아도 <데미안> <호밀밭의 파수꾼> 등의 위대한 작품이 있다. 영화는? <보이후드>가 있다고 말하고 싶다. 


여섯 살부터 열여덟 살의 12년을 영화로 보여주는 건 쉽지 않아 보이지만 사실 굉장히 쉬울 수 있다. 시간의 흐름을 보여주는 방법은 너무나 다양하다. 그리고 영화를 보는 이들은 그런 것에 관대한 편이다. 하지만, 12년을 그대로 보여주려 한다면? 이야기는 완전히 달라진다. 일단 촬영 기간만 12년이 걸릴 것이다. 감독 이하 스탭들과 등장인물들은 12년 동안 촬영에 임해야 한다. 무엇보다 12년의 기간 동안 질주하는 영화 관련 기술들의 발전을 어떻게 할 것인가? 영화의 처음과 끝이 다르면 안 되겠는데. 


12년 간의 촬영으로 소년기를 온전히 보여주다



이 영화의 위대함은 소년기의 12년에 해당하는 기간을 촬영했다는 점이다. 어느 누구도 생각지 못하고 해낼 수 없을 것 같은 것을 해냈다. ⓒUPI코리아


영화 <보이후드>는 여섯 살부터 열여덟 살의 소년기를 온전히 영화로 보여주기 위해 실제로 12년 간의 촬영을 감행했다. 이런 무모하지만 위대한 생각을 한 이는 <비포 선라이즈> <비포 선셋> <비포 미드나잇> 그리고 <스쿨 오브 락>으로 유명한 리처드 링클레이터 감독이다. 그는 현실성을 극도로 강조하기로 유명한데, <비포> 시리즈뿐만 아니라 <보이후드>도 영화적 시간과 현실적 시간을 가능한 일치시키려 노력했다. 12년 동안 매년 15분씩 만나 촬영을 했다고 하는데, 러닝타임이 160분을 상회하니 만큼 거의 비슷하다. 


6살 메이슨은 누나 사만다, 엄마 올리비아와 함께 텍사스에서 살고 있다. 아빠 메이슨과는 주말마다 만나고 휴가도 함께 보내면서 항상 즐거운 시간을 보내지만 같이 살진 않는다. 십대 후반의 이른 나이에 사고를 쳐 아이를 낳고는 오래지 않아 헤어진 것 같다. 올리비아에게는 하고 싶은 걸 하지 못하고 아이를 위해 자신의 모든 걸 던지는 삶에 대한 설움이 있다. 어린 메이슨은 엄마의 절규에 가까운 성토를 엿듣는다. 


감수성이 특별해질 수밖에 없는 환경, 환경에 절대적으로 휘둘릴 수밖에 없는 소년기의 한 가운데, 어린 메이슨은 이런저런 일을 겪으며 나름대로 헤쳐나간다. 방황은 어른들에게도 찾아간다. 특히 올리비아. 그녀는 아이를 키우느라 하지 못했던 공부를 뒤늦게나마 시작해 승승장구하지만, 결혼 생활은 정반대이다. 때문에 아이들에게도 피해가 가지만 그녀가 할 수 있는 게 더 있겠는가?


어린 메이슨의 12년 소년기는 그 어떤 영화가 주는 현실성보다 더 현실적이다. 얼마나 현실적이고 주위에서 흔히 볼 수 있으면, 그래서 중간중간 안 봐도 될 만하다고 생각되는 장면이 있었겠는가. 덕분에 종종 밀려오는 졸음을 편안히 받아들일 수 있었다. 이 위대한 영화에게 큰 결례인 바 반드시 또 보도록 할 것이다. 하지만 이 영화가 추구하는 것이 인생 그 자체이기에, 영화보면서 조는 실수도 감싸주지 않을까?


이혼한 가정의 소년이 겪은 소년기의 전형


이혼한 가정의 소년은 어떤 삶을 살까. 이혼이 아무리 흔하다지만, 그래도 특별한 일일 거다. 그의 소년기는 내 이야기같아 공감가지만, 너무 기구해 영화 같기도 하다. ⓒUPI코리아



나의 여섯 살을 회상해본다. 솔직히 기억이 거의 나지 않는다. 사진으로 남아 있어 기억을 더듬어 보아도 모르겠다. 아마 모르긴 몰라도 어린 메이슨의 여섯 살과 크게 다르지 않을 것이다. 다만, 그에게는 부모님의 '이혼'이라는 요즘 세상에서는 특별할 것 없지만 그래도 특별한 일이 있었다. 그리고 이후의 또 다른 결혼 생활도 좋지 못했고. 그런 면에서 이 영화는 이혼한 가정의 소년이 겪은 소년기의 전형을 보여준다고도 할 수 있겠다. 


그렇다고 여느 가정과 크게 다르진 않을 거다. 주로 바깥 일을 하는 아빠와는 거리가 있는 반면 부딪히는 일도 별로 없을 테지만, 주로 집안 일을 하는 엄마와는 가까운 반면 부딪히는 일도 많다. 어린 메이슨의 엄마가 바깥 일도 하고 집안 일도 하며 아이들과 특별한 관계를 맺는 게 좀 다르지만, 보이는 모습이 다를 뿐 본질은 같다. 


피를 나눈 누나와는 가장 많이 부딪히지만 또 가장 의지가 되기도 한다. 친구나 형, 동생과는 다시 없이 좋은 때를 보내지만, 다른 학교로 가거나 이사를 가면 훌쩍 떠나 기억에서 잊히고 만다. 새 친구를 사귀는 건 참으로 고역이고 귀찮고 때론 두렵기까지 한 일이지만, 언제 그랬나 싶다. 


한편 거리가 있는 아빠지만, 또 엄마한테는 말 못할 비밀을 공유하기도 하는 존재다. 그렇지만 가장 무서운 존재도 아빠인 바, 집 안에서 가장 힘이 세고 발언권이 강한 가장이 폭력을 쓰기 시작하면 답이 없다. 집이 파탄을 맞이하는 건 정말 한순간이다. 그렇게 파탄난 가정을 되돌리는 건 사실 불가능에 가깝다. 부부싸움은 칼로 물 베기라지만, 아이를 낳아 키우고 난 후 금이 가고 깨어지는 건 돌이키기 힘들다. 어린 메이슨이 겪는 일들은 참으로 기구하다. 대부분 내 이야기 같아 공감하지만, 때론 너무 기구해 응원하고 있는 나를 발견한다. 


누구나 한 시기가 지나고 새로운 시기가 찾아온다


영화의 마지막은 예고되어 있다. 소년기의 마지막, 다음 시기로 가야 하는 소년. 그 순간은 누구에게나 찾아온다. 그저 받아들이면 될 것. ⓒUPI코리아



이러저러 해도 어린 메이슨이 겪는 소년기는 별 다를 게 없다. 아무리 즐거워도 아무리 힘들어도 아무리 슬퍼도 크나큰 사건이나 전환점 없이 물 흐르듯 흘러간다. 지금 내가 무엇을 하고 있는지, 앞으로 무엇을 하고 싶은지, 어떻게 살아갈 것인지 생각해볼 겨를도 없는 것 같다. 그저 그렇게 흐르고 흘러 지금의 내가 되었다고 할까. 영화 막바지, 메이슨이 독립을 하려고 짐을 싸 나가려는 순간 엄마 올리비아가 울면서 말하는 대사가 가슴을 찌르고 들어온다. 


"오늘은 내 인생 최악의 날이야. 떠날 건 알았지만 이렇게 신이 나서 갈 줄은 몰랐다. 결국 내 인생은 이렇게 끝나는 거야. 참 많은 일들이 있었지. 결혼하고 애 낳고 이혼하면서. 네가 난독증일까 애 태웠던 일, 처음 자전거를 가르쳤던 추억. 그 뒤로 또 이혼하고, 석사학위 따고, 원하던 교수가 되고, 사만다를 대학에 보내고, 너도 대학 보내고... 이젠 뭐가 남았는지 알아? 내 장례식만 남았어! 난 그냥... 뭔가 더 있을 줄 알았어."


뭔가 더 있을 줄 알았다는 올리비아의 말, 메이슨이 온전히 소년기를 겪을 때 그의 주위 사람들도 온전히 그들만의 '소년기'를 겪는다는 걸 나타내는 단적인 대사다. 소년기가 끝나고 새로운 시기와 맞닥뜨리게 되는 아이들을 떼놓으려고 매몰차게 대하는 엄마의 모습이 바로 전 시퀀스에서 비춰져 올리비아의 대사와 행동이 더욱 와 닿는다. 우리 부모님이 생각나지 않을 수 없었다. 내 인생의 주인은 다른 누구도 아닌 '나'라고 하지만, 내 인생은 나만의 것이 절대 아니다. 


그렇게 길고 긴 한 시기가 지나고 새로운 시기가 찾아온다. 누구나에게도 찾아올 것이다. 개인뿐만 아니라, 가정도, 나라도, 인류에게도 찾아온다. 그 경계가 언제인지는 잘 모른다. 기억 나지 않는다. 그런데 여기에서는 기억이 그렇게 중요해 보이지 않는다. 시간이 흘러 그때를 생각하는 기억이 아니라, 지금은 알 도리가 없지만 그때 당시의 '지금'을 인지하고 당시의 '순간'을 맛보았으면 되는 것이다. 


앞으로도 계속 찾아올 거다. 어떤 기나긴 시기의 시간, 그리고 다음 시기로의 길, 또 다른 어떤 기나긴 시기의 시간. 그 순간들을 억지로 잡으려 할 필요는 없다. 메이슨의 말대로 그 순간들이 우리를 잡으려 할 것이기 때문에. 받아들이려는 마음만 가지면 된다. 순간은 우리를 스쳐 지나가며 손짓하며 인사할 것이다. 순간은 영원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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冊으로 策하다. 책으로 일을 꾸미거나 꾀하다. 책으로 세상을 바꿔 보겠습니다. singenv@naver.com Since 2013.4.16




[오래된 리뷰] <천공의 성 라퓨타>


일본이 전 세계에 자랑하는 거장 '미야자키 하야오'의 1986년 작이자 '지브리 스튜디오'의 첫 작품 <천공의 성 라퓨타> ⓒ대원 C&A 홀딩스



일본이 전 세계에 자랑하는 거장이 많을 텐데, 소설에서는 무라카미 하루키가, 영화 에서는 고 구라사와 아키라가 있을 거다. 그렇다면 일본이 자랑하는 콘텐츠인 애니메이션에서는 누구나 알 만한 거장에 누가 있을까? 미야자키 하야오가 아닐까 생각한다. 적어도 전 세계인들이 알 만해야 하니, 위 세 명에 논란의 여지는 없을 듯하다. 


미야자키 하야오, 여전히 현역으로 활동 중인 75세 초로의 노 연출가. 여러 논란에도 불구하고 애니메이션 영화 그 자체로 더할 나위 없는 수준을 보여주는 거장이다. 지난 2013년 <바람이 분다>를 끝으로 '진짜' 은퇴를 선언했지만 2020년 '애벌레 보로'라는 캐릭터를 가지고 다시 돌아온다고 한다. <천공의 성 라퓨타> 이후 30년 간 5번의 은퇴를 선언했지만 매번 다시 돌아온 특이한 이력을 갖고 있는 그다. 


하야오 세계와 지브리 월드의 시작 <천공의 성 라퓨타>


올해 2016년은 미야자키 하야오에게 있어, 그의 분신과도 같은 지브리 스튜디오에 있어 특별하다고 할 수 있는 해일 것이다. 1984년에 세운 지브리 스튜디오의 첫 작품 <천공의 성 라퓨타>가 올해 30주년을 맞이했기 때문이다. 1984년 <바람의 계곡 나우시카>가 상업적으로 큰 성공을 거둔 후 세운 지브리 스튜디오, 첫 작품 <천공의 성 라퓨타>의 연이은 성공으로 미야자키 하야오는 그만의 세계를 만들어냈다. 하야오 세계, 지브리 월드.


<천공의 성 라퓨타>는 분명 30년 전의 애니메이션이다. 하지만 도무지 믿을 수도 없고 믿고 싶지 않기까지 하다. 현재의 애니메이션이 퇴보했다고 생각할 수밖에 없게 만들기 때문이다. 옛스러운 느낌이 드는 그림체가 지금 보기엔 조금 부자연스러울 뿐, 기시감을 찾아볼 수 없다. 완벽하다고 해도 과언이 아니다. 


분명 '30년 전'의 애니메이션인 이 작품은, 완벽 그 자체다. 캐릭터, 서사, 메시지 어느 것 하나 빠질 게 없다. ⓒ대원 C&A 홀딩스



가장 눈에 띄는 건 의외로 '캐릭터'다. 미야자키 하야오의 애니메이션들에는 공통적으로 나오는 캐릭터가 있는데, 여기 나오는 '돌라'가 대표적이다. 그녀는 다양한 애니메이션에서 다양한 캐릭터로 분한다. 여기서는 해적 일당의 대모로 분했는데, 세계적인 만화 <원피스>가 생각나지 않을 수 없다. 특유의 자유분방함과 보물에 대한 욕망, 그들만의 의리와 어디로 튈지 모를 개성 등이 그들을 구성한다. 정녕 캐릭터다운 캐릭터다. 그들의 좌충우돌을 구경하는 것만으로도 보는 재미가 충분하다. 


물흐르듯 전개되는 서사와 더 없이 확실한 메시지는 백미다. 슬픈 눈을 가진 소녀가 군인 집단으로 보이는 이들과 함께 어디론가 가고 있는 듯 보인다. 거기엔 정부에서 보낸 밀사도 있다. 그때 해적이 출물해 소녀를 노린다. 군인 집단, 정부 밀사, 해적 일당이 노리는 건 다름 아닌 소녀가 간직한 '비행석'이다. 무엇이든 하늘을 날게 해주는 막대한 힘을 지닌 돌. 기계의 힘을 빌리지 않고 하늘을 나는 건 인간 근원의 욕망이다.


막간을 노려 탈출을 시도하는 소녀 시타, 비행석의 놀라운 힘으로 천사같은 모습을 하고 탄광에서 일하는 소년 파즈에게 온다. 그들은 곧 친해지는데, 오래지 않아 군인 집단, 정부 밀사, 해적 일당이 일제히 시타를 노리고 쳐들어 온다. 그들끼리 치고박는 틈에 도망가보지만 결국 시타는 군인 집단과 정부 밀사에게 잡히고 만다. 그들은 전설의 천공의 성 라퓨타를 제압하려 시타의 비행석을 탐냈던 것이다. 그녀는 다름 아닌 라퓨타족의 마지막 공주였다. 그녀를 앞세우려는 수작이다. 


한편 파즈는 해적 일당에게 붙잡히는데, 곧 각자의 원하는 바가 같아 손을 잡고 시타를 구출하러 떠난다. 전과는 완연히 다른 새로운 국면으로 접어드는 구간으로, 대지에서의 행복하고 단란한 느낌은 온데간데 없고 창공에서의 욕망의 뒤엉킴과 불손함이 지배한다. 그렇지만 파즈에게는 라퓨타라는 존재 자체가 아버지를 상징하고 생각나게 하는 가장 큰 것이기에 또 다른 느낌이 드는 것이다. 과연 시타와 파즈는 다시 만날 수 있을까? 그들의 앞날엔 어떤 여정이 펼쳐질까? 천공의 성 라퓨타의 운명은?


아무리 강한 무기가 있어도, 땅을 떠나서는 살 수 없다!


미야자키 하야오가 특히 신경 쓰는 건 '메시지'다. 전반적으로 비슷한 메시지를 전달하고자 하는데, 이번엔 '자연' 그리고 '인간의 욕망'이다. ⓒ대원 C&A 홀딩스



캐릭터와 서사를 애니메이션이 갖는 성격이라고 생각되는 것에 가장 잘 맞게 꾸려 놓고선, 그야말로 확실하고 확고한 메시지를 던지는 미야자키 하야오. <천공의 성 라퓨타>를 통해서도 마찬가지다. 그 메시지를 대사를 통해 대놓고 직설적으로 던지는 장면이 있는데, 시타가 정부 밀사 무스카의 계략에 휘말려 위기에 처했음에도 강력히 주장한다. 


"아무리 강한 무기가 있어도, 수많은 로보트를 조종해도, 땅을 떠나서는 살 수 없는 거예요!"


엄청난 힘을 가진 천공의 종족 공주가 '하늘'이 아닌 '대지'를 중요시 여기고 있는 것이다. 자연과 더불어 사는 삶이 중요하다는 뜻으로 보이는데, 천공의 종족이 하는 말이라서 더욱 중요하고 깊이 있게 들린다. 일종의 겸손함까지 엿보인다. 이는 대지의 종족인 인간이 천공의 성을 침범해 보물을 훔치고 지배하려 드는 모습과 완벽히 대비된다. 인간의 끝간데 모를 욕망, 그 끝엔 자연이 있다. 다분히 미야자키 하야오가 만들어낸 구조겠다. 그들이 침범하는 곳은 결국 자연인 것이다. 


그들은 곧 자연에게 큰 벌을 받게 되어 있다. 그건 익히 알고 있는 서사 패턴, 하지만 그걸 어떤 식으로 보여줄지, 어떤 식으로 보여줘야 확실히 각인 되어 잊지 않게 할지는 만드는 이의 선택이자 역량이다. 특히 이 분야(?)에서 탁월함을 보이는 미야자키 하야오는 유감없이 그 실력을 발휘한다. 아마도 이 애니메이션을 보고난 후 풀 한 포기라도 아껴야 겠다, 함부로 재물을 탐하지 말아야겠다, 하는 생각이 들 것이다. 


30년 전부터 환경파괴와 환경보호가 애니메이션의 주된 내용으로 부각될 정도이니, 현재는 어떨지 상상도 되지 않는다. 이미 지구는 사람이 살 수 없는 곳이 되어버리지나 않았는지... 새삼스레 자연을 보호하자는 교훈을 던지고 싶진 않다. 누구나 인지하고 있는 것이기에 오히려 부작용이 일 수 있다. 그럼에도 후손들을 생각하면 그런 교훈을 생각하지 않을 수 없다. 말로 하는 대신 다른 방법이 있다. <천공의 성 라퓨타>를 보면 될 것. '백문이 불여일견' 아닌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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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래된 리뷰] 봉준호 감독의 <살인의 추억>


올해로 30년이 된 '화성 연쇄 살인 사건'을 가지고 지난 2003년에 봉준호 감독이 만들어낸 <살인의 추억>. 2000년대 한국 영화가 낳은 최대 최고의 쾌거다. ⓒCJ엔터테인먼트



올해로 30년이 되었다. 한국에서 발생한 최초의 연쇄살인사건이자, 최악의 미제 사건. 일명 '화성 연쇄 살인 사건'. 1986년 9월 15일에 시작되어 10명의 여성이 피해를 입었다. 반경 5km 안에서 일어났음에도, 180만 명의 경찰이 동원되었음에도, 결국 살인자를 잡을 수 없었다. 잡히지 않는 범인도 대단하지만, 범인을 잡지 못하는 경찰도 대단했다. 잡을 마음이 없었던 게 아닐까, 생각할 정도로. 


1990년대 중반에 3편의 단편으로 화제를 불러일으켰지만 한동안 연출을 이어나가지 않았던 봉준호 감독은, 2000년 <플란다스의 개>로 장편에 데뷔한다. 비록 흥행엔 실패하지만 평단의 호평과 마니아층의 환호 속에 2003년 <살인의 추억>으로 돌아온다. '화성 연쇄 살인 사건'을 모티브로 한 이 영화는 그야말로 대대적인 흥행과 호평을 받으며, 봉준호 감독을 단번에 충무로의 총아로 발돋움시킨다. 


대사과 장면은 물론, 캐릭터까지 완벽한 영화로서, 한국만이 가지는 시대상에 그동안 한국 영화가 가지지 못했던 할리우드식 구도를 훌륭히 접목시켰다. <살인의 추억>으로 한국 영화는 한 단계 업그레이드 되었다고 할 수 있을 것이다. 그것도 지극히 영화 내적이니만큼, 전후 어디서도 찾아 보기 힘든 쾌거다. 


'왜' 그때 범인을 잡을 수 없었을까


영화를 보면 답답하기 그지 없다. 도대체 왜 범인을 못 잡는 것인가. 지금이라면 잡을 수 있을 것 같은데, 아니 '미제' 사건이니까... ⓒCJ엔터테인먼트



1986년 경기도 시골에서 강간살인 사건이 발생한다. 오래지 않아 동일범의 소행으로 추정되는 사건이 발생하자, 특별수사본부가 꾸려진다. 두만(송강호 분)과 용구(김뢰하 분)는 토박이 형사로, 뛰어난 '감'과 끈질긴 '족치기'로 쉽게 범인을 잡으려 든다. 뒤늦게 서울에서 자진 합류한 태윤(김상경 분)은 거짓말 하지 않는 '서류'만 믿을 뿐이다. 


아무래도 처음엔 '감'에 의지하게 되는데, 도무지 '서류'에 맞지 않아 범인이 아니라고 말하는 태윤을 무시한 채 현장검증을 했다가 범인이 부인해 전국적으로 망신살을 당하고 만다. 결국 반장이 파면당하고 서울에서 새로운 반장이 오기에 이른다. 그는 두만과 태윤의 감과 서류를 모두 이용해 또 다른 유력 용의자를 잡아 들였지만, 그마저도 상식적으로 범인이 아니다. 그렇게 사건은 한없이 미궁 속으로 빠져들고 만다. 


영화는 한국 최악의 미제 사건을 모티브로 삼은 만큼 결말이 이미 나와 있는 거나 다름 없다. 결국 범인은 잡히지 않았다는 것. 그렇다면 도대체 '왜' 범인을 잡을 수 없었는가 하는 게 중요한 포인트일 것이다. 여기서 생각해봐야 할 게 있다. 그때가 아닌 지금이라면 범인을 잡았을까? 모르긴 몰라도 잡을 수 있을 듯하다. 그건 단순히 30년이라는 긴 세월의 차이 때문만은 아니다. 세월의 차이가 아닌 다른 차이, 이 영화가 보여주고자 하는 바이다. 


나라를 대표하는 이들의 '무능'


시골 형사, 도시 형사를 막론하고 그들은 '무능'하기 짝이 없다. 나라를 떠들썩하게 한 사건이니만큼 그들은 나라를 대표한다고 할 수 있겠다. 나라를 대표하는 이들의 '무능'이다. ⓒCJ엔터테인먼트



그건 시골이 가지는 후진성일까. 꼭 그렇지만은 않은 것 같다. '두만'이라는 한 개인이 가지는 특수성에 기인할지도 모든다. 아니면 둘이 합쳐졌는지도. 그는 감에 의지해 곧잘 범인을 때려잡는다. 그런데 그에겐 좁디좁은 동네 돌아가는 사정을 꿰뚫는 여자가 하나 있다. 그녀가 지나가는 말로 하는 얘기를 귀담아들었다가 행동으로 옮기는 것이다. '과학에 입각한 수사'와는 하늘과 땅만큼이나 떨어져 있다. 이게 과연 시골에만 해당하는 걸까. 나라를 떠들썩하게 한 만큼, 두만은 시골을 대표하는 게 아니라 나라를 대표하는 이라고 봐야 한다. 


그렇다면 유연성 없는 서류 수사의 후진성일까. 이 또한 '태윤'이라는 한 개인이 가지는 특수성에 기인 또는 둘이 합쳐졌는지도 모르겠다. 그는 서류에 의지해 범인을 잡으려 한다. 거기에는 사실만 있을 뿐이니까. 시험문제 답은 전부 교과서에 있는 법 아닌가. 그런데 중학생한테 고등학교 시험 문제를 내주면 풀 수 없는 법, 태윤한테는 이 신출귀몰한 범인은 너무 어려운 시험 문제다. 교과서 밖에서 낸 응용문제다. 그는 두만이 잡아들인 용의자가 범인이 아니라는 걸 알 뿐이다. 두만과는 또 다른 종류의 '무능'. 나라를 대표하는 이들의 무능은 종류도 다양하다. 


이 판국에 그들이 할 수 있는 건 많지 않다. 별의별 말 같지도 않은 추리를 진지하게 내뱉는 그들을 보고 있노라면 웃음도 나오지 않는다. 그 중에 절정은 무당. 두만과 용구는 무당한테 찾아가 범인의 얼굴을 알 수 있는 방법을 알아온다. 무당이 준 화선지에 먹물을 쓱 뿌리고 자연스럽게 내려 말리면 범인의 얼굴이 비춘다는 것. 얼마 전까지라면 도무지 이해할 수 없는 짓이었을 거라 생각했겠지만, 지금이라면 이해가 가고도 남는다. 어련하시겠어요. 


영화는 그럴 수밖에 없는 상태로 천천히 흘러간다. 완벽한 짜임새다. 그들만의 세상 - 이물질 투여 - 대립 - 그들과 이물질의 실행 - 실패 - 결합 - 성공 징후 - 최종 동반대실패. 분명 이들에게도 성공의 여지가 있었다. 그러나 그들 스스로가 망치고, 운이 따라주지 않았고, 정부가 도와주지 않았다. 무엇보다 시대가 그들을 버렸다는 느낌을 지울 수 없다. 


이 미제 사건의 근원, 지금도 활개치고 있다


이 미제 사건의 근원은 당시 '시대'에 있겠다. 그런데... 그런데 지금은 어떤가? 왜 여전히 이 사건은 미제인가? 그때나 지금이나 다를 바 없는 것인가. ⓒCJ엔터테인먼트



때는 1986년, 전두환 시대의 절정이다. 비록 이듬해 민주화 운동의 거침 없고 매서운 불길에 움츠러들 테지만, 바로 그 전이기에 시대의 흐름에 저항하는 정권의 움직임은 매서웠을 것이다. 영화는 그런 모습들을 짧게나마 잡아내는데, 그 순간이 의미심장하다. 연쇄 살인 사건의 유력한 용의자에게 행하는 발길질을, 데모하는 여학생에게 똑같이 행하는 용구의 모습은 시대의 상징 그 자체이다. 


우린 그 순간의 모습으로 한 가지 사실이자 이 '미제' 사건의 근원을 알 수 있다. 정부는 이 사건을, 이 여성 강간 살인 사건을 수사할 저의가 없었다는 사실 말이다. 그들의 눈은 강간당해 죽은 여성에게 향해 있지 않았고, 자신을 위협하는 여성에게 있었다. 그들의 발은 자신을 위협하는 여성을 밟는 데 힘을 소진해, 강간당해 죽은 여성의 억울함을 밝히는 데 힘을 쏟을 여지가 없었다. 그때는 그런 시대였다. 


지금도 그런 시대다. 그래서 마음이 아프다. 그 시대를 마음껏 욕하면서, 그 시대를 살았던 무능하고 악랄한 이들을 욕하면서, 그 시대를 향유했던 이들을 욕하면서, 그 시대가 물려준 아픔과 상실과 치욕을 치유하려 했는데 그러지 못하게 되었다. 우리 시대는 자칫 역사상 최악의 시대가 될 위기에 처한 것이다. 이 위기를 헤쳐나간다고 해도, 분명 이 시대는 '무능의 시대'로 남게 될 거다. 


'살인의 추억'은 여러 모로 잔인했다. 에먼 사람을 잡아 족치는 동안 또 다른 희생자가 발생하고, 서로 잘났다 못났다 싸우는 동안 또 다른 희생자가 발생하고, 화해한답시고 거나하게 술판을 벌이는 동안 또 다른 희생자가 발생한다. 이보다 잔인한 게 있나. 에먼 사람을 잡아 족치는 것 자체가 희생자를 유발하는 행위이기도 한 것을, 그런 추억은 기억에서 지워버리고 싶다. 


하지만 기억하지 않으면 발전하지 않는다. 그래서 기억하고 되새기고 잊지 않으려 한다. 그런데 왜 자꾸만 더 어처구니 없고 황당무계한 일들이 벌어지고 마는 것일까. 어째서 잊지 않으려 하는 데에서 멈추고 바꾸려 하지 않는 것일까. 바꾸지 못하는 것일까. 바뀌지 않는 것일까. 정녕 모든 걸 비우고 다시 시작해야 하는 것일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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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래된 리뷰] 김지운 감독의 <달콤한 인생>



'김지운식' 스타일에 정점에 오른 작품이라 할 수 있는 <달콤한 인생>. 주연배우 이병헌도 이 영화로 해외진출에 발판을 마련할 수 있었다. ⓒCJ엔터테인먼트



1998년 <조용한 가족>으로 열렬한 찬사와 지지를 받으며 데뷔한 김지운 감독. 이어서 2000년 <반칙왕>과 2003년 <장화, 홍련>으로 필모 정점을 찍는다. 동시에 '김지운식 영화'가 완성되었다. 장르 영화의 대가. 장르가 가지는 강렬함에 파묻히지 않고, 오히려 자신만의 스타일에 장르를 끼워맞추는 솜씨를 선보인다. 그 완성에 가장 가까이 간 작품은 아마도 2005년 작 <달콤한 인생>일 것이다. 


<달콤한 인생>은 이병헌이 '해외에 나를 알릴 수 있었다'는 이유로 자신의 인생작으로 뽑는 바, 당시 한국영화사상 최고가로 해외(일본)에 팔렸다. 그건 김지운 감독 영화의 특징 아닌 특징이기도 한데, 국내도 국내지만 해외에서 '스타일리스트'로서의 이미지가 좋게 비치는 것 같다. 그렇게 할리우드에 진출하기도 했다. 비록 참패를 면치 못해 더 이상 이어나갈 수 없었지만. 


김지운 감독다운, 김지운식 누와르 


'거기에 누와르가 있었을 뿐, 나는 나의 길을 갈 뿐이다.'로 영화를 또 다르게 요약할 수 있겠다. 장르에 구애받지 않은, '김지운'이라는 장르를 만들어낸 대가의 절정기이다. ⓒCJ엔터테인먼트



영화는 '누와르'라는 장르적 성격이 지극히 강한 장르를 표방하지만, 역시 김지운 감독답게 자신의 스타일을 앞세운다. 한 해 뒤에 개봉하는 유하 감독의 <비열한 거리>가 한국영화가 보여줄 수 있는 정통 누와르에 가장 가까이 다가간 영화 중 하나라고 한다면, 김지운 감독의 <달콤한 인생>은 그저 김지운 감독의 영화다. 이번에 그가 택한 게 '누와르'였을 뿐이다. 그래서인지 누와르에서 흔히 보이는 조직의 본모습, 치열한 뒷공작, 당연한 우정과 배신이 보이지 않는다. 대신 완벽하게 짜여진 미장셴과 기가 막힌 연기와 대사 신공, 숨겨진 상징들이 보인다. 결코 싫어하기 힘들다. 


선우(이병헌 분)는 강사장(김영철 분)의 신임을 얻어 '호텔 크라운'을 철저히 관리하고 있다. 룰을 어기면 피도 눈물도 없이 처단해버리는 냉혈한이다. 바로 그런 점이 강사장의 선우를 향한 믿음의 결정체일 것이다. 어느 날, 강사장이 상하이로 삼일간 출장을 다녀오게 되었다. 그러며 선우에게 긴히 한 가지 일을 맡긴다. 


어린 애인이 하나 있는데 아무래도 그녀가 바람을 피는 게 아닌가 의심스럽다는 것이다. 선우에게 삼일 동안 감시하면서 사실로 드러나면 즉시 자신에게 전화를 하거나 알아서 처치하라는 명령을 내린다. 언제나 그랬듯이 선우는 그 믿음에 보답하기 위해 불철주야 희수(신민아 분)를 감시한다. 


결국 희수가 바람을 피는 게 사실로 드러나고 선우는 당장 그녀와 그를 잡고 강사장에게 전화를 걸려 한다. 그들은 죽음을 면치 못할 것이다. 하지만 그 순간 선우는 짧은 기간 희수에게서 느낀 감정에 흔들린다. 그녀와 눈맞힌 찰나의 순간, 그녀의 귀와 입과 손과 어깨. 그 달콤한 순간들이 그에게 돌이킬 수 없는 최악의 선택을 하게 만든다. 선우는 강사장에게 전화도 하지 않고 그들을 살려준다. 강사장은 한국으로 돌아오고, 선우를 향해 무시무시한 죽음의 칼날을 드리미는데...


'사랑'과 '믿음'이라는 김지운식 콤비


한 사람의 인생을 뒤흔든 이 역정이 고작 그 순간의 '사랑' 때문이었나. (사실 사랑이라고 하기도 그렇다.) '믿음'을 저버렸다고 생각했겠지. 하지만 당한 사람 입장에서도 '믿음'이 배신당했다고 느꼈을 테다. ⓒCJ엔터테인먼트



영화의 스토리 자체는 특별할 만한 게 없다. 한 인간의 특별한 인생역정이라고 할 수 있을까. 거기에 달콤한 순간의 '사랑'이 있고, 그 특별할 것 없는 사랑으로 속절없이 깨지는 오랜 기간 숙성된 '믿음'이 있다. 누와르와는 상당히 거리가 멀어 보이지만, 어둠의 범죄와 폭력을 다룬다는 점에서 누와르 장르라고 할 수 있겠다. 이 영화에서는 '믿음'이라는, 인간 행동의 가장 강력한 동인(動因)이 사랑이라 말하기 모호한 순간의 '달콤함'에 속절없이 배신당하는 게 누와르랑 가장 근접해 보인다. 김지운식 누와르. 


'사랑'과 '믿음'이라는, 누와르에는 맞지 않을지 모르지만 김지운에게는 딱 들어 맞는 신기한 콤비는, 영화의 대미를 장식하는 희대의 대사로 표현할 수 있다. 선우의 '저한테 왜 그랬어요?'라는 물음에, 강사장이 대답한다. '넌 나에게 모욕감을 줬어.' 이 얼마나 치졸하고 치명적인 대답인가, 이 얼마나 유머러스한 대답인가. 이 대답 하나가 영화를 전복시켜버릴 만하다. 


영화 뿐이랴? 인간을 전복시킬 수도 있는 말이다. 겨우 그깟 이유로 한 사람의 인생, 나아가 수많은 사람들의 인생이 사라지다니. 그러면서도 '그게 바로 인간이지' 하는 생각도 들게 만든다. 뭐 별 거 있겠어 하고 말이다. 그들의 대화가 주는 허무함, 그 허무함으로 말미암은 유머적 감성이 만들어낸 수많은 패러디만으로 이 대사를 판단할 수 없는 것이다. 거기엔 참으로 많은 것들이, 높은 것들이 포함되어 있다. 


호불호의 연기, 완벽한 미장셴, 그리고 즐기는 영화


감독의 의도가 완벽하게 구현된 화면, 자신을 잊지 않으면서도 그 미장셴에 어울리게 연기하기란 정말 어려울 거다. 이러니 김지운 영화는 즐기기에 정말 최고다. ⓒCJ엔터테인먼트



상상을 초월한 상징도 상징이지만, 연기를 말하지 않을 수 없다. 이병헌의 액션, 김영철의 카리스마, 황정민의 메소드. 누와르 장르답게 보고도 믿지 못할 액션이 아닌 지극히 리얼한 액션을 선보인 이병헌. 액션은커녕 움직임도 별로 없지만 눈빛과 목소리와 분위기로 누구보다 압도적인 면모를 선보인 김영철. 그리고 어디서 양아치를 데려와서 연기 수업을 시킨듯한 느낌을 받게 한 황정민. 감독의 완벽주의적 작업 스타일이 영화 곳곳에서 나타나는 바, 연기에도 그 스타일이 고스란히 반영된 듯하다. 


하지만 영화의 홍일점 신민아의 연기는 아쉬운 정도를 넘어섰다. 그녀의 아름다움이야 정평이 나 있지만, 적어도 이 영화에서 두 남자가 제대로 된 대답도 못한 채 목숨을 걸고 싸울 만한 여자는 아니다. 내가 보기엔 그렇게 생각한 이유가 다름 아닌 신민아의 연기 때문인 것 같다. 영화 내용상 팜므 파탈의 모습을 선보여야 하지만, 그렇지 못할 바엔 지극히 위험하게 사랑스럽기라도 해야 하는데 전혀 그렇지 못했다. 에릭의 출현은 아직도 의문이다. 앞으로도 의문으로 남을 예정이다. 그 앞에 어떤 이유가 붙더라도 말이다. 


미장셴을 빼놓으면 섭하다. 너무나도 유명하지만 간단히라도 집고 넘어가지 않을 수 없다. 김지운의 미장셴은 아무래도 멈춰진 화면에 있을 거다. 카메라 워킹이 화려하지 않는 반면, 멈춰진 화면에 완벽하게 짜여진 소품들과 인물의 배치가 인상적이다. 그 프레임 안에서 최대한 역동적인 모습을 선보인다면, 그 모순이 주는 쾌감이 굉장할 것이다. 김지운이 추구하는 미장셴은 그런 게 아닐까. 


한편 <달콤한 인생>에서 선보이는 미장셴은 <장화, 홍련>의 연장선이라고도 할 수 있겠다. 명암의 확실한 대비에서 오는 또 다른 모순의 쾌감이 그것이다. 영화의 대부분을 어둠이 지배하고 있는 가운데, 하얗과 빨강이 주는 아름다움. 김지운 감독은 그 대비를 만들어 내기 위해 고의적으로 장치를 만드는 것처럼 보인다. 


영화를 보는 이유가 적지 않을 거다. 교훈, 힐링 등을 '얻기' 위해, 화려한 액션이나 미장셴을 '즐기기' 위해, 시대상이나 영화 자체를 '연구'하기 위해. <달콤한 인생>은 어디에 포함될까. 단연 '즐기기' 위함이 아닐까. 아마 김지운 감독이 추구하는 바일 것이다. 그 안에 다양한 것들, 이를 테면 상징, 연기, 캐릭터, 미장셴, 액션 등을 넣으니, 이 영화는 보고 또 봐도 전혀 질리지 않는다. 김지운 감독은 영화를 참으로 '잘' 만든다. <달콤한 인생>은 참으로 '잘' 만들어진 영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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冊으로 策하다. 책으로 일을 꾸미거나 꾀하다. 책으로 세상을 바꿔 보겠습니다. singenv@naver.com Since 2013.4.16




[오래된 리뷰] <노트북>


당연하게도 재개봉을 해, 당연하게도 좋은 흥행을 기록한 영화 <노트북>. 현대판 로맨스 클래식으로서의 입지를 확고히 했다. ⓒ글뫼



최근 어김없이 재개봉 대열에 합류한 영화 <노트북>. 지난 2004년 개봉해 3천만 달러가 되지 않는 제작비로 전 세계 1억 달러가 넘는 흥행을 올린 바 있고, 국내에서는 약 80만 명의 관객을 동원해 괜찮은 흥행 성적을 올렸다. 재개봉 성적 또한 상당히 좋은 편으로, '구관이 명관'임을 입증했다. 


영화는 정통 멜로를 표방하며 2000년대 영화 중 가장 많은 눈물과 콧물을 쏟아내게 했다. 이 영화가 성공한 후 한동안 '<노트북> 따라쟁이' 영화들이 나와 성공을 꽤하기도 했다. 예측 가능한 스토리 내에서 나름의 반전을 시도해 누군가의 '반전 영화' 리스트에서 만난 적이 있다. 내외적으로 이야깃거리가 상당한 영화라 하겠다. 


클래식 반열에 올라서다


이 영화가 현대판 클래식으로 올라선 데에는 스토리라인 자체가 갖는 '고전적' 느낌이 크게 작용할 것이다. 한 눈 팔지 않고 고전에 올인해 제대로 된 걸 선보였다고 할까? ⓒ글뫼



영화의 스토리도 스토리거니와 스토리라인과 분위기가 왠만한 고전(영화) 뺨치게 고전적이다. 반전조차도 고전적 서사의 한 줄기 안에서 한 치의 어긋남이 없다. '전형적'이라는 말이 필요가 없다. '전형적'이라는 말을 생겨나게 한 장본인과 같은 라인에 속하니까 말이다. 이 영화가 여전히 인기를 끌고 있는 사실 그 자체가, 우리가 새롭고 쿨하고 스피디한 것만 원하는 건 아니라는 걸 알 수 있는 대목이다. 


놀이 공원에서 '앨리'(레이첼 맥아담스 분)를 보고 한 눈에 반한 '노아'(라이언 고슬링 분). 다자고짜 위험천만한 곡예를 펼치며 그녀에게 들이댄다. 마지못해 교제를 허락한 앨리지만 곧 잊어버린다. 하지만 노아는 포기하지 않고 그녀의 눈에 들기 위해 노력하고, 앨리는 그가 눈에 밟힌다. 그들은 우여곡절 끝에 사귀게 된다. 17세 한창인 그들은 곧 불이 붙어 주체할 수 없이 맹렬하게 서로를 원한다. 그야말로 불꽃 같은 사랑이다. 


문제는 집안의 격차다. 앨리는 지역 유지의 딸, 노아는 막노동꾼. 이어질 수가 없다. 당연히 앨리의 집안에서 극심한 반대가 따르고, 앨리는 극렬히 대항하지만 노아가 자신의 분수를 안다는 말로 앨리를 떠나보낸다. 먼 곳의 대학에 진학하게 된 앨리, 막노동꾼으로 생계를 이어가다 전쟁이 터져 군대를 다녀온 노아. 


그렇게 7년이 지난 후 노아는 아버지가 돌아가시기 전에 사주신 오래된 폐가를 공들여 재건축한다. 그를 계기로 신문에 난 노아를 결혼 직전의 앨리가 보게 되고, 앨리는 그 즉시 노아를 찾아간다. 7년 간 이어진 오해를 풀고 서로의 진심을 알게 된 그들. 어떤 선택을 하게 될까. 7년 전의 그 사랑은, 한순간 맹렬히 타오르고 꺼지는 불꽃일 뿐이었을까. 아니면 폭발하진 않아도 영원히 꺼지지 활화산처럼 만날 수 없어도 영원히 지속될 불꽃이었을까. 


예상치 못한 또 다른 절절한 로맨스


영화는 젊은 남녀의 로맨스 말고도 또 다른 로맨스를 선보인다. 오히려 이 영화의 꽃은 이 늙은 남녀의 로맨스일 것이다. 더욱 절절하고, 반전도 있다. ⓒ글뫼



영화는 알츠하이머병에 걸린 할머니에게 할아버지가 매일 찾아와 들려주는 이야기가 주된 내용인데, 이 할머니와 할아버지가 앨리와 노아라는 걸 직감할 수 있지만 확실할 순 없는 게 은근히 또 다른 재미이다. 앨리와 노아가 단지 할아버지가 각색한 이야기 속 주인공일 수도 있고, 앨리는 할머니가 맞는 게 확실하지만 노아는 할아버지가 맞는지 확신할 수가 없다. 


이 둘의 예상치 못한 절절한 로맨스가 앨리와 노아의 절절함을 넘어서는 게 또 다른 키포인트다. 당연히 멜로 영화인 만큼 이 둘 사이에도 가슴 아픈 뒷 이야기가 있을 거라 생각은 했지만, 이 정도의 절절함을 선보일 줄은 몰랐다. 그 절절함은 그대로 전해져와 눈물이 되어 흘러 내린다. 


화의 1차 반전이 앨리와 노아에게서, 2차 반전이 할머니와 할아버지에게서 일어나는 만큼 이들을 더욱 눈여겨볼 필요가 있다. 반전이 누구한테 일어난다는 걸 알려주는 건 범죄(?) 행위에 다름 없지만, 그것이 눈물을 동반한 로맨스에서 기인한 것이라면 미리 알려주는 게 예의라고도 할 수 있겠다. 깜짝 놀라게 하는 반전의 경우와는 달리, 알고 있어 준비하면 오히려 더 절절함을 느낄 수 있기 때문이다. 더구나 이 영화는 재개봉할 정도로 유명하니까 말이다. 


진정한 사랑이란?


이 영화를 보고 나면 필수적으로 따라오는 것들. '나라면?' '너라면?' '진정한 사랑이란?' 일단 영화를 보자. ⓒ글뫼



영화가 끝나고 나면 필수적으로 질문하게 되는 사항이 있다. '나라면 어떻게 할까, 너라면 어떻게 하겠니.' 다름 아닌 '사랑'에 대한 질문이다. 청춘을 오롯이 바쳐서, 평생을 오롯이 바쳐서 단 한 사람만을 사랑할 수 있을까? 그것이 과연 가능할까? 후회 없이 여러 사람과 사랑하고서야 비로소 진정한 사랑을 찾을 수 있는 게 아닐까?


영화는 한 사람만을 지극히 사랑하는 게 진정한 사랑이라 말한다. 진정한 사랑을 '찾기 위해' 노력할 필요가 없다. 진정한 사랑과 '재회하기 위해' 노력하면 되는 것이다. 선택은 그 진정한 사랑인 상대에게 달려 있지만, 그렇게 한 사람만을 사랑했다는 것 자체로 여한이 없다고 말한다. 


어느 동화에서도 이런 이야기는 찾아볼 수 없을 거다. 그런데 이 영화는 실화를 바탕으로 한 소설이 원작이다. '영화보다 더 영화 같다'는 말의 장본인이라고 할 수 있겠는데, 이야기 자체가 그런 말에서 자연스레 파생되는 기대를 저버리지 않을 만큼 재미있다. 고전적인 서사답지 않게 은근 파격적이고 은근 스피디하다. 그런 점들이 은근 새롭게 다가온다. 정녕 전형적으로 전형적이기만 했다면, 이 영화는 아무도 보지 않았을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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